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승 기류의 커다란 그것은 새들의 비상을 드높이는 날갯짓을 이끌어
내고, 두 어번의 몸짓만으로도 하이얀 깃털이 나부끼는 하늘로 높이
활공할 수 있는 비둘기 떼의 행렬을 보고 있노라면 나 자신도 꼭 그
와 같은 끝없는 비상의 일부가 되어버릴 것만 같아 가슴이 두근거릴
뿐이다. 차가운 철골 구조물에 생명의 혼을 불어넣는 혼신의 장인처
럼, '활공'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그것도, 비로소 비둘기의 자그마한
몸짓과 조우하여 결국엔 '비상'으로 화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내
눈동자에 한없이 아름답게 비치는 이유란, 내가 그들이 취하는 '비상
'이란 것을 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찰나에 동경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내가 보기엔 적어도 그랬다. 하늘이란 캔버스
위로 낙하하는 붉은색의 동그라미. 아니, 낙하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낙하의 시점을 뒤집어보면 타산이 맞을지도.
텅! 끝없이 날아오를 것만 같던 백색의 비둘기 떼 중, 가장 선두에
섰던 한 마리가 내 발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그 비둘기는 낙하 속도
와 중력의 크기에 비례하여 발 아래에서 기괴한 몰골로 변해버렸다.
마치 잘 익은 토마토 하나를 짓이겨놓은 모습… 그것이 바로 방금 전
까지 내가 동경하던, 저 푸른 하늘을 하얗게 수놓던 비둘기의 최후였
다. 뇌수가 흐르는 철골 구조물 위로 비둘기는 마지막 경련을 일으켰
다. 그리고 오랜 세월의 침식을 받으며 뭉툭해진 양 부리 사이로 비
둘기는 붉은 선혈을 토해냈다. 끝없이, 그러나 조금씩 생명의 증거를
갉아먹던 세상의 한기는 마침내 비둘기의 온몸을 경직되게 만들었다.
그리곤 없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초라했다. 마지막 최후의 모습치곤 너무도 쓸쓸했다. 다른 비둘기는
죽어버린 동료를 놓아두곤 갈길을 재촉했다. 다시 날아오르는 비둘기
는 비둘기일 뿐이었다. 그 이상은 없었다.
난 팔을 뻗어 그것을 주워올렸다. 아직 채 굳지 않은 선혈이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오른손. 손바닥의 중앙에 비둘기
의 생명의 증거가 잡혔다. 이제는 그 규칙적인 운동성을 잃은 선혈의
집합체. 아름다운 '살아있음의 증거'는 그렇게 '생명'으로서의 운명
을 소진했다.
높은 곳. 내가 발을 디딘 바로 이 곳. 이 곳에 바람이 한 차례 불었
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 손에 잠든 비둘기가 타고 날갯짓을 하던
그 바람이었다. 그 바람은 비상했다. 비둘기의 죽음과 자신은 별개의
공간에 자리해있는 이면異面의 모습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끝없는
비상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바람은 날아올랐다. 하늘 사이로
날아올랐다. 그리곤 한없이 떨어져내렸다.
난 내 손에 들린 비둘기의 시체를 본연의 고향으로 돌려놓게 되었다.
과연 날아오르던 바람이 비둘기를 받아들일지 의문이었지만 그것이
비롯된(날갯짓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바람이라고 앞서 말했다)바람
은 비둘기를 다시 한번 비상시킬 것이다. 그것을 굳게 믿고 난 때마
침 불어오는 바람에 비둘기를 하늘로 날려보냈다.
날아오르는 비둘기는 날개를 퍼덕였다.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곧 떨
어져내릴 것이라는 것을 망각한 듯 싶었다.
2.
비행기를 접었다. 종이 비행기다.
어디선가 하릴없이 뒹굴거리던 종이를 집어 몇 차례 꼬깃거리더니 탄
생된 일생 일대의 역작(?)이다. 정교한 날개 각도. 그리고 무게 중심
을 완벽히 잡는 황금 비율. 정말이지 대단하다.
…….
뭐, 실토하자면 역작까지는 칭하지 않더라도 그나마 내 공작 솜씨가
녹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만한 작품인 것이다. 꼼꼼한 공작을 필
요로 하는 종이 비행기를, 그간 몇 년 동안 접어오지 않은 종이를 가
지고 이만큼 접었다는 것은 내 자신을 위안시켜도 결코 부끄럽지 않
은 기록인 것이다. 그래. 아직 내 손가락은 녹슬지 않았다.
하지만 지울 수 없는 뼈 아픈 낙인의 자국은 있었다.
종이의 한 쪽 모서리, 그러니까 지금의 종이 비행기의 날개 부분이
붉게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 붉은 자국엔 기름기마저 돈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의 저녁 식사때, 냄비 받침으로 쓴 종이가 바로 이
종이인 모양이다. 저녁 식사는 김치찌개. 음, 뭔가 연관이 된다. 하
지만 뭐, 아무렴 어떨까. 비행기니 잘 날기만 하면 되지.
난 어렸을 때부터 종이 비행기를 날릴 때 잡았던 동체 부분(동체라고
말하기도 빈약하다)을 두 손가락으로 잡고 손목의 스냅을 이용하여
허공으로 던지듯 놓았다. 그러자 종이 비행기는 한 차례 허공을 가르
는 듯 싶더니 곧 허무한 몸짓을 떨구며 바닥을 향해 내려앉았다.
곧 머리 속에선 의문이 일었다.
'왜 이 비행기가 날지 않지?'
의문의 해답은 쉽사리 밝혀지지 않았다. 다시 비행기를 주워들어 여
러 군데를 만지작거렸다. 날개의 각도가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동체
의 무게 중심이 다른 곳으로 쏠린 건지, 여러 문제점을 미리 예상해
놓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행기를 여러 번 들여다보기도 했다.
하지면 역시 처음에 예상했던 문제로는 그 의문의 해답이 밝혀지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혹시 문제가 없을런지도 모른다. 내 쪽에선 그가 보이
지 않지만 '그' 쪽에선 내가 너무도 잘 보인다. 불합리한 조건 속에
서 내가 그를 발견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런 것과 같은 이
치이다. 그래서 난 그 문제의 깊이를 더욱 깊게 추정했다.
'비행기가 날기 위해선 뭐가 필요하지?'
날개. 그건 종이 비행기를 만들때 불가항력으로 계획된 것이다.
그 다음은 양력. 그렇다.
비행기는 날아오를때 플랩을 한껏 뒤로 젖혀 육중한 동체를 띄우는데
필요한 양력을 만든다. 그만큼의 양력을 만들어내려면 활주로를 길게
세워야 하고, 또 속도를 높여 커다란 양력의 원동력을 만들어내야 한
다. 하지만 이것은 또 보이지 않는 걸림돌에 가로막혀 애초에 성립될
수 없는 하나의 '계산'으로 화한다. 답이 없는 계산인 것이다.
이 곳은 공간이 제약된 '집'이란 곳이다. 그곳 중에서도 다양한 크기
가 존재하는 '집'들중, 인간이 생활할 수 있는 기본 요건을 제외하고
발을 뻗을 만한 공간조차 존재하지 않는 '집'인 것이다. 그런데 그러
한 곳에서 고작 종이 비행기를 하나 날리기 위하여 길다란 활주로를
만들어야 하다니. 그것은 애초에 실현될 수 없는 계획이나 마찬가지
였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양력. 이것은 활주로가 없어도 바람이란 조건만
충족된다면 언제든지 만들어낼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 난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어제꼈다. 개발아파트의 고층에서는 세찬
바람이 자주 분다. 이것이 바로 양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종이 비행기는 벌써부터 날개를 펄럭거리기 시작했다. 날아오를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이다. 난 종이 비행기를 허공으로 향해 살짝 던
졌다.
하지만 그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비둘기 떼가 종이 비행기를 뒤덮었
다.
3.
4번 트랙이 시디 플레이어 안에서 고요히 돌아가고 있다. 귀가 도중
지하철 안에서 느긋하게 감상하는 음악은 역시 잠을 곤히 청한다. 부
드러운 이어폰은 귓가를 간지럽혀 웃지 않아도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머무르게 하고 지하철 특유의 규칙적인 진동은 마치 어렸을 적에 어
머니께서 자주 불러주셨던 자장가의 리듬과 흡사하여 금방 그 시절을
상기해내며 잠에 빠져버릴 것만 같다. 게다가 사람도 얼마 없는 막차
직전의 지하철은 그야말로 졸음의 메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
다.
난 잠시 이어폰을 빼고 졸린 눈을 비비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내가
탑승한 칸에는 나를 제외하고 모두 다섯 명의 승객들이 있었는데, 그
들은 모두 하나같이 병든 닭처럼 고개를 숙이며 꾸벅꾸벅 졸고 있었
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조는 모습을 보아하니 나도 그 일원 중 한
명이 되어야 할 의무감마저 떠오르는 바람에 난 다시 이어폰을 꽂고
고개를 숙였다.
[ 넌~ 왜 가버린 거니~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다시 내 앞에 돌아온
다~ 말해버리고~ ]
그룹 보컬의 열정적인 보이스가 귓가를 자극했다. 이게 아마 이 그룹
의 타이틀 곡이었나? 제목이 '가버린 너'였을 것 같은데…난 잠시 노
래의 제목이 헷갈리는 바람에 시디 케이스를 꺼내려 가방을 만지작거
렸다. 그러나 분명히 내 손 끝에 만져저야 할 네모난 시디 케이스의
형태가 와닿지 않았다. 난 순간 책 속에 케이스가 겹쳐져 있나 하는
가능성을 생각했고, 가방 속에 손을 넣어 케이스를 찾으려 했지만 문
득 뇌리를 스쳐가는 '귀찮음'이란 감정이 내 손의 움직임을 억제했다
. 그래, 나중에 집에가면 가방 정리 할텐데 뭐. 그때 찾으면 되지.
다시 난 노래에 집중하며 고개를 숙였다. 덜컹, 덜컹. 일괄적인 지하
철의 리듬이 몸에 집중되며 나른한 기분을 들게 만들었다. 그에 따라
내 감긴 눈꺼풀이 조금씩 무거워지며 이윽고는 잠을 청하게 되었다.
나 말고는 승객이 몇 없는 텅 빈 지하철이라 난 팔걸이에 팔꿈치를
턱 얹은 다음 그 위에 얼굴을 눕히고 깊은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뜨거운 숨이 옷감에 스며들었다가 다시 내뱉기를 수십번. 난 점차 그
숨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잠이 들어버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으
로는 온몸의 피곤을 털어낼 수 없을 것만 같아 몸의 자세를 잠시 뒤
척이곤 다시 잠을 청했다. 완전히 편안한 자세로 말 그대로, '잠이
솔솔 오는' 가운데 난 갑자기 눈꺼풀을 떴다.
"……?"
…뭔가가 내 머리카락을 건드린 것 같은데, 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
지만 그것은 지금 내 머리 위를 배회하고 있는 파리의 날개짓 때문이
었다. 난 잇소리를 내곤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
…….
……그만하란 말야!
"…!"
난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저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고
개가 부서지도록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번에도 내 잠을 깨워버릴
만큼의 무언가가 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하지만 분명
아까처럼 그것이 파리의 날갯짓이였다던가 순간 불어온 바람이었다던
가 같이 대체할 것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내 주위엔 반
경 5미터 이내로 절대 접근하지 않는 타인 뿐이었다. 그러므로 난 또
다시 의문에 빠졌다. '뭐야, 대체?' 확언할 수 없는 대답뿐이 머리속
에서 맴돌았고 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발견
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는 아직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지
않았다. 그런데 그건 대체 뭐란 말야? 난 귓가에 꽂힌 이어폰을 빼고
잠을 청하려 했다.
세이브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적을 만났을 때 마다 손바닥에 땀이
맺힌다. 그리고 나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적을 물리쳤을 때
비로소 내 손에 땀이 맺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세이브를 해야지
, 생각해도 게임에 열중하다보면 어느새 그 사실을 잊어버리게 되고
또 세이브를 하지 않은 상태로 적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게 팽팽한
긴장감으로 일관되는 게임은 내 신경을 곧추세우기에 충분한 요소로
화하고 이것이 바로 내가 게임에 열중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
꼬르륵. 배고프다. 밥을 먹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적과 전투 중이
다. 이 자리를 떠나면 내 캐릭터가 죽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자리를
떠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밥은 포기다. 다시 게임에 열중한다.
열광참마선을 구사했다.
적은 그것을 알아채고 피하려했지만 워낙에 회피력이 부족한 녀석인
지라 그 공격을 정면으로 맞아버리고 만다. 녀석은 그대로 절명했다.
이번엔 마법사 캐릭터를 앞으로 내새워 매직 미사일을 구사했다. 여
러 발의 밝은 빛들이 마법사 캐릭터의 몸으로부터 쏘아져 나갔다. 그
것은 내가 지목한 적 캐릭터 한 명을 향하여 집중적으로 날아들었다.
무려 데미지 200을 기록하며 또 다시 적 캐릭터 한 명이 줄었다.
쨍그랑.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였다. 하지만 게임의 상황은 적과의 전
투다. 깨지는 소리가 날리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바깥으로부터 들려
온 소리다. 내 방과 철저히 단절되어있는 문 밖으로 누나의 비명소리
가 들렸다. 아버지는 안 계시나? "꺄악!" 누나는 또 다시 비명을 질
렀다. 애타는 비명소리다. 그러고 보니 '케이시'(내가 지금 플레이
하고 있는 게임의 여주인공이다)가 주인공을 부를때도 저렇게 애타는
목소리였지. 난 다시 게임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도둑이야!" 아직까
지도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운 좋은 녀석이 한 명 있었다. 그 녀석은
자신의 동료들이 모두 내 캐릭터의 손에 죽자 갑자기 분노치가 상승
했다. 순식간에 100을 달성한(이 게임에선 데미지와 HP, MP를 제외한
모든 능력치가 100이 한계다)녀석은 품 속에서 다마스커스를 꺼내더
니 내 캐릭터들 중에서 가장 HP가 적은 마법사에게로 달려들었다. 그
러면서 화면이 전환되어 배틀 장면으로 바뀌었다.
마법사와 적의 일대 일 상황이었다. 이렇게 되면 정면으로 붙는 것은
곧 '죽음'이나 마찬가지다. 멀리서 장거리 공격으로 견제하여 일정하
게 HP를 떨어뜨린 다음에 큰 마법으로 끝장을 봐야 한다. 그렇게 생
각하며 MP보충 포션을 쓰고 턴을 끝냈다. 적 턴이 돌아오자 난 경악
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무슨 적의 움직임이 전 맵을 전부 돌아다닐
수 있단 말인가? 순간, 난 녀석이 분노치가 100이라는 사실을 잊고있
었다. "쓰읍." 잇 소리를 내며 적이 내 곁으로 다가와 어떤 기술을
구사할 것인가에 대해 관심이 온통 쏠렸다. "아, 아아! 안돼요! 제발
이러지 말아요!" "흐흐흐…돈은 어디있어…? 말 안하면…알지?" 밖에
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거야?
순간 마법사 캐릭터 곁으로 바싹 다가온 적 캐릭터의 몸이 붉은 색으
로 빛나자 내 입술 사이에선 절로 '쌍'소리가 새어나왔다. 저 기술은
'연속베기 3초식'이 아닌가? 순식간에 마법사 캐릭터의 HP가 반 이상
으로 줄어들었다. "아악! 선호야!" "선호? 그 새낀 또 누구야…?" 거
정말 시끄럽게 구네.
어느새 내 턴이 돌아왔다. 난 TP가 되는대로 포션을 썼다. 하지만 얼
마 지나지 않아 포션은 전부 떨어지고 마지막 포션만이 남아버리는
절박한 상황에 임박하고 말았다. "하악…하아… 제, 제발 이러지 마,
말아…" "후후…어때…기분 좋지 않아?" "하아…아아!" 뭐야? 뭐가
이렇게 야릇해?
끝으로 난 더 이상 포션을 낭비할 수 없어 전투를 포기하려 했다. 뭐
, 세이브 파일이 있으니까. 그리고 전투는 적의 승리로 끝이 났고 게
임오버라는 8개의 알파벳이 화면을 가득 메웠다.
다시 게임의 초기 화면이 떴고 난 당연시 로드(Load)선택했다. 그렇
지만 로드 목록엔 세이브 파일이 딱 하나 밖에 없었다. 내가 이 게임
을 처음 시작했을 때, 기록했던 세이브 파일. 그럼 여태까지 게임을
노 세이브로 진행했다는 소리 아닌가? 제기랄!
덜컥! 신경질 적으로 문을 열어제꼈다.
"이게 다 너희들 때문 아냐! 이상 야릇한 신음소리나 내니까 집중이
이 안되잖아! 집중이!"
난 벗은 몸의 남자와 '여자'를 밟으며 광분했다.
대체 내가 왜 그토록 광분했는지 그 이유조차도 제대로 상기되지 않
았다.
아마도, 그것은…상실되었나보다.
5.
한 책방이 있었다. 그곳은 평소 내가 구할 수 없던 희귀본들을 그 어
느 서점보다도 많이 배치해 놓는, 몇 안되는 서점이라 난 그곳을 자
주 애용하곤 했다. 오늘도 전공 문학 책을 구입하러 난 여느때와 다
름없이 그 서점으로 발길을 옮겼다. 뭐, 집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 곳
이라서 난 간편한 반바지와 티셔츠 차림으로 그 서점에 자주 들르곤
했었다. 그래서 서점 주인과도 두터운 친분을 쌓아 자주 술잔도 같이
기울이고, 서점 주인이 기분 좋을 땐 적당히 아부의 말도 섞어준다면
책 값을 깎아주기도 하는, 그런 이용하기 편한 서점이었다.
막 빨간 신호로 바뀌기 전, 깜빡이는 횡단보도의 신호등을 발견한 난
슬리퍼를 끌며 급히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곳을 반쯤 건너자 횡단보
도의 신호등이 붉은 색으로 바뀌었지만 내가 보행하는데 그리 불편한
지장은 없었다. 횡단보도를 건너 육교 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다 보면
방금 전 언급한 그 책방이 나온다.
딸랑. 응? 방울소리가 명쾌한 걸 보니 새걸로 갈은 모양이다. 방울이
낡아 투박한 소리만 나더니, 아주 좋은걸.
"어서오세요."
난 평소 그 책방에서 듣지 못했던 아리따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오
혹해서 카운터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곳엔 언제나 넉넉한
웃음으로 날 맞아주던 주인 아저씨의 인상과는 전혀 다른, 조금은 도
도해보일지도 모를 법한 하얀 피부의 여성이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난 책방을 기웃거리며 주인 아저씨가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
하고, 의심스럽게 말했다.
"그 전 주인 아저씨는 어디 가셨나요? 이상하게 안 보이시네…"
"…아버지 말씀이신가요? 아버지께선 지금 몸이 안 좋으셔서 집에서
쉬고 계세요."
"…아아, 그럼 그 분의 따님이신가 보죠?"
"네…"
이건 듣도 보도 못한 소식이었다. 그 아저씨에게 미인 축에 끼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딸이 있었다니. 난 괜시리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
시키곤 서둘러 전공 책을 골라보기 시작했다.
"…뭐…찾으시는 책 있으세요?"
"네?! 아, 아닙니다…제가 찾겠습니다."
"말씀하세요. 제가 찾아드릴게요."
나 이거 참…난 난감한 나머지 생각나는 대로 입을 열어 말해버렸다.
"그, 그럼…'반(反)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비판'이란 책 있나요?"
"…잠시만요…"
그녀는 컴퓨터로 눈을 돌려 키보드를 두드리더니 곧 대답했다.
"아, 있네요. 어제 한 부 들어왔어요."
"그래요? 어딨죠?"
"아…제가 꺼내드릴게요."
그녀가 카운터에서 빠져나와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난 순간적으로 몸
을 움츠렸고, 그 때문에 그녀는 내게 착 달라붙어버렸다. 순식간에
난 좁은 공간의 여유도 없이 그녀와 책장 사이에 끼어 옴짝달싹할 수
도 없게 되어버렸다. 제기랄, 미인이 옆에 있어서 좋긴 한데 이건 너
무하군.
"저, 저기…"
"조금만 참으세요. 거의 다 꺼냈어요."
아, 이거야 원. 난 한숨을 푸욱 내쉬며 여전히 책장에 몸을 밀착시키
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있으려니… 순간, 내 콧등 위로 스쳐가는
달콤한 향기가 느껴졌다. 그것은…바로 그녀의 향기였다.
"아…"
"네?"
"아, 아닙니다…!"
난 나도 모르게 향기에 혹하여 내뱉은 신음을 그녀가 듣고 되물어오
자 당황하여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이건 내 욕망을 끊임없이 자극
하기에 충분한 소지가 있는 요소였다. 으으, 참아야 하는데…
"아, 저, 저…잠시만…"
그녀가 아직까지도 책을 꺼내려 하는 사이, 난 몸을 어떻게든 움직여
그 틈을 빠져나오려 시도했다. 그런데 그 순간, 내 손끝에 걸려드는
부드러운 느낌의 그 무언가가 있었다. 그 무언가의 느낌은 내가 일생
동안 느낀 일연의 감정을 일순간에 무너뜨리고도 남을, 충격적이고도
몽환적인 것이었다.
"아……"
그 때부터 난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욕망을 억누르지 못한 것이다.
한동안 정신을 잃고서 되차려보니 난 어느새 그녀의 스커트를 배 위로
반 쯤 올리고, 그녀를 범하기 직전에 놓여있었다. 벌써 그녀는 내가
취한 자극적인 행동에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아아…"
그녀는 참을 수 없다는 손길로 내 목을 끌어당겼고, 난 이제와서 이
행위를 멈출 수는 없을 것만 같은 크나큰 욕망의 손길을 느꼈다. 나
또한 벨트를 풀고 잠자고 있던 또 다른 나를 꺼낼 즈음…
"……!"
그녀의 발 밑에 흐르는 붉은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방금
전 생명의 소진을 다한 흔적이 역력하게 배어있는 인간의 '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