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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부동산 원문보기 글쓴이: 정직이최선
한국과 중국의 반은 같은 민족이다...
중국 시안시 서쪽은 요나라로 추정되며 나머지는 조선으로 보인다. 면적은
요나라와 조선의 크기가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일본은 유대자본의 지원으로 한국과 중국을 침략한다.
이후 일본은 한국인의 학자들을 등용해 역사를 말살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이후 조선의 역사는 바뀌게 된다...
우리는 중국을 욕하지 말고 진실 된 역사를 같이 탐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베 노부유키와 사이토 마코토는 찬란했던 조선의 영광과
역사의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은 자신들의 조상에 대한 자부심을 갖지 못하게 함과 동시에 실제 역사를 말살하는 것입니다.
역사를 잊은 국민에겐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베 노부유키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이란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데, 저선민에 찬란하고 위대했던 예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도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하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략할 것이다.
사이토 마코토
먼저 조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역사와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듬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잃게 하고 조선인의 조상과 선인의 무위, 무능, 악행을 들쳐내어 가르침으로써 조선 청소년들이
부조를 멸시하도록 만들고, 결과로 조선 청소년들이 자국의 인물과 사적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하여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한 후, 그때에 일본 사적, 일본 인물, 일본 문화를 교육하면 동화의 효과가 클 것이다.
이것이 조선인을 반(半) 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이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offee2zip&logNo=220642256372
조선왕조(朝鮮王朝), 一百萬 大軍을 운용(運用)했는가?
○ 주관식(主觀式) 문제(問題) :「조선왕조(朝鮮王朝)」란?
「개국시조(開國始祖) 단군(檀君)의 ‘고조선(古朝鮮)’으로부터, 근대(近代)라 할 수 있는 고황제(高皇帝)의 ‘조선왕조(朝鮮王朝)’시대까지를 총 망라(網羅)한 한민족(韓民族)의 옛 봉건국가(封建國家)를 말하는 것이다.」라고 설명(說明)한다면 정답(正答)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고조선(古朝鮮)으로부터 고황제(高皇帝)사이(間) 속으로 들어가 보면 :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세기엔 너무 많은 옛 왕조(王朝)들이 영겁(永劫)의 세월(歲月) 뒤편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例)를 든다면, 삼한(三韓)속에는 무려 78개 나라(國)가 있었다고 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78개 나라(國)에 포함(包含)되지 않은 나라 이름들이 또한 많다. 삼한(三韓)을 이은 것이 삼국(三國)이다. 곧 ‘고구려(高駒驪)·백제(百濟)·신라(新羅)’이다. 이들 삼국(三國)은 또 삼한(三韓)속에 포함되지 않았던 많은 나라(國)들을 복속(服屬)시키고,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성장(成長)한다.
이어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통일환영(統一寰瀛)을 이뤘다고 말하는데, 이를 삼한통일(三韓統一) 또는 천하통일(天下統一)이다.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이 떠받들고 있는 소위(所謂) 천자국(天子國)들도 “통일환영(統一寰瀛)”이란 말을 쓰지 않았다.
○ 高麗史節要 成宗 / 壬午 元年【AD 982】/ 정광 행선관어사 상주국(正匡行選官御事上柱國) 최승로(崔承老)가 상서(上書)에서 말하기를 :
《於是,値金雞自滅之期,乘丙鹿再興之運,不離鄕井,便作闕庭,定遼浿之驚波,得秦韓之舊地,十有九載,統一寰瀛,可謂功莫高矣. : 이에 금계(金鷄:新羅)가 멸망하는 시기를 만나고, 병록(麗 :高駒驪)이 다시 일어나는 운수를 타고 나서, 향리(鄕井:鄕里)를 떠나지 않고, 편리하게 궐정(闕庭:조정)의 대궐이 되어, 요수(遼水)ㆍ패수(浿水)의 놀란 물결을 안정시키고, 진한(秦韓)의 옛 땅을 얻어서, 19년 만에 천하(天下)통일(統一)하였으니, 이보다 높은 공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➊ 요수(遼水)와 패수(浿水) : 우리 카페(Cafe)에서 늘 주장(主張)하고 있는 것이다. 곧 “요수(遼水)와 패수(浿水)”는 대륙(大陸) 땅의 물줄기를 말하는 것이고, 반도(半島) 땅과는 전혀 관계(關係)없다.
【수경(水經) : 서한(西漢) 또는 동한(東漢) ‘상흠(桑欽)’이 저자(著者)라고 전하는데, 진(晉)의 곽박(郭璞)이 저자(著者)라고도 한다. 수경주(水經注) : 북위(北魏) 역도원(酈道元)이 편집(編輯)했다고 전해진다.】
참고(參考)로 인용(引用)한 것처럼, 수경(水經) 또는 이를 주석(注釋)한 수경주(水經注)는 대륙(大陸) 땅의 물줄기를 이야기한 것이다. 반도(半島)나 그 북방지대(北方地帶)와는 손톱만 큼의 관계(關係)도 없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 보듯, 수십(數十)년 전쟁(戰爭)으로 요수(遼水)와 패수(浿水)도 편안(便安)할 날이 없었다는 뜻일 게다.
➋ 덧붙여 말하기를 “진한(秦韓)의 구지(舊地)를 얻었다.”고 하였다. 도대체 “반도(半島) 땅, 어디가 옛 진한(秦韓)의 구지(舊地)인가?” 진한(秦韓)이란 곧 진(秦)을 말하는 것으로, 이곳이 진한(秦韓)의 옛 땅(舊地)이 될 수 있을까?
섬서성(陝西省) 임동현(臨潼縣)의 병마용(兵馬俑) 갱(坑)을 보면, 하나같이 조선(朝鮮)의 상투【추계(推髻), 수계(竪髻), 추결(魋結), 쌍상투(雙髻)등】를 하고 있다. 곧 그곳이 조선의 땅이었다는 이야기다. 진(秦)은 곧 진한(秦韓)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갱(坑)안의 병마용(兵馬俑) / 사진출처 : Daum 이미지
※ 갱(坑)안의 병마용(兵馬俑) / 사진출처 : Daum 이미지
➌ ‘통일환영(統一環瀛)=삼한통일(三韓統一)=천하통일(天下統一)’이다.「환(環)」이란, 기내(畿內)지방을 말하는 것으로, 천자가 직할(直轄)하던 영지(領地)를 말하는 것이고, 「영(瀛)」이란, ‘기내(畿內)=기내(圻內)’밖의 넓고 넓은 땅과 바다까지 모두를 하나로 하였다는 뜻이다.
시황(始皇)의 천하통일(天下統一)이란 지들끼리 말하는 천하통일(天下統一)일 뿐이다. 겨우 ‘한(韓)ㆍ위(魏)ㆍ초(楚)ㆍ연(燕)ㆍ조(趙)ㆍ제(齊)’나라 등을 무너뜨리고, 진(秦)나라 영토(領土)로 편입(編入)시켰다는 것일 뿐, “BC 221-BC207” 년까지 겨우 14년간을 영위(營爲)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에 의심(疑心)을 품게 된 사건(事件)이 바로 섬서성(陝西省) 임동현(臨潼縣)에서 발견(發見)되어 발굴(發掘)된 병마용(兵馬俑) 갱(坑)이다. 이곳에서 발굴(發掘)된 수많은 도용(陶俑)들은 조선인(朝鮮人)의 “상투”를 하고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다. 더불어 “진(秦)”이란 나라가 정녕 있었는가? 하는 정도(程度)에 이르렀다.
천하통일(天下統一)을 이룬 이는, 「고려(高麗)태조(太祖)가 유일무이(唯一無二)했다.」고 보아진다.
○ 조선왕조(朝鮮王朝)가 백만 대군(百萬大軍)을 운용(運用)했다고 할 때, 조선(朝鮮)의 인구(人口)는 몇 명이었으며, 가구(家口)수는 과연(果然) 얼마였을까? 백만 대군(百萬大軍)을 운용(運用)함에 있어 그 비용(費用)까지를 생각한다면 당시(當時)의 대제국(大帝國)은, 조선(朝鮮)이 유일무이(唯一無二)했다고 볼 수 있다.
고황제(高皇帝)는, 위에서 말한 ‘대제국(大帝國) 고려(高麗)’를 뒤엎고, 역성(易姓)혁명(革命)이었지만 선양(禪讓)이라는 이름을 빌려 이어 받고, 그의 후손(後孫)들인 ‘세종(世宗)·세조(世祖)·예종(睿宗)·성종(成宗)’으로 이어지는 시대(時代)에는 더 넓은 영토(領土)개척(開拓)이 있었다고, 역사서(歷史書)는 전한다.
“1백만(一百萬) 대군(大軍)을 운용(運用)했다.” 는 말에서, 그 후속부대(後屬部隊)인 군수지원(軍需支援)까지를 감안(勘案)한다면, 실제(實際)로는 수백만(數百萬) 명(名)이 동원(動員)되어야 “일백(一百)만 대군(大軍)”을 운용(運用), 유지(維持)할 수 있게 된다.
이게 정말 사실(事實)일 수 있을까? 그렇다. 사실(事實)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왕조실록(王朝實錄)속에 생생(生生)하게 기록(記錄)되어 있다. 지금으로부터 “550년 전(前)”의 조선왕조(朝鮮王朝) 시절(時節)로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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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종실록 6권, 예종 1년 6월 29일 辛巳 / 1469년 명 성화(成化) 5년 : 〈工曹判書梁誠之上書曰 : 공조판서(工曹判書)양성지(梁誠之)가 상서하였는데, 이러하였다.〉
《一, 議 長 墻. : 1. 장장(長墻)에 대한 의논입니다. 臣竊惟本國,表裏山河,幅幾於萬里,戶數百萬,兵一百萬.中略. :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본국은 안팎이 산과 강으로 되어 있어, 넓이가 몇 만리(萬里)이고, 호수(戶數)가 1백만이고, 군사가 1백만입니다. 前此本國平安之民,逃賦役者,流入於彼,東自開州,西至遼河,南至于海,蓋州聚落相望,不知幾千萬人.中略. : 이보다 앞서 본국 평안도(平安道)의 백성 가운데 부역(賦役)에서 도망한 자가 저곳에 흘러 들어갔으니, 동쪽으로는 개주(開州)로부터 서쪽으로는 요하(遼河)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바다에 이르러, 대개 고을의 취락(聚落)이 서로 바라보이는데, 몇 천만(千萬) 명이나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長墻雖自遼河至于鴨綠,猶有可慮,若至于碧潼之境山羊湖之間,則是東韓之地,中略. : 장장(長墻)이 비록 요하(遼河)에서 압록강(鴨綠江)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염려할 만한 것이 있는데, 만약 벽동(碧潼)의 경계(境界)인 산양호(山羊湖) 사이에 이른다면, 이는 동한(東韓)의 땅이다. 중략(中略).》
(1)〈臣竊惟本國,表裏山河,幅幾於萬里,戶數百萬,兵一百萬.中略. :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본국은 안팎이 산과 강으로 되어 있어, 넓이가 몇 만 리(萬里)이고, 호수(戶數)가 1백만이고, 군사가 1백만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인터넷(Internet)등의 많은 공간(空間)에서, 고전번역원(古典飜譯院)의 번역(飜譯)을 인용(引用), 참고(參考)하고 있기 때문에, 이게 정말 가능(可能)했던 일일까? ‘펑’이다? 등등 별의별 이야기들이 인구회자(人口膾炙)된다. 인터넷(Internet)등지에 워낙 많이 널려있는 글이어서, 정리(整理)하고 싶지 않았지만, 확실(確實)하게 해 둬야 할 것은 확실(確實)하게 정리(整理)를 해야 할 것 같아, 주제(主題)로 한 것이다.
➊ 「表 裏 山 河, 幅 幾 於 萬 里 : 안팎이 산과 강으로 되어 있어, 넓이가 몇 만 리(萬里)이다.」라고 하였는데,
네이버한자사전 :〈幅〉 : 디지털 한자사전 e-한자 / 1. 폭, 너비 2. 넓이 3. 가, 가장자리 4. 도량(度量) 5. 천, 포백(布帛: 베와 비단) 6. 폭(포목을 세는 단위) 7. 족자(簇子)
a. 행전(行纏: 무릎 아래에 매는 물건) (핍)
b. 붙이다 (핍)
c. 두건(頭巾) (복)
형성문자 / 뜻을 나타내는 수건건(巾☞옷감, 헝겊)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畐(복☞폭)으로 이루어짐. 옷감의 폭, 너비의 뜻. 전(轉)하여 단순(單純)히 폭의 뜻으로 쓰임.
➋ 「幾 於 萬 里 : 수(數) 만리(萬里)이다.」여기서 ‘幾’자는 ‘몇 기(幾)’ 이다. 이건 논란의 대상(對象)이 될 수 없다. 또 따질 필요도 없다. 예를 들어 “일만리(一萬里)”라면 앞에 ‘기(幾)자와 어조사(語助辭)’를 보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수만리(數萬里)에 달한다.’ 는 뜻이다.
➌ 「戶 數 百 萬, 兵 一 百 萬 : 호수(戶數)가 1백만이고, 군사가 1백만입니다.」라고 하였는데,
「戶 數 百 萬, 兵 一 百 萬 : 호(戶)가 수백만(數百萬)이고, 병사(兵士)가 1백만(百萬)이다.」 라고 번역(飜譯)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라고 본다.
왜냐하면「1백만(百萬)호(戶)에 1백만(百萬) 병사(兵士)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더하여 병제(兵制)를 보면 : 3호 중에, 1호(戶)에서 병사(兵士)가 징발(徵發)되고, 1호(戶)는 농사(農事)를, 1호(戶)는 부역(賦役)으로 나라의 역(役)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병사(兵士)가 1백만(百萬)이라고 했을 때, 호수(戶數)는 최소한 3백만 호(戶) 이상(以上)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 징발(徵發)되지 않는 사대부가(士大夫家)·왕족(王族)·천민(天民)등의 예외(例外)까지를 합한다면 : 3백만 호(戶), 그 이상(以上)의 가구(戶)가 있어야 한다.
이것을 인구(人口)로 환산(換算)하면 : 대가족(大家族)체제(體制)였음을 감안(勘案)하지 않더라도 5인 가족(家族)으로 계산(計算)해도, “일천오백만(一千五百萬)” 명(名), 그 이상(以上)의 인구(人口)가 살았었다고 보아야 한다.
➍ 위에서 보다시피 : 신하(臣下)인 양성지(梁誠之)가 군주(君主)인 예종(睿宗)에게, 왕조(王朝)를 통치(統治)함에 있어 꼭 필요(必要)하고 개선(改善)해야 할 28가지 항목(項目)을 상소(上疏)로써 말하고 있는데, 이때가 “서력(西曆) 1,469년”이다.
당시(當時)의 조선왕조(朝鮮王朝)는,
영토(領土)의 폭(幅)은 수만리(數萬里)에 달했다.
이 넓은 땅을 통치하는데 1백만(百萬) 대군(大軍)을 운용(運用)하였다.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인구(人口)는 수천만(數千萬)명 그 이상(以上)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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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말하는 내용(內容)이, 36년 일제(日帝)의 식민지(植民地) 시절(時節), 많은 부분(部分)이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 속에서도 「미처 고치지 못했다거나 또는 어떤 연유(緣由)로 인하여 고치지 못한 구절(句節)속엔 위에서 보는 것과 같이 반도조선(半島朝鮮)과는 전혀 관계(關係)없을 수밖에 없는 기록(記錄)들이 생생(生生)하게 살아있다.」는 것이다.
또 중요(重要)한 것은, 그 기록(記錄)을 어떻게 해설(解說)하느냐에 따라, 기존(旣存)의 해설(解說)과는 전혀 다른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들을 알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다.
2018년 09월 10일 〈글쓴이 : 문무(文武)〉
http://cafe.daum.net/greatchosunsa/75XT/9782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군기(檀君紀) 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원문] 當是之時, 檀君之化, 洽被四土, 北曁大荒, 西率猰貐, 南至海岱, 東窮蒼海, 聲敎之漸, 偉乎廣矣. 乃區劃天下之地, 以封勳戚. * 유(貐)자 앞부수가 犭임 [해설] 당시에 단군의 교화는 사방에 두루 미쳐 북으로는 대황(大荒)에 다다르고 서쪽은 알유(猰貐)를 거느리며, 남쪽으로 회대(淮岱)의 땅에 이르고 동으로는 창해(蒼海)에 닿으니, 가르침이 점차 퍼져나감은 위대하고도 넓은 것이었다. 이에 천하의 땅을 구분하여 나누고 공훈이 있는 친족에게 주어 제후로 삼았다. (중략)
이와 같이 단군조선에 대한 강역기록이 동서남북 사방 개념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북쪽 대황(大荒)은 고비사막 북쪽을 연하는 지역, 서쪽 알유(猰貐)는 산서성, 섬서성 지역, 남쪽 회대(淮岱)는 회수와 태산 지역, 동쪽 창해(蒼海)는 태평양. * 알유(猰貐) : 하(夏)나라 때는 훈육(獯鬻), 은(殷)나라 때는 험윤(獫狁), 진(秦)․한(漢) 때는 흉노(匈奴)라 함 이를 지도에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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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1670년대 권람선생이 기록한 대조선의 강역을 살펴보자
▲ 규원사화에 기록된 대조선의 강역 원문
"무릇 조선의 땅은 북으로 대황(大荒)과 연결되어 있으니 곧 얼어붙은 하늘과 빙판 같은 땅이 우리의 퇴로를 끊고 있고, 서쪽으로는 몽고와 접하니 만리에 뻗친 사막이 우리의 왼쪽으로 뻗은 팔뚝을 끊고 있으며, 서남으로는 한나라 땅과 인접하여 있으나 태산의 험준함이나 장강의 큰 물줄기 같은 경계가 없기에 곧 그 형세가 나아가 공격하기는 쉬우나 지켜 방어하기는 어려우며, 동남으로는 큰 바다에 가로막혀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땅이다."
*대황은 고비사막 북쪽을 연하는 지역
*얼어붙은 하늘과 빙판은 현재의 사하공화국일대와 북극
*현 몽고는 이동시킨 국가. 당시 몽고는 사하공화국 서쪽에 있었음.
*만리사막은 중공 황화강 서쪽부터 시작되는 사막
*한나라는 오랑캐를 뜻하는 漢으로 당시는 서구양키들을 뜻함
이를 강역으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참고로 1700년대 중반까지 대조선은 3만리강역이었다.
대조선연방이 해체될때는 1만리 강역이었름.
▲ 규원사화 기록을 근거로 한 대조선의 강역도
▲ 대조선련방 해체시 강역를 나타냄
국립중앙도서관 고서 귀중본실에 보관중인 진본 규원사화의 기록에 의하면 지도에 표시된 땅이 모조리 대조선의 영향권 내에 있었다는 말이다. 과연 1675년에 북애노인이 기록으로 남겨 전하고자 했던 그 역사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일까? 이 기록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언젠가는 밝혀야할 그져 놀라운 기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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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장개석) 1928년생 마오쩌둥(모텍동) 1926년생
중국은 다민족 국가로 46이상의 민족이 있다고 한다.
중국의 배우는 글(영어식굴절어)이 통일되는 것은 장제스, 모텍동때의 일이다.
장제스 때에 많은 부분의 역사가 바뀌었다고 본다.
일제 식민지에 역사를 바꾼 것처럼..(일본 막부시대부터 유대금융가가 일본지원)
이것이 분열과 역사를 말살하는 유대금융의 계략이 아닐까 생각한다.
고구려 성(지금의 사단, 여단)과 자급자족 집단인 마을들.
요나라에는 성이 153개가 있고 발해는 망할때 103개였다. 고구려는 176개였다. 즉 고구려가 요나라보다 성의 갯수가 많으니 요나라보다 인구가 적다고 보기도 어렵다.
만리장성에 대하여.
https://tip.daum.net/question/40503061?q=%EB%A7%8C%EB%A6%AC%EC%9E%A5%EC%84%B1+%EC%A7%80%EB%8F%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