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대화 2006/05/28/주일/
(잠언15장1-4절) 전주서광 이송로목사
우리가 크리스챤이라고 할 때 적어도 하나님과의 대화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지만, 더욱 원하시는 것은 인격적인 대화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지으시고 에덴동산에서 아담이랑 대화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다고 할 때, 또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에 그분과의 사랑의 속삭임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는 기도라고 하는 수단을 통해서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또는 매 순간마다 하나님과의 속삭임을 통해 교통(交通)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기와의 대화’를 강조하기도 합니다. 우리 중학교 다닐 때 영어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학생들에게 자극을 주기 위해서 헛된 낭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늘 이런 질문을 하라고 강조를 했습니다.
“송로야,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니?”
학생이 공부하기 위해서 책상에 앉았지만 정신이 몽롱해 있어서 30분도 1시간도 쓸 데 없이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때 “송로야,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니?”. 그런데 스스로 “나는 코딱지를 파고 있다!”, 아니면 “나는 하품을 하고 있다!”라고 대답한다면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자기와의 속삭임이 있을 때 인생을 바르게 사는 기폭제가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성경에서 자기와의 속삭임이 있는 한 구절에 늘 매력이 끌리곤 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네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네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42:5).
이 얼마나 멋진 자기와의 속삭임입니까? 바로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기 전에 시인이었던 것은 바로 자기와의 속삭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과의 대화’, ‘자기와의 대화’에 있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에 있습니다.
우리는 눈을 뜨면 수많은 사람들과 부딪혀야 합니다. 그 속에 가장 먼저 가족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장 잘못하고 있는 것이 가족과의 대화일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늘 보고 사는 사람이니까 무덤덤하게 지나칠지 모르지만, 우리는 가족과의 관계에서 대화하는 기술을 익힐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웃들, 교우들, 친구들, 제자들, 직장 동료들, 그리고 거래처 사람들, 심지어는 낯선 사람들과의 대화를 필요로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대화가 가져다주는 영향력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결코 아무 말이나 던질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대화는 그냥 일방적으로 나의 의사만을 전달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화는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경청이 더 우선이 될 때에 가장 좋은 대화의 장을 이끌어 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야고보 선생은,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고 성내기도 더디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느니라”(약1:19,20).
여러분은 남의 말을 들어주는 일에 익숙해 있습니까? 아니면 내 의사를 전달하려는데 익숙해 있습니까? 물론 그것은 성격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 듣는 데에 익숙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합시다. “남의 말을 귀담아 들읍시다!”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선수가 됩시다!”
지난 주간에 제가 은근히 한 방 먹었습니다. 무슨일이냐구요? 우리 허은하 집사님께 가서 전도사님이랑 가서 점심을 맛있게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기분이 좋아서 무심코 말을 많이 했습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신나게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허은하 집사님이 “목사님, 이런 나와서도 설교하시면 어떻게 해요. 저희들 한테도 말할 기회를 주셔야지요!”
저는 얼른 “아이구,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명심하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우리는 내가 입을 열기 전에 상대방의 말을 경청해야겠다는 자세로 대화에 임해야 합니다.
다음은 부드럽고 상냥한 말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대하는 대상에 따라서 그 언어와 표현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고향 사람 만나면 사투리가 더해질 수도 있고 또 크게 반가워하는 표현들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대화하는 데 있어서 어디까지나 부드럽고 온화한 분우기를 연출할 수 있는 말을 시용해야 합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15:1).
우리는 대화를 할 때, 말 속에 뼈가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때로는 뼈있는 말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들 때에 가장 조심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뼈있는 말에 찔리면 상대방이 상처를 받는다는 얘기입니다. 그 다음은 관계가 악화되고 결국 사람을 잃어버리는 결과로 치닫게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불행입니까?
우리의 분노 속에는 미워하는 감정이 발동을 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상대방을 다치게 하는 상처주는 말들이 오고가게 만듭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피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오히려 화가 났을 때 막같이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상입니다.
오히려 마음을 가다듬고 부드러운 대답을 통해서 상대방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특히 부부간에 이것이 잘 안 되는 가정이 많습니다.
어떤 분이 연구를 했는데, 남성과 여성 중에 어느 쪽이 분노를 더 조정할 능력이 강한가를 연구했답니다.
이것은 맥박 수를 통해서 쉽게 알아낼 수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흔히 남자가 더 분노를 잘 삭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정반대라는 것입니다.
시험 결과 여성은 화난 일이 있어도 5분이면 안정적인 분위기를 찾게 되지만, 남자들은 25분이 지나야 겨우 안정적인 분위기로 돌아온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합니까? 부부 간에 같이 화난 일이 있더라도 남자들에게 “당신은 남자가 되어가지고서 왜 그렇게 속이 좁은가요?”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화난 남편을 여성이 먼저 달래주려는 마음을 갖는 가정은 원만하고 행복하지만, 반대로 남편의 분노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막같이 하는 가정은 불행해질 가능성이 많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부탁하고 싶은 것은 ‘성난 남편’ 앞에서 끝까지 항변하려는 여성처럼 미련한 여성은 없다는 얘기입니다.
최소한 25분 후로 후퇴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우리 남성들이 알아둬야 할 일이 있습니다.
지난 주 친구 목사님 댁에 갔더니, 그 사모님이 하시는 말씀이 “여자는 남편의 말 한 마디에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여성들은 남성과 구조가 달라서 ‘말 한 마디의 위로’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남성들이 가장 못하는 것 중의 하나가 이런 말들입니다.
“여보, 오늘도 수고했지?” “모든 것이 여보 덕분이야!”
여기에서 하루의 피로가 다 사라지고 새 힘이 솟구친다고 합니다. 그러니 만큼 남성들은 일단 말로 아내를 격려하시기를 바랍니다.
돈 들지 않습니다. 오직 마음 하나만 있으면 되는 것을 왜 못합니까?
지금 연습합시다. “여보, 오늘도 수고했지?” “모든 것이 여보 덕분이야!”
그리고 우리는 지성있는 대화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혜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잠15:2).
“말이면 다 말이냐?”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 말이라도 가져다 붙인다고 해서 말은 아닙니다.
적어도 상황에 잘 맞는 말을 할 줄 알아야 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읽으면서 대화하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적어도 지성을 갖춘 분이라면 “이 말을 하면 상대방이 받아들이까?” 생각하며 말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가장 쉬운 격언 중에 “말 한 마디에 천냥 빚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런 센스가 고장난 분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상대방이 들으려고 안 할 때는 얼른 거기서 대화를 멈출 수도 있도, 다른 화제로 전환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말의 기술도, 말의 절제도, 말의 선별도, 대화의 바운더리도 배워야만 합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잠언 25:11)
우리는 지성있는 크리스챤이 되어야 하고 또한 지성있는 말을 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서광교회 성도님들은 다 그렇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지성있는 대화를 할 줄 알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마음을 품은 크리스챤이 되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이란 책을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은 참을성을 잃지 않고,
화가 났을 때라도 건설적인 길을 모색하며,
다른 사람의 행운을 시기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가장 나쁜 점보다 가장 좋은 점을 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마음과 생활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 줍니다.”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결론은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생활이 그리스도인다운 것이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최고봉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름다운 믿음은 가지고 있지만
아름다운 생활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식적으로는 수준급의 신앙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활에서는 수준이 미달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잘 하지만 생활신앙이 정립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제법 많은데 이것이 신앙인들의 아킬레스건 입니다.
마이크 머독은 그의 책에서
“일상생활을 바꾸지 않는 한 인생은 변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이 바뀌지 않는 한 일상생활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떻습니까? 걸핏하면 상대방을 헐뜯고 비난하기 일쑤가 아닙니까?
이렇게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고 고쳐지는 게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반발심이 커져서 더욱 더 관계가 악화되고, 반복과 갈등의 골이 더 깊어져 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말이나 부정적인 말도 삼가야 합니다. 진실한 말을 하고 긍정적인 말을 하고 희망을 주는 말을 하고 오래 기다려주는 말을 하고 은혜와 감동을 주는 말을 구사해야 할 때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람의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을 누리거니와”(잠13:2)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는 말을 통해서 복을 누리기도 하고 화를 자처하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누에는 자신의 입에서 나온 실로 집을 짓고 삽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로 자신의 삶을 경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 얼마나 삽니까? 우리 서로가 만나 행복하게 살자고.....
항상 온화하고 부드러운 말을 할 줄 알고 이치에 맞는 말을 할 줄 알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죽어가는 생명도 살릴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말씀이 그러했습니다. 우리의 입의 말도 그렇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우리는 대화에 있어서 ‘지성있는 대화’라고 할 때에 역시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과 복음 정신이 담긴 대화’라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비난과 깎아내리는 말들로 얼룩져 있습니다. 다 자기는 잘 했다는 것입니다. 서로가 잘 했다는 사람만 있고 잘못했다는 사람은 없는 사회처럼 되어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