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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鶴城都護府(학성도호부)를 아십니까? 원문보기 글쓴이: 무심(無心)
(약수문회 화전) ? 때 : 2008. 5. 18(일)
? 곳 : 봉안당 ? 이휴정 학성이씨 월진파 약수문회
◐ 화전 행사 안내 -------------------------------------------------- 1 ◐ 약수문회 연혁 --------------------------------------------------- 2 ◐ 봉안당 소개 ----------------------------------------------------- 3 ◐ 봉안당 조성문 --------------------------------------------------- 4 ◐ 약수문중 세계표 ------------------------------------------------- 5 ◐ 환영사 --------------------------------------------------------- 6 ◐ 축사 ----------------------------------------------------------- 7 ◐ 약수문회 선조 유사 ---------------------------------------------- 8 ◐ 봉안당 준공 ? 선조유해 봉안고유문-------------------------------- 18 ◐ 집성촌을 찾아서 ------------------------------------------------ 20 ◐ 거가요어 ? 독서규례 --------------------------------------------- 22 ◐ 주소록 --------------------------------------------------------- 25
▣ 때 : 2008. 5. 18(일) ▣ 곳 : 봉안당(10:30 - 11:00) ? 이휴정(11:30 - 16:00) ▣ 주요 행사 : 1부 - 봉안당 참배 2부 - 등록, 화전 개회, 중식 3부 - 윷놀이, 투호놀이, 여흥, 경품 추첨, 시상
▣ 주요 행사 시정표
◐ 1958년 봄 우산 할아버지댁 입구 ◑
약수문회장 흥 걸 반갑고 또 반가운 일가친지 여러분! 저는 약수문회장 흥걸입니다. 천곡댁 막내아들 우선 인사드리겠습니다. 신록이 짙푸르고 하늘이 더없이 맑은 5월에 바쁜 일 모두 제쳐두고 우리 문중 화전 행사에 참석해주신 친손들은 물론 딸네, 며느리, 외손까지 모든 성손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 행사에 기꺼이 참석해주신 채관 문회장님을 비롯하여 월진문회 임원님들께도 고마움을 표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을 이렇게 모두 한자리에 모셔놓고 보니 너무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기쁘기 한량없고, 반갑고 고마운 마음 그지없습니다. 특히 약수에서 나고 자라 시집간 지 수십 년 세월이 흐른 뒤에야 이렇게 모시게 된데 대해 송구스러운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한편으로 딸네들과 아울러 외손 여러분들이 이휴정을 찾아주신데 대해 환영하고 또 환영합니다. 이곳 이휴정은 여러분의 친정도 아니고 외가도 아니지만 세월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1800년 무렵까지만 해도 월진문중 모두가 이곳에서 월진촌을 이루며 7대 만석의 세도를 누리면서 명문가로서 행세를 해왔던 곳이니 조상님들의 고향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약수 이전의 우리들 고향이 바로 이곳이라는 말입니다. 저에게 고조부가 되는 [지]자, [회]자 못안 할아버지께서 이곳 팔등을 떠나 이원과 화정을 거쳐 약수에 정착하셨으니 우리들은 실로 약 200년만의 귀향을 한 셈입니다. 참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야 처음으로 화전을 엽니다. 대대로 약수에 모여 살았지만 대부분의 어른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고 새로운 세대가 빈자리를 채워가고 있습니다. 아직도 기껏 멀어야 열촌 이내건만 나누던 정이 예전 같지 않고 친정이나 외가를 찾는 분도 그 옛날의 약수를 기억하기 조차 어렵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너무도 변하여 조상님의 산소마저도 온전히 보전할 수 없었습니다. 조상님께 못내 송구스럽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문회를 재정적 안정 위에 운영할 수 있음과 동대산 능선에 가족납골묘를 조성하여 조상님도 모시고 후손들도 고향으로 돌아와 영면할 거처를 마련한 일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그 자체도 조상의 음덕일진대 이는 더욱 큰 음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동안 집안에 크고 작은 일이 많아 좀 더 일찍 이런 자리를 마련하지 못하였음을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이런저런 일들이 더러 있겠지만 오늘만큼은 모든 시름 다 내려놓으시고 그 동안 못다 한 정 많이 나누시기 바랍니다. 오늘 행사를 위해서 나름대로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처음 하는 일들이라 부족한 부분이 많을 것입니다. 너그러이 이해하시고 즐거운 시간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08. 5. 18
월진문회장 채 관 오늘따라 이렇게 좋은 날에 약수 문중에서 이런 성대한 화전 행사를 갖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족친뿐만 아니라 딸네, 췌객, 외손까지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 화전을 갖는다는 것이 현 시대에는 매우 어려운 일인 만큼 참 대단하다는 생각과 아울러 한편으로는 부럽기조차 합니다. 일가는 백대지친이라고 하는데 사실 우리 월진 문중은 여러 대로 외동으로 이어져 와서 그저 멀어야 스무 촌 남짓 하고 지금도 세대수가 400여 집으로 추산됩니다. 월진 문중원 모두가 이휴정 할배 형제들의 후손들이고, 약수문중은 이휴정 할배의 막내아들이 대를 이었습니다. 오늘 행사를 하고 있는 이곳 이휴정은 바로 여러분 모두의 조상님 정자입니다. 마음 편히 이용하시고 마음껏 자랑하십시오. 이 정자는 등록 문화재입니다. 처음 이휴정 할아버지께서 이 정자를 세운 지가 350여년이 지났는데 세월이 흘러 유허지만 남아 있다가 1940년에 울산초등학교 확장하면서 유서 깊은 남문이 헐릴 때 체목과 기왓장을 우리 문중에서 사와서 정자로 복원했으므로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다가 불행하게도 2003년 9월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복원되었습니다. 옆에 있는 용연서원도 그렇습니다. 1737년에 우리 학성이가 시조할아버지 사당을 세웠는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보존하지 못하다가 다시 세운지가 7년이 되었습니다. 조상님의 산소나 유적을 보존하는 일은 후손으로서 마땅한 일이고 자손 대대로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약수문중도 3년 전에 봉안당 낙성식을 할 때 저도 갔습니다마는 조상의 유업을 지키려는 노력들이 참 놀랍습니다. 일찍이 약수 일가들은 우리 월진 문중에서 큰 역할을 해왔습니다. 우리 문중이 약 200여 년 전 어려움을 당하여 동서남북으로 흩어질 때 [지회] 할아버지께서 약수에 정착하신 지 그리 오래지 않아 아들인 [형]자, [재]자 이원 할아버지께서 가세를 회복하기 시작하여 그 아랫대 네 형제분이 문중 출입을 하셨고, 그 이후로도 [민]자, [수]자 우산 할배를 비롯하여 꾸준히 월진문중을 주도하고 있는 분들이 바로 약수 일가들입니다. 특히 [경]자, [조]자 연동 할배와 산막등 쪽의 [경]자, [권]자 학남 할배는 당대 최고의 선비들로서 울산지방 대표 유림들이라고 향안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시 그 조상에 그 후손들이라 우리 문중뿐만 아니라 울산의 자랑인 [한호] 총장을 배출했으니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오늘 행사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 월진문중의 소문중으로서는 처음으로 이곳에서 화전을 열고 있습니다. 정말 자랑스럽고 고맙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 모두 오늘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감사합니다.
2008. 5. 18
▶ 본 글은 1997년에 큰집에 보관된 자료를 열람한 후 여러 족친 제위께 알리기 위하여 작성한 것인데 이번 화전 행사를 준비하면서 내용을 보완하여 싣습니다.(작성자 정호 註) 1. 시작하면서 약수문중의 중조인 휘 일민祖께서 몰(歿)하신지 어언 220여년, 그러니까 조선 영조시대부터 시작된 우리 일문은 특별히 벼슬길에 오르거나 뚜렷한 행적으로 알려져 있는 분이 없기 때문에 후손들은 조상의 내력을 제대로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저 족보상에 휘, 배, 생몰년대, 묘소위치 등이 해독이 어려운 한자로만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한 때는 가세가 상당했다는 이야기도 찢어진 가난 속에서 자란 우리 후손들은 전설로만 들릴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근간 저는 조상에 조금씩 관심을 가지면서 큰집에 있는 빛바래고 먼지 쌓인 여러 가지 문건들을 찾아 곰팡이 냄새를 맡아가며 어려운 한자를 해독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눈물겹게 반가웠고 지금까지의 궁금했던 일들을 많이 알 수 있었습니다. 이에 여러 족친 제위께 문중의 내력을 알고 조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과 후손들에게 알려줄 뜻으로 나름대로 분석하고 정리해 보았습니다. 식견의 부족으로 보존된 문건에 비해 충분한 분석과 해석이 따라주지 못함을 송구스럽게 생각하며 혹여 잘못되었거나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널리 이해를 바랍니다. 이 자료는 큰집에 소장되어 있던 문건들을 주손을 중심으로 작성하였으며 작성자 개인의 주관적 견해를 상당 부분 담고 있음을 밝힙니다. 2. 세계표 및 선조의 휘(諱)
* 위 표는 주손 중심, 호(鎬) 항렬 기준으로 작성되었음. * 산막등 집안은 16세에서 형제이나 재종숙에게 입양되었으나 약수에 계속 살아왔음. * 생가로는 17세에서 종반 간(7종반), 18세에서 재종반 간(9재종반)이 집안을 형성하였음.
3. 선조 일람표(21세 항렬 기준)
* 7-5대조(모) 산소는 2004. 3월에, 고조부(모) 산소는 2007. 1월에 봉안당으로 모셨으며 현재는 증조부모 산소만 약수 새양만리에 보존되고 있음. 입향조인 6대조 휘 지회(이원 할배) 할배 산소와 그에 딸린 산과 밭을 매각한 대금으로 문회가 운영되고 있음.
4. 고조부 형제 및 증조부 종형제 일람표
* 산막등 집안(지회 할아버지 2자 휘 영재 후손)의 가계 : - 경권(1842-1901, 학남조, 주사할배, 큰선비, 용산 아제의 증조부) →수학, 수장(후손 중국)→규걸→채홍→주호(일호), 상호→원우 - 경익(1846-1895, 상회)→수원→성걸(성동 할배)→채우, 종대, 채대 - 경문(1852-1903, 산막등)→수용→홍걸(후손 중국), 위걸(소정조), 덕걸(덕계조), 창걸(부산조) →수원(수호, 내산조)→장걸(유구조), 용걸(서울조), 생걸→채복 * 연동 할배께서는 집안의 어른으로서 남들에게 참사어른으로 불리었으며 문중의 일에도 많이 관여(농소, 서면파에 반론을 재기하며 소장을 내기도 하심)하시고 농소면장을 지내시기도 하는 등 큰일을 많이 하셨으며 우산 할배께서도 농소면장을 지내시는 등 선비로서 문사에 많이 활동하셨을 것으로 생각되나 문적이 보존되지 못하고 보고 들은 바가 없어 유사를 기록하지 못함.
4. 七대조 휘 일민(逸民)공 유사 ▶ 8대조 휘 여학(汝?)의 3子로 나셔서 조모 崔씨 사이에 1녀(창녕인 曺任臣)를 두고 일찍 상처를 하셨다. ▶ 영조시대인 1737년에 태어나시고 1778년, 42세에 돌아가셨는데, 내외분 산소가 옥동 도로변 안쪽에 있었으나 개발로 인하여 2004년 3월에 봉안당으로 모셨다. ▶ 월진문중은 8세 난은(難隱)공 시대부터 7대로 만석군을 누리며 명문가를 이루었으나 약 200여 년간의 영화를 뒤로 하고 이 시기에 월진 전 문중이 대부분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 후사가 없이 백씨(白氏) 달민(達民)조의 3子 지회(志晦) 할아버지를 입계시켜 오늘날 약수문중의 중조가 되셨다.
5. 六대조考 휘 지회(志晦)공 유사 ▶ 숙부에게 입양되어 흥려박씨 조모와 혼인 후 자식 없이 상처를 한 후 32세에 8년 연하인 김해김씨 조모와 재혼하여 2남(형재,영재) 2녀(월성인 이원기, 월성인 최사운)를 양육하셨다. 둘째 아들 영재(英載)조는 재종숙에게 입양되어 그 후손은 용산 아재(부산), 상회(온산 삼평), 내산 할배, 소정 할배(산막등)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 영조시대인 1771년에 나시고 순조시대인 1832년에 62세를 일기로 돌아가셨으며, 유품으로 호패와 인장, 서첩 등이 있는데 못안(북구 신천동)에 박씨 할머니와 나란히 누워계셨는데 지역 개발로 인하여 2004년 3월에 봉안당으로 모셨다. 옥동 도로 건너편에 계시던 후취 김씨 할머니도 함께 모셨다. ▶ 월평 팔등(현재의 신정동)에서 1800년 전후로 이원으로 이거를 하셨으며, 1830년경(60세 전후)에 화정으로 다시 옮기셨다. 월진문중 대부분이 이 시기에 농소 상안, 약수, 경주 백운대, 온산 신밤, 온양 귀지, 고산, 바리 등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거 동기는 궁핍, 역질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 조선 후기에 매 3년마다 조사한 호구조사표인 호구 단자(장적부 작성을 위한 자료)가 1810년부터 1908년까지 약 100년간 35매가 소중하게 보존되어 있다. ▶ 노비 2인을 거느린 기록이 있으나 살림은 매우 궁핍했던 것으로 보이며, 전답 구입(논 1805년 7두락 42냥, 밭 1826년, ?두락, 7냥)시 증빙자료 2매가 있다. ▶ 형제분을 두셨으나 할아버지의 손자 대(敬-洛 항렬)에서 일곱 분으로 손세가 벌었을 뿐만 아니라 재산도 늘고 인물도 나게 되었다.
6. 五대조(현조)考 휘 형재(亨載)공 유사 ▶ 순조조인 1810년, 아버지인 지회 할아버지가 40세이던 해에 나시고 철종조인 1863년에 54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는데 초명이 창(昶)에서 고(?)로, 다시 항렬에 맞추어 형재로 바뀌었다. 초혼 때만 해도 고(?)라는 이름을 사용하셨다. ▶ 지회公께서 돌아가시던 해인 1832년, 23세에 최(崔)씨 조모와 혼인하여 4년 만에 자식 없이 상처한 후 1840년경 약수로 이거하여 1841년, 32세에 12세 연하인 곽(郭)씨 조모와 재혼하셨다. 이때 살림이 무척 어려워 곽씨 조모께서 시집올 때 동네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바구니에 혼수품을 담아 이원에서 회양골 쪽으로 남몰래 시집오셨다고 전해진다. ▶ 곽씨 조모는 네 분의 고조부 형제를 두셨으며, 살림도 늘어났으니 자손도 늘게 되고 이 시기에 가세가 일어게 되었다. ▶ 혼인관계 문건 2매, 장적 10매, 논 구입 시 증빙자료 10매(약50두락, 800냥), 밭 구입시 증빙자료 1매(2두락, 7냥)가 보존되어 있다. ▶ 지회 할아버지께서 세상을 뜰 무렵 큰 아들인 고조부(휘 경복)만 성혼시켰고(22세), 나머지 세 분의 아들들은 각각 12세, 7세, 2세의 어린 나이였으니 네 분 고조부 형제분들은 처음부터 나이 차이가 많이 나셨다. ▶ 5대, 6대, 7대조 할아버지 모두 혼인 초기에 상처(喪妻)를 하셨으며(불행히도 이런 현상은 계속 이어졌다.) 늦게 후사를 얻었으니 자손이 귀하고 살림은 어려웠으나 5대조 시기는 약수문회의 새로운 시작이며 부흥기의 태동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7. 고조考 휘 경복(敬複)공(통정대부, 지당조) 유사 ▶ 1842년에 나시고 1907년 구한말인 순종조에 66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는데 초명은 일국(日國)이었으며, 4형제의 맏아들로 태어나 1858년, 17세에 18세인 고령박씨 조모와 혼인하셨다. ▶ 22세에 아버지를 여의고(외간, 1863년) 홀어머니를 모시고 어린 동생분들을 거두며 혼인 후 10년 만인 1867년에 후사(휘 수련, 산성조)를 얻었다. 38세에 어머니를 여의셨으며(내간, 1879년) 슬하에 1남1녀(달성인 서장철 : 정호의 큰외조부)를 두셨다. ▶ 선친(휘 형재, 이원 할배)께서 어렵게 일군 가세(유산, 논 50여 두락)를 잘 관리하시어 가문의 중흥기를 이루었다. 성실성, 재산 관리능력 등을 바탕으로 논 300-350두락, 밭 130-150두락, 산 6건(100-150냥) 등 3-40대에 이미 엄청난 부(富)를 축적하셨다. ▶ 80여건의 논, 밭, 솔밭, 갈대밭, 산 등을 구입할 당시의 증빙서가 보관되어 있다(별표 참조). ▶ 1886년 중보 논 도총기에 298두락, 37명의 소작자 명단으로 보아 주로 농장이 중보들에 있었던 것 같고 다른 지역(외동, 온산, 온양 등)에도 더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1886년 가을에 소작자 36명으로부터 532냥의 세수를 받았다.(당시 현물을 받지 않고 환전하여 받았으며 세수관계 자료가 일부 보존중이며 특히 집사이던 노(奴) 득용의 기록물이 많이 보관되어 있다.) ▶ 1897년 봄에 소작자 53명에게 204두락을 맡겼다는 기록과 그 해 화정지구에 24명에게 96두락을 맡겼다는 기록이 있는 바 그 시절의 반당 소출이 대체로 1.5석에서 2석으로 계산하면 오백여 석은 넘은 것 같고 거의 천 석에 가까운 소득이 있었던 것으로 추산된다. ▶ 자필 문서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큰 선비는 아니었지만 시를 좋아하신 것 같고(시첩 10여권 필사본, 자작 시첩 보관), 문제 해결력도 좋으셨으며(울산부사, 경주감영에 낸 청원서 5매 보존), 문사에도 밝으셨던 것으로 보인다. ▶ 24세이던 1865년에 못안 선영(조부모 산소)이 있는 산을 산주 정모(鄭某)로부터 사 들였다. 영영 산다는 증빙서가 보존되어 있다. ▶ 1902년, 회갑연(현재 이동화씨 집)에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그해 가을 나라에서(칙명-교지) 명예직으로 정3품 통정대부 벼슬을 내렸다. ▶ 생전에 친손자 네 분과 손서(천곡 왕고모부), 증손(1905년생, 4세 이후 조졸), 증손녀(경주고모)를 보았으며 부(富)와 덕망, 자손, 수(壽)를 두루 갖춘 복 받은 할아버지라고 볼 수 있다. 당시 혼맥이 울산에서 명문가로 알려진 만석군 산성 엄씨(며느리), 다전 서씨(사위), 경주 교촌 최씨(손부), 송정 박씨(손서) 등으로 미루어 가문의 전성기였음을 짐작케 한다. * 송정 박씨와의 혼사가 가장 많은 편이다. ▶ 생전에 바로 아래 동생(화봉조, 1891년)을 잃었으며 제수(연동조 전취, 1884년), 질부(가동조 전취, 1904년)를 잃는 아픔을 겪으셨으며, 지당 할배께서 돌아가신지 한 달 후에 장례 치르기도 전에 20세 연하의 막내 동생(학산조)이 돌아가셨다. ▶ 1907년 가을(음 9. 11)에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셨는데 소위 줄초상의 시작이었고 가세가 기우는 서막을 울리게 되었다. 석 달 만인 12월 8일에 상방 김씨 문중 산에 장례를 치렀는데 김씨들의 집단 항의방문 등 극심한 반대로 강동 화암으로 이장하였다. * 2008. 1. 17 지역개발로 인해 파묘하고 봉안당으로 모셨다. ▶ 손자인 겸듬 조부(휘 남걸)가 정리하신 만제초(輓祭抄)에 의하면 만사(만장에 쓴 시) 28편, 제문 8편(소상 때 3편, 대상 때 10편 별도)가 있었고, 장례 절차를 기록한 문안인 성복시의 절차, 안장시의 절차 등의 기록물이 보존되어 있다. * 만제초에는 고조부 내외분, 산성 할배가 돌아가실 무렵의 만사와 제문을 필사본으로 정리하여 보관되어 있다. ▶ 집사기에 의하면 장례가 거문중적이었다. 호상에 금호 할배의 조부인 경호조가 맡았으며 그 밖의 각종 유사에 집안의 큰 선비들이 맡았는데, 이때부터 네 분의 고조부 형제 중 유일한 생존자인 연동 할배께서 집안의 크고 작은 일들을 맡으신 것으로 보인다. ▶ 고조모인 숙부인 고령 박씨 할머니는 1909년 11월 23일에 별세하셨으며, 이듬해 3월8일에 농소 이원에 장례를 치렀고 1980년 무렵 고조부 산소에 합폄되었다가 봉안당으로 모셨다.
9. 증조考 휘 수련(樹鍊)공(산성조) 유사 ▶ 1867년에 종가의 외아들로 태어나셔서 성장기와 청장년 시절을 유복하게 보내신 것으로 보인다. 1886년 20세에 세 살 연상의 엄씨 조모와 혼인하셔서 4남3녀를 양육하셨는데 장남인 겸듬(휘 남걸)조와 장녀인 천곡 왕고모(박경동)만 성혼시키시고 돌아가셨다. ▶ 초명이 장원(章元)에서 상연(尙然)으로, 다시 수련(樹鍊)으로 개명되었다. 고조부께서는 작명에 매우 신경을 쓰신 듯 작명에 관한 초(抄)가 여러 편 보존되어 있다. ▶ 달골어른의 아버지(최성규)와는 이종 간이고 이휴정 할배 종손인 금호 할배의 아버지(휘 수일)와는 처 내외 종간이었다. 즉 금호 할배 댁은 친족도 되고 처외가도 되는 것이다. ▶ 41세 아버지를 여의고 43세에 어머니를 여의셨는데, 1910년 봄에 어머니의 장례를 치룬 후 넉 달 만인 7월 5일에 장티푸스에 걸려 세상을 떠나셨다. 그해 11월 7일 새양만리에 장례를 치렀는데 만사가 11편, 제문이 3편(소상시2편, 대상시 5편 별도) 전한다. ▶ 외간상 3년상을 벗자마자 내간상을 당하여 넉 달 간의 상주 역할로 몹쓸 병을 얻은 것은 아닌가 싶고, 3년여 짧은 기간 동안 가장으로서의 위치에 있었지만 상주의 몸으로 있었기 때문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하셨으나 유품으로 단계전(壇契錢) 유사 위촉장이 있다. ▶ 증조모 산성 할매께서는 외가와 시가가 모두 학성이씨 월진파 가문이었으며, 40대 후반에 영화가 끝나고 가세가 기울어 숱한 고생을 겪으시면서 남편보다 41년을 더 사시다가 1951년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 1908년의 호구단자(호적대장)의 내용 : *호주(이수련) *직업(사민, 士民) *나이(42세) *가택(초가 8간), *동거친속 → 모(박씨, 68세), *처(엄씨, 45세) *자(준걸, 남걸, 21세), (증개, 정걸, 15세), (증대, 장걸, 11세), *손부(최씨, 23세), *여(아지, 7세, 관문 왕고모), *장터 왕고모 누락, *손자(우생, 4세, 조졸), *손녀(아지, 2세, 경주 고모), *고용(노비 남2, 여1) * 1910년을 전후로 한 장례, 제례 행사 일람표 *
10. 王考 휘 남걸(南杰)공(겸듬조) 유사 ▶ 1888년에 5대 주손으로 태어나 큰 바위같은 조부모와 부모 아래서 유복하게 청소년기를 보냈으며 1902년 15세에 명문가로 소문난 경주 교촌에 나와 사시던 최씨 집안에 2년 연상의 겸듬조모와 혼인하셨다. ▶ 1905년에 첫아들과(5세쯤 조졸) 1907년에 첫딸(경주 고모)를 얻었다. 그 후 6남3녀를 두셨다. ▶ 1908년을 전후로 외동 석계에서 공부를 했으나(아버지께 보낸 서신 보존) 20세에 조부상, 22세 조모상, 23세에 부친상 등 집안의 초상을 당하시어(세 분의 탈상시 까지의 위문록 보존) 학업을 중단하고 경험 부족한 집안일을 맡게 되었다. ▶ 1907년부터 1912년까지 6년 동안 연이어 빈소가 차려져 있어야 했고, 특히 1910년과 1911년에는 한 집안에 두 곳에나 빈소가 있었다. 유교식 장례 절차에 따라 초상을 당한 후 3, 4개월 후 장례 치르기를 연속 3회를 거듭하니 집안일을 하는 사람이 매일 수십 명씩이나 되었고 수많은 조문객을 치르느라 가산이 소진되고 말았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조의금이 없었으니 빚이 상당히 생겼을 것으로 보이며 재산 또한 관리상에 구멍이 나기 시작 했을 것으로 보인다. ▶ 이외에도 선조의 기제사를 8회나 치렀으며 명절 차례와 명절 빈소 방문자까지 더하면 끊임없는 위선(爲先)사업으로 이미 살림이 기우는 해와 같았고 큰살림이 한번 기울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는 모습이 연상된다. 음지에서 자란 식물이 비바람에 약하듯 조부께서는 위기관리 능력이 부족한데다 산성 조모의 손도 컸다고 하니(내 복은 채로 쳐도 안 나간다?) 가문이 기울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그 후 형제들의 연이은 혼인과 분가, 일제의 수탈, 홍수(1915년), 가뭄 등이 이어졌을 것으로 보이며 조부께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과 전답은 물론 선영이 있는 산, 심지어는 사는 집이나 분가한 아우의 재물도 팔아넘겼으니 참담한 심정을 이기지 못하시고 자학의 길을 걷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 1912년경 양남 건대 산을 매입하셨음(매매계약서 보존).
11. 끝맺으며 참으로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나 우리 가문은 이렇게 흥망성쇠를 거쳐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연속된 장례, 제례, 혼인 등으로 가산이 소진된 데다 가뭄과 홍수에 의한 흉년, 빚보증으로 인한 재산 몰수 등으로 쇄락의 길에서 절망으로 내달아 1920년을 전후로 가정을 꾸릴만한 전답은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선대의 영화를 몰락의 한 가운데서 고통과 갈등, 한스러움과 참담한 심정으로 세월을 보내야 했을 할아버지께 원망에 앞서 깊은 연민을 느낍니다. 당시의 제도나 사회, 사람의 의식구조가 3대 부자가 없도록 되어 있었다고 여기고 싶습니다. 양반의 체통과 허위의식이 흥망의 순환을 재촉한 듯합니다. 조부님 대와 부모님 대는 가문의 쇠퇴기였습니다. 공부는커녕 생존에 허덕였었지요. 아우들인 종조부들께서도 고난을 겪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집안의 어른들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덕산할배께서는 가솔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이거했다가 해방이 되어 주검으로 돌아와 고향땅에 묻히셨고, 글이 좋으셨던 작은 증조부께서는 일본에 뿌리를 내리고 세 아들과 세 딸들은 일본인이 되었으며, 당신은 먼 이국땅에 묻히셨습니다. 5대조 (휘 형재) 대에서 가문이 서서히 일어나 고조부 대에서 가문의 부흥기를 이루었으나 국권이 일본으로 넘겨질 무렵 급격하게 집안은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일제의 수탈기와 해방 후의 혼란기, 6.25전쟁 등 역사의 침체기에 몰락한 집안을 꾸려야 했을 여러 조상이나 어른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할아버지 대와 아버지 대에서 찢어진 가난을 이겨내시고 자식들을 제대로 키워 내셨기에 오늘날 우리 후손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가정을 꾸리고 그리 부끄럽지 않은 위치에서 사회활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피나는 노력으로 자신을 우뚝 세운 여러 족숙, 족형, 족제에게도 큰 갈채를 보냅니다. 그러나 어려움에 시달린 사람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우리 부모대의 희생과 고난은 한으로 남아 가끔 서로를 원망하거나 자신을 가장 큰 피해자로 생각하고 울분을 터트리기도 합니다. 사실 더러는 잘못도 있었을 것이고 질책할 일도 있을 것입니다. 그간에 더러 있었던 풀리지 않은 고리들의 처음 원인은 할아버지 대에서 발생되었다고 봐도 좋을 듯합니다. 과거는 과거대로 흘러가게 하고 현재의 우리들은 화합과 돈목의 집안이 되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세월은 쉼 없이 흘러 어른들은 머잖아 물러갈 것이고 현대 사회는 점점 더 친족개념을 희박하게 할 것입니다. 차세대는 어쩌면 남이나 다를 바 없이 촌수도 자꾸 멀어지고 만나기조차 어려울 것입니다. 제 자신도 많이 부족한 사람이 감히 힘주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이제 한의 찌꺼기를 훌훌 털어버리자고 말입니다. 그래서 모두 용서하시라고 말입니다. 일가친지라고 해서 어찌 나의 마음과 같겠냐고 말입니다. 목소리를 낮추어 사랑과 용서와 양보와 화합의 길로 나아갑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생업이 중요하고 이웃이 좋고 동료와 가까워야 함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물보다 진한 같은 피를 나눈 같은 조상을 모신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가족과 부모 형제를 아끼고 참여와 화합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늘 바쁜 현대의 생활이지만 조금만 시간을 쪼개어 집안일에도 관심을 갖고 도와가며 얼굴도 한 번씩 봅시다. 조상님 덕분으로 오늘의 우리 문회가 있고, 또 우리가 함께 가꾸어나가야 할 선령님들을 모신 봉안당을 더욱 지성으로 가꾸어 나갑시다. * 보존중인 토지 구입 시의 증빙서 일람표
* (?) 표는 판독이 어려워 추정치를 기록하였음.
유세차 을유년(2005년) 3月 임술삭 초3일 갑자 학성이씨 월진파 약수문회장 흥걸은 향을 사르며 감히 밝혀 고하옵니다. 충숙공 예(藝) 할아버지의 14세손인 휘 일민(逸民) 공을 중조(仲祖)로 일문이 형성된 지 어언 250여년 세월이 흐른 오늘 우리 후손들은 한 자리에 모여 봉안당 준공과 선조 유해 봉안식을 갖고 있습니다. 긴 세월이 흘러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가고 있으며, 지역의 변천으로 선조의 유택마저도 보전?관리하기 어려워지자 선장(仙葬) 풍습이 도래하였습니다. 그렇다고는 하나 이렇게 한줌의 유해로 모실 수밖에 없음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송구스러움과 회한의 심중을 말씀드리게 됨을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받아주시기를 청하옵니다. 하지만 옥동, 제내, 약수 등지에 흩어져 있던 선령들을 정중하게 모셔와 후대에 전할 수 있는 온전한 묘역을 마련하지 못함은 후손의 미력함이요, 선조에 참으로 송구스러울지니 어찌 회한이 없겠사옵니까? 한편으로 세상 변천을 탓하며 여러 해를 보내며 평안히 모실 곳을 물색한 결과 여기 태백줄기가 마지막으로 용솟음치는 동대산의 호천위지 기호지세(護天衛地 騎虎之勢)한 곳에 터전을 잡아 봉안당을 조성하기 시작한지 어언 1년여, 마침내 준공을 보게 되었나이다. 그 동안 혹여 일이 잘못될세라 후손들은 노심초사 마음 조이며 성력을 다하였고, 장인들도 정성을 다하였지만 천지신명과 선령님들의 보살핌에 따랐기에 처음 도모한 일이 이루어졌다고 여기며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전해 올립니다. 사방을 살펴보건대, 동으로는 동해바다 넘실대며 끝없이 수평선 이어가고, 서로는 동천 강변 따라 천지개벽 세상 변천이 한 눈에 들어오며, 남으로는 굽이굽이 산세도 장엄하고, 북으로는 호랑이 걸터앉아 봉안당을 지켜주는 듯합니다. 하늘 아래 땅이요 땅 위로 하늘이라, 인간 세상 짧다지만 근원이 길면 흐름이 긴 것처럼, 덕이 깊으면 후손이 창성하리니 저희들도 조상님 따라 더욱 덕을 쌓아가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하늘은 부디 굽어 살피시어 이 터를 지켜 주시옵고, 땅은 부디 무른 곳 다져가며 숭고한 우리 조상님들 편히 쉬시도록 봉안당을 영원무궁 받아주시옵소서. 일월성신(日月星辰, 해와 달과 별)은 우리 선령님들이 후손들 보살피며 천지간(天地間)을 오르내리시는 길 밝혀주옵소서. 오늘은 우선 17위 분을 유해 또는 위패로 모셔와 봉안하게 되었음을 告하오며, 정성스레 약간의 음식을 진설하고 합동으로 제사를 드리옵니다. 중조 휘 일민공과 유인 경주최씨 신위, 약수 입향조 휘 지회공과 유인 흥려박씨 김해김씨 신위 , 다시 가세를 일으키신 이원할아버지 휘 형재공과 유인 경주최씨 유인 현풍곽씨 신위, 화봉 할아버지 휘 경근공과 밀양박씨 신위, 가동 아잠 휘 수윤공과 유인 고령박씨 유인경주이씨 신위, 매곡 형님 휘 삼걸공 내외분 신위, 일본 형님 휘 상걸공 내외분 신위께 삼가 맑은 술을 올리오니 강림하시어 흠향하시옵소서. 긴 세월 동안 부부지간, 부자 조손, 산지사방 외로이 계시다가 이제는 정령(精靈, 넋) 서로 오가시며 영면하시기를 간절히 기원드립니다. 앞으로도 이역변천 이어지면 선령님들을 이곳에 모셔올 것이며, 아래로 생업을 쫓아 각지로 흩어져서 살아가는 후손들이 이승을 하직하매 고향산천 굽어보며 선조님들과 함께 안식하도록 할 것입니다. 봉안당 준공은 이제 시작일 뿐, 후손들은 이곳을 지성으로 가꾸며 연연세세 영원한 추모지소가 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하며, 샘이 깊은 물은 가물에도 그치지 않는 것처럼 후손들 또한 대대손손 이어질 것입니다. 선조의 훈업(勳業)을 생각하는 것은 비유컨대 무성한 가지와 잎을 보면서 흙속의 깊은 뿌리를 돌이켜 생각하는 것과 같다할지니, 후손들은 항상 같은 뿌리임을 명념(銘念)하고 조상님께 고마움을 새길 것입니다. 뜨거운 가슴으로 서로 화합하고 돈목할 것이며, 지(智)와 혜(慧)와 성(誠)으로 세상에 나아가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다시 엎드려 고하옵니다. 천지신명께서는 이곳 봉안당을 지켜 주시옵고, 이곳에 모신 영령이시여 밝게 오시어 평안하옵소서.(2004. 4. 10)
경상일보 / 2003. 11. 25(화) 소개 농소2동 약수마을(학성이씨) 권토중래 "꿈" 용연서원 창건에 "만족" 국도 7호선을 따라가면 울산공항에서 약 7㎞쯤에서 동해남부선 철도를 만난다. 철도 밑 굴다리로 들어가는 길이 바로 약수마을로 가는 입구다. 굴다리 입구에 약수마을이라는 안내판도 볼 수 있다. 도로 왼쪽 굴다리 반대쪽은 약수초등학교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오래 전부터 피부병에 효험이 좋은 약물이 나오는 곳이라고 해 마을이름이 약수마을이 됐다. 동천강과 삼태봉 사이 넓은 들이 형성돼 있어 예부터 부농이 많고, 60~70년대에는 마을 산에서 생산되던 자연산 송이 판매 수익금으로 새마을 사업을 해 전국적으로 알려졌던 마을이 바로 약수마을이다. 최근 마을 주민들이 공동재산을 대학설립을 원하는 사람에게 기부한다는 약정서를 북구청과 맺은 곳이 바로 약수마을이기도 하다. 약수마을은 이제 단층 기와집으로 이뤄진 예전의 마을을 둘러싸고 남쪽과 동쪽으로 빌라와 아파트들이 곳곳에 들어서 전형적인 근교마을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동에서 서로 가로지르는 개천을 중심으로 예부터 지키고 있는 마을 집도 벼를 말리던 마당이 잔디밭으로, 기와집은 콘크리트 슬라브 집으로 조금씩 바뀌고 있다. 40여 가구 남짓 했으나 지금은 아파트와 빌라 등으로 인해 그 수를 헤아리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변해버렸다. 농사 대신 직장을 다니면서 많이들 떠났지만 아직도 열 집에 가까운 집들은 이씨의 문패를 달고 있다. 이곳이 학성이씨 월진파 약수문회의 집성촌이다. 최씨들이 먼저 터를 잡고 있던 이 약수마을에 학성이씨 월진파가 처음 온 것은 약 200여 년 전이다. 시조인 충숙공 이예(李藝)의 15세손인 지회(志晦)가 월평이라 불리던 지금의 신정동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지회 할아버지가 학성이씨 월진파 약수문회의 입향조가 된다. 입향조의 7세손인 이정호 삼평초등학교 교감은 "남산 은월봉 아래 팔등에서 7대로 만석을 누리며 구강서원과 시조 사당인 용연사 등을 설립하고 창건하며 살았으나 18세기 후반 가세가 기울면서 세거지를 떠나 여러 곳으로 흩어지면서 입향조께서 약수에 터를 잡게 된 것 같다."고 입향 내력을 설명했다. 이 교감은 당시 이곳 약수를 비롯해 가까운 옥동, 온양 귀지(삼광리), 고산, 망양 신밤(덕신리), 상북 궁근정, 농소 신답(상안리), 경주 방어리 등으로 흩어졌다고 덧붙였다. 가세가 기울어 세거지를 떠난 이 곳 학성이씨들은 가세를 중흥시켜 원래의 세거지였던 팔등으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의 목표였다. 입향조의 손자인 경복(敬復) 할아버지는 전답만 500여 두락을 가질 만큼 가세를 일으켰고, 동생인 경조(敬朝) 할아버지와 조카인 민수(敏樹) 할아버지는 농소면장을 지냈고, 사촌동생인 경권(敬權) 할아버지는 향중 반수(班首)를 지내기도 했다. 입향조의 7대 주손 이수호 울산대 학사관리부장은 "종가의 호구단자가 1810년부터 100년 동안 3년 간격으로 빠짐없이 보관돼 호적의 변천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흥걸(60?해성수산 대표) 약수문회장은 "호구단자는 물론 직계 조상들의 혼인관계, 토지 매매 서류, 소작농들의 세수목록, 서찰, 노비관계 등이 보존돼 있는 것은 종가가 곤궁에 처할 때도 있었으나 근본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유훈이 있었기 때문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거목이 된 은행나무가 지키고 있는 종가에는 종부인 김명옥(80) 할머니 혼자 노년을 보내고 있다. 팔등 세거지로의 권토중래를 꿈꾸던 약수문회는 세거지의 도시화 등으로 집안 대대로 또 하나의 염원이었던 용연서원의 창건으로 만족하고 있다. 약수문회는 최근 경사를 맞았다. 입향조의 7세손으로 이 마을 출신인 이한호씨가 지난 10월11일 공군참모총장에 취임한 것이다. 이정호 교감은 "총장 취임식에 공군에서 보내준 버스를 타고 마을 사람들이 참석해 찍은 기념사진은 새로 지은 마을 회관에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이진걸, 교통부 육운국장을 역임한 이용걸, 코오롱고속 소장을 지낸 이함걸씨도 약수문회출신으로 모두 작고했다. 입향조의 5세손으로 월진재단 이사장을 역임한 이장걸씨와 대한항공 부장으로 퇴임한 이생걸씨도 약수마을 출신이다. 문회부회장을 맡고 있는 이채만씨와 김천교통 이채윤 전무이사, 신용보증기금 이채복 지점장, 서호조경 이채흥 대표, 한올약품 이채훈 부장, LG증권 울산지점 이채우 차장과 개인사업을 하고 있는 이채헌씨, 부산에서 치과의사로 활동중인 이채경씨 등은 입향조의 6세손으로 약수문회 문중들이다. 동일제강 이창호 전무이사, 우주해운 이경호 대표, 동아닷컴 이문호 부장, 홍명고 이영호 교사, 스틸드림 이성호 부장 등도 문중이며, 입향조의 8세손인 이원빈씨가 삼아약품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가훈 격인 ‘거가요어(居家要語)’와 면학자세나 공부하는 방법인 ‘독서규례(讀書規例)’는 ‘국역 이휴정문집’ 에서 부분 발췌하여 싣습니다. 조상님의 유훈을 본받도록 노력합시다. ▶ 거가요어(居家要語) ★ 하루에 여러 가지 잡다한 일은 그 때 그 때 결단하고, 한 집안의 할 일은 그 일을 해결하는데 일념 할 것이니, 다만 여러 가지 많은 일만 하려고 하면 노력만 허비하고 성과가 적다. ★ 매일 열두 시간 항상 방심을 경계하고 유달리 기지개를 펴거나 거만하게 드러누워 있거나 해서는 안 된다. 집밖에 나가서는 큰 손님을 본 것같이 행동을 신중히 하고, 빈 그릇을 들더라도 가득 찬 그릇 잡는 것과 같이 하며, 나 혼자 있을 때를 조심하고, 자기 양심을 속이는 짓을 하지 마라 등의 성현 말씀을 명심하고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 아침부터 저녁까지 삼가하고 공손한 마음가짐은 옥황상제를 대하는 기분으로 하고 전장에 다다름과 같이 조금이라도 중단해서는 안 된다. 모든 일은 순리대로 하고 절대로 잔꾀를 써서도 안 된다. 이(理) 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현묘(玄妙)한데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옳은 것에 따라 행할 것이며 옳은 것은 성패에 관계없이 마땅히 해야 할 바에 따라 행하는 것이다. ★ 오직 입으로부터 좋은 말도 나오고 싸움을 일으키는 말도 나오니 말이 많으면 실언이 생기고 말을 너무 꾸미면 아첨이 되니까 참으로 경계할 바가 아니겠느냐. 이러므로 공자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말이 너무 많은 것보다는 오히려 말수가 말더듬이가 낫다고 하시고 주(朱)선생의 훈계 말씀에도 입을 지키되 병(甁)과 같이하라고 하셨다(병마개는 항상 막아 놓고 있고 필요할 때만 연다.). ★ 자식에게 효도로 책망하고, 형제들에게 공손으로서 책망하고, 처에게 순종으로서 책망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자기 자신이 이들을 위하여 자애와 우애와 순리를 다하는 것이 낫다. 이리하여 보답을 받지 못하더라도 역시 자기가 할 바는 버리지 말아야 한다. ★ 타인의 장점과 단점을 논하는 것은 사람의 심덕을 크게 해치는 것이다. 세상에는 장점과 단점이 없는 사람이 없으니 그 좋은 점을 취하고 그 좋지 못한 점을 묵과하여야 자기에게 허물이 돌아오지 않기를 바랄 수 있다. 사람이란 이웃이나 고을에 기거하는 것이 아니며 첫째 자기 집에서 살며 그 가정인으로서 이러한 도를 행하는 것이다. ★ 조정의 인사문제나 관청 정치의 잘잘못은 특히 선비로서 말할 것이 못된다.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그 일에 참견하기를 삼가하라. ★ 남의 비평이나 이해관계 등에 내 마음과 내 몸이 얽히고 흔들리지 않아야 내가 설 확고한 땅이 있는 것이다. 위 두 가지를 깨끗하게 해쳐 나오지 못할 것 같으면 비록 얼마간의 일을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결코 만족할만한 올바른 일은 아닐 것이다. ★ 벗을 취하는 방법은 반드시 충신하고 정직한 자를 택하여 나의 인격에 보탬이 되도록 하여라. 말만 앞세우고 실속이 없는 자와 교묘하고 간사한 속임수를 쓰는 자와는 절대로 친하게 사귀지 마라. 비록 내가 명철하지 못 할지라도 벗을 택하는데 주의를 많이 할 것 같으면 허풍쟁이와 남을 잘 속이는 자들을 충실하고 정직하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타인이 나에게 친구가 되어주기를 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먼저 내가 타인에게 친구가 되도록 노력할지어다. ★ 손님을 대접하는 예는 반드시 성의를 다할 것이며, 대접의 풍부하고 엷은 것은 가정 형편대로 할 것이며, 물질에만 마음을 쓰는 것도 역시 진심으로 대하는 도리가 아니다. ★ 사람은 대개 위에 있는 자만 두려워 할 줄 알고 아래에 있는 자를 두려워 할 줄 모른다. 또 높고 귀한 자를 공경할 줄 알고 낮고 천한 자를 공경할 줄 모른다. 이 때문에 교만하고, 인색하고, 더럽고, 아첨함이 널리 퍼져서 하늘의 도와 왕덕(王德, 옛 성왕들의 두터운 덕) 다시 볼 수 없도다. ★ 제사는 인생의 근본에 보답하는 것이니 어찌 삼가지 않을쏘냐. 일년에 한번 하는 일이니 힘을 다하여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제사에 필요한 물건은 반드시 정결하여야 하고 가례도식에 따라야 하고 감히 더하거나 빼거나 해서는 안 된다. 오직 태만해서 제계함을 소홀히 하지 말지어다. ★ 농사를 지음에 있어서는 선조 제사에 올리는 메쌀은 반드시 먼저 쓸 바를 생각하고 제사에 필요한 건포나 과실은 별도로 간직하여 두고 제사임시에 군색하고 급하게 이루는 일이 없도록 한다. ★ 기일(忌日)은 초상의 남은 날이므로 옛날 사람들은 조문을 받을 때 손님을 보지 아니하였던 만큼 화려한 의복이나 풍성한 음식을 하여서는 아니 되느니라. 반드시 헌 갓과 흰옷과 나물 음식으로 할지니라. ★ 무릇 사람의 몸을 위태롭게 하는 원인은 반드시 일상생활에 있어서 의식주에 너무 과도한 낭비와 사치와 안일에 있으니 덕성을 수양하는 기본은 전적으로 검소한 생활에 있는 것이다. 검소한 의생활과 식생활은 정신 수양 상 마땅할 뿐만 아니라 건강상으로도 또한 이와 같이 할 것이다. ★ 여식을 시집보내거나 며느리를 맞이하는 혼사 등에는 먼저 상대방 집안의 도리를 보고 그 다음에 인품을 보아서 반드시 덕이 있는 자를 구해야 할 것이요, 결연한 뒤에는 빈부(貧富)와 현달(顯達), 궁핍 등 세속사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 독서규례(讀書規例) ★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독서규례를 한 번 읽고 *상읍례를 행하고 선생님(函丈)이 침소에서 일어나시거든 절을 드리고 각자 자리에 앉아서 일과를 시작한다. * 상읍례(相揖禮) : 서로 두 손을 맞잡아 얼굴 앞으로 들어 올리고 허리를 공손히 구부렸다 몸을 펴면서 손을 내미는 예법 ★ 독서는 반드시 이치를 연구하여 몸소 실천하는 것을 주(主)로 삼으며, 많은 것을 탐내지 말고 넓은 것을 힘쓰지 마라. 기억해서 좋을 것이 수천 말(言)이면 다만 일천 말만 얻어내고 기억할만한 것이 이백 말이면 다만 일백 말만 얻어내어 정독하고 숙독하며 앞에 읽었던 것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 ★ 처음 뜻을 세울 때는 반드시 철석같은 각오로서 조금도 움직이지 말고 남달리 자주적 정신으로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갈 것이며 초지를 버리고자 하여서는 아니 된다. ★ 사사로운 쾌락과 욕망을 이겨내는 극기심을 가지고 오로지 완독(玩讀, 글을 음미하여 읽음)하면 성현의 지위에 이르기를 기약할 것이니라. ★ 배우는 자가 반드시 먼저 부귀를 뜬구름과 같이 보아야 쓸모있는 인물이 될 것이며 만약 티끌만치라도 외향적인 마음이 있으면 인격도야를 위하는 학문이 아니리라. ★ 방안에 혼자 있을 때도 항상 조심하기를 임금과 부모가 앞에 계시는 것 같이 하여 에 부끄럼이 없도록 할 것이다. * 옥루(屋漏) : 방의 서남쪽의 모퉁이에 햇빛이 스며들어오는 곳이니 태양이 곧 하늘이다. 시경(詩經)에 나오는 문자임. ★ 수양에 관한 것은 전부 책 안에 있으니 한시라도 헛되이 지나지 마라. 헛되이 지내는 시간이 많으면 글을 읽는다 하옵시고 실은 읽지 않는 것이 되느니라. ★ 하루에 배우는 것은 백 번을 외우고 한 달 분을 또 합쳐서 외우라. 이렇게 하여 을 받고 난 후에도 그 뜻을 탐구하고 또 복습하여 평생을 통하여 평상시에 자기가 말하는 것 같이 되도록 글을 외우도록 하여라. * 강(講) : 배운 글이나 들은 말을 선생이나 시관 또는 웃어른 앞에서 외어 들리는 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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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鶴城都護府(학성도호부)를 아십니까? 원문보기 글쓴이: 무심(無心)
첫댓글 벼르고 별렀던 화전이었습니다.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무척 성대하게 끝났습니다. 그때 사용된 자료 일부를 아우가 만들었기에 여기로 옮겼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수고하셨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