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원 가는 길

내가 사는 돌산 계동 해변에는 작은 방풍림이 자리하고 있는데, 계동주민들은 그 숲을 일컬어 수목원이라고 부른다. 지난 몇 해에 걸친 태풍 때문에 제법 많은 나무가 꺾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숲의 면모는 잃지 않아서, 꾀꼬리와 멧비둘기, 이름모를 산새들이 찾아내려와 온종일 지저귀고, 아침저녁으로는 수십 마리의 갈매기가 선회하며 군무를 펼친다. 계동 수목원은 갈릴리교회 교우들이 갈릴리해변이라고 부르는 몽돌해변과 내가 "백 개의 달이 뜨는 호수"라고 이름 붙인 다랑이 논 지대 중간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고 보면 계동수목원은 두 세계를 이어주는 녹색 띠인 셈이다.
장마철 내내 바람 한 점 없이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며 안개를 피워 올리고 습도를 잔뜩 올려놓더니, 오늘 아침에는 제법 서늘한 바람이 살갗을 간질인다. 그 바람결에 이끌려 내 발걸음은 자연스레 계동수목원으로 향한다. 수목원 입구에 들어서니 상당히 큰 후박나무가 누워 있었다. 의아하여 자세히 살펴보니 수목원에 이식하려고 농원에서 옮겨다 놓은 것이었다. 뿌리의 상당부분이 잘려나갔고, 윗동의 가지들도 많이 잘려 있었다. 태풍에 뿌리째 뽑혀나간 나무들의 자리에 심겨질 것이었다. 이식을 기다리며 누워 있는 후박나무들을 보는 순간 내가 처한 상황이 겹쳐져 어른거렸다.
"그래, 나도 저 나무처럼 옮겨 심어진 거야. 뿌리와 가지가 많이 잘린 채로..."
 어느 정도 자란 상태에서 이식된 나무는 족히 1년은 몸살을 앓는다. 예전의 상태로 회복하기 위해 눈물겨운 사투를 벌이는 거다. 뿌리와 가지를 잘리면서 자기 몸에 생긴 상처들을 싸매고 살을 덧입히면서 조금씩 뿌리를 내리는 데 몇 개월의 시간이 소요된다. 그러고도 새 움을 틔우기는 좀처럼 쉽지 않아서, 그해에 입어야 할 시푸른 새 옷을 입지도 못하고, 그해에 내걸어야 할 꽃등도 내걸지 못한다. 심지어는 뿌리내리는 일이 힘에 부쳐서 제 몸에 달려 있던 가지의 일부를 고사시키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러니 열매 맺는 일은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어느 정도 자란 나무를 새로운 땅에 옮겨 심은 사람과 그 나무를 보는 사람들은 조바심을 쳐서는 안 된다. 어찌하여 새 움이 돋지 않는가, 어찌하여 꽃이 피지 않는가, 어찌하여 시들시들한가, 하면서 안달할 일이 아닌 것이다. 나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힘겨운 고투를 헤아리면서 그저 참고 기다려야 하는 거다.
돌산으로 이식되기 전에 나는 이미 뿌리의 절반을 잃었다. 뜻을 세워 함께 길을 걷던 영혼의 벗이 지난 연말에 갑자기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실로 그는 겨울나무 같은 사람이었고, 겨울나무처럼 풍욕을 좋아한 사람이었다. 그를 생각하면 이원수 선생님의 동시 [겨울나무]가 생각난다.
나무야 나무야 겨울나무야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아무도 찾지 않는 추운 겨울을
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느냐
평생을 살아봐도 늘 한자리
넓은 세상 얘기도 바람께 듣고
꽃 피던 봄여름 생각하면서
나무는 휘파람만 불고 있구나.
가식과 위선을 벗어던진 겨울나무처럼 맑고 깨끗한 사람, 겨울나무처럼 알몸으로 신의 숨결을 맞으며 세상을 향해 휘파람을 불어대던 사람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은 참말이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자 아픔이었다. 나는 숫돌을 잃어버린 칼, 칼을 잃어버린 숫돌처럼 서성거릴 수밖에 없었다.
칼과 숫돌은 한 몸
다정하게도 우리는 함께
칼을 갈았네.
그대와 나는
갈마들며
칼도 되고
숫돌도 되었네.
남을 겨누기보다는
자기를 겨누려 했기에
누구의 날이 더 섰는가?
함부로 묻지 않았네.
자기를 겨누기가 겁나면
흔쾌히 몸을 맡겼네.
그대는 내게
나는 그대에게.
그대 떠난 지금
칼은 무뎌지고
숫돌은 야윌 줄 모르네.
두루 깎이고 둥글어지며
가야 할 길
아득히 멀기만 한데.
그가 세상을 뜨고 한 달이 지났을 때 하느님은 나를 이곳 돌산 계동으로 옮겨 심으셨다. 덕분에 내게 남은 뿌리의 상당 부분이 또 잘려나갔다. 잘려나간 뿌리는 내가 남해에서 힘차게 내렸던 나의 소중한 분신들이었다. 돌산 계동으로 이식되고 나서 지난 일곱 달 동안 이루어진 내 삶은 뿌리가 얼마 남지 않은 밑동을 부여잡고 뿌리를 조금씩 내리고 벋는 과정이 아니었나 싶다. 일기를 쓸 엄두는 전혀 낼 수 없었다. 할 말을 잃기도 했거니와 지금 내가 처한 형편을 당분간 입 닥치고 있으라는 표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일기를 쓰지 않고 사는 게 차라리 마음 편했다. 부족한 글에 맛을 들였던 곁님들의 전화가 이어졌다. 왜 글을 쓰지 않느냐, 무슨 일이 있느냐, 그렇게 바쁘냐? 하면서 사정을 물어왔다. 그때마다 나는 할 말이 없어서라고 말할 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나를 옮겨 심으신 분은 무심하셨다. 내가 움을 틔울 때까지 그저 기다리실 뿐이었다. 무심하셔서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어여쁜 교우들은 내가 뿌리를 잘 내리도록 그때그때 푸근한 사랑과 관심을 기울여주셨다. 나는 설교할 때가 되면 설교하고, 대지에 깊이 뿌리내린 교우들의 삶을 탐색하고, 틈틈이 돌산의 이곳저곳, 무엇보다도 계동의 구석구석을 둘러보며 지리를 익혔다. 나리꽃군락은 어느 골짜기에 있고, 원추리군락은 어느 골짜기에 있으며, 해국은 어느 갯바위에서 무리지어 자라고, 꽃창포는 어느 바위틈에서 자라며, 고라니는 어느 골짜기에서 출몰하고, 해달의 흔적(배설물)은 어느 갯바위에 있으며, 갓은 어느 교우의 밭에서 자라고, 고구마는 어느 밭에서 자라며, 교우들의 어장은 어디어디에 있고, 어장에서는 철따라 무슨 고기가 잡히며, 갯벌의 거주자는 누구이고, 돌산의 자생식물은 무엇이며, 어딜 가야 달콤한 약수를 맛볼 수 있는지, 갈매기는 언제 무리지어 춤추는지를 아는 것, 그것이 바로 나의 지리 익히기다. 또한 그것은 산, 바다, 섬, 들, 골짜기, 그들 속에 터를 잡고 사는 무수한 생명들에게서 하느님의 전언을 간취해내고, 그들 속에 보금자리를 치고 계신 하느님을 뵙는 일이기도 하다. 이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나의 지리 익힘은 헛공부가 되고 말 것이다.
내 님은 나리꽃 외로이 핀 산마루
고라니 몰래 찾아드는 오솔길
갈매기 떼 선회하는 갯바위
그리움을 돋우는 외딴 섬
꽃향기 실어 나르는 산들바람
뿌리를 스치는 지하의 거대한 강
차르륵 스르륵 먹빛 몽돌 어루만지는 파도
개구리 합창으로 더욱 고요한 밤
희망을 돋우는 눈부신 새벽
지난 4월과 5월 그리고 6월은 나무 심고 정원을 만드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다. 정원에는 동백나무, 후박나무, 돈나무, 호피향, 금목서, 목백일홍, 백정화를 심고, 텃밭에는 단감나무, 대봉나무, 자두나무, 석류나무, 포도나무, 매실나무 등의 묘목을 심고, 텃밭의 둑을 새로 쌓으면서 돌과 돌 사이에 철쭉을 끼워 심었다. 정원수 사이사이에는 금잔화, 노루귀, 노루오줌, 매발톱꽃, 붓꽃, 원추리, 자란, 털머위, 패랭이, 섬기린초, 천상초, 풍로초, 한련화, 해국, 사랑초, 사루비아, 꽃잔디, 리빙 데이지, 썬노드, 카랑코에, 라벤더, 로즈마리, 제라늄 등을 심고, 돌확에는 수련, 어리연, 마름을 심고 부레옥잠, 생이가래, 물상치를 띄웠다. 그 사이 벌과 나비들이 부쩍 늘었다. 저마다 맞춤한 때에 꽃등을 내걸고 정원을 환히 밝히며 싱그러운 향기를 발산하는 생명들을 말없이 보고 있노라면 나의 뿌리도 저들과 함께 내리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이식되기 위해 누운 후박나무를 뒤로하고 수목원 안으로 들어서니 아름드리 활엽수와 곰솔이 서늘한 그늘을 드리운 채 때마침 불어드는 바람에 녹색물결을 일렁인다. 꾀꼬리가 날아와 앉았는지 느티나무 우듬지에서 맑은 소리가 울려퍼진다. "지까지까지까오~." 자세히 들어보면 "지까짓 게 뭐라고?"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신의 흙피리이면서도 노래할 줄 모르는 나를 놀리는 것만 같다. 꾀꼬리의 노랫소리가 있어서 수목원이 더욱 고요하다. 노래는 울림을 낳는가. 수목원 바닥에 수북한 몽돌들이 내 발길에 자그락자그락 구르고, 나뭇잎들이 살랑살랑 흔들거린다. 그루터기에 앉아도 보고 우람한 나무의 허리를 팔로 감싸 안아도 보고 바람에 떠는 나뭇잎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기도 하면서 나무가 지닌 덕을 곱씹는다.
나무는 더 나은 삶의 자리를 찾아서 이리저리 떠도는 법도 없고, 별난 것을 찾아서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는 법도 없이 "여기가 거기이지" 하면서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는다. 그런 점에서 나무는 자족(自足)의 달인이다. 몸피를 늘리되 새들에게는 둥지를, 길짐승에게는 쉴만한 그늘을 베풀고, 벌 나비에게는 꽃등을 무수히 내걸어 길을 밝혀주는 나무는 이타(利他)의 샘이다. 하늘 향한 그리움이 사무쳐 한 없이 팔을 뻗치고, 근원에 목이 말라 끝없이 뿌리를 뻗는 나무는 신화(神化)의 길을 걷는 구도자의 전범이다. 옷을 입을 때가 있으면 벗을 때도 있음을 아는 나무는 채움과 비움 사이를 오가는 조화로운 삶의 상징이다. 한평생 아낌없이 주는 것을 가르침의 골자로 삼는 나무는 정녕 하느님을 닮은 큰 스승이다.
지극한 마음으로 가까이하면 가까이 하는 그 대상을 닮는다던가. 누가 내게 "그대는 누구를 닮고 싶소?"하고 물으면, 나는 나무를 닮고 싶다 말하리라. 뿌리가 부실한 밑동을 부여잡고 있지만 나는 불안하지 않다. 내가 심겨진 토양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몸이고, 나를 옮겨 심으신 이도 그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잘 자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직 완전히 뿌리내리지 못하여 이리저리 흔들리며 어지럼증을 앓고 있지만, 마음을 다해 뿌리내리다 보면, 우듬지에 꾀꼬리 날아와 노래 부르고, 신의 숨결도 무시로 찾아와 잎사귀를 간질이고, 아이들이 신나게 그네를 뛰는 나무로 자라 있을 것이다.→김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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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찬미예수님~ 목사님, 오랫만에 뵙겠습니다...^^* 처음글은 마음이 싸아~하니 소중한 벗을 잃은 忘友歌에 마음 숙연해 지더니 종래에는 끊임없이 쉼없이 무언가를 나누고 베푸는 나무를 닮고자 하시는 목사님의 소망을 봅니다... 뿌리는 이도 그분이시고 거두시는 이도 그분이심을 알기에 어디에서나 그분뜻에 순명하며
걸어가시는 목사님~ 말씀처럼 마음을 다해 뿌리 내리시다보면 더 많은 열매와 수확의 기쁨도 선물처럼 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건강하시고 힘내십시오~! 야훼이레~!! ^^*
<나무를 심은 사람>이란 책과 비디오를 본 적이 있는데 목사님 글을 읽고 떠올랐습니다. 애들 여름방학하면 8월 22일~28일경에 전화드리고 가겠습니다. 몽돌닮은 공룡알같은 통증이 제가슴속에 있어서 그곳 바닷가에 내려놓고 오렵니다.
....영혼의 멀미..목사님 힘내시고 자알 뿌리내리시고 힘차게 벋어나세요 화이팅 !
김목사! 이식되어진 나무의 아픔은 나무 그 자신 밖에 알 수 없을 것 같네. 잘 뿌리내리리라 믿네. 한번 내려가고 싶은데 잘 안되네. 전승문목사와 한번 내려가 봄세. 이운영 목사..
바쁘지만 마음이 공허해서 목사님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천천히 되씹어보겠습니다. 언제 시간내서 동무들과 찾아뵙고 싶은 데 왜 이리 바쁜지요??? 동무들과 연락해보지요..뵙고 싶군요...
부실한 밑동마저 잘려 나갈까봐...저는 한동안 일기를 삶 속에서 일부러 멀리했었습니다. 삶의 전부요 분신이라 생각할 만큼 일기의 중요성과 소중함을 하느님으로부터 배워나갔었ㅈㅣ요..그런데, 내 삶이 너무 초라하고 더이상 글로 옮기기에 부끄러운 거 투성이었어요..그런데 글 읽으면서 힘이 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