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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 산책 스크랩 <쌍차쌍조(雙遮雙照)>
두루미 추천 0 조회 904 16.04.29 08:2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쌍차쌍조(雙遮雙照)>

                             

                 

   ‘쌍차쌍조(雙遮雙照)’는 흔히 쓰는 말이 아니다. <영락본업경(瓔珞本業經)>에 나오는 독특한 불교용어로서 중국 천태종 개조 지의(智?, 538~597) 대사는 이것을 인용해서 중도(中道)를 설명했고, 성철(性澈) 스님도 쌍차쌍조가 중도의 핵심사상이라 했다. 여기서 ‘쌍(雙)’이라고 하는 것은 주관과 객관을 얘기하며, 상대의 양변을 말한다. 즉, 나와 너, 유와 무, 이것과 저것, 양과 음, 강과 약, 흑과 백 등 일체의 차별상인 2분법을 말한다.

    쌍차쌍조는 이분법적 사고에 사로잡혀, 좋고 나쁨, 내편 네편, 승패와 같이 좌우를 구별하는데 급급한 오늘에 사는 우리들이 배워야 할 교훈이다. 있고 없음은 서로 상대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므로, 세상만사의 이치를 상대적인 관점에서 이해하지 말라는 말이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데서 추함이란 관념이 나오고, 선(善)을 좋다고 생각하는 데서 악(惡)의 관념이 생긴다. 이와 같이 천편일률적으로 양쪽을 극단적으로 분별하고 차별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이다. 깨끗하다 더럽다,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와 같은 흑백논리처럼 양 극단에 치우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쌍차쌍조는 양 극단을 여의고, 각자 자기 고집만 내세우지 말고, 상대방을 이해해서 서로 감싸주고, 북돋우어주는 원융무애(圓融無碍)한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양변이 합쳐 하나가 되는 것도 아니다. 각자의 의견을 살리면서 하나로 융합하는 것, 이것을 융이불일(融二不一)이라 한다. 원융무애란 서로 모순되고 배척하는 양변을 떠나서 양변이 거리낌 없이 통해버리는 것을 말하며, 일체가 거리낌 없이 원만하게 껴안아 받아들이는 경지를 의미한다. 바로 중도(中道)인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컫는다.

    쌍차쌍조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다’, 이렇게 말한다. 그럼 뭘까. 이것과 저것, 남 ? 여를 초월해야 한다는 말이다. 막을 차(遮)자를 쓴다. ‘照(조)’라고 하는 것은 비출 ‘조(照)’자인데, 쌍조(雙照)라는 말은 초월한 자리에서 두 개를 다시 긍정하는 자리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초월은 왜 초월하느냐, 긍정하기 위해서 초월한다.

    쉬운 예로 부부관계를 생각해보자, 남편과 아내라는 남 ? 여를 초월한 자리 - 서로 사랑하는 자리에 서게 되면 남녀의 성차별이 없어진다. 여보! 당신인데, 부부는 일심동체인데, 거기 무슨 남녀 구분이 있겠는가. 그러면서도 남자는 남자대로의 특성을 인정하고, 여자는 여자로서의 특성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남자의 옹고집도 인정하게 되고, 여자들의 시기질투도 이해가 된다. 어느 정도의 단계에 올라서면 거기가 바로 중도의 자리이다. 초월의 자리, 궁극의 자리에 서고 보면 다 이해가 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남남끼리 만나 금실 좋은 부부관계가 되면, 바로 거기가 중도의 자리이다. 약점 없는 완벽한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서로가 극진히 사랑한다면 그런 약점을 다 덮어버리고, 부부가 사랑으로 용서하고 융합하게 된다. 그래서 아무 갈등 없이 아늑한 보금자리를 꾸며 오손 도손 자식 낳고 잘 산다면, 그것이 바로 이상적인 쌍차쌍조이고, 중도의 자리이다.

    그러니 쌍차쌍조란 ‘양극단의 변견을 버리고, 모두를 합쳐 다 함께’ 그런 말이다. 세상의 모든 시끄러움은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불협화음에서 생긴다. 하모니가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처럼, 서로 자기주장만 고집하지 말고, 상생의 길을 추구하는 윈윈전략이 이루어지면 세상을 행복하게 한다. 그러므로 지극한 중도는 지혜와 자비로 귀결된다. 무조건 하나로 통일하려는 발상은 또 다른 획일주의이며, 제2, 제3의 갈등을 낳는 뿌리가 된다. 사물을 좌와 우, 흑과 백, 많고 적음 등으로 양극화 2분화? 해서 그 중 하나로 모든 것을 통일시키려는 독선주의에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 중도(中道)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양변을 아울러 어느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지혜이다. 그리하여 쌍차쌍조(雙遮雙照)를 지향하는 원융무애(圓融無碍)한 경지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쌍차(雙遮), 즉 양변을 막는다는 것은 극단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하며, 쌍조(雙照), 즉 양변을 비춘다는 것은 양변이 완전히 융합하는 것을 말한다. 양변이란 모두 변견(邊見)인데, 변견을 버리면 곧 중도이다. 비유하자면 쌍차란 양변을 완전히 떠난 것이니 구름이 걷혔다는 말이고, 쌍조란 양변이 서로 융합한다는 것이니 해가 드러나 비친다는 말이다. 구름이 걷혔다는 것은 바로 해가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해가 드러났다는 것이나 구름이 걷혔다는 것은 결국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쌍차가 즉 쌍조이며, 쌍조가 즉 쌍차이다. 다시 말하면 쌍차(雙遮), 즉 양변을 버리고 나니 쌍조(雙照), 즉 양변이 서로 융합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으며, 쌍조, 즉 양변을 완전히 융합하니 쌍차, 즉 양변을 버리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쌍차쌍조 원리가 참으로 묘한 것이다. 그래서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도 한다.

    불교의 최고 원리란 중도(中道)이며, 그 중도의 내용은 양극단을 버리고, 양변을 통합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지의(智?, 538~597) 대사가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마음이 이미 맑고 깨끗해지면 양변을 다 막고, 바르게 중도에 들어가면 두 법을 다 비추느니라(心旣明淨에 雙於二邊하고 正入中道에 雙照二諦니라)”. 여기서 양변을 서로 다 막는다(雙於二邊)는 것은 상대모순(相對矛盾)을 다 버리는 것을 뜻한다. 현실세계란 대개가 상대모순으로 엮어진 형국이니, 선과 악, 옳음과 그름, 있음과, 없음, 괴로움과 즐거움, 너와 나 등 대개 2분법적 상황이다. 이들은 서로 상극이며 모순과 대립하는 투쟁의 관계이다. 우리는 평화의 세계를 목표로 해서 살아가고 있는데, 상극 투쟁하는 양변의 관계에서는 평화를 찾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참다운 평화의 세계, 진정한 자유를 얻으려면 양변을 버려야 한다. 모순 상극의 차별세계를 버려야 한다. 양변을 버리면 양 세계가 서로 다 비치게 된다[쌍조이제(雙照二諦)]. 여기서 다 비친다는 것은 서로 통한다, 초월한다는 뜻이니 선과 악이 통하고, 옳음과 그릇됨이 통하고, 모든 상극적인 것이 서로 통해 원융해지는 것을 말한다. 그것을 둘 아닌 법문[불이법문(不二法門)]이라고 한다. 선과 악이 둘이 아니고, 옳음과 그릇됨이 둘이 아니고, 괴로움과 즐거움이 둘이 아니라고 불교는 가르치고 있다. 둘이 아니면 서로 통하게 되는 것이니, 서로 통하려면 반드시 양변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추구해야 한다. 그래서 중도를 쌍차쌍조라 한다.

    <영락본업경>에 이런 말이 있다. “마음이 이미 밝고 청정해 쌍으로 양변을 차단하고 바르게 중도에 들어가서 쌍으로 이제를 비추니 부사의한 부처님 경계를 구족해 줄어듦이 없느니라.” 여기서 차단하고 들어간다고 하지만 그것은 순차적인 것이라는 뜻이 아니고 마치 구름이 걷히니 해가 드러나는 것처럼 서로 간격이 있는 것이 아니다. 구름이 걷히면 해가 드러나고 해가 드러나면 구름이 걷히는 만큼, 쌍차와 쌍조에는 간격이나 거리가 있을 수 없다.

    있다는 것은 없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에만 드러난다. 이 말은 모든 세상사물과 자연의 이치가 상대적인 비교에서만 파악할 수 있는 것 같지만 결국 하나라는 말이다. 따라서 이것은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라는 말과도 통한다. 즉, 근본적으로 쌍차와 쌍조는 즉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제법의 참모습으로서 중도(中道)이므로 실제로는 이것을 분리하려야 분리할 수 없는 것인데, 이해를 돕기 위해 편의적으로 쌍차와 쌍조를 나누어 놓고, 설명을 하는 것이다. 허지만 제법의 참모습인 중도는 실제로는 색(오온)과 공이 분리하려야 분리할 수 없는 즉한 것이기 때문에 쌍차 그대로가 쌍조이고, 쌍조 그대로가 쌍차이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진제(眞諦) 속에 속제(俗諦)가 있고 속제 속에 진제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진제 속에 속제가 있다고 하는 것은 공즉시색(空卽是色)이고, 속제 속에 진제가 있다는 것은 색즉시공(色卽是空)인데, 색과 공이 즉해 있는 것이 제법의 실상인 중도이고, 불이법문이며, 결국 쌍차가 곧 쌍조이다.

    이와 같이 만법(萬法)은 원융무애(圓融無碍)하게 서로 의지해 존재한다. 이것이 만법의 본래의 모습이다. 마찬가지로 야생의 밀림을 자연 그대로 두면 그 자체 안에서 조화롭게 조절이 이루어져서 원만한 숲과 자연을 이루어나가는데, 그것이 원융무애이다.

그리고 언뜻 생각하면 공(空)과 유(有)는 서로 모순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진공(眞空)이 아니면 묘유(妙有)일 수 없고, 묘유가 아니면 진공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진공 즉 묘유이고, 묘유 즉 진공이며, 진공과 묘유는 서로 분리 될 수 없는 완전한 합일이므로 이것이 즉(卽)함의 뜻이다. 색과 공이 즉함과 같다.

    비유하자면, 이 거울과 저 거울의 빛이 서로 걸림이 없어서 서로의 거울에 비춘다. 다만 빛의 작용 즉 역용(力用)이 있을 뿐 서로 용납해 상입(相入)하며, 중중무진(重重無盡)의 거울 빛이 서로 의지해 서로 걸림 없이 존재한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이 거울이 저 거울을 받아들여 서로 상즉(相卽)해 있으니 이것이 일즉일체 일체즉일(一卽一切 一切卽一)해 원융무애이다.

    당나라 때 임제 의현(臨濟義玄, ?~867) 스님은 <임제록(臨濟錄)>에서 “도(道)란 어디에서나 청정과 광명에 걸림이 없음이다.”라고 했다. 마음이 청정하다는 것은 일체차별망견을 다 버리는 것을 말하니 쌍차로서 망상의 구름이 다 걷혔다는 것이다. 마음에 광명이 비침이란 망상의 구름이 다 걷혀 무한한 광명을 얻게 되니 쌍조이다. 그래서 결국은 차조동시(遮照同時)이다. 중도에는 양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중간도 없다. 언어로써 표현하자니 쌍차쌍조이지, 실상을 알고 나면 쌍차가 곧 쌍조이고 쌍조가 곧 쌍차로서 언제든지 차조(遮照)가 동시이며, 그 둘을 분리할 수 없다.

    바람이 불면 체(體, 근본)가 드러나듯이, 꽃이 피면 체가 드러나듯이, 인연이 닿으면 체가 드러나듯이, 용(用)은 체(體)에 의지하고 체는 용을 의지한다. 그것을 적이상조 조이상적(寂以常照照以常寂)이라 하고,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示空空卽示色)이라 하며, "쌍차쌍조(雙遮雙照)라고 한다.

    고대 이스라엘의 솔로몬왕(BC970~930) 때의 일이다. 두 여인이 아이를 두고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다투었다. 이에 재판이 열리고, 솔로몬왕은 아이를 둘로 쪼개라고 했다. 결국 한 여인이 “이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다.”라며 포기했다. 아이를 죽일 수는 없었다. 그녀가 진짜 아이 엄마였다. 네 아이 내 아이, 좌우로 갈라진 한쪽에 섰던 여인이 그 한계를 극복하고 “내 아이가 아니다.”라고 선언한 순간, 그 여인은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다. 어느 편도 아닌 오로지 아이의 편인 그 여인이 진짜 엄마였기에 아이를 살린 것이다. 진제(眞諦)와 중도(中道)의 원리로 아이를 살린 것이다.

    중도(中道)란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말한다. 중도를 벗어나면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면 중도를 벗어나는 것이고, 그러면 실상(實相)을 볼 수 없다. 이때 어느 한쪽과 다른 한쪽을 양변이라고 한다. 이를 모두 부정하는 것을 쌍차라 하고, 동시에 둘 다를 모두 인정해 수용하는 것을 쌍조라 한다. 이 말은 불성(佛性)은 있음과 없음에 얽매이면 볼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있음과 없음을 완전히 떠난 것도 아니다.

    쌍차쌍조를 좀 더 쉽게 얘기해보자. 부처님이 아닌 범부중생 치고 허물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친한 친구 사이엔 서로 약점을 이해하거나 덮어준다[쌍차]. 오히려 친구 사이엔 그 약점이 더 매력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 친구 사이라면 단점은 보완해주고 장점을 북돋우어 주어야 할 것이다[쌍조]. 그리고 더 나아가 정말 친구 사이라면 단점 장점을 따지지 않고 그냥 좋은 사이가 아니겠는가. 이게 곧 쌍차쌍조이자 원융무애한 친구 관계라 볼 수 있다. 그러니 절친한 우정, 원만한 가정은 그대로가 중도인 것이다. 산골 오두막에 단 둘이 사는 노부부가 서로 양보하고, 서로 아픈 곳을 감싸주며 정답게 사는 모습, 마치 이쪽 개울물과 저쪽 개울물이 합쳐져서 한 물이 되듯, 그리하여 잔잔한 물길처럼 사는 것, 그 게 바로 최상의 쌍차쌍조요, 중도의 참모습이다.

    부부 간에나 친구 간에 당신은 내덕을 보았으니 ‘이제 갚을 때가 되지 않았어!’ 하고 덕 베푼 것을 마음에 담아두고 갚을 때를 기다리는 사람은 마음이 고단한 법이다. 하지만 상대를 내 몸이라 생각하고 베푼 것조차 잊어버리고 살다가 보면 저절로 충만해지는 그 무엇이 거기 있으니 좋은 일이건 궂은일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말 일이다. ‘해탈의 참된 기쁨’이라는 찬불가 가사가 있다.

      ?한 생각 바로 돌려 얽힌 번뇌 끊고 보니

      천상천하 넓은 우주 걸릴 것이 하나 없고,

      평등한 성품 속엔 너와 내가 따로 없네.

      대자재 유아독존 바로 이것인 것을,

      해탈의 참된 기쁨 사바세계 가득하네.

      윤회의 고해에서 피안 언덕 이르니

      어두웠던 나의 마음 한순간에 밝아지고

      본래의 천진면목 진실하게 드러나네.

      위없는 님의 진리 영원한 빛 가운데에

      열반의 대합창이 온 누리에 가득하네.? - 해월 스님

    화엄종에서는 쌍차쌍조의 논리가 화엄종취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현수(賢首法藏, 643~712) 스님이나 청량(淸凉 澄觀, 738~839) 국사에 이르러서는 화엄종이 쌍차쌍조를 중심내용으로 한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드러내 놓았으니 쌍차쌍조란 그만큼 중요한 불교철학이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 

    이것이 연기이고 중도이다. 이것이 만법의 참모습이고, 원융무애이다.

    부처님께서는 집(集)이 곧 멸(滅)이라고 하자 즉시 인가하셨다. 집은 곧 연기의 순관이고 멸은 곧 연기의 역관이다. 집이 곧 멸이므로 순관이 곧 역관인데 이것이 중도이며 연기이다. 집은 쌍조이며 멸은 쌍차이다. 쌍조에 의지한 쌍차, 쌍차에 의지한 쌍조, 순관에 의지한 역관, 역관에 의지한 순관 이것이 중도연기이며, 법계연기이고, 만법의 참모습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 이 글을 작성함에 있어서 많은 분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습니다. 일일이 양해를 구하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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