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훈 바오로 신부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요한 묵시록 11,4-12 루카 20,27-40
제1독서에서는 두 증인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이 두 증인은 바로 모세와 엘리야를 가리킵니다.
“예언하는 동안 비가 내리지 않게 하늘을 닫는 권한”(묵시 11,6)은 아합 임금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삼 년 동안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게 한 엘리야를 떠올리게 하고(1열왕 17,1 참조),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원할 때마다 온갖 재앙으로 이 땅을 치는 권한”(묵시 11,6)을 가진
예언자는 이집트에 열 가지 재앙을 일으킨 모세를 떠올리게 합니다(탈출 7,14-12,13 참조).
이 두 예언자는 주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며 자신의 사명을 다하였지만,
사명을 마친 뒤 지하의 짐승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도성 한길 가에 내버려집니다.
사흘 반 동안 무덤에 묻히지도 못합니다. 마치 악이 승리한 듯 보이고,
이 예언자들은 조롱거리가 됩니다. 불의한 자들은 예언자들의 죽음에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예언자들을 일으키시고 하늘로 불러올리시어,
그들의 승리를 선언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공정과 정의를 실현하실 하느님에 대한 희망입니다.
부활은 우리 삶의 마지막에 결국 선이 승리하고 악이 심판받으며 모든 것이 질서 잡힐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의인이 고통받고 악인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을
해결하실 분은 하느님뿐이십니다.
부활이 없다면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노력은 아무 쓸모가 없을지 모릅니다.
하느님께서 계심과 그분께서 이루실 하느님 나라는 지금의 우리의 노력을 의미 있게 합니다.
부활에 대한 전망은 이 세상에서 정의를 위한 작은 노력이, 비록 큰 열매를 맺지 못하더라도,
완성으로 나아가는 밑거름이라는 것을 보증해 줍니다.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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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우 바오로 신부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요한 묵시록 11,4-12 루카 20,27-40
오늘 복음은 부활 논쟁 장면을 소개합니다. 등장인물은 사두가이 몇 사람, 율법 학자 몇 사람,
예수님이며, 구성은 ‘액자형 구조’입니다.
등장인물들의 대화 안에 다른 이야기들이 끼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두가이들은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라는 모세의 율법 일부를 근거로
일곱 형제 이야기를 예로 듭니다. 일곱 형제가 한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였다면, 부활 때 그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질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예시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모순을 지적하시려고 다른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사두가이들이 모세의 율법 일부를 근거로 논쟁을 시작하였다면,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떨기나무
발현 이야기를 끌어오십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을 드러내시고 이름까지 알려 주신
구약 성경의 가장 탁월한 계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여러 성조의 하느님이심을 밝히셨습니다.
이로써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시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심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부활을 받아들였던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동조하는 것으로 전체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복음 내용을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해 봅니다.
나의 옳음과 정당함을 주장하려고 인위적으로 이야기를 끌어다 사용하는 사두가이들의 모습과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는 못하지만 경쟁 상대를 끌어내리려고 그분께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율법 학자들의 모습 가운데 우리는 어느 쪽에 가깝습니까?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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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요한 묵시록 11,4-12 루카 20,27-40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퀸즈에 있는 신부님의 모친께서 선종하였습니다. 신부님과는 지난 3년간 형제와 같이 지냈습니다.
당연히 모친을 위한 ‘연도’에 함께 했습니다. 연도는 부제님이 말씀의 전례를 주례하였고,
고인의 큰 따님이 감사의 인사를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인을 위하여 연도를 바쳤습니다.
제단 앞에 모신 고인과 유족들에게 인사하면서 마쳤습니다.
오늘은 유족께서 고인을 추모하며 함께 나눈 일화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고인은 103살 이었습니다. 1919년에 태어났습니다. 할머니는 불교를 믿다가 성당으로 오셨다고
합니다. 미국으로 이민 왔는데 당시 미국에는 사찰이 없었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큰 딸의 권유로 성당으로 왔습니다.
할머니가 성당으로 오면서 자녀들도 모두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할머니는 성당에 와서도 제단 앞으로 와서 불교식으로 엎드려서 큰 절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말을 하니 딸이 엄마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엎드려서 절하면 안 받아 주신다니? 성경에 보니
‘엎드려 절하나이다.’라는 말도 있던데?” 그러자 딸은 더 이상 어머니에게 말을 못하였다고 합니다.
신자들도 제단 앞에 와서 엎드려 큰 절을 하는 할머니에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언제든지 성당에 오면 제단 앞에 엎드려 큰 절을 하고 자기의 자리에 앉았다고 합니다.
막내아들이 신학교에 들어가서 할머니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엄마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재혼하지 마세요. 마음 바꾸지 마세요.” 그러자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들이나 마음 바꾸지 마세요. 계속 한 길을 가세요.”
할머니는 언제나 당당하셨다고 합니다.
저는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2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저의 어머니도 신학생인 저에게 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찌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나?”
어머니는 신학을 배우지 않았고, 성경을 많이 읽지 않았지만 신앙의 핵심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신앙은 지식으로만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향한 갈망으로 채워집니다.
백인대장은 신앙이 없었지만 부하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하를 사랑하는
백인대장을 향해서 ‘일찍이 이런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방인 여인의 딸에 대한 사랑을 보면서 ‘이 여인의 믿음이 이스라엘 사람보다 더 강하다.’
라고 하셨습니다. 과부의 헌금, 세리의 기도를 예수님께서는 칭찬하셨습니다.
부유함과 지식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척도는 아닙니다.
갈망과 사랑이 있으면 누구나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파 사람은 예수님과 ‘부활 논쟁’을 벌였습니다.
장기에 ‘외통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수입니다.
장기에 질 수밖에 없는 수입니다. 사두가이파 사람은 부활이 있다면 유대의 율법 규정을 들어서
‘일곱 형제와 살아야 했던 여인의 남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예수님께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은 존재의 차원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소유의 차원은 중심이 ‘나’입니다. 그러나 존재의 차원은 중심이 ‘하느님’입니다.
소유의 차원은 승자독식, 적자생존, 약육강식, 빈익빈 부익부의 세상입니다.
존재의 차원은 믿음, 희망, 사랑의 세상입니다. 정결, 순명, 가난의 삶입니다.
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뛰노는 세상입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더는 슬픔도, 아픔도, 고통도 없는 세상입니다. 부활은 생과 사의 문제가 아닙니다.
부활은 인식과 차원의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서 존재의 삶을 산다면 이미 부활의 삶이 시작되는 겁니다.
알에서 깨어난 병아리는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전혀 움직일 수 없었던 알 속에 갇혀 있던 병아리는 하늘을 볼 수 있고, 움직일 수 있습니다.
알과 병아리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저는 부활이란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비가 된 애벌레는 더 이상 기어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날개가 있기 때문입니다. 애벌레와 나비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사게 됩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현실에서 차원이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면
부활은 이미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갈 수 있다면, 절망에서 희망으로 나갈 수 있다면,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나갈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미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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