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s://m.blog.naver.com/forivan/222469062351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제3판)] . 짧게 정리한 글
벤야민의 이 논문이 다른 논문에 비해 이해하기 쉽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벤야민의 글은 약간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을 늘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게는 이
글 역시 그랬다. 그래서 '기술 복제 논문은 쉽다'는 말을
들으며 그 사람들은 비범하고 똑똑한 두뇌를 가졌고 나
는 그렇지 못한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더랬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논문의 주제
이 논문은 기술복제의 시대를 맞아 사진과 영화가 대두
하였고, 이에 따라 예술작품의 기능 및 의미가 어게 달라지게 되었는지에 대해 상술하는 글이다. 특히 주제가
되는 것은 "예술작품의 복제"에 따라 붕괴한 아우라와 아우라가 붕괴한 예술장르로서의 영화이다. 사실 예술작품이 복제되어온 역사는 유구하다[11. 그러나 사진술의 발전과 더불어 새로이 생긴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101)는 예술작품 전체를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기존의 다른 어떤 복제기술과 다르며, 예술의 작업방식에
있어서도 독자적인 위치를 점유하게 된다.
2. 아우라
벤야민이 이 논문에서 언급하는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아우라'이다. 아우라는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는데, 먼저 벤야민이 정의하는 바에 따르면
1) 자연적 대상과의 관계에서의 아우라가 있고,
2) 다음으로는 역사적 차원에서 예술작품에 존재하는 아우라가 있다.
서술상의 순서에 의하면 역사적 차원에서 아우라가 먼저 논의되고 있지만, 예술작품이 가진 이러한 아우라는 본래 인간이 자연적 대상에게서 보고 느끼는 어떤 것(혹은 분위기)이다.
인간은 본래 자연 속에서 아우라를 경험한다. 벤야민의
정의에 따르면 이러한 아우라는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
도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것의 일회적인 현상"(109)으로, 우리가 가까이 있는 것을 보면서도 지극히도 멀게 느끼는 현상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다.
역사적 차원에서의 아우라는 '진품' 및 '원작' 개념과 관련
이 있다. 원작에는 아우라가 있어서 어떤 복제품도 결국
원작과는 구별된다. 그런데 원작이 무엇이길래 복제품과
는 다른가? 원작은 "일회적인 현존재"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복제품과 다르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특성, 그럼으로 그 작품이 가진 고유한 진품의 전통은 오직 진품(원작)에게만 존재할 수 있다[21. 이러한 진품으로서의 원작은 손으로 만든 수많은 복제물들을'너
는 복제품이야' 따위 식으로 취급해 버릴 수 있을 것이
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기술복제로 인한 복제품들이다. 아무리 원작이라고 해도 기술적 복제(사진)로 인한
복제품을 함부로 대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기술적 복제는 나름대로의 유의미한 지점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기술적 복제는 우리가 직접 봐서는 관찰하기 힘든 아주 세부적인 것들을 포착해서 강조할 수 있다. 사진이 특정 부분을 확대해주거나 고속촬영을 해서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여줄 수 있듯이 말이다. 다음
으로 기술적 복제는 "원작이 도달할 수 없는 상황에 원작의 모사( 가져다놓을 수 있다"(104). 예컨대
1989년 10월 1일에 베를린에서 연주된 곡을 지금의 우리가 집에서 음반의 형태로 들을 수 있는데, 이것은 원작이 하지 못하는 일을 기술복제된 복제품이 하는 좋은 예이다.
3. 아우라의 붕괴
기술복제시대에 넘쳐나는 복제품들로 인해 원작의 가치는 하락한다. 정확히 말하면 원작의 현존재성, "여기와 지금의 가치"가 하락한다(105). 기술복제품들은 원작의 '아우라'를 위축시키고 나아가 붕괴시키기까지 한다. 아우라의 위축은 원작이 속해 있는 전통까지 침범하는데, 기술복제는 '원작'을(복제의 모체를) 전통의 영역에서 떼어내어 대량생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처에서 복제품을 발견할 수 있고, 그러다 보니 우리의 각각의 상황에서 복제품은 늘 '현재화'되어 있다. 그러므로 복제 기술과 대량 생산은 '전통'을 흔들어 대고 있다. 벤야민은 전통이 흔들리는 상황을 두고 현재의 인류가 처해 있는 '위기'이자 '변혁'의 모습이라고 지적하며[31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매개체가 영화라고 상술한다.
정리하자면, 아우라를 붕괴시시키는 것은 '가까이 있지
만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것의 일회적 현상'을 붕괴시키
는 현대의 복제기술이다. 그리고 이 복제기술을 촉진시
키고 열렬히 수용하는 주체인 "대중"이 아우라의 붕괴에 크게 한 몫 한다. 오늘날의 대중은 어떤 사물을 공간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자신과 더 가까이 두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 그런데 사물이란 것은 고유한 일회적인 특성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대중은 어떻게 하는가? 그 사물을 복제한다. 그리고 복제된 사물을 열렬히 떠받든다.
역사적 아우라의 근거와 상실
벤야민은 (신문 속 화보, 영상매체의) 복제영상들, 복제품
들과 예술작품의 "상(image)"을 구분하고 있다. '상'과
복제물'의 관계는 이후 아우라에 관한 논의로 이어진다.
복제품에게는 아우라가 존재하지 않는데 반해 '상'에게
는 아우라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둘은 우선 구별된다
예술작품의 '상'은 그 예술작품에게 유일하고 일회적인
것(이것은 곧 '아우라'의 성질이다)이다. 예술 작품이 유일성(uniqueness)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41 그 작품이 어떤 전통의 맥락에서 이해되든지 간에 상관없이 작품만의 '아우라'를 가지고 있음을 뜻하는 동시에, 한 예술작품이 그만의 고유한 전통 안에 편입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통은 때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는데 반해, 예술작품이라는 동일한 하나의 '상'은 변하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인들과 중세의 성직자들은 비너스 상을 각기 다른 전통의 맥락에서 바라볼 것이나, 그들이 보는 비너스 상이 가진 유일성, 그 상의 '아우라'는 변함이 없다.
이때 예술작품의 '아우라'는 일회적이고 고유하며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맥락에서 논의되고 있으므로 자연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역사적인 의미에서 설명되는 '아우라'이다. (물론 111쪽에 있는 벤야민의 원주9번이 설명하고 있듯이 자연적 아우라와 역사적 아우라는 아우라를 어떤 식으로 표현하느냐에 따라서만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아우라가 발생한 근거는 어디인가? 벤야민은 역사적 전통에 근거한 아우라의 발생을 '제의'에서 찾는다.
역사적 아우라의 붕괴와 결과
예술작품이 '전통'의 맥락에 편입되기 시작한 것, 다시 말하면 일회적이고 원본성을 가지는 것으로서의 아우라가 발생한 시기, '역사적 차원에서' 아우라를 지니기 시작한 때는 언제인가? 그것은 작품이 '제의(cult(256))
[51'(110)에서 사용되면서부터 이다. 벤야민이 '진정한
예술작품'이란 무릇 예술작품의 최초의 목적이자 최초의
사용가치였던 '제의'에 근거한다고 할 때, 이는 예술작품
이 지닌 '아우라'란 곧 의식에서 숭배되는 것이었음을 뜻
한다. 예술작품은 아름다운 숭배의 대상이기도 하다. 예술작품이나 아름다움 자체가 쓸모 없는 것으로 치부되곤 할 때 예술작품 및 아름다움을 그 자체로 '숭배할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자체가 숭배대상으로서 예술작품이 가진 성격을 입증하고 있다.[61
그런데 기술복제시대에 이르러 예술작품은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정치'에 뿌리내리게 된다. 예술작품이 종교적 의식에 근거를 두지 않는다는 것은 예술작품의 일회성 및 유일성, 진품성이 상실되는 것 내지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음을 뜻하고(벤야민도 말하고 있듯이, 우리는 인
화된 사진을 두고서 무엇이 원본이냐고 물을 필요가 없
다), 그로 인해 '역사적 아우라'가 상실되었음을 뜻한다.
예술작품은 종교에 뿌리내리고 있었던 시기처럼 더 이상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 특정하고 유일한 하나의 작품이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 도처에 널린 아이들의 그림의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수많은
복제품으로 인해 예술작품의 '진품성'을 판단하는 척도가 사라짐에 따라 사회에서 예술이 맡고 있던 기능도 변하게 되는데, 이제 예술은 숭배나 제의를 위해 쓰이는 것이 아니라 전시의 수단이 된다
6. 전시가치를 지닌 예술작품
예술작품의 제의가치보다 전시가치가 더 커짐에 따라 예술작품은 이전과 다른 본성을 가지게 되었다. '제의'를 위한 예술작품은 굳이 눈에 잘 띨 필요가 없지만, '전시'를
위한 예술작품은 눈에 잘 들어와야 한다. 기술복제는 예술작품이 보다 더 잘 전시될 수 있도록 했고, 이것은 곧
사진과 영화에서 그 예를 보여주듯이 예술작품의 본성을 질적인 차원에서 변화시켰다. [71 사진은 '제의가치'보다 '전시가치'를 중점에 두고 있는 예술작품의 일종이며,
기술복제 시대를 맞아 예술을 전시를 위한 것으로 바꾸는 데 톡톡한 역할을 했다. 영화 역시 사진과 같은 맥락
위에서 이미 제의적 가치를 상실한 예술에 속한다
영화
다시 말해 영화는 제의가치가 완전히 소멸해버린 예술장
르의 일종이다. 제의가치가 완전히 소멸해 버렸다는 것은 영화에겐 더 이상 (역사적) 아우라가 없다는 의미다.
(역사적) 아우라가 없는 영화는 어떤 것인가? 영화 속 배우들은 연극배우와는 달리 관객이 아니라 카메라맨
(camera operator)에게 이야기하고, 편집자는 이 화면
들을 편집해 일종의 몽타주처럼 작업해 내놓는다. 따라서 영화배우와 관객 사이의 관계에는 항상 '시각적 테스트'가 개입해 있다. 영화배우는 늘 카메라 속에서 자신의
연기를 '시각적'으로 '테스트' 받은 뒤 카메라라는 수단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되는 모양새를 취하는 것이다. 영화
배우는 연극배우처럼 관객에 맞추어 연기를 바꾸거나 즉흥적으로 행동할 수 없다. 영화는 더 이상 '지금, 여기'의
일회성과 직접성 및 현존재성을 잃어버린, 편집된 몽타주
들이다.
이런 사정들로 인해 관객들은 영화배우가 자신에게 직접 말을 걸거나 하는 식으로 행동하지 않을 것을 안다. 그러므로 관객들은 영화 속의 배우들과 동떨어져 "감식자
의 태도"(122)로 영화를 본다. 다시 말하면 관중이 곧
"카메라의 태도"를 가진, 영화(및 영화 배우들을) 테스트
하는 존재다. 이러한 태도는 제의가치에서는 절대 존재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연기자는 기계장치를 앞에 두고 연기하
게 된다. 이런 상황에 처한 영화배우는 "자신의 생생한 인격 전부를 바치면서도 그 인격의 아우라는 포기한 채
연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124)에 놓여 있다
8. 영화의 특징-가짜 아우라
아우라를 잃은 영화에는 아우라가 없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영화는 이전과 다른 아우라를 새롭게 생성해낸다.
이 아우라가 생성되는 것은 철저히 자본의 논리에 의거
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자본의 논리에 의거해 새롭게
생성된 아우라가 '전시'된다는 점에서 영화가 벤야민에
게 본격적으로 문제시 된다(*).
영화는 유명인물이라는 가짜 아우라를 만들어내는데 이야말로 영화배우를 소외시키고 영화를 오직 자본주의의 상품으로 전락시키는 것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영화배우는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시장의 결정권자인 관객 앞에 서 있다. 배우들은 관객을 열심히 의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이 연기하고 영화를 찍는다고 한들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배우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기계장치 앞에서 열심히 연기하지만 영화배우는 일종의 상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들과 다를 바 없이 스스로에게 소외되어 있다. 그리고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이 시장에서 팔려 나가기 전까지는 상품이라는 것으로 실감되지 않듯이 영화 배우 역시 관객에게 팔려 나가기 이전까지는 스스로 상품임을 자각하지 못한다. 영화자본은 가짜 아우라를 만들어 자본주의적 경쟁에 열렬히 참여한다. 영화는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혁명적인 비판을 촉진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서구의 영화산업(자본주의 하의 영화산업)의 주된 관심사는 혁명적 비판이 아니라 '물화'에 있다. 8]
9. 영화의 특징-다른 예술 장르와의 비교
영화 촬영은 연극과 달리 특정한 '입지점'을 가지기 어렵
다는 특징이 있다. 연극의 경우, 무대에서의 사건은 환영
(illusion)으로 치부하기 어려운데 반해 모든 제작 과정
에서 기계 장치가 개입하는 영화는 모든 것이 일종의 환
영으로 존재한다. 영화 속에서 우리 현실은 늘 일련의 가공 과정, 처리 과정을 거쳐 조립되고 있다
이런 특징은 회화와의 대조 속에서는 보다 극명하게 드
러난다. 카메라맨(camera operator)과 화가의 관계를
외과의사와 마법사의 관계에 대조해 볼 수 있는데, 외과
의사가 환자의 심부까지 파헤쳐 뒤져 보듯이 카메라맨
은 우리의 일상을 파헤쳐 들어와 그것을 가공한다. 반면
마법사는 늘 대상과 거리를 두고 환자를 전체적으로 조망한다. 화가가 늘 세부적 파편이 아닌 "하나의 전체적
영상"(133)을 제시하듯이 말이다.
회화와 비교했을 때 영화는 반응이 보다 더 '집단'에 치중
해 있다는 점에서도 구별된다. 일반적으로 (특히나 벤야
민의 시대를 생각하자면) 관객은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
관에 간다. 그 곳에서 관중의 "비판적 태도와 감상적 태
도"(134)는 일치한다. 다시 말하면, 개개인의 반응을 모두 합친 것이 곧 집단의 반응과 같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영화를 감상하는 공간은 집단에 의해 반응이 "직접적
으로 제약되어 있는" 공간이다. 회화의 경우, 회화는 늘
복수의, 다수의 대중에게 동시에 수용되는 예술장르는 아
니었다. 회랑이나 살롱에서 그림을 보는 것은 소수가 하는 일이었으며, 또 감상의 시간 동안 서로가 무엇을 느끼는 지 다른 이는 알 길이 없고, 그림이 어떻게 수용되고
조작되는 지 역시 개인적인 일이지 집단이나 대중의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10. 영화의 특성-영화 자체의 특징
영화는 사람이 카메라를 통해 자신의 주변 환경을 연출
해서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때 영화는 시각적인 것뿐만
아니라 청각적인 영역까지 파고들기 때문에 다른 예술
과 달리 인간의 지각 능력을 좀 더 집중적으로 공략하게
된다. 또한 영화는 다른 장르에 비해 분석할 수 있는 것이 많다는 특징이 있다. 영화는 우리 일상 생활에 존재하
지만 우리가 눈여겨 보지 않은 것들을 가까이에서 보게
함으로써 우리 일상 생활의 여러 소도구들을 탐구하는
동시에 그 모든 일상에 대한 통찰을 제시하기도 하고, 동
시에 이런 것들을 "유희"할 수 있게끔 한다. 영화의 등장
은 우리 세계를 파편화 시키고, 그 각각의 세계를 모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이를 통해 영화는 예술적
이거나 유희적 역할 뿐만 아니라 학문의 자리에서도 중
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고, 지금까지는 분리되어온 예술
학문의 두 영역을 일면 통합시키는 경향도 보인다.
11.영화의 (정치적 활용에의) 잠재성
뒤아멜은 영화가 대중에게 일종의 오락에 불과하며 대중
에게 유희거리로만 존재한다고 비판한 바 있다. 물론 예
술작품은 "정신분산"과 "정신집중"이라는 두 가지 기능
을 하며(144), 이 둘은 분명 상반되는 개념이다
회화와 같은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경우, 그것을 열심히
감상하고 집중하는 인간은 그 작품속으로 '들어간다.' 작
품에 집중하면, 사람은 그 작품에 흡입되는 것이다. 반면
대중이 예술작품을 향유할 때는 이런 식으로 작품에 '빨려들어가지' 않고, 대중 속으로 예술 작품이 '들어온다.'
우리가 영화를 감상하는 방식은 바로 이러한 방식이다.
인간이 이런 식으로 감각하는 예술 장르는 물론 영화만
이 아니다. 오랜 예술 장르 중 하나인 '건축물'도 이러한
유의 감상대상이다
건축물에 대한 벤야민의 통찰은 영화가 감각되는 방식
및 영화의 의의에 대해 많은 것들을 시사한다. 우리가 건
축물을 볼 때 그것을 '사용'하는 측면과 그것을 '지각'하
는 측면을 논의할 수 있는데, 이것은 다시 말하면 우리는
건축물을 '촉각적으로' 수용하기도 하고 '시각적으로' 지
각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관광객들이 앞서 회화를 감상
하는 사람처럼 유명한 건축물을 감상하던가? 아니다. 그
저 그들은 시각적으로는 '무심코' 본다. 그들이 건축물을
촉각적으로 수용하는 것 역시 특별히 '집중'해서가 아니
라 그저 습관적으로 사용하면서, 드나들면서 수용하는 것
이다.
우리는 건축물을 무심코 보면서 그저 습관적으로 감각한
다. 익숙함은 우리가 건축물을 촉각적으로 수용하게 만
든다. 이것이 정신을 집중함으로써 이루어 지는가? 아니
다. 정신이 산만한 사람도 자꾸 보면 익숙해지는 법이다.
예술은 이런 식으로 감상될 수 있으며, 이런 식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 현대에 와서는 영화가 바로 이러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영화는 대중을 조직하고 현시대의 기술
을 활용해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잠재성이 있다. 벤야민이 여기서 특별히 지적하는 대
상은 파시즘이다. 파시즘은 대중을 조작하는데, 그들을
여전히 프롤레타리아(무산계급)으로 놔둔 채 조작한다.
파시즘은 대중이 가진 권리를 열심히 표현하게 하면서
그 권리를 가지게 하지는 않으며, 소유관계는 전혀 바꾸
고 있지도 않다. 파시즘은 정치를 '심미화'하며 지배계급
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한다. 정치를 예술의 영역에 끌어들이되 본래의 생산수단을 유지하는 데 활용하는 것
은 전쟁에 찬성하는 입장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전쟁
이야 말로 현재의 생산수단은 유지한 채 현대의 발달한
기술 수단을 열심히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영화는 유용한 수단으로 쓰일 수 있기도 하다. 벤야민이 길게 인용한 마리네티처럼 극단적으로 전
쟁의 미학을 찬미하지 않더라도 파시즘이 전쟁미학과 맞닿아 있으며 이것은 '정치적 심미화'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 이와 반대되는 것은 공산주의의 "예술의 정치
화"(150)이다.
[11 복제의 역사는 다음과 같다: 그리스인들의 주조와
압형, 청동제품, 테라코타, 주화 식의 복제 >목판의 발명, 그래픽이 기술적으로 복제 가능 -> 인쇄를 통한 문자의 복제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 19세기 초 석판인
쇄술의 등장, 나무판이나 동판보다 석판이라는 보다 간편
한 방식으로 인쇄가 가능해졌다 ->사진술의 발명
[21 복제가 아무리 완벽하다고 하더라도 예술작품이 "여기," "지금" 갖는 영향력, 그 "일회적인 현존재"의 특성만 은 복제해낼 수 없다. 그리고 이 일회적인 현존재 속에 예술 작품의 역사가 존재한다. 우리는예술 작품을 두고예술 작품이 물질적으로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추적하는 한편, 그 작품이 어떤 소유관계에 놓여 있느냐도 연구해볼 수 있다. 이런 분석은 오직 원본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즉 "전통을 추적하는 일은 원작이 있는 장소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103). 원작이 진품이라는 것은 곧 원작이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런 것
은 기술적으로 복제할 수 없다. 이것은 다른 어떤 종류의
복제를 포함해 "기술 복제의 가능성에서[도] 벗어나 있
[는]"(104) 일이다
[31 "이러한 전통의 동요는 현재의 인류가 처해 있는 위
기와 변혁의 이면이기도 하다"(106)
[41 여기서는 예술작품의 "유일성"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데, 영역에서는 앞서 "일회성"으로 번역된 단어와 동일
한 "uniqueness"가 쓰였다.
[51 '제의'라고 번역된 단어 'cult'는 집단적 숭배, 추종
등을 뜻하는 단어인데, 숭배 의식 자체도 포함하는 단어
인 듯하다. 그런데 벤야민은 이 글에서 종교의식을 따로
떼어내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ritual) 여기서는 정말 '숭
배행위' 그 자체로 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
[61 예술작품 및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위기에 사용
가치를 잃어 쓸모 없어 보이고, 그래서 곧 위기에 직면하
는 것 같은 시기일수록 예술작품의 본래적 근거는 더욱
뚜렷해진다. 복제수단(사진술)이 발전하고 사회주의가
대두함에 따라 예술이 위기를 감지했을 때, 예술은 순수
한 예술을 표방하는 예술지상주의의 이론으로 돌아가 위
기에 대처하고자 했다. 그런 경향에서 순수예술론이 등
장한 것이었다(말라르메)
[71 부연: 예술작품은 크게 제의가치(cult value)와 전
시가치(exhibition value)를 두고 수용되어왔다. 예술
작품이 제의를 위해 쓰였을 때 작품은 단지 그것의 존재57
자체가 중요했지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잘 보이냐는 중
요하지 않았다. 사제들이 은밀한 곳에 가서 기도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대량 생산을 통해 예술작품이 여러 곳에
서 전시될 수 있게 되었고, 이로부터 예술작품은 원시시
대에 가졌던 본성과는 다른 본성을 보다 나타내 보이게
됐다.
[81 동시에 영화기술은 일반인을 '전문가'로 참여시켜
'누구나 다 영화에 나오는 인물'이 될 수 있게끔 하는 (긍
정적인?) 역할도 하고 있다. 길거리를 지나는 엑스트라
로 캐스팅되는 순간 평범한 사람은 예술작품 속에 편입
된다.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영화에 출연할 수 있다. 문학
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상황이 대두된 바 있다. 소수의 글
쓰는 사람들이 지면을 장악하고 있었던 옛날에 비해 신
문의 발전과 인쇄술의 발전은 독자를 곧 글쓰는 사람의
위치, 저자의 위치로 올려 두었다. 독자는 필자가 될 수
있었다. 글쓰기가 곧 특별한 전문가의 일이 아니라 일반
대중의 일이 되었다는 지적은 [생산자로서의 작가] 에
서도 피력된 견해이다. 여기서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
가 나오는 듯 한데, 글쓰는 것이 곧 일반적인 교양교육이
되었고 그래서 그것이 곤 '공동재산'으로 활용될 수 있다
는 지적이다. 이와 소련에서 모든 일이 말하는 일이라는
것은 동일한 맥락인 듯 보인다. 소련의 노동자들은 모두
자신의 노동에 대해 말로 할 수 있으며, 그래서 글쓰는 것
은 여러 형태로-사설, 르포르타주, 체험담 등-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이 된 것이다.
벤야민, 발터.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제3판)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사진의 작은 역사 외].최성만 옮김. 서울: 도서출판 길, 2018(2007)
https://naver.me/FzSQLSjN
출판사 서평
'현대 매체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게 한 유명한 에세이
이미 벤야민은 『일방통행로』에서 지식 전달과 글쓰기 수단으로서 인쇄된 책이 낡은 형식이 되고 구텐베르크 시대가 종말을 고해가고 있음을 직시하였다. 즉 그는 매체기술의 급속한 발달로 읽기 행위가 이미지적·단속적·충격적·촉각적 성격을 띠게 되면서 비평적 글쓰기 방식 또한 변화할 수밖에 없음을 통찰하였다. 현대가 매체의 시대라면 그것은 사람들이 현실을 지각할 때 기계장치의 매개에 의존하는 정도가 비상하게 커졌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미 「사진의 작은 역사」에서 제시한 아우라의 붕괴는 이 에세이에서 다시 한 번 중요한 용어로 등장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여기서 아우라는 예술작품의 유일무이한 존재, 그 진품성과 연관되면서 그러한 일회성과 진품성에 상응하는 전승의 형식과 결부된다. 벤야민은 이 아우라의 마법적 요인을 예술의 원초적 기능인 제의적 기능으로 소급하는데, 이러한 것들이 현대의 대량복제기술 시대에 들어서는 더 이상 그 기능을 할 수 없음에 주목한다. 그가 이제『오늘날의 예술작품이 지닌 새로운 기능들 중에서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두드러진 기능은 예술적 기능이지만, 이 예술적 기능 역시 사람들이 나중에 부차적 기능으로 인식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한 이유이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까지의 예술이 '의식'에 바탕을 두었는데, 이제 예술은 다른 실천, 즉 '정치'에 바탕을 두게 된다고 역설한다. 그런 대표적 예술매체로서 벤야민은 사진과 영화에 주목을 한 것이며, 이 책에 실린 대표적 두 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과 「사진의 작은 역사」는 새로운 현대의 '기술'이 어떻게 전통적인 예술개념을 전복시키며, 기술에 의해 지배되는 자연에 대한 충실한 모사로서의 영화에 더욱 주목하는 바를 말해준다.
예술의 복제가능성, 그리고 '아우라의 붕괴' ― 지금 21세기에도 유효한 인식틀로 재주목
또한 그의 정치철학이 기술을 염두에 두면서 집단을 정치적 행동의 중심에 두는 데 핵심이 있는 점을 인식한다면, 그가 복제기술시대의 새로운 매체로서 특히 영화에 주목한 바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벤야민이 이 에세이들에서 전개하는 매체미학적 성찰들은 종종 기술결정론, 기술낙관주의로 오해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영화가 지니는 혁명적 기능들이 제대로 성취되기 위해서는 영화를 스타 숭배의 사이비 아우라를 확산시킴으로써 역기능을 조장하는 '영화자본'이 몰수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분명히 한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물론 대량복제시대에 걸맞는 대중의 자발성과 자기조직의 역량에 대한 벤야민의 지나친 신뢰의 태도는 좌파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거듭 유보적 태도를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대중은 그가 희망하거나 진단한 것만큼 진보적이지 않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짧은 에세이는 마르크스주의적 미학이론의 고전적 텍스트로 수용되었으며, 21세기 새로운 매체가 속속 등장하는 요즈음 들어서 새롭게 각광받는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제2권의 해제 18~20쪽에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의 제1판, 제2판, 제3판에 대한 자세한 텍스트 탄생사 가 있다. 당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총본산인 사회연구소의 정치적 고려 때문에 판본의 다양화가 이루어졌음 을 볼 수 있다.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된 판본은 벤야민이 '정본'이라고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