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녘의 어깨
정끝별
내가 본 창경원 코끼리의 짓무른 눈꺼풀을 너도 봤다든가 내 흰 여름교복 등에 떨어진 송충이를 털어주고 갔던 그 남학생이 너였다든가 네가 잡았던 205번 버스 손잡이를 내가 잡았다든가 시청 앞 최루탄을 피해 넘어진 나를 일으켜준 손이 네 손이었다든가 2호선 전철에서 잃어버린 내 난쏘공을 네가 주워 읽었다든가
네가 앉았던 삼청공원 벤치, 내가 건넜던 대학로의 건널목, 네가 탔던 동성택시, 내가 사려다만 파이롯트 만년필, 네가 잡았던 칼국수집 젓가락, 내가 전세 들고 싶었던 아현동 그 집……
신성한 시계공은 왜 그때 깜빡 졸았을까
열쇠수리공은 하필 그때 열쇠를 잃어버렸을까
도박사는 하필 바로 그때 패를 잘못 읽었을까
아뿔싸 이브는 왜 하필 바로 그때 사과를 건넸을까
너 있고 나 없어 너 없고 나 있어
시작되지 않은 수많은 이야기들
허구 가득한 불구의 이 수많은 끝은
어느 생에서 다 완성되는 걸까
네 초등학교 졸업사진 배경에 찍힌 빨간 뺨의 아이가 나였다든가 혼자 봤던 영화를 나란히 앉아 봤다든가 결혼식 하객으로 따로 또 같이 서서 사진을 찍었다든가 너와 내가 한날한시에 같은 별을 바라보았다든가 네가 쓴 문장을 내가 다시 썼다든가 어느 날 밤 문득 같은 꿈을 꾸다 깨었다든가
—《문학청춘》2010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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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끝별 / 1964년 전남 나주 출생. 1988년 《문학사상》(시), 1994년 〈동아일보〉신춘문예(평론)로 등단. 시집 『자작나무 내 인생』『흰 책』『삼천갑자 복사빛』『와락』등. 현재 명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첫댓글 그동안 정끝별 시인에게서 느꼈던 실망감(?)을 단번에 날려버릴 수 있는 수작입니다. 정끝별 언니, 이제사 정신차리셨나 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