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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되어 행하라(엡 4:1-3)
할렐루야! 우리의 죄와 허물을 짊어지고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님께서 죽음과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의 기쁨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늘 넘쳐나기를 소망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만큼이나, 그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구체적인 삶의 문제도 똑같이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믿음에 대해서만 많이 강조해 왔습니다. 그러나 믿음만큼이나 강조되어야 할 것이, 바로 삶입니다. 삶이 없는 믿음은,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허물어지기 쉽습니다.
초대교회가 형성될 때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것이 사도행전 1장부터 9장까지의 이야기입니다. 베드로를 중심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놀라운 복음을 들었습니다.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복음을 유대인에게만 감추어 두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베드로를 통해 이방인 고넬료를 만나게 하시고, 그 만남을 통해서, 복음이 우주적인 복음으로, 전세계적인 복음으로, 이스라엘 밖의 이방인에게도 전파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해, 바울을 택하셨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택한 그릇이었습니다. 하늘의 비밀을 위해, 복음의 비밀을 위해, 선택되었습니다. 복음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온 것이 아니라 이방인, 곧 전세계 모든 족속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유대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속도보다, 이방인이 돌아오는 속도가 더 빨랐다는 것입니다.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한 자리에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생활양식, 사고방식, 전통, 종교적 배경이, 그렇게 다를 수가 없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교회의 갈등이 무엇이었습니까? 유대인들은 이방인에게 “할례를 받아라. 예수님 믿는 것도 좋지만, 할례를 받아야 한다.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계속해서 자기 주장을 고집한 것입니다. 또 이방인들은 “너희들이 믿었으면 믿었지. 뭐 그렇게 뽐낼 필요가 있느냐”면서, 이 문제를 가지고, 계속 싸워, 초대 교회 안의 갈등이 되었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수 믿는 데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예수를 믿게 되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멀리서 보고, 겉으로만 보면, 다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가까이 만나보면, 서로 실망합니다. 부딪히면, 상처받기 쉽습니다. 연애할 때는, 다 괜찮아 보였는데, 결혼해서 살기 시작하면 싸웁니다.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교회 다니는 것도, 멀리서 만날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다 좋아 보이고, 다 멋있는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옆에 붙어서 일하다 보면, 각자 성품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성격이 나오고, 사고방식이 나오고, 가치관이 나옵니다. 그때부터, 서로 부딪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고민이었습니다.
여러분! 서로 다르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옳고 그른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나와 다르다고 비판합니다. 비판하면 또 어떤 일이 생깁니까? 서로 자기 아집이 생깁니다. 아집이 생기면, 서로 공격하게 되고, 공격하면 서로 싸우게 되고, 싸우다보면, 분열하게 됩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에서, 실제로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겪었던 문제입니다. 또한 2천년 동안, 우리가 교회사를 통해서 경험해 왔던 사실입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배경과 보는 관점의 차이입니다. 노란 색을 좋아할 수도 있고, 빨간 색을 좋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좋아하는 것만 주장하다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간 데 없고, 자기 주장만 남습니다.
이런 갈등은,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사회에서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빈번히 일어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그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실천 명령들 중 한 가지는, 하나 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갈등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하나 되는 것이 교회이다. 이것이 세상과 다른 부분이다. 우리는 어떤 이유에서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하나 되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섬길 때 많은 해를 끼치게 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다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룰 수 없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사실은, 교회는 비슷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천차만별의 다른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끝까지 강조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요, 말씀입니다. 지적 배경, 정신적 배경, 도덕적 배경, 환경적 배경은, 전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서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와 다른 것을, 용납할 수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 믿게 된 배경도,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사회 참여를 강조하고, 어떤 사람은 성령의 은사를 강조하며, 어떤 사람은 도덕적 생활을 강조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구원을 강조하는 등, 자기가 배워 온 분위기에 따라, 다 다릅니다. 예를 들면, 부흥회를 통해 은혜 받은 사람들은, 그저 부흥회를 하자고 그럽니다. 그것만이 은혜 받는 유일한 비결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산 기도를 갔다가, 은혜 받은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산 기도를 가자고 합니다. 자기가 산 기도에서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찬양하면서, 은혜 받은 사람은, 찬양만 하자고 합니다. 성경 공부에 은혜 받은 사람은, 역시 성경공부만 하자고 합니다. Q.T에 은혜 받은 사람은, Q.T만 하자고 합니다.
여러분! 어떤 분위기와 배경에서, 자기가 은혜를 받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이 모든 것이 다 유익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한계가 있고, 부족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부족한 주장을 하게 되면, 분열과 어려움을 겪지만, 서로 사랑하고, 보완하면, 더 큰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후유증을 경험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교회에서 가장 먼저 실천해야 할 것으로, 제일 첫머리에 내놓은 것은, 서로 하나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어디 있고 게바가 어디 있느냐? 파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보여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라는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제목은 “하나되어 행하라”입니다. 하나님과 한마음되고, 목회자와 성도들간에 한마음되고, 성도와 성도간에 한마음될 때, 우리는 주 안에서 하나되어 행할 수 있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아멘.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는, 로마 감옥에 갇힌 몸으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 갇힌 나”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말에는 ‘주님 안에 있는 나’라는 뜻도 있는 줄 생각합니다. 물론 이 말은 자기가 감옥에 있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주님께서 자기 마음 속에 같이 계셔서, 주님의 말씀으로 권면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라고 권면합니다.
이미 생각한 대로 1장에서부터 3장까지의 말씀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본래는 세상에 속하였고, 우리의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아서, 영적으로 죽었던 가운데서 부활해서,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거룩하신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가 되었다는 것을 설명하였습니다.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존재이고,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예수 안에서 함께 약속에 참여한 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부름’이라는 말을 씁니다. 우리는 사람에 의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목사가 성도를 초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성도를 초대하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불러 주셨습니다. 성령님이 여러분을 이 자리에 불러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우리가 부르심을 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야 되겠다고 하면서, 2절에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라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겸손입니다.
“모든 겸손과”라고 말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겸손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사고방식에서, 겸손은 종이나 노예가 가져야 할 덕이었습니다. 자유시민들은, 겸손을 악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겸손은 종이나 노예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지, 주인이나 지배자들이 겸손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주인은 종을 마음껏 부려야 하는데, 주인이 겸손하면, 큰일납니다. 이것이 그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옛날부터 동양에서는 세 가지 덕,-지(知), 인(仁), 용(勇), 다시 말해 지혜롭고 어질고 용기 있는 것을 말했습니다. 서양에서는, 특히 헬라의 윤리사상에서는, 여기에 절제를 더해서 네 가지 덕을 말했습니다. 동양이나 서양의 윤리 사상에서는, 겸손을 그렇게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제일 먼저 겸손의 덕을, 가장 귀한 것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가르치는 것뿐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겸손의 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그 사실 자체가 겸손입니다. 예수님의 생활 전체가, 겸손에 대한 산 교훈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도, 예수님은 친히 수건으로 허리를 동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이것은 종이나 하는 일이지, 선생이 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겸손의 도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5절 이하에 보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시면서, 예수님은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셨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본받고 따르는 것이, 우리 믿는 사람의 생활이라면, 제일 먼저 겸손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언 6:16-17절에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곧 교만한 눈”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것을 싫어하고 미워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사실 하나님만 교만한 자를 싫어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교만한 것을 싫어합니다. 하긴 교만한 사람도 교만한 것을 싫어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고 말씀하였습니다.
사람도 그렇고 나라도 그렇습니다. 사실 교만은 모든 죄의 근본입니다. 교만하므로 많은 다른 죄를 짓습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사람은 반드시 망합니다.
시편 101:5절에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로다”고 말씀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교만한 것을 참지 못하십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첫째 되는 덕은 바로 겸손입니다. 그렇다면 겸손은 무엇입니까? 자기를 비우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소극적으로는 자기 자랑을 하지 아니합니다. 무슨 일을 해도 뽐내지 아니합니다. 자기 고집을 너무 세우지 아니합니다. 어떤 일을 당해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적극적으로 어디 가나 봉사합니다. 범사에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사람은 늘 마음에 평화가 있습니다. 겸손하면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습니다. 어떤 주장도 겸손하게 주장하면 절대로 상대방을 화나게 하거나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만한 태도로 주장하면 화가 나고 상처를 주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겸손하게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서로 섬기려고 할 때 교회는 하나 되기 시작합니다. 서로 겸손해질 때 교회는 든든히 세워집니다.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까?”
겸손한 사람들이 많은 교회입니다. 겸손한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교회는 은혜가 넘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은혜롭고 겸손한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만한 마음,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 나 밖에 모르는 마음을 다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자기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추고 오직 겸손함으로 사람들을 대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 효성선교교회가 은혜로운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누구나 오기만 하면 그냥 포근하고, 평안하고, 참된 쉼을 얻을 수 있는 은혜로운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가 은혜롭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 행복하고 풍성한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는 온유입니다.
2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아멘.
온유는 글자의 뜻대로 하면 ‘부드럽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온유는 무기력이 아니라 힘이 많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힘은 있지만 그 힘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고 극도로 절제하고,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을 가리켜 온유하다고 말합니다. 온유의 반대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자기 주장을 내세워서 반드시 관철시키려는 태도, 함부로 말하는 거친 태도, 무정하고 가혹한 태도라고 풀이되고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분이 있을지라도, 그 감정이, 성령님에 의해서 조절됩니다. 온유는 긴장과 분노에 찬 사람을, 풀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화가 나서 싸우다가도, 그 사람 얼굴을 보면, 그냥 잠잠해지는 것이 온유입니다. 또한 온유한 사람은, 평화로움을 느끼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주장도 겸손과 온유로 하면,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죄가 많은 사람은 온유할 수 없습니다. 화를 자주 내는 사람도 온유할 수 없습니다. 성격이 조절되지 않는 사람도, 온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인간의 의를 이루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적인 방법을 쓰거나, 서두르지 않습니다. 그냥 온유하게 기다립니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기 때문에, 온유와 겸손으로 모든 문제를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에 보면, “유순한 대답은 격노를 그치게 한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은 자보다 낫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온유한 것이 얼른 볼 때는, 약해 보이지만, 실상은 강한 것입니다. 이는 강퍅스럽습니다. 강합니다. 그러나 혀는 부드럽습니다. 그래서 가끔 강한 이로, 부드러운 혀를 씹으면, 피를 흘리면서도 혀는 참습니다. 그런데 어느 것이 오래 갑니까? 이입니까? 혀입니까? 이는 얼마 못 가서, 고장이 나고, 50이나 60이 되면 다 상해서, 어떤 분은 남은 것까지 뽑아 버리고, 의치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나이가 많은 분이라도, 혀에 고장이 나서 뽑아 버리고, 혀를 새롭게 한 사람을 볼 수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보셨습니까? 온유한 것이 강한 것보다 더 강합니다. 특별히 이 온유의 덕이, 단체생활, 교회생활에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말을 해도, 될 수 있는 대로, 부드럽게 해서,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이 없도록 하시기를 바랍니다. 말 한 마디로 원사가 되기도 하고,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기도 합니다. 온유함으로 땅을 기업으로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는 오래 참음입니다.
2절 가운데 있는 말씀을 보십시오.
“오래 참음으로”
오래 참는 것, 즉 인내는 무엇입니까? 무슨 일을 하든 중간에 결코 포기하거나, 적당히 타협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기다릴 뿐입니다. 자기가 분명히 옳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그것을 순식간에 이루려고 하지 않고, 온유와 겸손으로 오래 참고 기다립니다. 오래 참고 기다림으로 하나님의 복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에 대해 제일 많이 한 말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오래 참고’라는 말입니다.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한가’라고 말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 제일 중요한 것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참아 주는 것입니다.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오래 참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결코 속전속결이 아닙니다. 속전속결로 하면 깨집니다. 서로 오래 참고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실수해도 참아 주고, 또 참아 주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깨달을 때까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때까지 참아 주고, 기다리고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할 일입니다. 교회 안에는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일이든 온유하고 겸손하게 기다리고 있으면, 우리의 소망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시간에 정확하게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오래 참고 기다린다고 해도 우리의 지나친 욕심은 결코 들어주지는 않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우리의 어떠한 모습을 하나님이 과연 기뻐하실까? 나는 지금 내 욕심을 챙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왜 오래 참아야 합니까?
히브리서 10:36절에 보면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기 위하여 인내해야 합니다. 어떤 일을 마무리 하는 것이 끝이 아니라 그 일 후에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풍성하신 약속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 때문에 인내하는 것입니다. 오래 참는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계속해서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참으셨습니까?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했는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애는 한마디로 말해서 ‘인내’입니다. 우리에게 부탁하신 말씀도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고 “인내로써 너희가 너희 영혼을 보존할 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5:22절의 성령의 열매 가운데 사랑과 희락과 화평 그리고 다음이 인내입니다. 사도 야고보도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인내가 있어야 우리의 신앙생활이 온전해서 구원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이 너무 힘들어서 지친 분도 계시리라 믿습니다. 빈곤으로 인해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서 말할 수 없이 고생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오해로 인해서 상심이 되신 분도 계실 줄 압니다.
중상과 모략으로 가슴 아파 하시는 분도 계시겠지요. 고독한 가운데 외로워하시는 분, 세상의 여러 가지 어려운 짐을 지고 안타까워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뿐만 아니라 영적인 문제로 절망하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인내의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죽음과 절망 가운데에서 일어서신 주님을 바라보면 새로운 소망이 생깁니다.
이제 앞으로 우리 앞에 어떤 어려움이 닥칠런지 모릅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 참으신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을 바라봄으로써, 피곤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야고보서 1:12절 말씀을 꼭 기억하십시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앞에 놓여진 여러 가지 일에 오래 참음으로 하나님의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다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 번째는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는 일입니다.
2절 하반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서로가 조금씩 다른 점이 있다고 할지라도 너그럽게 생각하고, 혹 누가 좀 실수를 해도 용납해 줄 뿐만 아니라 사랑으로 용서해 주라고 권면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형제가 잘못하는 일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없는 사람인데,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모든 죄를 용서함 받고, 하나님께 용납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 형제가 내게 잘못한 것이 다소 있다고 할지라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진실로 사랑하면 용납합니다. 거짓 없이 사랑하면 모든 것을 덮어줍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내 눈에 다른 사람의 잘못과 허물이 자꾸 보이게 되면, 이것은 내 마음에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아마 기독교에서 사랑의 요소를 제거해 버린다면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교회에 사랑이 없다면 사람들이 모인 집단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교회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 중의 첫째입니다. 아니 성령의 다른 모든 열매도 사실은 사랑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세상을 뒤집어엎을 정도로 능력 있는 교회,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교회,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이 많아진 교회가 된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 충만해서 사랑으로 하나된 교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는 교회는 부흥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뜨겁게, 뜨겁게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 가운데서 서로의 허물을 덮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 가운데서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 가운데서 서로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뜨겁게 사랑함으로 우리 효성선교교회에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기를, 은혜의 강물이 흘러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섯 번째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3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아멘.
성령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것은 하나 되게 하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17장을 보면, 대제사장의 기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하신 내용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1-23). 아멘.
여러분! 여기서 ‘하나가 된다’는 말은, 모든 것이 똑같다는 말이 아닙니다. 서로가 다르지만, 한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곧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지체는 그 기능이 각각 다르지만, 한 몸에 붙어서 한 목적을 위해 삽니다. 그러므로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한 지휘자의 지휘 아래, 제각기 자기의 소리를 바로 낼 때, 호흡이 맞을 때, 훌륭한 화음이 되어, 아름다운 합창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을 따라 평화의 매는 줄로 하나를 이룰 때 놀라운 하늘의 합창을 노래해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이건 부끄러운 말이지만, 우리 개신교는 사회에 공헌이 많은 반면, 약점 가운데 하나는, 너무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는 것입니다. 다투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싸우는 것은, 결코 덕이 되지 않습니다. 언성이 높아지는 것은, 은혜로운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우리 믿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으므로, 어떻게 하든지, 교회는 하나 되어서 화평함으로, 불행한 저들에게, 행복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킴으로, 여러분의 삶과 가정과 직장에서, 여러분이 하는 일마다, 잘되고, 형통하여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교회 건축에 관한 이야기 가운데,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어서, 여러분에게 소개하겠습니다.
몇 백년 전의 일입니다. 어느 마을에서 방앗간과 교회를 지을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방앗간 하나와 교회를 설계했는데, 방앗간은 냇가 밑에 있고, 교회는 언덕 위에 있게 되었습니다. 조그만 마을이기 때문에, 마을 공동 주관 위원회에서, 다 주관해서, 그 건물을 지었는데, 짓다보니, 설계도가 바뀌었습니다. 산동네에다 방앗간을 짓고, 아랫동네에다가, 교회를 짓게 되었습니다. 말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는 사랑으로 하나 되는 동네였기 때문에, 이렇게 결론이 났다고 합니다. 방앗간 같은 교회를 짓고, 교회 같은 방앗간을 짓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동네에는 아직도 방앗간 같은 교회가 위에 있고, 교회 같은 방앗간이 아래에 있다고 합니다.
방앗간 같은 교회면 어떻고, 교회 같은 방앗간이면 어떻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일들을 처리해 가는 성숙한 모습입니다. 그 일들을 통해서 ,참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질적인 어떤 유산을 전혀 남겨 주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세상을 떠나실 때 가지고 계셨던 것은 로마 병정들의 손에 들어간 옷 한 벌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돈보다 값지고, 넓은 영토보다, 더 좋고, 위대한 유산을 남겨 주셨습니다. 그것은 평안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이 평안을 가지고 하나 되는 일에 힘써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겸손과 온유와 인내와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킴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여러분의 삶과 교회 가운데 풍성하게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부름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늘 부활의 소망 강누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