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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백제 토론방 백제의 명운을 결정지은것이나 다름없는 황산벌이 어디죠?
Kia-_-Tigers 추천 0 조회 683 10.02.16 11:43 댓글 24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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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02.16 12:40

    첫댓글 백제의 계백이 김유신의 침략군과 맞서 싸운 곳을 우리는 황산벌로 해석하고 있으나 삼국사기에는 황산지원(黃山之原, 황산의 벌판)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황산벌과 황산의 벌판이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황산의 벌판이라고 해석할 때에는 황산강의 유역에 있는 벌판이라는 뜻이고, 현재 학계에서는 황산강을 낙동강이라 해석하고 있으므로, 지금의 논산이 낙동강의 유역이 아니기 때문에 황산벌을 황산강과 무관하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가야와 신라를 흐르는 황산강은 어디인가?
    남당 박창화 선생은 황산강을 한강으로, 황산지원을 경기도 고양으로, 경기도 김포를 금관으로 주장한 바가 있습니다.

  • 10.02.16 13:21

    百濟 將軍 堦伯{階伯}>?, 擁兵而至, 先據嶮, 設三營以待 - 백제 장군 계백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먼저 험한 지형을 차지하고, 세 곳에 군영을 설치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벌판이라고 하여 언덕이나 구릉 야산등이 아예없는 평평한 지역이라고만 볼수 없습니다..게다가 목책, 마름쇠, 참호나 해자 등으로 장애물을 설치하여 얼마든지 방어할 수 있는 문제이지요..黃山이라는 지명은 여러군데에 있을 수 있는 문제이므로 현재 삼국사기 잡지의 지리편에 기록된 현재의 논산(연산)지역으로 비정해도 무방할 듯 합니다.

  • 10.02.16 13:31

    일부 학자들은 계백의 三營을 그곳 지역의 3군데 산성에 의거한 것으로 비정한 논문이 일부 있으나 공성전에서 4번의 실패를 반굴이나 관창의 시위로 사기가 올라 하루 이틀 사이에 이들 3성을 모두 함락시킨다는 것은 무리이며, 소정방과 합류기일이 다급한 신라군이 산성에 틀어 박혀 있는 백제군을 무시하고 그냥 백제 도성으로 직공하여 소정방과 합류하거나, 또는 백제군들이 성밖으로 나와 공격할때 역공하는 것이 오히려 공성전 보다 쉽다고 봅니다..따라서 벌판의 야산등 높은 지역에다 장애물을 설치하고 방어한 것으로 보는게 사료상 이해가 되는 부분이라 하겠습니다.

  • 10.02.16 16:28

    장의사(莊義寺/藏義寺) 관련 자료 (삼국유사)

    장춘파랑(혹은 장춘랑과 파랑)은 이전에 백제 군사와 황산에서 싸울 때 진중(陣中)에서 죽었는데, 후에 백제를 토벌할 때 태종의 꿈에 나타나 말하였다.
    “저희들은 옛날에 나라를 위해 죽었고, 백골이 되어서도 나를 지키고자 하여 군대의 대열에 따라나서 게을리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위협에 눌려 남의 뒤만 따를 뿐입니다. 원컨대 왕께서는 저희들에게 약간의 세력을 주십시오.”
    대왕은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두 넋을 위해 하루 동안 모산정(牟山亭)에서 불경을 설법하고 또 한산주에 장의사(莊義寺)를 지어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

  • 10.02.16 16:51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사망은 661년으로 고구려의 멸망보다 앞선 일로,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한산주를 취득하기 이전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장의사를 지은 일은 659년의 일이고, 통설은 고구려땅인 한산주(서울)에 해당하게 된다.
    만약 삼국사기의 기록에 잘못이 있어 장의사를 지은 일이 후대의 일이라면, 백제의 웅천주에 설치하는 것이 옳은 일이지, 고구려 땅에다 설치하는 일이 옳지않다.

  • 10.02.16 20:14

    장의사(莊義寺/藏義寺)=<창의문 밖에 있다. 신라가 백제 군사와 황산벌에서 싸웠는데, 장춘랑과 파랑이 싸움터에서 죽었으므로 태종왕이 두 사람을 위하여 이 절을 창건하였다.> ; 藏義寺<彰義門外 新羅 與百濟兵戰於黃山之野 長春郞罷郞 死于陣 太宗武烈王 爲二人 創是寺> [신증동국여지승람 권제3, 36장 뒤쪽, 한성부 불우]...창춘랑과 파랑은 일종의 화랑출신으로 보이며 한산주 출신의 화랑이었다면 한산주에 장의사를 지어줄수도 있다고 보입니다...그리고 한산주가 현재 서울지역이라면 당시 이지역은 신라영토 북한산주로 보여집니다.

  • 10.02.16 20:20

    같은 신라고기에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발췌했는지? 아니면 다른 고기에서 발췌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두내용이 매우 相異하며 삼국유사의 기록보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보다 문맥상 일치하여 사실적으로 보입니다..삼국사기에서는 先臣으로 표현되어 무열왕 이전의 사람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꿈에 현몽하여 꿈의 장면을 설명하는 것이기에 개꿈 같은 장면이 두서없이 나올 수 있는 문제입니다 이것을 삼국유사는 비교적 그대로 전하고 삼국사기는 너무 황당한지?..새로 편집하여 정황에 맞게 수정하여 입전시킨것으로 보입니다.

  • 10.02.16 23:31

    문제는 황산벌의 위치는 사비성(부여)에 인근한 현재 논산(연산)지역이 올바르다고 보면 됩니다..낙동강도 일명 황산강으로 불리었으나 같은 이름일뿐입니다..다른지역이 같은 이름을 쓰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문제입니다..백제의 도성은 분명히 사비성(부여)이었으며 "부여정림사지5층 석탑 즉 "대당평백제국비명"의 금석문등이 있으니 다른 지역을 찾는 것은 무리입니다.

  • 10.02.17 12:46

    어제 우리딸이 사회과부도를 가져와서 국사편찬위원회의 삼국의 지리관념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살펴본 즉 백제멸망시 신라의 영토가 한강의 하구까지 닿아 있고 당항성 또한 경기서부해안이더군요.
    그러므로 소호금천님 말씀대로 장춘랑과 파랑의 출신지가 한산주라면 사당을 한산주에 지었을 것이라는 의견에 타당성이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살펴보면 백제의 영토는 충청도와 전라도에 한정되어 있고, 신라의 영토가 경상도, 경기도, 강원도와 함경도 일부지역에 이르는 보다 넓은 지역이어서 대충 살펴도 신라가 백제보다 우위에 있더군요.

  • 10.02.17 12:53

    그런 신라가 당나라에 굽신거리며 굴욕적인 외교로 당나라를 끌어들였다고 하기엔 뭔가 부족함이 있고, 당나라가 고구려만 제어해주면 백제는 신라가 충분히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은 되겠더군요.
    그리고 백제땅이 신라와 발해말갈로 나뉘었다는 구당서와 신당서의 기록은 무엇인가요?
    구당서와 신당서를 기록한 이들은 아무 생각없이 기록하였을까요?
    김유신이 백제를 정벌하러 갈때 지나간 코스가 참 어이없더군요.
    경주에서 남천으로 서북진하였다가, 다시 논산으로 남서진, 그리고 부여와 공주로 북서진하는 요상한 진로이더군요.

  • 10.02.17 13:56

    물론 당나라가 고구려만 제어해주면 백제는 신라가 충분히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은 된다고 봅니다..그러나 당시 전황으로서는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심지어 왜까지 둘러쌓여 고립된 상태로 더구나 선덕여왕 재위시 40여성 함락과 대야성 함락 그리고 옛 가야지역 상실등 고구려 연개소문 정권까지 적으로 확인된 마당에 당나라에 굴욕적 외교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요..하지만 경기도 지역은 신라가 악착같이 지킴으로써 당나라와의 통로를 열어 놓은 것이지요 백제나 고구려가 이를 적극적으로 빼앗지 못한 것은 당나라와의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 10.02.17 14:09

    또한 백제정벌시 신라군이 남천정까지 북진하였다가 인천앞 덕물도에서 소정방과 작전회합을 가지고 남하하여 부여로 가는 코스가 보통사람들로서는 어이없어 보이지만 어쩌면 고구려와 백제를 혼란시키며 견재하는 전략으로 볼수도 있습니다..그리고 신,구당서에 백제땅이 신라와 발해말갈로 나뉘었다는 구당서와 신당서의 기록은 이미 안정복선생마져도 백제 땅이 말갈(靺鞨)에 분할되었다는 그릇된 사실이라고 지적하였으니 신구당서 역시 남의 나라 기록에 오류가 많은 것쯤은 별로 특별한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 10.02.17 19:26

    구당서와 신당서의 기록을 안정복선생이 잘못이라고 하였다하여 이를 근거로 잘못이라 지적하였으나, 잘못아닌가요?
    다만 이런견해가 있다는 정도로 참고자료로 활용하는 것은 가능할 것입니다.
    님이 제시하신 "부여정림사지5층석탑" 즉 "대당평백제국비명"의 금석문을 백제의 도읍으로 삼는 근거로 제시하였는데, 그렇다면 백제의 왕성과 왕릉에 대한 자료가 부족할 뿐더러 확실한 보충자료는 무녕왕릉 하나 뿐입니다.
    무녕왕릉 지석에서도 해석이 애매한 부분이 있고, 신라사초에서 보면 백제가 조문을 간 것이 아니라 장례를 치뤘다는 기록이 등장합니다.

  • 10.02.17 21:35

    무녕왕릉 발굴보다 남당유고가 시기적으로 앞서고 있으니 남당 박창화선생이 일부러 요상한 기록을 삽입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무녕의 아들 성왕은 진흥왕대에 무참히 죽임을 당하는데, 신라사초에 명확히 밝히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성왕이 무녕을 살해하였거나, 연관이 있거나, 죽인자를 살려두지 않았나 판단되고, 결국엔 성왕을 사로잡은 후 신라가 부덕한 백제 성왕을 처형하는 형식이 아니었나 합니다.
    또 성왕의 아들인 위덕왕대에는 신라와는 철천지 원수가 되어 싸워야 함에도 뭔가 허전함이 있지요.

  • 10.02.18 00:11

    물론 구당서와 신당서의 기록을 안정복선생이 잘못이라고 하였다하여 이를 근거로 잘못이라 지적한 부분이 정답이라기 보다는 동사강목의 역사서를 저술한 분의 견해를 존중하는 정도의 참고일 뿐입니다..그리고 대당평백제국비명뿐만 아니라 "당유인원기공비(唐劉仁願紀功碑)"도 있습니다...무녕왕릉 지석에서도 해석이 애매한 부분은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군요..성왕이 무녕을 살해내용은 저도 아는바가 없어 답변을 할수가 없군요..다만..고적 부문과 유물 미약하나마 삼국사기, 삼국유사 그리고 후대 역사서 또는 문집등으로 부여를 백제도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보는 것이지요!

  • 10.02.18 00:14

    성왕의 아들인 위덕왕대에는 신라와는 철천지 원수가 되어 싸워야 함에도 뭔가 허전한 부분은 본인도 의문입니다..그러나 당시 백제로서는 당장에 신라를 보복하기 보다는 자체 안정이 더욱 다급한 실정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네요..성왕이 전사하고 얼마 안되어 엎친데 덮친격으로 오히려 고구려로 부터 대대적인 공격을 받았으니 당시 정세로서는 당장에 신라에 보복하기에는 자체 정비가 안된 상태로 해석하는게 옳은것 아닌지요?

  • 10.02.20 02:10

    양당서의 백제의 옛 땅은 훗날 발해말갈과 신라가 나눠가졌다는 기록은 오기는 아닙니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부여융의 웅진도독부가 요동의 건안고성으로 옮겨졌습니다. 사서에는 이 건안고성의 웅진도독부를 백제라고 부르며 한반도에 있던 백제와 동급으로 취급했습니다. 훗날 발해가 요동에 진출하면서 이 건안고성에 있던 백제(웅진도독부)를 점령했기 때문에 양당서에 백제의 영토가 신라와 발해말갈에게 양분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입니다. 일부 한, 중의 학자들은 백제의 멸망을 660년으로 보지 않고 700년대 초기로 보기도 합니다.

  • 10.02.21 12:30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기 때문에 백제와 고구려의 기록과 문서들을 보았기 때문에 착오하여 기재하는 일이 드문일 입니다.
    당나라가 착오하여 기재하는 일이란 백제와 고구려의 사서에서 본래부터 왜곡되어 있는 내용때문에 판단에 착오가 올 수 있는 부분은 있겠으나, 백제의 땅이 신라와 발해말갈로 나뉘었다는 기록을 착각할 가능성은 0%입니다.
    대당평백제국비명, 당유인원기공비(唐劉仁願紀功碑)와 같은 것은 위치를 옮겨 이식할 수 있기 때문에 왕성과 왕릉과 자연지형등이 함께 복합적으로 합치될 때만이 진정한 역사적 사료로써의 값어치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10.02.22 22:01

    건안고성의 웅진도독부를 백제라고 부르며 한반도에 있던 백제와 동급으로 취급한 것은 당나라의 억지성이 엿보이는 부분이지요...그리고 부왕으로 부터 왕위 계승을 받은 것이 아니라 당나라에 의해 만들어진 하수인 부여융을 백제 마지막이라고 인정하지 않은 것은 삼국사기 김부식이나 조선시대 사학자들 모두 마찬가지 였다고 생각합니다..그러니 안정복 선생 역시 고구려의 건안성을 백제의 영토라고는 눈꼽만큼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겠지요.

  • 10.02.23 00:54

    한반도의 백제와 건안고성의 백제를 동급으로 취급한 당의 시각에서 쓰여진 양당서에는 백제의 영토가 발해와 신라에게 양분되었다는 기록이 있을 수밖에 없지요. 건안고성으로 옮겨진 웅진도독부 백제 가지고 대륙에 백제가 있었다는 것은 성립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 10.02.19 12:48

    무녕왕릉 지석을 보면 마지막에 부종율령(不從律令)이라고 적혀있죠.
    이 말은 율령(律令, 법률의 총칭)을 따르지 않는다는 뜻이죠.
    백제가 왕의 제사를 모심에는 나라의 제사(정부가 주관하는 제사)로 백제의 법령과 격식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 맞을 터인데 따르지 않겠다니 이게 무슨 뜻인지 정말 이해하지 못하다는 것인지...
    무녕왕릉 지석의 발견은 무녕왕 사마가 묻힌 곳이 백제땅이 아님을 오히려 증명하는 것이죠.
    이런 점을 이해하고 무명왕릉 지석을 처음부터 다시 해석해 보시기 바랍니다.

  • 10.02.20 01:07

    아니?. 무녕왕릉 지석이 아니라 태왕비의 지석 후면의 내용인데 마지막에 부종율령(不從律令)은 돈1만매로 토지를 구입해서 왕비의 능을 만들었기에 문서를 작성하여 증거로 삼으며 (이 묘역에 관한 한) 모든 율령(律令)에 구애받지 않는다.라는 내용인데 뜬금없이 백제의 법령과 격식으로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는 것은 무슨 말씀이신지요?

  • 10.02.21 12:12

    무녕왕과 왕비는 같이 묻혀 있고 왕비는 다른 곳에 묻혀 있다가 이장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님의 말씀대로 부종율령이라고 한 것은 왕비의 지석에 해당하는데, 하필이면 왕비의 지석에는 율령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 하였을까요?
    무녕왕은 나라의 제사를 받고, 같이 묻힌 왕비는 나라의 제사를 받지 못한다는 뜻일까요?
    그럴바에야 왕과 왕비의 무덤이 따로 있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닐까요?
    왕비의 무덤을 굳이 옮겨서 나라의 제사법에 의한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 10.02.21 21:00

    우선 율령(律令)이 무었인지? 따져야 할 것 같군요 율령이란 보편적으로 오늘날 형법정도로 보시면 되는데 율령에 나라의 제사가 왜 끼어드는지? 그것이 이해가 안되는군요..태왕비능을 만들때 무녕왕릉에 합장하는 과정에서 여러모로 율령(형법)법에 저촉되는 요인을 태왕비에 한하여 아예 율령에 저촉을 받지 않고 묘지를 만들기 위한 조치의 내용으로 보입니다만...우선 율령(형법)과 제사는 무슨 상관이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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