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401
11월7일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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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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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FPhJv9MnWjY
[수원교구 도승현 베드로(시화 성베드로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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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에게 영혼을 주십시오. 나머지는 다 가져가십시오!>
평생토록 가난하고 고통받는 청소년의 따뜻한 동반자요 아버지로 살아가셨던 살레시오회 창립자 돈보스코의 사무실 문에 걸려있던 글귀가 있었습니다. 라틴어로 적혀 있었습니다.
“Da mihi animas cetera tolle!” 한국말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저에게 영혼을 주십시오. 나머지는 다 가져가십시오!”
그에게 있어서 청소년 영혼 구원 외에 다른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명예, 돈, 부동산, 취미생활, 휴가...그에게는 다 쓰레기였습니다. 오직 중요한 것 한가지, 아이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또다른 유사한 돈보스코의 말씀이 있습니다.
“한 청소년의 영혼을 구하는 일이라면, 악마에게라도 절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돈보스코의 시선은 오로지 한곳, 토리노 뒷골목을 배회하고 방황하던 아이들, 무시당하고 착취당하며 서서히 죽음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던 아이들에게로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돈보스코에게 있어 세상 좋은 것들, 편한 것들, 재미있는 것들은 일단 관심사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그를 고위성직자로 추천하려 하자 펄쩍 뛰며, 내가 있을 장소는 바로 여기, 아이들 사이라며 마다했습니다. 너무 피곤해 보이는 그에게 휴가 좀 다녀오라 권했더니, 도무지 이해안되는 표정으로 “휴가는 천국에서!”라고 외쳤습니다.
한 아이가 악에서 돌아서서 하느님께로 향할 때 돈보스코는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한 아이가 성화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 고민하자, 그는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은 듯 기뻐했습니다.
돈보스코는 지상에 발을 딛고 있었지만, 이미 천상적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가장 중요한 가치, 가장 우선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 인간이 이 세상 사는 최우선적으로 얻고자 노력해야 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을 꽤 알쏭달쏭합니다. 악하고 불의한 집사의 그릇된 행동을 칭찬하시는 뉘앙스입니다. 그가 저지른 악행은 중한 것이었습니다. 공문서 위조, 공금 횡령이라 최소한 징역 5년입니다. 그런데 그를 두둔하는 분위기입니다.
우리는 오늘 주님 말씀을 잘 새겨들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범죄 행위를 본받으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가 미래를 준비하는 노력을 눈여겨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궁극적인 미래, 죽음 그리고 그 이후의 세계를 과연 얼마나 적극적으로 준비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최종적으로 남게 될 우리 영혼의 구원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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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iJIL73MtIh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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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산 사람들은 잘 죽는 법도 알았다>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루카 16,1-8)에서 우리는 '불의한 집사'라는 당혹스러운 비유를 듣습니다.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다 해고 통지를 받은 집사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주인의 빚을 탕감해 줍니다. 놀랍게도, 주인은 이 집사를 '영리하게' 대처했다며 칭찬합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것은 그의 부정이 아니라, '해고'라는 심판이 임박했음을 깨닫고 자신의 미래를 위해 절박하게 움직인 그의 '영리함'입니다.
이 집사와 정반대인 인물이 '부자 바보'(루카 12장)입니다. 둘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약삭빠른 청지기는 심판이 곧 온다고 믿었고, 부자 바보는 더 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청지기는 '해고 통지서'를 받자마자, 자신에게 남은 '불의한 재물'로 '미래'를 준비했습니다. 부자 바보는 '해고 통지서'(죽음)를 상상도 못 하고 재물을 쌓아두다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라는 심판 앞에서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자녀들이 빛의 자녀들보다 더 영리하다."라고 한탄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너는 더 이상 관리인 노릇을 할 수 없다."라는 '해고 통지서'를 받을 것입니다. 이 통지서를 미리 받아들고 삶을 바꾼 '영리한 집사'들이 있습니다.
다이너마이트의 발명가 알프레드 노벨은 막대한 부를 쌓았지만 '죽음의 상인'이라 불렸습니다. 1888년, 그의 형이 죽었을 때 한 신문이 그가 죽은 줄 알고 "죽음의 상인, 알프레드 노벨 사망하다." 라는 부고 기사를 냈습니다. 자신이 '죽음의 상인'으로 기억될 것이라는 사실에 전율한 그는, 복음의 집사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해고 통지서'를 미리 읽은 것입니다. 그는 즉시 유언장을 수정하여, 자신의 '불의한 재물'(전 재산 94%)을 기부해 '노벨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죽음의 상인'이라는 현세의 평판을 '인류의 은인'이라는 영원한 유산으로 바꾼, 가장 영리한 집사였습니다.
1912년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에 메이시스 백화점 소유주인 이시도르와 아이다 스트라우스 부부가 있었습니다. "여성과 아이들 먼저!"라는 외침 속에서 아이다는 구명보트 탑승을 권유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 이시도르 곁에 남았습니다. 이시도르 역시 "다른 남자들보다 먼저 타지 않겠소."라며 거절했습니다. 아이다는 남편의 팔을 꼭 잡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평생 함께였어요. 당신이 가는 곳에, 나도 가겠소." 두 사람은 마지막 순간까지 갑판에서 서로를 껴안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자산은 '함께 죽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마지막 재산을 '영원한 사랑'과 '부부의 신의'라는 영원한 가치와 맞바꾸었습니다. 세상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였을지 몰라도, 그들은 영원을 위해 가장 영리한 선택을 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극적인 '해고 통지서'를 받아야만 영리해질 수 있을까요? 성 베네딕토는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두어라"라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매일 스스로에게 '해고 통지서'를 발부하는 '빛의 자녀들'의 영리함입니다.
오늘 죽는다고 생각할 때, 비로소 우리는 자비로워질 수 있습니다. 오늘 죽을 수 있다고 믿을 때, 생명은 물론이요 내가 움켜쥔 이 재물, 이 명예, 이 자존심마저도 곧 사라질 '불의한 재물'임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모리 슈워츠 교수는 '루게릭병(ALS)'이라는 '해고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그는 절망하는 대신, "나는 내 죽음을 내 마지막 프로젝트로 삼겠네."라고 결단합니다. 그는 자신의 '불의한 재물', 즉 곧 사라질 '육신'과 '남은 시간'을 아낌없이 '사랑'과 '가르침'으로 베풀어 '영원한 친구'들을 사귀었습니다. 그는 제자 미치 앨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두가 자기가 죽는다는 걸 알지만, 아무도 그걸 믿지 않아. 하지만 죽는 법을 배우면, 비로소 사는 법을 배우게 되지." 죽음이라는 '해고 통지'는 무엇이 '불의한 재물'이고 무엇이 '영원한 가치'인지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잘 죽을 수 있을까요? '오늘 죽으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이 질문은 우리가 '죽음의 상인'으로 남을지, '영원한 사랑'을 완성한 부부로 남을지 결정하게 합니다. 우리는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과 희망으로 영리해져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처럼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음이 이득입니다."(필리 1,21)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우리가 태어날 때 우리만 울고 나머지는 웃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을 때 우리만 웃고 나머지는 울면 그것이 잘 산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잘 사신 분들은 항상 잘 죽는 법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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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스트 프리스코의 반 모임엘 다녀왔습니다. 그날 나누었던 묵상은 루가복음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믿음’을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만 한 믿음만 있어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착한 종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주인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종, 해야 할 일을 다하는 종은 주인에게 칭찬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날 묵상의 내용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믿음’이었고, 다른 하나는 ‘해야 할 일을 하는 종’이었습니다. 믿음이 부족하다고 이야기를 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모두 믿어야 하는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모두 믿어야 하는지 자신이 없다고 했습니다. 어떤 분은 하느님께서 늘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늘 가까이 있어서, 쉽게 얻을 수 있어서 물과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듯이, 주님께서 늘 가까이 계시는데, 우리가 다른 곳을 보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믿음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행위를 통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는 종’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구역장님은 그 주간에 3번의 반 모임을 다녀왔다고 했습니다. 세 번 모두 묵상의 내용 ‘해야 할 일을 하는 종’이었다고 합니다. 구역장이라서 반 모임을 3번 함께 했는데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니 감사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능력이 있어야 해야 할 일을 맡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하느님께서는 해야 할 일을 선택하면 그에 맞는 능력을 주신다는 것 새삼 알았다고 합니다. 저도 ‘해야 할 일’에 대한 묵상을 나누었습니다. 중남부 사제 모임이 4박 5일 동안 있었는데 중간에 장례미사가 생겼습니다. 손님 신부님에게 부탁할 수도 있었지만, 장례미사는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비행기 타고 본당에 와서 장례미사하고, 다시 비행기 타고 사제 모임엘 갔습니다. 하루에 두 번 비행기 타야 했고, 몸은 피곤했지만 해야 할 일을 기쁘게 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습니다. 신앙은, 믿음은 하고 싶은 일을 해서는 성장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신앙은, 믿음은 해야 할 일을 기쁘게 할 때 성장하는 것입니다.
수도자와 성직자가 3가지 서원을 하지만 한 가지가 다릅니다. 성직자는 청빈 서약을 하지 않습니다. 세리였던 마태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듯이, 사제는 교회의 재산과 조직을 관리하게 됩니다. 청빈 서약을 하지 않았지만, 사제가 소유에 집착하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소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복음을 전하는 데는 소유보다는 비움이 더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청빈 서약을 하지 않는 것은 교회의 재산을 투명하게 보존하고, 관리하라는 의미입니다. 처음 본당신부가 되었을 때입니다. 성당의 땅에 집을 짓고 사는 분들이 10명 정도 되었습니다. 매월 임대료를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점유를 인정하게 되고, 나중에는 성당의 땅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임대계약서를 작성했고, 모두에게 서명받아 임대료를 받았습니다. 후임 신부님은 임대계약서를 토대로 사람들이 이사 가면 땅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사제는 본인을 위해서는 건강, 기도, 학식을 쌓아야 하지만, 재정에 관해서도 공부해야 합니다. 신자들이 어렵게 낸 헌금과 교무금을 잘 관리하는 것도 사제가 해야 할 직무입니다. 돈은 무조건 멀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으로 쓰일 수 있도록 잘 관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교회의 재정은 세상의 일처럼 이윤을 창출하는 것만이 목적은 아닙니다. 교회의 재정은 공정하고, 올바르게 운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고, 선교를 하는 곳에 쓰여야 할 것입니다. 또한 신자들의 영적인 성숙을 위한 교육과 피정에 많이 쓰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예루살렘에서 일리리쿰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완수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그리스도께서 아직 알려지지 않으신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명예로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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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루카 복음서 15장의 ‘되찾은 양, 되찾은 은전,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이어 16장에는 ‘약은 집사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이지요.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그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는 그를 불러 더 이상 집사 일을 맡기지 않겠으니 일을 정리하라고 이릅니다.
‘낭비’라는 낱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재물이나 시간 따위를 아껴 쓰지 않고 헛되이 헤프게 씀”이라고 나옵니다. ‘헤프게’ 쓰는 것이 낭비라는 점에는 많이들 동의하리라 짐작합니다. 그러나 ‘헛되이’ 쓰는 것 또한 낭비라는 점은 쉽게 생각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말하는 낭비가 바로 헛되이 쓴 경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재산 관리를 맡긴 주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주인의 목적에 맞지 않게 쓰는 것도 헛되이 쓰는 낭비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자기의 재산을 맡긴 주인의 뜻은 무엇이었을까요?
집사는 빚진 이들을 하나하나 불러 그 빚을 줄여 줍니다. 그러자 주인이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합니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여, 곧 집사 자리가 영원하지 않음을 알고 나중을 생각하여 주인의 것으로나마 자비를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한 일은 무척이나 계산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주인의 뜻에 맞게, 곧 자비를 베푸는 데 재산을 썼기에 그가 칭찬을 받은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모두 ‘집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인께서 나에게 생명을 주신 까닭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은 사랑을 배워 오라고 하느님께서 주신 시간이 아닐까요? 우리는 시간과 재물과 재능을 제대로 쓰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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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6,1-8: 약은 집사
오늘 복음에 나오는 집사는 교활하고 불의한 사람이었다. 그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횡령하였고, 주인에게 발각되어 해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기발한 수단을 동원한다. 빚진 자들의 채무를 줄여 줌으로써, 장차 자기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안전망을 미리 만들어 놓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집사의 불의를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를 칭찬하신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자기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영리하다.”(8절) 세상의 사람들은 일시적인 이익과 보장을 위해서도 온갖 꾀와 수단을 다 동원한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위해, 얼마나 간절히,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는가?
사도 바오로는 우리 그리스도인을 “하느님의 신비를 맡은 관리인”(1코린 4,1)으로 부른다. 우리가 받은 생명, 은총, 시간, 재능은 모두 주인이신 하느님께로부터 잠시 위임받은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재물을 맡기신 것은 그 재물이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 우리의 종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Sermo 359) 우리가 맡은 것을 잘 관리하고, 그것을 통해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집사가 된다.
이 비유에서 주님은 다가올 일을 내다보는 지혜를 배우라고 하신다. 집사는 해고 이후를 내다보고 준비했다. 신앙인도 마찬가지로, 이 세상 삶이 끝난 후에 맞이할 하느님의 나라를 늘 생각하고 준비해야 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권고한다. “세상일에는 그렇게도 기민하고 영리하면서, 어찌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는 그렇게도 게으른가? 영원한 것을 위해 잠시의 것을 사용하라.”(Hom. 19) 우리의 시간과 재능, 재물을 영원한 목적, 곧 사랑과 구원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것은 하늘 창고에 쌓이는 보물이 된다.(마태 6,20 참조)
우리는 언제 주님 앞에 서게 될지 모른다. 그날은 도둑처럼 찾아온다(1테살 5,2). 그러므로 신앙인의 삶은 늘 지금 여기에서 준비하는 삶이어야 한다. 주어진 순간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 선택을 할 때, 우리는 이미 구원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교리서도 이렇게 가르친다. “모든 사람은 자기 삶 동안 하느님 앞에서 자유로이 행한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1021항)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내일의 계산이나 세속적 보장이 아니라, 오늘을 어떻게 충실히 살고 있는가이다.
우리의 삶 전체가 하느님께 맡겨진 집사직임을 기억하자. 불의한 집사가 미래를 준비했던 것처럼, 우리도 영원한 생명을 내다보며 지금 여기서 사랑과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늘 깨어 준비하는 삶이 될 때, 주님께서 오실 그날 우리는 참으로 충실한 집사로서 칭찬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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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대, 그러해야 하리니>
루카 16,1-8 (약은 집사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그러자 집사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첫 사람에게 물었다.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 그가 ‘기름 백 항아리요.’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얼른 앉아 쉰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얼마를 빚졌소?’ 하고 물었다. 그가 ‘밀 백 섬이오.’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아 여든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그대, 그러해야 하리니>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8)
그대,
쓰러지지 마라
그대,
쓰러져도
기어이 다시 일어나라
그대,
일으켜야 하리니
그대,
빼앗기지 마라
그대,
빼앗겨도
기어이 다시 가져라
그대,
나누어야 하리니
그대,
죽지 마라
그대,
죽어도
기어이 다시 살아나라
그대,
살려야 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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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생활은 신속하게, 최선을 다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그러자 집사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첫 사람에게 물었다.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 그가 ‘기름 백 항아리요.’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얼른 앉아 쉰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얼마를 빚졌소?’ 하고 물었다. 그가 ‘밀 백 섬이오.’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아 여든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1ㄴ-8)
1) ‘약은 집사의 비유’는 글자 그대로 ‘비유’입니다. 가르침을 더욱 생생하게 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일부러 만드신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비유를 읽을 때,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만드신 ‘의도’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8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라는 말씀은, “세속 사람들은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서 신속하게 대처하고 최선을 다한다. 그런데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는 너희는 영혼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이 왜 이리 굼뜨냐?”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물론 세속 사람들이 먹고사는 문제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본받으라는 뜻은 아니고, 그들의 그런 신속함과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본받으라는 가르침입니다.>
‘굼뜨다.’라는 말에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연상됩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루카 24,25) 예수님께서 탓하시는 것은 ‘지능의 부족함’이 아니라, ‘노력의 부족함’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을 얻는 것만을, 즉 영혼의 구원만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 목표 달성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이 당연한데,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을 때도 많고, 다른 것을 바라볼 때도 많습니다. 그렇게 마음과 정신이 흐트러져 있으면, 최선을 다할 수가 없고, 신앙생활이 자꾸만 굼뜨게 됩니다.
2) 1절에 있는 ‘낭비’ 라는 말은, 비유의 내용 전체를 볼 때 ‘횡령’으로 해석됩니다. 주인에게 가야 할 재물을 집사가 자기 마음대로 가로챈 것, 바로 그 ‘횡령’이 해고 사유라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라면, 주인은 집사가 횡령한 재물을 모두 빼앗을 텐데, 비유의 내용을 보면, 집사는 해고 통보를 받았을 때 먹고사는 문제부터 걱정했습니다.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주인에게 빼앗기고, 무일푼으로 쫓겨나게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3) 2절에 있는 ‘청산하게.’라는 말은, 표현으로는 장부를 정리해서 제출하라는 말인데, 뜻으로는 잘못한 일들을 바로잡으라는 명령입니다. <횡령한 재물을 모두 내놓는 것을 포함해서, 잘못한 일들을 전부 다 바로잡는 것이 쫓겨나기 전에 집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따라서 집사가 빚진 사람들을 불러서 빚을 줄여 준 일은, 자기가 먹고살기 위해서 사람들의 인심을 사려고 한 일이기도 하고, 잘못한 일을 바로잡는 일이기도 합니다. 정황을 보면, 아마도 집사는 기름이나 곡식을 꾸어 줄 때, 주인의 뜻과는 다르게 대단히 높은 이자를 붙여서 꾸어 준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부당하게 받은 이자는 자기가 가로챘을 것이고, 사람들은 주인만 비난했을 것입니다. 아주 나쁜 고리대금업자라고...... 그렇다면 집사가 사람들을 불러서 한 일은, 이자를 깎아주거나 없애 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 전에 받았던 이자는 돌려주었을 것이고......
4) ‘이자에 관한 규정’이 신명기 23장에 있습니다. “너희는 동족에게 이자를 받고 꾸어 주어서는 안 된다. 돈에 대한 이자든 곡식에 대한 이자든, 그 밖에 이자가 나올 수 있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다. 이방인에게는 이자를 받고 꾸어 주어도 되지만, 너희 동족에게는 이자를 받고 꾸어 주어서는 안 된다. 그래야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가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너희 손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이다."(신명 23,20-21)
집사가 사람들을 불러서 빚을 줄여 준 일이, 이자를 깎아 주거나 없애 준 일이라면, 집사는 사람들의 인심을 얻어서 먹고살 길을 찾게 되었을 것이고, 주인은 율법을 잘 지키는 좋은 사람이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집사를 칭찬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잘못한 일을 바로잡았기 때문에 칭찬했다는 것입니다. <집사가 자신의 잘못을 덮으려고 다른 잘못을 더 저질렀다면 칭찬할 이유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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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성서를 읽다보면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고 또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하는 것인지 의아스러운 대목도 만나게 됩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그런 대목 중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복음에 나오는 이야기 속의 청지기는 아주 교활한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꽤 많은 횡령을 하였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이 쫓아내려고 하자 다시 잔머리를 굴리며 술수를 짜내고 있습니다.
청지기는 빚진 사람을 불러서 그 액수를 고쳐주며 장부를 조작하기 시작하지요. 빚진 사람들은 좋아하며 그가 시키는 대로 합니다. 이렇게 청지기나 빚진 사람이나 교활하게 일을 처리하여 오히려 이 사실을 모르는 주인에게 일을 잘 처리했다는 칭찬을 받는다는 내용이 오늘 복음의 내용입니다.
도대체 오늘 복음은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이겠습니까? 비윤리적인 일도 얕게 잘 처리하면 괜찮다는 뜻일까요? 물론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청지기가 윤리적인 인물인지 아닌지, 혹은 살 궁리를 어떻게 해나가는지 여기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다만 이 청지기가 살기 위해서 세속적으로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에 초점이 모아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 청지기처럼 세상을 잘 살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단히 애를 쓰며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의 이런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서는 그렇게 애를 쓰면서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 또 자신의 영적 성숙을 위해서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은 바로 이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속의 자녀들이 빛의 자녀들보다 얕다고 하신 말씀에는 영적인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세적인 이득이나 승진, 또 자녀 교육이나 재산 축적과 같은 일에 있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또 밤과 낮을 가리지도 않습니다. 무슨 아파트 청약이 있다고 하면 총알같이 달려가서 줄을 서고, 무슨 유치원이 좋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텐트까지도 치고 앉아서 순서를 기다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지요.
오늘 복음은 그렇게 수고하고 애를 쓰는 만큼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도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에게는 신앙에 있어서는 별 노력 없이 있어도 저절로 다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례를 받고 시간이 흐르면, 또 주일미사에 빠지지만 않으면 내 신앙이 저절로 성숙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에 못지 않은 노력이 함께 뒷받침되어야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은 성숙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소한 것에 걸려 넘어져 상처를 입고 신앙이 없는 사람보다도 더 옹졸한 삶을 살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을 위해 노력한 그만큼 우리는 성장합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명확한 일입니다. 우리는 <성서 쓰기>에 이어 <100권 신심서적 읽기>를 시작했습니다. 이에 참여하여 성서를 쓴 사람과 쓰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일년이 지나서 하늘과 땅 차이로 나타나는 것을 보았고, 신심 서적 읽기 역시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실감할 수가 있습니다. 성서를 쓴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성서를 쓰기 전에는 단지 선반 위에 올려놓은 책 한 권에 지나지 않았던 성서가 이제는 살아 있는 책이 되어 깊이 있게 내 마음 안에서 살아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성서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고 나니 세상이 달라 보인다는 말씀을 하시기도 하였습니다.
성서를 쓰느라고 힘들고 어려운 시간들을 보냈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스스로도 놀랄 만큼의 영적 성숙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심 서적을 읽으면서도 놀라운 변화는 많았습니다. 한 주에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어찌보면 불가능해 보이던 일이 많은 분들의 높은 참여로 놀라운 영적 성숙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일상의 삶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던 것입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으면서도 신앙에 대해 채워지지 않았던 부분이 꽉 채워진 느낌이라는 분, 이제야 신앙이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했다는 분, 책을 통해 얻은 기쁨을 나누기 위해 선정된 도서들을 이웃에게 선물로 전하시는 등 많은 분들이 신앙적으로 성숙한 모습들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이 있는가 하면 나를 위하여서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방 어디까지 기를 쓰고 내려가 부동산 투기에 열을 올리는 이런 일은 안 해도 그만입니다. 그러나 성서를 받아들이고 하느님을 만나는 일에 관계되는 일은 놓치면 큰 낭패를 볼 것입니다. 그 일은 나의 영적 생명에 있어 너무나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살기 위해서도 그렇게 애를 쓰고 노력을 하듯이 하느님을 알고 따르기 위해서도 그에 못지 않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하느님을 만나면 또 다른 차원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는 아마도 살아가는 방법이 달라질 것입니다. 똑같이 세상을 살고 똑같은 사람을 만나도 품위가 다르고 지혜와 삶의 깊이가 달라지는 것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약은 청지기의 비도덕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그렇게 치열하게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듯이 영적인 성장을 위하여서도 부단히 노력을 하라는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 밤 낮 없이 연구하고 애를 쓰며 살아가듯이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이런 노력들 역시 우리의 삶을 위해 절실히 필요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노력한 만큼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고, 분명 하느님은 노력하는 우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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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오창열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은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고 칭찬하신다. 이것은 청지기의 속임수나 뻔뻔스러움에 대한 것이 아니다.
장래를 대비하여 현재의 위치를 이용한 대담한 수완에 대한 칭찬이다. 예수님은 청지기의 부정직한 행동을 칭찬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직 시간이 남아 있을 때 장래를 대비한 기지를 칭찬하고 계신 것이다.
청지기는 세속의 자녀이다. 세속의 자녀는 오직 현세 삶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하느님의 뜻이나 약속, 종말에 대한 준비는 안중에도 없다.
자신의 삶에 이득이 되는 것만을 얻기 위해 모험도 하고 단호한 처신도 한다. 그에 비해 빛의 자녀들은 현세의 삶을 하느님의 눈으로 보려고 한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다가올 세상, 이 현세 너머에 존재하는 세상을 준비하며 살아간다.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약삭빠르지만 모든 면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빛의 자녀들보다 약삭빠르지 못하다.
세속의 자녀들의 시야는 이 세상의 현실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다가올 세상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때문에 빛의 자녀들보다 더 어리석다.
하느님의 일에도 세속에서 거래할 때처럼 모든 노력과 힘을 기울여야 한다. 내 영신적인 이익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적당히, 대충 해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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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님]
<약삭빠른 청지기>
오늘 복음은 꾀많고 교활한 관리인에 관한 비유의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청지기는 주인의 노예이긴 했지만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고 횡령하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이것을 알고 그 사람을 파면 시키려고 하자 그 관리인은 자기가 그 직책에서 쫓겨나게 될 때를 대비해서 주인에게 빚을 진 사람들의 빚을 탕감해 주는 것입니다. 즉 일자리가 떨어지게 됐을 때 그는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구나'하고 생각하고 자기가 그러한 능력있는 직책을 맞고 있는 동안 최소한 자기를 도와줄 수 있는 친구를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처리한 그의 행동을 보고 오히려 주인은 그의 약삭빠른 행동을 칭찬했다고 합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세속사람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할짓, 못할짓을 다 하는것과 마찬가지로 빛의 자녀들 역시 자신의 영신적인 이익을 위해서 그렇게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라고 보겠습니다.
얼마전에 신문에 어떤 중공사람의 생활을 소개한 기사가 있었는데, 그 기사에서도 역시 이러한 생활의 유형이 보이고 있습니다.
그 중공사람은 극장에서 입장권을 판매하는 관리인이었는데, 그는 그 입장권을 잘 이용하여 많은 친구를 갖게되고 아쉬울 것 없이 생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빵집에 가서 빵을 먹을 수 있었고 고급식당에 가서 값비싼 음식도 무료로 먹을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볼때 역시 중공이라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유형은 비슷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자기가 능력을 갖고 있을 때,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 사회에서는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저마다 서로를 필요로하고 협력해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가 맡고 있는 직분도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남을 도와줄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직책과 재산은 가지고 많은 친구를 만든다는것은 세상을 살아나가는데 있어서 현명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물질과 재산을 받아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물질과 재산을 잘 관리하고 사용함으로써 영신적인 이익을 구해야 합니다.
남에게 베푸는 자선행위, 남을 돕는 행위를 통해 많은 친구를 만들수 있고 또 그것은 어느날엔가 저 세상에서 댓가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각자 갖고 있는 직책과 재산을 유용하게 이용함으로써 영신적 이익을 얻도록 힘씁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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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우리에게 맡겨진 재물>
현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 중의 하나는 우선 ‘돈’이라는 재물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복권을 사들고 일확천금을 꿈꾸기도 하고, 돈을 쫓다가 살인하기도 합니다.
물론 돈이 주는 순기능도 있습니다. 그러나 돈의 역기능은 사회를 병들게 하고 인간을 파괴시키기도 합니다. 사실 재물은 우리에게 선물임과 동시에 족쇄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약은 집사의 비유'는 재물과 맺는 관계가 하느님과 이웃들과의 관계 맺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사실 주인의 재물을 맡아 관리하던 집사는 관리인으로서 자신의 신원을 망각하고 관리를 맡긴 분의 뜻을 거역하고, 맡겨진 재물을 자신의 뜻에 따라 쓰고 낭비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이 그를 “집사 일을 청산하게.” 하자, 그는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이 ‘원래 있던 자리’와 ‘지금 있는 자리’, 그리고 ‘앞으로 가야 할 자리’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질문하고 답합니다.
“어떻게 하지? ~ 옳지, 이렇게 하자. ~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루카 16,3-4)
그는 비록 불의한 관리인이었지만, 지혜로운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잔머리를 굴려 마지막 한 몫을 더 챙기려하지 않고, 오히려 재물을 나누었습니다.
쌓아놓은 재물을 나누고, 움켜쥐었던 것을 내주었습니다. 횡령하고 착복했던 것을 아낌없이 퍼주었습니다.
주인처럼, 아버지처럼, 아낌없이 베풀고 나누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이어지는 뒷부분에서 이 비유를 해설하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루카 16,12)
그러니 이 비유는 결코 약삭빠른 청지기의 처신이나 비윤리적인 행위를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자녀들도 닥쳐올 일에 대해 민첩하게 대처하건만, 그렇지 못하고 있는 ‘곧 닥쳐올 일에 대해 민첩하게 대처하지 않는 빛의 자녀들의 삶에 대한 경고’입니다.
사실 자신에게 맡겨진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고,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는 신앙의 진실성을 드러내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재물이 지금 우리에게 용서와 화해와 우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 사이에 압박과 침해와 불목을 불러일으키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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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어떻게 하지? ~ 옳지, 이렇게 하자.”(루카 16,3-4)
주님!
제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 재물과 소유를 횡령했습니다.
제 자신을 마치 저의 것인 양 횡령했습니다.
입으로는 당신을 주님이라 고백하면서도 제 자신을 주인인 양 섬겼습니다.
진정, 당신이 맡기신 이 몸은 당신의 것이오니, 당신이 저의 주님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를 옭아매는 자애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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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선심 쓰는 것을 멈추지 마!>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오늘 주님께서 드신 비유에서 집사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했고,.그것 때문에 해고될 처지를 맞이했는데 영리하게 대처합니다.
곧 해고될 때 자기를 받아달라고 주인에게 빚진 이들에게 주인의 재산을 갖고 선심을 쓰는데 실은 횡령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그를 주인은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칭찬합니다. 주님의 생각은 집사가 주인 것을 횡령한 것이 아니라 선용했다는 것이고, 우리 인간도 본래 하느님 것을 가지고 집사처럼 선용해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에는 이런 영성이 깔려있습니다..이 세상에서 하느님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도 실은 하느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선심을 쓰려면 어쩔 수 없이 하느님 것을 가지고 선심 써야 하고,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선심 쓰길 바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것을 나만을 위해 쓰면 그것은 착복이라고 생각하시고, 이웃을 위해 쓰면 선용이라고 생각하십니다.
우리 부모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큰아들이 부모의 유산을 독차지하고 흥청망청 쓰려고 하면 언짢아하시지만 동생들의 환심을 사려고 부모 유산을 동생들과 나눠 쓰는 것은 좋아하지요.
여러분도 제게 그러지 않으십니까? 저는 여러분의 도움으로 지금까지 많은 좋은 일을 하였습니다. 제가 한평생 한 좋은 일 중에 여러분 도움 없이 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만일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 그것을
저를 위해서 쓰고 특히 욕망을 채우려고 썼다면
저를 이렇게 계속 도와주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느님도 여러분도 제가 하느님의 정직하고도 충실한 집사이길 바라시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다른 비유에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곧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양식을 제때 나눠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경우 정해진 대로 제때 나눴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것을 가지고 제가 막 선심 쓴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제가 고백성사 볼 때 특히 가난과 관련하여 성사 볼 때 하느님 것을 내 것으로 소유하지 않았지만 하느님 것을 내 것인 양 마구 썼다고 고백성사를 보곤 합니다.
그러니까 저의 경우 하느님 것을 내 것으로 소유하지 않을 뿐 아니라 쓸 때도 곧 선심을 쓸 때도 내 것인 양 쓰지 말아야 하겠지요.
그런데 이것이 아직도 잘되지 않고 있습니다. 곧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마치 제 것으로 선심 쓰는 양 아직 으쓱대고 또는 나는 주머니를 따로 차고 있지 않으니 잘하고 있다고 으쓱댑니다.
그러므로 저는 더 가난하고 겸손한 집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가난하고 겸손하지 못한 것 때문에 하느님의 것을 가지고 마구 선심 쓰는 것을 멈출 생각은 오늘 주님 비유 덕분에 없습니다.
가난하고 겸손하되 선심 쓰는 것은 멈추지 말라! 이 가르침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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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루카16,8)
<영리한 대처!>
오늘 복음(루카16,1-8)은 '약은 집사의 비유'입니다.
비유에는 전하는 메시지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때문에 오늘 복음인 '약은 집사의 비유'를 드러난 글자 안에서만 바라보면, 그리고 세상 기준의 눈으로만 바라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약은 집사의 비유가 전하는 메시지는 비유의 끝 말씀에 드러나 있습니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16,8)
오늘 복음인 약은 집사의 비유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세상의 자녀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영리하게 대처하는 것처럼, 빛의 자녀들인 하느님의 자녀들도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영리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영리하게 잘 대처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종말을 의미하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 일 지 몰라, 늘 깨어 준비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을 '임박한 현세적 종말론 신앙'이라고 합니다
때문에 언제나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회개'입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전하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한 아합 임금처럼(1열왕21,1-29 참조), 요나 예언자가 전하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처럼(요나3,1-10 참조), 우리도 지금 정신을 차리고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영리한 대처이며, 오늘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내가 다른 민족들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이 되어,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제직을 수행하기 위한 것입니다."(로마15,16)
내가 먼저 회개하고, 나의 회개를 너와 세상에도 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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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8)
위기 속에서도
지혜롭게
대처하는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지혜란 단순한
계산이 아니라,
관계와 미래를
살리는
통찰입니다.
그만큼
관계의 회복이
중요합니다.
주인이 불의한
관리인을
칭찬했다는 것은
그의 속임수를
칭찬했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위기 상황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는
지혜를 칭찬하신
것입니다.
세속의 재물도
하느님 나라의
선을 위해
사용할 수 있음을
우리들에게
가르치십니다.
위기 속에서
배우는
지혜로운
새로운 길입니다.
빛의 자녀들도
세상을 향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은 세상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서
하느님의 뜻을
지혜롭게 식별하는
적극적 실천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세상과의
단절이 아니라,
세상 한복판에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실천적 삶의
방식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지혜는 단순히
세속의 지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복음의
지혜입니다.
세속의 계산보다
더 깊은 사랑으로,
하느님 나라의
지혜를
세상 속에서
살아내는
우리가 되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세상을
피하거나
도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속의 현실을
지혜롭게 읽고
대응할 줄 아는
우리들이길
바라십니다.
세상의 지혜는
예수님과 함께
사랑과 진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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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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