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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 진사 제암 이공의 묘갈명 병서(成均進士霽庵李公墓碣銘 幷序)
제암(霽庵) 이공(李公)의 장례를 치른 것이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인데, 그 증손 집 등이 묘소의 왼편에 묘갈을 세우고자 공의 족제(族弟) 대계공(大溪公, 01)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갈명을 부탁하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 두 집안은 한집과 같다. 비록 내가 글재주가 없더라도 어찌 이를 사양할 수 있겠는가. 삼가 살피건대 공의 휘(諱)는 주로(周老)이고 자는 유진(幼鎭)이며, 처음 이름은 종유(宗儒)이고 자는 유진(幼珍)이었다.
고성이씨(固城李氏)는 세대가 오래된 집안으로 우리 동방의 큰 문벌이다. 고려에 문정공(文貞公) 행촌(杏村) 암(嵒)과 문경공(文敬公) 평재(平齋) 강(岡)이 있었고, 조선에 와서는 좌의정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용헌(容軒) 원(原)이 더욱 드러난 분이다.
용헌(容軒)의 여섯 번째 아들로 현감을 지냈고 이조참판에 추증된 증(增)이 처음으로 안동에 터를 잡았고, 그 아들인 현감 명(洺)과 손자인 별제(別提) 굉(肱)이 모두 벼슬을 버리고 강호로 돌아와 지내면서 임청각(臨淸閣)과 반구정(伴鷗亭)을 지었다.
6세에 이르러 후영(後榮)이 문과에 급제하여 정랑(正郞)을 지냈으니 이분이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시방(時昉)이며 호는 이가당(二可堂)이다. 조고는 헌복(憲復)이며 생원으로 호는 평지옹(平地翁)이고, 부친은 효경(孝慶)이다. 대를 연이어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며 덕행과 문학으로 가문을 이어왔다.
모친 남양홍씨(南陽洪氏)는 학생 적(適)의 딸로, 숭정처사(崇禎處士, 02) 우정(宇定)의 후손이니 지극한 성품과 아름다운 행실이 있었다. 공은 영조 기사년(1749, 영조 25)에 태어났다. 나면서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어 겨우 배우기 시작해서도 문의(文義)는 그 본말을 반드시 밝히니, 생원공이 매우 기이하게 여기며 “이 아이가 내 뜻을 이룰 것이다.”라고 하였다.
1세에 생원공이 세상을 떠나자 영은공(嶺隱公, 03)에게 가르침을 청하고 매일 1백 줄을 배웠는데 책을 등 뒤에 두고 암송하였다. 수년 안에 경전(經傳)에 다 통달하고 곁들여 제자서(諸子書)까지 통달하여, 발하여 드러내어 문장을 지으면 이미 노련한 구기(口氣)를 이루었다. 15세에 김경동(金慶東)의 집안에 장가를 들었는데 덕망 있는 어른들이 모두 일컬어 ‘단아하고 성숙하다.’라고 하였다.
정유년(1777, 정조 1)에 두 번의 향시에 합격하고 진사에 올랐는데, 축하연을 베풀 때에 대산大山 이 선생(李先生)이 축하의 자리를 주재하면서 깊이 인정하고 장려해 주었다.
신축년(1781, 정조 5) 성균관에 들어갔을 때, 정조께서 교화를 일으켜 성균관의 유생을 이끌어 경전을 강론할 때, 공의 용모가 단아하고 신칙하며 응대가 정밀하고 상세함을 보고, 들어 그가 영남사람임을 알고 더욱 기이하게 여기고 “떠나지 말고 성균관에 머물라.”라고 하교하셨다.
그러나 얼마 뒤 모부인이 편치 않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가 수년을 모셨다. 혹 어떤 이가 성균관으로 돌아가길 권하면, 개연히 탄식하며 “설사 내가 이로 말미암아 뜻을 이룬다 하더라도 하루의 봉양을 어찌 바꿀 수 있겠는가. 하물며 궁함과 영달은 천명이 있거늘 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에랴.”라고 하였다.
마침내 외물을 사모하는 뜻을 끊고 부모를 봉양하고 제사를 받드는 일에 힘을 다하였다. 여가가 있으면 경전을 읽고 문자를 베꼈고, 혹 꽃과 대나무를 가꾸는 것을 즐거워하며,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정성을 다하며 게을리하지 않았다.
병진년(1796, 정조 20)에 영남의 유생들에게 어정오경백선(御定五經百選), 04)을 교정하라는 왕명이 있어 공도 그 일에 참여했다. 교정을 마치고 진상하니, 특별히 교지를 내려 시전(詩傳). 노론(魯論). 주자서(朱子書) 등을 반질하며 노고에 보답하였다.
이에 공이 발문(跋文)을 지어서 그 일을 기록하고 날마다 소제(掃除)한 뒤 뽑아서 보았다. 손님들이 찾아오면 그들과 더불어 경서와 사서를 상량하고 토론하며 화락하였다. 정사년(1797, 정조 21)에 모친상을 당하고, 병인년(1806, 순조 11)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예식에 어긋남이 없었고, 3년상을 마치고 나서는 날마다 가묘를 배알하고 달마다 산소를 찾았다.
선조의 유문(遺文)과 의적(懿蹟)은 새로이 손질하여 차례대로 찬집하였고, 제전(祭田)을 별도로 마련하고, 묘석을 수리하여 거의 가닥을 잡기에 이르렀으나, 공이 이미 병이 들었다. 병이 위독해지자 자제들을 둘러보고 “과거 공부는 외물이니, 세속을 따라 허둥대다 선조의 덕을 욕되게 하지 마라. 우리 가문은 4세의 종가이다.
통솔하고 가르치며 기르는 일은 모두 종자(宗子)의 책임이니, 장공예(張公藝)의 백인자(百忍字, 05)를 응당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나는 효도를 잘 마치지 못했으니, 장사는 반드시 부모님의 무덤 아래에 지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에 남긴 경계를 글로 쓰도록 했는데, 모두 선조를 받들고 가문을 지키는 절도였다. 쓰기를 마치자 부녀자들을 물리치고 이부자리를 정리한 뒤에 세상을 떠나니, 이날이 바로 신미년(1811, 순조 11) 윤3월 24일로 향년 63세였다. 고을 남쪽 무릉(武陵) 간좌(艮坐) 언덕에 장사 지냈는데, 목란(木蘭)을 심어놓은 부친 묘소가 바라보이는 가까운 곳이었다.
공은 온화하면서도 덕성이 있었고 장중하면서도 도량이 있었다. 심오하면서도 명쾌하고, 소탈하면서도 치밀하였다. 두 눈동자는 빛나고, 온 얼굴이 환하였다. 약관의 나이에 이미 당시 사람들로부터 신망이 있었고, 고을의 선배들이 혹은 외우(畏友)로 대하였고, 혹은 국가를 경영할 인물로 허여하였다.
부모를 모심에 한결같이 정성으로 하며 지체(志體)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모시기를 다하였고, 병환을 돌볼 때는 신명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감응을 바랐으며, 장례에 필요한 물품은 다 미리 준비하여 일을 당해서 유감이 없게 하였다.
집안은 엄숙하고 경건하여 마치 조정과 같았으니, 자제들은 가르침의 조목을 감히 어기지 않았다. 친척들을 돈독하게 대하여 모두에게 환심을 얻었다. 그가 마을에 있거나 집안에 있을 때 일을 만나면 칼날을 대듯이 의리로 결단하였고 확고하여 다시 흔들리지 않았다.
글을 보는 견해가 뛰어났으나, 평생토록 강설(講說)은 사서육경(四書六經)을 벗어나지 않았다. 손수 성리학과 관련된 여러 글을 베껴서 항상 읽었다. 일찍이 “무릇 사람들이 지기(志氣)가 사라져 악의 구렁에 빠지는 것은 욕심이 빌미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평생 큰 장단점은 없지만 항상 욕심에 이끌리지 않는 것으로 스스로를 돌아보는 방편을 삼았다.”라고 하였다.
만년에는 아우와 함께 서쪽 기슭에 초가를 짓고, 글을 읽으며 한가로움 속에서 수양하니 유연히 자득한 지취(志趣)가 있었다. 아! 공은 아름다운 덕행과 빼어난 재주를 가지고도, 종신토록 스스로를 단속하며 그 한두 가지도 펼 수가 없었으니, 이를 아는 자들은 세상을 위해 애석하게 여긴다.
그러나 담박을 본분으로 여기고 가르침을 즐거움으로 삼아, 몸소 닦고 마음으로 얻어 집안을 잘 다스리고, 자손에게 모범이 되고 후손에게 본보기가 되었으니,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것이 어찌 공의 인품에 손상이 되겠는가.
부인은 의성김씨 교리(校理) 세흠(世欽)의 증손이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학수(學秀)와 출계한 기수(氣秀)이고, 두 딸은 류수문(柳秀文)과 류경문(柳敬文)에게 각각 시집갔고, 측실 소생의 딸 하나는 김내수(金來銖)에게 시집갔다.
학수의 아들은 정운(庭雲)과 생원인 정익(庭翼)이며, 딸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이휘연(李彙淵)에게 시집갔다. 기수의 아들은 정린(庭鱗)․ 정곤(庭鯤)․ 정리(庭鯉)이고, 딸은 생원 권승하(權承夏)․ 김현교(金玄敎)․ 김만양(李晩讓)에게 각각 시집갔다.
류수문의 대를 이은 아들은 치호(致頀)이고 딸은 이한신(李漢臣)에게 시집갔다. 류경문의 아들은 치강(致綱)과 치경(致經)이다. 내수의 아들은 회영(會永)과 시영(時永)이다. 정운(庭雲)은 출계하여 공의 제사를 받든자이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우뚝한 철령이씨여 / 崔崔鐵嶺。
우리 동국의 망족(望族)이로다 / 望我東國。
중세 이후로 덕을 감추었으니 / 中世隱德。
흘러 나아가지 않고 못을 이루었네 / 不川而澤。
그 경사를 돈독히 하여 / 則篤其慶。
대대로 훌륭한 자손 낳았네 / 代生偉人。
공은 전하는 가훈을 본받아 / 公淑世訓。
재목은 넉넉하고 행동은 순수하며 / 材優行純。
오직 효도하고 우애로우며 / 惟孝友于。
가정을 다스리는 걸로 정치를 삼았네 / 家施爲政。
집안은 엄숙하고 화목했으며 / 閨門肅穆。
친족은 사랑하고 공경했네 / 宗黨愛敬。
말을 접하고 모습을 뵈면 / 苟接言貌。
마음에 미덥지 않음이 없으니 / 靡心不孚。
어찌 거짓이 용납되리 / 豈容以僞。
오직 덕행에 부합하였네 / 惟德之符。
일찍이 성균관에 들어가 / 早歲陞庠。
임금을 가까이서 뵈었는데 / 亦近耿光。
곡진히 하교하신 말씀은 / 天語丁寧。
총망히 떠나지 말라하셨네 / 爾去勿忙。
귀운, 06)의 생각이 절실함은 / 歸雲繫思。
내가 그것을 바꾸겠는가 / 我其可易。
인륜의 도리를 가장 즐거워했으니 / 人倫最樂。
이 해를 못내 아까워하였네 / 此日足惜。
나아가 성취함에 뜻을 끊고 / 絶意進取。
담박한 생활을 달게 여기며 / 甘此淡泊。
정밀하고 진실됨을 가지고 / 含精葆眞。
조화에 따라 즐거웠네 / 與化而嬉。
임종에 내린 유훈은 / 令終有訓。
후손을 경계하기에 충분했으니 / 裕厥後嗣。
세상에 쓰이지 못하여 / 而不世需。
아는 이들을 탄식하게 했네 / 識者之喟。
나무 우거진 무덤은 / 鬱鬱佳城。
농강, 07)에서 멀지 않으니 / 毋遠瀧岡。
지나는 자들은 경건하라 / 過者尙式。
효자가 묻힌 곳이라네 / 孝子之藏。
<끝>
[주해]
01) 대계공(大溪公)
대계는 이주정(李周禎, 1750∼1818)의 호이다. 자는 경첨(景詹),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이상정의 문인으로, 1795년 문과에 급제
하여 결성 현감과 사헌부 지평을 거쳐 개성에서 재임 중에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대계집이 있다.
02) 숭정처사(崇禎處士)
숭정은 중국 명(明)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의 연호로, 재위는 1628년부터 164년까지 17년간의 기간이 이에 해당한다.
03) 영은공(嶺隱公)
영은은 이홍직(李弘直, 1724∼1768)의 호이다. 자는 맹만(孟萬), 본관은 고성이다. 외삼촌 권렴(權濂)에게 수학하였고 1754년 진사
에 합격하였다.
04) 어정오경백선(御定五經百選)
1795년 간행된 활자본 5권 5책으로 시경 · 서경 · 역경 · 춘추 · 예기 등 5경 가운데서 9편, 주자(朱子)의 저술 2편을 수록한 책으로,
경상감영(慶尙監營)에 보내 유학자에게 교정을 보게 한 다음, 내각(內閣)에서 간행케 하였다. 정조의 고도의 문화 사업으로 당시의 정
치적 동향을 엿볼 수 있다. 1908년 서울 휘문관(徽文館)에서 소책자로 중간하였다.
05) 장공예(張公藝)의 백인자(百忍字)
중국 당나라 장공예의 집안이 9대가 한 집에 동거하였는데, 고종(高宗)이 소문을 듣고 그 비결을 물으니 ‘인(忍)’ 자 10개를 써서 올렸
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가족끼리 서로 어려움을 참고 견디며 서로 양보하며 살아감을 뜻한다.
06) 귀운(歸雲)
부모를 그리워함을 뜻하는 말로, 중국 당나라 적인걸(狄仁傑)이 병주 자사(幷州刺史)로 나가는 길에 태항산(太行山)에 올라서 멀리
흰 구름을 바라보며 “우리 어버이가 저 아래에 계시겠구나.”라고 한 데서 나왔다.
07) 농강(瀧岡)
부모의 산소를 뜻하는 말로, 중국 송나라 구양수(歐陽修)가 부모의 산소를 용강산(瀧岡山)에 정하고 손수 글을 지어 비석에 새긴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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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成均進士霽庵李公墓碣銘 幷序
霽庵李公之葬。距今八十年。其曾孫等。將碣于墓左。以公族弟大溪公之狀。徵銘於興洛。興洛竊,惟吾兩家一室也。雖不文。其得辭。謹按公諱周老字幼鎭。初諱宗儒字幼珍。固城之李。遠有代序。爲東方巨閥。在麗文貞公杏村諱嵒。文敬公平齋諱岡。本朝左議政鐵城府院君容軒諱原。尤其顯者也。容軒第六子縣監贈吏曹參判諱增。始卜居安東。曁子縣監諱洺。孫別提諱肱。皆棄官歸老江湖。作臨淸閣,伴鷗亭。六世至諱後榮文科正郞。寔公高祖。曾祖諱時昉號二可堂。祖諱憲復生員。號平地翁。考諱孝慶。連代隱不仕。以德行文學世其家。妣南陽洪氏。學生諱適女。崇禎處士諱宇定後。有至性懿行。公以元陵己巳生。生有異質。甫上學。文義必核其原委。生員公大奇之曰。是成吾志者。十一。生員公下世。請敎於嶺隱公。日受百行。背卷成誦。數歲中。盡通經傳。旁及百家。發而爲文。已有老成口氣。十五聘金公慶東之門。長德咸稱其端雅夙成。丁酉占鄕解兩試。擧進士。及喜宴。大山李先生主賀席。深加推奬。辛丑遊泮時。正廟作興。引齋生講論經義。見公容貌雅飭。應對精詳。詢知爲嶺人。益奇之。有勿去留泮之敎。尋聞親闈有不安節。還侍數年。或勸其復居齋。則慨然歎曰。使我因此得志。豈可易一日之養。况竆達有命。非求之可得乎。遂絶意外慕。竭力於養親奉祭。暇則繙經籍抄文字。或蒔花種竹以自娛。課門弟子讀書。亹亹不倦。丙辰 。命嶺儒校御定五經百選。公與焉。校訖進覽。特旨頒詩傳,魯論,朱子書以酬勞。公作跋語以識之。日灑掃延攬。有可客至。與之商確經史。衎衎如也。丁巳遭內艱。丙寅遭外艱。式禮罔愆。制闋。日拜家廟。月朔省丘隴。先世遺文懿蹟。繕寫而撰次之 。代置祭田。修治墓石。幾至就緖。而公已病矣。疾革。顧謂子弟曰。科第外物。勿循俗奔忙。以忝先德。吾家爲四世宗。統御敎養。皆宗子責也。張公藝百忍字。宜體念焉。又曰吾未克終孝。葬必於親壠之下。仍命書遺戒。皆奉先持家之節也。書畢 。屛婦女。整枕席而逝。實辛未閏三月二十四日。享年六十三。葬府南武陵艮坐之阡。去先公木蘭之塋。莽蒼而近。公溫和有德性。莊重有器量。淵深而明快。疏通而縝密。雙瞳炯然。滿面盎如。弱冠。已有當世之望。鄕鄰先進。或待以畏友。或許其可任經濟也。其事親。一念洞屬。耦盡志體之養。侍疾。叩首神明。庶幾其感應。送終之具。皆出備預。臨事無遺憾。閨門肅穆如朝廷。子弟不敢違敎條。篤於親戚。皆得其歡心。其在鄕梱。遇事迎刃。旣斷于義。確不可復撓。於書見解超詣。平生講說。不出四子六經。而手寫性理諸書。常寓目焉。嘗曰凡人消沮志氣。墮落坑塹。皆慾爲之祟。吾平生無甚短長。而常以不爲慾拖去。爲內省之方。晩與季氏。置茅齋於西麓。治書養閒。悠然有自得之趣。嗚呼。以公德行之懿。才猷之盛。幽約終身。不得展布其一二。識者葢爲世道惜之。然淡素爲本分。名敎爲樂地。躳修心得而著於門梱之治者。自可貽燕子孫。垂範後生。則外至通塞。奚足加損公哉。金夫人籍義城。校理世欽曾孫。生二男學秀,氣秀出。二女柳秀文,柳敬文。側出女一金來銖。學秀男庭雲,庭翼生員 。女李彙淵僉樞。氣秀男庭鱗,庭鯤,庭鯉。女權承夏生員,金玄敎,李晩讓。柳秀文嗣男致頀。女李漢臣。柳敬文男致綱,致經。金來銖男會永時永。庭雲出。承公祀者也。銘曰。
崔崔鐵嶺。望我東國。中世隱德。不川而澤。則篤其慶。代生偉人。公淑世訓。材優行純。惟孝友于。家施爲政。閨門肅穆。宗黨愛敬。苟接言貌。靡心不孚。豈容以僞。惟德之符。早歲陞庠。亦近耿光。天語丁寧。爾去勿忙。歸雲繫思。我其可易。人倫最樂。此日足惜。絶意進取。甘此淡泊。含精葆眞。與化而嬉。令終有訓。裕厥後嗣。而不世需。識者之喟。鬱鬱佳城。毋遠瀧岡。過者尙式。孝子之藏。<끝>
西山先生文集卷之十八 / 墓碣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