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한준 롯젤로 신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다니엘 7,13-14 요한 묵시록 1,5ㄱㄷ-8 요한 18,33ㄴ-37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로마 제국의 정치 지배를 받으며 황제 숭배를 강요받았습니다.
로마 황제는 절대군주 체제로 드넓은 영토를 장악하고 있었지만, 언제 발발할지 모를 반란과
새로운 황제의 출현에 노심초사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내부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사제들은 합법적인 사제 가문 이외의 인물에게는
사제로서의 위상과 정당성을 주지 않음으로 기득권을 독점하고 있었고, 사회 지도자들과 결탁하여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며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 나자렛이라는 시골 출신인 젊은 목수의 등장은 분명 그들에게 놀랍고도 불쾌한 일이었습니다.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밝히며 기존 지도자들의 입을 막아버리는 권위 있고 명쾌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사람들은 매료되었습니다. 또 율법을 잣대로 정결과 부정, 선과 악을 규정지으며 심판자로
머물 뿐 참된 죄 사함은 베풀지 못하던 사제들과 달리 엄중하게 용서를 선언하는 예수님을 통해
참된 자유와 해방을 체험한 군중들의 기대는 점점 커져만 갔습니다.
이런 백성들의 기대와 희망은 기존 기득권층의 안정된 삶을 위협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자 기득권을 독점한 지도자들은 새로운 경쟁자 예수님을 ‘유다인의 왕’이라는 죄명으로
처형하기에 이릅니다.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요?”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따르고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으로 만들어 처형하기 위해서 한 사람을 왕으로 둔갑시킵니다.
사람을 죽여서라도 가진 것을 지키고 싶어 했던 처절한 몸부림 앞에서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황제로 자처하고 나섰던 적이 없었고, 그들이 쟁취하고 있던 것을 빼앗으려 한 적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그저 당신의 나라, 하느님 나라, 참된 진리를 있는 그대로 소개하며 전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온 누리의 임금이심을 고백하며, 세상 끝날 심판자요 왕으로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지냅니다.
예수님을 “온 누리의 임금”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마음은 가진 것을 지키고자 예수님을
“유다인의 왕”으로 불렀던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처형하기 위해 부여한 칭호가 아니라 온전히 섬기고 따르기를 다짐하며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님께 “온 누리의 임금님, 나의 유일한 왕”이라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 임금(바실레우스 βασιλεύς)
예수님 시절 유다 사회의 ‘임금’은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줄 정치적 권력을 가리키는 말마디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임금이신 예수님은 위계의 상층부에 있는 임금이 아니라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를 짊어지는 임금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다스림, 그 나라의 임금은 가장 나약하나 가장 자비롭고 온유하신 분이십니다.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모실 수 있습니다.
- 대구대교구 여한준 롯젤로 신부
2024년 1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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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지훈 베드로 신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다니엘 7,13-14 요한 묵시록 1,5ㄱㄷ-8 요한 18,33ㄴ-37
이 땅에 태평성대(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길
시대(時代)마다 성군(成君)과 폭군(暴君)이 있었습니다. 성군은 말 그대로 어질고 뛰어난 임금을
가리킵니다. 성군이 다스리는 시대는 백성들이 마음 편히 살 수 있었습니다.
항상 백성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아울러 임금에 대한 백성들의 믿음이 있었기에 말 그대로 태평성대를 살았을 것입니다.
반대로 폭군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무리의 이득을 위해 안하무인(眼下無人)의 모습으로
백성들을 갈취하고 핍박하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사는 백성들은 임금과 임금을 따르는
무리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고 곳곳에서 항거(抗拒)하였습니다.
권력과 탐욕에 의한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살아갔을 것입니다.
많은 나라의 역사를 다 알지는 못하지만, 대부분 온전히 성군의 시대 혹은 폭군의 시대가
이어간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 다른 임금이 있습니다. 권력욕도 재물욕도 없어 보입니다.
내 편 네 편 갈라치지 않습니다. 자신보다 백성들을 더 걱정하고 챙깁니다.
백성들 모두가 함께 어우러져 사랑하며 행복하길 바라십니다.
많은 이는 이 나라를 진리와 생명의 나라,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라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이러한 나라에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모르겠습니다만, 현세에서 권력이나 재물의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관심조차 없는
나라일 것 같습니다. 반대로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희망의 나라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나라에 정말 살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입니다.
그저 ‘얻어걸리겠거니’가 아니라, 정말 내가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마음이 있다면 당연히 임금이 바라는 것을 받아들여 이해하고 함께 이뤄가며 살아가겠죠.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 우리의 임금이시고 왕이라 고백합니다. 그분께 드리는 고백은
우리 자신이 그분의 백성이라는 것이죠. 더 나아가 그분을 믿고, 신뢰하며 그분의 다스림에
자신을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성군을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하는 우리는, 우리에게 구원을 이뤄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신 임금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그분의 계명을 따를 때만이 구원에 가까이 이를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 앎을 실현하기 위해 전례력상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지난날 부족했던
삶의 모습을 반성하고, 앞으로 충실한 백성의 모습을 갖춰나갈 수 있도록
다짐하고 노력해야하겠습니다.
- 대전교구 권지훈 베드로 신부
2024년 1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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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록 라우렌시오 신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다니엘 7,13-14 요한 묵시록 1,5ㄱㄷ-8 요한 18,33ㄴ-37
섬김과 봉사의 왕직
교회가 오늘 기념하는 축일의 명칭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 승천하셔서 전능하신 성부
하느님 오른편에 좌정하시어 영광을 받으시고 세상 종말에 심판하러 다시 오실 임금이십니다.
복음서에도 예수님께서는 자주 임금·왕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님을 잉태하리라는 소식을 전하면서 예수님께서 왕이 되실 것이고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루카1,33 참고)
동방박사들이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는 별을 보고 헤로데를 찾았을 때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마태2,2)라고 질문함으로써
헤로데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타나엘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1,49)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이 왕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총독 빌라도 앞에서 당신의 왕권을 분명히 하시면서도 당신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오늘 복음의 내용처럼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왕이 되는 것은 원치 않으셨습니다.
같은 이유로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던 놀라운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이
억지로라도 예수님을 현세적인 왕으로 모시려고 했지만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시고
그들을 피해 자신의 길을 가셨습니다.(요한6,15 참고)
사실 예수님의 일생은 일반적인 왕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습니다.
멋진 왕관을 쓰신 적도 없고 화려한 궁전에 머물렀던 것도 아닙니다.
구체적인 영토나 군대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비천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고
평생을 머리 둘 곳조차 없는 가난한 모습으로 사셨습니다.
3년간의 공생활 중에는 주로 가난하고 병들고 죄 많은 사람과 어울려 지내셨습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 속에서 십자가에 처형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으셨습니다.
보통의 세속 임금들이 백성 위에 군림하고 권력으로 통치한다면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10,43)라고
가르치셨고, 스스로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10,45)라고 하시며
섬김과 겸손을 통한 새로운 다스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최후만찬의 현장에서 직접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며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13,14-15)라고 하시며
참된 봉사와 사랑의 모습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완전한 사랑의 실천은 한마디로 ‘모든 이에게 모든 것’(1코린9,22)이 되어 주는
것이었고, 그로 인해 세상의 왕들과는 구별되는 진정한 왕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왕직은 섬김과 봉사의 직분이고 그리스도왕의 다스림은 사랑의 실천으로
이루어지는 통치입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의 왕직에 세례성사를 통해서 모든 신앙인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섬기고 나누고, 사랑하고 봉사하는 신앙인의 삶이야말로
세상과 우주를 다스리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 우리의 참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하는 올바른 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그리스도 왕의 통치가 실현되는 곳으로 변화되고 성장할 수 있기를
마음 모아 기도합니다. 동시에 그리스도 왕의 모습을 닮아 서로를 소중한 사람으로 여기며 돕고,
사랑으로 섬기는 실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할 것을 다짐해 봅니다.
서울대교구 유승록 라우렌시오 신부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11월 24일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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