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터 [Luther, Martin, 1483.11.10~1546.2.18]
독일의 종교개혁자·신학자.
국적 독일
활동분야 종교
출생지 독일 작센안할트주 아이슬레벤
주요저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1520) 《로마서 강의》(1515∼1516)
1483년 11월 10일 작센안할트주 아이슬레벤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만스펠트로 이주하여 광부로 일하다가 광산업을 경영, 성공하여 중세 말에 한창 득세하던 시민계급의 한 사람이다. 그는 엄격한 가톨릭신앙의 소유자였고 자식의 교육에도 관심을 가졌다. 마르틴은 1501년 에르푸르트대학교에 입학, 1505년 일반 교양과정을 마치고 법률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자신의 삶과 구원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무렵 도보여행 중 낙뢰(落雷)를 만났을 때 함께 가던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그 해 7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업을 중단,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갔다. 계율에 따라 수도생활을 하며 1507년 사제(司祭)가 되고, 오컴주의 신학교육을 받아 수도회와 대학에서 중책을 맡게 되었다. 1511년 비텐베르크대학교로 옮겨, 1512년 신학박사가 되고 1513년부터 성서학 강의를 시작하였다.
그는 이때, 하느님은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접근하고 은혜를 베풀어 구원하는 신임을 재발견하였다. 이 결과가 당시 교회의 관습이 되어 있던 면죄부(免罪符) 판매에 대한 비판으로 1517년 ‘95개조 논제’가 나왔는데, 이것이 큰 파문을 일으켜 마침내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파문칙령(破門勅令)을 받았으나 불태워 버렸다.
1521년에는 신성로마제국 의회에 환문되어 그의 주장을 취소할 것을 강요당했으나 이를 거부, 제국에서 추방되는 처분을 받았다. 그로부터 9개월 동안 작센 선제후(選帝侯)의 비호 아래 바르트부르크성(城)에서 숨어 지내면서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였다. 이것이 독일어 통일에 크게 공헌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는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썼는데, 처음에는 멸시의 뜻으로 불리던 호칭이 마침내 통칭이 되어 ‘루터파 교회’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에서 파생된 과격파나 농민의 운동, 농민전쟁에 대해서는 성서 신앙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이들과는 분명한 구분을 지었다. 그 뒤 만년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교회와 종교개혁 좌파 사이에서 이들과 논쟁 ·대결하면서, 성서강의·설교·저작·성서번역 등에 헌신함으로써 종교개혁 운동을 추진하였는데, 영주(領主)들간의 분쟁 조정을 위하여 고향인 아이슬레벤에 갔다가, 병을 얻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업적은 대부분 문서 형태로 남아 있어, 원문의 큰 책이 100권(바이마르판 루터전집)에 이른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1520)는 《로마서 강의》(1515∼1516)와 함께 초기의 신학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루터는 상황 속에서 자기를 형성하고 발언하는 신학자였기 때문에, 만년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저서와 강의를 통하여 그의 사상을 남김없이 토로하였다.
그는 신학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철저한 은혜와 사랑에 두고, 인간은 이에 신앙으로써 응답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하느님께 반항하고 자기를 추구하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자유로운 군주’이면서 ‘섬기는 종’이 되는 것이며, 신앙의 응답을 통하여 자유로운 봉사, 이 세계와의 관계가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면에서는 특히 모든 직업을 신의 소명(召命)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 그 이후의 직업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더욱이 이러한 견해는 성서에만 그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실천한 것도 중요한데, 1525년 카타리나와 결혼한 것도 이같은 실천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정세 속에서 이러한 신앙적 주장을 관철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인데, 칼뱅이나 다른 종교개혁자와 함께 종교개혁을 르네상스와 함께 근세에의 전환점으로 만들었다.
기독교한국루터회 [基督敎韓國-會, The Lutheran Church in Korea]
루터(Martin Luther)의 가르침을 따르는 한국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한 교파.
구분 한국의 그리스도교 교파
설립연도 1958년
소재지 서울 송파구 신천동 7-20
설립목적 전도 및 한국교계 발전
주요활동 선교, 월간 《새생명》 발간, 컨콜디아사 운영, 베델성서 연구, 루터란 아워 방송, 루터신학대학교 설립 운영
규모 교회 32개, 교인수 5,000여 명, 교역자수 36명(2002)
루터교회는 신약·구약성서를 신앙과 생활의 절대규범으로 믿으며, 사도신경·니케아신경·아타나시우스신경·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및 《루터 소교리문답서》를 교리로 여기는 프로테스탄트교회의 한 교파를 말한다.한국에 루터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32년(순조 32)으로, 독일인 선교사가 원산도(元山島)에 상륙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실제적인 선교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미국의 루터교 미주리의회에서 선교사 3명을 파견한 1958년 1월의 일이다. 이듬해 2월 서울 YMCA 회의실에서 첫 모임을 갖고, 같은 해 5월 처음으로 세례 및 입교식을 가졌으며, 역시 같은 해 11월 기독교방송 전파를 이용해 '루터란아워' 방송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선교사업에 들어갔다.
이후 한국의 루터교회는 1969년까지 한국루터교선교부로 있다가, 1971년 한국루터교선교회로, 1973년 한국루터교회로 각각 이름이 바뀌었다가, 1980년부터 기독교한국루터회로 부르게 되었다. 1960년 5월 기독교 통신강좌 보급 및 컨콜디아출판사를 통한 문서선교를 시작하였고,
1961년 3월부터는 월간 《새생명》을 발간하였다. 1972년 루터교세계연맹(LWF)에 가입해 국제 교류를 시작하였고, 같은 해 국제루터교협의회(ILC)에도 가입하였다. 1981년 6월에는 경기도 용인시에 루터신학대학교를 설립해 전도사업과 지도자 양성을 위한 기초를 확립하였다.
총회는 의회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산하에 컨콜디아사·기독교통신강좌부· 사회사업부·루터란아워방송(국제복음방송)·베델성서연구원·루터신학대학교· 북방선교위원회 등이 있다. 2002년 현재 서울·부산·대구·대전·천안·인천 등에 32개 지역교회가 있으며, 교인수는 5,000여 명, 교역자수는 36명이다. 총회 본부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신천동 7-20번지에 있다.
http://www.sunslife.com/bbs/view.php?id=4001&no=91
------------------------------------------------
종교개혁자 루터의 생애와 사상
1.서론
1)루터의 생애
마틴 루터는 1483년 동부 독일의 작센주의 아이스레벤에서 하층민인 가난한 鑛夫의 아들로 태어 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강건함을 지닌 광부였고 어머니는 신앙이 절실한 분이였다.고 전하고 있다. 루터의 고향 아이스레벤은 남부 독일과 라인강 연안 지역에 인접해 있던 관계로 당시의 거대한 흐름인 知的 混亂과 經濟的 混亂에서 약간 비껴날 수 있었다.
루터는 만스펠드 등지의 市立學校(Stadtschule)를 거쳐 에어푸르트 대학에서 Magister artium까지 수학을 하였으며 그 이후 法學을 공부하려 하였으나 일련의 사건(그의 바로 옆에 떨어진 벼락에서 가까스로 살아나게 된 다음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을 하게 됐다.)을 겪은 후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직자로서의 자기 행로를 변형하여 그의 나이 22세인 1505년에 수도자의 생활을 시작하였고 속세를 완전히 떠난 모범적인 수도자로서 수도원의 생활을 하기 위하여 무척 힘겨워하며 성직자의 길을 가게되었고 그 이후 비텐베르크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획득하고 그곳에서 신학부 교수로 재직을 하며 지도자 계급까지 올라가게 된다.
루터는 선행을 강조하여 이신득의를 주장했으며 1517년 비텐베르크 교회의 문에“95개 조항”을 내걸고 종교개혁의 시발점을 이루는 근간을 이룬다. 그 당시는 교회의 걸립을 위해 교회의 신자들이나 일반인들에게 면죄부를 판매하는 일이 성행하였는데 그 와중에 심한 모순을 느꼈으며 이에 내걸었던“95개 조항”으로 인하여 문책과 함께 도망자의 길을 걷게 된다.
루터는 1520년 10월 10일에 그해 6월 15일에 교황 레오 10세에게서 “EXURGE, DOMINE”라는 특별교서(마틴 루터로 하여금 60일 이내에 그의 모든 견해를 공식으로 취소하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이단자로 판정할 것이다.)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성직자의 破門書를 공공장소에서 불태우며 더더욱 그의 투지를 강하게 보였다. 또한 그에 관한 문제의 그 위협 校書뿐만이 아니라 교회법령집, 기타 교황권을 지지하는 책과 문서들을 불태웠다. 그리하여 1521년 1월 3일 루터에 대한 파
마틴 루터 본인
문과 출교가 공식적으로 선포되었으며, 이렇게 하여 1517년 10월말에 한 무명의 수도사에 의해 비교적 조용히 시작된 한 사건이 그 3년 후에 걷잡을 수 없는 대 사건으로 진전됨 셈이 되었다.
1525-34년 사이 Warburgfh 도피하여 라틴어로 되어 있던 성경을 모국어인 독일어로 옮겨 적었다. 한편 이시기의 구텐베르그의 인쇄술의 발달은 성경을 대량으로 생산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1525년 결혼을 금기했던 성직자의 특권을 깬 카타리나 수녀와의 결혼은 성직자로서의 특권을 무너뜨리고 사회자체에도 개혁을 이루었으며 카타리나 수녀와의 사이에 2남 2녀의 자제를 두었다. 루터는 2중 적 성직자의 생활 또한 결혼을 통하여 모순을 극복하며 건강한 기독교적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하였으며 이에 대한 많은 언급을 하였다. “만인 제사장”을 부르짖어 누구 나가 다 제사장이 될 수 있다. 즉 누구나 가정을 가지면 가정을 이끄는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1532년 “뉘른베르그 평화협정”, 1536년 “비텐베르그 협약”의 성립은 프로테스탄트의 개신교회의 존립을 가능케 하였다. 구교에 의해 신교의 승인을 그의 생전에 보게되었으며 혁명적인 교육의 실천가였으나 개신교의 승인 뒤 그의 보수적인 성향의 성격을 보였다 한다. 당시는 시대사적으로 르네상스의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神本主義를 비난하던 인본주의 자들(에라스무스, 토마스아퀴나스)를 비난하며 신중심의 사고에서 인간중심적 사고로의 전환을 가져왔으며 이는 신본주의에서 人本主義와 성경중심으로 변하여 르네상스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다.
인본주의는 인간은 누구나가 이성의 힘을 지니고 있으며 이것을 개발하여야하고인간의“완전성”(Perfektilitt) 에의 도달가능성과 “가소성”(Bildsam-keit)을 인정하고 모든 이는 신 앞에 동등하다는 平等性을 강조하여 동등한 權利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되었다.
2)루터의 교육사상
루터는 인간이 이해에 있어 救援論的 입장에서 아직까지 기독교적, 중세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 하에 결국은 인간을 구원해야 한다는 구원론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인간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존재이며, 이때 구원은 전위적인 역사로서의 인간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으며 인간은 구원을 “삶”으로 표현하며 살아가는 존재이고 , 인간은 “영의 나라”와 “세상나라”에 동시에 속하면서 그 곳에서 신의 질서가 지배하도록 노력함으로써 신에게 봉사해야 하는 존재(하나님께 봉사 Gottes Dienst)라는 큰 목적을 가지고 있다.
루터에게 있어 교육이란?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선한행위”(Gutes Werk)는 구원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즉 율법(인간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인간관계에 있어서 올바른 행위를 하도록 하는일)을 지키는 것은 인간이 하나 복음(인간을 죄에서 자유롭게 하는일-구원)에 있어 구원을 받는 것은 신만이 할 수 있다는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보이고 있다.
루터는 그의 교육사상에서 “두 왕국 설”(Zwei-Regimenten-Lehre)- “영혼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는 모두 신의 질서에 의해지배되어야 하며, 바로 이 두 나라의 존립과 발전을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는“세상의 나라”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깨끗한 직업을 위한 직업교육을 통해 깨끗해 져야 한다는 것이다. 중세는 내세를 강조로 현세를 중시하지 않았으나 루터에 의해 현실적 세계 또한 강조 되었다.
“영혼의 나라”를 위한 교육이란- 목사와 평신도 모두에게 복음선포를 위한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복음”,즉 성서 원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古典語 敎育(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을 해야한다.
“세상의 나라”를 위한 교육이란- 세상 안에서의 질서를“지혜(Weisheit)”,“이성(Vernunft)”을 통해 유지하기 위한 능력의 배양을 하여야 한다는 것으로 “예술”과 “언어”- 7自由敎科(septem artes liberales)와 모국어 교육을 통하여 완성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왕국 설” 은 모두 교육에 있어 언어의 중시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Maxweber는 기독교 숭배의 나라들이 자본주의가 발달하였으며 개신교의 영향은 서구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훨씬 더 엄격하고 금욕적이었다 라 하였다. 루터는 모든 기독교인은 성서를 읽고 해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가르칠 수 있는 권리와 의무를 지니다라는“ 만인 제사장설”(Des allgemeine Priestertum)을 강조하였다. 또한 “공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는데 이는 문맹퇴치와 연결이 된다. 교육은 성서에 제시된바 “신의 명령”(Gottes Gebot), 그것도 최고의 명령(하나님의 진리가 세상에 드러나도록 하라는...) 이라 하였고, 교육은 자연의 법칙이 제시한 바 “인간의 책임”(인간은 先天的으로 자신의 자녀를 교육하고 양육해야 할 책임을 지니고 있다)라 하였다.
2.루터 신학의 특징
1) 호두의 핵을 탐구하는 신학
루터는 신학의 과제에 대하여 초기에 이미 1500년대에 대표적이었던 생각과는 다른 독자적인 이해를 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새로운 이해는 스콜라적 경향이나 또는 인문주의적인 경향과는 대립되는 것이라 할 수 는 없다. 루터는 가브리엘 빌(G. Biel)의 저서와 같은 많은 많은 스콜라 문헌들을 감명깊게 읽었으며, 수도원적이고 스콜라적인 신학의 새로운 경향들이 지닌 차이점도 익히 알고 있었다. 신학에 대한 루터의 새로운 이해가 곧 전통과의 완전한 결렬의 의미는 아니며 루터의 신학적 주제들이 전통이 했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겠다.
루터의 신학적 문제의 모든면은 인간의 구원 문제였다. 구원(Heil)의 문제와 그 확신을 주는 진리(Wahrheit)의 문제는 정말로 신학의 중심이어야만 한다라는 독자적인 방식으로 신학연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그와 친밀한 관계였던 아이제나흐 사제인 요한네스 브라운(Johannes Braun)에게 보내었던 1509년 3월 17일자 편지에는 “나는 처음으로 철학을 신학으로, 즉 호두의 핵을, 밀의 내부를, 그리고 골수를 연구하는 신학으로 바꾸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인간은 항상 자기 판단 속에서 스스로 속는다. 우리는 언제나 자상하게 인도하시는 그가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다.”라고 이렇게 쓰여있다.
루터는 1509년 3월 9일에 성서학사 학위(Baccalaureus bibicus)를 취득하였다. 그는 성서를 면밀히 주석 했으며 이때부터 철학과 신학에 눈이 떴을 거라는 걸 앞에 인용한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2)십자가 신학
종교개혁에 있어 루터가 사용한 가장 유명한 용어는‘십자가 신학’이라는 개념으로 이 용어는 1518년에 창안하여 여러 군데에서 사용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십자가 신학’이라는 용어는 스콜라철학과 에라스무스의 인문주의를 겨냥한 것이다. 어거스틴을 추구하는 새로운 신학적 노력과 스콜라신학에 대한 반대 및 성서 연구를 장려했다는 이유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1517년 9월 4일자 ‘스콜라 신학에 반대하는 논제’와 관련해 1517년 11월 3일 루터에게 쓴 편지에서 셰울은 루터가 옳은 교리를 수호하고 있다 하여 그를 칭송하고 있다.
‘십자가 신학’의 중요 내용은 反 스콜라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는 “창조된 것으로부터 하나님의 비 가시적인 존재를 이해하고 아는 자가 신학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와 세상을 향하신 그의 뜻이 고난과 십자가에 표현되어 있다고 이해하는 자가 참된 신학자이다.”
영광의 신학자(Der Theologe der Herrlichkeit)는 惡을 善하다고 칭하고, 선한 것을 악하다고 칭한다. 그러나 십자가 신학자는 사안을 바로 직시한다. 하나님의 비가시적 존재를 행위에서 인지하고 보는 그러한 지혜는 부풀려진 것이며, 완전히 눈멀게 하는 것이고 완고한 것이다.
루터파의 예배장면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 신학 의 날카로운 대립은 모든 스콜라 신학과 루터가 에어푸르트에서 알게된 스콜라적인 경향과는 다른 것이며, 오히려 당시 이미 시작된 로마와의 싸움에서 신 인식에 대한 많은 견해들을 罪論과 恩寵論에서 처럼 명확히 밝혀야 한다는 하나의 論爭 形式(Kampfformel)이다.
루터는 신 인식의 문제를 가지고 철학과 신학의 귀속문제(das Problem der Zuordnung)를 이해하고 있다.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은 창조를 근거로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나 십자가 신학은 창조로부터 신을 인식하고자 하는 시도(영광의 신학)를 죄와 하나님의 심판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을 인식하려는 노력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십자가 신학은 하나님께서 숨어 계신 동시에 또한 자신을 계시하시는 십자가만을 오로지 중요하게 여기고 영광의 신학 및 십자가 신학이라는 개념의 사용은 구원의 문제를 신학의 중심 테마가 되게 했다. 하나님의 比可視的 및 그의 可視的 존재에 대한 언급은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과 질서를 통한 능력이라는 오캄의 구별과 유사하게 이루어진 것일 수도 있지만 이러한 구분은 구원의 문제를 고려함으로써 새로운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
그로 인하여 철학적으로 신을 인식하고자 하는 시도는 날카로운 비판을 받게 되었으며 율법과 같은 중요한 문제를 논할 때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완전히 새로운 진술을 이끌고 있다. 십자가의 의미는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 (CRUX sola nostra theologia) 라는 표현이며, ‘Crux probat omnia’는 십자가가 모든 것을 시험하듯 ‘십자가가 모든 것을 보장한다.’는 뜻으로 오로지 십자가만이 심판자요 진리의 증인이라는 표현으로, 이러한 첨예한 진술들은 논쟁의 와중에 생겨났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3) 하나님과 인간의 인식
1532년 시편 51편 2절에 대한 강의에서 루터는“하나님과 인간을 인식하는 것은 신적인 지혜이며 본래적인 의미에서 볼 때 신학적이고,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에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신학의 대상은 곧 죄인이며 잃어 버린 인간인 동시에 의롭게 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 이시다.”라고 이전 생각의 연속과 종교개혁적인 새로운 성찰이 예리하게 표현된 신학의 정의를 하고 있다.
신학에 대한 루터의 정의는 어거스틴 계열의 신학자와 연계되어 있으며 그의 정의는 상당히 이른 시기에 자신의 독특성을 갖게 되었고 시편 강의에서 벌써부터 “먼저 겸손하지 않고 자신을 인식하기 위해 낮아지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 인식에 이를 수 없다. 왜내하면 거기에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라하며 하나님 인식의 문제를 오로지 지성(intellectus)에서부터 시작하려는 시도를 루터는 거부 하였다.
루터는 1532년 신학의 대상에 대한 정의에 이전의 규명과 함께 완전히 獨自的인 방식으로 傳統을 재수용 하였는데 그에게 있어 신학의 과제는 하나님인식과 자신의 인식으로 하나님 인식과 자신의 인식은 오로지 창의론 과 연관하여 고찰 될 수 있으며 이식문제의 논의에 있어서 처음부터 창의론 을 연구해야만 하며, 창의론 은 인식의 문제에 있어 그 타당성을 재는 척도가 된다고 하고 있다. 이는 즉 하나님의 인식과 동시에 자신의 인식은 참 자기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며 그곳에 하나님 인식이 동시에 있다는 이치와 같다라고 보는 것이다.
3.루터신학의 역사적 발전
1)루터파의 宣傳과 轉派
루터가 신약성서를 모국어인 독일어로 옮기면서 바르트부르크에 은거해 있는 동안 그의 사상은 정열적인 제자들의 노력과 여러 가지 선전 방법 덕분에 계속하여 퍼져나갔으며 인쇄술(1519년 111권의 신간이 독일어로 출판, 1523년에는 약 500종의 도서 출판)의 발명 또한 그의 사상이 전파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던 걸로 보여진다.
루터는 신앙의 전파에 책을 읽을 수 없었던 일반인들을 위하여 음악과 상징적인 그림들이 쓰여졌다. 1523년부터 루터는 독일어로 찬송가를 작곡해 낱장으로 인쇄하여 마을마다 부를 수 있게 하는 등 쉽고 이해가 빠른 루터의 홍보 물은 여러 사람의 몫을 대신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대중의 루터에 대한 인기는 과히 신앙적인 것이 되었다.
황제가 자리를 비운 동안 제국회의와 의회는 福音主義 운동을 막는데 우유부단함과 무능을 드러냈고, 독일은 점차 宗敎改革의 열기에 휩싸였다. 1522-1524년의 세 차례의 뉘른베르그 의회의 소집은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체 공 의회에 일임이 되었고 더군다나 xzhstmxkscm 시 당국은 루터의 정 죄 한 보름스 칙령의 시행을 거부했고 에르푸르트, 마그데부르크, 브레멘, 뉘른베르크 같은 도시들도 콘스탄츠의 예를 따랐다. 그러나 루터의 승리는 점진적으로 이루어 졌다.
인쇄물과 강론과 미사에 나타난 주요한 변화들- 설교의 중요성 강조, 라틴어 사용중지, 미사의 희생제적인 의미 제거-로 가속화되었다. 그리고 구교 의식의 분명한 폐지와 새로운 공식 예배순서의 설정으로 완성되었다. 이렇게 해서 스트라스부르에서 구교와 최종결별이 이루어지기까지는 10년이나 걸리게 되었다.
1521년, 루터와 매우 친밀한 사이였던 메라히톤은 자신의 저서 《신학의 기본적인 주제들》에서 루터 신학을 처음으로 체계적인 설명을 하였다.
루터는 구교의 미사를 대체하는 의식을 확정한 후(1526, 1529)에 완성한 두 개의 기본 개념을 이 논문을 통해 교리로 정착시키려 하였으며 라틴어로 진행되는 예배의 점차적인 중단과 세 가지 형식 즉, 첫째-신자들이 믿음을 유지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복음 강론 같은 형식을 부분적으로 포함한 설교, 둘째-찬송가( 36개의 루터 작곡)과 셋째-성찬식(빵과 포도주의 성찬의식)등의 형식에 맞춰 예배의식을 진행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고 구원에 대한 불안감으로부터 신자들을 해방시켜주며 수많은 중보자 들을 없애고 의식을 더욱 분명히 만든 루터 주의는 동시에 하느님에 대한 직접적인 관계와 내밀한 개인적인 신앙심을 더 선호하고 있었다.
루터는 ‘머리 수만큼이나 많은 교파와 신앙고백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 성직자에 대한 규율을 정하는 것이나 검증되지 않은 집단의 발호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정치적인 힘에 의지 할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작센의 선제 후에게 요청해 이 지역에서 신학자와 법리학자들이 소 교구들에 대해 정기적인 감사를 요청했으며 이들은 감사를 통해 교회의 재산을 조사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說敎者를 감사하는 한편, 폐습을 억제하는 일을 했다.
이 조직은 교구를 관할하는 行政監督의 지명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곧 루터파에 속하는 지역들이 이를 모방하여 조직을 정비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제후들이 성직자의 재산을 회수 할 수 있게 되고 宗敎的인 査案에 간섭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자 종교개혁은 빠른 속도로 새로운 지방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렇게 확산되어진 종교개혁은 영주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改宗과 함께 그들의 영지에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황제는 종교개혁의 중단의 명령과 보름스 칙령의 실행을 명령하자 제국의 도시 3분의 2가 로마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14개 도시와 여섯 제후가 과감히 이 경전에 반기를 들었다.
1525년 종교개혁의 탄압으로 프랑스에서는 최초의 순교자가 나왔으며 1521년 5월 추기경 울지는 루터의 서적을 불태우도록 지시하였고 국왕 헨리 8세는 독일의 종교개혁자들을 비판하는 저서를 펴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북부유럽에서 큰 성공을 이루었는데 1544년에 스웨덴의 공식종교로 루터파가 인정되어지고 이시기에 등장한 칼뱅주의는 새로운 활기를 띠게 한다.
2)신앙과 그리스도의 따름
신앙에 대한 부분에서 전통적인 것과 새로운 것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상호 병존하고 있었다. 루터는 무조건 따르고 믿어야만 하는 3가지 신앙의 기본 진리(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 그는 보응자(remunerator)라는 것, 그리고 그는 拘束者(redemptor)라는 것) 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루터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예수의 말씀은 그의 인성에 대한 언급으로 새로운 강조를 보이고 있다. 루터는 하나의 간주행위인 당시의 신앙이해를 극복하고 있으며 신앙은 오히려 지금 現在에 救援과 生命을 일으키는 것, 인간 되심이 우리의 구원이며, 고통과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 하셨다. 라 말하였으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 되심과 신앙을 서로 긴밀히 연결시키며 롬바르두스의 여백주기에서 볼 수 없는 문제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예고하고 있다.
초기 여백 주기는 신학과 교회이 倫理的 形態와 방향에 대해 엄청난 批判的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비판은 루터 신학이 가진 새로운 점들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며, 루터는 당시에 성행하던 신학을 무작정 추종하지 안았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당시의 신학과 교회의 영역을 그의 비판에서 제외시키지 않았다.
루터는 스콜라 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 철학이 절대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철학자들을 비판하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자체가 아닌 신학에 미치는 그 영향을 비판하였다. 또한 철학은 루터에 의하면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만들어 냈지만, 그로 인하여 해결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도 초래하였다.“숱한 철학자는 새로운 개념 외에는 어떠한 것도 기뻐하지 않는다.”고 말한 어거스틴의 언급은 루터로 하여금 그 시대의 철학에 대하여 비판을 하도록 동기 부여를 하였다.
루터의 신학은 하늘이요, 인간의 땅이며 그리고 인간의 思索이란 연기와 같은 것이라고 루터가 강조하듯이 삼위일체와 같은 神學的 陳述은 이성을 통해서는 결코 증명 될 수 없고 오로지 성령이 말하기 때문에 진리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지혜를 부끄럽게 만들기 위해 우둔한 자를 통해 믿는 자를 기뻐하시기를 기뻐하신다. 라는 이러한 언급들은 루터사상이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학에 미친 그의 영향 및, 哲學과 神學의 혼합에 대해 비판했던 오캄주의적 전통에 그 출처가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증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루터의 비판은 더 급진적일 뿐만이 아이라 성서적 근거와 사고로 귀착되고 있다는 점에서 오캄주의의 비판과는 구별이 된다.
전체적으로 초기 루터의 신학적 입장에 관해 관련된 본문을 자체 해석하되, 그것이 후기의 宗敎改革 神學을 예시하고 있다고 말 할 수는 없으며 무엇보다도 여기에는 宗敎改革적인 創意論이 없으나 다른 한편 여러 가지 중요한 점에서 중세 후기의 오캄주의적인 신학적 틀을 탈피한 것만은 분명하며 특히 罪論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철학과 신학에 대한 오캄주의적 규명과는 달리 루터는 자신의 새로운 길을 가고 있다. 여기서 루터는 한편으로는 어거스틴을 다른 한편으로는 성서를 의지하고 있다. 그 자신이 여전히 수도사로서 살아가면서 교회와 신학의 특정측면에 대해 방대한 비판을 했다는 것도 중요하나 아직은 이러한 비판에 대한 깊은 신학적 성찰은 확실히 나타나지 않는다.
3)루터의 면죄부 비판
1517년 가을부터 시작된 면죄부 논쟁은 우선 다른 논쟁의 연장이거나 혹은 다른 논쟁이 진행되는 가운데 생긴 새로운 국면으로 보일 수 있었다. 새로운 갈등의 소지들뿐만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진 주제들이 급진적인 단면을 지니고 있음은 1518년에야 비로소 명백해졌으며 16세기초에 人文主義者들과 스콜라 학자들, 그리고 인문주의자들과 교회의 공적인 대표자들 사이에 벌어진 많은 논쟁들이 루터로 하여금 그에 대해 입장을 표명토록 원인을 제공했다.
1516년 시작된 비텐베르그 대학 개혁 움직임들은 비록 당시 루터가 에라스무스에 대하여 신중한 留保的 態度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루터를 윤리적인 인문주의자들과 상당히 근접할 정도로 밀착시켜 주었다.
1516년 이후 루터는 새로운 신학을 가지고 대중 앞에 나타났다. 바울과 어거스틴에게서 얻은 통찰을 더 이상 강의실의 학생들이 아닌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학문적인 대중에게 제시하였으며 이에 대한 동기는 그 자신만이 아닌 학생들에게서 起因 되었다. 그들은 루터의 로마서 강의에서 들은 것을 대중에게 알리고 싶었으나 이러한 노력의 일차적인 정신적 주창자는 의심의 여지없이 루터 였음을 알 수 있다.
1518년에 완성된 면죄부의 출판은 루터와 로마의 갈등을 여러 차원에서 발생시켰으며 95개의 논제 및 면죄부 논제해설을 통해 제기된 문제들은 많은 글을 통해 계속 취급되었고 그로 인하여 양측의 입장이 더욱 명쾌하고 정확하게 되었다. 그 후 루터에 대한 교회 소송 준비가 시작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자연적으로 루터의 주장뿐만이 아니라 글을 통한 갈등에 대해서도 반응이 생겨났다.
1518년 여름 이후 세속정부의 루터 문제에 대한 개입은 1518년 8월 5일 교황에게 루터로 인하여 신앙의 일치가 끝나게 될지도 모를 위험에 대하여 서신을 띄웠고 독일 제국 회의가 루터를 처벌할 교회의 대책을 수립하는 데 적극적으로 돕고자 했다.
1518년 8월 7일 로마에 출두하라는 요구를 받았으나 그는 반박의 글을 썼으며 여기에서 루터는 노골적으로 교황과 공의회기 오류를 범할 수도 있음을 피력했으나 루터는 로마 교회가 지금까지는 오류를 범하지 않았으며, 참된 신앙으로부터 이탈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교황에 대한 판단은 루터에게 더욱 예리해져 갔다. 1518년 말 루터는 처음으로 교황이 아마도 적 그리스도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4)로마교회의 개선점에 대한 논제
루터는 로마교회에 대한 여러 가지의 개선점을 제시하며 이렇게 말하였다.“나는 이와 같이 무서운 정황 가운데 어떤 개선을 가져올 만한 제안을 하기에는 너무나 변변찮은 존재이나 여전히 바보스런 노래를 끝까지 부를 수 있으며 또한 할 수 있는 한 세속적인 당국자나 일반 공의회를 통하여 무엇을 할 수 잇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말할 수 있다.”
첫 번째 개선점-루터는 모든 제후와 귀족과 도시는 그들의 예하 사람들이 로마에 첫 수입세를 지불하는 것을 담대하게 금할 것을 말하고 있다. 이는 교황은 계약을 어기고 첫 수입세를 강탈하여 전 독일 국민에게 손상과 모욕을 끼쳤다 하여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두번째 개선점- 로마의 임명권 금지로 교황은 로마의 책략 곧 위탁제도, 보좌제도, 보류, 양도예약, 교황의 달, 통합, 연합, 팔리아, 상서원의 규칙 및, 악행 등으로 아무 권리와 권리도 없이 독일의 모든 재단들을 강탈하고, 또 재단들을 독일을 위해서는 전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로마의 외국인들에게 주고 매각한다. 하여 교황은 개교회 당국자에게서 그들의 권한을 빼앗고 주교들을 바보와 명목상의 지도자에 지나지 않게 하며, 그 자신의 교회 법규와 본성과 이성에 거슬러 행동한다.
세 번째 개선점-사도들의 통치와 교황의 통치를 벗어난 개교회의 權利回復으로 고위성직자의 권한 박탈과 그 예하 인들의 권위회복을 통한 자유보장을 찾자는 취지가 강하게 베어 있다.
네 번째 개선점-주교의 법정에서 세속적인 문제의 배제하자 라 하여 주교 법정의 재판관들에 의하여 자행되는 난폭한 착취의 금지를 말하며, 그들은 신앙과 도덕 문제에만 관여하며 돈, 재산, 생명, 명예 등에 관한 문제들은 세속적인 재판관들에게 맡겨야 한다. 영적인 재물은 돈이나 육신에 관한 어떤 것이 아니라 신앙과 선행이라는 것이다.
다섯 번째 개선점-독일 교회의 조직으로 로마 교황청의 관장 하에서가 아니라 독일 교회가 독일에서 일어난 사건의 최종적인 공소원이 되어야하며 이를 위해서는 독일 교회의 조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여섯 번째 개선점-보류제도의 폐지
일곱 번째 개선점- 보류사항의 폐기
여덟 번째 개선점-교황 가족의 축소, 즉 교황의 가족들은 교황 자신의 재정으로 먹여 살려야 하며 교황 궁정의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에 있어 모든 제왕의 궁정보다 사치스러워서는 안된다. 이는 로마교도들의 가지고 있는 재물과 허영이 적다면 더 잘 기도하고 연구할 수 있을 것이며 저 옛날처럼 신앙문제를 다룰 자격과 능력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아홉 번째 개선점- 주교의 서약에 있어 엄격하고 두려운 서약은 폐지되어야 한다.
열 번째 개선점- 교황과 황제의 관계에 있어 교황을 황제의 즉위 시 기름을 붓고 왕관을 씌우는 일 외에는 어떠한 간섭도 황제에게 할 수 없다.
열 한 번째 개선점- 솟권과 나폴리 왕국, 교황은 스스로를 억제하여 손을 떼고 또한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에 대하여 아무 칭호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열 두 번째 개선점- 교회 국가들, 볼로그나, 이몰라, 비쎈짜, 라베나., 그리고 안코나 국경과 로마그나 및 다른 이태리 지방에 있는 모든 영토들에 대하여 동일한 생각을 가져야 하며 아무러 소유권도 가져서는 안 된다.
열 세 번째 개선점- 교회에 대한 경의로 교황의 발에 입을 맟추는 행위는 비 그리스도적 이라 하여 이를 금지 할 것을 요구하며 그이상의 행위들에 대하여도 강력히 반대의 요구를 하였다.
열 네 번째 개선점- 로마 순례의 폐지, 로 좋은 본을 보지 못하는 무분별한 로마의 순례를 반대하였다.
열 다섯 번째 개선점- 탁발 수도단의 개혁, 서약은 많이 하나 거의 지키지 않는 무리들에 대한 내용으로 형식위주가 아닌 진실된 행위로의 개선을 말하고 있다.
열 여섯 번째 개선점- 성직자의 결혼, 성직자의 건강한 가정의 이룸으로 건강한 사고의 신앙으로의 유도를 말하고 있다.
수도원 가운데서 보류사항의 폐기, 죽은 자의 미사 폐지, 성사금지의 폐기성자의 날 폐기, 사면권의 확대, 순례의 금지, 특권의 금지, 거지 생활의 금지와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일, 무용한 미사 그지, 성우회와 면죄, 보헤미아 사람들의 문제, 대학교, 교회법, 세속법, 신핫, 신학교재, 학생수의 제한,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경제개혁과 사회개혁, 의복의 사치, 조미료 거래, 연부금, 거래, 과도한 음식, 사회악, 독신생활과 그 폐혜등을 거론하녀 그의 개선점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4. 宗敎改革에 미친 여러 사안
1) 宗敎改革의 原因
신의 섭리에 따른 종교개혁은 19세기 이후 역사가들은 종교개혁이 단순히 중세교회의 악습에서 비롯됐다는 전통적인 학설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학설로 대체했다. 그들은 종교적인 요인은 물론 정치, 경제, 인구통계학적인 원인을 분석해서 설명하려고 했다.
독일어판 성경으로 제자들에게 구술하는 루터
제네바에 있던 칼뱅의 계승자 테오도루 스베자는 종교개혁에 대해 매우 학문적인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루터의 야심과 17세기의 성직자들의 부패에서 비롯된 改革理念은 개신교 신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카톨릭 신자들에게도 중세 교회의 敎理와 慣習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의 해결 수단으로 인식되어 졌으며 이는 16세기 초 이탈리아의 신성 로마 제국을 분열시킨 깊은 수렁을 강조하며 그것을 종교개혁의 출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루터와 독일의 상황 때문이라고 보는 프러시아의 역사가 레오폴드 폰 랑케등 19세기 역사가들에 의해 새롭게 설명되어 지고 있으나 마슐레는 루터로부터 종교개혁의 원인을 찾은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의 기폭제를 찾아냈으며 배타 주의적인 민족주의의 틀 속에서 루터의 혁명을 해석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현대의 사료에 있어 루시앙 페부르의 글이 발표된 이래, 역사가들은 종교개혁이 단순한 교회의 부패에만 그 원인이 있다고 설명하거나 종교 내부의 문제에만 전적인 책임이 있다고 말하지 않게 되었으며, 그간의 단순한 해석에 대하여 현대의 사료는 적절한 지적과 함께 종교적인 목적을 재 확립하고, 다양하고 복잡한 종교개혁의 원인을 제시한다.
신앙적인 문제와 구원의 문제에 민감한 피에르 쇼뉘는 종교 개혁사에서 유럽 라인강 유역의 특수성을 강조하였으며 상업도시의 밀집과 높은 문맹 퇴치율을 자랑하는 이 지역은 새로운 사상과 보급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피에르 쇼뉘는 종교개혁은 일반적으로 하나의 신앙과 하나의 성서라는 두 개의 개념으로 축약될 수 있으며 이들은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우며 루터의 종교개혁은 하나의 신앙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고 작센 지방 교회에서 실험으로 시작된 루터의 종교개혁은 구원 증명서의 거부라는 행동과 성서를 통해 확립되었으며 따라서 하나의 성서라는 개념이 없었다면 그의 종교개혁이 어떻게 댔을지 알기 어렵다. 교회를 성서의 든든한 중심 위에 다시 세웠다고 하는 종교개혁 과정은 대학의 학문적인 분위기와 비슷하면서도 다소 차이가 있는 인문주의 환경에서 시작되었으며,
한편 츠빙글리에게서 비롯된 하나의 성서라는 개념은 유럽 중부, 라인강 유역, 알프스 산맥의 문화적인 성과들을 모두 결집해 주었으며 지리적인 主權體로서 하나의 유럽은 다루기 힘든 거대한 덩어리인 사회적인 집단으로 만들어져 있지 않았다, 그런 만큼 하나의 신앙이라는 개념이 없었다면 모든 것이 은혜이고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이상, 하느님께서 증거를 요구하실 때 사람들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정신적인 힘은 무엇을 근거로 나올 수 있었단 말인가? 라고 말하며 하나의 신앙과 하나의 성서를 강조하고 있다.
루터주의의 영향으로 급진적인 경향을 보이며 여러 가지 복음주의적인 기대가 엇갈리며 우유부단하게 진행되었던 프랑스의 종교개혁은 전차 칼뱅주의로 정착하였으며 프랑스의 개신교 신자들은 제네바를 이상적인 상태로 보게 되었다.
2) 칼뱅과 복음주의 운동
에라스무스와 함께 프랑스 복음주의 운동의 선구자인 르페브르 데타플은 사람들에게 오직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며, 인간이 공로, 즉 선행을 쌓아야 한다는 생각을 배격하였다. 또한 칼뱅은 성인과 성 유골에 대해 경배하는 것을 강력히 비판하였으며, 그는 우상숭배의 관습이 하느님의 거룩하심에 해가 된다고 보는 우상 파괴주의 자였다.
종교개혁과 예술에 있어 예술에 대한 종교개혁의 기여도는 논란의 대상이었으며 츠빙글리와 칼뱅이 성화에 대해 보인 공공연한 적대감은 우상파괴주의 운동과 함께 예술의 창작 정신에 대한 障碍要因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개신교의 다양한 사상이 특정한 예술양식에 영감을 주었고, 그에 대한 밝은 미래를 약속하였다.
모든 종교개혁자들 중에서 음악에 대해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인 사람은 루터였다. 그는 성화에 있어서도 칼뱅과는 달리 관용적인 입장이었다. 종교개혁에 있어 수많은 종교전쟁은 그 폭력성 때문에 동 시대 인들에게조차 전대미문의 일로 받아 들여 졌다. 사실상 1560년 이후는 광기에 가까운 신앙과 이단에 대한 증오심 그리고 말세에 대한 불안감이 대 학살극 같은 참혹한 사건들을 불러 왔다.
칼뱅주의 교인들의 예배
3) 루터주의와 칼뱅주의의 세계화한 종교
루터와 칼뱅의 뛰어난 업적과 영향력 면에서 신중한 비교가 필요하다. 루터가 라틴어의 성서를 모곡어인 독일어로 번역함으로써 부분적으로는 독일의 정체성을 확림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면, 칼뱅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는 ‘국제적인 칼뱅주의’를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루터주의는 발생지인 독일과 스칸디아 반도 등지에 한정되어 남아 있게 되었다. 이에 비해 칼뱅주의는 스코틀랜드 교회와 네덜란드 교회를 세우고, 영국 교회의 반대파를 형성하고, 마침내 미국의 기독교계 다수파를 차지하면서 계속 확대되어 세계적인 종교로 바뀌어갔다. 그리고 심지어 정치적인 팽창을 거듭해 세계를 지배하게된 영국의 그늘 아래에서 도처로 수출된 영국 교회조차도 성직제도나 예배의 형식에서 칼뱅주의와 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그 자체가 칼뱅주의적인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실제로 칼뱅주위로부터 몇 가지 중요한 영향을 받으며 칼뱅의 사상적인 영역 안에서 그 틀을 다진 것이었다.
이처럼 칼뱅주의가 경이적으로 세계화를 이루게 된 진짜 원인은 칼뱅주의자들이 가진 사상 때문이다. 우선 칼뱅주의는 서양세계의 급속한 정치, 경제적인 발전에 발을 맟추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또한 현대적인 입헌정치에 합당한 민주주의적인 원칙들을 보여준 것도 칼뱅주의다.
더욱이 칼뱅주의자들은 실질적으로 경제 발전을 주도했다. 국가에 대한 개념이 반민주적이며 절대주의여서 저항정신을 인정하지 않고 복종만 주장하며, 경제적인 면에서는 동업조합에서 비롯된 완고한 조직체계를 구축하고 있는 루터주의의 보수적인 태도와 칼뱅주의가 구별되는 점이 바로 거기에 있다.
5.결론
루터의 출현은 종교적인 해방과 민족적인 해방에 대한 이중의 상징으로 전독일인에게 환영을 받았던 커다란 사건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루터와 함께 독일어로 말씀하시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시 독일 민중의 10분의 9는 격심한 소요사태와 휘말리게 되었으며 독일 근대 역사의 중심 드라마는 플랑드르에서 등극한 황제가 로마교회에 충실한 채 남아 있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하였다.
카를 5세와 개신교 제후들의 대립으로 시작해 1866년 프러시아-오스트리아 전쟁에 이르기까지 300년 이상 독일이 분열되어 골육상쟁을 겪는 동안 독일민중의 공동체 의식은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고, 많은 작가와 사상가들이 그것을 널리 전했다. 모든 루터파 제후가 진심으로 바라지도 않았지만, 카톨릭 황제에 대한 개신교 신자들의 충성심은 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독일 민족은 프랑스처럼 국가적인 응집력 속에서가 아니라 어느 누구도 완전히 대세를 잡지 못한 영방국가적 다양성에서 형성되었다. 이에 역사가인 요제프 로방은 를 전혀 이루고 있지 못하던 독일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루터가 공헌한 점을 장조 하였다.
루터주의는 신앙만이 아닌 교육에 있어서도 귀족에게만 국한되었던 점을 탈피한 자국어의 교육(공교육의 강조)으로 문맹퇴치를 선두적으로 이끌며, 인간의 이해에 있어 구원론적인 입장으로 중세적인 사고의 탈피를 꾀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참고문헌-
·올리비엥 크리스티 저《종교개혁》
·베른하르트 로제 저 《마틴루터의 신학》
·브렌다 볼튼 저 《중세의 종교개혁》
·마틴 루터 저 《종교개혁 3大 논문》
http://www.sunslife.com/bbs/view.php?id=4004&no=1485
------------------------------------------------
마르틴 루터의 구원론에 대한 소고
Subject : 마르틴 루터의 구원론에 대한 소고
서론
카톨릭교회의 교권과 왜곡된 성서 해석의 진흙 속에 묻혀 수 백년 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기독교 신앙의 보물인 '이신칭의'를 발굴한 신학자는 수도승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였다. 신앙과 신학의 코페르니쿠스적 발견인 마르틴 루터의 '이신칭의'의 토대 위에 마침내 개신교가 이룩되었고, 조직신학의 한 자리인 구원론의 뼈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마르틴 루터의 구원론에 대한 연구는 대단히 중요하다. 특히 기독교의 순수성이 성공주의와 물량주의에 희석되어져 가는 오늘의 현실을 돌이켜 볼 때, 루터의 순수한 신앙심과 학문에 대한 열의와 교회개혁의 의지는 병들어 가는 오늘의 교계를 진단하고 치료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리라 본다.
이 짧은 연구는 먼저 카톨릭교회의 사제로서 루터의 고민이 무엇이었는지, 시편과 로마서 그리고 갈라디아서를 연구함으로써 얻어진 루터의 깨우침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종교개혁과 더불어 시작된 그의 의인론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될 것이다.
1. 마르틴 루터의 고민
마르틴 루터는 1483년에 태어나 1546년에 사망한 독일의 종교 개혁가이다. 그는 어린 시절을 주로 강압적이고 엄격한 가정 및 학교 환경 속에서 보냈으며, 14세 이후로는 줄곧 집을 떠나 학업을 계속하였다. 1501년에 에어푸르트(Erfurt) 대학에 입학하여 1502년에 마쳤고, 1505년에는 M.A.학위를 받았다. 이후 에어푸르트에서 법학을 전공하던 중에 뜻하지 않은 체험으로 수도사가 되기를 결심하고 에어푸르트에 있는 어거스틴 수도원에 입원하게 된다. 수도사가 된 루터는 여러 가지 종교적 질문을 갖기 시작하였고, 특별히 구원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루터가 고민했던 문제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어떻게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정죄함을 받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구원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이었다. 루터는 이 고민을 풀기 위해서 수도원의 모든 규율을 필요 이상으로 철저히 지켰다. 그는 완벽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거룩함을 얻고자 혼신의 힘을 쏟았던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의로우시고 준엄하신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설 수 있겠는가? 이것이 수도사로서 갖는 루터의 최대의 관심사였다.(1
가. 중세교회의 구원론
루터의 고민을 이해하기 위해서 중세교회의 구원의 교리를 조금 설명할 필요가 있으리라고 본다.
중세교회는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인간은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완전하게 순종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올바로 순종할 수 있는 어떤 도움을 주시는 데, 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도움을 은혜라고 한다. 이 은혜를 '성화케 하는 은혜'(sanctifying grace), '후속은혜'(subsequent grace), '공동협력 은혜'(cooperating grace), '효능 은혜'(efficacious grace), 또는 '성화를 가능케 하는 능력'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이 은혜를 받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일정한 공덕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 개혁 이전의 프랜시스컨 수도승 신학은 죄인도 이 은혜를 받아 낼 능력이 있다고 믿었고, 마르틴 루터가 몸담았던 어거스틴 수도승 신학에서는 인간이 완전히 무능하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선 은혜'(prevenient grace)를 부여하심으로서 성화케 하는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일정한 공덕을 쌓도록 한다고 믿었다.
여기서 선 은혜란 '작용하는 은혜'(operating grace) 또는 '충족한 은혜'(sufficient grace)라고 하며, 의지를 새롭게 하고 이해를 조명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주시는 믿음이나 회개를 말하며, 이로서 죄인은 하나님의 복음을 수용하여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또 여기서 말하는 '일정한 수준' 또는 '일정한 공덕'이란 중세교회가 가르쳤던 '합일치 공덕'(meritum de congruo)을 말한다.(2
합일치 공덕이란 성화케 하는 은혜를 받기 위한 일정한 수준의 행위로서 이를 불완전한 공덕 혹은 절반공덕(half-merit)이라고도 한다. 죄인은 하나님께 부여받은 자유의지 즉 선과 악을 분별하여 행할 수 있는 선택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이 성화케 하는 은혜 없이도 죄인은 적어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형벌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회개(contrition)는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형벌을 피하기 위한 회개(attrition)를 할 수가 있고, 하나님의 뜻대로는 아니지만 그가 주신 율법도 순종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또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 즉 성화케 하는 은총을 받을 수도 있고, 이기심 없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합일치 공덕이란 하나님께서 은혜로 보상할 수 있는 지점에까지 죄인이 행위로서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카톨릭교회는 "자신 속에 있는 것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 주기를 거절하지 아니하신다"(Facienti quod in se est, Deus non denegat gratiam=To the one who does what is in him, God does not deny grace)라는 말로써 표현한다. 그러므로 은혜는 구원의 근원 또는 기초가 아니라, 인간의 예비행위에 대한 열매이다. 먼저 인간의 일정수준의 공덕이 선행되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부여받는다.(3
이제 합일치 공덕으로 인하여 부여받은 은혜를 성화 시킬 수 있는 능력 즉 선행을 가능케 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부른다. 이 은혜는 인간의 영혼에로 수급된다. 이 은혜는 죄를 사하고 죄를 제거한다. 죄가 선 행위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 은혜 즉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죄인은 혼자의 노력이나 수고로써가 아니라, 이제는 이 은혜 즉 성화케 하는 능력과 보조를 맞추어 전보다는 좀더 수월하게 실질적인 공덕을 쌓게 된다.
다시 말하면, 죄인은 성화케 하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좀더 용이하게 실질적인 의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완전공덕(meritum de condigno)이라고 한다. 이 지점에 이를 때에 죄인은 비로소 영생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중세교회에서는 이를 칭의(稱義/justification)와 동등시 취급했지만, 실제로는 오늘날의 개신교에서 말하는 점진성화(聖化/sanctification)의 의(義/ righteousness)를 말하고 있다. 만일 이 중세교회의 공덕개념이 성서적 교리라면, 인간은 결국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써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며, 실질적인 거룩함에 도달했을 때만이 인간은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은혜가 아닌 보상이 될 것이다.(4
중세교회는 그리스도의 공덕만을 온 인류를 위한 충족한 행위로 보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공덕은 물론 성자들의 공덕, 그리고 개개인의 공덕과 병합하여 구원의 교리를 주장하였다. 그리스도나 성자들은 자신들을 구원하고도 남는 공덕을 행하였으므로 이 여분의 공덕을 쌓아 둔 창고(treasury of merits)가 있다고 주장하여 면죄부 판매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5
카톨릭 사제들의 면죄특권은 요한복음 20장 23절인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는 예수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이 면죄(indulgence)는 이미 사함 받은 죄로 인해서 받는 일시적 형벌(temporal punishment)에 대해서 교회로부터 면죄함을 받은 것을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사함을 받지만, 죄로 인한 상처는 그대로 남기 때문에 일시적 형벌을 통해서 치유함을 받는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일시적 형벌을 받는 곳이 연옥(purgatory)이다.
그러므로 연옥은 믿고 구원받은 자들만이 가는 곳이요. 완전하지 못한 것을 완전케 하고, 죄로 인한 불결을 정화하며, 죄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는 곳이다. 따라서 면죄(indulgence)는 형벌을 사하는 것이요. 연옥에서의 정화과정을 면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면죄특권은 또한 교회의 영적 창고(spiritual treasury of the church) 즉 그리스도의 완전한 율법의 요구충족, 마리아 또는 성자들의 완벽한 삶, 그리고 순교자들의 잉여공덕 창고에 근거하고 있다. 교황의 면죄특권은 바로 이 잉여공덕 창고에 쌓인 성자들의 공덕을 희사함으로써 연옥에서의 일시적 형벌을 면케 한다는 것이다.(6
따라서 중세교회는 인간의 행위 공덕으로써 일곱 가지 성례전을 강조하였고 시혜하였다. 중세교회는 수혜자가 영적 방해를 가하지 않는 한 교회의 올바른 성례는 수혜자에게 은혜를 실어온다고 말한다. 이것을 ex opere operato 즉 "베풀어진 성례에 의해서"라고 부른다. 이 말은 믿음에 관계없이 교회에 의해서 베풀어진 성례 자체로써 구원하는 은혜에 족하며, 작용하는 능력(virtus operativa)을 갖는다는 말이다.(7
여기서 말하는 성례전이란 성만찬(Lord's Supper), 침례(Baptism), 고해성사(Penance), 견진례(Confirmation), 혼례(Marriage), 안수례(Ordination), 그리고 종부성사(Extreme Unction)를 말한다. 중세교회는 이들 성례를 은혜를 받는 통로(channels)로 또는 객관적 실재라고 주장하였다. 이들 성례전은 구원의 능력을 실어 오며,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 마리아의 손을 거쳐 성례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되는 은혜의 통로라고 말한다. 또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열매로 인하여 고인 은혜의 저수지로부터 은혜의 유입을 받는 수로(水路)가 성례라고 말한다. 물론 성례는 행위를 수반한다. 또 성례 그 자체가 행위이다(opus operatum).(8
나. 개신교회와 중세교회의 구원론의 비교
이제 카톨릭교회의 구원의 교리를 확실하게 알고, 카톨릭교회의 칭의 개념이 개신교회의 것과 어떻게 다르며, 또 앞으로 전개될 루터의 칭의 개념을 비교해 보기 위해서 개신교회의 의인론을 카톨릭교회의 것과 비교해 보고자 한다.
(1)개신교회
1. 칭의(稱義)는 의롭다고 간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2.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義)의 전가(轉嫁)로 이루어진다.
3.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를 받으실 만하게 하며, 하나님 보시기에 기쁘시게 한다.
4.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하여 칭의 된다.
5. 하나님께서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신자를 칭의 하신다.
6. 칭의는 그리스도의 인성 속에 있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무죄선언이다.
7. 죄인은 하나님의 전가된 의에 의해서만 칭의 된다.
8. 칭의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마치 의인처럼 취급하게 하신다.
9. 신자는 대속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 의롭게 드러나셨기 때문에 의롭다고 선포된다.
10. 칭의는 인간의 자리에 대신 서신 예수께서 의롭다는 사실에 대한 선언이다.
11. 칭의는 하나님께서 신자의 심령에 중생과 성화(聖化)를 가져오게 하신다.
12. 죄는 칭의와 중생 후에도 인간의 본성에 여전히 남는다.
13. 신자는 하나님의 가능케 하는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선행에 대해서 어떠한 공덕도 주장할 수 없다. 선행은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의 중보를 통해서만 받으실 만하며,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는 신자의 선행에서 나타나는 모든 인류의 행함의 부족을 충족시킨다.
14. 신자는 언제나 대속자이신 그리스도의 인성 속에서 받아 드려진다.
(2)카톨릭교회
1. 칭의는 의롭다고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2. 칭의는 은혜의 유입으로 이루어진다.
3. 신자 속에 있는 성화케 하는 은혜는 신자를 하나님께 받으실 만하게 만든다.
4. 인간은 자신의 실질적인 의에 의해서 칭의 된다.
5. 하나님께서는 오직 중생한 자만을 칭의 하신다.
6. 칭의는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중생 시키는 행위이다.
7. 죄인은 전가된 의에 의해서만 칭의 될 수 없고, 그의 심령 속에 부어진 의에 의해서만 칭의 될 수 있다.
8. 칭의는 죄인이 실제로 의롭게 만들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9. 신자는 은혜의 성령께서 신자를 의롭게 만드셨기 때문에 의롭다고 선포된다.
10. 칭의는 인간 자신 속에 있는 실재성에 대한 선언이다.
11. 중생케 하는 은혜는 하나님께서 신자를 의롭게 하도록 한다.
12. 칭의는 죄를 전체적으로 박멸시킨다. 오직 정욕과 연약함만이 남을 뿐이다.
13. 성화케 하는 은혜는 신자 속에 있는 것과 함께 연합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선행을 행한다.
14. 성화케 하는 은혜는 신자 속에 있는 것과 함께 연합하여 신자를 하나님께 받으실 만하게 만든다.
여기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개신교회의 칭의는 무죄선언 즉 법정개념의 칭의를 말하고 중세교회는 개신교회가 말하는 성화를 칭의 개념으로 보는 데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위의 비교에서는 개신교회의 성화의 개념이 설명되어 있지 않으나, 사실상 중세교회의 칭의 개념이 이를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에 성화에 대한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으로 본다. 다만 개신교회가 죄인의 소망을 하나님의 무죄선언에 두고 있고, 성화의 정도에 두지 않는다는 점은 거듭 강조되어야 할 중요한 점이다.
다. 개신교회의 칭의론과 성화론의 비교
루터의 의인론을 정확히 밝히기 위해서 루터가 기초를 놓고 그 기초 위에서 발전된 개신교회의 칭의와 성화에 대해서 잠시 살펴봄으로써 개신교회와 중세교회의 차이점과 루터와 중세교회 또 현재의 개신교회 사상과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보는 도구로 삼고자 한다.
개신교회에서는 칭의를 법적문제로, 성화를 우리의 상태 즉 본질 문제로 취급한다. 따라서 칭의는 위법에 따른 유죄성에 문제로, 성화는 위법의 결과인 부패성의 문제로 취급한다. 칭의는 외적, 객관적 선포에 의한 의로써 하나님은 재판장으로써의 역할을 담당하시며, 성화는 내적, 개인적 만들어진(보상된) 의로써 성령은 치유자로써의 역할을 담당하신다.
물론 그리스도는 대속자로써 우리의 죄를 친히 담당하시고 화목제물이 되신 중보자이시다.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계획하시고 실천하신 지극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시며, 하나님의 의로움이시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로 하여금 친히 원수된 인간들과 화목하시기 위해서 제물로 삼으신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하나님의 의가 즉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덕이 전가된 의를 칭의라고 부르며, 하나님 앞에서 오직 믿음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이는 죄인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며, 칭의의 순간에 모든 죄가 사하여지며, 침례 가운데서 성령에 의한 중생의 씻음과 새롭게 하심을 입는다.
이를 초기성화라고 한다. 여기서 믿음은 구원하는 믿음을 말하며 행위가 수반되는 순종의 믿음을 두고 말하지 않는다. 구원하는 믿음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동의하는 것이요, 또 그를 구세주로 신뢰하는 것을 말한다. 한편, 성화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무죄선언을 받고 구원함을 입는 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날마다 육과 정을 십자가에 못박는 생활을 말하며 점진적으로 성화 되어 가는 삶을 말한다. 이를 우리가 만들어진 의 또는 보상된 의라고 부르는 실질적인 의이다. 로마서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구원의 길은 이러한 사실들을 확증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중세교회의 칭의 개념은 성화교리에 대한 잘못된 교리이며, 성화는 상급의 문제는 될 수 있어도 구원의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개신교회의 가르침이다. 이 점에 있어서 성서와 개신교회가 이신칭의를 주장하는 반면, 중세교회는 행위를 주장하였다. 따라서 행위교리를 주장하는 중세교회의 수도사 마르틴 루터의 고민은 더할 나위 없이 큰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을까? 행위로써는 인간이 아무리 노력하여도 하나님 앞에 완벽하게 설 수 없다는 강박관념이 루터를 괴롭혔다. 중세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받기 위한 통로로써 일곱 가지 성례전을 체계화시키고 있었다.
특별히 고해성사는 죄인들에게 위안이 되는 성례였다. 죄인으로써 받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성례는 고해성사뿐이었다. 따라서 죄인들은 모든 죄과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여야 했다. 루터는 혼신의 노력을 다하여 죄과를 고백하려고 하였다. 그는 할 수만 있으면 자주 심지어는 매일 고해하다시피 하였다. 한 때는 여섯 시간까지 죄과를 고해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루터에게는 크고 작은 죄가 문제가 아니라, 과연 하나라도 빼놓은 것 없이 모두 고백했느냐에 있었다. 인간의 기억력이 허락치 않은 한 반드시 고백하지 못한 죄가 있기 마련이며, 고백하지 못한 죄는 용서받지 못하며,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는 한 구원받지 못한다는 논리가 루터에게는 더없이 고통이었다. 수도승들로써는 이러한 루터의 발버둥이 여간 성가신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수도원 원장이었던 스타우피츠(Staupitz)는 루터에게, 정말 그리스도께서 그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를 기대한다면, 사소한 일로 찾아오지 말고, 살인이나, 간음 또는 신성모독과 같은 중한 일로 찾아오도록 충고하였다고 한다.(9
한편 스타우피츠는 루터가 너무 어렵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보여 주려고 노력했다. 그는 루터에게 필요한 단 한가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루터는 진노의 불꽃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라는 강한 의구심을 떨쳐 버리지 못하였다.(10
또 다른 루터의 고민은 설사 모든 율법의 요구 조건들을 다 지켰다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 족한 내적 변화가 일어나겠는가라는 문제였다. 성화케 하는 은혜를 소유한 사람은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뉘우치며,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온전한 회개(total contrition)를 할 수 있다고 중세교회는 주장하였고, 어렵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원하셔서 사랑하시는 것과 같이 우리도 상당한 정도는 마음에서 우러나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루터는 자신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가르침 속에서는 그의 행위로나 태도로 볼 때,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가 없었다. 노력을 하면 할 수록 오히려 실망과 좌절을 체험하게 되었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진노의 하나님으로 비추어지게 되었다.(11
이러한 루터를 돕기 위해서 스타우피츠 원장은 루터로 하여금 계속해서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얻도록 하였고, 교수로써, 설교가로써, 상담가로써 병든 심령들을 치료토록 하였다. 스타우피츠는 루터가 남의 심령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고민도 해결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12
2. 마르틴 루터의 각오(覺悟)
한편 루터는 1508년 비텐베르그(Wittenberg) 대학으로 전근하여 철학을 강의하던 중 신학을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피터 롬바드의 경구집}(Sentences of Peter the Rombard)을 강의하기 위해서 에어푸르트(Erfurt)에 다시 전근된다. {피터 롬바드의 경구집}은 중세기 신학의 근간을 형성하는 성경, 교부들, 그리고 스콜라철학자들의 경구들을 주제별로 수집한 책이었다. 그는 다시 1511년 비텐베르그(Wittenberg)대학으로 전근되어 그곳에서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그리고 1513-1515년에 시편을 강의하게 되고, 1515-1516년에 로마서, 1516-1517년에 갈라디아서, 1518년에 다시 시편을 강의하게 된다. 이러한 연구와 강의를 통해서 루터는 1513-1519년에 거쳐 복음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 시대의 그의 깨달음을 "탑 속 경험"(tower experience)이라고 하는 데, 비텐베르그의 어거스틴 수도원에 있는 탑 속에서 복음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13
종교개혁으로 인한 루터의 공헌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성서적 의미의 재발견이다. 일반적으로 중세교회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정의 즉 반드시 죄인과 불의한 자를 처벌하시는 정의로 그 뜻을 풀고 있었다. 때문에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미워하였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선물로 발견하였을 때, 그는 하나님의 의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로써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극적인 깨달음은 세 가지 단계로 설명될 수 있다.(14
중세교회가 하나님의 의를 반드시 불의한 자들과 죄인들을 처벌하시는 정의로써 풀이할 때, 문제는 어떻게 인간이 그와 같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겠는가 였다. 중세교회는 물론 자기 자신의 의로써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간은 진지한 의도와 성화케 하는 은혜를 받는 합일치 공덕과 인간의 출생부터 죽음까지 관련을 맺고 있는 성례의 실재들의 병합의 덕택으로 하나님의 의로움 앞에 서기를 바랐다. 이것이 첫째 단계인 중세교회의 상황이었다.
둘째 단계는 이해의 단계이다. 시편강의나 로마서 강의를 통해서 깨달은 바는 하나님의 의는 더 이상 불의한 자를 벌하시고 징계하시는 엄격한 심판의 의가 아니었다. 오히려 믿음을 통해서 우리를 의롭다고 칭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요, 변화시키는 은혜요, 거져 주시는 선물이었다. 하나님의 의는 율법의 요구가 충족되어야 하는 그래서 죗값에 대한 처벌이 선행되어야 하는 거래행위가 더 이상 아니었다.
따라서 인간의 행위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오직 은혜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하게 한다. 물론 중세시대에도 어거스틴의 전통을 대표하는 인물들에 의해서 이러한 견해는 어느 정도 공유되었다. 그러나 루터에 의해서, 이 견해는 좀더 성서적이고 복음적인 교리로 재 천명되었다.
셋째 단계에서 루터는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은혜를 완전히 동일시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는 더 이상 인간을 의롭게 만드는 성화케 하는 은혜가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이 어떠한 상태에 있든지 간에 그 인간을 의롭다고 취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인간이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이 가능하다.(15
은혜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이 종교개혁을 탄생시켰으며, 중세교회의 성례전들이 도전을 받기에 이르렀다. 인간과 의로우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행위나 실질적인 의의 유입에 의존하는 따위의 견해는 사라지게 되었으며, 그 대신 오직 은혜만이 우뚝 서게 되었다.
가. 마르틴 루터의 [95개조의 의제]
루터의 의인론은 그가 면죄교리에 대해서 토론의 기회를 마련키 위해서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그 대학에 있는 캐슬(Castle)교회 문에다 라틴어로 쓴 [95개조의 의제](The Ninety-five Theses)를 붙일 때만해도 아직 충분하게 발전되지 못했다. 다만 시작에 불과하였다. 제 1조에서 루터는 마태복음 4장 7절의 회개가 "신자들의 총체적 삶이 회개의 삶이며," 제 2조에서는 사제들에 의한 고해성사 즉 고백(confession)과 고행(satisfaction)에 대한 언급은 아니라고 믿었다. 회개는 단 한번의 행위이기보다는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임전에서 갖는 일종의 계속적인 심정이며, 마음에서 우러나는 결단이다. 그러므로 루터는 [95개조의 의제]를 통해서 중세교회의 면죄교리의 잘못된 주장이나 실행을 공격하였던 것이다.(16
또한 루터는 [95개조의 의제에 대한 해설]에서 고해성사의 당위성을 입증하는 데 인용된 제롬의 라틴어 불가타(Latin Vulgate)의 성서 본문이 잘못된 번역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마태복음 4장 17절에 대한 라틴어는 penitentiam agite 즉'do penance'이다. 그러나 에라스무스(Erasmus)가 만든 헬라어 성경은 단순히 'be penitent'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헬라어 성경의 'Metanoeite'는 문자적으로 '마음을 바꾸다'라는 의미일 뿐이다.(17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면죄(indulgence)는 죄는 이미 사함 받았지만 하나님께 죗값을 치르며(satisfation), 피할 수 없는 형벌 즉 일시적 형벌을 면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성자들의 잉여공덕을 적용하는 방법이다. 선 행위와 함께 교회에 일정한 액수의 돈을 바치면, 모두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양의 연옥에서의 형벌은 면하게 된다고 가르쳤다. 이 면죄를 보증하는 증서가 교황의 대사에 의해서 발급되었다. 이를 면죄부라 한다. 이와 같이 교황의 면죄특권은 살아있는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이미 죽은 자를 위해서도 유익하다고 믿었다. 역사적으로는 이 면죄특권이 십자군 전투에 참여한 용사들에게 적용되었고, 그 후에는 교회에 바치는 기부금에 적용을 시켰다.
루터가 [95개의 의제]를 캐슬교회 문(게시판) 앞에 부착한 것도 도미니컨 수도승 요한 테젤(Johann Tetzel)이 면죄부 구입을 촉구하는 설교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 건립에 필요한 재원을 충당키 위해서 로마당국은 성직매매를 공공연히 자행하였고, 성직을 구입한 자들은 매입자금을 충당키 위해서 면죄부 판매를 허락 받고 있었다. 테젤은 그의 설교에서 면죄부를 구입한 자는 죄사함은 물론 형벌을 면하게 된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95개조의 의제]에서 루터는 "교황 자신은 죄를 사할 수 없다"(6조). "이 때문에 면죄부를 구입하도록 설교하는 자들이나 교황의 면죄부를 구입하는 사람은 모든 형벌로부터 사함 받고 구원함을 받는다 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21조). "동전이 연보함 바닥을 땡그랑하고 때리자마자 영혼이 연옥으로부터 날아 오른다는 설교는 하나님께서 그 당위성을 인정치 않고 있다"(27조).
"면죄부 구입으로 구원함을 받는다고 확신하는 자들은 그들의 교사들과 함께 영원토록 저주를 받을 것이다"(32조). "진정으로 참회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라도 형벌과 죄로부터 완전한 사함을 누리며, 이 축복은 면죄부 없이 주어진다"(36조). 그러므로 "면죄부에 따른 구원에 의존하는 것은 헛된 것이다"(52조)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18
나. 마르틴 루터의 [하이델베르그 논의를 위한 의제]
1517년 10월 31일의 [95개조의 의제]가 중세교회의 면죄부 판매를 바로 시정하려는 데서 그 의의를 찾는다면, 1518년 4월 열린 하이델베르그 어거스틴 수도승 독일 총회를 위해서 마련한 [하이델베르그 논의를 위한 의제](Theses for the Heidelberg Disputation)는 죄, 자유의지, 은총과 같은 신학문제에 초점을 맞춘 최초의 개신교 사상이란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19
여기서 루터는 "하나님의 율법은 가장 건전한 생활 교리이긴 하지만 인간을 의로움에 인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된다"(1조)고 하였다. "인간의 행위는 언제나 매력적이고 좋아 보이지만 결국 그것들은 치명적인 죄로써 둔갑한다"(3조).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은 언제나 매력도 없고 나빠 보이지만, 그 결국은 진실로 영생을 위한 공덕이다"(4조)라고 말하고 있다.(20
자유의지에 대해서 중세교회가 "자신 속에 있는 것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기를 거절하지 아니하신다"라고 주장하는 것에 반하여 루터는 "자신 속에 있는 것을 행하는 한 그것은 치명적인 죄를 범할 뿐이며, 타락후의 '자유의지'는 말뿐이다"(13조)라고 주장하였다. "타락 후의 '자유의지'는 선행에 대해서 오직 실현할 수 없는 능력으로써의 가능성을 가지며, 악행에 대해서는 그러나 언제나 실현할 수 있는 능력으로써의 가능성을 가진다."(14조). "자유의지는 무죄의 상태를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써 남아 있을 수 없다"(15조).
"자신 속에 있는 것을 행하므로 의로움에 이르고자 하는 자는 죄에 죄를 더할 뿐이며, 이중으로 유죄하게 된다"(16조).
"율법은 또한 하나님의 진노를 야기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안에 있지 아니한 모든 것을 죽이며, 욕하며, 정죄하며, 심판하며, 저주한다"(23조).
"행함이 많은 자가 의로운 자가 아니라, 행함은 없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많이 가진 자가 의로운 자이다"(25조). "율법은 '이것을 행하라'고하지만, 결코 행하여 지지 않으며, 은혜는 '이것을 믿어라'고하지만, 즉시 모든 것이 행하여진다"(26조).
"그리스도의 사역은 마땅히 능동적 사역이라고 불리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행위는 수동적이며, 행하여진 자는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사역 때문에 하나님께 기쁘시게 된다"(27조)고 주장하고 있다.(21
이후 1521년 보름스에서 열린 왕정회의(Diet at Worms)에 소환될 때까지 특별히 1519년 열린 요한 에크(John Eck)와의 라이프찌히(Leipzig) 토론을 통해서 얻은 바 확신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범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서뿐이라는 것이었다. 때문에 로마교황은 믿음의 문제에 있어서는 과오를 범할 수 없다는 주장이나 교황만이 성서를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을 반박하였다. 뿐만 아니라, 루터는 종교회의에서 얻어지는 결론들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들어 종교회의 자체도 신뢰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따라서 보름스 왕정회의가 루터에게 그 자신의 저술들을 잘못된 것으로 인정하라고 촉구했을 때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존엄하시고 주되신 각하께서 간략한 답변을 요구하시므로 담담하게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성서가 증거 하는 바가 아니거나, 분명한 이유가 있지 않은 한 (왜냐하면, 본인은 교황도 종교회의도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황이나 종교회의들은 종종 과오를 범하였으며, 상호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본인은 본인이 인용한 성경말씀에 매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으므로, 아무 것도 취소할 수도 취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양심을 거슬려 가는 것은 안전하지도 옳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 . . 하나님 도우소서. 아멘.(22
1520년 교황청에서 내려진 교서에서는 루터의 모든 저술들을 저주하고 60일 이내에 루터가 자신의 주장을 모두 취소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이 해에 많은 글을 발표하고 있다. {선행에 관한 논문}(The Treatises on Good Works), {로마 교황권}(The Papacy at Rome), {독일 국적의 지배계급에 보내는 호소}(An Appeal to the Ruling Class of German Nationality), {교황의 이방적 예속}(The Pagan Servitude of the Church),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자유}(The Freedom of a Christian)와 같은 내용의 글들이 1520년에 발표되었다.(23
3. 마르틴 루터의 의인론
이제 이들 루터의 저술들을 통해서 루터의 개혁사상을 알아보고자 한다. 루터의 의인론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앞에서 언급하고 제시한 바와 같이 중세교회의 구원관과 루터가 놓은 초석을 바탕으로 발전된 개신교회 사상을 먼저 바로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뿐만 아니라, 루터가 즐겨 사용한 어휘들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그의 사상을 바로 알 수 없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다섯 개의 슬로건을 먼저 소개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라 생각된다.
가. 개신교의 다섯 가지 슬로건
(1)오직 성서(Sola Scriptura)
교황이나 사도들의 전승을 성서와 동등하게 권위를 부여하여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실천의 규범으로 삼는 것을 반대하는 슬로건이다. 또한 사제들만이 절대적이고 오류 없는 권위로써 성서를 해석할 수 있다는 카톨릭교회의 주장을 반대하는 슬로건이다. 그러나 오직 성서만이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실천의 유일한 규범임을 주장하는 슬로건이다.
(2)오직 은혜(Sola Gratia)
루터의 고민은 어떻게 준엄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겠는가 였다. 하나님의 은혜를 의존하는 구원론의 재발견은 자신의 의를 통해서 구원에 이룰 수 없음을 알고 하나님의 의를 의존하는 복음의 진수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죄인이 살길임을 외치는 슬로건이다. 은혜의 독특성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태도와 그분의 자비로우신 행동에 있다.
하나님은 스스로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삼으심으로써 진노하심에서 인류를 구원하셨다. 하나님의 스스로 취하신 태도와 외아들을 화목제물로 삼으신 행동은 하나님의 은혜의 속성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직 은혜란 모든 인간의 공덕과 행위를 배제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구원의 사역에 의존하는 구원의 원인적 근원에 대한 슬로건이다.
(3)오직 그리스도(Sola Christo):
그리스도만이 오직 죄인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이심을 가르치는 슬로건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은 죄인을 구원하기에 100% 충분하며, 죄인의 구원을 위한 공덕적 근원이다. 따라서 마리아와 성자들의 중보는 사족에 불과하며, 사제들의 중보적 역할도 그 필요성이 전무하다. 인간의 공덕체제로써의 성례전을 부정하며, 미사의 피 없는 희생제사 제도를 배격한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십자가에 죽으심을 통해서 단번에 모든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셨으며, 인류구원을 위한 족한 화목제물이 되셨다. 그리스도만이 인간구원의 소망이다.
(4)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믿음으로써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으며, 그분의 은총을 입을 수 있다. 이는 중세교회의 공덕이나 성례전의 ex opere operato(=by the work performed)의 개념을 반박하는 슬로건이다. 이는 구원을 받는 수단이다. 구원하는 믿음은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동의와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는" 신뢰를 말한다(롬 10:9). 따라서 오직 믿음의 실질적 원칙(material principle)은 중세교회의 사제들만의 제사장론을 배격하며, 만인 제사장론을 펼치는 슬로건이다.
(5)오직 하나님께 영광을(Soli Deo Gloria)
인간 구원의 모든 계획과 사역의 주체자이신 하나님 한 분에게만 찬양을 드리며, 그 은덕에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라는 슬로건이다. 하나님은 마땅히 영광과 찬송을 받으실 분이시다.
이들 슬로건들은 모두가 루터의 저술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어휘들이다. 특히 오직 성서, 오직 믿음, 오직 은혜는 그의 저술에서 반복해서 사용되고 강조되고 있는 말들이다. 이들 슬로건들은 칭의의 본질을 설명하는 동시에 중세교회의 잘못된 교리를 배격하는 말들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가능하다는 강력한 주장이다.
나. 마르틴 루터의 공헌
마르틴 루터의 공헌은 오래도록 사장되었던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성서적 가르침을 재발견한데서 찾을 수 있다. 마치 태양을 따라서 돌던 지구를 코페르니쿠스가 처음 발견하고, 그 사실을 세상에 알린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1520년 11월 출판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루터는 "오직 믿음이 행위 없이, 의롭게 하며, 자유케 하며, 구원한다"고 말하고 있다.(24 우리가 이 긴 말을 축소해서 이신칭의(以信稱義)라고 하는데, 루터가 뜻하는 이신칭의는 어떤 것인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루터가 활동하던 당시의 중세교회의 구원론을 상기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루터 자신이 몸담았고, 또 배웠던 사상에서 루터 자신은 크게 물러설 수 없는 인간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중세교회의 합일치 공덕, 완전 공덕, 성화케 하는 은혜의 개념은 루터에 의해서 믿음, 성령, 하나님의 은혜의 전가라는 개념으로 새롭게 바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루터에게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법정개념으로써의 칭의 또는 초기성화와 인간본질의 상태의 변화를 말하는 점진성화의 개념은 갖지 못했으며, 또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루터가 생각한 칭의 개념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법정개념의 무죄선언 즉 하나님께서 죄인의 믿음을 보시고 무죄로 선언하는 간주되고 칭의 되고 선포된 개념의 칭의와는 차이가 있음을 살피게 된다. 물론 루터가 성화라는 어휘를 쓰지는 않았지만, 그의 칭의론은 성화론과 흡사하며, 중세교회의 구원론의 틀을 완전히 벗지는 못하고 있다.
루터에게 있어서 행위와 대조가 되는 것은 행위와 믿음, 성화케 하는 은혜와 하나님의 전가, 인간의 공덕과 하나님의 선물, 합일치 공덕과 형식적인 의(formal righteousness) 또는 외인의 의(alien righteousness), 완전 공덕과 실질적인 의(actual righteousness) 또는 당연 의(proper righteousness)와 같이 1단계, 2단계 형식의 개념의 틀을 이루고 있음을 본다. 따라서 믿음 그 자체는 행위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행위가 율법과 관련을 맺고 있듯이, 믿음도 율법과 관련을 맺고 있음을 보게 된다.
중세교회의 합일치 공덕이 성화케 하는 은혜를 입기 위한 인간의 의로운 행위를 말한다면, 루터의 믿음은 곧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는 행위의 개념을 포함한다. 따라서 이 믿음은 연약하고 불완전한 것이 되며, 하나님의 전가된 의를 입는 1단계의 의 즉 외인에 의한 의 또는 형식적인 의에 해당된다. 그리고 이 부족한 의를 채우고 보충키 위해서 중세교회가 성화케 하는 은혜를 부여받게 된다고 가르치는 바로 그 자리에서 루터는 하나님의 의의 전가를 주장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인간구원의 모든 조건을 하나님의 선물로써 즉 은혜로써 설명하고 있다.
{로마서 서문}에서 루터는 로마서 2장의 유대인 정죄에 대한 부분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믿음에 대한 개념을 피력하고 있다. 바울이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롬 2:13)라고 해놓고, "율법의 행위로 그의[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롬 3:20)고 한 점에 대해서 루터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와 진정한 마음으로 하지 못한 것이 문제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나 보상에 대한 바람 때문에 겉모양으로나 행동으로는 율법을 지키지만, 자의(自意)나 율법에 대한 사랑에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오히려 마지못해서 억지로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율법을 미워한다는 것이다.(25
그러나 율법은 신령한 것이기 때문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서 하지 않은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율법이 신령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행위는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은 신령하며, 거룩한 것이기에 신령한 마음으로 또 진정한 마음으로 지켜야 하는 데, 인간으로써 다소나마 거리낌이나 마지못함이 없이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율법의 행위는 가식이며, 위선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의로써 간주하실 수 없으며, 우리가 율법을 싫어하고 억지로 한다면, 우리의 행위는 헛되고 무의미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세교회의 합일치 공덕의 가르침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율법주의적 가르침이며, 무의미한 것이라고 말한다.(26
이런 맥락에서 1525년 출판된 루터의 {속박 의지론}(The Bondage of the Will)은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Erasmus)가 {자유 의지론}을 쓴 후, 그를 비판하기 위해서 쓴 글이다. {속박 의지론}에서 루터는 속박의지를 인간이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결정을 할 수 없다거나 또는 인간이 돌이나 짐승이나 또는 악당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떠한 의지의 행동이나 능력으로는 하나님과 적절하고 적당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환언하면, 인간 자신의 결정과 노력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소원된 관계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칼뱅의 완전타락설과 같이 인간은 결정적인 존재문제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무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자유의지는 전혀 자유하지 않으며, 죄악에 예속된 영구한 죄수이며, 노예라고 말하고 있다.(27
은혜가 없이는 자유의지의 능력은 전무하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가치한 것이다. 때문에 자유의지는 오직 하나님께만 적용될 수 있는 용어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만이 하실 수 있고, 또 무엇이든지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다하시기 때문이다.(28
다만 인간은 구원과 저주문제에 있어서 자유의지를 가지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의지에나 또는 사탄의 의지의 포로이며, 죄수이며, 예속된 노예일 뿐이다 라고 하였다.(29 이는 인간이 가식이나 위선이 없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모두 다 해낼 수 없다는 뜻으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행하는 것과 율법을 성취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며, 율법의 성취는 오직 인간이 자유의지와 선택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행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 율법의 성취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믿음을 주시는 데, 이 믿음에서 진실로 선 행위가 나온다는 것이다.
율법을 기쁨으로 진실된 마음으로 지킬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의 성령께서 주시는 데, 이 성령은 율법의 요구와 우리를 동등하게 만드신다. 따라서 우리는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진정한 욕구를 가지게 되며, 두려움이나 억지로 하지 않고, 원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행하게 된다. 율법은 신령한 것이기에 신령한 심령들에 의해서 사랑 받는다. 따라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죄는 남게 되며, 율법에 대한 증오감이 남게 된다.(30
그러므로, 오직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며, 율법을 성취하며, 믿음 때문에 이것은 그리스도의 공덕에 의해서 얻어진 영을 우리에게 가져오며, 이 영은 또한 율법이 목적으로 하는 행복과 자유를 우리에게 가져온다고 한다.(31
이상에서 보듯이, 믿음은 수단으로써 구원을 성취하기보다는 주체로써 구원을 성취하며, 율법을 완성한다. 이렇게 볼 때, 루터의 믿음은 다분히 행위적 개념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며, 중세교회의 합일치 공덕의 개념을 믿음으로 대체(代替)시킨 결과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개념에서 루터는 "오직 믿음만이 하나님의 말씀의 구원하는 그리고 효력 있는 이용이다"라고 했고,(32 "오직 믿음만이 행위 없이 의롭게 하며 자유케 하며 구원한다."(33 또 "오직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혼에서 다스린다."(34 또 "오직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며 율법을 완성한다"고 말한다.(35
따라서 루터의 믿음은 구원하는 믿음으로써 법정개념의 무죄선언을 얻는다는 이신칭의의 개념보다는 순종의 믿음을 통한 점진적 성화의 개념이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래의 글에서 이러한 그의 개념을 뚜렷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은,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변화시키며, 요한복음 1장 13절의 말씀대로 우리는 하나님께로써 다시 태어난다. 믿음은 옛 아담을 죽음에 처하고, 마음과 정신과 모든 능력 가운데서 사는 아주 다른 인간들로 우리들을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에 의해서 동반된다.
믿음은 살아있는 흔들리지 않은 확신이며,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는 믿음은 매우 확실해서 인간이 그것을 위해서라면 천 번이라도 죽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는 이런 유의 확신은 또 그것에 대한 이런 유의 지식은 우리를 즐겁게 하며, 우리의 정신을 고양시키며, 하나님과 또한 모든 인류와의 관계 속에서 열심을 내게 한다. 그것은 성령이 믿음을 통해서 이루시는 것이다.
때문에 믿음을 가진 인간은 그 같은 은혜를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을 위해서 쫓김이 없이 기쁘고 자원함으로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고자 하며, 모든 사람을 섬기며, 모든 종류의 고난을 참는다. 진실로 믿음으로부터 행위를 분리시키는 것은 마치 불로부터 열과 빛을 분리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불가능하다.(36
루터는 그의 "두 종류의 의"(Two Kinds of Righteousness)란 설교에서 이제 살펴본 바의 믿음의 단계를 "외인에 의한 의"(alien righteousness)라고 부른다. 이 의는 그리스도의 의이며, 침례 가운데서 주어지는 의이다. 이 그리스도의 의가 그리스도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서 우리의 의가 되며, 이 의는 곧 하나님의 의라고 한다. 그리고 이 의를 믿음 그 자체로 생각한다.(37
따라서 "이 의는 근본적이며, 그것은 우리 자신의 모든 실질적인 의에 대한 자료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담이 상실한 원래의 의를 대신해서 주어진 의이기 때문이다"라고 한다.(38
그리고 이 의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우리의 의가 된다고 한다. "그리스도는 날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지식이 자라는 데까지 일치하여 더욱더 옛 아담을 몰아내신다. 왜냐하면, 외인에 의한 의는 단번에 모든 것이 부여되지 않으며, 그것은 시작이요, 발전되며, 죽음을 통하여 마지막 때에 결국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39
루터는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이 의를 형식적인 의(formal righteousness)라고 부르고 있다.(40
이 형식적인 의는 곧 믿음을 말하며, 이 의는 완전하지 못해서 믿음을 가진 후에도 여전히 우리의 육체에는 죄의 잔존이 남게 된다. 따라서 이 의는 불완전한 의이며, 연약한 의이다. 그리고 이 의는 하나님의 전가된 의를 받기 위한 초보적인 단계의 의에 지나지 않는다.(41
이러한 루터의 믿음에 대한 개념은 중세교회의 합일치 공덕의 개념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며, 중세교회가 인간의 자유의지의 사용으로 하나님의 은혜 즉 성화케 하는 은혜를 받기 위해서 공덕을 쌓아야 한다고 가르친 점을 미루어 볼 때, 루터는 이 공덕의 개념을 믿음으로 대치(代置)하였으며, 이 믿음은 곧 하나님의 전가된 의를 받는 발판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긴 하지만 불완전하며, 약하며, 결국 하나님의 의의 전가로 완성되어야 할 의로써 설명하고 있다. 마치 중세교회의 합일치 공덕이 불완전한 공덕이었던 것과 같으며, 성화케 하는 은혜로 완전공덕에 이르는 것과 같다.
따라서 루터는 그리스도의 의를 두 단계로 보았고, 두 종류의 의로써 설명하였던 것이다. 제 1단계인 믿음의 단계는 성령의 첫 열매는 소유하고 있는 단계이지만, 아직 죄악이 남아 있는 단계이며, 불완전한 의의 단계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불완전한 우리의 의를 완전한 의로 간주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죄악을 무죄로 간주하신다는 것이다.(42 이것이 둘째 단계의 의이다.
이러한 루터의 개념은 오늘날 우리가 칭의와 성화의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는 구원론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으며, 칭의 개념이 아닌 중세교회의 성화의 논리를 엿볼 수 있는 개념이다.
루터의 제 2단계의 의인 실질적인 의는 또 "당연 의"(proper righteousness)라는 말로써 설명되고 있다. 이 의는 "우리만의 노력으로 그 의를 이루기 때문이 아니라, 첫째 의인 외인의 의와 함께 행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43 이는 중세교회가 성화케 하는 은혜와 함께 완전공덕에 이른다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
루터의 제 2단계 의는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의를 말하고 있다. 다만 이 의를 하나님의 전가된 의라고 말함으로써 오늘날 우리의 칭의의 개념이 하나님의 전가된 의라고 말하는 점과는 크게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루터가 말하는 이 당연 의 또는 실질 의 또는 오늘날의 개념으로 성화의 의는 루터에 의해서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세 가지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첫째는 갈라디아서 5장 24절의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고 하신 말씀에 근거한다. 육체와 함께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 가는 삶, 이것이 첫째이다.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셋째는 하나님을 향한 온유함과 두려움 즉 경건의 삶이다.(44 이 의는 첫째 의인 외인에 의한 의의 산물이며 실제적 열매이며 결과라고 한다.(45
따라서 이 의의 열매는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의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이다. 그리고 이 의는 옛 아담을 멀리하고 죄의 몸을 멸함으로써 첫째 의를 이루려고 한다. 이 의는 죄를 미워하고 이웃을 사랑한다. 자기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한다. 이 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며, 자신에 대하여 근신하며, 이웃에 의로우며, 하나님께 대하여 경건한 삶을 살아간다.
이 의는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살며, 그의 형상으로 변화한다.(46 이 의는, 루터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의를 구성하는 "마음의 믿음"과 "하나님의 전가" 가운데 전가의 의를 말한다. 마음의 믿음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이 의는 그 부족함을 채워 완전하게 한다. 그리스도인의 의는 믿음에서 시작되어 하나님의 전가로써 완성된다. 마치 중세교회가 행위로 시작해서 성화케 하는 은혜로 완전공덕에 도달함과 같다. 믿음은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가 없이는 완전하게 되지 못한다. 따라서 믿음이 의를 시작하고 하나님의 전가가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것을 완성시킨다고 한다.(47
그리스도인의 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중세교회가 인간의 공덕을 주장한 것과 정반대가 된다. 이 단계에서는 불완전한 우리의 의가 완전한 의로 받아드려지고 죄의 잔존에도 불구하고 죄를 죄로 간주하지 않으신다.(48 하나님은 죄의 잔존을 벌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것 때문에 저주하시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을 덮으시며 거저 용서하실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며, 거룩하면서 불경스러우며, 하나님의 원수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이다"라고 루터는 말하고 있다.(49 그리고 선 행위는 우리의 의가 믿음으로 된 의임을 입증하는 외적 표적이다. 선행은 믿음에서 나오며 좋은 열매가 좋은 나무에서 나오는 것과 같이 선행은 죄인이 하나님 앞에 의인된 사실을 입증하는 외적 표적이다.(50
결론
이상으로 루터의 구원론을 그가 처해있던 중세교회의 교리적 상황과 루터 자신의 고민과 갈등 속에서 알아보았고, 그의 구원론이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구원론과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보았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루터의 새로운 발견은 암흑시기의 인류에게 크나 큰 빛과 소망이 되었으며, 인간 중심의 행위 신앙에서 신 중심의 은혜의 신앙으로 바꾸어 놓은 위대한 업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루터야말로 위대한 신학자요, 개혁가였다. 그가 외친 오직 성서, 오직 믿음은 중세교회로 하여금 흑암의 두터운 껍질을 벗고 새로운 진리를 발견토록 하는 안목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그의 구원론은 중세교회의 구원론의 틀을 완전히 벗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고 있으며, 오늘날의 법정개념으로써의 칭의 개념이 인간본질의 개념인 성화의 개념과 구분되고 있지 않으며, 불신자의 구원하는 믿음이 신자의 순종의 믿음과 구분되지 않고 중첩되고 있다. 또한 중세교회의 합일치 공덕은 믿음으로, 성화케 하는 은혜와 연합으로 이루는 완전 공덕은 하나님의 전가로 대치시키고 있다.
그러나 루터는 중세교회의 공덕개념을 완전히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바꾸어 놓았으며, 구원을 하나님의 선물로 만들고 있다. 비록 루터에게서 무죄선언으로써의 칭의 개념은 없지만, 그의 이신칭의에 대한 확신은 결국 성서에 대한 주의력을 집중시켰으며, 성서로 돌아가게 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고, 따라서 오늘 우리 성도들은 그의 덕택으로 바른 구원론을 발견케 된 것이다.
루터에게 있어서 구원의 근원은 하나님의 은총이며, 믿음은 그 구원에 이르는 도구이며, 침례는 구원을 받는 시간이며, 구원의 목적은 선행이다. 루터는 침수를 주장하였을 뿐 아니라, "의는 침례 가운데서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했고,(51 "그리스도께서는 침례 가운데서 구원을 부여하신다"고 주장하였다.(52
또한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에 대해서 그는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에 대해서 완전하게 자유로운 주인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아니한다. 그리스도인은 모두에게 완전하게 의무를 가진 종이며, 모두에게 예속된다"고 했고,(53 "그리스도인은 자신 속에서 살지 아니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의 이웃 안에서 산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고 하였다.(54 이것이 바로 루터가 가르치는 구원받은 자의 참다운 모습이다.
루터의 믿음은 모든 이에게 선을 행하는 믿음이요, 모든 사람을 섬기는 믿음이요, 모든 고난을 참아내는 믿음이었다. 루터의 의는 그리스도와 함께 인간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 가는 삶이요,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의 삶이었다. 따라서 루터가 말하는 의인은 죄를 멀리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자신의 유익보다는 남의 유익을 구하며 하나님께 대하여는 경건하며, 모든 것에 자유하면서 그 자유를 진정으로 누릴 줄 알고,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왕이요, 모든 이의 종으로써 자신 속에 살지 아니하고, 이웃 속에 살면서 그들을 섬기는 제사장이요, 썩고 병들고 부패된 교회, 성직이 매매되고 면죄부가 판매되고 부도덕이 자행되던 교회에 의연하게 맞설 수 있었던 예언자였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일 천만 의인이 있다고 하지만 소돔과 고모라성에서 의인 열 사람을 찾을 수 없었던 그 기현상이 오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루터의 의인론은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많다고 할 것이다.
http://www.sunslife.com/bbs/view.php?id=4001&no=522
------------------------------------------------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 문제제기
시기 : 1483~1546
분야 : 종교 지도자 ,종교 개혁자
출생지 : 시골인 아이슬레벤(Eisleben)
저서 :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로마서 강의
내용:루터는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나 에르프르트 대학(University of Erfurt)에서 수학을 하였고 1507년에 사제(신부)가 되었으며 1512년에는 신학 박사가 되어서 성서학 교수로 재직을 하였다.
그는 자신의 구원 문제에 대한 확실한 확증을 갖고 싶어 하였다. 루터는 우선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수도승이 되어 수도원에서 생활을 하면서 그 규례나 법칙을 지켜보면서 구원의 확신을 찾을려고 하였으나 구원의 확신을 얻지 못하고 영적인 방랑자가 되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영적 방랑을 계속하든 루터는 신약 성서를 공부하던 중에 구원의 의미를 깨달을 수가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선행으로는 도저히 구원의 대열에 끼일 수 없음은 깨닫고 오로지 예수의 속죄양 되심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구원의 반열에 들어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 후 루터는 믿음을 통해서 의롭게 되며 구원을 얻을 수 있다라는 가르침을 자기의 중심 사상으로 확고히 자리매김 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카톨릭 교회에서는 오직 전통만을 고집하여 성경을 평신도는 소유 할 수도 없었으며 그 내용도 알 수가 없었으므로 그 해석에서 많은 오류가 나타났고 교황 청에서는 면죄부를 판매하고 있었다. 이 면죄부란 사람이 범죄를 했을 때에 신부 앞에 나가서 고해성사를 하고 그 죄에 합당한 돈을 내고 면죄부를 사는 것이며 이 면죄부로 죄를 사함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성경에 반하는 일들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일은 당시의 최고 권력 기관인 교황청에서 행하는 일이어서 어느 누구도 감히 이의를 제기 하지 못하고 있었고 만일 문제를 제기하면 이단으로 파문 당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지금까지의 터득한 성경 지식에 의하면 도저히 용납 할 수가 없는 내용이어서 여기에 반하는 95개항의 항의문을 작성하여 1517년 10월 31일에 비텐베르크 성당의 정문에 붙이고 교황청의 오류에 대한 토론으로 도전하고자 하였다.
결론적으로는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는 결과를 초래 했으나 당시 그의 견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으므로 루터는 종교 개혁의 필요성을 더욱 느꼈고 직접적으로 교황에게 도전 하기에 이르렀다 루터는 당시 천주교의 총괄 위원회를 비판하며 실수할 수도 있으나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사제이다 라고 주장 하였다. 그 뿐이 아니고 교리적인 면에서 교황은 성경으로부터 떠나 있다고 분명히 말하므로 1521년에 카톨릭으로부터 파문을 당하게 되었다.
파문 당한 루터는 당시의 카톨릭 법에 의하면 잡히면 화형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그를 돕는 많은 동지들의 도움으로 계속해서 종교 개혁을 지속할 수가 있었다. 그를 도운 사람 중 한 사람이 섹슨 프레데릭이다. 그는 바르트 버그 성주로서 루터의 신변을 숨겨주고 보호하여 주었으며 루터의 종교 개혁의 동조자였고 협력자였다.
루터는 바르트버그 성에서 두 달 반 가량을 머물면서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평신도들에게 배포 함으로 드디어 일반인들도 성경을 읽을수 있게 되었으며, 그 후 10 여년동안에(1522~1532) 외경을 포함한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데 성공하므로 성경의 소유물이 사제들만의 것이 아니게 되었고 루터의 업적 중에 제일 위대한 업적이 되었다.
어느 누구든지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성경을 읽음으로 당시의 카톨릭이 얼마나 성경에 반한 일들을 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어서 루터의 종교 개혁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다.
이 종교 개혁은 1517년 이후에 급속도로 번져갔으나 1524~1525년에 일어난 농민봉기로 잠시 주춤하기도 했으나 카톨릭과의 사이에 전쟁의 상황까지 이른다.
그 후 1555년에는 루터와 카톨릭 양측간에 옥스버그 평화 협정을 맺게 되어 각 나라가 정한 종교가(루터교이든 ,카톨릭교이든)그 지역의 종교가 된다는 규례를 정함으로 루터의 종교 개혁은 빛을 보게 되었다.
http://www.sunslife.com/bbs/view.php?id=4001&no=5
------------------------------------------------
루터와 종교개혁의 시작 - 1
1) 루터와 종교개혁의 발발
정치적으로, 교회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복잡하여 많은 점에서 개혁이 요구되었으나, 어떤 새로운 개혁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15세기 말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만스펠트 공작령인 아이스레벤 (Eisleben) 에서 1483년 11월 10일 태어났다. 루터의 할아버지, 즉 루더 (Luder) 가정은 아이스레벤 큰처에 있는 뫼라 (Moehra) 출신의 농부였다.
루터의 부친인 한스(Hans)는 네 아들 가운데 장남이었고, 막내가 부친의 농가를 상속받기 때문에 1483년 가을 아이제나흐 (Eisenach) 의 린데만 (Lindemann) 출신인 부인 마가레트 (Margarete) 와 함께 새로 발견된 구리광에서 광부로서 일하고자 만스펠트 공작령인 아이스레벤으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1483년 11월 10일 자정 무렵 그의 둘째 아들이 태어났고,
그 시대의 관례에 따라 다음날 베드로 교회에서 신부인 바톨로메우스 렌네베쳐 (Bartholom us Rennebecher) 의 집례로 그 날의 성인인 마틴 (Martin) 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 그러나 루터의 아버지는 이곳 아이스레벤에서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처럼 보이며, 그 때문에 1484년 초여름 작은 가족을 이끌고 만스펠트 (Mansfeld) 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그는 우선 일반 갱부로서 일했다. 그러나 1491년 다른 만스펠트인과 함께 작은 제련소를 임대하는데 성공했고, 곧 유명하게 되었으며, 재산도 어느 정도 모을 수 있었다.
1488년 마틴은 시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입학했다. 거기서 그는 읽기, 쓰기, 노래하기, 그리고 라틴어를 배웠다. 라틴어를 배우는 학생들은 알렉산더 드 빌레디에 (Alexander de Villedieu) 의 교과서 (Doctrinale), 라틴어 구문론에 의거하여 동사변화와 명사변화를 읽혔다. 어린 마틴은 Pseudo-Cato, 이솝 그리고 Terenz 를 배웠다. 가정에서의 교육은 비교적 엄했고, 경건이 특별히 지배했던 것은 아니지만, 종교적이었다. 1497년 봄에 마틴은 마그데부르크 (Magdeburg) 의 성당학교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그는 성당학교에서 강의한 공동생활형제단 (Br dern vom gemeinsamen Leben) 과 함께 살았다. 경건운동인 새로운 헌신 (Devotio moderna) 이 어린 마틴에게 특별히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그에 관한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그러나 공동생활형제단의 종교적인 진지함이 마틴에게도 역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1498년 부활절에 그는 마그데부르크를 떠났다. 왜냐하면 부모가 그를 저렴한 비용이 드는 아이제나흐의 성 게오르크 신부학교 (Pfarrschule St. Georg) 로 보냈기 때문이다. 루터는 경건한 고타 (Cotta) 의 가정에 묶으면서 샬베 (Schalbe) 의 집에서 매일 양식을 얻었다. 물론 그 대가로 루터는 그 집 자녀들의 학교 숙제를 돌봐주어야만 했다. 프란시스코적인 영향으로 고타와 샬베의 가정에는 중세후기의 경건이 크게 지배했고, 어린 마틴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1501년 4월 말 루터는 에어푸르트 대학에서 학업을 시작했고, 의무과목인 자유예과 (artes liberales) 의 7 과목, 즉 문법, 수사, 변증의 세 과목 (Trivium) 과 수학, 음악, 지리, 그리고 천문의 네과목 (Quadrivium) 을 공부하는 인문학부에 등록했다. 인문학사 학위 (magister artium) 로 이러한 과정을 마친 사람은 더 높은 그 다음 단계의 학과, 즉 신학, 의학 또는 법학공부를 결정할 수 있었다.
루터는 인문학부의 규정들을 가능한 한 신속하게 완수했고, 1505년 1월 7일 인문학사 학위 시험을 통과했다. 에어푸르트 대학의 학문적 경향은 새 길 (via moderna), 즉 오캄의 인식론적인 원리를특징으로 하는 노선이었다. 이러한 경향에 의하면, 실재 (Realitaet) 는 개별적인 것이거나 혹은 경험되는 것이며, 실재의 틀을 묘사하려고 시도하는 보편 개념들은 정신내적인(intramentale), 즉 우리의 사고 속에만 존재하는 실재이다 (universalia sunt post res).
루터의 가장 중요한 스승은 아이제나흐 출신의 요도쿠스 투르트페터 (Jodokus Trutvetter) 와 우징겐의 바톨로메우스 아르놀디 (Bartholomaeus Arnoldi von Usingen) 였다. 1518년 5월 9일자 투르트페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루터는 스승인 그에게서 성서적 진리와 자연적 이성을 구분하는 법을 배웠다고 쓰고 있다: Ex te primo omnium didici, solis canonicis libris deberi fidem, ceteris omnibus iudicium (rationis). (WAB 1,17 1,72f.: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에게서 나는 모든 성경에서 신앙만이 가장 중요하며, 다른 모든 것은 이성의 판단이라는 것을 배웠다"). 루터의 이러한 회상은 새 길 (via moderna) 이 대변하는 철학과 계시의 엄격한 구분과 서로 일치하는 것이다.
인문학부를 마친 후 루터는 - 아버지의 소원에 따라 - 법학 공부를 시작한다. 만스펠트에 있는 부모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루터는 1505년 6월 2일 스토테른하임 (Stotterheim) 에서 커다란 폭우를 만났다. 번개가 그의 옆을 때렸고, 그로 인해 그는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으며, 성 안나 (die heilige Anna) 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간절히 기도하며 "내가 수도사가 되겠다"는 서원을 덧붙였다.
극도로 긴박한 상황에서 이러한 서원이 튀어나오긴 했으나, 결코 우연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아마도 루터는 이미 그 이전에 수도사가 될 가능성을 생각했을 수도 있다. 엄청난 수의 수도원, 당시 인구에 비해 높은 비율의 수도원 종사자들, 구원에 대한 불안등 이러한 가능성을 깊이 고민하며 영원한 심판자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가치를 찾게 할 동기는 충분했다.
그는 우선 에어푸르트에서 이처럼 우연히 이루어진 서원이 정말로 구속력이 있는지를 생각한 후에 수도사가 되는 길을 택했고, 1505년 7월 17일 에어푸르트의 어거스틴 엄수파 (Augustiner - Eremiten) 수도원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강하게 반대했지만, 결국 부모도 루터의 결정에 동의했다. 견습적인 수련기간 후 루터는 1506년 9월 서원식을 했고, 어거스틴 엄수파 수도원 정식 회원이 되었다.
금욕적 삶의 수행이 초기 수련시절의 주된 교육내용이었다. 처음에 그는 다른 모든 초보수련생들처럼 수련부장인 요한 폰 그레펜슈타인 (Johann von Grefenstein) 으로 부터 수도원에서의 행동방식과 어거스틴적 규율에 대해 교육받았다. 교육의 큰 비중은 영적인 교육수단인 성서강의에 있었다. 이것은 고해와 더불어 수련생 교육의 핵심을 이루었다. 조용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수업과 더불어 수련생은 동시에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관찰해야만 하며,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은 - 규정에 따라- 수련부장에게 큰소리를 신중하게 그리고 겸손히 고해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초보 수련생인 루터에게 내면적인 자아분석이 일어나게 되었고, 결국 이것이 잘 알려진 그의 수도원의 영적시련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전보다 더욱 그는 장차 임할 하나님의 심판에서 용서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의심과 심판에 대한 공포에 사로 잡혔다. 물론 이러한 경험은 수련부장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어린 루터를 영적으로 돕고자 힘썼다.
격렬한 영적시련은 간혹 평안한 상태를 동반하며 계속되었고, 이때마다 루터는 만사를 제쳐두고 성서강의와 중세후기의 교육적인 서적들을 탐닉했다. 그렇지만 구원에 대한 공포 내지 심판의 두려움은 결코 그를 자유케 하지 않았으며, 계속해서 그를 엄습했다. 당시의 그러한 경험을 루터는 1518년에 이렇게 썼다.
이러한 형벌을 종종 겪었다고 확신한 한 사람 (고후 12,2) 을 나는 알고 있다. 형벌은 잠시였지만, 말로도 글로도 형언할 수 없을정도로, 경험하지 않고는 결코 믿지 않을 정도로 가혹하고, 지옥과 같았다고 한다. 형벌이 절정에 도달하거나 반나절만 지속되었어도, 아니 한 시간의 십분의 일만 지속되었어도 그는 완전히 사라졌을 것이며, 그의 모든 뼈는 재가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여기서 그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두렵고 무서운 분으로 나타나고 있다.
거기는 도망도 없고, 위로도 없으며 안도 없고 바깥도 없으며, 모든 것이 기소자가 될 것이다. 그때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내가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시31,22). 이순간에 감히 다음과 같이 말할 자가 없다.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소서" (시6,1). 이 순간에 영혼은 언젠가는 죄사함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 형벌은 영원하고, 영혼은 그것이 잠시뿐이라고 간주할 수 없다.
도움을 바라는 부질없는 욕망과 땅을 뒤흔드는 한숨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영혼은 어디에서 그가 도움을 간구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영혼과 그리스도와의 벌어진 간격은 너무나 커서 그 모든 다리들을 동시에 셀 수 있으며, 가장 통렬한 고통이 아닌, 두려움, 전율, 그리고 슬픔으로 가득찬 그곳에는 빈각이 없다. 게다가 이 모든 것들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다. 비유를 들어 설명해보자. 공이 일직선상의 선을 지나가게 될 때, 닿게 되는 선의 모든 점은 공을 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 전체와 접촉되는 것은 아니다. 영혼도 이와같은 원리이다.
그 위를 지나는 작은 홍수라도 접하면 영원한 형벌 외에 어떤 것도 느끼지 못하며 마시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은 머물지 않고, 그 위를 지나간다. 만약 지옥의 형벌, 즉 어느 누구도 견딜 수 없고 그에 알맞는 위안도 존재하지 않는 공포가 살아있는 자들에게 주어진다면, 연옥에서의 영혼의 형벌보다 더 긴 것처럼 보일 것이다. 내적인 불이 외적인 불보다 훨씬 더 무섭다. 이것을 믿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영적시련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자신의 인식과 자신을 낮춤에서 신적인 심판을 선취하는데 목표를 둔 어거스틴 엄수파 수도원의 겸손신학은 작은 도움만을 줄뿐이었다. 중세의 성례전 역시 루터를 한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왜냐하면 성례전을 통해 매개된 은총을 공로가 되는 행위를 통해 보전할 수 있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에어푸르트 대학교수들의 스콜라신학은 은총의 수용을 "facere, quod in se est"의 성향에 매어 놓았다. 이것은 은총을 받기에 적합한 모든 것을 정말 다 행하였는지 결코 알 수 없어 마음졸이는 수도승을 불안케 했다.
루터가 수도원에서 겪은 영적시련과 침체를 병리학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지의 문제는 심리분석가인 에릭슨 (E. Erikson) 의 연구 (Der junge Mann Luther, 1970) 와 함께 일찍이 부인되고 있다. 왜냐하면 수도원에서의 영적시련은 계속 평온한 국면과 교체되었고, 루터는 높은 영적인 업적을 쌓을수 있는 능력도 있었기 때문이다.
에릭슨은 루터의 영적시련의 경험보다는 새시대로 접어드는 문턱에서 루터뿐만 아니라 중세후기 사람들의 특징이었던 종교적 동질성 위기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루터는 이러한 동질성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장기간의 지불유예 (Moratorium) 를 필요로 했다. 이러한 유예의 기간에도 루터는 언제나 수도원의 규율을 잘 지켰고, 수도원 예배 공동체 속에서 살았다.
1506년 수도사 서원식을 거행한 후, 루터는 지체없이 사제가 될 준비와 이러한 목적으로 튀빙겐의 신학교수인 가브리엘 빌 (Gabriel Biel) 의 미사정경의 주해 (Expositio Canonis missae) 를 공부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1507년 4월 4일 루터는 에어푸르트 성당에서 사제가 되었고, 1507년 5월 2일주일 칸타타에서 수도원 동료, 부모 그리고 친구들이 참석한 가운데 신임신부의 첫 미사를 축하했다.
신부가 된 후 수도원 원장은 정식 신학공부를 그에게 명했다. 이것은 먼저 교단자체의 일반수업에서 시작했다. 선생이자 수업의 책임자는 신부였던 요한 나딘 (Johann Nathin) 이었다. 그는 튀빙겐의 오캄주의자인 가브리엘 빌의 학생이자 추종자였다. 그는 서방에서 조직신학 수업의 기본 텍스트로 사용되었던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의 교의학에 대한 강의를 했다.
이 수업외에도 루터는 주해강의를 들었다. 해석학적인 참고서로서 성서주해 (Glossa ordinaria) 를 사용했다. 이것은 중세 주해가인 니콜라우스 폰 리라 (Nikolaus von Lyra) 가 성서 전체를 주석한 책이다. 또한 그는 조직신학적이고 신학적인 핵심 주제를 다룬 가브리엘 빌, 피어르 다이 그리고 오캄의 교의학 주해를 공부했다.그러므로 루터는 먼저 유명론적이며 오캄주의적인 신학을 공부했으나, 이것으로 그의 내적인 영적시련은 극복할 수가 없었다.
1508년 가을 루터는 비텐베르크에 있는 어거스틴 엄수파 수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어거스틴 엄수파 수도원에 할당된 도덕철학 (Moralphilosophie) 을 볼프강 오스테르마이르 (Wolfgang Ostermayr) 신부 대신에 비텐베르크 대학 인문학부에서 강의해야만 했다. 여기서 그는 이제 한주에 네 번씩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메니우스 윤리학을 읽어야만 했고 야간에 한번 학생들의 토론을 지도해야만 했다.
동시에 그는 신학부에서 자신의 공부를 계속해 나갔다. 1509년 3월 비텐베르크에서 성서학사학위 (Baccalaureus biblicus) 를 받은 후, 인문학부의 도덕철학 강의 외에도 신학부가 그에게 지정하는 성서의 몇 개의 장에 대하여 두 번째 강의를 해야 할 의무가 부여되었다. 1509년 10월 루터는 에어푸르트로 돌아왔고, 이곳에서 스스로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의 교의학 (Sentenzen)을 읽었다. 루터는 당시 이 책을 에어푸르트 수도원 도서관에서 빌렸고, 여백에 기입해 넣은 일련의여백주기 (Randbemerkungen) 는 아직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루터는 여전히 오캄주의 신학의 노선에 있고, 그들과 같은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죄론과 은총론에 있어서는 새로운 강조점도 나타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악취가 나는 철학자" (ranzigen Philosophen) 라고 비판도 하고 있다. 그의 인간학이 스콜라 신학을 잘못 인도하여 인간에게 있는 은총을 영혼의 내재적 질 (eine habituale Qualitaet) 로 이해하도록 했고, 이로 인하여 은총의 직접성 (Unmittelbarkeit) 과 임의로 사용할 수 없는 성격 (Unverfuegbarkeit) 이 손상될 위험에 빠졌다.
롬바르두스의 교의학 공부는 1509년 가을 루터가 조직신학사(Sententiarius)가 됨으로 일단락 되었다. 롬바르두스 연구와 함께 그는 이제 어거스틴을 연구했고, 어거스틴의 소책자들 외에도 삼위일체론 (De trinitate) 과 신의 도성 (De civitate Dei) 을 공부했다. 그렇지만 어거스틴의 반펠라기우스 저서들을 아직은 연구하지 않았다. 1510년 11월 루터는 수도원내 다른 동료 한 사람과 더불어 로마에 파송되었다.
어거스틴 엄수파 독일지부 총 책임자인 요한네스 폰 스타우피츠(Johannes von Staupitz)가 주도하는 규율의 통합, 즉 좀 더 강한 규율의 추진과 작센지역의 헤이해진 수도원들의 수도사 통합을 에어푸르트 수도원의 이름으로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로마에서 개최된 수도원 총회에서 에어푸르트 수도원의 이러한 반박은 성공여부가 불투명했고,얼마 지나지 않아 기각되었다.
루터는 4주간 로마에서 체류했다. 르네상스적인 로마 성직자들의 세속화가 루터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로마에 있는 일곱 개의 주요 교회를 일일이 방문하면서 거기서 제공하는 은총의 수단을 얻고자 노력했다. 로마에서 루터가 종교적 오류를 보지 못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엄청난 은총이 그곳에 있음을 느꼈으며, 결국 긍정적인 인상이 더 많았다. 로마에서 돌아온 후 루터는 에어푸르트에서 수도원내 대다수의 의견과는 달리 독일지부총책임자인 요한네스 폰 스타우피츠의 중재안을 지지했다.
스타우피츠는 결국 루터를 1511년 비텐베르크로 불렀고 박사과정으로 신학수업을 끝마치도록 요구했다. 그는 루터를 동시에 비텐베르크 수도원의 담당 설교자로 임명했다. 루터는 이제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에게 규칙적으로 설교해야만 했다. 1512년 10월 19일 박사과정 최종 시험인 토론에 이어 학위수여식이 개최되었고, 1512년 10월 22일 신학부 교수가 되었으며, 대학평의회의 일원이 되었다.
스타우피츠는 이제 수도원 업무로 인해 자신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성서학 교수직(lectura in biblia)을 루터가 수행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결정은 초기 루터의 생애에 중요한 진로를 확정지어준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행한 집중적인 성서주해는 스콜라신학의 껍질을 그에게서 하나씩 벗겨주었고, 1515/16년 바울서신 주해를 토대로 소위 종교개혁적인 돌파가 일어났다.
루터가 영적시련을 겪을 때에 그를 위로하고 새로운 길로 접어들도록 조언을 해준 것은 스타우피츠였다. 어느날 도대체 그 자신이 예정된 자인지 혹은 아닌지에 대한 송곳과도 같은 문제가 그에게 다시 일어났을 때, 스타우피츠는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예정에 대하여 논의하고자 한다면, 그리스도의 상처에서 시작하라. 하나님에 의해 예정되고, 죄인을 위해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가슴에 새겨라.
그러면 예정으로 인한 영적시련은 사라질 것이다." 스타우피츠는 루터가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금욕적인 겸손의 참회를 할 때도 참회를 하나님이 은총으로 선물한 사랑의 결과라고 토마스적으로 이해함으로서 영적시련 가운데 있는 루터를 계속 도와주었다. "참된 참회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시작한다." "이 말은 번개처럼 나를 강타했고, 장사의 화살처럼 내 영혼에 박혔다"고 루터는 1518년 쓰고 있다.
스타우피츠에게서 넘겨받은 성서학 강의 (lectura in biblia) 는 루터로 하여금 스타우피츠가 해준 영적인 상담들을 바울 서신 주해를 통해 더 깊이 이해하도록 해주었고, 종교개혁의 기반을 삼도록 이끌어 주었다. 1512년 10월 루터는 비텐베르크 어거스틴 엄수파 수도원의 강의실에서 첫 강의를 시작했고, 아마도 창세기를 읽었으며, 1513년 8월부터 1515년 7월까지 시편을 강의했다. 주해를 위해 시편을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루터는 수도사로서 매일 시편을 노래했었고,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직도 많이 있었다.
가령 시편 31편1절의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In tua iustitia libera me) 가 그를 괴롭게 했다. 왜냐하면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그를 구하며 자유케 하는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1513-1515년의 일차시편강의 (Dictata super psalterium) 는 볼펜뷔텔 시편 (Wolfenbuetteler Psalter) 에 자구해석 (Glossen) 이 그리고 드레스덴 시편 (Dresdner Psalter) 에 본문주해 (Scholien) 가 남아 있다.
오늘날 볼펜뷔텔의 에른스트-아우구스트 도서관 (Ernst-August-Bibliothek) 에 있는 자구해석 (Die Glossen) 은 루터가 강의를 듣는 학생들을 배려하여 줄 간격이 넓게 인쇄한 불가타 시편본문을 사용했다. 강의에서 그는 줄과 줄 사이에 있는 넓은공간에 자구해석을 기입했고, 그 후 소위 본문주해에 자필로 쓴 각 구절의 주해를 시작했다. 이러한자료를 근거로 우리는 중세 후기 오캄주의로부터 종교개혁적인 성서신학자가 되기까지 루터의 발전을 추적할 수 있다. 중세의 전통적인 이해처럼 루터도 시편을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한다.
다윗은 시편에서 그리스도의 운명을 예언적으로 선취하고 있다. 이에 상응하여 루터는 프랑스의 인문주의자인 파버 스타플랜시스 (Faber Stapulensis) 와 그의 시편주해인 5개역 대조시편 (Psalterium Quincuplex) 의 도움을 받아 시편이 가지고 있는 이중의 문자적 의미 (sensus literalis) 를 구분하고 있다. 즉 하나는 다윗에게 연관시키는 역사적인 문자적 의미 (sensus literalis historicus) 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에게 연관시키는 예언적인 문자적 의미 (sensus literalis propheticus) 이다.
예언적인 문자적 의미 (sensus literalis propheticus) 가 루터에게는 시편이 가진 본래적 의미 (sensus primarius) 이다. 사중적 성서해석이라는 중세의 전통적인 주해방식에 맞추어 루터는 예언적인 문자적 의미를 해석하고 있다. 사중적 성서해석이란 이미 언급한 문자적 의미 (sensus literalis) 와 함께 개개인과 그의 행동에 해석의 방향을 맞추는 도덕적 의미 (sensus tropopogicus), 교회에 초점을 맞추는 비유적 의미 (sensus allegoricus), 그리고 교회와 마찬가지로 각 개인의 종말론적인 완성으로 해석하는 신비적 의미 (sensus anagogicus) 를 말한다.
루터 자신은 시편의 그리스도론적 의미인 예언적 문자적 의미와 도덕적 의미의 관계에 점점 더 집중했다: "왜냐하면 예언적 문자적 의미에 따라 하나님의 역사로서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은 도덕적 의미에 의한다면 우리 안에 있는 신앙을 말한다" (WA 3,458,8-11).
그러므로 시편 71(72)편 2절에 대한 본문주해에서 루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심판 (iudicium Dei) 과 하나님의 의 (iustitia Dei) 를 도덕적 의미로 겸손과 신앙의 관계로 해석한다. 죄인인 모든 육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시에 나타났다.
어떻게 십자가의 역사를 신앙으로 이해해야만 하는지를 루터는 도덕적 해석 (sensus tropologicus) 의 틀로 주해한다. 도덕적 해석에 의하면, 하나님의 심판은 겸손 (humilitas) 이며 그리고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fides Christi) 이다. 신앙인은 겸손으로 자신을 판단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선취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할 것임을 바랄 수 있다.
비록 여기서 루터가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의를 구분하고, 겸손과 신앙을 도덕적으로 구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진술은 금욕적인 그의 십자가 신학으로 분류되고 있다. 십자가 신학은 믿는 자는 참회의 자기 심판에서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선취하고 (고전 11,31),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면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향하게 된다는 사실에서 출발한 것이다.
루터는 여기서 신앙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와 연관시키고 있고,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그가 일차시편강의에 이어 1515년 11월부터 1516년 9월까지 한 로마서 강의에서 비로소 종교개혁적인 돌파구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 강의는 루터가 하나님의 의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변화를 겪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강조점은 더 이상 겸손에 있지 않으며, 신앙에 있다. 그리고 이 신앙은 루터가 근원적 죄 (peccatum radicale) 라고 말하는 원죄 (Erbs nde, WA 56,277,12) 를 멀리하며 우리 밖에 그리스도 안에 (extra nos in christo, WA 56,158,9) 있는 하나님의 의를 붙드는 신앙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기 때문이며 (고전 1,30), 이 모든 것은 오직 그를 향한 신앙과 소망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것이다. 그 때문에 교회의 모든 찬양은 그리스에게 속한 것이며, 그리스도는 신앙을 통해 교회 안에 사시는 것이다" (WA 56,279,23-26).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외적이며 낮선 하나님의 의이다 (WA 56,158,13f. 159,2). 우리 안에는 세례를 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죄가 남아 있으나, 그러나 이 죄는 "그리스로 인하여 덮여 있고, 간주되지 않는 죄이다" (WA 56,280,2f.). 로마서 1장 17절 해석에서 루터는 그 때문에 사람 앞에서의 의 (Gerechtigkeit) 와 하나님 앞에서의 의를 구분하고 있다.
인간적인 교리에는 인간의 의가 드러나고, 누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그 자신과 사람들 앞에서 의롭게 되는지를 가르쳐 준다. 그러나 복음에는 오직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며, (즉 누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의롭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지), 즉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신앙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것이다. 마가가 마지막에 말한 것이 이것이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막16,16).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는 구원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를 그것을 통해 자신이 스스로를 의롭다고 하는 의로 이해해서는 안되며, 그 의를 통해서 우리가 그로부터 의롭게 되어지는 의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복음을 믿는 믿음을 통해 일어난다.
그 때문에 성 어거스틴은 그의 책「영과 문자에 관하여」(Vom Geist und vom Buchstaben) 11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의'는 그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으로 인간을 의롭게 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주의 구원' (Heil des Herrn) 이 그것을 통해 그가 구원하신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같은 책 제9장에도 동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즉 하나님의 의는 행위에서 오는 인간의 의와는다르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윤리학 3권에서 분명히 쓰고 있듯이, 그의 의견에 의하면 의는 우리의 행위를 쫓고 그리고그 행위로부터 일어난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의는 행위에 앞서며 행위는 그 의로부터 나온다.
루터가 여기서 신앙에 의한 하나님의 의의 발견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강조하지 않고자 힘쓸수록, 종교개혁적인 하나님의 의(義)의 발견은 해석학적인 이러한 진술 속에 표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의는 중세신학이 생각하듯, 인간이 쌓은 공적을 -비록 그것이 은총의 도움을 받아 쌓았다고 할지라도 - 마지막 날에 심판하고 재판하는 벌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구원하는 하나님의 의이며, 이 의가 구원의 원인이요, 오직 믿음 안에서만 인간에게 주어지게 됨을 루터는 인식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 이해는 루터가 로마서 강의 이후 집중적으로 사용한 반펠라기우스적인 어거스틴 저서「영과 문자에 관하여」(De spiritu et littera) 제 9 장과 11 장에 의해 확인되고 있으며, 인간의 의가 인간의 행위에서 나온다고 생각한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모순되고 있다.
루터는 1506년 요한네스 암머바흐 (Johannes Amerbach) 가 바젤에서 출판한 11권으로 된 어거스틴 전집중 반펠라기우스적인 글에 도움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이 되며, 로마서 강의 이후 이 책들을 자신의 강의에서 즐겨 사용했다. 이와 더불어 루터가 그레고르 폰 리미니 (Gregor von Rimini)에게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배제 할 수 없지만, 어거스틴 엄수파의 일원인 이 사람을 루터는 1519년에야 비로소 인용하고 있다 (WA 2,394,31-395,14). 특히 루터는 바울과 어거스틴을 토대로 중세후기 신학자인 가브리엘 빌에 대해 펠라기우스 혐의를 제기한다.
루터는 인간이 만약 자신에게 있는 것을 행할 때 (facere quod in se est) 자연적인 능력으로 구원의 은총을 획득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WA 56,502,14ff.). 자유의지는 구원과 관련해서는 전적으로 무익한 것이며(WA 56,182,9f. 385,15ff.), 욕망 (concupiscentia) 은 스스로 이타적이기를 원하지만 은총이 없이는 그럴 능력이 없는 무능한 전인(全人)과 관계하고 있다 (WA 56,356,2ff). 루터는 이제 원죄를 항구적(恒久的)이면서 근원적으로 인간을 규정하는 인격의 죄 (Person-S nde)라고 강조한다 (peccatum radicale: WA 56,277,12).
어거스틴의 도움 (de nupt. et conc. 1, 10,25,28) 으로 루터가 확신하듯이, 원죄는 "세례에서 용서를 받지만, 그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이다" (WA 56,273,9ff.). 원죄는 새로운 유혹으로 다시금 죄를 불러일으키는 단순한 불꽃 (fomes) 으로 축소되는 것도 아니다 (WA 56,271,6ff). 죄 사함은 특성의 변화 (Eigenschaftswechsel) 가 아니라, 죄의 권세로부터 벗어나서 그리스도의 은총의 통치 아래 머무는 통치권의 변화 (Herrschaftswechsel) 이다 (WA 56,334,14-17).
하나님의 의는 이제 루터에게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그가 증명해야만 하는 습성적으로 인간에게 내재하는 의가 아니라, 오직 신앙으로만 그에게 주어지는 낯설고 외적인 그리스도의 의인 것이다. 이에 상응하여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다 (simul iustus et peccator, WA 56,272,17). 즉 인간은 그 자신 (혹은 우리) 밖에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고, 그 자신 안에서 죄인인 것이다 (gerecht extra se (nos) in Christo. Suender in sich selbst).
(하나님의 의에 관한 것은) 마치 한 병자의 비유와도 같다. 그에게 가장 확실한 건강을 약속하는 의사를 믿고 약속한 건강을 희망하면서 그의 처방지침을 지키고, 약속한 건강회복을 위태롭게 하지않고, 병이 악화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의사가 그에게 약속한 것이 이루어지기까지 자신에게 금지된 것을 그만두는 환자와 같은 것이다. 이 환자는 그렇다면 지금 건강한가? 아니다. 그는 아픈 동시에 건강하다. 현실에 있어서는 아프다.
그러나 그에게 이미 건강하다고 설명한 그가 믿는 의사의 확실한 언약 (ex certa promissione) 에 근거하여 건강하다. 왜냐하면 환자는 의사가 그를 치유할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것이 의사는 이미 이 환자를 치유하기 시작했으며, 의사는 그 때문에 이 환자가 사망할 것 (원죄) 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이다. ...... 그렇다면 이제 그(환자)는 완전히 옳은가? 아니다. 그는 죄인인 동시에 의인이다 (simul peccator et iustus); 실제로는 죄인이다.
그러나 완전히 치료하기까지 죄로부터 그를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확실한 언약과 참작 때문에 의롭다 (peccator rei vera, sed iustus ex reputatione et promissione Dei certa). 그러므로 그는 희망 안에서 완전히 구원받았으나, 현실에 있어서는 여전히 죄인인 것이다.
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 앞에서 용납 받을 것이라는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이러한 희망은 확실한 하나님의 언약 (certa promissio Dei) 에 근거하고 있다. 여기서 루터는 스콜라 신학이 그에게 가르쳐준 주요한 구원의 확신을 내려놓고 있다. 인간은 오로지 그 자신 밖에 (extra se)그리스도안에서 내지는 하나님의 확실한 언약 안에서 의롭게 되기에 구원과 은총의 실현을 더 이상자기 자신에게서 추론하지 말아야 하며 금욕적인 자아분석에 근거시켜서도 안된다. 이것으로 루터는 수도원에서 자신이 겪은 영적시련을 극복하도록 그리고 단계적으로 자신의 정체성 위기 (Identitaetskrise) 를 끝내도록 도와준 종교개혁적인 입장에 도달했다.
종교개혁 인식과 관련해 로마서 강의를 통해 얻은 것을 루터는 후에 그 자신이 겪은 종교개혁 체험으로 여러번 요약 기술했다. (비교. WATR 3,32〔1538〕; WATR 5.52,47〔1540〕; WATR 5.55,18〔1542/43〕그리고 무엇보다도 1545년 비텐베르크에서 출판한 라틴어로 쓰인 그 자신의 전집 (Opera latina) 서문, WA 54,185,12ff.). 위의 여러 가지 보도 가운데서 우리는, 비록 그것이 회고일지라고, 종교개혁적 인식의 관철을 핵심적으로 조명해주고 있는 두 가지를 선택하고 싶다. 우선 1532년의 탁상담화 (Tischrede) 에 있는 글이다.
"의로운" 그리고 "하나님의 의"라는 말들은 번개처럼 내 양심을 강타했다. 그 말들을 들을 때 나는 무기력해진다. 하나님이 의롭다면, 그는 벌을 내릴 것임에 틀림없다. 한번은 내가 이 탑 (비텐베르크의 어거스틴 엄수파 수도원에 있는 탑을 의미한다) 속에서 이 말씀 (롬1,17):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 것이다" (Der Gerechte wird seines Glaubens leben)와 "하나님의 의" (Gerechtikeit Gottes) 에대해서 곰곰히 숙고했을 때, 곧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일 우리가 의로운 자로서 신앙으로 살고 그리고 하나님의 의가 믿는 사람을 구원으로 이끈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내 영혼은 기운을 다시 얻었다. 그도 그럴것이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에 그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러한 말들은 내게는 가장 사랑스러운 말들이 되었다. 이 탑에서 성령이 성경을 내게 드러내 보이셨다.
루터의 종교개혁적 발견이 늘 성탑 체험으로 기술되는 것은 바로 이 본문 때문이다. 발견의 시점에 대하여 루터는 이 탁상담화에서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그 내용에 대하여는 로마서 1장 17절에서 하나님의 의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하게 되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당시까지 하나님의 의를 벌하시는 의로 이해했다면, 이제는 믿는 자를 의롭다고 여기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긍휼로 그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된다는 사실에 그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 의는 더 이상 은총 때문에 가능했던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외적인 의이며, 이것을 우리는 신앙으로만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적 인식에 대한 이러한 설명을루터는 1545년 비텐베르크에서 출판한 그의 라틴전집 (Opera latina) 서문에서 한번 더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나는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에 대한 바울 서신을 강의한 후 이제 자신 있다고 확신한 가운데 시편을 새로이 주해하기 위하여 이 해 (1518년말) 에 다시 시편으로 되돌아갔다. 로마서에 있는 바울을 알고자 하는 놀라운 열정에 나는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것은 내 마음의 차가움이 아닌, 로마서 1장 17절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났다) 의 한 단어였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의'라는 이 단어를 미워했고, 모든 박사들의 흔한 습관에 따라 소위 형식적인 또는 능동적인, 그를 통하여 하나님은 의롭고 불의한자와 마찬가지로 죄인을 벌하시는 의를 철학적으로 이해하도록 이 말을 가르쳤었다. 수도사로서 나는 흠이 없이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느꼈고, 내 양심은 불안했으며, 나의 행위를 통하여 화해될 수 있다고 소망할 수 없었다.
나는 죄인을 벌하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으며 그를 미워했다. 마치 불행하며, 원죄를 통해 영원히 저주받은 죄인들이 십계명이라는 율법으로 불행에 억눌려 있는 것이 충분치 않다고 말함으로 은밀한 모독이 아닌 엄청난 불평으로 나는 하나님을 불쾌해 했다.
하나님은 복음을 통해 고통에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으며 복음으로 역시 우리에게 그의 의와 그의 분노를 위협하고 있음에 틀림없지 않느냐? 이렇게 나는 혼란스런 양심 속에 쉬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바울이 무엇을 원했는지 알고자 하는 갈증에 목이 탐으로 끊임없이 바울의 이 구절에 대하여 문을 두드려 댔다. 그때 하나님이 나를 긍휼히 여겼다. 나는 그 말씀, 즉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서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의 연관성을 알기까지 낮이나 밤이나 끊임없이 몰두했다.
그때 나는 하나님의 의를 바로 이런, 즉 의인은 하나님의 선물로, 즉 믿음으로 산다고 이해하기 시작했고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 즉 수동적인, 그것을 통해서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우리를 신앙으로 의롭게 하시는데, 그것이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라는 뜻임을 인식했다.
바로 여기서 나는 '나는 다시 태어났고, 문은 열렸고 나는 낙원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바로그로부터 성서전체가 나에게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기억하듯이 나는 성서전체로 달려들어 갔고 그리고 다른 개념에서도 비슷한 것을 확인했다. 가령 하나님의 역사 (Werk) 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것을 뜻하고, 하나님의 능력 (kraft Gottes) 은 그것을 통하여 그가 우리를 강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지혜 (Weisheit Gottes) 는 그것을 통하여 그가 우리를 지혜롭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힘,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영광 등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전에 내가 '하나님의 의'라는 말을 미워했던 그 정도로, 이제는 나에게 가장 달콤해져버린 그 개념을 찬양했고, 바울의 이 말씀은 나에게 천국의 입구가 되었다. 그후 나는 어거스틴의 '영과 문자에 대하여' (De spiritu et littera) 를 읽었다. 거기서 나는 기대와는 달리 그 역시 하나님의 의를 비슷하게 즉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할 때 그것으로 우리를 입히시는 의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비록 그가 이것을 완벽하게 언급하지는 않았고 그리고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의(義)의) 전가로 주해하지는 않았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의롭게 되는 하나님의 의를 그가 가르쳤다는 것이 나의 눈에 띄었다.
위의 포괄적인 이러한 보도는 종교개혁적 발견에 대한 루터 자신의 진술을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루터는 다음과 같은 점을 확신하고 있다.
1) 그는 로마서 1장 17절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그것으로 죄인을 벌하시는 철학적으로 해석된 형식적이며 능동적인 의가 아니라, 수동적인 의이며, 이것을 통해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쓰여진 것처럼 믿음을 통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다.
2) 그는 어거스틴 특히 그의 반펠라기우스적인 저서 「영과 문자에 대하여」(De spiritu et littera)에서 이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어거스틴 역시 여기서 인과적인 의 이해를 가르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의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의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말은 완전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는, 루터에 의하면, 하나님의 전가(Zurechnung)에 대하여 아직은 모든 것을 바르게 가르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세례 또는 참회에서 하나님의 의가 죄용서라는 형태로 단지 처음에만 인간에게 인정된다. 그렇다면 그것은 은총 혹은 사랑과 동일 한 것이며,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의지를 공로가 되는행위를 하도록 회복시킴으로서 의롭게 한다. 그러나 루터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낯선 의는 믿는자에게 일생동안 인정되는 것이며, 신앙인은 행위에 앞서 믿음 안에서 완전히 단 한번에 의롭게 되는 것이다.
3) 복음은 새로운 율법 (nova lex) 즉 은총으로서 의를 행하도록 요구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연유되는 수동적인 칭의의 계시이다.
4) 신앙에 의한 칭의의 발견은 루터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주었다.
5) 거기서부터 루터는 이제 성서에 하나님의 행동을 표현하는 어휘들을 새롭게 이해한다. 6) 시점에 대하여는 바울 서신 주해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충분히 다룬 이후에 1518년 말 시편주해를 다시 시도했음을 알 수 있다.
종교개혁적 발견의 시점에 대한 이러한 언급이 오늘날의 루터 연구를 서로 다른 두 개의 방향으로 이끌었다. 하나는 종교개혁적 발견을 로마서 강의시의 1515/16년으로 보는 초기설 (Die Fruehdatierung) 이며 (E. Hirsch, E. Vogelsang, G. Ebeling, R. Prenter, H.A. Oberman, L. Grane, B. Lohse, R. Schwarz), 다른 하나는 1518년으로 보는 후기설 (Die Spaetdatierung) 이다 (E. Bizer, O. Bayer, K. Aland, M. Brecht).
초기설에 의한다면, 루터는 신앙에 의한 하나님의 의를 바울서신을주해하는 동안에 발견했고, 후기설에 의한다면 바울서신 주해 후 이차시편강의을 시작하면서 발견한 셈이다 (1518-1521). 루터의 로마서 1장 17절 주해 (1515/16) 와의 내용적인 일치 및 거기서 보여주는 어거스틴의 저서 (De spiriru et littera) 인용과 로마서 강의가 보여주는 스콜라 신학과의 폭넓은 논쟁등은 본인에게는 초기설이 더 적합하게 보여진다.
그렇지만 루터가 로마서 1장 17절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의를 해석학적으로 발견했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발견의 결과를 완전히 인식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도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 이에 상응하여 그의 신학은 여전히 이제는 그가 단계적으로 벗어야 할 중세 후기의 사상들을 담고 있었다.
로마서 강의를 통한 스콜라 신학과의 루터의 대립이 비텐베르크 대학 여론을 자극시켰다는 사실도 배제할 수 없다. 그 때문에 루터는 스콜라신학과 자신의 대립을 토론하기 위해 당시 통용되었던,즉 학문적인 토론 방식을 활용했다. 그는 조직신학사 (Sententiar) 시험을 준비하는 제자인 바톨로메우스 베른하르디 (Bartholomaeus Bernhardi) 에게 "은혜 없는 인간의 의지와 능력에 대해" (De viribus et voluntate hominis sine gratia) 몇가지 논제를 자신의 로마서 강의를 토대로 제시하도록 제안했다.
이 논제를 증명하는 데에는 성서 외에 무엇보다도 어거스틴의 반펠라기우스적인 저서가 사용되었으며, 인간은 은혜가 없어도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의 계명을 성취할 수 있다거나, 또 은총을 예비할 수 있다는 생각은 배제되었다. "의지는 자유하지 못하며, 마귀의 노예이고, 그 때문에 인간은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할 때 단지 죄를 범할 뿐이다." 이것으로 루터는 자신의 에어푸르트 스승, 누구보다도 가브리엘 빌(Gabriel Biel)의 반펠라기우스적인 신학 (die semipelagianische Theologie) 인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행하여 은총을 예비할 수 있다는 생각이 집약된 문구인 "facere quod in se est"를 분명히 거부했다.
이러한 논쟁은 1516/17년 겨울 계속해서 또 다른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즉 어거스틴의 이해에 대한 집중적인 토론이 시작되었다. 루터의 학과 동료교수인 칼 슈타트 (Karlstadt) 는 루터에 반대하여 어거스틴을 변호하고자 노력했다. 어거스틴의 반펠라기우스적 저서의 강의는 그러나 그로 하여금 루터가 바울서신을 주해하면서 바르게 어거스틴을 인용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고, 1517년 4월 26일에 쓴 151개 논제에 그 자신이 어거스틴을 인용하면서 스콜라 신학을 공격하는 입장으로 변하게 된 것을 표현하고 있다.
프란츠 귄터 (Franz Guenther) 의 성서학사 (baccalaureus biblicus) 취득 때문에 이루어진 1517년 9월 4일 루터의 논쟁「스콜라 신학에 반대하여」(Contra scholasticam theologiam) 역시 스콜라 신학의 모순에 그 핵심이 있다. 루터는 가브리엘 빌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이 논제의 기초로 삼았다. 빌의 교의학 주해 (Sentenzenkommentar) 는 1514년에 출판되었고, 그 속에 있는 일련의 여백주기가 우리에게 그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루터는 이제 바울과 어거스틴을 근거로 스콜라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반대한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 개인 그 자체보다는, 그에 대한 스콜라의 수용을 반대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은 그들의 본질을 이루는 목표(Entelechie)을 관조할 수 있는 영혼이다. 이 목표는 영혼이 덕스러운 행동을 실현할 때 도달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간은 그가 윤리적으로 선하고, 덕스러운 행동을 실현할 때 그 본질에 도달하게 된다.
식물이 그들의 목표, 그들의 본질을 싹에서 나무가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실현하듯이, 물론 그 싹에는 이러한 나무의 성향이 본래 있는 것이기는 하나, 인간도 도덕적인 행동으로 그가 영으로 본 자신의 본질을 실현함으로서 참된 존재에 도달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올바른 행위를 계속해서 수행함으로써 의롭게 된다.
스콜라의 은총론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관점을 수용함으로서 올바른 행동을 통해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고 가르쳤다. 더 나아가서 스콜라 신학은 인간이 은총으로 계속 지원을 받아야 하며, 칭의는 세계내적인 목적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이교도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물론 전혀 알 수 없었을 영원한 목표, 즉 영원한 행복을 이루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하나님은 인간없이 인간을 창조했다. 그러나 인간없이 인간을 의롭게 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어거스틴 이후로 계속 가르쳐 온 것이나, 스콜라에 이르러 다음과 같은 차이점을 동반하고 있다. 즉 인간의 본질이 이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영혼론의 테두리에서 설명되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은총을 인간의 본질에 상응하는 존재질서 (Seinsordnung) 인, 즉 이성과 자유의지의 협력에 개입시킴으로써 인간을 의롭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또한 은총의 존재방식도 우리 안에서 윤리적인 행동의 실현 내지는 공적을 쌓는 행위에 의존하게 된다.
루터가 자신의 로마서 1장 17절 주해에서 하나님의 칭의 이해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스콜라 사상으로부터 이미 해방시켰다면, 그는 지금 스콜라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즉 에어푸르트 스콜라 신학자들의 은총론 뿐만 아니라 스콜라 전성기의 신학자들과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논제에서 이와 연관하여 다음과같이 날카롭게 언급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거의 모든 윤리는 은총의 최악의 적이다.
스콜라 신학에 반대하여 (Tota fere Aristotelis ethica pessima est gratiae inimica. contra scholast). (논제 41). 그 때문에 "인간의 행복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견해가 카톨릭 교리 (doctrina catholica) 에 모순되지 않는다" (논제 42) 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 없이는 아무도 신학자가 되지 못한다" (Sine Aristotele non fit theologus) 고 말하는 것도 잘못이다. (논제 43).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신학자가 되지 못한다" (immo theologus non fit nisi fiat sine Aristotele) 는 것이 옳다. (논제 44).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그의 존재론은 루터가 바울과 어거스틴에게서 얻은 자신의 새로운 은총론을 해석하기에는 부적합한 것임이 입증되었다.
2) 1517년 면죄부 논쟁부터 1521년 보름스 제국회의까지
루터는 그 시대 교회의 불분명한 면죄부론을 학문적인 토론속에서 설명하고자 했고, 그러한 목적으로 모든 성인들을 기념하는 만성절 (Allerheiligenfest) 하루 전날인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교회 (Schlo kirche) 문에 면죄부에 대한 95개 논제를 붙였다. 같은 날 그는 개인적인 편지를 동봉하여 이 논제를 마인쯔의 알브레히트 (Albrecht von Mainz) 에게 보냈다.
알브레히트는 자신의 마인쯔 교구와 통합된 마그데부르크에서 1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 (1503-1513) 가 베드로 교회 신축을 위해 발행한 일괄면죄부 (Plenarabla ) 을 도미니크 회원인 텟첼 (Tetzel) 을 통해 팔도록 허락했다. 같은 날 루터는 이 논제를 편지와 더불어 비텐베르크 소속 교구인 브란데부르크의 감독 히에로니무스슐체 (Hieronymus Schulze) 에게 보냈다.
루터는 후기 저서에서 이 논제를 붙인 날짜를 정확히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에드윈 이저로 (E. Iserloh) 같은 카톨릭 교회사가는 루터는 결코 95개 논제를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교회 문에 붙이지 않았다고 말한다. 다만 면죄부에 대한 소견을 기대한 채 언급한 교구 감독들에게 보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전혀 또는 만족스럽지 않게 답변하였기에 루터는 의도한 토론에 초대하기 위하여 논제를 비텐베르크 안팎의 학자들에게 배부했다는 것이다. 면죄부 논쟁 (WA 1,528,18ff 그리고 WAB 1,245,358ff.) 의 일반적 시작에 대한 두 개의 언급에서 감독들에게 보낸 서신과 논제의 배부사이에 확실한 시간적인 간격이 있기는하나, 그렇다고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토론을 목적으로 비텐베르크 성교회 문에 논제를 붙이지 않았다고 주장 할 수는 없다.
이 날짜는 물론 후에 멜란히톤이 1545년 루터 저작 2권 서문에 명시된 것이다. 멜란히톤이 이 날짜를 임의로 만들어냈다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 1517년 11월 11일 (WAB 1,121f.) 루터는 95개 논제를 에어푸르트에 있는 동료수사인 요한네스 랑 (Johannes Lang) 에게 보내며, 거기서도 이 논제를 이미 알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요한네스 랑에게 보낸 편지에서루터는 감독에게도 역시 편지를 보냈음과 반응에 대한 어떤 기대도 하고 있지 않음을 언급하고 있다.
루터는 실제로 만성절에 대학에서 통용된 방식에 따라 자신의 논제를 성교회 문에 부착했을 것이다. 면죄부 토론의 직접적인 동기는 자신에게 고해를 해야 할 비텐베르크 성교회의 피고해자들 (Beichtkinder) 이 면죄부를 구입함으로 고해의 필요성을 부인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유터보그 (J terbog) 또는 제릅스트 (Zerbst) 에서 면죄부를 구입했고, 이 도시들은 대주교인 알브레히 폰 마인쯔가 특히 브란덴부르크에서 도미니크 수도사인 요한네스 텟첼 (Johannes Tetzel) 에게 베드로면죄부 (Petersabla ) 를 판매하도록 허용한 도시였다. 선제후 프리드리히 현제 (Friedrich der Weise) 와 영주 게오르크 폰 작센 (Georg von Sachsen) 은 이에 반대하여 자신의 지역에서 베드로면죄부 판매를 금지시켰다.
중세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참회의 성례전에서 죄책과 함께 영원한 지옥의 형벌은 용서받지만,그러나 죄인의 죄를 경감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하나님이 부과한 한시적인 형벌을 용서받는 것은 아니다. 한시적인 형벌사상은 중세에 교회가 부과하는 참회형벌과 결합되었다. 이러한 참회형벌은 참회를 행할 때에 사제가 부과하는 것이며, 고해자는 경건한 행동으로 이렇게 부과된 형벌을 실천함으로서 자신에게 부여된 한시적인 형벌을 제거할 수 있었다. 면죄부는 바로 교회가 부여하는 이러한 참회형벌의 사면을 보증해 주었다.
면죄부의 역사를 보면 우선 교회는 십자군에 참여하는 사람과 특정한 십자군을 위한 기금 기부자를위해 면죄부를 발행했었다. 1300년 보니파츠 8세 (Bonifaz VIII) 는 소위 기념면죄부 (Jubelabla ) 를 발행했다. 이 면죄부는 로마의 건국을 기념하는 해에 로마에 있는 베드로와 바울의 묘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보니파츠 8세는 그러한 기념해는 100년마다 열리도록 규정했지만, 기간은점점 더 단축되어서 돈을 주고 일괄면죄부 (Plenarabla ) 내지는 특별면죄부 (Partikularabla ) 를 구입 할 가능성은 점점 더 많아졌다.
교황 율리우스 2세 (Julius II) 는 로마에 베드로 성당을 신축하고자 했고, 그 재정을 조달하기 위해1506년 일괄면죄부를 발행했다. 독일에서는 알브레히트 폰 마인쯔에게 이 면죄부의 판매를 위임했고, 면죄부 판매 수입의 절반을 푸거 가문에게서 차용한 29000 굴덴의 융자금을 상환하는데 사용할수 있도록 허용했다. 알브레히트 폰 마인쯔는 그 중 14000 정도의 두카텐 (Dukaten) 을 마인쯔 교구를 인수하는데 드는 상납금과 예복비 (Servitien- und Palliengelder) 명목으로 교황청에 지불해야만 했다. 더 나아가서 그는 10000 두카텐을 마그데부르크 교구를 인수한 마인쯔 대교구의 누적금 명목으로 로마에 지불했다. 물론 당시의 교회법이 이러한 것을 적법하게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터가 면죄부에 대하여 그 이전에도 이미 비판적으로 언급했었다면, 베드로 면죄부는 이제 면죄부 논리와 그 효용가치에 대하여 학문적인 토론을 통해 설명하려는 동기를 제공했다. 로마의 금전주의 (Fiskalismus) 뿐만아니라, 돈을 모으기 위한 형식적 참회도 그것을 방해하지 못했다. 그의 새로운 종교개혁적인 인식의 의미에서 볼 때 자신을 의롭게 하는 그리스도의 칭의를 가진 신앙인은 동시에 자신의 모든 죄에 대한 용서와 하나님의 모든 형벌의 사면을 가진 것이다.
동시에 의롭게 된자의 새로운 삶은 완전한 참회인 성서적 회개 (metanoia) 의 의미에서 볼 때 이미 용서받긴 했으나, 여전히 존재하는 원죄의 세력으로부터 매일 매일 돌아섬 속에 있는 것이다. 이에 상응하여 루터는 면죄부 논제 제1조에서 "우리들의 주요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회개하라'라고 말씀하심으로 신자의 모든 삶이 참회이기를 원하셨다"고 강조한다. 논제 1-4에서 루터는 복음적인 참회는 신자의전 생을 포괄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교황은, 만약 정말 그렇다면, 그가 부과한 교회적인 참회 형벌만을 사해줄 수 있다 (논제 5-8). 형벌을 사해줄 수 있는 교황의 권한은 죽은 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논제 8-13). 그 외에도 교황은 연옥의 심판에 대하여 아무런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죽은 자들에게 단지 중보기도의 형태 (per modum suffragii) 로만 면죄를 줄 수 있다 (논제 8-29). 면죄부가 살아있는 자들에게 갖고 있는 기능에 관한한, 그것은 구원의 확신을 매개할 수 없다. 참된 회개는 면죄부가 없어도 죄용서와 형벌의 사면을 가져오는 것이다 (논제 36-40).
논제 36에서 루터는 강조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참된 참회가 이루어졌다고 느끼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외없이 면죄부 없이도 그에게 부여되는 형벌과 죄책으로부터 완전한 용서를 받는다." 선한 행위가 사실 면죄부보다 더 나은 것이며, 그것으로 바뀌어서는 안된다. 논제 43-55는 복음의 설교가 모든 면죄부 설교보다 우위에 있음을 밝힌다. 이것은 면죄부가 판매된 곳에서 면죄부 설교는 다른 모든 설교보다 우선적이라는 면죄부 지침을 루터가 반대하는 것이다.
결국 루터는 교회의 참된 보고 (thesaurus ecclesiae) 는 복음이며 확산되고 있는 면죄부 설교는 복음과 모순되는 것임을 주장한다 (논제 69-80). 논제 62는 다음과같이 표현하고 있다. "교회의 참된 보화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의 가장 거룩한 복음이다." 이것으로 루터는 당시 인정되고 있던 면죄부 논리의 핵심, 즉 1230년 성 체르의 휴고 (Hugo von St. Cher)가 전개한 그리스도와 성자의 잉여 공로의 보화인 교회보고론 (Theorie vom thesaurus ecclesiae) 을 반대한다.
중세 교회는 그리스도와 성자들이 쌓은 잉여의 공로를 면죄부의 형태로 매각한 것이다. 교황 클레멘스 6세 (Clemens VI) 는 1343년 1월 27일자 칙령 우니게니투스 (Unigenitus) 에서 이러한 이론을 공식적 교리로 삼았다. 논제 81-91은 결국 평신도들의 생각을 요약하고 있다.
논제 86은 이렇게 질문하고 있다: "오늘날 가장 부자인 크라수스보다더 많은 재산을 소유한 교황은 왜 베드로 성당을 그 자신의 돈이 아닌 가난한 신자들의 돈으로 지으려 하는가?" 논제 92-95는 결국 면죄부가 주는 거짓된 평화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주는 참된 평화에 대립시키고 있다.
루터의 논제는 신속하게 전 독일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아직 1517년 말 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라이프찌히 (Leipzig), 뉘른베르크 (N rnberg) 그리고 바젤 (Basel) 에서 출판되었다. 뉘른베르크에서는 독일어역 번역판도 나왔다. 루터가 몸 담고 있던 수도원에서는 95개 논제를 우선은 신중하게 수용했다. 수도원장인 울리히 아담 (Ulrich Adam) 이 직접 루터에게 나아갔고, 수도원을 창피하게 만들지 말라고 그에게 맹세토록 했다.
면죄부 설교자 텟첼은 1517년 11월 베를린에서 브란텐부르크의 감독이 이 논제를 자신에게 제시했을 때, "이 이단자를 내가 삼주안에 불 속에 집어 던질 것이며,욕조에서 저 세상으로 가게 할 것이다" (즉 그의 재를 욕조에 모아 물로 쓸어버릴 것이다) 라고 떠들어댔다. 논제가 가져올 이러한 파장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루터는 1518년 2월부터 5월까지 상세한 설명서, 즉 "면죄부 효용성에 대한 논쟁 해설" (Resolutiones disputationum de indulgentiarum virtute)을 썼고, 관할 담당자인 브란텐부르크의 히에로니무스 슐체 (Hieronymus Schulze) 감독에게 그 안에 그를 불쾌하게 하는 내용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을 지우고, 그가 좋을대로 원고 전체를 불에 던져 달라는 요청과 함께 보냈다.
감독은 회피하듯이 답변했고, 그가 당장은 이 글을 검토할 수 없다고 루터에게 알려왔다. 루터는 그동안 면죄부를 반대하는 새로운 글을 썼고, 3월말 독일어로 쓴 "면죄부와 은총에 관한 설교" (Sermon von Abla )를 출판했다. 이제 루터는 더 힘주어 면죄부를 반대하여 그것은 계명도 아니요, 교훈도 아니며, 공로도 순종의 행위도 아니며, 그 반대로 마땅히 해야할 복종에서 벗어나라는 유혹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면죄부로 인해 구원얻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뜻이요 요청이라고 주장한다.
1518년 3월 루터는 자신의 면죄부 논제에 대한 두 개의 날카로운 공격을 받았다. 하나는 1518년 1월 오더의 프랑크푸르트 (Frankfurt a.O) 에서 개최된 도미니크 교단총회에서 논의된 반박논제 (Gegenthesen) 이다. 이것은 도미니크회 회원이며 오더의 프랑크푸르트 대학 총장이었던 텟첼 (Tetzel) 이 제안하고 콘라트 빔페나 (Konrad Wimpena) 가 작성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잉골스타트 (Ingolst dter) 의 신학부 교수였던 요한 에크 (Johann Eck) 가 루터에 반대하여 손으로 작성한 어구설명 (Glossen)인 소위 "날카로운 기둥들" (Obelisci) 이다.
텟첼의 논제에 대해 루터는 큰 반응을 표명하지 않았으나, 에크의 오벨리스치에 대해서는 소위 "작은별들" (Asterisci)이라는 글을 써 조목조목 반박했다. 루터는 95개 논제로 인해 1518년 1월에는 도미니크 교단을 통해 그리고 1517년 말에는루터의 논제에 대해 비판적 평가서를 로마 교황청에 제시했던 대주교인 알브레히트 폰 마인쯔를 통해 로마 교황청에 공식적으로 고소되었다. 로마에 본부를 둔 어거스틴 엄수파 수도원 총 책임자는 우선 루터에 대한 소송을 열기보다는, 루터가 본래 의도했었던 것처럼, 면죄부 논쟁을 신학적 토론의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어거스틴 엄수파 수도원 독일지부 총 책임자인 요한네스 폰 스타우피츠 (Johannes von Staupitz) 에게 루터를 잘 훈계하고, 그에게 신학적으로 변명할 기회를 주도록 요구했다. 루터의 친구이면서 그의 고해를 들어주는 담당신부였던 스타우피츠는 1518년 4월 26일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리는 독일 어거스틴 엄수파 총회에서 면죄부 비판을 근거로 한 자신의 새로운 종교개혁신학을 강연해줄 것을 루터에게 요청함으로 이 요구를 이행했다.
루터의 유명한 하이델베르크 논쟁은 1518년 4월 26일 이렇게해서 이루어졌다. 여기 작센외의 대학에서 루터는 처음으로 자신의 비텐베르크 신학의 개혁프로그램을 요약적으로 개진했고, 십자가 신학 (theologia crucis) 과 영광의 신학 (theologia gloriae) 을 소개했다.
1518년 4월 26일 하이델베르트 대학 인문학부 강의실에서 열린 이 토론에 루터는 28개의 신학적 논제와 12개의 철학적 논제를 제시했다. 이 논제들은 면죄부 문제가 아닌, 면죄부 문제 배후에 있는 신학을 다룬 것이다. 논제 1-12에서 루터는율법도 행위도 인간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도록 인도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논제 3에서 루터는공격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의 행위들은, 아무리 그것이 빛나는 업적이라 할지라도, 죽음의 죄일 뿐이다." 루터는 물론 그리스도인의 선한 행위를 거부한 것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 신뢰받는 근거로 그것을 남용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 자신이 죄인됨을 부인하고 떨쳐 버리려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논제 13-18은 칭의의 외적인 조건들인 즉 율법과 행위 뿐만 아니라, 그의 내적인 조건인 소위 자유의지 (freie Wille) 도 거부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논제 13에 따르면, 자유의지는 원죄 이후에 단지 명목상의 이름에 불과한 것이며, (은총을 얻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는 한, 죽음의 죄를 범할 뿐이다 (librum arbitrium post peccatum res est de solo titulo, et dum facit quod in se est, peccat mortaliter). 루터는 자신의 새로운 칭의 인식을 인간론적으로 이보다 더 날카롭게 강조할 수는 없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낯선 의인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께만 속한 일이며, 결코 자유의지의 대상이 아니다. 유명론적인 신학과 마찬가지로 자유의지도 "facere quod in se est" 를 생각한 나머지 구원을 요구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행동이며, 자유의지와 은총의 연합으로 인간에게서 이루어지는 내적인 물질적인 의가 아니다. 이러한 논제 배후에 있는 신학적 근거를 루터는 논제 19-24에서 십자가 신학과 영광의 신학을 구분함으로 전개하고 있다.
(논제 19) 하나님의 비가시적인 것들을 피조된 가시적인 것을 통해 이해하고 인식하는 사람이 신학자가 아니라, (논제 20) 십자가와 고난을 통해서 가시적이며 작은 하나님의 일을 인식하고 이해하는사람이 신학자이다. (논제 21) 영광의 신학자 (Der Theologe der Herrlichkeit) 는 악 (공로)을 선이라하고, 선 (십자가) 을 악이라 일컫지만, 십자가 신학자 (Der Theologe des Kreuzes) 는 사물을 있는그대로 말한다. (논제 22)
하나님의 비가시적인 것들을 행위에서 이해하고, 인식하려는 지혜는 어리석고, 생각이 모자라며, 완고한 것이다. (논제 23) 율법은 하나님의 진노 (롬4,15) 를 초래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모든 것을 죽이고, 원망하고, 죄짓게 하고, 심판하고, 정죄한다. (논제 24) 그렇다고 그런 지혜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며, 율법을 회피해야 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십자가 신학이 없으면 인간은 스스로 가장 선한 것을 가장 나쁘게 오용한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며, 무슨 가치가 있는가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무력함에서 드러나게 된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죄를 심판하시며, 인간을 죄인이라고 밝히신다. 이러한 경험은 어느정도는 좋은 것이긴 하나, 행위를 고집하는 스콜라의 영광의 신학에 의해 이것이 악하고 안좋은 것으로 폄하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선한 행위가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은총만이 구원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루터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도덕적인 통치행위뿐만 아니라 이성적인 통치행위도 멀리한다. 왜냐하면 그의 지혜는 이성이 가시적인 것을 통해 하나님의 비가시적 존재를 인식함으로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은총과 오로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낯선 의를 계시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만이 오직 인식되는 것이다.
십자가 신학자는 그 때문에 그것이 어떤가하는 실상 (Realit t) 을 설명해 준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한 현실주의자이다. 인간이 오직 십자가에 계시된 하나님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면, 아리스토텔레스를 반대하는 논제 25는 옳다: "많이 행하는 사람이 의로운 것이 아니라, 업적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를 굳게 믿는 사람이 의롭다." 루터는 그의 신학적 논제를 28조로 다음과 같이 끝맺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가 사랑할 가치가 있는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나가신다. 이에 비하여 인간의 사랑은 사랑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도 그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은 거룩한 인간이 아니라, 죄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죄인을 사랑 받을 만한 대상 즉, 의롭다 인정받은 죄인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논제를 기초로 이어지는 12개의 철학적 논제에서 스콜라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비판하고, 논제 29에서 "위험없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리석은 자가 되어야만 한다"고 해석학적인 지침을 제시한다.
즉 고린도전서 1장 18절 이하의 의미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통치행위를 파괴하는 그 사람은 자유하며, 철학과 그 속에 있는 인간 이성의 인위적인 가능성을 비판적으로 다룰 수 있다. 하이델베르크 토론은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 토론이 루터의 스승인 투르트페터 (Trutvetter) 와 우징겐 (Usingen) 을 설득할 수는 없었으나, 비텐베르크 신학의 사안을 지지하는 브렌쯔 (Brenz), 빌리칸 (Billikan), 에프너 (Ebner), 쉬네프 (Schnepf) 그리고 마틴 부처 (Martin Bucer)와 같은 남부독일 출신의 젊은 신학자들을 얻을 수 있었다.
5월초 루터는 하이델베르크에서 비텐베르크로 돌아왔다. 1518년 5월 19일 에크의 오벨리스키 (Obelisci)에 대한 대응저서인 아스테리스키 (Asterisci) 를 잉골스타트로 보내주었다. 얼마전에 칼스타트는 406개의 논제를 출판했고, 여기서 그는 루터와 상관없이 요한네스 에크를 날카롭게 공격했다. 루터는 오히려 에크에게 칼스타트를 거칠게 대하지 않고, 이해해 줄 것을 요청했다. 같은해에루터는 십계명에 대한 설교를 라틴어로 출판했고, 1516년 5월에 처음으로 편집했던 독일신학 2판을발간했다.
이 책은 독일 신비주의에 의해서 나온 것이며, 아마도 1400년 프랑크푸르트 독일기사회(Deutschherrenhause)의 익명의 한 사제에 의해 집필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타울러가 독일신비주의를 보듯이, 루터도 여기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철저히 수동적이라는 사상을 강조하며, 그 역시 하나님의 의를 수동적인 의 (iustitia passiva) 라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그 외에도 루터는 독일어로 쓰인 이 글에서 라틴어로 쓰는 로마의 신학적 사고 방식과 대립되는 이미지를 보고 있다. 그래서 그는 독일신학 (Theologia deutsch) 서문에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의 적들은 언제나처럼 우리가 독일신학자라고 말할 것이다. 우리도 그렇게 되고자 한다. 나와 그들이 여태까지 라틴어로도, 희랍어로도, 또한 히브리어로도 발견하지 못했던 나의 하나님을 내가 독일 말로 듣고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이 작은 책자가 알려지게 한 것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독일신학자들이 의심의 여지없이 최고의 신학자들임을 안다." (WA 1,379,7 12). 이미 그 이전에도 독일 신비주의가인 요한네스 타울러가 이와 유사하게 "나는 모든 대학에 있는 스콜라의 박사들보다 그에게서 참된 신학을 발견했다" (WA 1,557,29-31) 고 언급하여 독일 신학자를 칭송했다. 이 시기에 루터는 독일 신비주의와 자신의 십자가 신학에서 유사한 사상을 보지만, 양자사이에 커다란 차이점이 곧 드러났다. 즉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신비주의적인 내면의 신학이 아니라, 십자가의 말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계시를 중심으로 하는 신학이라는 것이다.
어거스틴 엄수파 회원 상당수가 1518년 3월 하이델베르크에서 루터를 따른 반면에, 작센의 도미니크파 회원들은 이단혐의를 씌워 루터를 로마에 고소했다. 1518년 5월 로마에서 개최된 도미니크 교단 총회도 이러한 고소를 지지했다. 그 결과 교황 레오 10세는 우선 로마 교황청의 신학자인 실베스터 프리에리아스 (Sylvester Prierias) 에게 루터의 논제를 심사할 것을 명했으며, 1518년 6월 In praesumptuosas Martini Lutheri conclusiones de potestate pape dialogus 라는 제목으로 그 심의서가 작성되었다.
급히 작성된 이 글은 문제의 핵심으로 교회와 교황의 권위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교황의 무오류성을 교리적으로 확정된 것보다 더 강하게 강조했고, 교의적으로 구속력을 지닌 교리와 면죄부 판매의 차이를 충분히 구분하지 못했다. 1518년 6월 이 dialogus는 인쇄되었고, 7월초 교황청 최고 판사인 체누치 (Chenucci)가 통보를 받은 60일 이내에 개인적으로 로마에 출두하여본인이 범한 잘못과 이단혐의에 대하여 답변하도록 루터에게 요구한 편지에 동봉했다.
루터는 이 출두 요구서를 교황청 대사 자격으로 터키와의 전쟁에 대한 독일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낼 목적으로1518년 7월 이후 아욱스부르크 제국회의에 머물고 있던 카예탄을 통해 1518년 8월 7일 넘겨받았다. 그러나 루터의 지역 영주였던 선제후 프리드리히 현제가 이 문제에 개입했고, 로마 교황청에 이의를 제기했으며, 루터의 심문은 추기경 카예탄의 주관하에 아욱스부르크로 변경되었다. 1518년 8월 23일 교서를 통해 교황 레오 10세는 추기경에게 루터를 아욱스부르크에서 심문할 수 있는 전권을 위임했다. 그 결과 1518년 10월 12일부터 14일까지 추기경 카예탄의 주관하에 아욱스부르크에서 루터 심문이 이루어졌다.
루터와 종교개혁의 시작 - 2
카예탄은 루터를 회유할 목적으로 호의적인 제안을 했다. 그 자신도 1517년 면죄부에 대하여 논했으며, 면죄부 이론에 대해 교회법 학자들과 신학자들의 의견이 서로 매우 다르다고 주장했다. 면죄부에 대한 그의 관점은 매우 완화된 것이었다. 그에게 면죄부는 교회가 부과한 형벌의 단순한 사면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의 (Gerechtigkeit) 앞에서 죄를 범해 초래한 형벌로부터의 자유였다. 추기경 카예탄에게 심문을 받고자 루터가 1518년 10월 12일 아욱스부르크 푸거 가문에 나타났을 때, 카예탄은 그에게 세가지를 요구했다.
첫째는 자신의 오류를 취소할 것, 둘째는 그것을 더 이상 퍼뜨리지 않을 것, 그리고 세 번째는 교회의 평화를 위해하는 모든 활동을 그만둘 것 등이다. 자신의 오류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해달라고 루터가 그에게 요청했을 때, 추기경은 먼저 58번째 면죄부 논제를 지적했다. 여기서 루터는 교황이 면죄부를 나누어주는 근거로 삼는 교회의 보고는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공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교황이 없어도 내적인간에게는 은총을,외적인간에게는 십자가와 죽음과 지옥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카예탄이 루터의 58번째 논제가 클레멘스 6세의 칙령 Unigenitus를 통해 반박되었다고 설명했을 때, 루터는 이러한 칙령은 자신에게 아무런 권위가 없다고 대응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칙령은 성서와는 모순된 논지를 전개하며, 단지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von Aquin) 의 관점만을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루터는 그 때문에 자신의 논제에서 인용한 성구에 무조건적인 우위를 주고 있다. 카예탄은 이에 대하여 교황은 모든 공의회와 성서보다 우위에 있으며, 루터는 자신의 모든 주장을 취소해야 하고, 이것이 교황의 뜻이다라고 하며 루터를 비난했다.
루터는 그 점에 대하여 생각할 시간을 요청했으며, 아욱스부르크의 푸거 가문을 떠났다. 10월 31일에는 작센의 시의회에서 뤼헬 (R hel), 파이리취 (Feilitzsch) 그리고 요한네스 폰 스타우피츠 (Johannes von Staupitz)가 루터의 두 번째 심문에 동행했다. 물론 공정하게 심문이 진행되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루터는 먼저 만약 카예탄이 자신의 오류를 입증하고 잘못되었음을 밝히면, 취소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자신은 어떤 점이 성서, 교부, 교황의 교령 또는 이성에 어긋나게 가르쳤는지 잘 모르겠다고 밝혔다.
그는 적법한 교회의 판단에 복종할 것이며, 아욱스부르크이건, 다른 곳이건, 공개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토론할 것을 자청했다. 카예탄은 이제 화해적으로 루터를 대했고,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글로 써서 다음날 제출할 것을 허용했다. 다시금 작센 시의회가 동행한 가운데 루터는 세 번째 심문을 위해 10월 14일 카예탄 앞에 나타났다. 카예탄은 글로 작성된 루터의 입장을 경멸했고, 그에게 취소할 것을 다시 요구했다.
다시금 1343년 칙령 Unigenitus에서 교리로 확정된 교회의 보고 (thesaurus ecclesiae) 에 대해 논의했다. 카예탄은 루터에게 그리스도는 고난을 당함으로 시련을 겪는 교회에 보화의 공로를 획득했다 (einen Schatz erwerben) 고 쓰여있는 권위 있는 한 본문을 읽어 주었다. 루터는 보화를 얻는 것 (einen Schatz erwerben) 과 보화인 것 (ein Schatz sein) 은 서로 다르며, 카예탄을 이것을 혼동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 차이점이란 그리스도가 죄를 용서하도록 교회에 준 은총을 공로로 획득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은혜요, 교회의 근거라는 의미이다. 카예탄은 더 이상 토론을 진행하지 않았고, 심문을 끝냈다. 루터는 "잘 가르쳐져야 할 거룩한 아버지에 대해 전혀 잘 가르치지 못한 교황과 그의 판사에 대하여" (Von dem nicht gut unterrichteten Papst und dessen Richtern an den besser zu unterrichtenden Heiligen Vater) 라는 호소문을 작성했고, 10월 22일 아욱스부르크를 떠났다.
로마에서는 루터를 압송하려는 노력에 이어 이제 면죄부 교리를 합법적으로 선포하고자, 즉 교리화 하고자 노력했다. 레오 10세는 1518년 11월 9일자 카예탄의 구상을 근거로 "Cum postquam" 을 발행했다. 교황은 죄를 사해줄 수 있는 그의 권세에 근거하여 면죄부로 그리스도와 성자가 쌓은 공로의 보화를 나누어 줌으로서 죄의 형벌을 사면할 수 있다고 새롭게 선포했다.
이 면죄부는 살아있는 자들에게는 사면의 방식으로 그리고 죽은자 들에게는 "per modum suffragii" 즉 중보기도의 방식으로 제공되는 것이다. 루터는 그러는 사이 카예탄 앞에서의 자신의 심문을 다룬 "아욱스부르크 행적" (Acta Augustana) 를 집필했고, 1518년 12월 출판했다.
1519년 칼 5세 (Karl V) 의 독일 황제 선출은 루터에 대한 소송을 일시 멈추게 했다. 교황청은 교회국가가 북부와 남부 이태리의 합스부르크 가문에 의해 휩싸이는 것을 우려했고, 프랑스의 프란쯔 1세 (Franz I) 를 황제 후보로 추천했다.
후에 교황청은 칼 5세 선출을 반대하여 작센 선제후를 후보로 세우고자 교황의 시종인 칼 폰 밀티츠 (Karl von Miltitz)를 통해 금장식 장미 (die goldene Tugendrose) 를 보냈고, 게다가 기꺼이 루터 심문을 연기하고자 했으며, 작센 출신의 이 수도승에 대한 파문칙령을 취소하고자 했다. 1519년 1월 루터와 밀티츠의 협의가 성사되어 양측이 아래와같이 약속했다.
첫째, 면죄부 문제에 관하여 차후에 설교도, 토론도 하지 않으며, 둘째로 취소해야 할 루터의 잘못된 주장을 판결해 줄 감독을 한 사람 세우도록 밀티츠를 통해 교황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1519년 6월 28일 칼 5세는 독일 황제로 선출되었고, 교황청은 더 이상 프리드리히 현제를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정치적인 문제들, 재정적인 어려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적인 유흥들이 루터 문제에 대해 강력한 박해를 가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소송이 완만하게 진행되면서 다른 한편 루터의 새로운 신학에 대해 집중적으로 토론되었다.
1519년 6월 27일부터 7월 16일까지 라이프찌히논쟁이 일어났다. 7월 2일까지 에크와 칼슈타트가 예정과 자유의지에 대하여 논의했다. 칼슈타트는에크의 적수가 못되었다. 그는 전형적인 학자였고, 탁월한 언변에 유명한 잉골스타트의 교수들도 압도되었다. 7월 4일부터 에크와 루터가 서로 토론했을 때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루터와 에크는 우선 교황의 수위권과 공의회의 권위에 대해서 토론했다. 그리고나서 "면죄부", "참회", "연옥" 문제를 다루었다.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토론은 라이프찌히 논쟁보다 앞서 일어난 루터와 에크의 공개적인 논쟁이었다.
1518년 12월 에크는 이미 라이프찌히에서 "contra novam doctrinam" 을 변호하고자 12개 논제를 작성했다. 1519년 초 루터가 이 논제를 알게 되었을 때 그는 12개의 반대 논제로 응답했다. 이것은 에크를 다시금 자극하여, 그의 논제를 수정하고 추가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이 논제중 13번째 논제는 교황의 수위권에 관한 것이며, 여기서 그는 "로마교회가 실베스터 (교황 실베스터 1세, 314-335) 이전에는 다른 교회보다 높지 않았다는 주장을 우리는 부인한다.
오히려 그 반대로 성베드로의 신앙과 직위를 가진 그를 우리는 항상 베드로의 후계자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인정했다"고 주장했다. 루터 역시 이에 상응하여 논제 13번을 추가했고, 에크의 논제 13번에 반대하여 "로마교회가 다른 모든 교회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은 400년 이후에야 등장한 로마교황의 빈약한 교령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천백년의 신앙의 역사와 성서 본문과 모든 공의회 가운데 가장 거룩한 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 (Konzil von Nic a) 는 이것을 반대한다"고 썼다. 도전적인 이러한 논제로 교황제도는 12세기에 비로소 생겼다는 것을 루터가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루터는 그레고리 9세 이후 이루어진 교령의 법령화가 교황들에게 특별히 독일에서 그들의 요구를 완전히 관철시키는 것이 가능케 했음을 단지 주장하고자 한 것이다.
루터는 라이프찌히에서 이 논제를 토론할 기회가 없을 경우를 대비해 토론에 앞서 이미 "교황의 권력에 대한 13개 논제 해설" (Resolutio super propositione XIII de potestate papae) 을 작성했고 인쇄를 의뢰했다. 루터는 여기서 교황의 수위권은 엄격한 의미로 볼 때 황제 콘스탄틴 4세 (Constantin IV, 669-683) 치하에서 비로소 형성되었다고 피력하며, 다른 동방교회들처럼 희랍교회는 한번도 로마의 통치를 받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교회와 동일한 권한을 가진 기독교 교회로 말해지고 있다는 논제를 피력했다.
루터와 에크 사이에 벌어진 라이프찌히 논쟁이 즉시 교황의 수위권을 다루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루터는 교황의 수위권이 신적인 법 (de iure divino) 이라는 것을 부인하며, 교황은 인간이 만든 하나의 제도요, 이런 의미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교황에게 순종하는 것은 그 때문에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또한 희랍의 기독교인들에게는 한번도 구원을 위해 기독교 최고의 권위인 로마 감독을 인정해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되지 않았다.
에크는 이제 위클리프와 후스를 정죄했던 여러 가지 말을 거론하며 로마의 수위권은 신적인 법이라는 강조했다. 이들은 1415년 콘스탄쯔 공의회에서 정죄받았다. 루터는 비록 콘스탄쯔에서 정죄받은 후스의 주장에 옳고 복음적인 것이 있음을 확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후스와 동일시하는 것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이것은 다시금 공의회도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교회는 성서에 근거가 없는 어떤 것을 구원에 절대적인 것이라고 선언할 수 없다. 이것은 라이프찌히 논쟁의 핵심이 더 이상 면죄부와 참회 문제가 아니라, 성서가 증거하듯이, 그리스도 한분만이 교회의 머리요, 교황이 아니라는 새로운 교회 이해였음을 보여준 것이다.
루터는 이미 이러한 사상을 1519년 6월 25일 라이프찌히에서 있은 베드로와 바울의 날 기념설교에서 표명했다. 당일의 복음서 말씀은 마태복음 16장 13-19절의 베드로 고백이었다. 루터는 우선 칭의에 대해서 설교했고, 인간은 그 자신의 힘으로나 자유의지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강조했다. 죄를 사하는 권세에 관하여는 그것의 올바른 사용을 항상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베드로에게 그것이 주어지긴 했으나, 그는 사실 교회를 대표했기 때문에, 이것은 원칙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그것이 주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죄를 사하는 권세는 사제나 교황또한 증거해야 하는 복음의 표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복음이 은총과 확신을 매개하며,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받는다. 복음에 비해볼 때 교회의 직제 (das kirchliche Amt) 는 기능적인 의미만을가지고 있다.
1519년 8월 루터는 라이프찌히 논쟁에서 전개한 자신의 논제에 대해 세 개의 글로 그 정당성을 입증했다. 하나는 "교황의 권한에 대한 13개조 논제 해설" (Resolutio super propositione (tertia decima) de potestate papae) 증보판이었고, 두 번째 글은 토론에 대한 상세한 해설 내지는 라이프찌히 논제 해설인 "Resolutiones Lutherianae ... Lipsiae disputate" 이며 그리고 세 번째는 "Contra malignum Joh. Eccii indicium"이라는 제목의 날카로운 논박서이며, 에크가 루터에 반대하여 유터보그 (J terbog) 에 프란시스파 수도원을 위해 작성한 평가서에 대한 반박이다.
에크가 라이프찌히에서 외적으로는 승리를 한 듯 했으나, 라이프찌히 논쟁은 그에게 신학적으로 하나의 패배를 의미했다. 에크는 루터를 대항하도록 쾰른 (K ln) 의 종교재판관인 야콥 폰 혹스트라텐 (Jakob von Hoogstraten)을 자극하고 쾰른과 뢰벤 (L wen) 대학을 반종교개혁자 대열에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쾰른의 신학자들은 1519년 8월 30일에 이미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루터의 8개항의 문구를 정죄했고, 강력한 억압과 관련된 책자의 소각을 요구했다. 뢰벤의 신학자들은 1519년 11월에 반응을 보였다. 신적인 수위권에 대한 루터의 비판에 대해서 그들은 아무언급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도 15세기의 개혁 공의회적인 전통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면죄부와 참회에 대한 루터의 주장에 대해 비판했고, 그의 책의 소각을 요구했다.
그러는 사이 루터에 대한 로마의 소송도 다시 재게되었다. 쾰른과 뢰벤 대학의 평가를 근거로 로마에서는 세 개의 위원회가 루터의 가르침을 조사했다. 이 중 하나의 위원회는 에크가 제출한 평가서를 근거로 1520년 5월 21일부터 6월 1일까지 회의를 열었고, 1520년 6월 15일 파문교서 "주여 분기하소서" (Exsurge Domine)를 공포했다.
이 교서는 루터의 글에서 발췌한 41개의 문장을 "이교적이며, 분노를 유발하고, 오류가 있으며, 경건한 자의 귀를 더럽히고, 평범한 사람을 유혹하며, 그리고 카톨릭 교리에 모순된다"고 정죄하고, 60일 이내에 이 말들을 취소할 것과 그렇지 않을 경우 파문 당할 것임을 경고했다. 교황청 대사로서 파문교서를 독일에 알리는 임무는 이태리 인문주의자인히에로니무스 알레안더 (Hieronymus Aleander)와 요한네스 에크 (Johannes Eck) 가 맡았다.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로마와의 갈등을 차단하기 위해 1520년 10월 12일 칼 폰 밀티츠 (Karl von Miltitz)는 루터를 엘베의 리히텐베르크 (Lichtenberg an der Elbe) 에서 다시 만나 교황 레오 10 (Leo X) 에게 개인적인 서신을 보낼 것을 권고했다. 이 편지에서 루터는 개인으로서의 레오10세와 로마 교황청을 구분하고, 자신의 공격은 개인 레오 10세가 아니라, 교황권과 교황청 제도에 해당하는 것임을 밝혀야 했다. 서신과 함께 루터는 논쟁서가 아닌 새로운 종교개혁적인 신학을 담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총체" (Summe eines christlichen Lebens)를 요약한 책을 전달해야 했다.
루터는 실제로 레오 10세에게 보내는 서신을 작성했고, 그는 "가장 거룩한 아버지" 그리고 "경건한 자" 레오에 대항하여 어떤 악한 것도 행하지 않았으며, 다만 성서를 근거로 교황제도를 비판하고자 했음을 맹세했다. 이 서신에 루터는 비록 논쟁적인 성격은 없으나, 자신의 새로운 종교개혁 신학을 명료하게 신학적으로 표현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menschen) 라는 논문을 첨부했다.
파문교서에 대응하여 루터는 "에크의 새로운 파문교서와 거짓에 관하여" (Von der neuen Eckischen Bullen und L gen) 와 "빌어먹을 적그리스도의 교서에 반대하여" (Adversus exsecrabilem Antichristi bullam)라는 책을 썼다. 루터는 이제 거침없이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1518년 12월 이후 친구들간에 오고 갔으며, 1519년 말 무렵에야 비로소 공공연하게 표현된 사상이다.
1520년 10월과 11월 뢰벤 (Loewen), 뤼티히 (Luettich) 그리고 쾰른 (Koeln) 에서 루터의 서적들을 공개적으로 소각하자, 루터 역시 1520년 12월 10일 비텐베르크 시입구(Stadttor)에서 서적 소각으로 맞섰다. 많은 교회법적인 교령들과 참회총서 (Beichtsumme) 인 안젤루스 시아바쏘 (Angelus Chiavasso) 의 "안젤루스 전집" (Summa angelica) 그리고 요한네스 에크와 엠저(Emser)의 책들 및파문교서인 "엑스루게 도미네" (Exsurge Domine)가 불태워졌다.
루터는 "왜 교황과 그 제자들의 책들이 불태워졌는가" (Warum des Papstes und seiner Juenger Buecher verbrannt sind) 라는 글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이유를 설명했다. 교황청은 이제 본래 의도했던 파문을 시행해야 했다. 1521년 1월 3일에는 루터의 파문을 선언한 파문교서인 "Decet Romanum Pontificem" 이 발부되었다. 교황청 대사인 알레안더가 이 교서 역시 독일에 알렸고, 1521년 2월 8일 "전 독일이 지옥 같은 폭동 속에 있다. 십분의 구가 루터를 연호하고 있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에게도 루터는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고, 로마교황청에 최소한 죽음을 연호하고 있다. 또한 모두가 공의회를 소집하라고 요구하며 소리치고 있다"고 로마에 보고했다.
알레안더가 과장한 점이 없지 않다고 할지라고, 곧 개최될 보름스 제국회의는 결코 교황청이 기대하는 그렇게 큰 루터 판결이 아닌, 루터에게 자유로운 통행을 보장하면서 그 문제를 형식적으로 다룰 것이라고 본 것은 옳았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1519년 7월 3일 칼 5세가 맹세한 선거 공약에 달려 있었다. 그 공약에 따르면 독일 문제는 독일 내에서 처리되고 어느 누구도 사전에 청문회가 없이 판결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루터는 독일민족의 대변자가 되었고, 1520년 6월에 쓴 글 "독일 크리스챤 귀족들에게. 기독교 개선에 관하여" (An den christlichen Adel deutscher Nation. Von des christlichen Standes Besserung)에서 처럼 스스로 그들의 고난과 비판의 대변인이 되었다.
이 책에서 루터는 자신의 교회 개혁안을 "독일민족의 불만" (Gravamina nationis germanicae) 과 결합시켰다. 1520년 7월에는 "로마 교황청에 대하여. 라이프찌히의 유명한 로마주의자들에 반대하여" (Von dem Papsttum zu Rom. Wider den hochberuehmten Romanisten zu Leipzig) 라는 글로 새로운 교회론을 제시했다. 루터는 여기서 라이프찌히의 프란시스파였던 알베드트(Alveldt)를 의미했다. 왜냐하면 그는 루터에 반대하여 교황이 인간적인 법뿐만아니라 신적인 법에 의해서 전체 기독교의 머리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1520년 늦여름 루터는 "교회의 바벨론 포로" (De captivitate Babylonica ecclesiae praeludium) 에서 중세교회의 성례론을 성서에 비추어 검토함으로서 자신의 새로운 교회론을 더 발전시켰다. 이미 1520년 초에 그는 "선한 행위에 대하여" (Von den guten Werken) 에서 자신의 새로운 칭의론이 결코 행위를 배척하지 않으며,그 반대로 윤리의 새로운 근거가 되고 있다는 문제를 다루었다.
1520년의 종교개혁 주요 저서들의 해석학적인 배경은 1518년 가을 다시 시작하여 1521년 4월 보름스로 여행하기까지 비텐베르크에서계속되었던 그의 시편주해 (Operationes in Psalmos) 였다. 종교개혁 주요 저서들은 독일에서 커다란 관심을 받았고, 새로 개발된 인쇄술 덕분에 신속히 판매되었다. 루터 사건 (Causa Lutheri) 이 1521년 4월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제국문제 (Reichssache) 가 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1520년 10월 23일 아켄에서 거행된 황제즉위식에서 칼 5세는 선제후 프리드리히 현제에게 루터를공개적으로 심문하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센제후는 루터를 보름스의 제국회의에 데려와야 했다. 1521년 3월 6일자로 작성되어 3월 16일 인편으로 발송된 소환장을 보면, 이러한 이유에서 루터는 이단자로 소환 당하지 않고, 자유통행을 보장받으며 공개적인 심문을 받고자 보름스로 초청되었고, 여기서 그는 1521년 4월 17일과 18일 황제와 국회 앞에서 자신의 종교개혁 신학과 교회개혁을 변론했다. 재판은 트리어 대주교 리챠르트 폰 그라이펜클라우 (Richard von Greiffenklau) 와 감독의 판사였던 요한 폰 데어 에켄 (Johann von der Ecken) 이 진행했다.
프리드리히 현제가 1519년 이미 이 사람을 루터 문제의 재판관으로서 제안했었다. 교황청 대사인 알레안더가 오류를 범한 책 (corpus delicti) 이라고 모은 약 20여권의 루터의 책들이 앞에 제시되었고, 그가 이 책들을 알고 있는지 여부와 이 책들이나 혹은 그 가운데 어떤 것에 대해 취소할 뜻은 없는지 질문되었다. 책의 제목이 크게 낭독되자, 루터는 자신의 책들임을 고백했고, 취소와 관련해서는 하루의 생각할 기회를 달라고 요구했다.
1521년 4월 18일 재판은 계속되었고, 루터는 다시금 제출된 서적들에 대한 취소를 요구받았다. 루터는 이제 황제, 선제후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모든 사람에게 성서로 그를 반박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렇게 해준다면 자신의 어떤 오류라도 즉시 취소할 것이며, 가장 먼저 자신의 책을 불 속에 집어던질 것이라는 것이다.
"당신들의 위엄과 영광이 간결한 답변을 나에게 요구하기에 뿔도 이빨도 없는 그러한 답을 하고자 한다 (계략이 없이 있는 그대로 답하고자 한다 - 역자주). 본인이 성서와 명백한 이성적 근거를 통해서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 - 그도 그럴것이 교황도 공의회도 본인은 믿지 않으며, 왜냐하면그들도 종종 실수했고, 모순되었기 때문에 - 인용한 성서의 이 말씀으로 본인은 양심을 극복했고,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 잡혔다. 이러한 이유에서 본인은 그것을 철회할 수도 없고, 하고자 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은 확실한 것도 아니며, 현명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아멘,"
1521년 4월 24일 트리어 대주교 숙소에서 루터에 대한 특별재판이 한 번 더 벌어졌고, 여기서도 그는 다시금 취소를 거부했다. 1521년 4월 25일 저녁, 루터는 모든 경고가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에 대하여 조처를 취하겠다는 황제의 통보를 받았다. 4월 26일 루터는 보름스를 떠났다. 작센 의원들의 암시로 그는 도중에 어디론가 가서 숨게 될 것임을 준비했다 (WAB 2,305).
프리드리히 현제는 루터를 보호하고자 그의 지역 어디엔가 루터를 숨기려는 계획에 동의했었지만, 그 자신도 만일 황제가 루터의 소재를 물을 경우, 떳떳해야 했기에 자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비텐베르크로 귀환도중 루터는 도중에 사로 잡혔고, 기사 외르크 (J rg) 라는 이름으로 튀링겐의 바르트부르크에서 1521년 5월 4일부터 1522년 3월 3일까지 숨어 지냈다.
보름스에서는 그러는 사이에 보름스 칙령이 가결되었고, 루터와 그를 보호하는 모든 사람은 법의 테두리 밖으로 추방했다. 이것은 교황청 대사 알레안더가 준비한 것이었으며, 1521년 5월 8일 황제가 서명함으로 승인되었다. 대부분의 제국의원들이 보름스를 떠난 후인 1521년 5월 25일 제국회의에서 몇가지 변화를 가결했다. 브란텐부르크의 선제후 요아킴 (Joachim) 만이 제국 의원의 이름으로 서명했다. 황제는 1521년 5월 26일 칙령에 서명했다. 칙령은 소위 루터의 잘못된 가르침을 열거했고, 무엇보다도 그가 콘스탄쯔 공의회에 손상을 입혔으며, 불안을 야기 시켰다고 비난했다. 칙령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제의 지존한 위엄과 영광과 권위에 의지해서 여기 모인 제국의 선제후, 영주, 의원들의 뜻과 권고를 따라 우리는 이러한 행동의 영원한 혐의를 인정하며, 이 문제의 재판장이며 거룩한 아버지인 교황이 허락한 파문교서가 완전히 실현되기까지, 하나님의 교회에서 파문된 루터를 완고한 자요, 분리자요, 그리고 이단자로 모두가 간주해야 함을 인정하고 선포한다."
3) 1520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3대 저서
1519년 라이프찌히 논쟁 후 루터는 독일 민족의 대변자가 되었다. 제국및 교회와 관련하여 16세기초에 가시화 되고 있던 개혁안들은 더 강해졌고, 무엇보다도 루터를 대변자로 발견했다. 게다가 비텐베르크 대학도 계속 성장했고, 루터의 새로운 종교개혁 신학은 학생들을 통해 계속 확대되어 갔다. 인쇄술은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을 확산시키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했다.
이미 1518년 바젤에 있는 인문주의자 요한네스 프로벤 (Johannes Froben) 은 그때까지 출판된 루터의 라틴어 전집을 여러판 출판했다. 1520년에는 스트라스부르크와 바젤에서 증보판이 나왔고, 여기에 1520년 5월 바젤에서 그리고 7월 스크라스부르크에서 루터의 독일어 전집이 시장에 나왔으며, 절찬리에 판매되었다. 루터는 세명의 인쇄업자와 일했다.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루터의 글중에서 새로운 종교개혁 신학의 약력을 좀 더 상세히 논하고자 1520년의 소위 종교개혁 주요저서를 아래에서 다룰 것이다.
오직 믿음을 통한 그의 칭의 교리가 행위을 파괴한다는, 심지어 신앙이 행위를 가증스럽게 여기도록 한다는 비난에 대하여 루터는 센제후의 비서인 스팔라틴 (Spalatin) 의 요청으로 1520년 봄 신앙과 행위의 관계에 대해 포괄적으로 논한 "선한 행위에 관하여" (Sermon von den guten Werken, WA 6,202-276) 를 집필했다.
그는 여기서 평신도들에게 십계명 해석에 근거하여 선한 기독교인의 삶과 활동에 대하여 폭넓은 교훈을 주고 있다. 모든 일 중에서 가장 고상한 것은 "믿는 것이 일이다" (Werke ist der Glaube, 요 6,28) 는 것이다. 믿는 것은 다른 것과 더불어 있는 선한 행위의 종류가 아니라, 모든 선한 행위의 근원이다. 선한 행위는 믿음, 사랑, 기쁨, 평화 그리고 희망이 가져오는 열매이다. 사랑은 의롭게 하는 신앙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결과이다.
스콜라 신학이 우리 안에서 형성된 의, 신앙 그리고 사랑을 하나로 생각한다면, 루터는 그것을 근원과 그리고 거기서부터 생겨나는 행위로 구분한다. 신앙은 변함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낯선 의를 믿는 것이요, 신앙의 열매인 사랑은 칭의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제 삼자에게 경험적으로 계속 전달해준다. 여기서 사랑이라는 선한 행위는 우리의 은총 내지 칭의를 통제 할 수 있는 조건은 되지 못한다.
"그도 그럴것이 칭의가 신앙으로 가능하다면, 신앙만이 모든 계명을 성취하고 그들의 모든 행위를 의롭게하는 것이다" (WA 6,211, Z.4-5). 우리가 살아있는 신앙을 가졌다면, "우리는 율법을 더 이상 필요로하지 않으며, 그런 사람은 스스로 언제든지 선행을 할 것이다" (WA 6,213, Z.20-21). 선행을 행 할 이러한 신앙의 자유를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한, 격식과 약속으로 선한 행동을 하도록 자극받는 어린이들처럼 율법과 훈계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1520년 봄에 루터는 라이프찌히의 프란시스파인 아우구스틴 알벨드트 (Augustin Alveldt) 의 교회개념을 가지고 논쟁을 벌인다. 알벨드트는 "사도적 지위에 대하여..." (Super apostolica sede...) 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었다. 루터는 그의 친구 파물루스 요한네스 로니쳐 (Famulus Johannes Lonitzer)에게 이 글에 대해 답하게 했다. 그 결과 알벨드트가 자신의 글을 수정하여 독일어로 출판했을 때, 루터가 직접 격렬한 반박글인 "로마의 교황청에 대하여. 라이프찌히의 유명한 로마주의자를 반박하여" (Vom Papsttum zu Rom. Wider den hochber hmten Romanisten zu Leipzig, WA 6,286-324)를 작성했다.
루터는 이 글로 교회에 관한 자신의 새로운 사상을 1520년 처음으로 분명하게 소개하고 있다. 알벨드트는 교황은 신적인 법에 의한 것이고, 인간적 법에 의해서도 전체 기독교의 머리라고 주장했다. 이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가령 희랍인이나 위클리프 또는 중세 후기의 특별한 집단들처럼 이단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가 가시적인 한명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모이듯이, 교회도 역시 가시적 지도자 혹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을 중심으로 모인다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루터는 교회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들의 모임이라고 이해한다. 이러한 모임은 육적인 모임이 아니라,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모임이다.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으로서 비가시적 교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가시적 교회는 가시적 교회와 분리되지 않고, 숨어있는 교회는 경험되는 교회와 단절되지 않으며, 영과 육처럼 이 둘은 함께 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은 영적인 것이다. 그 때문에 유일한 참된 교회인 기독교는 지상에 머리가 없으며,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 혼자만이 교회의 머리요, 교회를 다스린다. 사제, 감독 그리고 교황의 영적인 직임, 즉 복음선포와 성례전 집행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위에 언급된 직임들은 교회에서 모두 동등한 것이다. 외적인 교회에서 어떤 하나의 직임이 다른 직임보다 위에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사람이 만든 제도에만 해당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6장 18-19절에 언급된 죄를 사하는 권세는 마태복음 18장 18절을 통해 해석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성 베드로는 전체 교회를 대신해서 죄사하는 권세를 받은 것이지, 그 개인을 위해 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교황은 먼저 로마의 감독이다. 교회에서 그를 인정한다면, 단지 인간적 법에 의한 질서 요인으로서이며, 그러므로 "터키인을 감내하듯", 우리도 그를 감내해야 한다.
이러한 교회 이해를 기초로 루터는 교회 개혁을 전체적으로 착수하며, 이를 위해 1520년 여름 그의 글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들에게. 기독교 개선에 관하여" (An den christlichen Adel deutscher Nation. Von des christlichen Standes Besserung)를 출판했다. 만약 교회가 전체적으로 개혁할 능력이 없다면, 황제 내지 독일 귀족들은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성격에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루터는 1519년 6월 28일 칼 5세가 독일 황제로 선출되자 제국 개혁과 로마 교황청 및 그들의 금전주의의 포로된 상태에서 해방될 새로운 희망을 보았다. 이러한 희망이 종교개혁 주요 저서에 자세히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동시에 독일민족의 불만 (Gravamina nationis germanicae) 이 가지고 있는 사상을 계속 받아들이는 것이며,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이제 교리적으로 근거를 대고 있는 것이다. 독일 그리스도인 들에게 쓴 이 글은 세 개의 주요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 로마주의자들의 세 개의 벽과 그들의 개혁. 2. 로마 교황청 개혁의 과제. 3. 기독교인을 통한 개혁의 수행 (27가지 개혁요점).
로마의 세가지 벽에 대한 루터의 설명을 담고 있는 첫 번째 부분은 지금까지 교회의 모든 개혁을 방해한 커다란 것들을 지적하고 있다. 루터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로마주의자들은 오랜동안 세가지 벽을 쌓아왔다. 그들은 이것으로 여태까지 어느 누구도 그것을 개혁할 수 없도록 스스로를 보호했다. 첫째는 이것이다. 만약 세속적인 권력으로 그들을 억누르면, 세속권력은 그들을 다스릴 권리가 없으며, 오히려 영적인 힘이 세속적 힘보다 위에 있다고 주장했다. 둘째는 이것이다. 성서를 가지고 그들을 비난하려고 하면, 교황외에는 어느 누구도 성서를 해석할 권한이 없다고 대응했다. 셋째는 공의회를 가지고 그들을 위협하면, 교황외에 어느 누구도 공의회를 소집할 권한이 없다고 꾸며댔다.
로마 교황청이 쌓은 이러한 장벽에 대한 비유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무너져 내린 여리고 성을 생각나게 해준다. 첫 번째 장벽은 로마 교황청의 성직자 통치, 즉 영적인 권력이 세속적 권력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루터는 세속적 권력은 영적권력 아래 있다는 중세의 두 검 이론 (Zwei-Schwerter-Lehre) 을 공격한다. 동시에 그는 사제계급이 영적인 고유권한을 갖고 있기에 우위에 존재한다는 사제신분과 평신도 신분의 구분도 비판한다.
그에 대해 루터는 세례, 복음 그리고 신앙 (엡4,5) 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동일한 영적 신분을 지닌 구성원이 되게 하는 것이다고 반론을 제기하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 12절 이하에서 설명하듯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게 한다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2장 9절과 계시록 1장 5절이하, 5장 9절 이하로 루터는 만인사제직 (das Priestertum aller Gl ubigen) 을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세례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동일한 직임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동일한 영적 신분을 가지고 있다. 교회의 직임은 이에 비하여 영적인 전권을 공적으로 수행하도록 그러한 직임을 수행할 수 있는 교육적인 전제조건을 다 갖춘 사람들에게주는 위임에 근거한 것이다. 루터에 의하면 세례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교회개혁에 참여할 의무는 만인사제직에서 나온 결과이다. 만약 교회의 직임자들이 이러한 개혁을 거부한다면, 세례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 즉 세례받은 그리스도인들인 세속정부는 이러한 개혁을 하도록 부름을 입은 것이다.
두 번째 장벽은 교황의 교리수위권, 즉 교황만이 성서를 구속력 있게 해석할 수 있다는 권한에 대한 것이다. 루터는 고린도전서 2장 15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서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1521년 3월에 쓴 자신의 논문 Assertio omnium articulorum Martini Lutheri per bullam Leonis X. ... damnatorum 서론에서 언급한 자신의 사상을 성서해석의 원리를 통해 더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그것에 의하면 성서 (sola scriptura) 는 교회와 신학의 권위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해석의 권위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성서가 그 자신을 해석한다 (scriptura sacra ipsius interpres) 는 것이다. 전통이나 혹은 교황의 직권이 성서의 바른 해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가 그 스스로를 해석한다. 성서는 구원의 문제와 기독교가 추구하는 점이 무엇인지 분명히 보여준다. 그리스도는 성서의 중심이며, 이 중심으로 인하여 성서는 구원론적인 명백성을 갖고 있고, 세례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세운 권위로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세 번째 장벽은 결국 교황만이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다는 교황의 요구에 대한 것이다. 루터에게 있어서 만인사제직, 즉 세례받은 모든 그리스도인, 특히 관직에 있는 세례받은 세속정치가들은 성서를 척도로 삼아 교회의 개혁을 완전히 수행할 수 있도록 옳고 자유로운 공의회를 소집할 권한을 갖고 있다. 이것을 볼 때 루터는 중세 후기의 공의회주의가 가졌던 본래 의도를 잘 이해하고 있지만, 공의회의 권위를 구원적으로 이해한 성서의 권위에 연관시키고 있다.
이러한 장벽들이 무너진 후 루터는 두 번째 부분에서 로마 교황청 개혁의 과제를 다룬다. 그는 교황을 그리스도를 단순히 따르는 자요, 영적인 과제를 가진 자로 생각한다. 더 나아가서 교황청은 엄청난 수의 추기경을 대폭 감소시킴으로 개혁되어야 한다. 로마의 조세주의 (Fiskalismus)를 개혁하는 것도 중요하다.
교황에 의해 임명받은 감독과 수도원장이 연봉의 절반을 자신이 얻은 성직에 대한 댓가로 로마에 내야만 했던 첫 수입세는 폐지해야만 한다. 교황이 제시하는 사면, 은총의 서신, 특별법 그리고 각종 호의들을 판매하고 승인하기 위해 교황이 설치한 교황의 달(月), 예복비 (Palliengelder), 교황의 마음속의 보류 (reservatio pectoralis) 사상, 성직록 관할청 (Datarhaus) 도 역시 폐지해야 한다. 면죄부, 참회서 그리고 결국 로마 교황청의 모든 조세주의가 페지되어야 한다.
독일 크리스챤 귀족들에게 보내는 글은 27가지의 포괄적인 종교개혁 프로그램을 담고 있다. 순례와구걸승단을 반대하며, 성직자의 독신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과도한 교회축일을 축소하고 있고, 구걸 승단 제도를 없애며, 대학 개혁을 호소하고 있다. 언어, 수학 그리고 역사공부를 장려해야 하며,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모든 과목은 폐지되어야 한다. 영적인 권리 대신에 세속적 법이 교수되어야 하며, 교부와 교황의 교령 대신에 성서가 연구되어야 한다.
1520년 10월 쓴 루터의 세 번째 종교개혁 저서인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 대하여" (De capitivitate Babylonica ecclesiae praeludium) 는 교회라는 주제를 다룬 것이다. 여기서 그는 다시금 라이프찌히의 프란시스파인 알벨드트 (Alveldt) 가 1520년 6월에 쓴 "두 종류의 성찬에 대한 논문" (Tractatus De communione sub utraque specie)을 반대하여, 로마의 성례전론을 성서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1519년에 이미 루터는 "참회의 성례전에 대한 설교" (Sermon vom Sakrament der Bu e, WA 2,713-723), "세례의 성례전에 대한 설교" (Sermon vom Sakrament der Taufe, WA 2,727-737), 그리고 "Sermon von dem hochw rdigen Sakrament des heiligen, wahren Leichnams Christi und von den Bruderschaften" (WA 2,742-758)에서 로마 교회의 성례전 이해를 반대했었다.
오직 신앙에 의해서만 가능한 자신의 칭의론을 바탕으로 루터는 지칠줄 모르고 "사효론" (ex opere operato) 에 의해 성례전의 효력이 발생한다는 로마 카톨릭의 이해에 반대하여 신앙을 가장 올바른 성례전의 사용이라고 제시한다. 의식으로 실행된 성례전이 아니라, 성례전에 대한 신앙이 의롭게 하는 것이다. 루터는 이제 성례전을 다음과같이 설명한다. 성례전에서 세가지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는 성례 (das Sakrament) 혹은 표지 (das Zeichen) 이며, 두 번째는 그 성례전 (혹은 표지)의 의미이고, 마지막 세 번째는두가지 방식의 성례전에 대한 신앙이다. ... 그러므로 성례는 (1) 육적인 (객관적인) 형태나 모양으로 외적이며 가시적이어야만 한다. 그 (표지의) 의미는 (2) 내적이며 영적이어야만 한다. 즉 인간의 영에서 그 의미가 반추되어야 한다. 신앙은 (3) 성례를 바르게 이용하고 사용하도록 이 두가지를 결합시켜주어야만 한다.
이러한 성례전이해는 형식적으로 볼 때 인간이 성례전적 요소나 표지를 외적으로 받을 때,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에서 내적으로 일하신다는 어거스틴적이며 프란시스코적인 전통에 서있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가시적 말씀 (verbum visibile) 인 성례전은 요소의 형태를 지니고 있어서 눈으로 명백히 볼 수 있게 된 말씀 자체인, 즉 내적인 말씀 혹은 성령이 요소에 더해지게 될 때 효력을 발생한다: Accedit verbum ad elementum, et fit sacramentum, et etiam ipsum tamquam visibile verbum (말씀이 요소, 즉 성례전적 표지에 더해질 때, 성례전이 되며, 동시에 그 자체는 하나의 가시적인 말씀인 것이다).
성찬의 요소를 받을 때에 인간의 마음에 영향을 주는 것은 어거스틴에게 있어서는 내적인 말씀이라면, 루터에게 있어서는 선포된 성례전적 언약인 외적인 말씀이며, 이것을 통해 성령은 신앙안에서 인간의 마음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로 루터는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자신의 성례전 이해를 종교개혁적인 말씀신학의 틀에서 분명하게 전개하고 있다.
루터에게 있어서 성례전을 이루는 것은 두가지이다. 1. 언약 (promissio) 과 2. 성례의 표지이다. 동시에 그는 성서의 성례전은 이러한 척도에 맞게 제정되었는지를 묻고 있고, 로마 교회의 칠성례전을 세례 (Taufe) 와 성만찬 (Abendmahl) 으로 줄이고 있다. 참회는 신적인 언약이기는 하나, 외적인 표지가 없기에 제한적인 의미에서만 성례전이라고 할 수 있다. 결혼, 서품, 견진 그리고 종유에 대해 루터는 성례전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성서에 명시된 성례전인 성찬, 세례 그리고 참회도 루터의 판단에 의하면, 교회의 오랜 전통속에서 심각하게 변모되어 성례전과 또 그 성례전에 의해서 사는 교회도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성만찬과 관련하여 루터는 성찬의 세가지 포로를 말한다. 잔 박탈 (Kelchentzug) 의 포로, 화체설 (Transsubstantiationslehre) 의 포로 그리고 공로와 희생 (Werk und Opfer) 으로서의 미사의 의미이다. 첫째와 연관하여 루터는 두가지 방식 (sub utraque specie), 즉 성찬에서 빵과 포도주 모두의 제공을 요구한다.
그리스도는 한가지 방식에서도 역시 참으로 실재할 수 있지만, 회중에게 잔을 제공하지 않는 것은 성서의 성찬 제정에 위배되는 것이다. 화체설에 관한한, 이것은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 (IV. Laterankonzil) 에서 인노센트 3세 (Innocent III) 에 의해 교리로 확정된 것이며, 미사에서 사제가 조용히 언급한 제정의 말씀을 통해 빵과 포도주의 본질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외적으로 나타나는 빵과 포도주의 형태는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교리는 성직자 계급의 권력과 위엄을 쌓은 토대가 되었다. 왜냐하면 평신도와 구별된 서품받은 사제만이 화체를 일으키는 성찬 요소의 축성을 거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화체설 비판으로 루터가 성찬에 임하는 그리스도의 실재적 임재를 부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러한 현재를 본체와 표징 (Substanz und Akzidens) 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용어로 설명 가능하다는 사상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오히려 크고 분명하게 언급된 성레전의 언약을 통해서 현재화되고, 이 언약과 더불어 주어지는 빵과 포도주라는 요소로 오직 신앙을 통해 받게 되는 것이다. 성례의 언약을 사제를 통해 조용히 언급된 법적으로 작용하는 축성형식 (Konsekrationsformel) 으로 축소시키는 것은 루터에 의한다면, 성례 이해와 그 속에서 작용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모순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선포된 말씀으로서 성례의 표지가 외적으로 가리키는 것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어떤 방식으로 빵이 그리스도의 몸인지 (ist) 알 수 없기는 하나, 내 이성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고 또 전적으로 그의 말씀에만 의존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빵에 있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빵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도 확고하게 믿고자 한다. 철학이 이러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성령은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더 위대하다. ... 비록 철학은 이러한 것을 파악하지 못할지라도, 신앙은 이러한 것을 파악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은 인간이 가진 지성의 파악능력보다 더 위대하다. 이와같이 성례에 그리스도의 참 몸과 피가 있게 하기 위하여 빵과 포도주가 변질될 필요는 없으며, ... 두가지가 다 있는 그대로 동시에 거기에 존속하면 되는 것이다.이것이 "이 빵은 내 몸이며, 이 포도주는 내 피이다"라는 참된 의미이다. 따라서 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계속 이와같이 이해하고자 한다. 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인간의 이성으로 침해당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며, 다른 개념으로 왜곡되는 것도 용인치 않을 것이다.
성만찬의 세 번째 포로는 미사의 희생이다. 이것은 다시말하면 사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희생의 반복을 말한다. 이러한 희생론은 비록 성례를 오로지 하나님의 역사요, 하나님은 자신의 은총을 성례를 통해 믿는 자들에게 부어주신다고 이해할지라도, 사제의 공로가 되게 할 위험이 있다.
세례에 관한한, 그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공동의 기반이기는 하나, 루터에 의하면 그 본질이 참회의 성례전을 통해 상대화 되었다. 왜냐하면 중세의 이해에 의하면, 세례의 은총을 통해 원죄가 사라지고, 더 나아가 새로운 자범죄를 불러 일으키는 우리안에 있는 죄의 뿌리 (fomes) 까지도 소멸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새로운 죄를 범하면, 세례의 은총이 상실된 것이며, 성례전을 행하여 그것을 새로이 받아야만 한다.
히에로니무스 (Hieronymus) 도 그래서 참회의 성례전을 파선후의 제2의 널빤지라고 불렀다. 그러나 루터에 의하면, 비록 죄가 은총의 능력을 벗어나 우리를 지배하는 세력이 된다고 할지라도, 죄는 결코 세례의 본질을 소멸시킬 수 없다. 그 반대로 우리는 바르게 회개하고 참회함으로 세례를 통해 주신 객관적으로 적용되는 하나님의 언약 아래로 언제든지 새로이 복귀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죄를 다시 이기거나 혹은 참회를 행한다면, 그것은 곧 우리가 떨어져 나갔던 세례의 능력과 세례의 신앙으로 돌아서고, 거기서 일어나는 죄를 지어 우리가 떠났던 언약으로 되돌아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WA 6,528, Z.13-16).
참회는 그 때문에 세례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며, "파선후의 제2의 널빤지" (WA 6,529, Z.23) 도 아니며, 믿음안에서의 언약의 변함없는 훈련이며, 루터가 말하듯이, "세례에로의 계속적인 복귀" (reditus ad baptismum) 인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성례전적으로 단 한번 (semel) 세례를 받았으나, 신앙을 통해 항상 (semper) 세례를 받아야만 하며, 그것은 죽고 그리고 다시 사는데 언제나 유효한 것이다" (WA 6,535, Z.10-11).
지속적으로 세례를 구성하는 언약처럼, 세례의 표지 역시 세례에 속한다. "왜냐하면 ... 하나님의 언약과 함께 말씀이 의미하거나 혹은 스콜라 신학자들이 말하듯이 성례가 작용함에 따라 의미하는 것을 묘사해주는 표지 역시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WA 6,531, Z.28-30). 마찬가지로 세례는 "죽음과 부활, 즉 완전하고 완결된 칭의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성직자가 아이를 물속에 집어 넣는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지만, 다시 아이를 끄집어 낸다는 것은 생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WA 6,534, Z.3-5). 만약 세례가 이렇게 언약과 표지를 통해 효력을 발생한다면, 거기에는 객관적이고도 외적인 신적인 은총이 사전에 주어졌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은총 내지는 우리의 죄를 덮어주는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을 통해 불러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받을 뿐이다. 이러한 은총의 객관성은 루터에 의하면 어린이들 역시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세례를 받았을 때 어떤 노력과 공적으로도 해를 입지 않고 모든 점에서 자유하며, 오로지 영광스런 세례의 능력으로만 거룩하게 태어난 작은 아이들처럼 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그리스도안에서 연이어 세례를 받는 그런 작은 아이들이다" (WA 6,537, Z.38 -538, Z.3). 그러나 언약은 단지 신앙으로만 효력을 발생하기 때문에 어린이들에게는 도대체 어떻게 신앙이 이루어지는지 루터는 질문을 제기해야만 했다.
루터는 이에 대하여 어린이를 세례받도록 데려오는 사람의 낯선 믿음 (fides aliena) 이라는 논지로 대답한다. 교회의 기도, 그리고 부모와 대부 (Paten) 의 기도로 "부어지는 신앙을 통해 어린이는 변화되고, 정결케 되고 그리고 새롭게 된다" (WA 6,538, Z.10-11).
마지막으로 참회의 성례전에 관한한, 루터는 이것을 세례의 성례전으로 묶어서 참회를 세례의 언약을 회복하려는 항구적인 회귀 (st ndige R ckkehr) 라고 이해하고 있다. 성서적 토대를 둔 이러한 성례전과는 달리 결혼, 서품, 견진 그리고 종유의 성례전은 비성서적인 성례전이라고 루터는 거부한다.
"교회의 바벨론 포로" (De capitivitate Babylonica ecclesiae praeludium) 가 새로운 성찬론을 통해 바벨론 포로상태에 있는 교회의 자유를 주장했다면, 1520년 말에 쓴 "그리스도인의 자유" (De libertate christiana) 는 그가 칼 폰 밀티츠 (Karl von Miltitz) 와 협상했듯이 교황 레오 10세에게 이러한 방식으로 설명하고자 한 그의 새로운 신학의 전체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 글은 그가 제시한 두 개의 논제에 일치하는 커다란 두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셔서 그에게 주신 자유를 위해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우리가 잘 인식하고 있음을, 바울도 물론 이에 관하여 많은 것을 썼지만, 나는 다음과 같이 두가지 결론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스도인은 더 할 수 없이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하지 않는다 (Ein Christenmensch ist ein freier Herr ber alle Dinge und niemand untertan).그리스도인은 더 할 수 없이 충실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한다 (Ein Christenmensch ist ein dienstbarer Knecht aller Dinge und jedermann untertan).
변증법처럼 보이는 이러한 논제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논제 배후에 있는 루터의 칭의 이해의 토대가 되는 신앙과 사랑의 구분을 설명해야만 한다. 신앙안에서 그리스도인은 더 할 수 없이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랑안에서 그리스도인은 더 할 수 없이 충실된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한다. 그 역도 성립한다. 즉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는 사람은 신앙과 사랑을 구분해야만 한다.
인간은 이 신앙을 통해서만 의롭게 되며, 하나님의 자유에 참여한 한 사람으로서 자유한 것이다. 또 이 사랑을 통해서 신앙은 밖으로 작용하며, 이웃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기꺼이 포기하는 것이다. 루터에 의하면 자신의 자유를 오로지 신앙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사랑으로 인해 일어난 행위들이 더 이상 그의 칭의 내지는 자유의 성취근거가 되지 못하게 하는 사람만이 궁극적이고 실제적으로 자유하다.
자유는 그의 행위나 혹은 실천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자신이 받아들여졌음을 (Sich-Empfangen) 말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신앙에 의한 이러한 자유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말하는 이 책의 첫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루터는 여기서 이러한 자유를 내적이며 영적이며 새로운 인간의 자유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새로운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받는다.
내적 인간의 이러한 자유를 루터는 인격의 자유, 즉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직접적이며 개인적인 인간 존재의 자유라고 이해한다. 이러한 자유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시작되는 존재의 가능성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신앙을 통해 우리안에서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영혼은 그리스도에 관해 설교한 거룩한 복음, 하나님의 말씀외에 하늘에서도 그리고 그들이 사는 땅에서도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 ...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만 있다면 그 밖의 다른것은 없어도 되며,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아무것도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음을 확신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말씀만 있다면, 어떤 다른것도 더 이상 필요치 않으며, 말씀속에 충분한 음식, 기쁨, 빛, 예술, 의, 진리. 지혜, 자유 그리고 모든 선한 것을 넘치도록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신앙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있는 자는 하나님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과 함께 있는 자는 자유하며, 의롭고, 참되다. 그는 그리스도의 의와 인간의 죄사이에서 일어나는 즐거운 교환을 통해 그에게 주어지는 그리스도의 복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은 영혼이 신적인 말씀과 동일한 가치를 지니도록 모든 은총을 넘치게 하고, 자유케 하며, 구원할 뿐만 아니라, 신부가 신랑과 하나가 되듯이, 영혼을 그리스도와 하나되게 한다. 바울 사도가 말하듯, 이러한 혼인으로 그리스도와 영혼은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이 둘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든 것들을 함께 하여, 그리스도가 가진 것은 곧 믿는 영혼의 것이기도 하며, 역으로 영혼이 가진 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것이 되기도 한다.
그리스도는 모든 선한 것들과 축복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들은 동시에 영혼의 것이기도 하다. 또한 마찬가지로 영혼은 모든 불의와 죄를 가지고 있으며, 이같은 원리에서 그리스도는 이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게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제 즐거운 교환 (der fr hliche Wechsel) 과 갈등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결코 죄를 범한적이 없으며, 그의 의는 정복할 수 없고, 영원하며 그리고 전능한 하나님이자 사람이기 때문에, 그는 믿는자의 영혼이 범한 죄를 결혼반지 - 이것은 신앙이다 -를 통해 자신의 것으로 삼고, 마치 그가 죄를 범한 것처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들은 그에게 삼키운바 되고, 익사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의 극복할 수 없는 의가 모든 죄보다 크기 때문이다.
루터는 이제 자신의 새로운 신학의 최고의 문장들을 이러한 형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신랑인 그리스도의 복은 영혼의 것이 되고, 영혼의 부족함과 죄들은 그것을 삼키우는 그리스도의 것이 된다. 영혼은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에 참여한다. 그리스도와의 이러한 연합은 신비적이며 직접적인 존재의 일치가 아니며, - 베른하르트적인 신부신비의 예화(die Bilder der Bernhardinischen Brautmystik)를 추측케하나 -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신앙에만 단지 중재되는 일치이다.
하나님의 존재에 참여한다는 것은 비록 신앙으로 이미 참여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종말론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중재가 이러한 성격을 유지시켜준다.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에게 토대를 둔 이러한 자유를 그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 두 번째 부분의 주제이다 - 사랑으로 이웃에게 계속 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인간은 영적으로 신앙을 통해 내적으로 충분히 의롭게 되었고,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신앙과 만족함(Gen gen)은 내생(來生)에 이르기까지 계속 자라야 하기 때문에 이생에서 그 자신의 육신을 제어해야하며, 사람들과 사귐을 가져야만 한다. 그는 이제 많은 일들을 해야 한다. 여기서 그는 빈둥거려서는 안된다.
그는 몸을 금식, 절제, 노동 및 다른 적절한 훈련으로 단련해서 내적 인간과 신앙에 순응하고 일치되도록 해야하며, 강요받지 않고 멋대로 행하듯이 모순도 방해도 되어서는 안된다" (WA 7, 30, Z.11-20). 그리스도인은 이웃사랑을 베풀어줌으로서 다른 사람과도 교제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그 자신 밖의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고, 그 자신 밖의 이웃안에 그들의 활동 영역을 가지고 있다.
이 모든 것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그리스도인은 그 자신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이웃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신앙으로 주 안에서 살고, 사랑으로 이웃 안에서 산다. 신앙을 통해 그는 자신을 넘어 하나님에게 이르며, 사랑을 통해 하나님에게서 다시금 자신을 낮추어 이웃에게 이른다. 그는 항상 하나님과 그의 사랑 가운데 머문다. ... 보라 이것이 참된 영적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이다.
루터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자유 내지 그리스도인의 의는 이웃과의 연대속에서 동시에 수행되는 것이다. 때문에 흔히 하듯이 루터가 자유를 인간의 내면성에 제한시켜, 이것으로 특별한 시민적 자유개념의 창시자가 되었다거나 칸트 철학에 나오는 세속화된 특별한 자유 형태를 발견했다는 비판은 적절치 못한다 (Marcuse). 왜냐하면 루터에 의하면 사실 그리스도인은 결코 내면성이 아닌 이중적인 "자신 밖에서" (au erhaln seiner selbst) 살기 때문이다. 즉 신앙으로 그 자신밖에 하나님 안에서 살고, 사랑으로 그 자신 밖에 이웃 안에서 사는 것이다.
4) 1521/22년 루터의 바르트부르크 체류와 비텐베르크 소요
1521년 5월 4일부터 1522년 3월 3일까지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Wartburg) 에 머물렀다. 이곳은 루터의 "밧모섬" (Patmos) 이었다. 한 때 요한처럼 그는 이곳에서 비텐베르크 종교개혁에 계속 영향을 준 글들을 집필했다. 물론 비텐베르크 종교개혁이 가진 여러 가지 문제들을 직접적으로 알고 한 것은 아니다.
칼슈타트, 멜란히톤, 또한 종교개혁적 성향을 지닌 어거스틴 엄수파 출신의 루터의 수도원 동료들, 특히 그 가운데 급진적 개혁의 대표자였던 가브리엘 쯔빌링 (Gabriel Zwilling) 과 같은 2진에 속하는 사람들이 비텐베르크의 개혁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들은 다양한 개혁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비텐베르크의 종교개혁이라는 배가 불안하게 표류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루터 역시 방관치 않았고, 끊임없는 창의력으로 계속 글을 써 개혁에 영향을 주고, 자신의 의도대로 조정해 나갔다. 융커 외르크 (Junker Joerg) 로 변장하고 있는 동안 그는 시편 68편, 21편, 22편 그리고 37편을 주해했다. 더 나아가서 보름스로 출발하기 전에 이미 시작했던 마리아 찬가 (Magnifikat, WA 7,544-601) 주해도 완성했다. 그는 이제 인간의 무능함의 표현인 마리아의 겸손이 아닌 낮아짐 (Niedrigkeit) 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신앙에 의한 칭의에서 이러한 낮아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같은 시기에 루터는 사제와 가정경건회를 돕고자 소위 "Kirchenpostille" 를 쓰기 시작한다. "Von der Beichte, ob die der Papst Macht habe, zu gebieten" (WA 8,138-185) 라는 글에서 루터는 아직은 사적인 고해를 긍정하고 있지만, 로마 카톨릭 교회의 참회 강요는 반대한다. 이러한 글과 함께 소위 "Antilatomus" (WA 8,43-128)도 집필되었다. 이글에서 루터는 1520년 가을 뢰벤 대학(Loewener Fakultaet)이 자신의 종교개혁 저서들을 정죄하고 소각 결정을 하자 이를 방어해 주었던 뢰벤의 신학자인 라토무스를 반대하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은총을 받은 이후에도 인간에게 남아 있는 죄의 문제였다.
세례의 은총과 남아있는 원죄는 사라지지 않는가? 이러한 문제는 만일 죄를 부정적인 영혼의 질 (Qualit t) 로 그리고 은총을 긍정적인 영혼의 질로 이해했을때 스콜라적 사고체계에서 본다면 이것은 단지 결과적으로만 옳은 문제였다. 그렇다면 세례에서 죄가 은총으로 대체되는 성향의 변화(Eigenschaftwechsel)이 일어났고, 새로운 자범죄를 범할때까지 인간은 "죄가 없음" (ohne Suende) 에 틀림없다.
이에 비하여 루터는 바울의 인간론을 근거로 원죄는 완전히 용서되나, 아직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인격은 전인으로서 이미 의롭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낯선 의를 통해 원죄를 용서 받았고, 덮여졌기 때문이다. 인간의 인격은 믿음안에서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의에 완전히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인간의 인격은 매일 후회과 참회로 남아 있는 죄의 통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통치로 나아와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은총이 전인인 인간의 인격을 의롭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동시에 은총의 은사로서 인간의 인격속에서 남아있는 원죄의 세력을 대항하는 것이다.
뢰벤 대학을 반대할 뿐만 아니라, 루터는 파리의 소르본 대학 (Pariser Sorbonne) 도 반대하고 있다. 이 대학은 1521년 4월 루터의 많은 글들을 이단으로 판결했다. 먼저 멜란히톤이 비텐베르크에서 파리대학의 이러한 평가에 대하여 날카로운 변증을 했다. 루터는 이것과 파리대학의 교령을 독일어로 번역했고, 서문과 결어를 첨부해 이 두 개의 글을 출판했다. 루터는 교황에 대한 자신의 날카로운 공격을 의식적으로 배제한 파리 대학의 신학자를 비판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프랑스인 내지는 갈리아인들의 자유라는 의미에서 스스로가 교황에 대항하는 행동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루터는 소르본 대학의 공격을 재치있게 방어했고, 교황을 대항하는 공의회주의자들의 요새를 폭로했다.
대주교인 마인쯔의 알브레히트가 할레에 성유물 (Reliquienschatzes) 전시관을 개관했고, 방문자와예배자에게 일괄 면죄를 약속하며 신자들을 초청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루터는 격분했다. 그는 "할레의 우상숭배를 반대하여" (Wider den Abgot zu Halle) 라는 논문을 썼다. 선제후의 비서인 스팔라틴 (Spalatin) 이 이 책의 인쇄를 거절했을 때, 루터는 최후통첩방식으로 마인쯔의 대주교에게 썼다. 대주교는 현명한 태도를 취했고, 결국 루터의 비판에 굴복했다.
1521년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서 쓴 두 번째로 방대한 저서는 "수도사의 서원에 대하여" (De votis monasticis) 이다. 여기서 그는 수도사였던 자신의 과거를 결산하고, "가난, 순결 그리고 복종"이라는 수도사 서원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모순된다고 주장한다. 1521년 11월 40명의 어거스틴엄수파회원중 15명이 비텐베르크 수도원을 떠났다. 루터도 그것을 알게 되었고, 선한 양심에 따라 모두가 다 이러한 행동을 감행하지 못했음을 그리고 전혀 감행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안타까와 했다.
1521년 11월 11일 루터는 스팔라틴에게 "나는 이제 수도사의 서원의 문제를 다루고, 젊은 사람들을 독신의 지옥에서 풀어주기로 결심했다"는 서신을 보냈다 (WA Br 2.403). 같은 달에 그는 "수도사 서원에 대하여" (De votis monasticis, WA 8,573-669) 를 완성했다. 루터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외에 어떤 다른 일인자나, 감독, 교황도 알지 못한다고 강조한다. 그리스도를 통해 그의 양심은 자유하게 되었고, 이것은 최고의 자유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양심의 자유라고 말한다. "그 때문에 나는 아직도 수도사이고, 동시에 수도사가 아니다; 나는 교황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피조물이다" (WA 8,575,28f). 루터는 자아를 치유하고자 선택했고 이제는 복음으로 능력으로 내적으로 극복한 수도사로서의 그 자신의 삶을 16세기의 종교적인 정체성 위기를 잘 견디고 극복하도록 그에게 허락한 영적인 유예기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육신의 연약함을고려하여 1524년 10월 4일에야 비로소 그는 수도복을 벗었다.
비텐베르크에서는 어느덧 예배와 미사의 개혁이 수행되고 있었다. 멜란히톤 (Melanchthon), 칼슈타트 (Karlstadt) 그리고 어거스틴 엄수파 회원인 가브리엘 쯔빌링 (Gabriel Zwilling) 이 이와 관련된 개혁을 시작했다.
1521년 성 미카엘 축일에 멜란히톤은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빵과 잔을 다 배분하는 양종성찬의 성례를 거행했다. 쯔빌링의 설교를 토대로 어거스틴 엄수파 회원들은 1521년 10월이후 개인미사(Privatmessen)를 폐지했다. 이러한 새로운 조치들은 선제후의 관심과 염려를 불러 일으켰고, 선제후는 조사위원회를 소집시켰다. 이와 관련하여 루터는 1521년 11월에 "개인미사의 폐지에 대하여" (De abroganda missa privata, WA 8,411-476) 을 썼다.
여기서 루터는 사제들이 회중없이 그 자신을 위하거나 혹은 죽은 자를 위해서 집행하는 개인미사 뿐만 아니라, 좋은 공적이 된다는 생각으로 행하는 미사의 희생을 비판한다. 미사를 언약으로, 즉 우리에게 주신 유언 혹은 은사로서 전개했던 이전의 생각들을 그는 이제 날카롭고 전투적인 형식으로 개진하고 있다. 새로운 논지로서 그는 히브리서에 있는 그리스도의 "단 한번" (ein f r allemal)의 십자가 희생을 미사의 희생성격을 반대하는 증거로 인용한다. 그리스도는 단번에 우리를 위해서 희생이 되었다. 다른 사람의 희생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그는 우리가 그의 희생을 생각하기를 원한다. 불안하게 전개되고 있는 비텐베르크의 사태를 개인적으로 지도하고자 1521년 12월 2일 루터는 융커 외르크 (Junker J rg) 라는 이름으로 비밀리에 바르트부르크를 떠났고, 1521년 12월 4일부터 9일까지 아무도 몰래 (incognito) 비텐베르크에 머물렀다. 루터는 그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태롭게 하고자 하지 않았기에 사태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다. 비텐베르크에서 체류한 후 다시 바르트부르크에서 그는 "소요에 폭동을 피해야할 모든 그리스도인에 대한 신실한 경고" (Eine treue Vermahnung zu allen Christen, sich zu hueten vor Aufruhr und Empoerung, WA 8,676-687)를 썼다.
이 글에 의하면 엄청난 폭력으로 교회의 오류를 제거하는 것은 주의 일이 아니다.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은 비폭력적이지만, 개혁의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며, 복음을 당파적인 것으로 만들지 말라고 복음주의자들에게 경고하고 있으며, 자신들을 "루터적" (lutherisch) 이라고 부르지 말도록 금했다. 선제후는 불안을 조성하는 사람을 시의회를 통해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많은 시민들은 예배의 개혁을 넘어 복음을 자유롭게 설교할 것과 개인미사의 폐지 및 평신도에게 성만찬에서 잔을 배종해 줄것을 요구했다. 선제후는 1521년 12월 19일 재차 강력하게 독단적인 새 제도의 도입을 금했다. 외적인 합의에 도달할때까지 기존의 모든 것들은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슈타트는 대강절 네 번째 주일에 미사의복의 사용등 다른 예식없이 알기쉬운 축성의 말씀만으로 빵과 잔을 다 나누어주는 성찬미사를 거행할 것이라고 고지했다. 선제후의 금지조치가 채 실행되기도 전에 그는 1521년 성탄절 예배에서 이 계획을 실현했다.
1522년 1월 6일 어거스틴 엄수파 총회는 수도사들에게 수도원을 떠날 자유를 허용했다. 남아 있는 사람은 설교자 혹은 교사로서 활동하거나 아니면 수공업을 통해서 식량을 벌어와야 했다. 1522년 1월 11일 어거스틴 엄수파는 쯔빌링에게 수도원 교회의 부제단 (Nebenaltaere) 의 제거와 성상파괴 임무를 부여했다. 성화는 하나님의 말씀 (출20,4) 이 금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칼슈타트는 1522년 1월 19일 결혼했다.
비텐베르크의 개혁은 가속화하기 시작했고, 게다가 소위 쯔비카우의 예언자들, 즉 직조상인인 니콜라우스 스토르크 (Nikolaus Storch) 와 토마스 드레히젤 (Thomas Drechsel), 한때 멜란히톤의 제자였던 마쿠스 스튀프너 (Markus Stuebner) 로 인해 더 가열되었다. 이들은 쯔비카우 출신으로 그곳의 소요 때문에 추방되었으며, 스스로 비텐베르크로 왔다. 그들은 성령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는다고 자랑했다. "내적인 말씀" (Das innere Wort) 이 그들에게는 중요한 것이었고, 그 때문에 기록된 말씀은 크게 요구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받은 내적인 계시에 의하면 세계질서는 곧 변혁을 할 것이고, 성직자와 불신자를 소멸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초가 놓여지게 될 것이다.
비텐베르크에서 이들은 물론 직접적으로 그 안에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가속화되고 있는 종교개혁 운동을 부채질 했다. 이들은 멜란히톤을 불안케 했다. 멜란히톤은 1521년 여름에 나온 "신학총론" (Loci communes)에도 불구하고, 물론 여기서 루터편에 서서 새로운 비텐베르크 신학의 기본개념들을 잘 요약하지만, 복음적인 성령이해에 아직은 흔들렸고 쯔비카우인들의 예언자적인 자의식에 큰 감명을 받았다.
멜란히톤은 루터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루터는 비텐베르크에 있는 예언자들을 성서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로 시험해보라고 조언했다.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그들의 설교에 영향을 받게 해서도 안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유아세례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어린이가 낯선 신앙으로 세례받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비텐베르크 지역이 자신들에게 매우 위험했기 때문에 쯔비카우 예언자들은 1522년 봄 이곳을 떠났다. 비텐베르크시 소요를 평정하기 위해 시의회는 1522년 1월 24일 시규율 (eine Ordnung der Stadt) 을 반포했다. 이에 따르면 성화는 제거되어야 하며, 미사는 칼슈타트의 방식으로 거행되어야 하고, 성직자들의 성직록은 공동기금으로 모아야만 했다. 선제후와 함께 있던 카톨릭 주교 참사원들의 항의와 불만은 당연한 것이었다. 칼슈타트와 특히 쯔빌링하의 비텐베르크 개혁자들에게 개혁은 그리 만족할만큼 신속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1522년 1월 27일자 "성화의 제거와 그리스도인 가운데 거지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Von Abtung der Bilder und da keine Bettler unter den Christen sein sollen) 이라는 글에서 칼슈타트는 시규율 (die Stadtordnung) 이 반포된지 삼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성화는 제거되지 않았다고 한탄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구책을 강구했고, 이제는 직접 나서서 1522년 2월 초 시교회에서 대대적인 성상파괴운동이 일어났다.
선제후는 다시금 기존에 사용하던 모든 것을 그대로 둘 것을 요구했지만, 사제단 회의, 대학 그리고 시의회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었고, 결국 루터에게 돌아와서 도와주기를 요청했다. 이로인해 루터는 바르트부르크를 떠나 1522년 3월 6일 비텐베르크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삼일 후인 1522년 3월 9일 사순절 첫 주일날 루터는 처음으로 다시금 시교회 설교단에 섰다.
1522년 3월 9일 사순절 첫 주일 (Invocavit) 부터 1522년 3월 16일 회상 주일 (Reminiscere) 까지 행한 그의 유명한 설교로 도시는 평화를 다시 되찾았다. 그는 각자에게 신앙적인 책임의식을 호소했고, 개혁을 위한 시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개혁자들에게 기다려줄 것을 권고했다.
루터는 우선 비텐베르크를 위해서 일종의 유예기간을 택했다. 주일의 미사는 시교회에서 계속 진행했다. 1522년 부활절 성찬은 기존의 방식대로 집행했다. 즉 잔 배종은 하지 않으며, 늘 입었던 미사복과 몇몇 의식과 함께 라틴어로 진행되었다. 다만 미사곡이 희생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기에 모든 사람들의 호소로 즉시 개정되었다. 그 가운데는 성만찬을 두가지 방식으로 특별하게 거행하기를 열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비텐베르크에서는 우선 미사와 결합된 설교에 강조점을 두는 정화된 미사예배가 진행되었다. 1523년 예배지침서인 "미사와 성찬 요강" (Fomula missae et communionis, WA 12,205-229) 에서 루터는 미사의 희생을 암시하는 모든 것을 제거한 아직은 라틴어로 쓴 미사를 제시했다. 물론 복음적인 그의 의도는 독일어로 쓴 예배서가 목표였고, 이것은 결국 1526년에 쓴 "독일미사" (Deutschen Messe)로 이루어졌다.
루터는 그러나 개정된 예배형식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예배가 사람들의 마음과 말을 정복해야만 했다. 통역자와 번역자의 일이 무엇을 뜻하는지 루터는 잘 알고 있었고, 비텐베르크를 은밀히 방문한 후 1521년 12월 친구의 요청으로 바르트부르크에서 11주간에 걸쳐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다. 이러한 번역은 언어능력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번역해야 할 본문의 문제을 수년간에 걸쳐 집중적으로 다룬 사람만이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루터가 짧은 시간에 번역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라틴어로 쓰인 불가타 성경을 그는 외우다시피 잘 알고 있었으며, 그 결과 번역을 자유롭게 써 나갈 수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 번역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그는 동시에 1519년에 나온 에라스무스 (Erasmus von Rotterdam) 의 희랍어 신약성서 두 번째판을 사용했다. 루터보다 앞선 독일어 성서 번역도 이미 있었다. 그러나 어떤 번역도 루터가 번역한 성서만큼 그렇게 많은 호응을 얻지 못했다. 루터가 번역한 성경이 성공한 하나의 중요한 전제조건은 독일의 다양한 방언이 하나의 통일된 성서언어로 함께 용해되었기 때문이다.
루터가 이러한 통일된 언어를 만든 것은 아니지만, 그의 신약성서 번역을 통해 그 확산이 가속화 되었다. 비텐베르크로 돌아온 후에 그는 멜란히톤과 함께 자신의 독일어 번역 성서를 한번 더 면밀히 검토했다. 1522년 9월 독일어역 신약성서인 소위 "9월 성서" (das sog. September-Testament)가 발간되었다. 초판이 신속하게 매진되어, 1522년 12월 이미 제2판인 소위 "12월 성서" (das sog. Dezember-Testament)가 나왔다. 이것은 비텐베르크 대학 동료들과 협의를 거쳐 많은 것들이 개정된 것이다. 신약과 구약을 망라한 독일어역 신구약 합본은 구약의 각성경이 개별적으로 번역되어 하나둘 나온 후인 1534년에야 이루어졌다.
루터와 비텐베르크 동료들은 성서번역을 위해 언어학적인 정확성과 함께 가장 좋고 명료한 표현을 하고자 노력했다. 그 때문에 루터는 "통역자의 서신" (Sendbrief vom Dolmetschen, WA 30 II,632-646) 이라는 글에서 표현했듯이, 백성들의 입을 보고자 노력했다. 결국 루터는 비텐베르크 개혁을 다시 공고히 하는데 성공했지만, 이러한 과정은 1520년대에 일어난 종교개혁의 해결과정 (Klaerungsprozesse) 에서 단지 하나의 전야제에 불과한 것이다.
내용출처 : [인터넷] http://gnade.com.ne.kr/reformation/reform4.htm
http://www.sunslife.com/bbs/view.php?id=4003&no=116
---------------------------------------------------
루터의 개혁사상에 대하여
Ⅰ. 序論
16C 宗敎改革의 핵심인물인 마틴 루터는 敎會史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유럽에 있어서 전환점을 가져다 준 사람이다.
그는 어떤 이들에게는 ‘이단의 괴수’로서 격렬한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어떤 이들에게는 ‘신앙의 영웅’으로 열렬한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상반된 루터의 모습을 catholic교회와 protestant교회의 기독교계에서 각기 자기의 신앙의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경향에서 나온 결과이다. 루터 연구는 일반적으로 광범위하지만 루터의 개성과 개혁운동의 동기에 대한 문제와 루터의 神學을 이해하려는데 그치고 있다. 오히려 루터가 宗敎改革으로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면 宗敎改革家로서의 연구가 더 활발하게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歷史上으로 루터가 중요한 위치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루터와 그의 宗敎改革에 대해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 이미 1920년대 초기에 p.smith는 宗敎改革에 대한 종합적인 설명이 없음을 개탄하였으며 과연 宗敎改革이 서구문화의 발달에 어떠한 공헌을 하였는 가에 대해서도 학자들 사이의 견해가 일치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왜냐하면 宗敎改革의 근본동기가 宗敎的인 것으로 믿는 歷史家들과 社會․政治․經濟․文化的인 것으로 믿는 歷史家들 사이에서는 改革의 동기라든가 결과․배경에 있어서 많은 異說을 가져오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루터가 남겨놓은 改革의 업적과 思想을 전반적으로 이해하고 평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思想을 객관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기본적이며 대표적인 텍스트가 될만한 것이 없을 뿐 아니라 루터의 전집들이 양적으로 매우 방대하다는 점과 작품들이 세밀히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루터는 同時代의 큰 事件이나 論爭이 일어날 때마다 그에 대처한 단편적인 思想을 발표하였다. 그러한 루터의 思想들은 당시의 歷史的 事件들이나 政治․ 社會․ 經濟的 문제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루터의 여러 改革思想의 형성 배경을 中心으로 改革思想의 형성과정, 개혁 내용 등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루터의 改革思想 형성 과정에 영향을 준 배경에 대한 연구는 루터 자신의 주장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가 언급했거나 실제로 사용한 자료들을 살필 수 있겠고, 또는 대표적 특성을 가진 자료를 선정하여 그 자체의 문맥 안에서 연구할 수도 있겠다. 여기서는 후자의 방식을 따르기로 한다. 그러므로 먼저 필요한 것은 과연 루터의 개혁사상이 무엇인가를 규명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루터의 개혁사상을 규명하는데에는 그 자신이 카톨릭 교회의 사상, 제도, 가르침 등에 문제를 제기하고 개혁하기 위하여 저술한 글 들 속에서 찾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제 2장에서는 루터의 改革思想에 영향을 준 당시의 중세 후기 神學思想인 스콜라주의 神學과 神秘主義, 그리고 르네상스 人文主義가 무엇인가를 살펴봄과 동시에 이 思想들이 루터 思想의 어떤 면에 영향을 주었는가를 겸하여 고찰하여 보고자 한다.
제3장에서는 루터의 改革思想의 형성과정을 살펴본다. 왜냐하면 루터의 思想이 추상적이거나 논리적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경험에 기초한 실제적이고 실존적이라는 독특성이 있기 때문에1) 루터의 개혁사상을 좀더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그가 생명을 걸고 쟁취한 종교적 확신의 성장과정을 면밀히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2)
제 4장에서는 루터의 改革思想이 1520년까지는 대체적으로 표현되었다고 전제하고 宗敎改革의 서막을 열은 95개조 논제3)와 1520년에 출판된 루터의 개혁논문이라고 말하는 ‘선행론’, ‘독일크리스챤 귀족에게 보내는 글’, ‘교회의 바벨론 감금’ ‘크리스챤의 자유’4) 등에 나타나고 있는 改革思想을 고찰하여 본다. 동시에 루터의 改革思想이 당시의 로마 카톨릭과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나는지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 제 5장에서는 요약과 평가 및 전망으로 본 논문의 結論을 내리고자 한다.
Ⅱ. 루터의 改革思想의 형성배경
16세기에는 루터의 改革思想을 순수히 전후관계에 비추어 연구하려는 시도가 좌절되었었는데, 그 이유는 宗敎改革者들과 로마 카톨릭 敵對者들 사이의 대립으로 인한 것이었다.5) 즉 로마 카톨릭 學者들은 전체 프로테스탄트를 붕괴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루터를 공격하여 그가 정신착란이나 건전치 못한 성격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반면에 루터파들은 교황제도와 함께 로마 카톨릭 神學의 전 구조를 맹렬히 공격하면서 루터 이전의 것들과 철저히 대립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6)
이러한 연구 태도는 20세기초부터 변화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이유는 루터와 中世 後期의 선배들 사이에 깊은 연관성이 있음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7) 그리고 계속된 연구로 오늘날에는 루터의 인격, 신학적 발전, 입장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세 후기가 새로운 전망을 제공한다는 것이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가 되었다. 이러한 배경 연구는 루터 연구에 있어서 점차 증가되고 있다.
이러한 연구 결과 루터의 改革思想에 영향을 준 中世 後期의 思想은 中世 後期 스콜라주의 神學과 神秘主義, 그리고 北歐 르네상스 人文主義임이 밝혀졌다.
본 장에서는 바로 이러한 中世 後期 스콜라주의 神學과 神秘主義 그리고 이탈리아 北歐 르네상스 人文主義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 이것들이 루터의 改革思想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를 고찰하겠다.
A. 중세 후기 스콜라 신학
中世 로마 카톨릭 敎會의 공식적인 神學이었던 스콜라神學은 中世 전체를 지배하였던 思想으로서 피터 롬바르드의 敎義學이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敎義學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8) 이러한 스콜라주의는 A. D. 1100년경에 시작되어 宗敎改革에 이르러 終決된다.
11-12세기에 이르러서는 당시의 제도적이며 형식적인 宗敎生活에 대한 반동으로 인간의 구원에 대한 내적 확신을 추구하는 노력들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노력들은 두 가지 대조적인 방향으로 전개되었는데 곧 宗敎的 主觀主義를 부르짖는 神秘的 경건운동과 합리주의적 客觀主義를 주장하는 스콜라 神學이 그것이었다.9)
인간의 구원에 대한 내적 확신에 대해 神秘的 경험주의는 靈的 체험이라고 보았고, 스콜라주의에서는 합리적 이해라고 보았다.10)
이러한 스콜라 神學에서는 모든 敎理의 타당성을 증명할 수 있다고 보았고 이를 위하여 사물의 관념과 실제의 관계에 대하여 두 가지 상반된 인식체계를 세웠는데 그것은 實在論과 唯名論이었다.
實在論은 스콜라 神學의 初期와 中期의 전성기를 지배했던 思想으로써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에서 도출된 것으로 보편자의 實在性을 주장한다. 그리하여 ‘보편은 실재에 앞선다.’ 고 하여 참으로 합리적인 것은 또한 참으로 실재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實在論은 아리스토텔레스 계통의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다소 완화되어 ‘보편은 실재 안에 있다’ 고 하여 보편 개념을 단순히 개체 안에서 활동하는 정신적인 힘으로 보았다.11)
이와 같은 實在論의 논리적 귀결로써 개체나 개인보다 전체나 보편적인 것에 항상 우위가 주어졌으며 따라서 國家나 敎會가 개인보다 중요시되는 전체주의적 思想的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는 敎皇權의 속권 지배를 합리화 시켰고 이데아 思想을 우선하는 내세 지향적인 세계관을 형성하여 現世는 다만 來世를 향한 천로역정의 과정에 불과하도록 만들었다. 그러기 때문에 中世 敎會와 信者들의 관심사는 자신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문제였으며 루터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12)
그러나 中世 後期에 이르러서는 새로운 각성과 함께 實在論은 둔스 스코터스와 옥캄의 唯名論에 의해 붕괴된다. 唯名論에서는 ‘보편은 실재에 뒤진다.’ 고 주장하여 개인의 개성과 가치를 존중하였고 信仰에 있어서도 개인의 체험이 중요시되었다. 즉 國家나 敎會라는 보편개념보다 그것을 구성하는 개개인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영혼의 영원불멸이라는 보편개념은 믿을 수 없게 되었으며 三位一體 하나님의 경우 3개별 1체성 역시 용납될 수 없었고 교회의 보편적 실재와 하늘 나라의 보편적 실재 역시 확실성이 없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唯名論은 인간이성의 인식 능력 범위를 극히 축소시키는 동시에 특수 계시인 聖書의 권위를 고양시켰고 信仰을 강조하였으며 實在論的 主知主義에 반대하여 양심적 自由意志라고 하는 실천 이성에 강조점을 두었다. 理性과 啓示와의 관계에서 초자연적인 것은 이성의 영역밖에 있으므로 이성은 계시를 인식할 수 없고 다만 믿음에 의한 비약만이 神秘와 기적, 그리고 敎會의 眞理를 어느 정도 인식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13)
스코터스는 有限과 無限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간격이 있기 때문에 有限한 것의 인식을 통해 신인식에 도달할 수 없으며 다만 이 간격을 건널 수 있는 길은 권위의 길, 곧 敎會의 권위에 의해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啓示의 길이라고 하였다.14)
이렇게 唯名論에 의해서 實在論에 그 기반을 두었던 中世 체계는 붕괴될 조짐이 보였다. 틸리히는 이것을 가리켜 中世 實在論이 지배하던 때, 즉 神이 모든 인식의 제일 원리라고 하는 神律은 科學的인 自律과 敎會的인 他律로 나뉘어 져서 무너지게 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나아가서 옥캄은 聖書와 敎會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역사 할 때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옥캄주의 때문에 루터는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두 가지 면에서 영향을 받게 된다. 부정적인 면에서 보면 그는 심각한 고통의 시련을 경험하게 된다. 옥캄의 神學에서는 사람은 자기가 뜻한 바를 행할 수 있다는 自由意志를 주장하는 한편, 하나님의 절대적 의지와 예정을 주장하였다.15) 옥캄은 하나님을 절대적 의지라고 하여 神은 인간의 어떠한 권위에도 얽매이지 않는 절대적으로 초월한 분이시며 절대적 자유를 가지고 독단적으로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를 예정하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思想을 전제로 루터는 자신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자 노력하지만 계속적인 실패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것은 자기가 하나님의 절대적 예정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긍정적인 면에서는 唯名論, 특히 옥캄주의는 루터의 改革思想, 특히 믿음에 의한 비약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변증법에 대한 루터의 혐오, 그리고 그리스도敎 眞理의 유일한 근원으로서 객관적 啓示인 聖書에 대한 중요성을 가지는데 영향을 주었다고 보여진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中世 後期 스콜라주의는 루터의 改革思想 형성의 배경이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B. 중세의 신비주의와 그 영향
中世 初期의 로마 카톨릭 체계는 계층질서적 聖職 체계와 일곱 가지 성례전을 은총의 수단으로 강조함으로서 외적, 형식적 종교를 가져왔고 결국 백성들의 심령 속에 있는 은혜를 매개시키지 못하게 되었다. 그 결과 백성들은 영적 갈급함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1-12세기에 이르러서는 敎會의 敎理的 가르침에 속박되었던 개개인의 영혼과 정신을 해방시켜 內的, 個人的, 靈的 生活을 추구하고자 하는 宗敎的 主觀主義가 대두되었고 그것은 어거스틴 主義와 같이 죄와 은총, 구원의 확신에 대한 문제에 집중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경건 운동의 세 가지 특징은 구원의 확신, 체험, 회심이었다.
이러한 경건운동의 근저는 神秘主義였다. 즉 수난을 겪으신 그리스도의 생애를 그대로 본받아 예수를 따르고 예수와 같이 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 시대의 경건과 神秘主義의 대표자는 클레어보의 버나드였다.
그는 철저한 그리스도 中心의 神秘主義者로서 그리스도의 고난이 모든 경건의 中心이며 절대적 헌신의 핵심이라고 하였다. 한편 神的 實在는 예수의 굴욕과 그 인내와 사랑과 순결을 묵상함을 통하여 경건한 자의 체험에 계시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직접적인 통찰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하였다.
루터는 이러한 버나드의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에서 많은 감명을 받고 그를 중세기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聖子 중의 한 사람이라고 찬양하였다. 루터는 버나드의 방식을 따라 그리스도의 수난을 명상함으로써 자신을 버리려고 노력하였다.
神秘主義 중에서 루터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독일 神秘主義 였다. 가장 중요한 대표자는 엑카르트인데 그는 인간에 내재하는 神的인 가능성에 의하여 神과 연합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16) 그는 인간 안에 내재된 불꽃에 의해 피조물인 인간은 神的 존재와 결합이 가능한데 이 결합이 바로 구원이며 결합 과정은 우리의 영혼이 유한한 것으로부터 분리되고 자기 이탈과 초연으로 무아경에 들어가는 것이다. 神은 영원한 현재로 현존하고 구체적 상황에서 인간이 먼저 개선되거나 향상되기를 요구하지 않고 소외상태로 있는 인간에게 다가온다. 이 神的 실체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내적인 정숙과 평정이 요구된다.
엑카르트의 제자는 헨리 수소와 타울러였다. 루터는 타울러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가 1516년 스타우피츠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타울러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배운 것을 감사하다는 내용을 글을 썼다. 루터의 초기 글인 [로마서 강해]에 있는 감추어진 하나님 개념과 [시편강해], [노예의지론]에서도 타울러의 영향을 볼 수 있다.17)
이러한 神秘主義는 唯名論과 함께 宗敎改革을 위한 준비였다고 볼 수 있다.18)
이상의 神秘主義로부터 루터는 인격적인 체험에 대하여 배웠다. 이 체험이라는 주관성이 聖書라는 객관성과 聖靈의 역사로 하나로 통합되어 원시 기독교의 복음을 재발견하고 改革思想을 형성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C. 이탈리아 북구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그 영향
르네상스 운동이란 1350년에서 1500년 어간에 中世主義 운동에 병행하여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文化的, 敎育的 復興운동으로서 희랍, 로마문화의 復活을 추구하였으며 모든 인간의 존엄성과 탁월성을 강조하였던 운동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러한 르네상스 人文主義 운동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1470년대에 이르러서는 西歐 전역에 확산되었는데 독일에도 루터보다 한 세대 이전부터 르네상스 人文主義가 들어왔고 루터가 다니던 에르푸르트 대학에도 정착되었다.
이러한 르네상스 人文主義 운동은 이탈리아 中心의 南部와 독일 中心의 北部에서 성격상 서로 다른 두 가지 조류로 나타난다.19) 이탈리아 르네상스 人文主義는 神的인 것보다는 인간적인 것을, 경건보다는 향락적인 것을 추구하는 문예적이고 세속적인 성격을 띠고 인간이 무한한 자유와 능력을 강조했으며 반면에 독일을 중심한 北歐의 르네상스 人文主義는 명상적이고 경건한 종교적 보편주의의 특성을 가지게 되었으며 또한 유대교 및 기독교의 경전을 연구하면서 聖書연구에 자극을 주게 되었는데 바로 이 北歐 르네상스 人文主義가 神秘主義와 함께 루터의 改革思想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요소들 중에 가장 핵심적인 것이었다.20)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로렌조 발라나 루터에게 히브리어를 가르친 로이힐란 같은 人文主義者은 聖書의 原語를 연구하고 기독교의 진수를 聖書에서 찾아야 할 것을 역설하였다.
로이 힐린은 구약 히브리어를 연구하여 敎會의 전통적 聖書解釋과 原語上 해석의 차이를 찾아냈다. 이러한 영향으로 루터는 聖書硏究에 자극을 받게 되었을 것이고 그 결과 루터는 기독교의 진수를 聖書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러한 思想은 루터로 하여금 聖書를 연구하게 하는 근본적인 思想이다. 그리고 에라스무스에게서도 영향을 받았는데 에라스무스는 로마 敎會가 초대교회와 다른 것을 인식하여 聖書的인 단순한 기독교로 돌아갈 것과 초대 교부 연구를 강조했다.
그리고 에라스무스가 宗敎改革에 적극적으로 공헌한 것은 聖書飜譯과 註釋이다. 루터는 이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新約聖書를 가지고 로마서 9장부터 주석 하였다. 특히 에라스무스의 歷史的이고 言語的인 해석이 루터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에라스무스는 神學이 聖書에 대한 言語的 연구와 歷史的 연구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영향으로 루터는 르네상스의 모토인 ‘근원으로 돌아가자’와 聖書 연구와 교부들(특히 어거스틴)에게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르네상스 人文主義는 중세기적 主知主義에 반하여 양심과 의지를 강조하였는데 루터에게서도 이러한 경향을 볼 수 있다.
Ⅲ. 루터의 改革思想 형성 과정
루터의 改革思想이 형성된 것은 우연히 어느 날 된 것이 아니다. 그가 改革思想을 형성하기까지는 엄청난 고통을 느끼며 투쟁하는 과정에서 된 것이다. 루터는 자신의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자비로운 하나님을 얻고자 자신 전체를 수도원에 투신하여 내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내적 투쟁에서 그는 聖書 연구와 聖靈의 역사로 구원의 빛을 찾게 되었으며 로마 카톨릭 敎會의 체제를 돌파하는데 성공한 원동력이 되었다.21)
그러므로 루터의 改革思想을 잘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그가 생명을 걸고 쟁취한 그의 內的인 체험과 宗敎的 확신의 성장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그래서 최근의 루터의 宗敎改革에 대한 연구의 경향도 젊은 시절의 루터 연구에 많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22) 그리고 루터의 改革思想이 추상적이거나 논리적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경험에 기초한 실제적이고 실존적이라는 점23)을 고려하여 볼 때 그의 改革思想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그의 改革思想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A. 루터의 문제
루터를 고통스럽게 한 한 가지 문제는 “어떻게 하면 자비로운 神을 얻을 수 있을까?”24)였다. 즉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내어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문제였다. 젊은 루터는 자신의 구원의 불확실성으로 인하여 죽음에 대한 공포와 지옥에 떨어질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항상 괴로워했다. 루터의 이러한 내적 고통의 체험은 그가 1518년에 발표한 “95개조 논제 해설문”25)에서 잘 보여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고통이 얼마나 크고 심한지 사람의 글로써 표현할 수 없어서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믿을 수 없고, 또한 만약 그가 한 시간의 십분의 일이라도 체험했다면 그는 완전히 파멸되고 그의 뼈는 재로 변하고 말았을 것인 그러한 고통을 매우 짧은 순간이지만 종종 체험했던 한 사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런데 그의 영혼은 하나님이 무서운 진노로 그와 모든 피조물에 다가올 때에도 어떠한 피난처나 위로를 찾을 수 없고 다만 모든 것이 고소하는 것뿐이며, 그가 ‘나는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나이다.(시 31:22)나를 당신의 노로 징계치 마소서.’ 라고 한탄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자신의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는 믿을 수 없으며, 오히려 자신의 영혼이 끊임없는 형벌을 받으면서 두려움에 덜며 애타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영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혼은 어디에서 도움을 구할지도 모른다. 그의 영혼은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 매우 혹독한 고통과 공포와 두려움, 비애 등으로 채워지지 않는 곳이 하나도 없는 영혼이 되며 그것은 영원한 것처럼 보여진다.26) 이와 같이 루터는 자신의 구원의 문제로 고통의 시련을 겪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당시에 로마 카톨릭 敎會는 이러한 문제의 가장 확실한 해결의 길은 수도사가 되는 것이라고 가르쳤으며, 루터 자신은 이것에 대하여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결국 이 문제는 루터로 하여금 수도원에 들어가게 까지 했다.27)
루터는 [탁상담화]에서 말하기를 “내가 수도원에 들어가려고 서약한 것은 배를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을 위해서 였다.” 고 하였고 [수도원 서약에 관하여] 에서는 “나는 하늘의 공포에 사로잡혀 이 소명에 응하였다.” 고 한다. 이와 같이 루터를 사로잡은 문제는 정치나 사회적인 문제가 아니라 구원의 문제였다. 루터는 이제 이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고민하다가 결국 福音을 발견하고 그 福音을 근거로 改革思想을 세우게 된다.
B. 신앙적․신학적 문제들
J. L. Neve는 중세기 로마 카톨릭 교회가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상승, 곧 구원을 가능케 하는 세 가지 ‘하늘 사다리’를 제시했다고 보면서, 그는 이 세 가지 사다리를 공적신학, 사변신학, 신비주의라고 보았다.28) Nygren도 중세기 로마 카톨릭 神學은 시종 상승운동의 경향이 특색이며 그것은 스콜라주의의 합리주의 사다리, 신비주의 사다리, 그리고 일반 카톨릭 교회의 도덕적 사다리로 보았다.29)
그러므로 중세의 사람들은 이 세 사다리를 통하여 구원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루터도 자신의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 구원길을 따랐다. 루터는 먼저 이 세 사다리를 오르기 위하여 수도원에 들어갔고, 하루에 일곱 번씩 기도하고 금욕과 자기학대, 그리고 모든 형태의 고행을 했다. 그는 경건의 훈련과 神學的 연구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는 수도원 생활에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그는 죄의 유혹에서 도피하려는 일에 대하여 좌절하였고, 자신의 모든 신앙 훈련에도 평안과 안정을 얻지 못했다.
루터의 근본적인 번뇌는 인간의 공적이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데 있었다. 산상수훈의 말씀이 너무나 높고 어려워 아무도 그것을 지킬 수 없다고 괴로워했다.30) 여전히 그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대하여 두려움을 갖고 있었으며 하나님을 인간과 화해한,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으로 믿을 수 없었고 단지 노여움과 불로 심판하는 하나님으로 여겼다. 그는 첫 번째 사다리인 선행의 방법을 시도하여 보았으나 자기 자신을 구원할 만큼 충분하게 선을 행할 수 없음을 발견하고 절망하게 되었다. 이것은 루터가 인간 중심적 종교에 절망한 것이다.
두 번째로 중세 로마 카톨릭이 제시한 사다리는 성직자들의 공로를 힘입어 자기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 루터는 로마를 방문할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거기서 공무를 마친 다음 그는 모든 시간과 정력을 기울여서 성자의 공로를 힘입어 자기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힘썼다. 성당에 나아가 매일 기도했고, 카타콤과 유적들을 방문했지만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라테란 성당에 있는 ‘거룩한 계단’ 이라고 불리는 일명 ‘빌라도의 계단’을 손과 무릎으로 주기도문을 외우며 올라갔다.31) 그러나 그는 아무런 평화를 얻지 못했다. 루터는 聖者들의 공로를 힘입어 보려고 하였으나 결국 회의, 의심으로 끝났다.
세 번째로 루터에게 소개된 사다리는 참회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루터는 쉴 사이 없는 고해성사로 그의 선생들을 괴롭혔다. 그는 때를 가리지 않고 하루에도 수차례씩, 어떤 때는 6시간을 고백했다. 그리고 고해시 마다 일곱 가지 큰 죄와 십계명에 비추어서 자신의 생활을 검색했다. 그러나 그는 고해성사를 통하여서도 구원의 문제를 해결할 수없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자주 고백하고 나에게 부과된 고행을 철저히 수행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양심은 결코 만족치 못했다.’32) 이와 같이 그는 여기에서도 실패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사다리는 神秘主義 사다리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명상과 모든 자기 중심적인 성향을 포기하여 하나님과의 연합을 지지하게 추구했다. 루터는 때로는 천사들의 합창을 듣는것 같은 고상한 분위기에 빠져들기도 했지만 이내 소외의식이 되돌아오고 말았다. 神秘主義者들은 이러한 영혼의 밤중을 지나면서 환희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루터에게는 그 기쁨이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시고 자신은 너무나 불결했기 때문에 神人 合一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루터는 이와 같이 당시에 로마 카톨릭 敎會가 보여준 선행과 공적의 사다리, 신비주의 사다리, 합리주의 사다리를 힘을 다하여 올라가려고 했으나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루터가 이러한 고통 중에 있을 때, John von Staupitz33)는 루터의 어두운 마음속에 福音의 빛을 비취게 하였다. 그는 루터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 근본 원인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루터에게 충고하기를 “너는 죄가 없을 것이다. 진짜 죄를 가지고 있지 않다.” “너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분노를 품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네가 하나님에 대하여 분을 품고 있다.”라고 했다. 그는 루터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 핵심을 발견했다.
즉 그는 루터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속됨 사이에 가로놓인 심각한 심연을 파악하고 이를 극복할 수 없는 인간의 무능력을 탓하고 있음을 보았고 이로 인해 하나님의 義와 인간의 사이에는 영원한 대립만 있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파악했다. 그리하여 그는 루터가 세 가지를 오해가 있다고 보고 그에게 문제의 해결 방안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길을 안내했다고 왓슨(P. S. Watson)은 말한다.
첫째로, 참회개는 자기 스스로 부고한 고행이나 형벌이 달려 있지 않고 마음의 변화에 있는데, 이 마음의 변화는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이루신 것이기에 자신이 강제적으로 만든 이웃에 대한 사랑은 참회개의 시작에 불과하지 그 목적도 완성도 아니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마음이 변화하는 참회개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하여 일어난다는 것을 가르쳤다. 이것은 당시의 고해성사와는 다른 해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루터가 고통과 절망과 두려움을 말했을 때 그 이유중의 하나가 예정 사상이었음을 파악하고 그가 이러한 생각을 품지 않도록 충고했다.
그러나 이상의 두 가지 가르침은 루터에게 큰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그는 루터로 하여금 聖書를 연구하도록 했다. 그는 루터로 하여금 훌륭한 聖書의 원전 비평학자가 되도록 권면하였으며 대학의 聖書 교수직을 맡도록 하였다. 결국 루터를 구원한 것은 바로 이 聖書 연구였다.
이와 같이 Staupitz는 루터에게 자기의 죄에서 그리스도에 이르는 길을 가르쳤고 律法에서 십자가로, 행함에서 믿음으로, 스콜라 철학에서 聖書 연구와 어거스틴과 터울러 연구로 이르는 길을 가르쳐서 루터로 하여금 새로운 福音의 빛을 보게 하였는데 이것들 중에서 루터가 福音의 빛을 보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무엇보다도 바로 聖書硏究에 대한 적극적인 권면이었다. 그는 루터로 하여금 본격적인 聖書硏究에 접하게 하였고, 이 聖書硏究를 통하여 루터는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얻게 된 것이다.
루터는 星鏡硏究를 하기로 마음을 먹고 1511년 여름부터 공부하여, 1512년 9월에는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1513년 8월부터는 시편 강해를 시작했다.
루터는 이렇게 하여 聖書를 연구하고 講解하는 가운데 福音을 접하는 종교적인 체험을 한 것이다. 루터는 이어서 로마서 강의를 준비하는 동안에 그가 발견한 福音에 대하여 더욱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새로 태어나는 것 같았고 천국의 문이 열려져서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것을 느꼈다.34)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1513년부터 1515년까지 시편을, 1516년에는 로마서, 그 후에는 갈라디아서, 히브리서, 디도서등을 강의했다. 이와 같은 聖書 연구를 통하여 얻은 확신은 결국 루터로 하여금 로마 카톨릭 敎會의 가르침에 문제를 제기하게 하고 결국 개혁의 길로 이끌었다.
루터가 聖書 硏究를 통하여 발견한 福音은 루터의 모든 문제로 해결하여 주었다 그리고 그는 이 福音을 근거로 中世의 로마 카톨릭 敎會를 개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 루터가 발견한 福音은 무엇인가? 루터는 이 福音을 탑속 서재에서 시편 22편을 읽는 중에 발견했다. 루터는 여기에서 비참한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시편 22편이 자신의 모습을 묘사한 글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했을 때 이해할 수 없는 놀라움에 사로잡혀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다.
‘어째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버림을 당해야 했단 말인가? 나 자신이 버림을 당하는 것은 타당한 일이다. 그러나 어째서? 어째서?’35) 다음 순간에 루터는 벼락을 맞는 듯한 놀라움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할 수밖에 없는 나 루터 대신에 그리스도가 친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했다. 죄없으신 그리스도가 내 대신 죄를 담당하시고 내 대신 버림을 받았다.’36)
이와 같이 루터 앞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모습은 더 이상 무서운 심판자가 아니었고, 진노와 심판의 하나님이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으로 나타났다. 드디어 그는 이제까지 애타게 추구하던 자비로운 하나님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발견하게 된 것이다.37)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되는 것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福音의 眞理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구원이 인간의 공로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에 기반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이므로 구원받은 자는 아직도 죄인이면서도 자유스럽게, 그리고 온전히 용서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새롭고 즐거운 관계에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새로운 삶이 되어진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이 때까지도 이해가 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는데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義에 대한 것이었다. 루터는 이 하나님의 義에 관한 문제를 로마서 강의를 준비하는 동안 깨닫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공의’와 ‘칭의’와의 관계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그 때까지 ‘하나님의 공의’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드디어 ‘하나님의 공의’ 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을 연관시켜 그 뜻을 깨닫게 되었다. 이 ‘義’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義’ 인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하여 루터는 福音의 진수인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칭의’를 깨닫게 되었으며, 이 敎理를 福音의 총체요, 본질이며, 神學의 핵심으로, 그리고 기독교의 중심 진리로 보게 되었다. 루터는 이제 이 敎理를 기준으로 모든 다른 敎理를 판단하고 聖書를 해석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福音을 발견함으로 구원의 확신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38) 이것을 근거로 改革思想을 형성하여 중세기 로마 카톨릭 敎會를 개혁하게 된다.
Ⅳ.루터의 改革思想의 내용
루터의 改曆思想을 살펴보는데 있어서는 여러 가지 난제가 있다. 그 중에 가장 큰 난제는 그가 자신의 思想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루터는 神學 總論이나 기독교 綱要를 저술하지 않았다. 다만 자기를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답변하기 위하여 혹은 문제를 제기하기 위하여 그 때 그 때 필요에 따라서 저술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루터의 思想을 종합적으로 밝히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루터는 자기의 社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저술들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저술들을 통하여 그 때 그 때 제기된 주제에 대하여는 분명한 자기의 입장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루터는 특정문제에 대하여 자기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기 때문에 그의 사상은 그의 저작들 속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A. 95개조 논제에 나타난 개혁사상
루터의 저작들 중에서 改革思想이 가장 잘 나타난 저작은 어느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루터의 저술 동기가 역사적인 어떤 사건을 계기로 자기의 입장을 주장하기 위하여 저술하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改革思想은 첫째로 95개조 논제에 잘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지난 수세기 동안에 인정되어온 것이다. 이 95개조 논제가 비텐베르그 성 교회 정문에 붙여졌을 때 전 독일이 그렇게 소용돌이를 일으킨 것은 이 논제가 당시의 로마 카톨릭과는 분명히 다른 思想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한다. 그러므로 95개조 논제는 루터의 改革思想을 고찰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와 같은 주장에 모든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일부 學者들은 95개조 논제가 改革思想을 나타낸 다기보다는 오히려 로마 카톨릭적 입장에서 저술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이 이와 같이 주장하는 이유는 루터가 95개 논제를 쓸 당시 로마 카톨릭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었음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95개조 논제가 다소 로마 카톨릭적 잔재를 담고 있다는 것을 사실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 논제 안에 로마 카톨릭적인 요소가 있는 것은 루터가 자신의 思想을 부드럽게 나타내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고 보아야 하며39) 이러한 것들로 인하여 루터가 95개 논제에서 改革思想을 보여주고 있지 않다고 보아서는 안된다. 대부분의 루터 연구가들은 이 논제가 로마 카톨릭적 요소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그의 改革思想이 분명하게 보인다고 말한다.40) 즉 이 논제에는 루터가 이 논제를 게시한 동기에서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과 같이 당시에 판매되는 면죄부가 그가 聖書에서 발견한 福音에 모순되기 때문에 이것을 바로 잡으려고 게시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논제에는 로마 카톨릭 思想과는 다른 改革思想이 표현되어 있다고 보아야한다.
그러면 이 안에는 어떤 思想이 있는가? 이것은 이 논제를 분석하여 보면 알 수 있다. 루터는 면죄부 판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41) 한다. 그런데 이러한 면죄부 판매에 대한 비판은 교황의 사면권을 비판하는 것이며 결국 교회의 사죄권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것들이 보여주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神學的인 문제로 독 구원론에 대하여 특히 칭의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루터는 칭의의 문제를 놓고 첫 번째 주제로 회개를 다루고 있다. 사실 이 논제의 중심은 여기에 있다. 그는 1논제에서 4논제까지에서 참된 의미의 회개를 다루고 있는데42)
여기서 루터는 로마 카톨릭 敎會의 고해성사는 죄에 대한 싸움과 참된 회개 그리고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에 저해요인으로 작용한다고 보고 참 회개는 인간의 전 생애를 통하여 계속되며 또 계속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은 그의 전 생애에 걸쳐서 매일 매일 내적인 뉘우침과 외적인 혁신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한다. 곧 죄에 항거하여 싸워서 육43)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투쟁은 무덤에 갈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회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죄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게 되며 참회개에 따르는 사죄의 은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기인한 것이며 그의 발자취를 따라 그가 지신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고 했다. 루터의 이와 같은 회개에 대한 개념은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의 神人관계인 객관적, 양적, 상대적 체계를 부인하고 인격적인 神人관계의 思想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바로 루터는 인격적인 神人관계의 思想을 근거로 하여 그의 칭의의 敎理를 접근했고 이 思想을 기초로 하여 로마 카톨릭의 사면권을 비판한 것이다. 결국 루터는 중세기 로마 카톨릭 敎會가 가르쳐온 잘못된 敎理에 대한 도전과 함께 그의 새로운 福音 中心의 思想인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인격적인 관계라는 改革思想을 선포하게 된 것이다.44)
그리고 루터는 두 번째 神話的 주제로 중세기 로마 카톨릭의 공로 사상에 대한 반론을 펴고 있다. 루터는 제 56논제에서 제 68논제까지와 92논제에서 95논제까지에서 敎會에 위탁된 공로는 마리아나 또는 聖徒들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진리가 충만한 거룩한 福音 내지는 그리스도의 공로라고 말한다. 이 福音에 근거하여 죄의 용서와 새로운 삶이 항구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며 그리스도만이 敎會에게 주어진 유일한 보물이다. 그리고 죄를 사하여 주는 권한은 사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설교의 그리스도 내지는 福音 자체가 聖靈을 통하여 역사할 때 죄를 풀어주기도 매기도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볼 수 있는 루터의 改革思想은 중세의 로마 카톨릭 교회가 공로사상을 내세워 인간 중심의 종교가 된 것을 반대하고 神人관계가 神의 은총으로 이루어진다는 神 중심의 종교를 말하고 있다. 제 37논제45)에서도 참된 聖徒들은 사죄증 없이도 하나님의 선물에 의하여 그리스도와 敎會의 모든 영적 재산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하여 神 중심적인 宗敎思想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루터가 원시 크리스트교회의 神 중심성을 회복한 것이다. 그가 로마 카톨릭을 반대한 것은 로마 카톨릭이 종교의 중심을 점령하고 있는 것을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루터는 로마 카톨릭 敎會의 인간 중심적인 종교를 반대하고 하나님 중심적인 종교를 주장한 것이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제 53논제부터 제 55논제까지는 福音 설교와 이것을 깨닫고 수용하는 信仰에 대하여 말한다.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인 그리스도인은 평생토록 병원인 敎會에서 福音이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계속 치료되어가야 하며 면죄부의 설자리는 결코 없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 26논제부터 제 40논제까지는 면죄부 판매에 대한 비판과 면죄부 神學에 대한 반론을 표고 있는데 제 26논제에서는 면죄부가 연옥에 있는 영혼을 해방시킬 수 있다는 것을 반박한다. 제 30논제와 31논제는 고해성사에 대한 비판이며 면죄부 증명서 발급에 대한 비판이다. 제 42논제부터 제51논제까지는 면죄부를 살 것이 아니라 이 돈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그리고 제 71논제부터 제 89논제까지는 면죄부 판매행위의 구체적인 부패상을 비판했다.46)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95개조 논제에는 어느 정도 로마 카톨릭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가장 근본적인 루터의 改革思想인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하나님 중심적 宗敎思想과 神人 관계를 인격적인 관계로 보는 思想이 나타나 있다. 이신칭의를 근거로 한 구원론을 가르치고 있으며 교회에서 설교되어야 할 십자가의 福音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47)
B. 1520년 개혁논문들에 나타난 개혁사상
마틴 루터의 改革思想을 살펴보는데 있어서 1520년에 발표한 논문들은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이것은 루터에게 이 시기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아보면 쉽게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지원용 박사는 1520년은 루터의 생애 가운데서 여러 면에 있어서 중대한 해였을 뿐만 아니라 宗敎改革의 분수령을 이룬 해라고 말한다.48) 1517년까지 암중모색하던 루터는 비록 학자들간에 토론할 목적으로 95개 논제를 비텐베르그성 교회 문에 게시한 것이기는 하였으나 이 일로 그는 개혁자로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그 후로 로마카톨릭 교회와 더욱더 대립이 격화됨에 따라 그는 우선 외적으로 비난, 공격, 위협, 저주를 받았으며 동시에 찬동과 격려도 받았다. 그런데 1520년이 이 모든 것이 절정에 달한 해였다. 교황 레오 10세는 그해 1월부터 준비한 敎書를 6월15일 발표했는데 이것은 루터가 60일 내에 자기의 주장을 취소하지 아니하면 파면에 처한다는 것이었다.49)
이와 같이 1520년에는 宗敎改革 운동이 이미 본 궤도에 올라 로마 카톨릭과의 타협은 불가능한 것이 되었으며 루터는 그 자신의 태도를 확실히 밝히고 그의 신앙 내용을 더욱 명백히 해야 할 필요성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제까지 무관심하던 人文主義者들과 일반에게서 찬사와 격려와 호응을 얻기도 하였지만 루터 자신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일반인들의 오해도 적지 않게 받게 되었다.50) 그러므로 루터는 어떻게 자신의 입장을 일반 민중에게 오해받음이 없이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가 하는 과제를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루터는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1520년은 루터 자신이 내적으로 성열한 해이기도 하였다.
그는 信仰的으로나 神學的으로 말씀에 확고 부동한 기반을 두고 福音에 대한 그의 태도를 어디서나 굽히지 않고 분명히 밝히고 주장할 수 있었다.51) 말하자면 그는 그의 개혁 정신을 자신 있게 밝힐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미 그에게는 새로운 神學의 터전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루터는 자신의 태도를 불가피하게 분명히 밝혀야할 외적인 요구에 응할 수 있게도 되었던 것이다. 그는 교회의 미신들을 통분히 여기고 福音의 眞理들을 천명하기 위하여 우선 글로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서 나타난 것이 宗敎改革의 의미를 명백히 하여주는 4대 작품이다. 이 4개의 논문에서 그는 자기의 改革思想을 대체적으로 거의 다 표현한 셈이다.
루터는 놀랄 만큼 많은 저서, 논문, 설교 혹은 담화를 저술했는데 그 가운데서 이 4대 작품들은 유달리 빛나는 것이다. 이 4대 작품은 信仰의 핵심을 보여주는 루터 神學의 금자탑이었으며 영원히 변치 않는 眞理를 증거해 주는 개혁의 소리이고 후대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의 진귀한 보배가 되었는데52) W. Walker는 루터가 이 작품들로 자신의 개혁자 칭호를 완성하였다고 한다.53)
루터는 이상의 4대 작품을 통하여 하나님의 福音과 은총으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반복음적인 인간의 공헌 사상을 여지없이 깨뜨리고, 영적인 것과 사죄에 대한 특권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교황권의 횡포에서 사람들의 영혼을 해방시켰으며, 또한 구원의 길과 본질을 명백히 밝혔다. 물론 그가 여기에서 모든 것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하지는 않았으나 근본적인 원리만은 뚜렷이 드러내었다.54) 즉, 루터는 1520년에 그의 개혁사상을 실제적으로 다 표현한 셈이다. 이제 각 논문에 표현된 改革思想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1. [善行論]에 나타난 改革思想
[善行論]은 루터가 1520년 3월에 시작하여 그 해 5월에 마친 것으로 선제후 요한에게 바친 소책자이다.55) 이것은 평민적이고 교화적인 문체로 개혁 정신을 잘 나타내주며 信仰과 善行의 위치관계, 信仰과 善行의 교차점, 신앙의 근본적인 동기 및 율법에 관한 문제 등을 간명하게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의 구성은 십계명을 해설하는 형식으로 9개의 항목으로 되어 있다.
루터는 여기에서 10계명 가운데서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는 첫째 계명은 다른 모든 계명보다 앞선다고 보며, 이것은 그가 유일하신 까닭에 오직 그만을 신뢰하고 믿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계명은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완성되는 최고의 계명이며 최선의 계명이다. 여기에서 출발하면 한 오라기의 짚을 잡는 일이라도 善行이 될 수 있으나 만일 그렇지 못할 때는 온 인류와 피조물에 해당하는 善行이라 할지라도 무의미한 것이라고 하였다.56) 이와 같은 루터의 善行觀은 자연히 로마 카톨릭 교회의 善行觀에 도전적이 아닐 수 없다.
로마 카톨릭 敎會의 善行의 개념은 敎會에서의 기도, 금식, 구제, 등만이 善行이라고 극히 협소하게 생각하였고 믿음도 단지 하나의 덕성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여기에 반하여 루터는 믿음을 근거로 한 善行 곧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 안에서의 기거동작은 무엇이나 다 善行이라고 하였다. 또한 루터는 善行 중 최고의 善行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敎會에서 명령하는 인간의 노력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으며 하나님을 믿는 信仰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루터는 구원의 조건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달려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루터는 古代에서 中世期에 이르는 이원론적 관념을 이탈하여 一元論的 관념을 보여주고 있다. 즉 하나님을 섬기는 최선의 장소를 특별한 敎會의 영역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과정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것은 성속의 구분을 강력하게 보여주는 中世의 로마 카톨릭 敎會의 思想과 본질적으로 다른 思想임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루터는 이 믿음이 바로 사랑, 화평, 기쁨 및 희망을 가져다주며, 이러한 믿음에서 나오는 모든 행위는 크고, 작고,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으나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행위가 행위 자체와 관계되는 것이 아니고 신앙과 관계되는 것이라고 보았다.57) 그러므로 그는 善行은 인간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기쁜 행위가 되어야 하며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이 그에게 은총을 주신 사실을 믿어야 하는데 이것이 참 善行이며 또한 가장 고귀한 행위라고 주장한다.58)
또한 루터는 이 행위가 믿음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솟아나는 자발적인 행위라고 하여 善行의 동기를 구원에 대한 응답으로 본다. 이러한 그의 思想은 善行을 구원의 조건으로 보고, 善行의 결과를 중시하는 로마 카톨릭 思想과 본질적인 차이를 보여주며 인간 중심의 宗敎思想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 중심적인 宗敎思想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59)
2. [독일 크리스챤 귀족에게 보내는 글]에 나타난 改革思想
루터는 이 論文을 1520년 6월 중순부터 쓰기 시작하여 그해 7월에 완성하여 8월에 출판하였다. 이 논문은 두 주간도 못되어서 4000부의 책이 매진되었고 라이프찌히에서 재판까지 나온 관심거리의 책이었다. 불타는 확신과 유창한 독일어로 쓰여진 이 책은 급속히 독일 전역에 유포되었다. 이것은 루터가 로마와의 분리가 이미 불가피하다는 것을 확신한 후에 나온 최초의 출판물이며60) 루터는 이 論文에서 改革運動의 참 뜻과 목적을 연방군주들에게 제시하였다.61)
그리고 이 論文은 기본적인 문제를 취급하는 부분과 실제 문제를 취급하는 부분으로 크게 나뉘어 진다. 첫째 부분에서는 1천년 가까이 西方世界의 社會, 政治, 宗敎, 思想의 기반을 이루고 있었던 이른바 “로마의 세 가지 담”62) 에 관하여 논박하고 있는데 루터는 이 세 가지 담 때문에 아무도 로마 카톨릭 敎會를 개혁할 수 없었으며 무서운 부패의 원인이 되어왔다고 주장하면서 神學的으로 논박하고 있다.63)
루터에 의하면 첫째 담은 영적 계급이 세속적 계급 위에 있다는 주장 곧, 敎會의 권세가 세속권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인데 이에 대하여 루터는 이 계급의 구분 자체를 부정하고 萬人祭司長設을 내세워서 세속 통치자들의 宗敎的 기능과 권한을 높이 주장했다. 이것은 모든 기독교인들 사이에는 직무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고 지위나 신분의 차이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루터는 세속 군주들도 교황과 똑같은 신분을 가지고 있으므로 세속 군주들이 하루 속히 교황의 靈的 억압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며 교황이 敎會의 改革을 거절하는 경우에는 세속 군주들이 敎會가 聖書의 교훈에 따라 본래의 위치로 복귀하여 자유를 회복하려는 일에 마땅히 원조와 보호를 게을리 하여서는 안된다고 하여 세속 군주들이 敎會 改革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호소하고 있다.
둘째 담은 聖書 해석자인 교황과 교황 무오설64) 즉 교황만이 聖書를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인데65) 이것에 대하여 루터는 되지 못한 거짓말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교황의 무오설이 사실이라면 聖書는 어디에 필요하고 무엇에 유용하겠는가? 우리는 聖書를 불태워 버리고 聖靈을 소유하고 있는 로마의 不學 無識한 수령들로 만족하자”66)고 비꼬아서 말한다. 그는 고린도전서 14장과 요한복음 6장을 근거로 하여 교황의 무오설을 부정하면서 聖書 해석이나 그 해석의 확인이 홀로 교황에게만 속한다고 하는 것은 순전히 조작한 거짓말이라고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다 사제들이고 다 한 信仰과 한 福音과 한 聖禮를 가지고 있다면, 왜 信仰 문제에 관하여 바르고 그른 것을 시험하고 판단할 권능을 가져서는 안되는가? 그러므로 신앙의 대의를 지지하고 이것을 이해하고 변호하며 모든 오류를 책망하는 것이 모든 크리스챤에게 마땅한 일이다’67)
이상과 같이 루터는 萬人祭司長을 근거로 논박했다.
루터가 말하는 셋째 담은 교황과 공의회 즉, 교황만이 종교회의를 소집하거나 결의를 확인할 수 있다는 주장인데 이것에 대해서 루터는 이것은 전혀 聖書的인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회의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니케아 종교회의68)는 로마의 주교에 의해서가 아니라 콘스탄틴 황제에 의하여 소집되고 확인된 사실을 근거로 하여 강력하게 반박한다. 또한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필요성이 있고 또 교황이 그리스도교계에 거리낌이 될 경우에는 소집할 수 있는 처음 사람이 모든 몸의 한 성실한 지체로서 참으로 자유로운 공의회를 성립시키기 위하여 그 일을 행하여야 한다. 이 일은 세속적인 당국자처럼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69) 이와 같이 루터는 세속 통치권이 宗敎改革에 적극 참여할 것을 호소하면서 세속 통치권의 적극적 기능을 인정했다.
이 論文의 둘째 부분에서 루터는 공의회에서 논의되어야할 여러 가지 문제점들과 개선되어야 할 당면한 실제적인 문제들을 취급한다. 루터는 여기에서 敎會內의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政治, 經濟, 社會, 敎育 등 다방면에 걸쳐서 개혁안을 제시하여 宗敎改革이 指向하여야 할 바를 가르쳐 주었는데 이는 그의 改革이 宗敎生活 만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전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곧 루터가 성속을 분리하지 않고 一元論的 세계관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루터의 이러한 改革案은 굉장한 호응을 얻었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당시의 人文主義者들이 내놓은 改革案과 공통점이 있고 그 논조가 흡사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70) 그러나 루터는 이들이 모두 도덕적인 면과 국민적인 감정에 호소하여 로마 교황의 사슬로부터 벗어나려고 한 것은 근본문제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기 때문에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다고 확신하였다. 그는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문화적이나 도덕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신앙적인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즉 信仰의 改革이 없이는 참 改革은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이다.
3. [교회의 바벨론 감금]에 나타난 개혁사상
루터의 이 論文은 1520년 10월에 출판이 되었는데 이것은 루터의 가장 神學的이고 조직적인 論文 중의 하나이다. 이 論文은 神學者들과 지식층에 속한 사람들을 위하여 본래는 라틴어로 쓰여졌다. 이 論文은 루터의 聖禮觀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루터는 여기서 로마 카톨릭 敎會의 잘못된 聖禮觀을 神學的으로 조리 있게 논박하면서 그의 성례에 대한 뜻깊고 새로운 해석을 말해준다.71)
이 論文의 제목을 [교회의 바벨론 감금]이라고 붙인 것은 로마 카톨릭 交會가 성례전에 대한 왜곡된 가르침을 통칭하는 말이다. 즉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싸움에 패하고 오랫동안 바벨론 포로가 되어 있으면서 고난의 생활을 한 것처럼 중세기의 敎會가 성례전으로 말미암아 교황청에 포로가 되었다는 풍자이다.
또한 이 論文은 글을 쓴 대상이 神學者 층이었던 관계로 다른 글들보다 표면적으로는 덜 격렬한 어조로 쓰여져 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그릇된 점들을 주저함 없이 정면으로 공박하고 있으며 그 뜻에 있어서도 매우 급진적인 改革 論文이다. 그는 당시에 통용되던 로마 카톨릭 敎會의 일곱 가지 성례전을 모두 다루었는데 이 論文의 거의 대부분을 성찬과 세례를 취급하는데 할애하고 있다.72)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제정된 것이 아니면 성례 전으로 취급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聖書에 따라서 聖禮란 세례와 성만찬 두 가지 뿐이라고 하였으나 이 논문에서는 참회도 성례전으로 인정했는데 루터가 여기서 참회를 聖禮로 인정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는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표식이 있어야 하는데 참회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근거한 세례나 성찬도 같이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73)
이 論文에서 루터는 로마 카톨릭의 성례전 제도는 단순히 信者들을 사제에게 구속시키려는 노력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면서 한편 성례전의 참된 기능은 믿음으로써 우리가 거저받는 하나님의 약속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는 聖禮의 유일한 가치는 그것이 神의 약속의 증거이기 때문이며 성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죄가 용서되었다는 神의 약속을 표명하는 표시이며 信仰을 강화시켜 준다고 하였다.74)
이 論文에서 취급된 요점은 성례전의 단순한 표지가 아니요, 성례전의 효력과 뜻에 관한 문제였는데 루터는 이 문제가 세례와 성만찬에서 진지하게 추구되어야 한다고 보면서 聖書的 근거를 들어 성만찬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한다. 루터는 여기에서 로마 카톨릭 敎會의 思想과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주는 그의 改革思想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여기에 나타난 그의 改革思想은 그가 오직 聖書에 권위를 두는 것과 성례전의 효력은 성례전을 받는 자의 믿음에 있다는 것, 그리고 시종일관 萬人司祭論을 보여준 것이다. 그는 바로 이 改革思想을 가지고 로마 카톨릭 敎會의 성례전 적인 삶, 司祭織과 계층질서, 그리고 수도원적 제도와 그 삶의 양식 등을 개혁하고자 한 것이다.75)
4. [크리스챤의 자유]에 나타난 改革思想
이 論文은 밀팃즈의 권고에 따라 교황과의 화해를 위해 1520년 10월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내는 편지에 첨가된 글인데 고린도전서 9장 19절, 로마서 13장 8절이 본 論文의 주제가 된다.76) 이 논문은 30개조로 된 작은 글이나 루터의 신앙체험이 역력히 나타나고 있으며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총체가 담겨있어서 루터의 저서 가운데 진주와 같은 글이다.
루터는 이 글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명제로 제시한다.
‘크리스챤은 더할 수 없이 자유로운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하지 않는다. 크리스챤은 더할 수 없이 충의로운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다.’77)
이 말은 그리스도인은 신앙에 있어서는 절대로 자유로우나 사랑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두 명제는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이 보이나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가장 잘 보여주는 말이며 그리스도인의 본질을 밝혀주는 말이다. 루터는 사람에게는 영적이고 육체적인 이중적 본성이 있어서 한편으로는 무한히 자유롭고 영적인 내적 사람이 있고 또 한 편에는 현세적이고 외적인 옛사람이 있다고 말하였다.78)
여기에서 영적이고 내적인 자유자란 모든 믿는 자가 가지는 자유를 말한다. 사람의 영혼을 해방시켜 자유케 하는 것은 육적이고 외적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이므로 그를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자유자가 되었다는 것이다.79) 이렇게 하여 자유롭게 된 자는 만물의 주인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영적으로나 내적으로 자유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루터는 모든 믿는 자의 영혼이 신앙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信仰으로 맞이하여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가지게 되었다고 논증하였다.80) 여기에는 信仰 이외의 인간의 어떤 의식이 필요치 않는다. 내적인 사람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뿐인데 이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福音이며 이 福音은 信仰에 의해서만 받을 수 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결합할 수 있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靈的 祭司長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설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靈的 의로움을 받은 모든 자가 靈的으로는 무한히 자유롭고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지만 그는 역시 現世的이고 外的이고 肉的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살면서 肉身과 정욕에 대항하여 싸워야 하며 또한 이웃과의 관계에서 그들을 사랑으로 섬겨야 한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크리스챤은 그의 이웃에 대하여 기쁘게 자발적으로 善行을 해야 한다. 그리고 언제나 기도와 봉사와 사랑으로 몸을 다스려야 한다. 따라서 크리스챤은 신앙으로는 그리스도안에서 살며 사랑으로는 이웃 안에서 산다. 그는 信仰으로 하나님에게 올려지고 사랑으로 그 자신 이하로 이웃에게 내려간다. 사랑으로는 아래로 내려와 이웃을 섬겨야 하는 것이 크리스챤의 사명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論文에서 루터는 기독교인의 구원론적인 자유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윤리를 말하고 있다. 즉, 루터는 이 論文의 전반부는 구원을 말함으로써 기독교적 생활 윤리의 동기를 말하며, 후반부는 주님의 종 되심을 본받아 기독교인이 역시 이웃을 위하여 사랑의 종노릇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善行이 순수한 의미에서 영적인 자연발생설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81) 그러므로 루터는 이 論文에서 기독교 윤리의 神學的 원리를 제시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Ⅴ. 結論
루터의 宗敎改革이 결과적으로는 당시의 문화생활이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쳤고, 인류의 歷史가 中世期에서 近世期로 넘어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루터의 宗敎改革은 기독교를 갱신시킨 순수한 敎會의 改革運動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이것은 루터의 宗敎的 체험과 당시의 여러 思想의 조명아래 福音을 발견하고 그 福音을 근거로 改革思想을 형성함으로서 가능하게 된 것이다. 즉, 루터는 구원의 문제로 고통의 시련을 겪는 과정에서 시편과 로마서 연구를 통하여, ‘하나님의 義’ 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발견함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라는 宗敎改革의 원리를 세우고 이것을 기초하여 改革思想을 형성하여 로마 카톨릭 交會의 思想, 制度, 가르침을 향하여 改革의 횃불을 든 것이다.
루터가 改革의 원리를 발견한 것이 시편과 로마서 연구를 통해서라면 루터의 改革的 원리의 발견시기는 1516년 이전이고 이 改革的 원리를 기초로 하여 루터가 改革사상을 대체적으로 거의 형성한 시기는 1520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므로 루터의 改革思想이 무엇인가를 살펴봄에 있어서는 로마 카톨릭 敎會와의 論爭을 위하여 저술한 95개조 논제와 1520년에 출판된 4개의 論文을 면밀히 분석하여 루터의 改革思想을 고찰하여야 한다.
여기에 나타난 루터의 改革思想을 보면, ‘하나님 중심의 宗敎 思想’,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인격적 관계라는 사상’, ‘律法과 福音을 구별하는 思想’, ‘십자가의 神學’, ‘萬人司祭論’, ‘오직 聖經으로만’ 등의 思想이 있음을 보았다. 이것들은 또한 오직 은혜로만, 오직 믿음으로만, 오직 그리스도로만, 오직 聖書로 만이라는 말로 함축될 수 있는 말들이다.
이러한 루터의 思想은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하여서 그 思想의 형성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왜냐하면 어떤 행동이나 운동, 또는 진술을 이해하려면 그 배경에 대해 바로 알고 있지 않고서는 그러한 것들을 바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루터의 改革思想 형성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로, 중세 후기 스콜라주의 神學을 들 수 있다. 中世 로마 카톨릭 交會의 공식 神學이었던 스콜라 神學은 11-12세기에 이르러 민중들의 신앙을 당시의 제도적이며 형식적인 종교생활로 몰아갔다. 그러자 여기에 대한 반동으로 구원 내지는 내적 확신을 추구하는 노력이 대두되었다.
두 번째로는 中世의 神秘主義이다. 中世期 로마카톨릭 敎會는 外的, 形式的 宗敎로 되어갔다. 그리하여 聖徒들에게는 靈的인 갈급함이 생기게 되었다. 이에 따라 기존교회의 가르침의 속박에서 벗어나 영혼과 정신을 해방시켜 內的, 靈的, 個人的인 해방과 자유를 얻으려는 神秘主義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 神秘主義의 특색은 수난을 겪으신 그리스도의 생애를 그대로 본받아 예수를 따르고 예수와 같이 되려고 한 것이다. 이들 神秘主義들 중에 루터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독일의 神秘主義였다.
셋째로는 이탈리아 北歐의 르네상스 人文主義 운동이다. 이것은 루터에게 聖書연구에 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로렌조 발라나 로힐린 같은 人文主義者들은 聖書의 원어를 연구하고 기독교의 진리를 聖書에서 찾아야 할 것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루터는 聖書 연구에 자극을 받게 되었다. 人文主義者들 중에서 에라스무스는 루터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그는 中世 로마 카톨릭이 聖書 중심의 단순한 기독교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으며 초대교부들을 연구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歷史的이고 言語的인 聖書해석으로 루터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루터의 改革思想은 당시의 思想들의 영향아래서 창조적으로 그것을 소화하여 놀라운 改革思想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루터는 이 思想을 근거로 하여 로마 카톨릭 敎會의 모든 미신과 부조리를 개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歷史의 자기 희생이요 해산의 고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宗敎改革의 선구적 운동은 오래 전 부터 진행되어 프랑스 남부지방에서의 이단운동82)에서 비롯되어 영국은 14세기에 John Wycliffe(1324~1364)에 의한 福音主義的 개혁운동이 있었고, 15세기초에는 보헤미아의 John Huss(1375?~1415)가 개혁을 부르짖었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루터에 의하면 위클리프와 후스는 교황의 생활에 대해서만 싸웠지만 자신은 로마교의 그릇된 敎理를 공격하여 그들을 패배시켰다고 말한다.
아울러 宗敎上 또는 敎會 制度上의 피해가 루터 改革運動의 직접적인 원인과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면 社會的․經濟的․政治的 압박은 그 잠재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16C에 발생한 루터와 그의 宗敎改革은 중세 1000여년 간의 정신세계를 지배하여 왔던 로마 카톨릭의 조직과 그 敎理에 대한 改革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활에 밀착된 부분에 대한 혁신을 촉구한 西洋思想에 있어서 가장 활기찼던 정신운동의 하나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인간의 모든 歷史는 劇的인 것이다. 아무리 歷史的 사건의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으로 원인이 단순하게 나타나 보인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분석해 보면 진실한 사람이 歷史를 이끌어 왔음을 우리는 보아왔다. 이렇게 본다면 마틴 루터야말로 歷史에 작용했던 뛰어난 인물 중에 한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는 처음부터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思想家는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의 사고는 實存的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思想은 자신의 인간적 경험과 결정으로부터 발전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정통적인 歷史性의 핵심부에 서서 기독교의 敎理를 당시대에 적용시킬 목적으로 새로운 정신적인 세계를 이끌어 낸 행동적인 인물이었다83).
루터의 改革이 본질적으로 宗敎的이었다고 하더라도 宗敎改革을 설명함에 있어서 社會的․政治的․經濟的 異素를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中世期에 있어서 두 큰 세력인 교황과 황제의 권위에 반항하였지만 반면에 제후들과 국민들의 보호와 지지를 얻었다. 그가 국민들에게 그들의 宗敎의 참모습을 보여 주었던 것은 기독교 信仰의 핵심에 대한 재발견의 필연적 결과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계속된 프로테스탄트의 改革과 카톨릭의 改革으로 기독교는 두 개의 대립된 宗敎 사회로 분할되었으나 오늘날 두 개의 敎會가 공존하여 발전하고 있음을 볼 때 루터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앞으로도 계속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參考文獻
(한서)
김성식. [루터]. 서울:지문각, 1969.
이장식. [기독교사상사].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83.
김성식.[루터]. 서울:의명당, 1983.
이형기. [종교개혁 신학사상]. 서울:장로회신학대학출판부, 1986
전경연. [루터 신학의 제문제] 서울:대한 기독교서회, 1978.
지원용. [루터와 종교개혁]. 서울:컨콜디아사, 1983.
지원용. [루터의 사상: 생애와 사상]. 서울:컨콜디아사, 1987.
홍치모. [종교개혁사]. 서울:성광문화사, 1985.
(번역서)
Aland, Kurt. [네사람의 개혁자들]. 이기문역. 서울:컨콜디아사, 1983.
Bainton, R. H. [마틴 루터의 생애]. 이종태역. 서울:생명의말씀사, 1988.
Luther, Martin. [크리스챤의 자유]. 지원용역. 서울:컨콜디아사, 1983.
[교회의 바벨론 감금]. 지원용역. 서울:컨콜디아사, 1985.
[독일 크리스챤 귀족에게 보내는 글]. 지원용역. 서울:컨콜디아사, 1982.
[탁상담화]. 지원용역.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77.
S. E. 모이어. [인물중심의 교회사].곽안전,심재원 역. 평화당.1977.
(학술 논문집)
김명혁. [신학지남]. 44권. 제1집. 통권 176호. 1977.3.
박봉배. “초기 루터의 신학에 있어서의 윤리적 근거로서의 칭의”. [기독교사상]. 1973. 5.
손규태. “율법과 복음의 구별”. [현존]. 1973. 10.
홍치모. “독일 인문주의와 루터의 종교개혁”. [신학지남]. 1975. 10.
윤경호. “루터사상에 관한 일고”.영남대학교.1983.
김만화. “마틴 루터의 정치사상에 관한 연구”. 효성여자대학교.1992.
☞ 출처: 원광대학교 사학과( http://mahan.wonkwang.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