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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8. 묵상글 ( 재의 수요일. - 더 그리고 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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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8. 재의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2.18 04:13
- 더 그리고 또
오늘 요엘 예언서의 주님과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그런데 이 말씀을 듣는 저는 내가 하느님께 멀어진 적이 있고 지금 멀리 있나?
내가 하느님과 원수진 적이 있나? 하는 생각이 솔직히 듭니다.
사실 저는 일생 하느님과 원수진 적이 없고 그래서
하느님께 마음이 멀어진 적도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렇다면 가까이 갔거나 가까이 있기는 하나?
그리고 마음을 다하여 돌아오라고 하시는데 마음을 다하기는 했나?
이런 측면에서는 올해 그리고 오늘 나를 성찰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왜냐면 묵시록에서 너는 차지도 뜨겁지도 않다고 나무라셨듯이
저는 멀어지지도 않았지만 가까이 가지도 않은 것이 혹 아닐까?
이런 생각도 들었기 때문입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마음이 멀어지거나 차가워지지는 않았고,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감히 제가 이렇게 얘기해도 되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지만
갈수록 주님께 가까이 가고 있고 마음도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물론 얼핏 보면 젊을 때보다 마음의 열정이 식은 것같이 보이지만
잘 생각해보면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세속 열정은 식어가지만 하느님께 대한 열정은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만’입니다.
그렇지만 아직 멀었습니다.
그렇지만 더 뜨거워져야 합니다.
그렇지만 더 가까이 또다시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회개란 ‘더’ 이고 ‘또다시’ 입니다.
하느님께 등 돌리고 멀어져가던 나라면 방향 전환이 회개이겠지만
하느님께 이미 마음을 정하고 향하고 있다면 더 가까이 가면 되고,
다가가다가 잠시 쉬고 있다면 또다시 다가가는 것이 올해 저의 회개입니다.
마음 새로 먹는 것도 회개이지만 또다시 먹는 것도 회개라는 뜻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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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8. 재의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내면의 해방!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사막에서 머무는 시간은 우리의 자아가 쌓아온 습관적 틀을 깨뜨리며, 성령께서 우리를 참된 겸손과 내적 자유로 이끄십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사막과 변모
내면의 해방
2026년 2월 17일 화요일
작가 스티븐 코플랜드(Stephen Copeland)는 사막 교부들과 교모들의 영성적 이야기들이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은총의 자극이 되어, 관상적 기도와 내적 성찰의 길을 더욱 경건히 걸어가도록 이끌고 있음을 증언합니다:
사막의 신비주의자들이 걸어간 옛적의 길은 우리를 자아와 세속 권력의 굳어진 틀에서 벗어나도록 초대하며, 내적 해방을 향한 용기 있는 추구 안에서 참된 자유와 은총을 맛보게 합니다. 교회의 역사 속에서 신비가들과 영적 순례자들은 세상의 길을 떠나 사막으로 들어가, 하느님과의 친밀한 일치를 갈망하는 급진적 여정을 걸어왔습니다….
이러한 영적 운동의 한 줄기는 내적 해방을 향한 갈망이며, 관상적 영성 실천을 통해 그 자유를 길러내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일치를 깨닫게 하는 이러한 탐구와 기도는 세속의 방식 속에서 형성된 마음과 정신의 패턴을 끊어내며, 탐욕과 권력이라는 유혹의 힘을 넘어설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사막의 관상은 우리로 하여금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하며, 토머스 머튼이 "비실재(unreality)"라 부른 허상에 가려지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1]
머튼과 헨리 나우웬(Henry Nouwen)과 같은 20세기 영성가들은 사막 영성의 가치를 다시 일깨우며, 평신도들도 관상의 변혁적 길을 걸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리처드 로어는 이 고대 전통이 여전히 의미 있는 까닭을 설명하면서, "그것이 교회가 제국적이고 지나치게 조직화되기 이전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해되셨는지를 보여주는 독특한 창"이라고 말합니다. [2]
"내려놓음"을 실천하는 관상은 사막의 신비주의자들에게,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영적 자아에 닿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줍니다:
사막 영성의 핵심 원리 가운데 하나, 그리고 우리가 내적 자유를 길러가는 과정에서 깊이 새겨볼 만한 것은 바로 아파테이아(apatheia)입니다.
작가 로라 스완(Laura Swan)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파테이아는 마음의 순수함입니다. 사막의 교모들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향한 단일한 추구를 방해하는 모든 것을 의도적으로 내려놓으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를 묶어 두는 감정과 생각, 우리의 존엄을 약화시키는 욕망과 중독, 자기완벽주의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아파테이아는 영혼의 풍요로움에 뿌리내린 단순함 속에서 길러집니다." [3]
이런 "내려놓음"의 길은 때로는 공허함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방향을 잃은 듯 혼란스럽고, 비이성적이며, 심지어 두려움으로 가득 찬 경험일 수 있습니다. 마치 사막의 교부들과 교모들이 도시의 안락함을 떠나 광막한 사막의 빈 공간으로 들어갔던 것처럼 말이지요.
이 강력한 은유는 우리 안의 불건전한 패턴을 흔들어 깨뜨리도록 초대합니다. 세상의 방식과 거짓된 자아가—때로는 무의식적으로—우리 삶을 지배하는 길을 끊어내어,참된 자아의 단편들이 발견되도록 해주고, 우리 안에 깃든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의식이 자라나도록 해주고, 사랑이 확장되도록 수 세기 전 사막에서 드러났던 동일한 영적 진리가 우리의 영혼 안에 거하며 더욱 깊어지도록 해주며 우리 안에 더 깊은 무언가가 태어날 자리를 마련해 줍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우리 같은 "평범한" 이들의 성찰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클레어 M.은 이렇게 썼습니다: “삶은 크게 변하지 않지만, 그 체험은 더욱 강렬해집니다—기쁨, 아름다움, 빛남과 함께 슬픔, 불안, 연민도 깊어집니다.”
저는 올해 72세로, 유방암 진단과 치료라는 긴 여정을 막 마쳤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평범한" 삶에 대한 주의가 더욱 강렬해졌음을 느꼈습니다. 아름다운 일출, 햇살 속에 고요히 쉬고 있는 고양이, 저녁에 촛불과 음악을 곁들여 함께하는 식사, 사랑하는 남편과의 대화….
평범한 시간은 참으로 거룩한 시간입니다. 저는 이 평범한 시간에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Lea M.
References
[1] Thomas Merton, Thoughts in Solitude (Farrar, Straus and Giroux, 2011), 3.
[2] Richard Rohr, “Desert Christianity and the Eastern Fathers of the Church," The Mendicant 5, no. 2 (March 2015): 6.
[3] Laura Swan, The Forgotten Desert Mothers: Sayings, Lives, and Stories of Early Christian Women (Paulist Press, 2001), 25.
Stephen Copeland, “The Way of the Desert,” the Mendicant 15, no. 4 (2025), 4.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Dan Grinwis, untitled (detail), 2017, photo, Namibi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사막으로 자유롭게 걸어 들어가는 순간, 구도자는 어떤 제도나 구조를 넘어서는 광대한 변혁의 자리에서, 스스로 사고하고 온전해질 수 있는 능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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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사순 시기는 단순히 겉모습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안에 뿌리내리는 시간입니다.
이마 위의 재는 화장과 정반대의 의미를 지닙니다. 화장은 꾸며내는 것이며, 이탈리아어 trucco는 "속임수"를 뜻하고, 독일어 Schmink 역시 "가림"을 의미합니다. 많은 언어에서 화장은 "가면"과 연결됩니다. 우리 말에서는 화장(化粧)이라는 말은 "머리나 옷의 매무새를 매만져 맵시를 내는 일"인데, 이 말은 서양의 화장에 해당되는 단어들보다는 조금 부드러운 의미를 지니지만, 무언가를 꾸미어 바꾸어 준다는 의미에서는 본래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는 말이긴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화장을 통해 시간의 흔적을 가리려는 것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재의 수요일에 이마에 얹는 재는 정반대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죽을 운명(필멸성)을 기억하게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삶을 염세적으로 보게 하거나 우울하게 만들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교회는 재의 수요일로 시작되는 사순시기를 "기쁨과 은총의 시기"라고 말합니다. 달리 말해, 사순은 꾸밈이 아니라 진실을 향한 시간입니다. 물론 화장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만, 진짜 "화장"은 우리가 조금 더 나아 보이려는 거짓의 층이며, 이는 남녀 모두가 걸치는 가면입니다.
옛날에는 "좋은 모범을 보이라"는 권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위선과 구분되지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한 무명 저자는 더 깊은 지혜를 전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행하는 것은 바람 속에 흩날려 버린다.… 인간의 칭찬이란 바람 소리에 불과하다."
오늘 복음 말씀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내면 깊숙한 진실성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나무가 뿌리를 깊이 내리지 않으면 폭풍에 쉽게 쓰러집니다. 뿌리가 내리는 땅속은 어둠과 침묵, 고요의 세계입니다. 이는 빛과 소음, 움직임이 가득한 지상과는 정반대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만을 삶만을 우리 삶의 전부로 삼는다면, 우리는 삶의 폭풍을 견디지 못하고 성장의 근원을 잃게 됩니다. 우리의 행위와 삶은 침묵과 고요 속에서 자라나는 내적 뿌리에서 비롯됩니다. 오늘 복음을 두 열로 나누어 보면, 하나는 "보이지 않게"(in secret), 다른 하나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적 삶은 외적 삶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닙니다. 토머스 머튼은 관상이라는 것을 핑계 삼아 도피적인 삶을 살려는 이들은 참된 관상가가 아니라 단지 내성적이거나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는 사람일 뿐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참된 관상가는 안으로 들어가는 것뿐 아니라 밖으로 나아가는 긴급성까지도 아는 사람입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적 삶을 포기하거나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 안에서, 그와 함께, 그로부터 활동하도록 배워야 합니다. 내적 삶이 활동 속으로 스며들고 활동이 내적 삶으로 들어가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독서, 기도, 외적 활동 모두 내적 삶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만일 외적 활동이 내적 삶을 파괴한다면 내적 삶을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둘이 하나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과 협력하는 것입니다."
사순 시기는 단순히 겉모습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안에 뿌리내리는 시간입니다. 뿌리를 깊이 내릴 때 우리는 멀리 뻗어 나가도 쓰러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진리(예수님) 안에는 진정한 자유와 해방이 실재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하고 말씀하시면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벗이)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사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일 뿐만 아니라 그분의 형제요, 벗(요한 15,15)이기에, 우리의 모든 신뢰를 그분께 맡기고 우리 내면에 거하시는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우리 모두 누리도록 합시다! 설 명절 연휴에 맞이하는 재의 수요일이라고 해서 이런 참된 기쁨을 가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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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8. 재의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부터 사순시기가 시작됩니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9)는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회개’를 <제2독서>에서는 ‘화해’를, <복음>에서는 ‘의로움’에 대한 말씀을 들려줍니다.
<제1독서>에서 예언자 요엘은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요엘 2,13)라고 말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과 화해하고 은혜로운 구원의 날을 맞이하라.’고 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들처럼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자선과 기도와 단식하지 말고, 숨어계신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는 몸과 옷을 찢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는 뉘우침이며, 자신을 드러내는 의로움이 아니라 하느님에게로 ‘돌아옴’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회칙 <신앙의 빛>에서, ‘회개’를 “주님을 향해 거듭 되돌아가는”(13항) 것으로,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우리 자신을 맡기며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거듭해서 기꺼이 변모되려”(13항)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회개’가 첫째는 ‘지속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며, 둘째는 ‘새로운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결국, ‘지속적인 회개’는 부르심에 대한 끊임없는 응답으로 지속됩니다. 이를 수도승들은 ‘제2서원’으로 삼아 살아갑니다.
이처럼, ‘회개’는 ‘뉘우침’이라는 내적현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옴’이라는 외적 실행을 요청합니다. 곧 마음만 찢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행동의 요청이요, ‘새로운 부르심에 대한 삶’을 불러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이는 의로움의 본질이 하느님 앞에 놓인 처지,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임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 앞에 드러난 행동이나 결과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 생각을 보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의로운 생활의 중심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인정받고 칭찬받고 보상 받고자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러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진정, 우리는 겉모양이 그리스도인인 것이 아니라, 뼈 속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늘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마태 6,6)의 현전을 마주하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마태 6,6)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희는 어둠이 아니지만 어둠과 놀면 어둠이 되고 말 것입니다. 또한 저희는 빛이 아니지만 빛 앞에 머무르면 빛의 옷을 입게 될 것입니다. 저희는 천사는 아니지만 하느님 앞에서 노래하고 하느님을 섬긴다면 천사 와 같이 될 수 있고, 마귀는 아니지만 마귀의 영을 따라 산다면 마귀 같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주님!
선을 과시하지 않고, 악을 거짓으로 치장하지 않게 하소서!
사람들 앞에서 의로움을 내세우지 않고,
숨어 계신 당신 앞에 다소곳이 머무르게 하소서.
마음의 단식으로 제 마음이 씻기어 지고
기도로 마음이 순결하게 하소서.
일상의 모든 삶이 당신의 영으로 벅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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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8. 재의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콜롬비아 보고타엘 다녀왔습니다. 6월에 서울대교구 사제 모임이 보고타에서 있습니다. 최종 점검하러 다녀왔습니다. 사제 모임 때 점심 식사할 예정인 가정을 방문했습니다. 라파엘, 미카엘라, 안젤라 가정입니다. 천사의 세례명처럼 가족 모두가 방문했던 저희를 따뜻하게 환영했습니다. 샌디에고에서 온 부부, 달라스에서 온 부부, 뉴저지에서 온 청년, 사제 둘이 함께 미사를 했습니다. 언어가 다르고, 사는 곳도 다르고, 문화가 달랐지만, 주님 안에 모두 하나 될 수 있었습니다. 한 부부는 결혼 34년 되는 기념일이었습니다. 한 부부는 결혼 40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라파엘 부부는 결혼 42년 되었다고 합니다. 식사하면서 어떻게 만났는지 이야기했습니다. 딸은 스페인어를 영어로 통역해 주었습니다. 영어를 잘하는 부부의 이야기를 딸은 스페인어로 통역해 주었습니다. 후배 신부님은 서품 17년이 되었고, 저는 35년이 되었습니다.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도, 사제로 사는 것도 모두 하느님께 영광이 될 수 있다면 감사할 일입니다.
오늘은 ‘재의 수요일’입니다. 교회는 오늘부터 사순시기를 시작합니다. 사순시기는 ‘회개와 화해’의 시간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비록 죄를 지었을지라도 우리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면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 이다. 그가 다시 후회하여 그 뒤에 복을 남겨 줄지 주 너희 하느님에게 바칠 곡식 제물과 제주를 남겨 줄지 누가 아느냐?”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이 죄를 지었어도, 카인이 죄를 지었어도 용서해 주셨습니다. 함께 하셨습니다.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죄가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처럼 희게 하신다.” 우리가 뉘우치기만 한다면, 하느님은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분입니다. 사순시기는 ‘화해’의 시간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빕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화해란 내가 잘못했다면 마음을 다해 용서를 청하는 것입니다. 화해란 나에게 잘못한 이를 기쁜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자캐오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를 위해서 나누어 주겠습니다. 제가 빚진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아 주겠습니다.” 자캐오는 잘못한 것을 뉘우쳤고, 용서를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캐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은 구원 받았다.”
잠시 후 우리는 이마에 재를 얹을 것입니다. 재는 불을 지나고 남은 것입니다. 한때는 푸르던 성지였고 생명이 있었지만, 불을 지나며 재가 되었습니다. 재는 우리에게 인간의 유한함을 일깨워 줍니다.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여라.” 이 말은 절망의 선언이 아니라, 진실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재는 끝이 아닙니다. 재는 땅에 스며들어 다시 생명을 준비합니다. 농부는 재를 거름으로 씁니다. 불을 지나온 재가 오히려 땅을 살찌우듯이, 우리의 실패와 상처, 죄와 눈물도 하느님 손에 맡겨질 때 새로운 생명의 거름이 됩니다. 사순시기는 바로 이 믿음을 새롭게 하는 시간입니다. 나는 먼지이지만, 하느님 안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존재임을 믿는 시간입니다.
사순시기 40일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합니다. 그 안에서 예수님께 상처를 준 사람들도 보게 됩니다.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진리를 외면한 이들, 두려움 때문에 도망친 제자들, 조롱하고 침 뱉던 군중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께 위로드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함께한 여인들, 십자가를 대신 진 키레네 사람 시몬, 주님의 얼굴을 닦아드린 베로니카, 모든 슬픔을 가슴에 안고서 계셨던 성모님, 예수님의 장례를 정성껏 치러드린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입니다. 2026년 사순시기를 시작하며,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이 40일을 살아갈지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예수님을 아프게 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께 위로드린 사람으로 살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절제의 삶으로 단식하며, 이웃을 향해 자선을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도록” 이번 사순시기를 은총의 시간으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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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8. 재의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은 주님 안에서 해결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또다시 시간이 흘러 사순 시기 첫 순간을 알리는 재의 수요일입니다. 재의 수요일은 참회와 속죄의 상징인 재를 교우들의 머리에 얹는 예식입니다. 작년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축성한 종려나무 가지를 불에 태워 만든 재를 만듭니다. 사제는 그 재 위에 성수를 뿌리고 축성한 다음 교우들 머리에 얹어주며 이렇게 외칩니다.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십시오.”(창세 3,19) 혹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십시오.”(마르 1,15) 저는 민망하지 않게 살짝 재를 머리에 얹어주는 편인데, 심신이 강한 선교사 신부님들께서는 재 위에 성수를 듬뿍 부어 진흙처럼 만들어, 이마 위에 아주 크게 십자가를 그어주시곤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가장 신심 깊은 한 신부님께서는 아직도 당신 이마 위에 선명하게 그어진 십자가를 하루 내내 지우지 않으시며, 사순 시기 동안 회개와 참회를 다짐하곤 하십니다. 오늘 재의 수요일을 기점으로 또 다시 예수님의 고통과 수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깊이 묵상하는 사순 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시기 동안 우리는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으며, 하등 그럴 이유가 없음에도 우리를 위해 십자가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의 고통을 묵상하는 동시에 우리 각자의 고통도 묵상하게 될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예수님처럼 백번 천번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혹독한 고통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곱씹어봐도 이유를 모르겠는 십자가를 짊어질 때가 있습니다. 요즘 와서 아주 조금이나마 고통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고통, 내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그리 잘못 산 것도 아닌데 와닿는 신비로서의 고통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고통 앞에서는 세상적인 논리로 따지지 말 것입니다. 세상의 이치로 헤아릴 것도 아닙니다. 주님과의 관계에서 다가온 고통이니 그분 안에서 해결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끝까지 주님께 부르짖고, 그분께 아뢰고, 그분께 매달리며, 그분 안에서 답을 찾고자 발버둥 쳐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듭하는 어느 순간 하느님께서 반드시 정답을 알려주실 것입니다. 그 고통은 그분께서 더 가까이 그대를 부르시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을. 당신의 심오한 진리를 우리에게 열어 보여주시려고 그 고통을 사용하셨다는 것을. 우리를 더 큰 세상, 더 큰 사랑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그 고통을 보내셨다는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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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스토리 黃Dami 매일묵상 >
겸손→성찰→회개→자신의 비참함 인식→이웃 사랑의 실천!
또다시 재의 수요일이 돌아왔습니다.
사제는 교우들의 머리에 재를 얹으면서 외칠 것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다시 맞이한 사순시기,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가 하나 있습니다. 회개입니다.
어떤 분에게 회개 좀 하라고 했더니, 아무리 생각해도 회개할 거리가 없다고 해서 놀랐습니다.
회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 자신의 힘과 능력만 믿는 사람,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에게 회개는 불가능합니다.
회개는 겸손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주님께서는 겸손의 덕을 지닌 사람에게 성찰의 능력을 선물로 주십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성찰이라고는 단1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 많습니다.
반대로 틈만 나면 자신을 성찰하고, 공동체의 현실을 성찰하고, 부조리하면서도 고통스런 현실을 성찰하고, 다양한 사건 사고를 성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찰하게 될 때 우리는 겸손해집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나약하고 비참한 존재인지를 정확히 파악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없이 살아가는 한 인간 존재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를 잘 압니다.
자신의 비참함을 잘 알고 있기에, 자연스레 그의 시선은 자신보다 더 비참한 동료 인간의 현실을
눈여겨보게 됩니다.
그의 고통, 그의 상처에 깊은 연민과 측은지심을 느끼게 되고, 자연스레 도움의 손길, 즉 자선을 펼치게 됩니다.
겸손→성찰→회개→자신의 비참함 인식→이웃 사랑의 실천, 바로 이 사순시기 우리 내면에 이루어져야 할 영적 여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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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8. 재의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6,1–6.16–18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을 하지 마라.”
기도도, 자선도, 단식도
시선이 하느님께 향할 때 생명이 되지만,
시선이 사람에게 향하면
그 순간부터 신앙은 “관계”가 아니라 “연출”이 됩니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는
겉모습의 경건함을 경계하며
신앙의 중심을 이렇게 붙듭니다.
하느님을 ‘보여주는 것’보다, 하느님께 ‘닿는 것’ㅔ이 먼저라는 것.
그에게 기도는 말의 기술이 아니라
영혼의 방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골방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골방은 공간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내 안의 깊은 자리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솔직해집니다.
남에게 보일 표정을 만들 필요가 없고,
성공한 사람처럼 기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가
하느님 앞에 서는 자리입니다.
단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단식을 금지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단식이
“내가 얼마나 하는지”를 증명하는 간판이 되는 순간,
단식은 이미 목적을 잃습니다.
참된 단식은
먹지 않는 행위가 아니라
욕망의 소음을 줄여 하느님의 소리를 더 듣는 길입니다.
평화/인내 주간의 수요일,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너는 누구의 시선을 먹고 사느냐?”
사람의 인정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숨결인가.
주님,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 말하면서도
사람의 시선을 더 의식할 때가 많습니다.
골방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감추어진 자리에서
저를 다시 정직하게 하시고,
기도와 단식이
자랑이 아니라 사랑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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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8. 재의 수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6,1-6.16-18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오늘은 사순시기를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종려나무 가지를 태운 재를 머리 위에 얹으면서 우리 인간이 얼마나 부족하고 약한 존재인지를 생각합니다. 종려나무 가지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그분을 환영하기 위해 손에 들고 흔들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이 기대하고 바라던 강력한 군주로서의 메시아가 아님에 실망하여 금새 그분께 등을 돌리고 맙니다. 그렇기에 종려나무를 태운 재를 머리에 얹는 것은 우리도 그들처럼 언제든 주님으로부터 돌아서서 죄를 지을 수 있는 약한 존재임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먼지에서 태어나 먼지로 돌아가는 우리 삶은 너무나 무의미하고 공허할 뿐임을 되새기는 것입니다. 그런 객관적 ‘자기인식’이야말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출발점이기 때문이지요.
그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재계와 덕행을 실천함으로써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로 되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방법으로 크게 세가지, 즉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제시하시는데, 그 핵심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면서 그분 뜻을 따르기 위해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두가이나 바리사이 같이 열심한 이들이 자선도 기도도 단식도 모두 사람들에게 거룩하게 보이기 위해 거창하게 행하면서, 정작 하느님과 그분 뜻을 의식하지 않았던 잘못된 모습을 바로잡고자 하신 것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시니, 자신을 거짓되게 꾸미려 들지 말고, 자기 부족함과 약함을 감추려 들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분 앞에 서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내면과 외면, 지향과 행동, 신앙과 삶이 일치된 참된 신앙인이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자선을 베풀 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은 나의 능력과 의로움을 뽐내고 자랑하려고 하다가 자선을 받은 이들의 마음을 상하게 함으로써 자선을 베푼 보람과 의미를 깎아먹지 말고, 내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나보다 더 필요로 하는 이웃들과 나눔으로써 하느님께 영광과 기쁨을 돌려드린다는 자선의 근본정신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하라는 말씀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온갖 화려한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떠드는 데에, 그렇게 자신의 거룩함을 과시하는데에 헛심 쓰지 말고, 기도의 본질에 집중하라는 뜻입니다. 기도란 하느님과의 대화이며 그 대화를 제대로 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먼저 그분 말씀을 귀기울여 잘 듣는 것이기에, 조용한 골방에 하느님과 나 단 둘만 머무르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지요. 단식할 때 얼굴을 찌푸리며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말라는 말씀은 단식의 목적이 그저 굶는 행위 자체에 있지 않고 어려운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데에 있음을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도움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도움을 주는 이가 얼굴을 한껏 찡그리며 괴로운 표정을 하고 있으면 괜히 자기가 그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 미안하고 부담스러워지지요. 그러니 내가 내미는 도움의 손길을 그가 기쁘게 잡을 수 있도록 웃는 얼굴, 밝은 표정으로 그를 대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그와 나 모두의 마음이 기쁘고 환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사순시기 동안 이 세가지 덕행을 충실히 실천함으로써 먼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다음으로 이웃과 사랑의 관계를 맺어야겠습니다. 그러면 주님 부활의 기쁨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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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8. 재의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희망과 믿음>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1-6.16-18).”
1) 우리는 사순시기가 끝나면 부활절이 있고,
부활시기를 지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정말로 부활절을 맞이할 수 있을까?”
아무도 모릅니다.
심판과 종말의 날이 닥칠 수도 있고, 전 지구적인 재난들, 전쟁이나 전염병 등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각 개인의 경우를 생각하면 더욱 불확실합니다.
지금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누가 언제 어떻게 무슨 일을 당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계입니다.>
정말로 부활절을 맞이할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지만, 우리는 부활절을 맞이하기를 희망하고, 맞이할 수 있다고 믿으니까 사순시기를 잘 지내려고 노력합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모르니까 없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면, 또 직접 확인할 수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희망과 믿음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몰라도 있다.” 라고 믿고 희망합니다.
희망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25).”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인생 자체가 사순시기입니다.
이 사순시기를 잘 지내면,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부활시기’를 지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희망이고, 믿음입니다.
바로 그 희망과 믿음이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입니다.
2) ‘재의 수요일’에 거행하는 ‘재를 머리에 얹는 예식’은, “인간이란,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지 않으면 ‘먼지’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 라는 것을 묵상하기 위한 예식이고, 동시에 “먼지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겠다고 다짐하는 예식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과 믿음이 없다면, ‘재를 머리에 얹는 예식’은 ‘헛된 예식’이 될 뿐입니다.
신앙인은 “자격을 갖추기만 하면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고,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3) 재의 수요일에 듣는 복음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한다면, 위선자가 되지 마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보이는 경우라도,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의 기준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생활일 수 있습니다.
‘자선’의 경우, 위선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을 받기 위해서’ 합니다.
위선자들도 실제로 불우이웃 돕기를 실천하고, 또 그 덕분에 실제로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일의 목적 자체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일은 ‘이 세상에서의 일’로 끝나버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위선자들은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고마워하기를 바라고, 고마워하라고 강요하기도 합니다.
그런 경우에 도움을 받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고맙기는커녕 마음에 상처만 생깁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위선자들을 꾸짖으실 것입니다.>
‘기도’의 경우, 위선자들의 기도는 진짜 기도가
아니라 기도하는 척 하는 ‘연기’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기도는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
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위선자들의 기도는 하느님을 향하지 않고
사람들을 향하기 때문에,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빈말’입니다.
‘단식’의 경우, 위선자들도 실제로 단식을 합니다.
그런데 ‘자선’의 경우처럼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을 받기 위해서’, 또 자기의 신심을 과시하기 위해서 하는 단식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 아무 소용이 없는 ‘헛일’이 되어버립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나의 신앙생활은 위선일까, 진짜일까?”를 반성하는 일입니다.
위선과 진짜 사이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에, 더욱더 엄격하게 자기반성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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