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통속극, 신선하다?
우리나라 드라마가 워낙 2, 30대의 사랑 이야기를 주로 다루다 보니 자연히 주인공도 2, 30대의 탤런트가 맡게 됩니다(10대의 사랑을 다룬 드라마도 요즘 한창 인기이지만). 그러다 보니 비주얼은 훌륭해도 연기력 논란은 대부분의 드라마에서 불거지고 있습니다. 시청자 입장에서는 스토리의 개연성 여부를 떠나 주인공의 연기까지도 이해해 가며 봐야 하는 거죠.
이런 속에서 중년, 그것도 50대의 사랑을 기둥 줄거리로 삼은 <미워도 다시 한 번>은 최명길, 전인화라는 '연기의 달인'이 등장하기에 주인공의 연기를 조마조마하지 않고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일단 안심이 되는 드라마입니다. 나아가, 젊은이들이 사랑에 목숨을 걸 때 '철 없는 것들'이라며 호통치던 부모님 연세의 인물들이 사랑하는 이야기라니, 이건 뭐 신선하다고 해야 할까요?
저는 이 드라마가 명품 배우들을 데리고 도대체 50대의 삶과 사랑을 어떻게 다룰지 기대했습니다만 뚜껑을 열고 보니 이들의 모습은 20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른 드라마에서 50대 부모가 20대 자녀를 보고 쯧쯧 할 때, 이 드라마에서는 50대가 나서서 가족이건 일이건 다 팽개치고 사랑 하나에 목숨을 매달고 있는 격입니다.
물론 사랑은 삶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우리는 젊은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드라마들에서 충분히 그 사랑을 보고 또 보았습니다. 드라마는 사랑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출생의 비밀, 삼-사각 관계, 막장 시부모, 불륜, 복수를 끊임없이 소재로 사용했습니다. 젊은이가 '이 죽일 놈의 사랑' 때문에 방황하고 싸우고 미워하고 반항하고 속고 속이고 복수하는 것, 충분히 보았다는 뜻이지요.
은혜정, 국민배우가 부르는 '사랑밖에 난 몰라'
연기를 문제삼지 않아도 되는 이 드라마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은혜정의 캐릭터입니다. 이 사랑이 아니면 나는 죽겠다? 나이 50이 넘은 '국민배우'가 반평생 넘게 쌓아온 커리어도 포기하고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까지 감수하겠다며 한 남자에게 집착하는 모습은 상식 밖이라 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은혜정은 이정훈을 알거지가 되게 하더라도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습니다. 심지어 전 국민이 보는 TV 프로그램에 나가서 실명을 거론하는 무덤을 팠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국민배우'라는 호칭을 듣는 안성기 씨를 예로 들어 생각해 봐도, 그가 만약 좋은 연기와 더불어 좋은 이미지를 수십 년간 쌓아오지 못했다면 50대의 나이에 그런 호칭을 얻을 수 없었겠지요. '국민배우'란 단순히 연기 잘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호칭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신뢰감을 주는 인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방황하는 사춘기 십대도 아니고 사랑의 열병에 눈이 멀 이십대도 아닌, 오히려 인생에서 산전수전 다 겪고 포기할 것은 포기해야 한다는 것도 알 나이인 50대에 은혜정이 갑자기 이런 집착을 보이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지금껏 30년을 그의 연인으로, 실질적인 부인으로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요?
정훈이 갑자기 원래 가정에 충실하겠다고 선언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이해를 하고 넘어가 보지요. 그래도 또 캐릭터에 문제가 생깁니다. 드라마 초반에는 각종 기사에서 은혜정을 '팜므파탈'로 소개했습니다. 이제야 가정에 충실하려고 하는 남자를 빼앗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그 가정을 파탄으로 이끄는 역할이라 하여 현모양처 이미지의 전인화가 이런 역을 맡았을 때 꽤 화제도 되었습니다.
일단 팜므파탈이라면 다른 여러 특징들이 있겠지만 똑똑하고 계산이 빨라야 합니다(<아내의 유혹>에서 신애리와 점이 생긴 구은재가 그랬듯이요). 정훈이 가정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자 은혜정은 한명인 회장에게 접근하여 자신을 유일한 친구로 믿게 만들었습니다. 이때만 해도 앞으로 은혜정이 어떻게 한명인을 요리할지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진 것처럼 기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실로 어이 없는 해프닝으로 끝나 버렸습니다. 은혜정이 한 것이라고는 기껏 '한명인이 이정훈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보내 주겠다'라는 것이니 말입니다. 무슨 팜므파탈 캐릭터가 이렇단 말입니까?
심지어 이정훈과 내연의 사이임을 드러낼 증거가 한가득 쌓여 있는 방에 한명인을 눕혀 놓아서 곧바로 들키기까지 했습니다. 은혜정이라는 팜므파탈은 활을 한껏 당겨놓고는 시청자에게 김이 팍 새게 해 버렸습니다. 은혜정 캐릭터가 이렇게 약하니 두 여자의 '배틀'을 지켜보는 것도 똑같이 긴장감이 떨어질 수밖에요.
한명인의 뜬금없는 복수심
한명인 역을 맡은 최명길 씨는 연기에 대해 연일 극찬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캐릭터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금할 수가 없군요. 20대 때 가슴 아픈 사랑을 해봤고 그 이후 마음을 닫고 30년을 살아온 냉혈 여인 한명인. 참 매력적인 캐릭터라 할 수 있는데, 초반에 최윤희(박예진)와 '배틀'을 벌이는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 은혜정과 치를 '배틀'이 더 기대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뚜껑이 열리고 보니 한명인 또한 이해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30년간 소 닭 보듯 무시하며 살아온 남편을 향해 새삼스럽게 잘해 보자고 하면서, 드라마 초반에는 남편이 그동안 부정을 저질렀더라도 호쾌하게 넘어갈 것처럼 말했습니다. 그러다가 상대가 은혜정이라는 사실을 알더니 갑자기 엄청나게 충격을 받고 복수를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사실 자신도 옛 남자를 잊지 못하여 남편을 받아들이지 못했으면서 왜 남편의 불륜에 그렇게 상처를 받은 것일까요? 다른 여자는 다 되는데 은혜정이라서 용서를 못한다고요? 만약 은혜정이 <아내의 유혹>에서 신애리와 구은재처럼 오랜 친구 사이였다면 이해가 될 법도 한데, 이들은 서로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고 복수를 하려는 것인지 명분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대로 가면 배우들의 연기가 아깝다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는 등장인물에게 감정이입을 시키게 됩니다. 반드시 선인과 악인을 구별하지 않더라도 등장인물에게 최소한 애정이든 연민이든 분노든 무슨 감정이 생기는 것이 정상이고, 그래야 드라마 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워도 다시 한 번>에서는 도대체 은혜정과 한명인 중 누구에게 감정을 품어야 할지 혼돈스럽습니다. 연륜도, 사회적인 지위도 깡그리 무시하고 사랑밖에 모르겠다는 은혜정에게 몰입하기도, 이해 못할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는 한명인에게 몰입하기도 어색하니 <미워도 다시 한 번>은 그저 좋은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것에 만족해야 하는 드라마인가요?
다행히도 박예진이 맡은 최윤희 캐릭터는 생명력과 매력이 통통 튑니다. 덕분에 은혜정과 한명인의 '유치한' 사랑싸움과 복수전보다는 최윤희와 한명인의 구도가 훨씬 흥미롭습니다.
정겨운이 맡은 이민수 캐릭터도 만만치 않던데 이 드라마 최고의 고단수 최윤희가 앞으로 어떻게 요리할지, 이 부분을 지켜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13회에서는 이민수를 유혹하려는 최윤희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던데, 둘 사이가 너무 빨리 '작전'에서 '사랑'으로 진전된다면 팽팽하게 당겨진 재미가 덜해질 테니 완급 조절이 필요해 보입니다.
복수심과 분노를 드러내기 위해 <아내의 유혹> 등의 드라마에서 악다구니를 치고 뺨을 때릴 때 <미워도 다시 한 번>은 나이에 걸맞게 좀 더 우아하고 치밀하게 상대방의 목덜미를 움켜쥐려 함으로써 드라마의 재미를 배가시킵니다. 막장이 될 요소를 다분히 지닌 드라마임에도 배우들의 좋은 연기로 칭찬받고 있는데, 초반부를 지났으니 이제 속히 캐릭터를 제대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배우들의 연기가 아까워질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