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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도로(道路) 발달역사
도로는 인류문명 발전의 기초이며 물자의 운송로, 지식과 문화 및 기술 등의 전파로, 군사 이동로로서 인간집단 상호간의 정보교환과 재화의 유통을 촉진시키는 수단이었다.
사전적 의미로는 ‘차나 우마 및 사람 등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오갈 수 있게 만들어진 거의 일정한 너비로 뻗은 땅위의 선’이다. 고고학적 측면에서 도로는 ‘대상(帶狀)으로 연속성이 있는 특정공간을 형성하고 그 공간에는 노면으로 인정되는 경화면(硬化面)과 측구(側溝) 등의 관련시설과 통행로로 이용된 흔적이 있어야 하는 구조’를 말한다.
우리나라의 「도로법」에서는 ‘일반의 교통에 공용되는 도로’로서 구체적으로는 고속도로, 일반국도, 특별시도, 광역시도, 지방도, 시도, 군도, 구도를 지칭한다. 이외에 ‘터널, 교량, 도선장(渡船場) 등 도로와 일체가 되어 도로의 효용을 다하게 하는 시설이나 그 공작물까지를 포함한다’고 규정하였다.
이와 같은 도로의 어원은 중국의 『주례(周禮)』 주기에 따르면 경(徑)은 우마를 수용할 수 있는 오솔길이고, 진(畛)은 수레(大車)가 다닐 수 있는 소로(小路)이며, 도(途)는 승거(乘車) 한 대가, 도(道)는 승거 두 대, 로(路)는 승거 세 대를 수용할 수 있는 길이라 하여 도와 로는 원래 길의 등급이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도와 로의 명확한 구분이 없이 길의 중요도에 따라 대로, 중로, 소로의 구분이 있을 뿐 도로와 길이 같은 개념으로 통용되고 있다.
한편,서양에서는 ‘이동’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의 ‘Vahana’와 라틴어의 ‘Vehiculum’에서 유래되었으며, 영어의 ‘road’는 라틴어의 ‘rad(말타고 여행하다)’에서, ‘path’는 ‘pad(발로 다져진 길)’에서 유래되었다.
이러한 도로의 기원은 일반적으로 야생동물의 통로설과 원시인의 이동로설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야생동물 통로설은 들소와 같은 야생동물은 본능적으로 정기적 이동을 하게 되는데 북아메리카의 플레인즈 인디안(Plains Indian)같은 부족들이 들소떼를 사냥하여 고기와 가죽을 생활용품으로 사용하였는데 이 들소들의 계절적 왕래에 따라 인디언 통로(Indian Trails)가 형성되었으며 이러한 통로들이 서부개척민의 이동로가 되어 후일 미국의 대륙황단철도의 모체가 되었다는 견해이다. 원시인 이동로설은 신석기인들이 소규모 집단을 구성하여 여름과 겨울을 번갈아 이동함으로써 점차 정착생활을 하면서 형성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다.
우리나라의 도로는 일정한 조직적 권력체제나 기술에 의하여 체계적인 시설물을 설치하여 왕명이나 공문서를 전달하고, 왕래인에게 역마와 숙박을 제공하며, 공공물자를 운송하는 등의 국가통치조직의 교통수단으로서 기능해 왔다.
우리나라 선사 시대 및 부족국가 시대의 도로 실태는 기록상의 한계로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고조선 시대에는 일찍이 수도인 왕검성과 요서지방의 대ㆍ소릉하와 고죽국(孤竹國)을 지나 연(燕)과 제(齊)나라와 교류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육상교통로가 발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연의 화폐인 명도전(明刀錢)의 출토, 청동제 차여구(車輿具) 및 석노(石砮)의 출토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부여 시대에는 『상서대전(尙書大傳)』에 의하면 기원전 8∼7세기경 부여와 주(周) 및 한(漢)에 이르기까지 중원과의 교섭이 활발한 것으로 보아 교통로가 개척되었으며, 북의 약수(弱水), 남의 고구려, 동의 읍루(挹婁), 서의 선비(鮮卑)와의 교류나, 제가(諸加)들이 사출도(四出道)를 관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중앙과 지방 읍락간의 일정한 교통로가 개척되어 일정한 도로가 개설되었을 것이다.
고구려 시대에는 환인의 졸본성에서 도읍한 이후 환도산성 및 국내성 양 지역 간의 교통로가 발달되었다. 이후 대외 정복 전쟁을 통해 부여ㆍ북옥저ㆍ동옥저 등으로 영역을 확대하고 나부(那部) 중심의 행정조직을 갖추면서 교통로를 확보해 나갔다. 이는 각저총과 무용총의 수레 그림과 오회분 5호묘의 수레신ㆍ마굿간을 통해서도 당시에 개척된 도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국내성과 요동지역 사이에는 북도(北道; 혼하 상류-유하-휘발하-혼강-위사하)와 남도(南道;혼하-소자하-부이강-혼강-신개하)의 2개 교통로가 개척되어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남도는 현도군을 축출하면서 확보한 지역으로 국내성과 요동 사이의 교통로였으며 북도는 고구려와 부여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로였다.
427년(장수왕 15)평양성 천도 이후에는 백제ㆍ신라와의 전쟁을 거치며 평양성 중심의 교통로를 확대하였다. 그 결과 남한강은 물론 소백산맥 지역의 충주-죽령 지역까지 진출하여 북남 교통로의 확장을 가져오게 되었다.
당시 고구려는 수도인 평양에 장안성(長安城)을 축조하였는데, 여기에서 발굴된 자갈로 축조된 도로 및 수레바퀴 흔적, 대교(大橋)의 건설 기록 등을 통해 볼 때 상당한 규모의 도로가 발달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장안성의 경우 방리제(坊里制) 또는 부방제(部坊制)에 의거하여 정방향 또는 장방향의 도성체제하에 대로ㆍ중로ㆍ소로가 축조되었다. 나성 내의 도시유적에서는 약 20㎝ 두께의 강자갈이 깔린 12.6∼12.8m 넓이의 도로유구와 약 60∼70cm 폭의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또한 국내성에서 평양성 사이에 17개 역(驛)이 있었다고 한 것은 도로를 이용한 국가행정명령 전달체계가 발달되었음을 의미한다.
백제 시대의 도로는 중앙 및 지방 통치조직의 확립에 따라 발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성(漢城) 시기에는 낙랑(樂浪)과 말갈(靺鞨) 및 고구려와의 전투를 위해 북방교통로인 자비령로ㆍ방원령로ㆍ재령로가 개척되었으며, 웅진 시대에는 수도의 5부-5항(巷)제 및 지방의 방(方)-군(郡)-성(城)체제로의 개편 과정에서 교통로가 발달하였다.
이 당시 도로의 모습은 풍납토성(風納土城), 왕궁리, 궁남지(宮南池), 쌍북리, 관북리 유적 등에서 보인다. 풍납토성에서는 남북을 관통하는 너비 8m 정도의 도로와 교차하는 너비 5m의 동-서 방향 도로가 발굴되었는데, 노면의 기반층을 굴착하여 다진 후 잔자갈을 4.5∼5m, 두께 20cm 정도 깔고 그 위에 고운 흙과 모래를 덮고 양쪽 배수로 시설을 갖춘 구조였다.
궁남지 도로 유적은 동-서 방향의 노면너비 10m 내외이고 노면에 특별한 포장시설은 보이지 않으나 다수의 중복된 수레바퀴자국이 확인되었다. 관북리 유적의 경우 남-북대로의 노면너비 8.9m, 측구 배수시설을 포함하면 10.75m 규모이며, 동-서 소로는 너비 3.9m이다. 이와 같이 백제의 도로에 나타난 특징을 보면 노면을 포장하지 않고 도로 양측에 측구시설인 배수로나 암거시설이 설치된 점이다.
신라 시대의 도로 역시 소국의 병합과 정복활동의 과정에서 정비되었다. 일찍이 아달라왕 3년(156)에 계립령(雞立嶺), 5년(158)에 죽령을 개척하였으며 소지왕 9년(487)에 이르러 사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관도(官道)를 수리한 것은 도로교통의 필요성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한편, 법흥왕ㆍ진흥왕대 이후 정복활동 지역의 통치를 강화하고자 진평왕ㆍ문무왕대에는 교통기구를 정비하였는데, 내정기구로서 고역전(尻驛典)ㆍ공봉승사(供奉乘師)에 이어 어룡성(御龍省)을 설치하였다. 또한 진평왕ㆍ문무왕대에는 중앙의 경도역(京都驛)에 이어 승부(乘府)ㆍ선부(船府)를 설치하여 육상 및 수상 교통업무를 관장하게 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도로교통 정책을 시행할 수 있게 되었다.
신라의 도로 유적은 왕경(王京)도로와 지방도로로 나뉜다. 먼저 왕경도로는 대표적으로 황룡사지(皇龍寺址) 주변도로와 분황사(芬皇寺) 남쪽 동서도로, 전랑지 서쪽 남북도로, 황남동 북쪽 동서도로, 월성(月城) 석교 남쪽 남북도로, 황성동 동쪽 남북도로, 남산왕정곡 남북도로, 서부동 남북도로 등이 있다.
이와 같은 왕경도로의 발굴 결과의 특징을 종합해보면, 첫째, 도로의 평면형태가 방형의 격자모양으로 구획되고 남-북, 동-서 방향의 직선 도로인 점, 둘째, 노면 폭은 대략 너비 5m, 소로 10m, 중로 15m의 대로로 축조되었으며, 셋째, 노면구조는 직경 5∼10cm 내외의 잔자갈과 황색 사질토, 황갈색 점질토와 황갈색 사질점토를 섞어 구축하고 상ㆍ하층이 다른 노면구축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배수시설인 측구(側溝)와 암거(暗渠)시설이 있으며, 넷째, 도로의 축조시기는 황룡사 주변 도로유구를 통해 판단하면 7세기대로 추정된다.
지방도로는 확대된 통치 영역을 관리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가야를 멸망시켜 울산-부산-김해-진주로 통하는 길(東海通)과 창녕-합천-거창으로 나아가는 길, 한강유역 점령 이후 조령-충주-이천-용인-수원-남양으로 통하는 길(北海通)과 경주-영덕-울진-삼척-강릉을 거쳐 속초-고성-함흥에 이르는 길(北海通)이 열리게 됨으로써 이른바 5통(通)-5문역(門驛)이 연결되는 교통로가 개발되었던 것이다.
또 백제를 멸망시킨 이후 이 지역의 통치를 위해 경주-양산-창녕-거창-남원-무주-나주에 이르는 길(海南通)과 고구려평양성과의 교통로인 경주-안동-죽령-원주-포천-수안-평양에 이르는 길(鹽池通)이 개척됨으로써 군사ㆍ외교 및 물자운송 등에 필요한 도로가 병행하여 개발되었다.
이와 같은 5통-5문역은 삼국통일 이후 지방통치제도의 확립과 더불어 9주 5소경을 연결하는 교통로로 확대되어 왕경과 지방을 서로 잇는 도로체계를 확립하였다.
이러한 지방도로 유적으로는 대구 봉무동(鳳舞洞) 유적, 대구 동촌(東村) 유원지 유적, 경산 대평동(大坪洞) 유적, 울산 굴화리 및 매곡동 신기 유적, 밀양 가인리(佳仁里) 유적, 김해 율하 관동리(栗下 官洞里)유적 등이 있다. 이들 지방도로 유적에 대한 연구결과를 살펴보면, 첫째, 축조유형에 따라 돌을 깔거나 사질토 등을 섞어 노면을 축조한 구축된 도로와 노면이 축조되지 않았으나 사용 이후 보수되어 구축된 도로, 정지면 구축 시 구상형태의 수혈에 의해 노면이 설치된 도로로 나뉘며 수레바퀴 흔적이 나타난다.
둘째, 도로의 평면형태는 ‘一’형이 대부분이나 ‘十’, ‘Y’자형으로 단일노선이 많다. 노면의 규모나 형태는 소로 3m 내외, 중로 5m 내외, 대로 8m 내외이며 기반층을 굴착하거나 정지하여 10∼30㎝ 내외의 천석이나 할석ㆍ역석 그리고 사질토 등을 깔았으며 노면 양쪽에 측구(側溝)와 같은 배수로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셋째, 축조 시기는 관도가 정비되는 삼국시대로 추정되나 특히 통일 이후 왕경과 지방 간의 통치체제가 확립된 때부터로 추정된다. 넷째, 도로의 기능면에서 사람과 생산물자의 이동을 위한 운송교통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정치ㆍ행정 및 군사도로로서의 기능도 수행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그 외에 수레 유물이 다수 출토되어 도로교통상 물자의 운송에 사용되었을 개연성을 높여주고 있다. 기록에서도 유례왕 원년(23)에 수레[車乘]를 제작했고 눌지왕 2년(438)에 백성들에게 우거(牛車)를 이용하는 법을 가르쳤다다고 하는 등 수레를 이용하여 조세운송이나 군수물자 등 화물운송에 널리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삼국시대 교량의 가설도 도로 교통이 매우 발달하였음을 말해주는 시설물이다. 그것은 413년고구려 평양성 평양주(平壤州)의 대교(大橋) 가설, 498년백제 웅진성의 웅진교(熊津橋)의 가설, 부여 능산리 절터의 567년경 목교(木橋) 흔적, 그리고 신라 760년(경덕왕 19) 2월문천(蚊川) 위에 월정교(月精橋)ㆍ춘양교(春陽橋)의 축조가 이를 반증해주고 있다.
1. 개경의 도성도로
고려는 후삼국 통일 이후 개경에 도성을 조성하였다. 도성 안의 공간은 산세의 영향을 받아 서북쪽에 궁궐과 관아가 배치되어 남산을 중심으로 동ㆍ서 경계가 구분되었으며 오공산-남산-부흥산으로 이어지는 지형 때문에 선의문(宣義門)-십자가(十字街)-숭인문(崇仁門)으로 관통하는 도로를 경계로 남북 구분선이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국초부터 개경 황성(皇城)의 조성과 함께 개경 주변에는 왕릉이 조성되었으며 많은 사찰을 건립하여 점차 나성(羅城)과 4교(四郊)로까지 확대되었다.
황성을 중심으로 광화문과 남대문을 연결하는 남대가에 이어 북쪽의 안화문(태화문), 성도문(북성문), 영창문(탐현문)을 연결하고 동쪽의 숭인문과 동남쪽 장패문(보정문), 남쪽의 회빈문(고남문), 서쪽의 선의문(오정문), 영평문(눌리문), 통덕문(도찰문)을 연결하였다.
또 도성 안의 물길인 백천(白川)과 도성 밖의 사천(沙川)을 건너기 위해 많은 교량을 건설하여 도로교통의 편리를 증진하였다. 백천에 건설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병부교(兵部橋), 금오위남교(金吾衛南橋) 등은 궁궐과 연결되는 중요 교량이었으며 노군교(勞軍橋), 당상교(堂上橋), 피정교(皮井橋) 등도 도성 중앙의 도로교통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하여 도성 안에는 국왕의 행차에 필요한 전용도로인 어가(御街)가 조성되었다. 어가는 황성과 외성(外城)에 이르는 중심대로로 정전인 회경전(會慶殿)에서 시작하여 나성의 성문을 지나 지방으로 연결되었는데 아마도 군대의 사열, 격구 시범, 사신 행렬 등과 같은 대규모 인원을 수용할 수 있도록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도로 폭에 대해서는 『주례』의 기준이 도입되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조선시대의 경복궁 대로가 9궤(軌)인 점을 고려하면 이에 상응한 노폭으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개경의 도성도로는 중국 등의 고대 도성에서와 같은 주작대로(朱雀大路)의 모습을 띠지 않고 지형과 수세에 따라 격자형이 아니라 불규칙한 형태였다. 도성 내의 관도(官道)와 사찰참배 도로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2. 사찰 및 왕릉 건립과 참배노선
개경 주변으로는 수많은 사찰들이 건립되었는데 이들은 왕실의 원당(願堂), 팔관회 등의 불교행사라는 본연의 임무는 물론 중요한 교통로에 위치하게 됨으로써 개경의 외곽을 방어하는 기능도 함께 하였다. 국청사는 개경 서쪽의 관문에 위치하여 교통과 방어의 중심지였으며 천수사 역시 남쪽으로 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흥왕사는 전쟁 시 남쪽의 이궁(離宮)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개경이 황성을 중심으로 도시구획과 함께 나성, 4교(郊)로 확장되자 주변에 설립된 사찰들은 개경의 방어뿐만 아니라 교통로로서의 역할과 함께 왕실의 사냥터, 연회장소로 이용되어 정치ㆍ사회적으로 큰 힘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이외에 왕릉 참배에 따른 도로의 확장ㆍ보수가 활발하였다. 이들 왕릉들은 송악을 기준으로 교외의 나성 서쪽은 봉명산ㆍ만수산 등 기슭에, 남쪽의 진봉산ㆍ부소산 일대 그리고 동쪽으로 용흥동 서쪽산과 송림현ㆍ장단현과 북쪽의 오관산 등에 위치함으로써 개경의 황성으로부터 왕릉 참배지까지 국왕의 잦은 행차에 따른 도로의 개설과 보수가 활발하게 되었다고 본다.
3. 고려의 지방도로
고려의 지방도로는 삼국시대의 교통로에 기반을 두었는데, 이후 지방제도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점차 체계적으로 발달하였다. 개경과 도ㆍ부ㆍ목ㆍ군ㆍ현의 치소 간에 중앙과 지방 사이의 왕명이나 군령의 전달, 조세의 수송, 외관 및 사신의 왕래와 같은 목적에 따라서 삼국시대에 조성된 교통로가 점차 확대ㆍ발전된 것이다. 특히 국왕의 서경(西京)주 01) 및 남경(南京)주 02)에로의 지방 순행에 따라 간선도로가 크게 발달하였다.
개경에서 장단현을 거쳐 광주-이천을 지나 충주, 상주방면으로 연결되는 ‘장단도로(長湍渡路)’와 문종대 남경 설치 후 개경과 남경 직로 외에 개경과 남방의 지방 군현 사이의 교통로는 ‘임진도로(臨津渡路)’가 주로 이용되었다. 이에 따라 개경의 청교역에서 출발하여 통파역(임진)-마산역(파주)-벽지역(고양)-영서역, 청파역, 노원역이 있는 남경에 이르는 역로 조직도 함께 발달하게 되었다.
고려시대 도로유적은 단독적으로 확인되기보다 삼국이나 통일신라 시기 축조된 도로와 연계된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마산 중리 유적의 도로 유구는 삼국 시대의 도로가 지속적으로 사용된 도로와 축조방법을 달리하는 유구이다. 자연퇴적층에 측구 부분인 양 가장자리만 굴착하여 구축하였다. 도로면은 30∼70cm 정도의 천석과 할석으로 석재의 반듯한 면이 바깥쪽을 향하도록 외열을 맞추어 3∼4단을 축조하였다. 바닥은 경계석을 쌓고 내부에 점토ㆍ모래ㆍ잔자갈 등을 혼합하여 다짐처리를 하고 측구는 천석과 할석으로 들여 쌓고 뒷면은 자갈을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