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규 베네딕토 신부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요한 묵시록 14,1-3.4ㄴ-5 루카 21,1-4
이스라엘의 성전은 제사뿐만 아니라 자선의 중심지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아무래도 사람이 많이 모이고, 예배의 핵심 역할을 한 곳이기에 성전을 중심으로 유다인의
자선 활동이 활발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유다인들에게 자선은 제사나 기도만큼 중요하고,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대한 오늘 복음은 성전을 배경으로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십니다. 부자와 과부, 풍족함과
궁핍함이 대조됩니다. 부자들이 헌금함에 어느 정도의 예물을 넣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과부는 렙톤 두 닢이라는 얼마 되지 않는 예물을 봉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과부를 칭찬하십니다.
가난한 과부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치 하느님께 받은 것을 모두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여기서 ‘예물’이라는 표현은 ‘선물’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부자들은 자신들이 받은 것 중에 일부만을 하느님께 돌려드리지만
과부는 자신이 받은 모든 것을 예물로 내놓습니다.
예물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봉헌의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봉헌하는지, 나에게 주어진 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이해하는지가 중요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것이 나의 노력만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받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나의 것이라 여겨지는 것을 다시 하느님께
돌려드리고 이웃과 나누는 것이 조금은 더 수월할 것 같습니다.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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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구 루치오 신부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요한 묵시록 14,1-3.4ㄴ-5 루카 21,1-4
과부의 동전 두 닢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넣은 동전 두 닢은 돈이 아닙니다.
그녀의 사랑이 담긴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그러나 부자들이 헌금함에 넣은 뭉칫돈은 돈일뿐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21)
하느님을 사랑하는 과부는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바쳐도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길이라면 목숨까지도 내어놓고 싶습니다.
그녀의 마음은 하느님께로 향하고 있지 돈에 있지 않습니다.
그녀의 아름다운 마음이 담긴 동전 두 닢은
부자들의 뭉칫돈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러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랑과 믿음, 정의와 평화, 기쁨과 행복은 천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습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믿음은 믿음으로만 살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정의와 평화, 기쁨과 행복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돈으로는 절대로 살 수 없습니다.
보석보다 찬란하고 꽃보다 아름다운 당신의 사랑을
하느님께 바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산교구 강영구 루치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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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요한 묵시록 14,1-3.4ㄴ-5 루카 21,1-4
어떤 빈곤한 과부가 자신의 생활비 전부인 렙톤 두 닢을 헌금함에 넣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지켜보십니다.
물론 부자들이 넣는 돈과 비교해서 보잘것없는 금액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칭찬을 단순한 금액의 비율로 평가하는 것은 복음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빈곤한 과부가 놓인 현실을 외면해 온 공동체의 책임에 대한
비판이 숨겨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고아나 떠돌이와 함께 공동체의 보호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의 대표로
과부가 자주 언급됩니다.
이는 하느님 백성으로서 부름받은 모든 이의 어느 지체도 그분의 사랑과 자비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와 주권을 잃고, 이민족의 지배를 받으면서
율법의 기본 정신은 사라졌고, 세속적 욕망이 이웃 사랑에 대한 원칙을 넘어서면서
경제적 양극화가 일어나고 빈곤한 이들에 대한 연대감이 사라진 것입니다.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이유는 자신이 얻은 수익이 자신의 노력만이 아닌
하느님의 돌보심과 이웃의 희생에 따른 것임을 고백하는 순수한 종교적 행위입니다.
물론 그 헌금이 성전을 관리하고 교회의 사제들의 삶을 위하여 쓰인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원칙은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생활비 전부를 헌금함에 넣은 과부는 어쩌면 세상에 대한 미련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얻은 것은 모두 하느님의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수도 있고,
하느님께서 채워 주실 것이라는 강한 믿음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약자 보호의 원칙을 지키지 않는 유다 사회에 대한 강한 질책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오늘날 돈과 권력이 갖는 속성을 꿰뚫어 보시고
제자들에게 교회가 가야 할 길을 새로 보여 주신 것은 아닐까요?
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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