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성들은 참으로 졸렬하였도다. 여성이 글을 쓰고 배우는것 조차 엄격히 금하던 시대. 허난설헌(16세기 천재여류시인)은 초당 허엽의 딸로 그녀가 죽고난후 동생 허균에 의해 당시의 다른 시들과 함께 엮어지고 임진왜란을 통해 명에서 온 사신을 통해 중국으로 전해져서 400년동안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그녀는 일찍 관리에 들어간 오빠 허봉을 통해 중국의 사상과 시들을 접했고, 스승 이달을 통해 시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배웠다. 허씨집안 자체가 그당시로써는 보기드문 혁명적 가풍을 가지고 있었던 집안이기에 그녀의 재능이 꽃피울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15세때 정략결혼으로 시집을 가게 되는데 조선초기까지만 하더라도 남귀여가(남자가 처가살이를 하는것)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풍습이었는데, 조선의 사대주의를 통한 결혼 시스템의 변화를 통해 친형제도(여자가 시집살이를 하는것. 17세기에 정착)의 첫세대에 해당하는것이 허난설헌이었다. 동류시대의 여인으로 신사임당이 있었으나 그녀는 주로 친정근처에서 생활함으로 그녀의 예술적 재능을 꽃피울수 있었다고 한다. 남편은 결혼생활에 무관심하고 오직 과거공부에만 몰두하는데도 번번히 낙방하고 아내의 문장력에 비해 열등감을 심하게 느껴서 부부사이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다고 한다. 그녀에게 있어 유일한 낙은 시를 쓰는것이었다. 그는 사대부집안의 딸이었지만, 스승 이달을 통해 계급사회의 모순을 배우게 되고 시를 통해 신분차별을 꼬집는 저항시도 많이 지었다. 하지만, 아버지 허엽과 오빠 허봉이 객사하고, 두 아이를 연이어 병으로 잃자 그녀또한 27세의 이른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녀가 죽고나서 중국에서 여성시가 유행했었기에 최초의 한류열풍을 얻어서 조선에 그녀의 시가 들어왔지만, 200년동안 가부장적인 남존여비의 시대는 그녀의 시를 하찮은것으로 치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