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독립문을 세우기 위해 영은문을 철거
영은문
독립문(1898)
독립문(獨立門)은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 자주독립 결의를 다짐하며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사대외교(事大外交)의 상징인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세워졌다. 따라서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 19세기 말 자주민권 자강운동의 한 기념물이다. 1894~1895년에 이른바 갑오경장으로 내정개혁과 제도개혁을 단행하였으나, 청(淸)나라와 일본의 간섭, 그리고 아관파천(俄館播遷) 후 러시아의 간섭으로 나라의 자주독립이 위협을 받게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민족의 자주독립 결의를 다짐하려는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1896년 2월 사대외교의 상징인 영은문이 헐리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1884년의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실패한 뒤 미국에 망명해 있던 서재필(徐載弼)이 1896년 귀국하면서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사대외교의 표상인 영은문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울 것을 당시 뜻있는 인사들에게 발의하였다. 독립문 건립은 오래도록 계속되어 온 중국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는 동시에, 당시 우리나라를 위협하고 있던 일본ㆍ러시아ㆍ서구열강들의 간섭으로부터 탈피하여 영구 독립을 이루기 위한 상징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그의 발의는 국민과 애국지사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었으며, 1896년 6월에는 독립문 건립계획이 구체화되었다. 국왕의 동의를 얻고, 9월 6일에 독립문 건립을 서재필이 담당하도록 하고, 3,852원의 건립비용을 책정하였다. 이때 치욕의 영은문도 헐리고 그 뒤에 있던 모화관(慕華館)을 독립관(獨立館)으로 바꾸었다.
11월 21일 대대적인 정초식(定礎式)을 거행하였고, 그로부터 1년여 뒤인 1897년 11월 20일에 완공되었다. 독립문의 건축양식은 서재필이 구상하여 기본적으로 프랑스 파리에 있는 개선문(凱旋門)을 참고로 이루어진 것이며, 비용 때문에 개선문보다 축소되었다. 서재필의 자서전에 따르면, 문의 설계는 당시 독일공사관에 있던 스위스 기사가 담당하였고,
공사는 우리나라 목수(木手)인 심의석(沈宜碩)이 맡아 시공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경성부사(京城府史)≫에는 러시아 사람인 사바친이 했다고 하여 어느 쪽이 옳은지 분명하지 않다. 독립문은 좌우에 화강석 돌기둥을 세우고 중앙에 홍예(虹霓)를 설치하였다. 그 한쪽에는 내부로 드나들게 출입문을 두어 옥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으며, 상부에는 돌난간이 돌려져 있다. 이맛돌에는 대한제국의 문장(紋章)인 오얏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문 정면과 뒷면에는 좌우에 태극기가 새겨지고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 ‘獨立門’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현판석(懸板石)이 있다.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나, 1979년 성산대로가 개설되면서 원 위치에서 서북쪽으로 70m 정도 떨어진 지점으로 옮겨 세우고,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문 앞에는 영은문 주춧돌(사적 제33호) 1쌍이 서 있다. /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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