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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번 강의
2007년 십자가 마을 겨울 수련회 강의 : 이근호 목사
주제 :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8장 9-10절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이렇게 해서 우리 몸을 마치 제 2의 예수의 몸으로 간주해서 성령께서 다루십니다.
엄마가 큰아들 옷 입힌다는 핑계로 둘째아들 옷 입힐 때, 엄마가 둘째아들 옷 입힐 때는 마치 큰아들 옷 입힐 때와 똑같은 감정으로 둘째아들 옷 입히는 거예요.
성령께서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가 하면, 우리를 제 2의 예수로 사용해서 예수님께 일어난 십자가 사건을 우리한테 되풀이하고 반복해서 적용하려는 그런 의도로 성령이 오는 겁니다. 이것도 모르고 성령을 논할 때, 자기 구원 받은 것만 자꾸 생각하면 안 돼요. 내가 구원 받고자 해서 성령 믿어야겠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성령께서 예수님 다루듯이, 초창기 예수님 공생애 때 성령이 왔을 때 성령께서 예수님을 다뤘습니다. 누가복음을 보세요. 성령의 능력이 임해야 병이라도 하나 낫게 해줘요. 자기 힘으로 낫게 못합니다. 성령이 임해서 낫듯이, 이제는 성령님께서 예수님 다루듯이 지금 우리를 다루는 거예요.
궁극적으로 우리 속에서 뭘 다루느냐? 예수님 십자가의 능력이 너희에게도 해당되고 효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를 죽이시고 다시 살리시는 겁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속에 있으면 너희 죽을 몸도 그리스도 영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게 된다는 거예요.
성령께서 자꾸 실습하는 겁니다. 우리를 가지고.
여학생들 가정 시간에 카스텔라 하나 만들고 나면 온 집안에 카스텔라가 넘쳐나요. 실습한다고. 옛날 제가 자랄 때 고모들이 많아서 고모들이 가정실습하면 카스텔라 냄새가 천지를 진동합니다. 계란을 몇 개나 깼는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집안에 카스텔라가 넘쳐나요. 계속 실습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령 믿고 나 구원 받았다. 그 소리 하지 마세요. 성령이 우리를 가지고 노는구먼. 이렇게 보시기 바랍니다. 그 안의 핵심이 뭐냐? 우리 안에 들어오는 컴퓨터 칩이 뭐냐? 예수님께 해당되는 모든 천국과 영생과 복락을 이제 우리에게 집어넣는 실습을 감행하시는 분이, 주동자가 누구냐?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우리기도 안 들어주고 성령이 주의 뜻대로 기도해서 예수님의 기도와 그 기도를 포함시켜서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시는 것. 이 코스가 예수님이 먼저 하신 코스 아닙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서 걸은 코스 아닙니까. 예수님의 코스를 그대로 가져다 적용시키는 그 재미가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재미예요.
이러나저러나 우리를 쫄따구(졸병)입니다. 성령님의 쫄따구에요. 내 인생 내 마음대로 못합니다. 내 커피는 내 마음대로 하지요. 설탕도 내가 원하는 만큼 넣고 할 수 있는데, 내 인생은 내 마음대로 못해요. 성령께서 예수님 다루셨듯이 이제 우리를 다루시는 거예요.
어디까지 실험하고 실습하느냐? 우리를 죽여 놓고 살리는 겁니다. 매일같이. 매일 실습해요. 그래서 고린도후서에 보면, 죽음의 힘이 우리한테 역사하고, 예수님은 또 우리에게 생명으로 역사합니다.
고린도후서를 봅시다. 우리 안에 카스텔라 냄새가 진동합니다. 4장 11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보세요. 우리 살아 있는 사람을 성령께서 맨날 죽여요. 그것이 성령께서 했다는 증거가 어디 나오느냐? 8장에 나와요. 주님의 능력이 우리한테 임하면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것을 죽음에 넘기고, 그러니 우리는 뭐냐 하면 우리는 맨날 청룡열차 타고 바이킹 타는 거예요.
어린 동생들 그네 태울 때 얘는 얼굴이 파랗게 질립니다. 언니, 내려줘. 내려줘. 해도 안 내려 줍니다. 야, 재밌지, 재밌지? 하면서 더 세게 밀고 당깁니다. 얘는 엄마야~ 하고 우는데, 언니는 계속 재밌지, 재밌지? 얘를 나중에 그네에서 내려놓으면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립니다. 그래놓고 언니는 흐뭇해하며 엄마, 나 오늘 동생하고 재미있게 잘 놀았어. 하고 있습니다.
지금 성령님께서 그러고 있습니다. 죽어라, 죽어라. 사는 게 재미있지? 우리는 하나도 재미없고 아슬아슬한데 성령께서는 실컷 그네를 밀고 당기면서 우리 몸을 죽음에 넘기고 십자가 은혜를 통해 다시 살게 하고 하면서 재미있지, 재미있지? 하면서 범사에 감사하라. 이러고 있어요. 우리는 돈이 있어야 감사한데 돈은 안주고 밀고 당기면서 감사하라고 해요.
이런 관점으로 로마서를 보시면 그 다음 8장부터 나오는 성령의 주도권이 이해가 됩니다.
성령이 주도권을 쥐고 이제 8장부터 시작되는데, 주도권을 쥐는 그 밑바탕, 신학적은 근거는 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의 육신을 누가 다뤘느냐? 성령님께서 다뤘지요. 그러면 오늘날 우리 성도는 육신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성도의 육신을 누가 다루시는가? 성령께서 다루신다. 어떤 내용을 집어넣느냐? 예수님이 이 땅에서 고난 받고 죽었다가 부활하신 그 모든 것, 고난과 승귀라고 하지요. 출생하심과 그리고 인도하심과 죽으심과 그리고 승귀하심. 그리고 모든 치욕과 영광을 성령께서는 육신 된 우리에다가 집어넣는 이 작업을 이제 하시는 겁니다.
요단강에서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 음성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했지요? 여기에 아들 개념이 나옵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예수님만 아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을 받은 우리가 바로 아들이 됩니다. 아들의 영 다른 말로 하면 양자의 영, 예수님은 맏아들이고 우리도 아들 혹은 양자로서 예수님을 본받는 자 되도록 성령께서는 그렇게 되도록 그네, 청룡열차 태우면서 재밌지, 재밌지? 하며 이끄시는 겁니다.
따라서 그 아들이 갖고 있는, 아들이기 때문에 받는 보너스는 무엇과 다른가 하면, 종일 때, 율법의 종일 될 때의 보너스와 영 딴판입니다. 이제 더 이상 종이 아니고 아바 아버지라고 부름으로 말미암아, 비록 지금은 예수님이 가신 그 코스를 가느라고 고난이지만, 18절에 보면 지금은 고난이지만 장차 올 영광은 지금의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근거를 대지요. 그 근거가 뭡니까? 이미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심. 그 외에 다른 근거는 없습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떤 큰 교회 목사 잘 사는 것 그것을 모델로 삼는 것이 아니고, 고난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델 삼아서 제 2의 예수님 제 3의 예수님으로 계속 새끼 치는 그 일로 우리를 위로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같은 경우에는, 성령이 임하면 고난 가운데 기뻐하라. 그리스도가 주신 약속을 인하여. 그럴 때 너희들이 비로소 성령이 너희들 머리위에 임함을 너희가 알리라. 이렇게 되어 있고, 스데반 집사님이 돌아가실 때는 성령이 충만해서 돌아가셨지요. 성령에 충만하니까 자기의 죽음도 큰 문제가 아니었고, 그리스도와 연합한 상태를 즐거워했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 이것을 가지고, 다른 육신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23절)고 했습니다.
8장 나머지부분은 전에 강의에서 군데군데 했습니다. 여기에서 특별히 주의할 것은 33, 34절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송사하리요라는 것은 송사할 수 있는 여건 속에 너희들이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송사당하고 고소당해도 이미 택하신 자한테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보가 그 속에 입력되었기 때문에 어떤 경우도 너희들을 죄 있다. 지옥 간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더라도 그것은 그리스도를 집어넣는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너희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가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끊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어떤 것도 끊을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34절을 보면,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이 말이 앞뒤가 안 맞지요? 다시 한 번 봅시다. 빨리 나간다고 능사가 아닙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이 뒤에다가 다음 문장을 완성시키시오. 라는 논술 시험이 나온다고 칩시다. 누가 당신을 정죄하리요. 그 뒤를 괄호로 둔다면 대부분 사람들은 뭐라고 쓰겠습니까? 나는 이미 의인이다. 보통 이렇게 쓰겠지요.
누가 너희를 정죄하겠느냐? 너희는 이미 예수님 때문에 의인 되었는데 이렇게 되어야 문장이 자연스럽게 흘러가잖아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렇게 안 되어 있어요. 이렇게 되면 틀린 거예요. 이렇게 되면 성령께서 의도했던 바가 아니란 말입니다.
성령께서 의도하는 바는 누가 성도를 정죄하겠느냐? 너희들이 구원 받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너희 안에 너희를 향한 목적을 가진 분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죽으실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누가 너희를 정죄하리요. 해놓고, 우리가 우리를 변명하거나 책임질 위치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에 누가 너희를 정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정죄 당하지 않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 능력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구원 받아야만 하는 그런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처량하다는 말이 이상한데.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은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있는 피조물이지 피조물 좋으라고 창조가 있는 것은 아니에요. 주객이 전도되면 안 됩니다. 거꾸로 바뀌면 안 돼요. 이것을 바꾸겠다고 해서 금지한 법을 넘어서 우리는 잘난 체하지만 하나님은 다시 원상복구해서 우리(피조물)로 하여금 철저하게 창조주를 보여주는 그런 증거물로만 삼습니다.
이것이 로마서 9장에 보면 나옵니다. 21절 이 구절 모르는 사람 없을 거예요. 우리를 뭐로 보느냐 하면, 토기장이에 의해 지음 받은 하나의 그릇으로 봅니다. 이 그릇 자체는 별로 영광스러운 것이 없어요. 다만 토기장이가 토기를 만들 때는 토기를 고려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고 토기 좋아라고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만 토기장이의 원하는 바만 담기면 그릇은 어쩔 수 없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도 어쩔 수 없이 그 담긴 그릇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그릇은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제 3의 그릇은 없습니다. 반은 담기고 반은 아니고 그런 것은 없어요. 한 그릇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랑을 담는 자비의 그릇이고, 그릇을 보면 자비가 막 튀어나와요. 다른 그릇은 하나님의 진노가 막 나와요. 이 두 종류 외에 다른 그릇은 머릿속에서 버리세요. 제 3의 종류는 없습니다. 텅 비어있는데 내가 알아서 넣는 것은 없습니다.
이미 채워진 대로 있는 그릇뿐입니다. 만약 항의가 들어오면 어떻게 하는가? 항의가 안 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저쪽에 있는 진노의 그릇이 이쪽에 있는 자비의 그릇을 눈치 채면 항의가 들어오겠지요. 토기장이님! 저로 하여금 왜 저 자비의 그릇처럼 안 되고 진노의 그릇으로 만들었습니까? 하겠지만, 고맙게도 진노 받을 그릇이 관심이 없어요. 하나님의 선택에 관심이 없어요. 자기 신은 자기가 선택했고 자기 메시아는 자기가 골라 선택했고 예수도 자기가 다듬어놓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별로 그런데는 관심이 없어요. 선택론 그것은 불합리하지. 하고 그냥 스쳐 지나가지요. 그런 불공평한 하나님은 나는 안 믿지. 이렇게 끝나버려요.
관심이 있어서 길길이 뛰는 사람은 구원 받은 성도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에요. 의심을 해서는 안 되지만. 이런 사람들 있어요. 000씨. 우리 김대식씨를 밤새 애먹인 사람 있어요. 목사님, 저 지옥 갑니다. 어쩌면 좋겠습니까? 다른 지옥 가는 사람 보란 말이지요. 지옥 가는 사람 같으면, 기독교 그것 인간 만드는 거잖아. 예수 그 사람 죽었잖아. 나와 무슨 상관 있는데. 이렇게 나올 때 지옥 간다고 하지, 하나님이 선택 안 하셔서 내가 지옥 가면 안 되는데 -- 이렇게 나오면, 자기 믿는 것 자랑하는 것인지--
그래서 마음껏 선택론을 해도 여러분 누구한테 욕 안 먹습니다. 왜냐하면, 아예 선택론 같은 것은 불합리하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은 없다는 것입니다. 잘 하면 복 주고, 바쁜 짓 하면 벌주는 하나님이지 어떻게 미리 선택하셔서, 아무리 착해도 지옥 보내고 아무리 나빠도 천국 보내는 그런 불합리한 하나님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로마서 9장을 봅시다. 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또 다시 아브라함 이야기를 끄집어냅니다. 하여튼 지독해요. 사도 바울이. 계속 아브라함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도 마찬가지고. 계속 아브라함을 이야기했고 아브라함 나오면 덩달아 사라와 하갈 세트가 나옵니다. 맞습니까? 맞지요.
아브라함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7절)
이와 같은 원리가 어디에 그대로 적용되느냐 하면, 놀랍게도 야곱에게 적용됩니다. 여기서 여러분 언약의 신비로움을 한 번 들어보세요.
야곱의 아내 리브가가 아기를 못 낳는 불임여성입니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아기를 못 낳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삭의 인간적인 의도 같은 -아브라함 같으면 인간적인 의도로 이스마엘을 낳았지요. - 아예 하나님은 그런 인간적인, 육적으로 낳을 수 있는 기회마저 이삭에게는 박탈해 버립니다. 왜? 그런 실수는 이미 아버지가 다 했기 때문에 그런 재방송을 할 필요가 없거든요.
또 다른 새로운 드라마가 이삭을 통해서 펼쳐집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잉태했을 때 보니까 둘이 나올 때부터 싸웠습니다. 그러니 엄마 태중에서부터 얼마나 싸웠는지 태어날 때부터 머리카락 다 뽑혔을 거예요. 붙들고 싸운 채, -아직 3라운드 안 끝났는데 2분 15초 남았는데 - 나와서 밖에서 남은 시간을 싸우는 겁니다. 아마 산부인과에 그런 아기는 없을 거예요. 갓 태어난 아기가 울기 바쁘지 상대방과 싸우면서 나오는 아기는 없어요.
이것은 뭐냐? 아기는 부모 소유가 아니고 하나님의 소유로 오는데, 이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과 구원이 어떤 비밀로 이뤄진다는 것을 야곱의 태를 통해서 미리 앞서서 예언으로, 맛보기로 보여주는 겁니다.
여기에서 뭐가 문제냐 하면, 하나님이 아기를 원하는 리브가에게 문제를 던집니다. 이 둘 중에 누가 하나님께 인정받는 복의 상속자가 되겠는가? 문제를 던집니다. 그 문제 아무도 못 맞춥니다. 왜냐,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이 알아서 이루지 인간은 못 맞추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맞췄다고 우기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야곱입니다. 그 인간 죽어야 됩니다.
그래서 자기 힘으로 상속권 뺏겠다고 자기 처지를 비관하면서 팥죽으로 꼬시고 뭣하고 뭣하고 해서, 야곱의 특징은 나쁜 놈 중에 나쁜 놈, 다른 말로 하면 죄인 중의 죄인. 이것의 대변자로서 야곱의 육적인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 받을 만해서 사랑 받는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로마서 9장에 보니까 왜 하나님은 에서를 버렸느냐? 이것은 에서나 야곱이 태어나기 전에 하늘나라의 어떤 정보가 있었다는 겁니다. 에서와 야곱이 태어날 때부터 둘이 붙들고 싸우며 태어나는 이유는 둘이 어떤 행동을 하는가와 상관없이 하늘에서 이미 창세전에 결정 된 운명을 따라서 그들이 어떻게 결말이 이어지는지 똑똑히 한 번 보란 말이지요.
무조건 한쪽은 사랑 받도록 되어 있고, 무조건 한쪽은 미움 받도록 되어 있는데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인류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하나님의 확정된 원리라는 겁니다.
이런 하나님을 누가 믿겠습니까? 아무도 안 믿지요. 사랑받고 싶어서 사랑 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사랑했기 때문에 줄기차게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게 토기장이와 그릇의 비유로서 땅땅땅(의사봉 두드리는 소리) 이미 확정이 나버렸습니다.
결국 이 말을 앞서 있는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의 내용을 추리면, 인간은 가만히 있는데 성부, 성자, 성령끼리 설치고 나대고 해서 우리로 하여금 천국 백성 만들어 가는 드라마입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몇 월 며칠 태어나게 하옵소서. 이런 것 없어요. 그냥 창세전에 정보가 입력된 대로 태어나서 한쪽은 지옥 가는 코스로 가야만 하고, 한쪽은 천국 가는 코스로 가야만 합니다. 물론 이 둘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고 그 전쟁의 여파로 야곱은 고난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로마서 9장 11절에 보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태어나야 뭐 착하든지 악하든지 하는데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그러니까 선이다 악이다 하는 것을 인간 차원에서 뽑아낼 건덕지(건더기)도 없는 그런 입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오직 택하심을 따라서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본인이 알아서 성취하고 다만 적용되는 대목만 우리에게 적용될 뿐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지요?
로마서 9장 15절을 봅시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이것이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인간이 최초로 하나님을 독대했던 그 대목을 인용한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긍휼히 여길 자에게만 긍휼이 가고 은혜 줄자에게만 은혜를 준다. 아무에게나 주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은 분명하지만 사랑하기 위해서 만든 것도 아니고 은혜 주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중에 은혜 줄자가 따로 있고 미워할 자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창조주의 이 본성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다움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피조물을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취지로 하나님의 본성을 알려주시고 그 본성이 인간의 행위와 관계되지 않고, 그 다음 16절에 보면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나님이 은혜롭다는 것을 우리 안에 그대로, 택한 자에게 집어넣어 버려요. 성령께서 어떻게 한다고요? 우리를 가지고 바이킹 태우고, 그네 태우고 깜짝 놀라게 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살았던 생애를 우리 속에다가, 우리의 생애로 집어넣어 버려요. 우리로 하여금 죽음 속을 느끼게 해서 이런 죽음도 예수님의 피 때문에 우리가 거든히 영생 얻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쪽으로 사용하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이 스데반 집사고 사도 바울이고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맨날 믿느냐, 믿느냐?는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이 바보같은 바로, 이 바로는 조금도 강퍅할 마음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깔짝깔짝 약을 올려서 강퍅케 만들어요. 그 예가 뭐냐 하면, 사울이란 왕인데 그 사울은 다윗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좋아했는데 무슨 병이 들었는지, 다윗아 이리 오느라. 수금을 한 번 켜다오. [상하이 투위스트]가 듣고 싶구나. 아이고 잘 한다. 하더니만 창을 쥐고 갑자기 던져버려요. 그러니까 이 소년 다윗은 저양반이 미쳤구나. 생각하고 창을 피해 도망가니까, 하는 말이 다윗아, 미안하다.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희한해요. 자기도 왜 그런지 모르겠다는 것이지요.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 ~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몰라 [갈무리] 부를까요?
다윗아, 너는 나보다 의롭고 선하구나. 나를 죽일 수도 있는데 죽이지 않고 옷만 베었구나! 해도 소용이 없어요. 사울에게는 다윗같은 철천지원수가 없습니다. 이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왜? 우리는 이유 없이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예수 믿는 사람이지만 십자가 싫어하고 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싶어 하는 쪽으로, 자꾸 그 쪽으로 성경 해석하는 식으로 돌아갑니다. 하루 23시간 그 소리 하다가 갑자기 주의 은혜가 임하면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속에 사울이 계속 퍼지고 있고, 다윗 적인 요소도 하나님께서 주시면 계속 퍼지는 거예요. 우리의 활동성이 이렇게 있는 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하나님의 십자가가 들어오면 십자가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왜 십자가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원수인가, 왜 우리는 경건치 못한 죄인인가를 깨우치면서 그 옆에 십자가와 동행해서 십자가 피만으로 구원 받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철저하고 자기의 창조주 역할을 다 하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9장 27절에 나오는데 같이 한 번 봅시다. 야! 진도 빠르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라. 남은 자만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자칭 이스라엘이고 택한 백성이라고 할지라도 속아 넘어가지 말라는 말입니다.
첫 번째 했던 강의 다시 해 볼까요?
인간은 자연을 보고, 혼돈을 보고 나름대로의 것을 굳히기 위해서 형식을 동원하는데 여기에 합리적 이성이 동원되지요. 이렇게 해서 굳히기를 하는데, 여기에서 새로운 변화가 오면 이것을 수정해서 플러스 알파, 메타 형식으로 더 나아가려고 합니다. 여기에 굳혀진 것이 우상이고,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전체 왕들이 이스라엘 자체를 우상시해요. 이것은 내 나라다. 나는 왕이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는 이 나라 왕이다. 그래서 우리아가 죽잖아요. 다윗은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왕이시구나! 하고 스스로 형식 만들었음을 자인합니다.
인간은 어떤 것을 자꾸 소유하려고 하고, 그것을 모아서 내가 구원 받았음을 확정지으려고 자꾸 자기중심으로 형식화시키려고 애를 쓰는데, 성령께서는 우리가 생생히 살아있는 것을 떼어내고 거기에다 예수 그리스도의 한 평생을 집어넣기 때문에 여기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우리가 갈등을 일으킵니다. 이게 뭐냐,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자지요.
그 구체적인 것이 11장에 나옵니다.
3-5절에 보면,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말하지요. 그 전에 엘리야가 말하기를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사도 바울이 왜 이 대목에서 구약의 이 이야기를 집어넣습니까? 로마서 9장에서 지금 왜 하나님께서 율법 없는 이방인에게 성령을 주셔서 그들이 족히 의인되게 했느냐? 하는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겁니다. 그것은 참된 남은 자, 참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통해서, 자기중심으로 이스라엘을 만들고자 하는 것을 피해가는 방식으로 일하신다 이 말입니다.
쉽게 하면, 여러분, 예수님이 누구한테 당했습니까? 남의 백성에게 당한 것이 아니고 누구한테 당했습니까? 바로 유대인들에게 당했잖아요. 그 당함을 그대로 집어넣는 자가 하나님의 남은 자, 마지막 최후에 남은 자들에게 이 사건이 그대로 들어온단 말입니다. 그 중 한 사람 엘리야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만 남았습니다. 아니다.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는구나.
하나님의 능력은 어떤 상황이라도 7,000명은 남기는 그만한 위력이 있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그동안 유대인들이 내 구원을 위해서 얼마나 수고했는가? 그러나 이것도 다 자기 구원에 아무 소용없는 헛짓이었단 말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10장에 나오지요.
2-3절을 보면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이왕 구원 받은 나라는 존재를 더욱더 굳히기 위해서 열심히 애를 쓰는데 그것이 바로 진짜 하나님께서 원했던 그 이스라엘은 아니올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네가 어떻게 하는가? 그런 것 신경 쓰지 말고, 주께서 너에게 어떤 주님으로 네게 다가왔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난데없이 누명을 쓰고 로마에 갔습니다. 자기가 로마로 갈 때 주께서 억지로 데리고 가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로마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을 이용한 것입니다. 심지어 바울이 가다가 전도까지 해요. 전도하는 입장이 높은 자리가 아니라 자기는 완전히 얻어먹는 자리에서 독사에게 물렸을 때 토인들이 자기들끼리 감동을 받아서 오! 신이시여, 하늘에서 내려오셨군요. 하고 감동을 하니까, 그 때 바울이 아, 또 복음 전해야 되나? 하면서 전하니까 믿는 자가 발생하고.
사도 바울은 느긋해요. 복음을 전하는데 유대인이 왔을 때 그냥 복음 전하니까 갈 사람은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울이 하는 말이 성경 말씀대로 되는구먼.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구나. 이 화평교회 사람들아.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이 주님 은혜요, 나의 갈 길을 주께서 인도하셨기 때문에 내 평생 달려갈 길 다 달렸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자기가 달린 것이 아니고 주께서 몰아세우는데 자기도 어쩔 수가 없는 겁니다. 이게 바로 남은 자예요. 계속해서 은혜예요. 자기 열심은 이해하지만 그게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가 나에게 일을 시키니까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거예요. 방종이 있을 수가 없어요. 방종은커녕 방귀도 제 마음대로 못 낀다.
주께서 간섭하시는 한 계속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게 뭐냐, 자기가 따로 신비를 찾을 필요 없어요. 예수님이 날 떠나지 않는 자체가 신비예요. 신비를 따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로마서 10장 6절 이하가 상당히 어려운 말씀이라고 하는데 어려울 것 없어요. 6절을 보면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이게 무슨 뜻입니까? 100번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몰라요. 횡설수설 하는 것 같아요.
이게 뭐냐 하면,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다고 하니까 주여, 저도 하늘에 올라가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지옥을 갖다 왔다면서. 그러면 저도 지옥에 가게 하옵소서. 이럴 필요가 없다 이 말입니다. 음부의 세계에 간 것도 주님이고 천국 간 것도 주님이라면 주님께서 네 코앞에다가 말씀을 주었단 말입니다. 그 말씀 안에 천국을 안 가도 눈으로 안 봐도 지옥 안 가도 그 말씀 들으면 양쪽 다 엘리베이터가 연결되어 다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믿으면 그것이 주님과 교류하는 매체가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로마서 10장에 대학교 C.C.C나 네비게이트에서 좋아하는 구절 있지요? 9절에 보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나, 주님 만나서 주님의 변화된 것을 볼래. 변화산에서. 나, 지옥 가서 주님께서 전파한 것을 볼래. 나도 동참해서. 이러지 말고 십자가가 네 눈앞에 있는데 누가 너희를 꾀더냐 하는 식이에요. 다른 증거 필요 없습니다. 주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을 믿으면 이미 그것으로 최종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확증된 거예요.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이미 죽은 자며, 주께서 이미 살아서 나에게 믿게 했구나. 이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다 알 수 있는데, 딴 것 신비적인 체험을 찾고자 애를 쓰느냐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절도 마찬가지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하는 것과 같은 차원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주라는 것은 십자가 지신 주님, 죽었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말하는 겁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한 군데 찾아봅시다. 로마서 17장 30절. 제가 아주 이 대목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갈수록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로마서는 17장 없습니다. 사도행전 17장 30절입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제가 이 말씀 좋아하는 이유가, 하도 현대인들이 바빠서 교회를 안 나오고, 갈수록 교회 나오던 사람도 안 나오고 제 마음대로 살기 때문에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천지를 몰라요.
어떻게 돌아가는가?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그 증거가 뭐냐, 기준이 뭐냐 하면,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신비적인 체험을 못하고, 꿈에 예수님을 안 만나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으면 구원 받기로 작정된 그런 시대 속에 우리가 지금 놓여 있어요. 그런데 건방지게 현대인들은 십자가를 코앞에 들이대도 그것 옛날이야기 아니야. 옛날이야기 왜 내게 해. 나 지금 바쁘단 말이야. 하면서 외면해 버립니다.
옛날에는 허물치 아니했어요. 세종대왕은 허물치 아니했습니다. 강감찬, 주몽 다 봐 줬어요. 하지만 이제는, 주몽같은 경우에는 삼족오가 그려진 깃발만 흔들고 소서노와 연예만 하면 되지만 지금은 그것이 다 허물이 되는 시대에요.
따라서 십자가 모르면 교회 목사가 아니라 총회장이 되어도 소용없어요. 이번에 총회장 되신 분이 있습니다. 정락원(울산 목양교회 담임) 목사님이 총회장 되었습니다. 십자가 모르면 소용없어요. 이것은 제가 정한 것이 아니에요. 마지막 때에는 심판 날을 작정하시고 매듭을 지었어요. 더 이상 봐주는 것 없습니다. 최후로 내민 카드가 뭐냐 십자가 믿을래, 안 믿을래? 이거예요.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면 믿어버리면 산단 말이야. 왜 이걸 안 믿어. 이런 식으로 마지막 들이대는 겁니다. 막 들이대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누가 들이댈 수 있느냐, 누가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사람은 못합니다. 사람으로는 그런 복음을 못 전해요.
로마서 10장에 보면 주께서 보내신 자가 따로 있어요. 이것은 목사가 아니고 성도 전체를 말합니다. 주께서 보내지 아니하면 누가 전하리오. 이 말은 보냄을 받은 자는 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보냄 받은 자가 전도할까, 말까? 망설이는 자가 없습니다. 반드시 주께서 보낸 사람은 전하고 싶어 환장해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하고 싶어 환장해요.
그 전도의 내용은 뭡니까? 마지막 심판 때를 앞두고 전도의 내용은 뭡니까? 교회 부흥입니까? 복 받는 겁니까? 뭡니까? 오직 뭐 밖에 없어요? 죽었다가 살아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이것만 전하는 거예요. 1장에서 복음에 빚진 자란 말은 바로 이 말입니다. 말씀 성취를 말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10장에서 16장까지의 말씀은 간단하게 한 마디로 끝내버려요. 모든 나오는 은사, 서로 섬기고, 어떻게 하고 하지만 이 모든 은사가 뭐와 연관되어 있습니까? 십자가의 정신과 연관된 은사만 은사가 되지, 십자가를 못 보여주는 은사는 교회 단합대회지 그것은 은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10장 13절을 봅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이 말을 사람들은 듣게 해 다오. 이렇게 나오지요. 그리고 누가 전해야 믿지. 듣겨야 믿지 이런 말 아닙니까. 전파하는 이도 있어야 할 것 아니냐는 거지요.
사람들이 핑계 댈 내용들을 사도 바울이 미리 다 이야기해요. 너희들 이런 이야기 하고 싶지? 하고 대신해서 다 하는 겁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그러니까 진짜 전도하는 사람은 내가 하고 싶다.가 아니라 주께서 보내셔서 내가 우편배달부로 당신에게 봉사하는 차원에서, 무엇을 도와드릴까 하는 차원에서 당신과 나는 만나게 되었습니다. 무슨 인연인지, 이 세상에서 무슨 인연인지 이렇게 만났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로마서 11, 12, 13장 이것을 가지고 교회 은사입니다.
교회에 밥 퍼는 봉사를 하든지 청소를 하든지 점심 식사 당번을 하든지 교회 형광등을 갈든지 간에 항상 그 정신은 뭐냐 하면, 나는 형광등 갈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고 보내신 분이 나로 하여금 형광등 갈라고 해서, 보내시는 분을 증거하는 입장에서 하는데, 그 보내신 분인 이미 이 땅에서 십자가 지신 분이다. 라는 쪽으로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은사를 주신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하는 일이 좀 어설프더라도, 믿음이 약하다고 형제를 너무 나무라지 마라. 주께서 그를 위해 죽었단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사람 대 사람의 만남으로 보지 말고,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면 이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누가 당신을 보냈어요? 나는 누가 보내셨다. 이 보낸 자가 일치될 때, 일치된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십자가지요.
옛날에는 허물치 아니했지만 지금은 허물하는 세상에서 우리의 만남이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요. 우리의 만남이 우연이 안 되려면 십자가 증거하는 식으로 만나야 되는데, 이것은 우리 힘으로 못하고 주께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하십니다. 왜? 성령의 은사기 때문에. 성령의 그네를 막 태우는 거예요. 우리는 깜짝깜짝 놀라는데, 재미있지, 재밌지? 하면서.
로마서 뒷부분에 나오는 모든 은사들은, 우리가 합시다. 합시다! 하면서 단합대회 하라고 준 것이 아니고, 이 마지막 시대에는 심판에서 면제되는 것이 십자가 밖에 없어요. 그 십자가 정신을 품고 청소를 하든지 권면하든지 모든 것이 십자가로 되어야 하는 겁니다.
당신 카드 보여라. 뭐고? 광땡인지 장땡인지 한 번 보여 봐라. 뭐 잡았는데 봉사하노? 그래서 서로 펴보니까 십자가에요. 이게 교회의 도박화.
아, 십자가가 있으니까 자기 영광 안 돌리고 봉사했구나. 저 권사님이 이번에 식사당번 하는데 십자가를 쥐고 있기 때문에 오뎅 국을 해 오셨구나. 맛이 있든 없든 간에 십자가 떠먹는 식으로 오뎅 국을 먹지요. 물론 다음에는 좀 더 맛있게 하면 되고.
이럴 때 그 교회에서 문제가 있을 수가 없어요. 먹는 사람도 십자가 대하듯이 대하고, 하는 사람도 십자가로 하는데 여기에서 어떻게 사람을 자랑합니까? 그리고 여기에 무슨 경쟁이 필요합니까? 피차 이 마지막 시대에 십자가 때문에 심판에서 피했는데.
이게 바로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한 성령을 마셨기 때문에 눈이 귀에게 너는 쓸데없다 못하고 또 손이 귀에게 쓸데없다 소리 못하고 우리는 하나의 사랑으로 하나 되었단 말이지요. 이 모든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계속 전파하면 평소에 십자가로 이미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 구석구석에서 나와요. 그런데 십자가라고 들고 나오는데 십자가를 전하니까 삐치는 사람들은 가짜 십자가입니다. 화투치는데 포커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펼쳐 보이라고 하니까 행함을 보이요. 이것은 갈라서야 해요. 십자가가 아니기 때문에.
여기 모인 사람 중에는 이런 분들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냥 십자가를 보여주세요. 목숨 걸고, 판돈 다 걸고 펴 보여주세요.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로마서 10장 18-19절을 보세요.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이 말이 굉장히 어려운데 어려운 이유가, 원래 이것이 노아 언약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노아 언약에는, 홍수 이후의 언약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쫙 깔려 있는 땅이에요.
창세기 9장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사철이 있고, 무지개 언약으로 이제는 물로 다시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있고, 이것을 은혜로 봤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의 복음의 그림자요, 모형입니다. 이제는 그 은혜가 사계절 은혜가 아니라 사계절 은혜위에 십자가 은혜가 덥히면서 이제는 말씀이라는 아주 폐쇄된 그 집단 내에 하나님의 노아 언약이 십자가화 되어서 우리에게 언약이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노아 언약에 대해서 십자가 쪽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죠.
그 다음 19절에 보면,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 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한쪽을 발로 차버리고 자기 백성 아닌 사람을 건져낼 때, 그것이 바로 어떤 의미에서 진짜 자기 백성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가짜를 척결하고 가짜라고 여기는 사람을 진짜 백성으로 만드는 이 작업. 이런 작업은 뭐냐 하면 결국은 우리 힘으로 우리가 보내심을 입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겁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자체의 능력이 있어서 우리를 계속해서 이 땅에서 십자가만 증거하라고 보내는 겁니다.
11장 봅시다. 안경을 쓰고 봅시다.
9장으로 뒤돌아 갑시다. 3절을 보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 이렇게 쭉 나옵니다.
그 다음 6절에 보면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그러니까 우리가 전하는 십자가 복음과 이 말씀은 인간이 아무리 방해해도 온 땅에 다 퍼져서 말씀대로 되는데, 우리가 오해하지 말 것은, 말씀대로 하면 말씀 듣는 사람이 구원 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그런 오해를 하지 말고, 그 말씀 속에는 차야 될 사람을 기어이 차서 지옥 보내는 말씀도 성취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망해야 될 사람한테는 복음이 악취가 되도록 하는 거예요. 십자가 복음이 망해야 될 사람은 향기가 아니고 악취가 되도록 그렇게 조치하는 겁니다.
아까 바로 이야기를 다시 하면, 바로가 참 불쌍한 사람이에요. 자기가 강퍅 안 하고 싶어도 강퍅해야만 되는 겁니다. 왜? 말씀이 그렇게 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사람이 저항한다고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반항한다고 천당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어떤 열심과 관계없이 말씀의 위력은 지옥 갈 사람은 지옥 보내고 천국 갈 사람은 천국 보냅니다.
이런 말씀의 위력으로만 우리가 구원 되었습니다. 라고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기 행함을 더 이상 자랑하지 않지요. 세상에 그런 사람이 누가 있느냐? 그것이 바로 성령님께서 그렇게 하고야 맙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성령님, 이제 우리를 예수님처럼 다루셔서 우리로 하여금 빼도 박도 못하게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도록 그렇게 조치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바로 선택론과 연관되면서 로마서 11장에는 참된 이스라엘, 온 이스라엘은 이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이것에 의해 이스라엘 된다.
마지막으로 11장 15절을 봅시다.
제가 참 좋아하는 말씀인데 사람들은 이 대목을 잘 몰라요.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십자가는 지금도 죽지 않았다는 겁니다. 십자가 그 방정식대로 지금도 하나님은 실시하는 겁니다. 자기가 죽어야 마땅하다고 느끼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이미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이 방식 외에 다른 구원의 방식은 성령께서 사용하지 않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참되게 남은 자 되고 구원된 사람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 공통점은 주께서 창세전부터 택정했기에 그 효력이 그대로 이어져서 이 땅에 태어나야만 하고 구원 받아야만 하고 십자가를 증거해야만 하고 마지막에 주님과 연합해서 영생 얻어야만 한다는 그 사실이 왠지 믿어진다는 것이 놀랍기만 합니다. 주께서 아브라함을 찾아 오셨고, 믿음의 조상께 찾아온 은혜가 있던 것처럼 동일한 은혜가 저희에게 찾아왔사오니 이 은혜를 귀하게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내일 1시간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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