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김효주 아녜스와 효임 골롬바는
그들보다 먼저 성인품에 오른 아녜스와
비비안나라고 불릴 만큼 과연 그들의 순교는
가히 한국교회가 낳은 가장 장한 순교였다.
효주와 효임은 어머니가 두 자매를 임신할 때마다
문고리에 달린 거문고를 꿈에 보았고
또 그 기묘한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1816년에 출생한 효주는
언니 효임과 같이 중국인 유 파치피코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한편 아버지는 천주교 이야기를
전혀 들으려 하지 않을 뿐더러
집안에서 이를 엄히 금했다.
또한 부인과 딸들에게 미신 행위를 강요하므로
그들은 그때마다 몸을 피해 절대로 복종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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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주는 천성이 온순하고 상냥했으며,
그의 모습은 외모에도 역력했다.
입교한 지 얼마 안 되어
벌써 효주의 아름다운 표양에 탄복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의 집은 본시 부유했으나
효주는 언니 효임과 함께 전혀 재물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다만 열심 수계하는 데 전념했다.
효주는 묵주가 없는 교우에게 직접 만들어 나눠주고
가난한 교우들에게 많은 애긍을 했으니
또한 그들은 그것을 본분으로 여겼다.
때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어쨌든 효주 일가는 그 사이 밤섬에서
고양(高陽) 땅 용머리로 이사해
오빠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기해년 박해가 점차 심해져
사방에서 교우들이 체포되었다.
마침내 5월 3일 포졸들이 아는 사람을 데리고 와
그들의 집을 포위했다.
모두 피신하고 효주와 언니 효임
그리고 3살 된 어린아이만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일단 마을 이장에게 인도되었다가
어린아이만을 남겨둔 채
효임과 효주만을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했다.
체포 당시 포졸들이 동생 효주에게
몹시 심하게 굴자 효임은 용감하게 포졸들을 꾸짖었다.
“당신들이 우리를 잡아가면 따라 갈 것이다.
하지만 왜 이렇게 거칠게 군단 말이오?”
포청에 온 효주는 언니 효임과 함께
모진 고문과 혹형을 받았는데,
하루는 형리들이 효주를 외딴 방으로 끌고 가
학춤이라는 형벌을 가했다.
이 형벌은 죄수를 옷을벗기고 손을 뒤로 결박 지어
팔을 공중에 매달아
네 사람이 번갈아가며 매질을 하는 것이다.
몇 분만 지나면 혀가 빠져나오고 입에 거품이 고이며
얼굴빛은 검붉어져서 내려 쉬게 하지 않으면
곧 죽게 되는 형벌이다.
형리들은 효주가 일찍이 들은 일이 없을 만큼,
혹독히 때리며 여러 가지 조롱과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효주는 더욱 더 열심히 자기 고통을 천주께 바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때론 형벌을 중지시키고 달래보기도 했으나
효주는, “천주대전에 가기 위해 나를 빨리 죽여주시오.”
이렇게 간청할 뿐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또한 언니가 겪은 형벌을 직접 목격함으로써
혈육의 고통까지도 달게 참아 받았으니
그의 온순함은 무서운 고문이나 죽음보다 더욱 강했다
5월 9일 효주 아녜스는
언니인 효임 콜룸바와 함께 형조로 이송되었고
언니 효임 콜룸바보다 먼저 순교의 칼을 받고 순교하니,
때는 1839년 9월 3일. 나이는 24세였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천주교부산교구"오늘의성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