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판정을 받은 후 고통을 받아들이며/ 이동우>
이동우 “모든 고통 겸허하게 받아들이던 아내의 모습에서...”
실명 판정 받은 후 현저히 시력이 떨어져 갑니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또 다른 고통이 찾아온다는 것
그게 삶이라는 것
그러나 그 고통 또한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2004년 봄, 그러니까 결혼한 지 3개월 만이었습니다.
연애 시절부터 야맹증이 심해서 불편함을 겪었던 터라
아내는 어느 햇살 좋은 날, 저에게 병원에 가자고 했습니다.
야맹증에 좋은 약을 처방받고 나서 영화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자며 신혼 분위기에 들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집으로 금방 들어와야만 했습니다.
들어오자마자 저는 책상에 엎드려 겁에 질린 아이처럼 온몸을 떨며 절규했고,
아내는 그런 저를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망막 색소변성증'.
눈의 망막 세포가 변해 바깥 시야가 좁아지면서
터널처럼 가운데 부분만 보이다가 점차 시력을 잃는 병입니다.
미국은 40만명의 환자가 있고,
일본은 6000명 중 한 명꼴로 발생한다고 합니다.
발병 원인조차 아직 알려지지 않아 딱히 치료 방법도 없고,
진행 속도를 늦출 수 있는 약조차 명확하게 나온 게 없는 희귀병입니다.
눈을 뜨면 볼 수 있다는 것은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제게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앞으로 볼 수 없다"는 그런 진단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기엔
제 운명이 너무 가혹하게 느껴졌지요.
수년이 흐르는 동안 저는 몸과 마음이 많이 망가졌습니다.
개그 그룹 '틴틴 파이브'의 멤버로
홍록기, 표인봉, 김경식, 이웅호 등과 함께 박수소리에 파묻혀 지냈던 날도
세월 속에 점점 잊혀졌습니다.
툭하면 시비 걸고 소리지르고 닥치는 대로 집어던졌습니다.
취하면 잠들고 다시 일어나면 술을 찾았습니다.
집에 덩그러니 혼자 있게 되는 날엔
죽을 결심으로 아파트 베란다를 서성이곤 했습니다.
그렇게 엉망진창인 저에게
아내는 단 한 번도 인상 쓰는 일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돈도 못 벌어 오고 술만 마시며 잠만 자는 남편과
평생을 살아야 하는 자기의 참담한 현실을 참아내기가 버거웠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내는 오히려
이왕이면 좋은 곳에 가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술을 마시라고 했고
늘 손에 용돈까지 쥐여주곤 했습니다.
저는 아내의 정성스러운 그 사랑 앞에
서서히 거친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안정을 되찾아 갈 무렵,
아내가 뇌종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저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수술을 하더라도 아내에겐 청력 상실이나 반신마비 등과 같은
후유증이 생길 것이라고 했습니다.
'죽을 힘으로 살아라' 하는 말이 맞더군요.
온몸에 힘이 너무 빠져서 자살할 엄두조차 나질 않았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저희 부부는 순리를 따랐습니다.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어차피 이렇게 된 것,
모든 걸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더 이상 원망해봤자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다는 판단이었겠지요.
지금 아내는 한쪽 귀의 청력을 잃었고,
저는 1급 시각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또 다른 수술 후유증이 언제 올지 모르지만
아내는 오늘도 저를 향해 방실방실 웃어줍니다.
저는 시각장애인용 흰 지팡이가 없으면
집 앞 수퍼마켓도 못 갈 정도로 병이 진행됐고
집안에서도 이리 부딪히고 저리 걸려 넘어집니다.
그런 저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다시 방송 MC 일이 주어졌고
얼마 전엔 그간의 일상과 기억을 담은 에세이 책도 펴냈습니다.
그리고 저희 부부에게 토끼 같은 딸도 태어났습니다.
아이를 갖는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사치라고 생각했던 저희 부부에게
어느 날 천사처럼 하늘에서 까맣고 눈 큰 여자 아이가 내려온 것이지요.
그런 갓난 딸을 밟거나 차기도 해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그 아이가 어느덧 자라 이제 다섯 살이 되었고,
요즘은 지팡이를 손에 들고 있는 아빠의 모습을
꽤나 예쁘게 그려냅니다.
저에게, 아니 저희 가정이
이렇듯 보석 같은 일상을 다시 얻을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돌이켜보면 그 안에는 간절한 기도가 있었고
절박한 몸부림도 있었습니다.
가족들의 사랑과 친구들의 응원,
그리고 수많은 분들의 격려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축복을 받아들일 그릇을
아내가 만들어 주지 않았다면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고통과 불행을 겸허하게 자기 것이라고 받아들이던
아내의 모습에서, 살면서 갖지 못했던 빈 그릇을 하나
얻은 셈이라고 할까요.
욕심과 욕망으로 가득 차서 더 이상은 채울 수가 없는,
그래서 허영으로 잔뜩 부풀었던 저 자신을 발견한 것이지요.
그 빈 그릇은 저를 매우 용기 있는 남자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동안 겪었던 불행과 고통이 좀 컸다고 해서
그게 제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겪어야 할 시련의 전부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아내는 발을 만지면서 감각이 무디다고 합니다.
이게 또 다른 후유증의 예고인가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하지요.
저는 실명 판정을 받은 후로도
하루가 다르게 시력이 떨어져 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전 알고 있습니다.
내가 사는 한 언제든지 또 다른 고통이 찾아올 수 있음을.
그게 삶이라는 것을.
하지만 저는 또 알고 있는 게 있습니다.
그런 고통 또한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음을….
머지않아 저는 연극무대에 오릅니다.
그것도 주인공 역을 맡아 노래하고 춤을 춥니다.
다시 무대에 오를 수 있다는 생각에
저는 18㎏의 체중감량도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눈이 안 보여 연습과정이 불편하고 힘들지만,
요즘처럼 행복한 순간이 있었을까 싶습니다.
막이 오르고 조명이 켜지면
아내는 저의 연기를 보며 울고 웃을 겁니다.
전 보이지 않지만 아내가 잘 봅니다.
그 사실이 절 들뜨게 합니다.
제가 들뜨고 꿈틀거리는 한
그토록 바라는 기적도 같이 꿈틀거릴 것입니다.
아내가 저를 향해 박수를 보내는 순간, 그 기적도 눈을 뜰 것입니다.
저는 이제 아내가 준 그 빈 그릇에 그날의 행복도 함께 담으려 합니다.
등록 : 2010-11-08 09:57
- 출처: 밴쿠버 조선일보
(이동우-실명후행복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