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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句驪)와 수당(隋唐)의 전쟁(戰爭)사(1)
● 조선(朝鮮)사에서 말하는 삼국【三國 : 고구려(高句驪). 백제(百濟). 신라(新羅)】시절, 고구려(高句驪)와 백제(百濟)는 왕조(王朝)를 이어 온지 900 년 만에 당(唐)이라는 정체불명(正體不明)의 집단(集團)에 의해 나라가 멸망(滅亡)당했다고 역사서는 적고 있다. 여기에 삼국(三國)중의 한 나라인 “신라(新羅)”가 당(唐)이란 집단(集團)의 배후(背後) 지원(支援)세력으로 등장하여 결국 두 나라는 영원(永遠)히 역사(歷史)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고구려(高句驪)와 백제(百濟)는 한 뿌리로써, 나라는 2 개로 별도로 되어 있으나, 그 태생은 동일하며, 사실적으로 보면, 고구려(高句驪)와 백제(百濟)는 부자(父子)지간(之間)이다. 따라서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驪)를 넒은 의미로 보면, 한나라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본인의 주장이다.】
● 수(隋)의 양제(煬帝)로부터 당(唐)에 이르기까지 이들 황제(皇帝)들은 고구려(高句驪)를 정벌(征伐)하지 못해 안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1) 수양제(隋煬帝)는 무엇 때문에 자신의 운명(運命)을 걸다 시피하며, 2백만에 가까운 대병력을 고구려(高句驪)정벌에 투입했으며, 그로 인해 수(隋)나라는 망하고, 양제(煬帝) 역시 살해(殺害)되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는다.
2) 당(唐)이 건국(建國)한 후 태종【太宗 : 이세민(李世民) : 고조(高祖)인 이연(李淵)도 혈통적으로 보면 돌궐(突闕)과 혼혈인이라고 한다. 따라서 태종(太宗) 역시도 돌궐(突闕)의 피가 흐르는 혼혈일 수밖에 없다.】시대에 벌어지는 당(唐)과 고구려(高句驪)의 전쟁사의 시작은 큰 사건이 아닌 사소한 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는 곧 “고구려(高句驪)의 개소문(蓋蘇文)”이 자신의 주군(主君)인 “영류왕(營留王)”을 살해하고 “보장왕(寶藏王)”을 새로운 왕(王)으로 세웠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당 태종은 전쟁(戰爭)을 해야만 하는 <중국(中國)은 본 뿌리와 같고, 사이(四夷)는 가지와 잎과 같다.>라는 것에 그의 명분(名分)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대륙조선사(大陸朝鮮史)에서 보면 가당치도 않은 것으로 신라(新羅) 조정(朝廷)의 이름일 수도 있다.】자신【自身 : 당 태종은 그의 아버지를 독살하고, 많은 형제를 죽인 후 제위(帝位)를 이었다고 하는 역사해설도 있다.】의 죄업(罪業)은 전혀 반성치 않고, 남의 나라 사건을 자신의 명분(名分)으로 삼으려한 것은 무언가 다른 것이 있었을 것이다. 당(唐)이란 나라의 위치(位置), 존재(存在)여부조차 의문이기 때문이다.
당 태종(太宗) 역시 고구려(高句驪) 정벌(征伐)을 위해 수많은 백성(百姓)들을 지옥(地獄)으로 보냈으며, 그 역시 전쟁(戰爭) 중에 맞은 화살로 인한 치료 중 악화되어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렇게 까지 해야 할 뚜렷한 명분이나 이유가 있었을까? 나라의 운명(運命)을 걸고, 하는 싸움은 그만한, 타당한 명분(名分)이 있었을 것이다.
● 또한 수당(隋唐)의 전쟁(戰爭)사를 보면 ; 고구려(高句驪) 토벌(討伐)전쟁을 빼고는 서역(西域)의 종족(種族), 나라들과의 전쟁이 대부분이다. 특히 돌궐(突闕), 철륵(鐵勒)등과는 시도 때도 없이 전투를 치루는 모습을 본다. 장안(長安)을 왕도(王都)로 한 당(唐)의 입장에서, 서역(西域)의 조그마한 종족(種族)들이 일으키는 소요사태(騷擾事態)까지도 군대를 파견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곳까지 가는 군대(軍隊)의 여정(旅程)은 최소한 수개월에서 수년이 걸리는 곳이다. 또한 출정(出征)하면, 수많은 병사들은 그곳 차가운 모래밭에 피를 흘리고, 뼈를 묻는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당(唐)나라 조정(朝廷)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수많은 병사(兵士)들을 그곳으로 보내야만 했던 것일까?
<당(唐)의 황도(皇都) 장안(長安)이라고 할 때 도대체 이해(理解)할 수 없는 사건의 연속이다.> 전한(前漢)이라는 나라는 한혈마(汗血馬) 몇 마리를 위해, 포도(葡萄) 몇 송이를 위해 수많은 병사들을 뜨겁고, 또 차가운 모래사장에 뼈를 묻고, 백골이 되도록 만들었다. 후대의 당(唐)이란 왕조(王朝) 역시 똑같은 짓을 되풀이 한 것을 보면, 전한(前漢)이란 나라의 영토나 당(唐)이란 나라의 영토가 같은 곳에 있었다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이러한 여러 가지 사항을 검토해 보면, 당(唐)나라는 서역(西域)의 남쪽 인접(隣接)지역에 있지 않고는 불가능(不可能)한 전쟁(戰爭)사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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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자치통감(資治通鑑) / 수(隋) 高祖 / 開 皇18年. 戊午,<598年>
《春,二月,甲辰,上幸仁壽宮.高麗王元帥靺鞨之眾萬餘寇遼西,營州總管衝擊韋走之.上聞而大怒,乙巳,以漢王諒、王世積並為行軍元帥,將水陸三十萬伐高麗,以尚書左僕射高熲為漢王長史,周羅( ) 為 水軍總管. : 봄 2월, 갑 진, 상(上)이 인수(仁壽)궁에 행차하셨다. 고려(高麗 : 고구려)왕이 원수(장수)와 말갈(靺鞨) 무리 ‘만여 명’이 요서(遼西)를 침구(侵寇)하였다. 영주(營州)총관 ‘위(韋)’가 충격으로 달아났다. 상(上)이 듣고 크게 노하였다. 을사(乙巳), 한 왕(漢王) ‘량(諒)’과 ‘왕 세적’이 행군원수가 되어, 수륙(水陸)30만이 고려(高麗 : 고구려)를 치는데, 상서복사 ‘고영(高 穎)’는 한 왕(漢王)의 장사로, ‘주라( )’는 수군총관이었다.》
《六月,丙寅,下詔黜高麗王元官爵.漢王諒軍出臨渝關,值水潦,饋運不繼,軍中乏食,復遇疾疫.周羅( )自 東 萊 泛 海 趣 平 壤 城, 亦 遭 風, 船 多 飄 沒. : 6월, 병인, 고려왕 “원”의 관작을 물리치는【삭탈(削奪) 관직(官職)과 같은 것】조서를 내렸다. 한 왕(漢王) ‘량’군이 림유관(臨渝關)을 나왔는데, 곧바로 큰 비를 만나, (식량)운반이 계속되지 않아 먹을 것이 없어 , 군(軍) 중에서는 걸식【乞食 : 식량이 없어 남에게 빌어먹음】을 하고, 다시 질병을 만났다. 주라( )는 동래(東萊)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성(平壤城)으로 내달렸는데, 또한 바람을 만나, 많은 배가 회오리바람으로 가라앉았다.》
《秋,九月,己丑,師還,死者什八九.高麗王元亦惶懼遣使謝罪,上表稱,遼東糞土臣,上於是罷兵 : 가을, 9월, 군대가 돌아왔으나, 죽은 자가 열의 여덟, 아홉이었다.【 30만 군대(軍隊)가 출정하여, 80-90%가 죽었다고 하였으니, <25만 명> 정도가 싸움한 번 해보지 못하고 굶어 죽고, 병들어 죽고, 바다 속에 생매장되었다는 이야기다. 】고려(高麗)왕 “원”이 당황하고,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 사죄하니, 상(上)이 표하기를, “요동(遼東)은 더러운 곳이다.” 라고 하면서 병사들을 방면하였다. 》
● 위 문장 역시 수(隋)의 입장에서 기록된 것이므로 가부를 다질 필요는 없다. 남의 나라를 뺏으려고 30만 대군을 보냈다가, 군량이 운반되지 않아 굶어 죽은 것은 고구려(高句驪)의 책임이 아니며, 더하여 전염병(傳染病)으로 병사들이 죽어 나가는 것 역시 고구려(高句驪)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고, 또한 회오리바람이 불어 수군들이 바다 속에 생매장당하는 것 역시 고구려(高句驪)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인데, 무엇 때문에 고구려(高句驪) 대왕(大王)이 사신을 보내 사죄(謝罪)을 했겠는가? 승자(勝者)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이런 문장이 기록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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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수(隋) / 高 祖 文 皇 帝 / <604年>
《秋, 七 月, 甲 辰, 上 疾 甚,(중략). 丁未,崩於大寶殿.受禪之初,民戶不滿四百萬,末年,逾八百九十萬,獨冀州已一百萬戶. : 가을, 7월, 갑 진, 상(上)이 병이 심해져, (중략). 정미, 대보 전에서 죽었다. 수선【受禪 : 임금의 자리를 물려받는 것】초에 민호(民戶)가 불과 4백만이 되지 않았는데, 말년에는 8백9십만이 넘었다. 기주(冀州) 홀로 이미 1백만 호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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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煬皇帝上之上高祖文皇帝下大業元年.乙丑,公元六零五年)
《契丹寇營州,詔通事謁者韋雲起護突厥兵討之,啟民可汗發騎二萬,受其處分。: 글란(契丹)이 영주(營州)를 노략질하자, 조서를 받은 통사 갈자 ‘위 운기’는 돌궐(突闕)병을 인솔하여 치려하니, 그 처분을 받아드리고, 계민(啓民)가한(可汗)은 2만(萬)기마를 파견하였다. (중략). 契丹不為備,去其營五十裡,馳進襲之,盡獲其男女四萬口,殺其男子,以女子及畜產之半賜突厥,餘皆收之以歸.帝大喜,集百官曰:雲起用突厥平契丹,才兼文武,朕今自舉之. : 글란(契丹)은 대비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 영(營)이 50 리 떨어져 있으니, 마구 달려 나아가 불의에 쳐, 그 남녀(男女) 4만구를 얻고, 그 남자(男子)들은 죽여 버리고, 여자(女子)들은 가축을 기르도록 하고, 절반은 돌궐(突闕)에 주고, 나머지 모두를 수거하여 돌아왔다. 제(帝)가 크게 기뻐하며, 백관들을 소집하여 ; <‘운기’가 돌궐(突闕)을 부려 글란(契丹)을 평정하였으니, 문무(文武)를 겸한 재주가 있으니, 짐(朕)이 지금 올라온 것이다.> 라 하였다.
● 현 세기야 이런 사건을 없을 것이다. 인권단체가 가만히 있겠는가! 허나 봉건(封建)왕조(王朝)시절의 패자(敗者)는 말이 필요(必要)없는 것이다. 행동만 있을 뿐!
위 기록을 보라. 포로 <4만 여명>을 잡아 놓고, 남자는 모두 살해(殺害)해 버리고, 부녀자 중 절반은 가축을 기르도록 놔두고, 나머지 절반은 글란(契丹)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운 돌궐(突闕)들에게 선물로 안겨줬다는 것이다. 돌궐(突闕)병사들에게 안겨 진 글란(契丹)의 부녀자(婦女子)들의 목숨은 그 돌궐(突闕)병사들 개개인에게 달린 것이다. 이때 글란(契丹)의 장정(壯丁)들은 전투(戰鬪)에 참가, 많은 인원이 전사했을 것이니, 4만여 명중에 부녀자가 더 많았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또 발견하는 것은 당시 글란(契丹) 종족(種族)은 목축(牧畜)을 주업(主業)으로 하는 종족(種族)들이었으며, 부녀자(婦女子)가 가축(家畜)을 기르는 것은 수천(數千)년 그 전통을 이어 <중앙아시아 지방>에서 생생한 증거(證據)를 직접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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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煬皇帝上之下大業四年.戊辰,公元六零八年)
《春,正月,乙巳,詔發河北諸軍五百餘萬眾穿永濟渠,引沁水南達於河,北通涿郡.丁男不供,始役婦人. : 봄, 정월, 을사(乙巳), 조서를 내려 하 북(河北)의 여러 군(軍)에 5백여만 무리를 보내어 영제거(永濟渠)를 뚫어, 물을 모아 하(河)의 남쪽으로 다다르게 하여, 북으로 탁군(涿郡)과 통하게 하였다. 장정(壯丁)을 제공하지 못하면, 부인(婦人)을 시역(부역)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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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煬皇帝上之下大業六年.庚午,公元六一零年)
《帝之幸啟民帳也,高麗使者在啟民所.啟民不敢隱,與之見帝.黃門侍郎裴矩說帝曰:「高麗本箕子所封之地,漢,晉皆為郡縣;令乃不臣,別為異域.先帝欲征之久矣,但楊諒不肖,師出無功。: 제(帝)가 계민 가한의 군막(軍幕)에 행차하였을 때, 고려(高麗 : 고구려) 사자(使者)가 계민 가한의 처소에 있었으나, 계민 가한(可汗)은 감히 아뢰지 못하고 숨기는 것을, 제(帝)가 보았다. 황문시랑 <배구>가 제(帝)에게 말하기를 ; 『고려(高麗 : 고구려)는 본시 기자(箕子)가 봉 받은 그 땅이며, 한(漢)나라 및 진(晉)나라의 모든(皆) 군현(郡縣)입니다. 별도로 있는 다른 땅이라, 지금 신하들은 믿지 못할 것입니다. 선제(先帝)께서 정복(征服)하려 하였으나, 다만 “양 량(수(隋)의 한(漢)왕(王)”만은 같지 않았으며, 장수들이 출정했으나 공을 없었습니다.》하였다.
● 양제(煬帝)가 누군가. 아버지를 독살(毒殺)했다는 의심(疑心)을 받고, 아버지의 부인(貴妃)를 은근히 눈독을 들여 이용(利用)하고, 정을 통했으며, 형제(兄弟)의 목을 치고, 황위(皇位)에 오른 자다. 이러한 그가 돌궐(突闕) 계민 가한의 군막(軍幕)에 행차했을 때, 그곳에 당시 고구려(高句驪)의 사자가 있었고, ‘계 민’ 자신과 ‘고구려(高句驪)’가 모의하는 것을 두렵게 여긴 “계민 가한”이 고구려(高句驪) 사자(使者)를 은밀히 숨겼는데, 이를 보았다는 이야기다.
진정 수(隋)가 황제(皇帝)국 곧 천자(天子)국이었다면, 이러한 일은 일어날 수 없다. 어찌됐든 고구려(高句驪) 사신은 천자(天子)에게 인사를 하는 것은 하늘의 이치(理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민 가한”은 혹시나 자신에게 불리한 일이 생실 수 있지 않을까 우려하여, 고구려(高句驪) 사신을 숨긴 것이다. 이것은 고구려(高句驪)와 수(隋)가 대등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며, 또 반대로 고구려(高句驪)가 상국(上國)이었기 때문에, 계민 가한의 입장에서 수(隋)와 자신이 만나는 것을 좋게 보질 않을 고구려(高句驪)이니, 좋지 않을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란 판단아래 그렇게 행동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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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煬 皇帝 大業 7年 <A. D611年>
《春,二月,壬午,下詔討高麗.敕幽州總管元弘嗣往東萊海口造船三百艘,官吏督役,晝夜立水中,略不敢息,自腰以下皆生蛆,死者什三四. : 봄, 2월, 임 오, 고려(高麗)를 토벌한다는 조서를 내렸다. 유주총관 ‘원 홍사’ 는 동래 해구(海口)에 가 300척의 배를 건조하도록 하고, 관리를 시켜 일을 감독케 하였는데, 수중에서 주야(晝夜)를 서 있으니, 숨 쉬는 것이 되지 않아, 허리(腰)이하는 모두 구더기가 살아, 죽은 자가 십의 셋, 넷이었다.》
《帝自去歲謀討高麗,詔山東置府,令養馬以供軍役.又發民夫運米,積於瀘河,懷遠二鎮,車牛往者皆不返,士卒死亡過半,耕稼失時,田疇多荒. : 제(帝)가 지난 해(去歲)에 고려(高麗)를 치려고 논의 했을 때, 산동(山東)에 부를 설치하라는 조서를 내리고, 명을 내려 말 사육과 군역을 명하였다. 또 백성들의 장정을 보내어 군량미를 운반케 하여, <로 하(瀘 河), 회원(懷遠)>의 2 진(鎭)에 저축하도록 하여, 수레와 소를 끌고 가는 자들 모두 되돌아오지 못해, 죽거나 없어진 군사(士卒)가 과반(過半)이었으며, 농사에 곡식을 심을 시기를 놓쳐, 많은 밭이 황폐해졌다.》
《加之饑饉,谷價踴貴,東北邊尤甚,斗米直數百錢.所運米或粗惡,令民糴而償之.又發鹿車伕六十餘萬,二人共推米三石,道途險遠,不足充餱糧,至鎮,無可輸,皆懼罪亡命,;더하여 기근【흉년으로 양식이 없어 굶주림】으로, 곡가는 뛰고, 값이 비싸졌는데, 동북변이 매우 심해, 쌀 1두에 수백전이 되었다. 그곳으로 운반해간 쌀이 혹 조악(粗惡)하면, 영을 내려 백성들에게 곡식을 사 배상하도록 하였다. 또 녹거(鹿車)부로 간 인부가 60여 만이었는데, 두 사람이 함께 쌀 3석을 옮겨야 하는데, 도로는 험하고 멀어, 후량【餱糧 : 먼 곳을 가는 사람들이 가지고 가는 양식】이 부족하여 채워야 하니, 진(鎭)에 다다르면, 나른 것이 없으니, 모두 형벌을 두려워하여 망명하였다.
당시 수양제(隋煬帝)는 고구려(高句驪)를 쳐 복수(復讐)하려는 야욕(野慾)으로 군대(軍隊)의 식량(食糧)을 비축(備蓄)하려고, 이들에게 군량(軍糧)용 쌀을 운반케 하여 <로 하(瀘 河)와 회원(懷遠)> 두 진(鎭)에 쌓도록 한 것이다. 이들이 군량(軍糧)용 쌀을 운반하는데 <60 여만 명>이 동원되었으며, 이들은 <로 하(瀘 河)와 회원(懷遠)> 두 진(鎭)에 다다르기도 전에 양식이 떨어져 굶어죽게 생겼으니, 그곳으로 가져 갈 군량(軍糧)을 먹어 치워, 그곳에 도착하면 운반(運搬)한 군량(軍糧)이 없다는 뜻이다.
두 사람이 1조가 되어 쌀 3석을 운반해야 되는데, 가면서 먹을 양식도 없는 판에, 무슨 운반을 할 수 있겠는가! 가지고 가는 군량(軍糧)을 다 먹어치웠으니, 그곳에 가면 죽는 일밖에 없으니, 살아남기 위해 작당(作黨)하여 도망을 가버렸다는 이야기다.
※ 당시 수(隋) 백성들의 주식은 미【米 : 쌀을 말하는 것이나, 조, 수수, 보리, 옥수수 등의 껍질을 벗긴 것들을 말하기도 한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논농사, 밭농사를 많이 경작(耕作)했다는 증거(證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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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원(懷遠) : 회원(懷遠)진 또는 회원(懷遠)현으로 수(隋), 당(唐)이 고구려(高句驪)를 칠 때 군량미(軍糧米)를 미리 저축(貯蓄)해 놓은 곳인데, “회원(懷遠)”은 『영주(營州)의 속현(屬縣)으로 있었으며, 이곳에 회원(懷遠) 수착성(守捉城)이 있었다.』고 하며, 이곳은 『진(鎭)으로, 현(縣)으로』 왕조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뀌었다.
➊ 구당서【舊唐書 : 다른 사서(史書)역시 대동소이한 내용으로 같다.】에는 령주대도독부 속현【내몽골을 흐르는 황하 서북(西北)안 지대로 내몽골 및 외몽고지방을 총괄한 도독부이다.】으로 있었으며,
➋ 회원(懷遠)은 <영주(營州)관할 속현(屬縣)>이라는 것으로 보면, <청해(靑海)성의 황하(黃河)와 황수(湟水)사이>에 있어야 한다. 【북사(北史)에 저 강(氐羌) “난당”이 “영주자사”였다】
➌ 영주(營州)의 속현(屬縣)이며, 영주(營州) 관내를 유성(柳城)에서 다스렸다는 것으로 보면, 신강(新疆)성 지방에 “용성【龍城 : 수경 주 및 자치통감 등】”과 함께 “유성【柳城 : 청사(淸史)지】”이 있다.
위의 모든 지역은 넓게 보면 하(河)의 서쪽지방이며, 전한(前漢), 후한(後漢), 진(晉), 오대(五代)등의 역사서(歷史書)로 보면, 요하(遼河)의 서쪽지방이므로 “요서(遼西)지방”이다.
이들이 목표로 했던 <로 하(瀘 河)와 회원(懷遠)> 두 진(鎭)은 “요서(遼西)”지방에 있었으며, 이곳은 동쪽으로 요동(遼東)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고구려(高句驪)를 침공(侵攻)하기 위해서는 요수(遼水)를 건너지 않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갈 수 없는 것이 요동(遼東) 땅이다.』
고구려(高句驪)와 수(隋)나라의 영토(領土)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는 결론(結論)에 다다를 수밖에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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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사서(史書)의 기록으로 보면, 고구려(高句驪)는 반도(半島) 땅에 없었으며, 수(隋)나라 역시 대륙(大陸) 중원(中原) 땅에 존재(存在)할 수 없다. 불가능(不可能)하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다. 지형(地形), 지리(地理), 방향(方向)등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있었으니,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저자(著者)는 여러 참고(參考) 문헌(文獻)을 보면서 기록(記錄)했을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다른 방향(方向)으로 사고(思考)를 해야 한다.
요동(遼東)과 요서(遼西)를 가르는 하천(河川)이 “요수(遼水)”다. 동안(東岸)과 서안(西岸)이 있다는 것은 이 하천(河川)이 남북(南北) 또는 서북(西北)에서 동남(東南)선상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 전한서(前漢書), 후한서(後漢書), 오 대사(五代史), 자치통감(資治通鑑), 통전(通典)등을 보면, 소위 『요수(遼水)를 건너는 최고(最高)사령관(司令官)의 직책이 “도요장군(度遼將軍)”이라고 하며, 관직(官職)의 이름이다.』라고 주해(註解)하고 있다. 그렇다면 요수(遼水)는?
(1) 하(河) 곧 황하 상류를 말한다. 곧 곤륜산(崑崙山)으로부터 흘러오는 하(河)를 말하며, 이것은 섬서(陝西) 서북(西北) 내몽고지대의 북 하【北河 : 하의 북쪽을 흐르는 황하의 한 줄기】까지를 말하는 것이다. 증거(證據)와 고증(考證)이 된다. 곧 이곳은 유목민들에게 천혜【天惠 : 하늘이 베풀어 주신 은혜】의 땅이라고 한 곳이다.
(2) 현 신강 성(新疆省)의 이리 하(伊犂河)와 공작 하(孔雀河)등으로 포창해 및 박사 달 호 등과 연결되는 이 수계(水系)가 아닐까 추정해 본다. 증거(證據)와 고증(考證)이 어렵다. 이곳은 유목민들에게 고난(苦難)의 연속적(連續的) 삶을 강요(强要)하는 곳으로 생활환경이 극히 불량(不良)한 곳이다.
※ 기타 문헌으로 <송 막(松漠)기문>과 여러 <조선 유학자>들의 기록으로 보면, (1)과 (2) 모두 타당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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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전(通典) 주군(州郡)전(典)에 이런 기록이 있다. : 《營 州 今 理 柳 城 縣 。 殷 時 為 孤 竹 國 地. : 영주(營州) 【유성(柳城)현에서 다스렸다.】 은(殷)나라 때 고죽국의 땅이다.》라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영주(營州)는 옛 조선(朝鮮)의 영토였으며, 고구려(高句驪)의 선대나라였다는 “고죽국(孤竹國)”의 땅이었다.【수서(隋書) 배구 전(裴 矩 傳)에 , “고려(高麗 : 고구려)는 본시 고죽국(孤 竹 國)이다.” 하였다. 】 이러한 곳에 “고죽국(孤竹國)”이 있었다고 할 때 주(周)가 은(殷)을 멸하니, 백이(伯 夷)ㆍ숙제(叔 齊)가 북해(北海) 변에 살았다는 내용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대명일통지에 그 연혁(沿革)이 자세하게 나열되어 있는데, 《大 明 一 統 志 : 永 平 府 十 五 里。有 孤 竹 君 國 所 封 之 地。又 曰。朝 鮮 城 在 永 平 府 境 內。「箕 子」受 封 之 地。以 此 有 與 孤 竹 國 爲 鄰。按《盛 京 志》。錦 州 府。「禹 貢」、冀 州 之 域。「舜」分 冀 東 北 爲 幽 州、錦 州。其 所 統 也。商 爲 孤 竹 國。周 幽 州 地。屬 燕。秦 爲 遼 東 郡 地。又 以 幽 州 爲 遼 西 郡。漢 爲 無 慮、望 平 縣 地。屬 遼 東 郡。唐 置 柳 城 縣。屬 營 州. : <대명일통지> : 고죽 군 공으로 봉 받은 땅은 ‘영 평(永平)부’ 15 리에 있다. 또 이르데 <조선 성(朝鮮 城)>이 ‘영 평(永平)부’ 경내에 있었다. 기자가 봉 받은 땅이다. 이곳 가까운 곳에 고죽국이 이웃하고 있었다. 안(按)의 <성경 지>에 의하면, 금주부이다. <우공>의 기주지역이다. <순>이 기주(冀州)의 동북(東北)을 나누어 유주(幽州), 금주(錦州)로 했다. <상나라>의 고죽국이며, 주(周)나라의 유주 땅이다. 이곳은 연(燕)에 속했다. 진(秦)나라 때는 요동(遼東)군의 땅이었으며, 또 이 유주(幽州)는 요서(遼西)군이 되었다. 한(漢)나라 때는 무려, 망평현의 땅이었으며, 요동(遼東)군에 속했다. 당(唐)나라에서는 유성(柳城)현을 설치했으며, <영주>에 속했다. 》
● 또한 영주(營州)는 “유성(柳城)”에서 다스렸는데【치소가 있었다는 말】, 유성(柳城)은 계주【薊州 : 어 양(漁陽)】주위이다. 계주(薊州)에 대한 조선(朝鮮)의 유학자들이 기록한 지형(地形), 지리(地理)의 특징(特徵)을 보면,
【次 書 狀 薊 州 途 中 韻 / 此地元來是塞沙.野連遼左際天賖.漢時憑翊爲三輔.齊邑臨淄有萬家.幾道商車來綰轂.一方民物競繁華.傷心唯見漁陽水.幽咽潮聲海涯( ). : 【간 재 집(崔 奎 瑞 A. D 1650-1735.형조 판서.예조 판서.한성 판윤 등 역임) 이 시(詩) 앞 구절의,《 此 地 元 來 是 塞 沙. 野 連 遼 左 際 天 賖 : 이 땅(계주)은 원래 사막지대의 요새이다(塞 沙).【또는 변경 사막지대다】 들판이 연이어져 요동【遼 左란 요동을 뜻한다.】사이(際)는 하늘과 마주칠 만큼 멀다.》고 한 것을 보면, 오늘날의 ‘하 북 성(河北省)’지방을 말하는 것이 될 수 없다.
현 ‘하 북 성(河北省)’지방의 <북경(北京), 영 평(永平), 계(계주=어 양), 란 하【灤河 : 고죽국성이 있었다고 한다.】등은 “사막(沙漠)지대”라고 설명을 하고 있으며, 계주(薊州)로부터 요동(遼東) 벌판은 큰 산이 없는 ‘천리(千里)평원(平原)’지대라 했기 때문에 현재의 것과는 지형지리(地形地理)의 특이성, 방향(方向), 생태계이 전혀 부합되지 않는 곳이다. 물론 시대적 환경의 변화까지 <감안(勘案)한다> 해도 어림없는 이야기다. 대륙(大陸)의 당(唐)나라 때 시인(詩人)이 말한 이곳지방의 지형적 특색을 또 찾아보면, 위의 조선(朝鮮) 유학자가 기록한 것과 똑같은 지형의 특이함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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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唐)의 변새(邊塞)시인(詩人)이라 호칭하던 “고적(高適)” 시 한 편을 보면서, 영주(營州)가 어떤 곳에 있었는가를 심정적(心情的)으로 느껴보자.
營 州 歌(영주가)
營 州 少 年 愛 原 野 : 영주의 소년들은 벌판을 좋아하여,
皮 裘 蒙 茸 獵 城 下 : 더부룩한 가죽옷을 덮어쓰고, 성 아래 우거진 곳에서 사냥을 하네.
虜 酒 千 鍾 不 醉 人 : 오랑캐는 술 천 잔에도 취하지 않고,
胡 兒 十 歲 能 騎 馬 : 오랑캐 아이 열 살이면 말 타는 것은 능하다네.
● 위 시(詩)를 보면, 당시 영주(營州)지방은 유목(遊牧) 또는 이목(移牧) 종족들이 가축(家畜)과 더불어 살아가는 곳이었으며, 이곳은 호(胡)들이 살던 곳임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곳이 현 하 북(河北)성 북경(北京) 동쪽지방이었다고 한다면, 현재의 반도(半島) 북방이나 북경(北京)지방은 사막(沙漠)과 초원(草原)지대로 양(羊), 말(馬), 낙타(駱駝)등을 방목하며, 수초(水草)를 따라 이동(移動)하는 종족(種族)들의 삶터였다는 것이 된다.
이들 소년들이 더 성장하여 장정(壯丁)이 되면, 『유주(幽州)의 돌격기마대(突擊騎馬隊)』가 되어 광활(廣闊)한 초원(草原)지대와 사막(沙漠)지대를 포효(咆哮)하며, 가장 용감무쌍(勇敢無雙)한 돌격기마대(突擊騎馬隊)의 일원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지형(地形), 지리(地理)적 위치는 서방(西方)에 있어야 옛 기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은 농경(農耕) 종족(種族)과는 그 사고가 전혀 다르다. 여기에 덧붙여 조선(朝鮮)의 대신(大臣)이며, 유학자(儒學者)였던 조선(朝鮮) 선비의 시(詩) 하나를 보면서, 우리 스스로 생각해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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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祖 詠> 望 薊 門 ;
《燕臺一去客心驚.簫鼓喧喧漢將營.萬里寒光生積雪.三邊曙色動危旌.沙場烽火侵胡月.海畔雲山擁薊城.少小雖非投筆.論功還欲請長纓. : “조 영”의 계(薊 : 계주)문을 바라보며 :
연대는 일거에 나그네 마음을 놀라게 하는구나. 한나라 장군 영에는 퉁소와 북소리가 시끄럽고, 차가운 달빛은 먼 쌓인 눈을 비추는데, 세 곳의 변경 새벽빛에 부절(旌)이 위태롭게 서 있고, 오랑캐 달이 모래사막에 봉화처럼 침범하였네. 바다 경계 운산이 계성(薊 城)을 끌어안고 있는 듯, 조그만 것이라도, 붓을 던져버려서야 되겠는가. 논공(論功)으로 벼슬(長 纓)때문에 돌아기기를 원하다니! 》 【장 영(長 纓) : 긴 갓끈. 가슴속 포부를 떨칠 만한 높은 벼슬을 나타내는 말】
위의 당시(唐詩)를 보면, 계주(薊州 : 현 하 북 성 동쪽) 주위의 지리적 환경은 모래사막(沙場)으로 뒤덮인 곳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현 ‘하 북 성’ 동쪽지방에 있다는 “계(薊)”와는 너무도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계 국(薊 國)”의 도읍지도 아니며, 그 유명한 “계주(薊州)의 돌격기마대(突 擊 騎 馬 隊)”가 있었던 계주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설마하니 “일천 이삼백 년 전”의 당나라 시절의 학자나 시인들이 사후(死後), 역사왜곡이 생길 것이라는 천기(天氣)를 보고 기록할리 만무하며, 수백 년 전 조선(朝鮮) 선비가 천기(天機)을 누설하고, 앞으로 있을 역사왜곡을 위해 비밀리에 적어 놓은 것은 아닐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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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를 토대로 보았을 때, 당시 수(隋)나라는 조선【고구려(高句驪)】의 서남(西南)지방에 위치해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당(唐)나라 역시 같은 곳임】『고구려(高句驪)는 현재의 신강 성(新疆省)지방과 그 북부지방까지를 영토로 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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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조선>이란 주장에서, <중앙아시아 곧 아프가니스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지방 등의 그 가운데 지역이 “중국(中國)”이라고 했을 때, 『대륙에 산재(散在)해 있는 옛 기록들을 모조리 “조작(造作)”했다.』라는 말은 불가능(不可能)하다.
○ 또한 중요한 것은 지리(地理), 지형(地形), 방향(方向), 생태계(환경적 요인)등의 복잡한 요인(要因)을 충족(充足)시킬 수 없다. 이것은 본인의 견해(見解)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왜(倭)가 유럽지방에 있었다는 주장 역시 심사숙고(深思熟考)를 해 봐야 한다. 정황【情況 : 일의 사정이나 형편】으로 판단하는 것은 큰 오류(誤謬)을 잡을 수 없다.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던 당시의 세력들을 “왜(倭)”같은 생존방식의 “종족(種族)”이라는 것에는 동의(同意)하나, 그들이 “왜(倭)”집단이란 것에는 회의적(懷疑的)이다.
○ 또 그곳 지방을 견문(見聞)했다는 동방견문록의 저자 역시, 사막(沙漠)과 반 초원지대, 회교(回敎)등을 설명하고 있으며, 사막(沙漠)을 통과하는데 수일(數日)을 간다는 등 지형적인 특색으로 보면 “중국(中國)지방”이라고 보기엔 많은 허점이 있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 <관중평야, 옥야천리>라는 말, 또는 <農, 天 下 之 大 本 也 : 농업은 천하의 큰 근본이다.>라는 것은 <2천여 년 전>에 생겨난 말인지 그 근세(近世)에 탄생된 단어(單語)가 아니다.
쌀을 주식(主食)으로 하는 것과 밀을 가공한 식품을 주식(主食)으로 하는 한계는 분명 존재하며, 이러한 한계가 언제부터 존재 했는지, 락타(駱駝), 양, 말 등의 젖(乳)과 그 고기를 주식으로 하는 종족들과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등도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다. 우리가 “조선(朝鮮)”의 후예(後裔)라 했을 때【 중앙아시아/중국】, 과연 그곳에서 있었던 생활풍습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아니면 지금도 생생하게 조선의 중국지방에 살아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답을 구하려면 한정(限定)이 없는 것이 바로 <아시아/조선>이란 주장이다.
● 전한서(前漢書)를 보면,
【漢 書 卷 四 . 文 帝 紀 第 四 : 春 正 月 丁 亥, 詔 曰 :「夫 農, 天 下 之 本 也,」 : 한서 4. 문제기 4 : 봄 정월, 정해, 조서에서, 『농업은 천하의 근본이다』라고 일렀다.】 【臣 瓚 曰 : 景 帝 詔 曰 『朕 親 耕, 后 親 桑, 為 天 下 先』: 신하 “찬”이 이르기를, 경제가 조서에서, 『짐(朕)이 친히 밭을 갈고, 왕비는 친히 양잠을 하는 것이 천하의 우선이다.』라 이르셨다.】 이라 하였는데, 이러한 곳이 과연 중앙아시아/중국이 될 수 있을까? 본인(本人)은 이 『전한(前漢)』을 『고구려(高句驪)』라고 주장한다.
【구월(九月), 詔 曰 :「農, 天 下 之 大 本 也, 民 所 恃 以 生 也. : 농업은 천하의 큰 근본이니, 백성들은 그것을 의지하여 살 것이다. 】
【통전 : 關 中 記 云 :「東 自 函 關, 弘 農 郡 靈 寶 縣 界, 西 至 隴 關 今 汧 陽 郡 汧 源 縣 界, 二 關 之 閒, 謂 之 關 中, 東 西 千 餘 里. : 관중(關中)기에 따르면, 동쪽 함 관(函關)은 ‘홍 농 군 령 보 현’ 지경으로부터, 서쪽으로 롱 관(隴 關)인 ‘견양 군 견원 현’ 지경에 이르는 두 관(關) 사이로, 소위 관중(關中)이며, 동서(東西) 천(千)여리이다.】
● 본인(本人)은 『<아시아/조선>을 주장하는 분들을 배척(排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근거나 고증, 지형지리문제, 생태계등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너무도 많아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지리(地理), 지형(地形), 방향(方向) 등의 이해(理解)할 수 있는, 신뢰(信賴)할 수 있는 증거(證據)와 고증(考證)을 해달라는 것이다. 정황(情況), 추리(推理), 추정(推定), 음(音)의 변화(變化), 유사(類似), 근대사(近代史) 등 이러한 것들은 같은 부류(部類)에서는 통용(通用)될 수 있으나, 제 삼자 무리(衆)들을 설득(說得), 이해(理解)시키는 것은 무리(無理)요, 한계(限界)다. 더하여 이러한 이해(理解)를 구하지 못할 경우 잘못하면 혐오감(嫌惡感)마저 줄 수 있다는 것이 염려(念慮)도 된다.
현재까지 증거(證據)와 고증(考證)의 객관성(客觀性)이 없으며, 지리(地理), 지형(地形), 방향(方向), 생태(生態)계 등으로 볼 때 가능성이 희박(稀薄)하다.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그렇다면 그 동쪽지방은 조선의 땅인가?』하는 문제다. 만약 <조선(朝鮮)의 땅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그 다음 과제는 무엇일까?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그러한(중앙아시아/조선) 주장을 한다면, 주된 논리(論理)에 대한 질문(質問), 의문(疑問)에 대하여, 설명할 책임(責任)이 있는 것이다. 물론 의무(義務)는 아니기 때문에 추궁(追窮)할 수는 없는 것이나, 도의적(道義的) 도리(道理)가 있다는 것이다.
● 내가 조선(朝鮮)인이며, 그래서 조선(朝鮮)의 옛 역사(歷史)와 그 역사(歷史)가 전개된 땅을 찾고 있는데, 그게 아니라면 그 땅을 찾아 무엇을 할 것인가............? <아시아/조선>을 주장하는 여러분들에 던지는 본인(本人)의 화두(話頭)다.!!!!!!!!!!!!!!!!!!!!!!!!!!!!
2011년 11월 02일 <글쓴이 : 문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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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사는 승자의 것입니다. 결국은 수당이 이겼고, 수당은 우리의 조상입니다. 왕건이 당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조상을 거스를 수는 없지요.
당이 승자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검증할 수 있나요? 당이 승자이며, 고려사가 당의 역사이며, 미스테리에 휩싸인 왕건의 출신성분을 당으로 단정짓는 이유가 있을테지만, 역사는 때론, 패자라고 불린 세력을 불러내기도 하고, 조상이 아닌걸로 보이는 이들의 이름이 우리와 동일시되는 순간이 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조상으로 믿어의심치 않던 족보나 왕조, 민족 같은 것들, 심지어 우생학이나 유전자학 같은 과학조차도 그 믿음의 근거는 참 희박한 것입니다.
찾아감에있어 중심같은 글입니다. 당=신라 아닌가요?
당의 실체는 영한사전 slam을 찾아보면 나옵니다. 이슬람이 곧 당이고, 사로센인 신라가 곧 당인 셈입니다.
신라가 천자국이란 얘기는 이슬람인 당나라의 지배집단이 사로센이란 얘기고, 양이들이 일컫는 아바스니, 우미야드니 하는 왕조들이 전부 사로센조라고 하는 겁니다.
우미야드조의 시작이 산천에서 움막(텐트)를 치고 떠돌았다(캠패인)는
것인데, 이는 신라 화랑과 내용이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고요. 그 화랑도가 삼국통일이 되자 쇠퇴하여 소멸되는데, 그 시기는 우미야드조의 쇠퇴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신라 향가는 서아시아에서 생사와 관계된 장례,제례에서 불려지는 곡소리이지 무슨 논다니들의 풍월(風月)이 아니고
그리고, 반도에 신라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있었다면 어떤 형태로 있었고, 현 경주가 신라의 금성(金城)이 맞는 건지, 아니면 경주가 거대한 세트장인지는 머지않아 밝혀질 것입니다.
지중해 문명...단군조선이 주도한 문명 맞을 겁니다.
그러나 그건 단군조선의 후예들인 거란,여진,유적,흉노...등등...서역조선의 역사이지...
그들을 서역 오랑케라 규정했던 동국조선의 역사가 아닌겁니다.
껏해야,,,동국조선이 상국으로 모셨던(?) 명나라(무굴?)...그를 인수한 청(타타르) 정도가 동국조선 입장에서의 중국이지...
아시아적 요소가 나온다 하여...무조건 그걸 다 근세조선(동국조선)의 중심지 문영이라 우기는 건...
박용숙 교수님의 훌륭하신 연구실적을...오히려 망가트리는 행동들이라 전 걱정됍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려(黎)는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종족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중해의 고대문명을 단군문명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해도, 현 파미르 이동의 중국이 원시인의 땅이라고 말할 순 없다고 봅니다. 단군이 지중해를 지배했으면, 현 중국을 지배한 것도 당연하다고 봅니다. 근대 서아사아가 고려의 영역이라면, 동아시아 또한 고려(朝鮮)인 것은 당연한 겁니다. 지나가(金) 중국(中國)인 것은 명확한 것입니다.
명(明)은 넒은 인도전역에 자리잡았고, 청(淸)이 인도가 아닌 유라시아 고려(朝鮮)전역을 지배한 남북조 시대가 맞다고 봅니다. 퓨리턴(淸)들이 일루미나티(明)와 유라시아 남북에서 경쟁 협력했다고 보입니다.
그 균형을 깬 것이 왜놈들인 사로센(solar+人)이고요. 이성계가 근세에 정립한 수피즘을 당나라때부터 있던 지들의 종교라고 날조하고,유대교와 개신교의 입맛에 변형시킨 것이 수니파 이슬람이고요. 유대교(youfh)의 발명과 탄생이 명(明).청(淸)을 존재하지도 않았던 대립과 반목으로 왜곡시켜 두 거인인 세계제국을 멸망시켰다고 봅니다.
청(淸)과 손문이후의 세력과는 분명히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봅니다. 현 중꿔런들의 문화없음은 청조(淸)가 짝퉁이기 때문이 아니라, 명.청 밑에서 아전질(衙典)을 하던 유대(youth=dutch=german=england=japan=turkey)의 동맹때문입니다. 영국이 무굴을(明) 무너뜨리고,독일이 청(淸)을 멸망시킨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