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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만식
<허생전>
이 이야기는 한 가난한 마을에서 시작된다.
‘허생’이라는 한 가난한 남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입신양명에 관심이 없었으며 가난한 집에서 아내를 두고 책이나 읽으며 살고 있었다. 어느날 그는 배고파서 죽겠다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집을 나가, 그 지방의 최고 부자인 변 진사에게 찾아간다. 변 진사와 대면을 하였는데, 어이없는 소릴 하였다. 1만 냥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부자는 처음에는 어이없어 하였지만, 그의 눈빛을 보고는 아무 말 없이 돈을 빌려 주었다.
허생은 안성장의 과일을 매점하여 석 달 만에 열 배의 이문을 남긴다. 허생이 쌀을 매점하라는 강선달의 권유를 물리친 후 도적들이 돈을 훔치러 온다. 허생은 도적들을 굴복시켜서 새 달 보름까지 강경 장터로 모이라 하고 돈을 주어 보낸다. 허생은 변 진사에게 1만냥을 갚을 뿐만 아니라, 1만 냥을 이자로 더 준다. 그는 강경 장터에서 숱한 물건들을 사들이고, 십사장, 백사장 등의 조직을 갖추어 사천여 명의 사람들을 배에 싣고 강경을 떠난다. 그들의 목적은 제주도였다.
허생은 제주 목사의 횡포를 듣고 계략을 꾸며 그를 제주에서 떠나게 한다. 삼 년 동안 허생은 제주에서 낙천지를 이룬 후 사람들에게 잘 살아가는 도리를 가르쳐 주고 제주를 떠난다.
시간이 지나서, 이완이라는 벼슬아치는 허생을 변 진사로부터 알게 된다. 그는 허생을 벼슬길로 권유하려고 그의 집으로 찾아간다. 변 진사가 이완을 데려오자, 허생은 이완에게 장기적인 북벌 계획을 제시한 후 세 가지의 비책을 알려주지만 이완은 모두 다 어려운 일이라고 말 대꾸를 한다. 그러자 허생은 화가 나서 칼을 찾아 죽이려 하지만, 그는 도망친다.
다음 날, 다시 그의 집으로 찾아가보니 허생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있었다.
특별히 채만식과 박지원의 <허생전>의 차이점은 찾을 수 없었지만 같은 제목의 작품에서 차이점을 찾았다. 박지원의 허생전과 채만식의 허생전을 비교해 볼 때 채만식의 허생전에서 작가가 이상국을 제주도로 선택하였다. 그 이유로는 박지원은 제주도를 말총의 매점매석으로 부를 축적하기 위한 경유지로 선택했을 뿐이지만, 채만식은 그 곳을 부의 축적을 심화하고 탐관오리를 쫓아내어 이상국을 세우는 곳으로 그렸기 때문. 박지원이 최종 이상국으로 구체적인 지명이 아닌 무인도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건 그러한 생각 자체가 당시에는 급진적인 사상이어서 당대에 수용될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든다.
이에 비해 채만식은 일제 시대라는 특수한 시대 상황에 처해 쌀의 집산지였던 강경을 집결지로 정했을 뿐만 아니라, 제주도라는 실제의 땅을 선택하여 구체적인 현실성을 확보하고 있다. 즉, 채만식은 박지원이 생각하던 이상국의 공간적 의미를 역사적 사실과 연결시켜 구체적 보편성을 획득하였다.
모든 책은 작가 개개인의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라 채만식과 박지원의 책을 읽어보면 그 작가들의 생각의 차이점을 알 수 있다.
<논이야기>
이 작품은 막 해방이 된 후, 그 당시 사회의 혼란을 잘 엮은 작품이다.
일본인들이 토지와 그 밖의 모든 재산을 두고 쫓겨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한 생원은 우쭐해졌다. 일본인에게 땅을 팔고 남의 땅을 빌려 겨우 살아오던 한 생원은 일본인들이 쫓겨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땅을 찾게 되리라는 기대에 부푼다. 일본인이 쫓겨 가면 땅을 다시 찾게 된다고 큰소리를 쳐왔던 터였다.
한일 합방 이전에 한 생원은 동학란과 관련하여 무고하게 옥에 갇히고 석방되는 조건으로 고을 원님에게 강제로 아홉 마지기의 논을 빼앗긴다. 한 생원은 남은 일곱 마지기마저 술과 노름, 그리고 살림하느라 진 빚 때문에 일본인에게 팔아넘길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가난한 소작농 한 생원에게 땅을 도로 찾게 될 것 이라는 기대는 큰 기쁨이었다. 일본인들이 물러가자 땅은 그전 임자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한 생원은 술에 얼근히 취해 자기 땅을 보러 간다고 외친다. 그러나 막상 찾으리라고 바라던 땅은 이미 소유주가 바뀌어 찾기 어렵게 되고, 논마저 나라가 관리 하게 되어 다시 찾을 수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 한 생원은 허탈감을 느낀다. 한 생원은 마침내 자신은 나라 없는 백성이라 하며 해방되는 날 만세를 부르지 않았던 걸 잘했다고 혼잣말을 한다.
8.15 이후 최대의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땅의 문제였다. 이 소설은 개인의 토지가 시대 격동기마다 어떻게 변전되는가를 통해 광복의 의미를 되묻고 있다. 이와 함께 광복 직후의 현실에서 동학 직후의 부패한 사회상과 일제 강점기에 일인들에 의해서 교묘하게 농토를 수탈 당하는 농촌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잘 보여 주고 있다.
<논이야기>는 한 생원을 통해, 광복의 진정한 의미와 국가의 존재 의의가 어디에 있는가를 반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 생원은 토지 소유와 분배의 문제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어온 전형적인 농민의 한 사람이다. 한 생원은 광복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에 대한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 왜냐 하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라라는 존재가 그의 편한 삶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국가는 권력이라는 힘으로 자신을 못살게 구는 존재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러한 한 생원에게 해방이라는 것은, 추상적인 것보다는 농토를 되찾는 일일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올바른 역할은 이런 농민의 욕구를 충실히 이해하고 반영하는 것이겠지만, 광복 직후의 국가는 이와 같은 역할을 이행하지 못했다. 한 생원의 말을 통해, 국민들의 희망과 욕구를 소외시킨 해방 정국을 비판, 풍자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한생원은 고을 ‘원’과 ‘국가’를 동일시하여 풍자의 대상으로 삼았다.
즉, 작가 채만식은 이 소설을 통해 새 정부의 농업 정책의 잘못을 비판함은 물론, 일제에 아부하고 치부를 일삼던 친일파들이 광복이 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어도 개과천선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반대로, 가난한 농민들은 동학란 이후 엉뚱한 모함을 씌어 농토를 수탈당하던 시대나, 독립을 맞아서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현실에서나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는 인식을, 한 생원을 통해서 풍자,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 생원에 대한 연민의 이면에는 그의 합리적이지 못한 시대 변화에 따른 대응 방식을 통하여 그 자신까지도 풍자의 대상으로 설정되고 있는 것이다.
<탁류>
정주사는 신구학문을 하고 군청에서 십삼 년을 일하다가 도태 당한다. 그는 재산을 정리해서 군산에 이주하여 할 일 없이 열두 해를 지내다가 미두라는 투기 노름을 하면서 손해를 본다. 정주사는 집으로 가는 길에 외상 쌀을 더 달라고 한참봉의 쌀집에 들렀다가 예쁘장한 한참봉의 부인 김씨로부터 큰딸 초봉의 중매를 서겠다는 제의를 받게 된다.
초봉은 제중당의 여점원 겸 사무원으로 일하면서, 세를 들어 사는 승재를 좋아하지만, 약국주인 박제호와 은행원 고태수가 초봉에게 추근 거린다. 제호는 초봉의 환심을 사기 위해 십원짜리 지폐를 주고 같이 서울로 약국을 옮겨갈 것을 제의하며, 태수는 은행돈을 횡령하여 곱사등 형보를 통해 미두를 한다. 태수는 미두장 시세 하락으로 투자한 돈을 거의 잃게 되자, 남은 돈을 형보에게 줘 버리며, 그동안 정을 통해 오던 주인댁 김씨에게 초봉과의 중매를 간청하게 된다.
김씨는 태수가 갑부이고 장사 밑천을 대줄 거라는 말로 정 주사에게 혼담을 꺼내며, 초봉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려던 제호의 계획은 부인인 윤희에 의해 무산되고 만다. 초봉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로 하고 태수의 청혼을 받아들이며, 형보는 태수를 궁지에 몰아넣고 초봉을 빼앗으려는 음흉한 흉계를 꾸미게 된다. 형보는 그동안 김씨와 태수가 간통해 온 사실을 김씨의 남편인 한 참봉에게 폭로해 버리며, 간통의 현장에서 붙잡힌 김씨와 태수는 한참봉의 방망이에 맞아 죽게 된다. 같은 날 밤에 형보는 태수가 나가고 초저녁에 잠에 떨어진 초봉의 방으로 들어가, 말을 듣지 않으면 남편의 일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하며 겁탈을 하게 된다.
남편(태수)이 죽은 사실을 알게 된 초봉은 충격을 받으며, 장례식이 끝나자 제호를 찾아가기 위해 이리역에 나갔다가 그를 만나 같이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한다. 초봉은 제호와 서울에서 살림을 차리며, 그녀는 아버지가 누구(형보,태수,제호)인지 모르는 아이를 임신하자 약을 먹고 유산시키려 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초봉은 딸을 낳아 이름을 송희라고 지으며, 형보가 초봉의 집에 찾아와 자신이 송희의 친아버지라고 주장하자 제호는 일이 복잡해질 것을 염려하여 결국 양보하고 물러선다.
형보의 술수와 협박으로 해서 초봉은 억지로 형보와 살림을 하게 되며, 부자가 된 형보의 돈으로 초봉은 친정집을 먹여 살리고 동생인 계봉을 서울로 불러들인다. 성격 이상자인 형보가 자신과 어린 딸에게 가학 행위를 계속하자 이에 견디다 못한 초봉은 형보를 죽이는 길밖에 달리 길이 없다고 생각하고, 극약을 사러간 사이에 형보가 어린 송희에게 잔인한 행위를 하며, 초봉은 화가 극도로 치밀어 올라 심한 발길질로 형보를 죽이게 된다.
형보가 죽자 초봉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다가 마음을 정리하고, 어린 딸 송희를 계봉에게 맡기고 자신은 자살을 하기로 결심한다. 계봉과 승재는 초봉을 설득하여 자수할 것을 권하며 초봉은 승재의 미래에 대한 약속을 믿고 마음에 얼마간의 변화가 오게 되어 자살을 포기하게 된다. 초봉은 승재가 자신을 기다려 줄 것이라고 믿고 자수하여 징역을 살기로 결심을 한다.
탁류 속에서 언뜻언뜻 비치는 이들 작중 인물들의 갈등은 대단히 비속적이고 통속적이기는 하지만 그 속에는 식민지 시대 조선인의 고통이 여지없이 베어 있으며, 이를 채만식 특유의 풍자로 묘사시키고 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된다. 신교육도 받았고, 아름답고 기품도 있지만 봉건적 의식에 젖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고 고태수, 박제호, 장형보라는 시대적.윤리적 파탄자에게 차례로 유린당하고 마는 여 주인공 초봉의 비참한 운명은 조선의 역사적 운명과 비길 수 있다.
식민지 시대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초봉을 유린한 이들 세 사람을 청국이나 러시아, 그리고 일본이라는 등식으로 연결, 도식화시켜 볼 수도 있겠으나 이는 너무나도 지나치다.
채만식은 이 소설에 나오는 세 사람의 속물들을 그만의 장기인 특유의 풍자로써 꼬집었는데 결국 그가 말하고자 하는 탁류는 곧 순결한 여인 초봉을 농락하는 고태수, 박제호, 장형보 등, 세 사람의 상징물인 식민시대 당시의 우리 사회를 뜻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연약한 여인 초봉(조선)은 끝까지 이와 같은 탁류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물결에 휩쓸리어 끌려 다니기만 한다. 다행히 채만식은 남승재와 그의 연인 계봉에게 기회를 부여하지만 그들에게는 탁류를 헤치고 살아 갈 수 있는 강인한 힘과 애착, 그리고 끈끈한 근성이 없다는게 내게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였다.
아무튼 이 소설을 통해 한 시대를 살다간 우리 조상들의 애환을 간접적이나마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본 것은 나로서 큰 수확이라 할 수 있겠다.
작중 인물들이 결코 한 세기를 바라보는 지난 세월 속사람들이 아닌, 언제라도 1930년대와 같은 시대가 도래된다면 탁류의 주인공들과 똑같은 인물들이 등장할 것이며, 또한 그런 상황이 또다시 되풀이 될 것임을 예상해 볼 때, 복잡한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던져지는 교훈은 확실하게 잡히지는 않더라도 뭔가 자못 심각하다 할 것이다.
<치숙>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줄거리를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줄거리란 객관적인 시간의 순서를 따라서 사건의 진행을 요약적으로 배열한 것이다.
이 작품 <치숙>에는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건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작중 화자인 ‘나’의 이야기를 따라 아저씨의 걸어온 길을 순행적으로 재배열하면 거기에 하나의 이야기가 성립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치숙>은 글자 그대로 ‘어리석은 아저씨’에 대한 ‘나’의 비판이 주 내용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조금만 읽어보면 비판받아야 할 사람은 아저씨가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금방 간파할 수 있다. 즉, 비판자인 ‘나’가 그 당시 사회로 보면 비난받아 마땅한, 영리하게 현실에 타협하는 기회주의자라는 아이러니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냉소, 비꼼, 조롱 등이 완곡하게 스며있는 풍자적 성격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치숙>은 조카의 눈과 입을 빌려 사회주의 운동으로 감옥에 갇혔다가 나온 고모부의 삶과 당시 사회 모습을 그려 나가고 있다. 아저씨와 ‘나’는 많은 대화를 나눈다. 그러나 많은 대화 속에서도 서로를 조금도 설득하지 못하고 평행선을 그으며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음만을 확인한다.
<치숙>에는 뚜렷이 대립하는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숙질간인 그들은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데, 작품은 조카인 화자가 오촌 고모부를 비난하고 풍자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조카의 논리에 의하면 그의 고모부는 대학까지 나온 지식인인데도 그놈의 사회주의 사상에 물들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사회주의라는 ‘불한당질’이나 할 생각을 하면서 고모를 고생시킨다는 것이다. 그런 점만을 보면 <치숙>은 무능한 지식인 계층을 풍자한 작품으로 볼 수도 있다. 제목부터가 ‘어리석은 숙부’고, 작품의 화자가 무능한 지식인인 오촌 고모부를 비난하는 내용이 작품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점에서도 그렇다.
조카는 어느 일본인 상점의 점원으로 일하고 있는데, 그의 관심은 오로지 돈을 벌어 남부럽지 않은 재산을 모으는 데 있다. 그뿐만 아니다. 그는 일제 식민지 체제 아래서도 출세할 것을 낙관하고 있다. 이런 조카에 의해 무능한 지식인인 숙부가 비판을 받지만, 작가의 궁극적인 비판의 화살은 더욱 날카롭게 조카에게 겨누어지며, 오히려 화자의 무지만이 폭로되고 만다.
내가 <치숙>을 읽으며 웃음 짓는 것은 고모부에 대한 화자의 비난이 속이 시원해서가 아니라, 거꾸로 그것이 화자의 무지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화자는 일제 식민지 지배 논리에 더할 나위 없이 충실하며, 그 무지가 순진한 확신에 가득 차 있어 뚜렷한 아이러니를 이룬다.
보통의 풍자는 풍자하는 쪽에 의해 풍자 대상의 거짓과 위선이 드러남으로써 이루어지는데, <치숙>은 오히려 조롱하고 풍자하는 쪽이 반어에 의해 다시 풍자되는 이중 풍자로, 무능한 지식인에 대한 풍자라기보다는 식민지 지배 논리에 순응한 채 돈 버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인물에 대한 풍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채만식 소설의 특징이다.
채만식은 <치숙>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독특한 말투와 구수한 사투리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어딘가 모자라는 조카의 모습을 드러내려는 장치로도 작용하고 있다.
1930년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통치는 우리 민족의 삶을 더욱 옥죄고 들어왔다. 날카롭게 현실을 비판해 온 우리 사회주의 문학 이념 단체도 해산되었다. 이에 채만식은 식민지 현실을 드러내어 비판하는 방법으로 풍자 문학을 내세워 식민지 지배를 은근히, 그러나 분명하게 풍자, 비판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글을 읽으며 <풍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소설을 접할 때 중요한 점은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다. 그에 대해 나는 아직도 멀은 것 같다.
<태평천하>
1930년대 후반의 어느 늦가을. 서울 계동의 만석꾼 부자 윤직원 영감 은 명창대회를 구경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다. 소작료와 수형 장사로 1년에 십수만 원을 챙기는 이 거부 윤직원 영감은 타고 온 인력거에서 내리자마자 인력거꾼과 요금 시비를 벌인다. 30전은 주어야겠다는 인력거꾼과 15전밖에 못 주겠다는 윤직원 사이에 옥신각신이 있다가 마침내 25전으로 합의를 보자 거만의 갑부 윤직원은 몹시 속이 상해서 집으로 들어간다. 매년 십수만을 버는 윤직원 영감이지만 밖으로 나가는 돈은 이처럼 절치부심, 아까워하는 것이다. 치재의 비결이 워낙 이러한지라 윤직원 영감은 버스를 타더라도 짐짓 큰돈을 내밀어 거스름돈을 받지 못한다는 핑계로 무임승차를 즐기는 터이기도 하다.
거만의 부를 움켜쥐고 있는 윤직원이지만 그에게도 비참한 역사는 있기 마련이었다. 노름꾼이던 그의 아비 윤용규가 어찌어찌 한몫을 잡아 가산이 일게 되면서부터 윤두섭(윤직원의 본명) 부자는 화적떼로부터 무수한 약탈을 당했는데, 급기야는 어느 날 밤 들이닥친 화적떼에게 윤용규가 무참히 살해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달아나 명을 보전한 윤두섭은 화적들이 물러간 뒤 돌아와 ‘우리만 빼놓고 어서 망해라’며 외친 바 있다. 화적떼에게 뺏기고 관리들에게 수탈당하던 두꺼비 윤두섭이 세상에 외친 위대한 선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연고를 겪으면서 모은 거만의 재산이라서 그런지 그가 한 푼의 돈을 쓰는 것에도 벌벌 떠는 것이 무리가 아니라 하겠지만, 그는 착취니 뭣이니 하는 말에도 펄쩍 뛰는 무치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이만큼 돈을 번 것은 자신의 치재 수단이 좋았고 시운이 따라 가능했던 것이지 절대로 남의 것을 뺏은 것은 아니라는 탄탄한 소신이 그에게 내장되어 있는 탓이다. 시골 치안의 허술함과 후손 교육을 기회삼아 서울로 올라온 윤직원 영감에겐 지금이야말로 ‘태평천하’이다. 든든한 경찰이 있어 도둑 걱정이 없고 자신의 고리대금업은 날로 성업이 되고 있으니 이런 좋은 세상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이러니만큼 현재의 그에게는 사회주의 운동 운운하는 자들이야말로 가장 경멸스럽고 두려운 인물들이다.
그러나 현실적 위협이 없으니 그것도 피안의 불일 따름, 윤직원 영감에게 절박한 실적 위협이 없으니 그것도 피안의 불일 따름, 윤직원 영감에게 절박한 근심은 없다. 단지 남은 소원이 있다면 그의 두 손자 종수와 종학이 각각 하나는 군수, 하나는 경찰서장이 되어 집안에 지위와 명성을 보태어주는 것뿐이다. 돈이 있으니만큼 이러한 자리욕심이 생긴 터인데, 사실 직원이라는 그의 직함도 시골에 있을 무렵, 향교의 수장자리를 돈을 주고 사들인 것이다.
자신의 만수무강과 후손의 영화를 위해 자신의 소변으로 눈을 씻고 어린아이의 소변을 사서 매일 아침 장복하는 등 갖은 양생법을 실천하는 윤직원 영감이지만 실인즉 그의 가내사정은 난맥상을 드러내가고 있다. 그의 외아들 창식은 진작 첩살림을 차려나가 하는 일이라곤 노름에 계집질뿐으로 주색잡기에 수 천금을 뿌리고 있으며, 맏손자인 종수는 군수가 되리라는 명목으로 시골 군청의 고원으로 취직해 있으면서 역시 첩살림에 갖은 주색잡기로 수만의 가산을 탕진하고 있는 판이다. 둘째 손자 종학은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어 윤직원이 가장 기대하고 있는 터이지만 이도 서울집에 있는 본부인과 이혼하겠다며 성화를 피우고 있다.
또 윤직원 영감은 회춘을 하려고 여러 차례 동기를 바꾸어 가며 동접을 기도하나, 이번에는 열 다섯짜리 동기 춘심이년이 애간장을 태우게 한다. 실은 춘심이는 윤직원의 증손자 경손이와 눈이 맞아 연애를 즐기는 중이었다.
이런 신선놀음을 하고 있는 윤직원 영감에게 비보가 날아든다. 맏아들 창식이 동경으로부터 온 전보를 윤직원에게 전해주는 바, 거기에는 ‘종학, 사상관계로 피검’ 이란 활자가 선연히 찍혀있다. 윤직원의 차손 종학이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가장 증오하고 두려워 해 마지않는 사회주의에, 가장 큰 희망이요 보람이었던 경찰서장감 종학이 연루되었다는 것을 안 윤직원은 격노에 비틀거리며 소리를 지른다. 왜 태평천하에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하느냐는 것이다. 그리고는 사랑으로 사라진다.
첫댓글 ㅋㅋㅋ. 내일 마지막 독후감 마져 올리고 놀러 잘 갔다 오셈~
책을 통하여 작가의 시대적 배경을 통찰하고 내것으로 만드는 방학동안의 대일 부처님 아미타불! 감사합니다. _()_ 아미타불!
성실한 학생, 그리고 카리스마를 지닌 그 어머니.. 저희집 작은 딸은 숙제 미뤄 놓고 이미 놀러갔습니다. ㅋ_()_
내내 입만 벌리고 읽습니다. 에구 대일님이 무지 부럽습니다요.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