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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재 이상설선생의 유업 - 강상원 전 진천 상산 국민학교장(1975년)
제1절 선생의 출생. 입양. 수학. 출세.
"내가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유혼인들 무슨 면목으로 조국 땅에 돌아가랴.
내가 죽거든 시체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유물을
모두 불태워서 시베리아 벌판에 뿌려라.
그리고 조국의 광복이 되기 전에는 제사도 지내지 말라"
이상설(李相卨,1871년 1월 27일~1917년 3월 2일 / 향년 향년 46세) 선생의 자(字)는 순오(舜五)요. 호(號)는 보재(溥齋)니, 경주이씨(慶州李氏)로 고려 말기의 대학자요. 명유(名儒)인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8~1367)의 23대 손이며, 이조에 들어 속칭 팔별집(八鼈家) 즉 8형제 중 네째 타(鼉)의 16대 손이고, 벽오(碧梧) 이시발(李時發)의 11대 손이다.
부친 행우(行雨)와 모친 벽진이씨(碧珍 李氏)의 장자로 고종 7년 경오(庚午,1870년) 음력 12월 7일(1871년 1월 27일)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산척리(忠淸北道 鎭川郡 德山面 山尺里) 산직(山直)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7세에 양부 용우(龍雨)에게 입양(龍雨는 同副承旨로 吏曹參議도 지낸 사람)하여 서울 장동(長洞: 장박골) 양가로 올라와서 이제촌(李齊村) 선생에게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 이범세9李範世). 서만순(徐晩淳). 신자하(申紫霞). 조한평(趙漢平). 여규형(呂圭亨). 여조현(呂祖鉉) 등과 함께 수학 하였고,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에게도 사사(師事)하였다.
그 뒤 고종 황제의 정치 고문 헐버트 박사와도 친교를 맺어 영어(英語)와 불어(佛語). 구미(歐美)의 정치. 경제. 문화 등의 신지식도 섭취하여 유교. 불교. 천주교 등 종교 철학과 천문. 고등수학. 법학 등에도 통달하여 당대 학계의 최고봉을 이루었다.
고종 31년(1894) 갑오 동학혁명이 일어나던 해에 25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춘방 시독관(春坊侍讀官)을 거쳐 한성사범학교 교관과 성균관 교수. 탁지부재무관(度支部財務官)을 역임하고, 다시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 외부(外部交涉局長)을 거쳐 고종 41년(甲辰年,1904)에 학부(學部)와 법부(法部)의 협판(協瓣)에 오르고 고종 42년(乙巳,1905)에는 36세로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으로 승진하였다.
제2절 을사 매국조약 체결시의 항쟁.
이해 고종 42년(乙巳,1905) 11월에 왜적의 괴수 이토오히로부미(伊藤博文)가 내한하여 침략의 독아(毒牙)를 벌이고 덤벼들어 11월 17일에는 군대로 궁궐을 포위하고, 궁중으로 돌입하여 대신들을 강제로 어전(御殿)에 모아놓고, 협박하여 외교권을 박탈하는 조약을 체결하고, 익(翌,다음날) 18일 발표하니 서울 장안은 청천병력이었다.
장안 시민은 철시하고 비읍(悲泣)하였고, 학교는 폐문하고 교사와 제자는 통곡하였으며, 신문은 통분이요. 거리에는 격문과 연설이었다.
선생은 일반의 여망(輿望)도 높았고, 고종의 신임도 두터웠으나 각료 회의에 참여할 자격이 없었으므로 그날 의전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하고, 공지 민충정공(閔忠正公: 閔泳煥)과 별도로 만나 이 조약의 저지책을 상의하고, 고종에게는 형세가 뜻 같지 않으면 순사직(殉社稷) 할 것을 상소하기도 했고, 참정(參政) 한규설(韓圭卨 )에게는 순사(殉死) 할 것을 맹약 받기도 했다고 한다.
만일 군신(君臣) 중 한 사람 만이라도 그 장면에서 순사. 항거한다면 늑약(勒約)은 막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이 마침내 이에 이르자 선생은 대성질호(大聲叱呼) 하면서 표훈원(表勳院)에 동지들을 규합시킨 후 참정(參政)이 반대하였고, 황제의 주준(奏准)이 없으므로 조약의 비위(非違)와 무효를 주장하고, 즉석에서 "이 매국적 조약을 즉시 파기하고, 이에 찬성한 제적(諸賊)들은 처단하여 국민 앞에 사죄하소서" 하는 상소를 드리고, 원임대신(原任大臣) 조병세(趙秉世)를 소두(疏頭)로 하여 궐하(闕下)에 부복(俯伏)하여 단식 철야하니 수백 명의 동지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고종 황제께서는 시종들을 보내어 "경(卿) 등의 소정(疏情)은 잘 알았으니 물러가 있어라" 분부하시되 결사부동(決死不動)하니 왜병이 몰려와서 총검으로 위협하여 해산시켰다. 다음날 선생은 동지 민충정공의 순국 비보를 듣고, 통곡하면서 종로 네거리에 이르러 단상에 올라 모여든 수천 군중 앞에 왜적의 불법 무도한 방법으로 체결된 조약은 무효라 선언하고, 매국노를 소탕할 것과 왜적을 축출할 것을 강조하면서 만약 이대로 가다가는 2천만 민족은 왜적의 노예가 될 것이라고, 비장한 어조로 통곡하면서 호소하였다.
이에 왜병이 또 다시 몰려와서 총검으로 위협하면서 해산을 강요하니 흥분하고 격노한 군중들이 이에 항거하다가 많은 사람이 부상을 당하였고, 선생도 의관이 파열되고, 수처에 부상을 당하여 유혈이 낭자하였다. 선생은 주먹으로 땅을 치며 몸부림을 치다가 기절 혼도하니, 동지들이 인근 민가로 옮겨 응급 치료를 하여 수시간 후에 소생하였다.
그러나 무슨 면목으로 조상을 대하랴 하며 식욕을 전폐하므로 동지들이 다시 본가로 옮게 갔으나, 매일 통곡하면서 물로만 연명하고실신한 사람이 되어 두문불출하며 수개월을 지냈다.
제3절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밀사의 수석대표로 활약.
그러던 중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海牙)에서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들은 선생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세계 만방에 일본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각국의 협력을 얻어 국권을 회복해 보려는 생각으로 극비밀리에 고종 황제에게 연락하여 황제의 수결(手結)과 어보(御寶)가 찍힌 백지 위임장을 받아 내는 데 성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경지단성(卿之丹誠)은 짐소인지(朕所稔知)라" "어찌하던지 이 기회를 물실(勿失)하고, 전력을 경주하여 성취 하도록 하라"는 밀지사찰(密旨私札)까지 받았다 한다. 고종 43년 광무 10년 병오(丙午: 1906) 음력 4월 17일에 선친 기제(忌祭)를 최후로 봉사하고 그 다음날 고향으로 선영(先瑩) 산소에 성묘하러 간다고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직행하여 배를 타고 원산을 거쳐 노령 블라디보스톡으로 밀행(密行)하였다.
블라디보스톡에 정착한 후 엔치야(煙秋: 블라디보스톡 서남방)에 원동 임야회사(遠東林野會社)를 세워 교포들의 개척사업을 지도하면서 시기를 기다리다가 평화회의가 익년으로 연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해 추(秋) 8월에 간도 용정촌(*龍井村)으로 넘어가서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우고, 교포 청년 자제들을 모아 민족 자주 독립정신과 배일 사상을 고취하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익년 고종 44년 정미(丁未,1907)년이 되자 서전서숙을 여조현(呂祖鉉)에게 맡겨 놓고 다시 블라디보스톡으로 넘어와서 본국으로부터 아우 상익(相益)이 인도해 온 이준(李儁)씨를 만나 그를 휴반(擕伴)하고 양력 4월에 그곳을 떠나 노도(露都)로 가서 전 주러시아공사 이범진(李範晋)을 찾아 헤이그로 가는 뜻을 이야기하고, 전 주한공사 위베르(韋具)와 파블로의 주선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를 알현하고, 고종황제의 친서를 전달하며, 협력하여 줄 것을 호소 하였다.
노제(露帝)는 후의를 베풀어 헤이그에 가 있는 평화회의 노국 대표 넬리토프에게 소개하는 친서와 러시아 외상(外相)의 소개장을 받아 주었다. 선생은 이 곳에서 이범진씨의 아들로 러시아공사관의 서기관(書記官)이었던 이위종(李瑋鍾)씨를 밀사의 1인으로 가입시켜 3인이 노도(露都)를 떠나 6월 20일 경에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제2회 만국평화회의는 45개국이 참가하여 6월 15일부터 개최되었는데, 러시아 대표 넬리토프가 의장에 당선되어 있었다. 세 밀사는 헤이그에 도착하자 네리토프 의장을 찾아 노제(露帝)의 친서와 러시아 외상의 소개장을 전달하고, 각별한 후원을 요청하자, 넬리토프 의장은 깊이 동정하여 주최국인 네덜란드의 외상(外相)후온데스를 만나 보게 하였다.
그러나 후온데스는 "나 개인으로는 동정하나, 한일 을사보호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이 일본으로 이양되었은적 본회의에 한국 대표의 참석권 여부를 나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완곡히 거절하였다. 6월 25일 회의는 4개 분과위원회로 구분되었고, 그 중 제1부가 중ㅈ재(仲裁) 재판에 관한 위원회로서 위원장은 프랑스위원 뿌로즈와씨였다.
밀사들은 제1분과 위원회가 열리는 25일에 그 회를 방문하였다. 밀사들은 1905년의 보호조약은 한국 황제가 인준한바 없으며, 일본이 폭력으로 외교권을 박탈했으므로 이 사실을 만방에 알리고, 정당한 조정을 원하는 뜻에서 한국 황제의 특사로 왔음을 호소 하였다.
동시에 고종의 신임장을 보이고, 또한 각국 정부에 보내는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였다. 그러나 이 회의에 밀사들의 참석을 허가할 수 잇는 가장 정당한 기구인 이 위원회로부터 거부를 당했다. 그러나 밀사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6월 27일에는 국제 여론을 환기 시키고자 각국 위원에 호소하는 성명문(聲明文: 控告詞)을 작성하여 전달하는 한편 각 신문에 선포했다(1907년 6월 30일,《평화회의보》14호 기제) ‘무슨이유로 한국은 제외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쓴 힘차고 씩씩한 이 문장은 각 신문에 보도되어 외교계에 큰 센세이션을 야기시켰던 것이다.
6월 29일에는 또다시 평화회의 의장인 러시아 대표 넬리토프를 방문하고 의장의 권한으로 참석을 확인토록 요청하였으나, 그는 이제까지 호의를 보여왔으나 국제 관계를 꺼려하여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그 후 7월 9일 영국 신문인(新聞人) 윌리엄 토머스 스테드씨가 주관하는 열국(列國) 신문 기자단의 국제 협회에 선생과 이위종 두 대표가 귀빈으로 초청을 받개 되었다. 여기에는 한국 밀사의 연설을 듣고자 각국의 저명한 언론인. 신사. 숙녀. 각국 수행원들이 운집하였다.
먼저 선생의 인사가 있은 후, 한국의 20여세 청년 이위종씨가 단상에서 유창한 프랑스어로 외친 도도(滔滔)한 수천어의 웅변은 청중에게 무한한 감명과 찬사를 금치 못하게 하였다. 이 같은 밀사의 활약과 비등(沸騰)하는 국제 여론에 당황한 그 곳의 일본 공사 쓰즈키(Suzuki)와 카토오(加籐高明)는 토오쿄오의 일본 외상 하야시(林薰)와 한국에 와있는 통감 이토오에게 통신망을 늘여 놓고 세(3)밀사의 활동을 저지하기에 혈안이 되었다.
그리하여 왜적과 국내의 간적이완용(李完用) 등은 황제를 위협하여 "짐은 밀사를 파견한 바 없다"는 황제의 칙어를 듣고, 그들은 "을사 조약은 원만히 체결된 것이다"라는 말을 덧붙인 전보를 헤이그에 쳤다. 이 전보가 7월 8일 그곳에 도착하니, 밀사의 참석은 마침내 좌절을 당하고 말았다.
선생과 밀사 3인은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만리 이역에서 갖은 형극(荊棘)의 길을 헤쳐 가면서 모든 방법을 다하여 악전고투 하였으나, 당시 한국은 약소 국가의 비애로 열강의 정치 와중에서 한낱 제물로 희생될 수밖에 없었으니 밀사들은 각국 대표들의 책임 회피로 회의에 참여치 못하였고, 따라서 한일 관계는 이 회의에서 조정을 보지 못하였다.
이러던 중 7월 14일에 이준선생이 울분을 금치 못하여 발병분사(發病憤死)하니, 선생은 그 시체를 거두어 안장(安葬)하고, 그 묘앞에 ‘李儁’ 2자를 손수 써서 새겨넣은 묘비(墓碑)를 세워 놓고, 쓸쓸히 헤이그를 떠났다.
선생은 그 길로 미국. 프랑스. 독일. 영국을 역방(歷訪)하면서 일본의 침략상과 한국의 비참하고도 억울한 사정을 설파하고, 국권 회복을 위하여 국제적 협력과 한국의 지정학적(地政學的) 위치로 보아 장래 동양 평화의 유지를 위해서는 한국의 영세 중립화(永世中立化)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열국은 선생에게 뜨거운 동정과 후대를 표하엿으니, 미국 대통령 루우즈벨트는 사견례(私見禮)로써 면담을 허락하엿으며, 영국에서는 학사원(學士院)에서 명예 학사 학위를 받았고, 독일 황제 윌리엄 2세는 선물로 호신용 피스톨(pistol)을 하사 하였다 한다.
선생은 각국 순회를 마친 후 고국에 돌아올 수 없는 몸이 되어 노도(露都: 러시아의 수도)를 거쳐 그해 초 겨울에 다시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왔다. 한편 국내에서는 왜적 이토오가 친일 주구 이완용(李完用). 송병준(宋秉畯)과 더불어 고종을 위협하여 7월 20일에 강제로 양위(讓位)케 하고, 8월 9일에는 선생에게 궐석 재판으로 교수형에 처하는 판결을 내렸다(이때 이준. 이위종은 종범으로 종신형에 처하엿다).
제4절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와서 항일 독립운동 전개.
(1)의병대를 조직하고 망명정부 수립 계획
선생은 이해 고종 44년(1907) 초겨울에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와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여 순종 3년 기유(己酉: 1909년) 5월에는 의
병대를 조직하고, 의병대장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을 13도 의군 도총재로 추대하고, 이범윤(李範允) 등과 협력하여 민족 독립운
동의 기반을 공고히 하는 한편, 순종 4년경술(庚戌,1910) 7월 28일에는 이곳에 고종 황제를 모시다가 망명 정부를 수립하고 장기 항일
투쟁을 전개하려 하였다.
그러나 고종에게 밀주(密奏)를 올려 보낸 지 불과 1개월 후인 8월 22일에 한일합방조약(韓日合邦条約)이 발표되었고, 국제 정세가 혼
란하여 이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다.
(2)한일합방조약이 발표되자 합방의 불법. 무효 성명
선생은 한일합방의 소식을 듣자 의암 유인석. 김학만(金鶴萬, 또는 金學萬) 제씨와 더불어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여 일본 천황에게
서한을 보내어 국제 공약을 배반하고, 침략 행위를 자행하였다고 힐책하고, 동시에 8,624인의 연명으로 세계 만방에 대하여 왜적의 죄
상을 지적하는 성명서를 전달하는 한편, 의병을 크게 일어켜 국내로 쳐들어올 것을 결심하고, 러시아 관헌에게 협력을 요청하였으나 그
들은 국제 여론을 두려워하여 제지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선생 등 20여 명을 감금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엿다.
(3)장기 항쟁 계획으로 권업회 조직 . 학교설립. 신문 발간 등 활동
러시아 관헌에게 구금되었다가 미구( 未久에 풀려나온 선생은 투쟁 방법을 바꾸어 장기 항쟁을 계획하고, 1911년 11월에는 동지들과
더불어 러시아 극동 총독 보스타빈과 교섭하여 교포들의 산업 권장과 교육 보급을 목적으로 한다는 조건하에 양해를 얻어 다음과 같은
활동을 벌였다.
(가)권업회 조직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여 본부를 블라디보스톡 신한촌(新韓村)에 두고, 엔치야(煙秋: 블라디보스톡 서남방 포세트 지방). 니콜리스
크(雙城子: 블라디보스톡 서북방 80리). 소성(蘇城). 영안(永安). 평도(坪刀) 비하(比河). 하바로프스크(哈發浦) 등 8개처에 지부를
두어 산업을 권장 지도했다.
(나)《권업신문 발간》
신채호(申采浩). 김하구(金河球)를 주필로 삼아 《권업신문 발간》 을 발간하여 산업을 지도하는 동시에 구국 독립정신을 고취하였
다.
(다)신한학교 설립
신한(新韓) 학교를 이종호(李鍾浩)와 이범진(李範晋)의 의연금(義捐金)으로 신한촌에 건립하여 교포 자녀의 교육에 힘썼다.
(라)부인회 조직
블라디보스톡에 교포들의 부인회를 조직하여 애국 정신을 배양하였다.
제5절 하바로프스크로 이주하고 계속 독립운동.
(1)독립운동 기지의 이전
그러나 차차 국제 정세가 달라져서 왜적의 헌병들이 이곳 블라디보스톡 까지 드나들며 독립운동을 탄압할 뿐만 아니라, 러시아 관헌에
게 선생의 신병(身柄)을 인도해 달라고 요구하여 오니 선생도 국제 정세를 고찰하고, 노중(露中)지방 관헌과 교섭하여 그 양해를 얻어
독립운동 기지를 노만(露滿) 국경지대 오지(奧地)로 이전할 것을 결정하고, 흑룡강성(黑龍江省) 유역 흥개호(兴凯湖/興凱湖) 연안의
이류가(伊柳街)와 그 대안(對岸) 쾌당별백포자(快當別白佨子) 일대에 교포 각각 수백호를 이주 정착시키고, 다시 흑룡강과 송화강이
합류하는 양강구(兩江口) 서북쪽 오운현(烏雲縣) 울라까하(烏拉卡河)를 중심으로수백호를 이주 정착시켜 놓고, 선생도 신변의 안전을
생각하여 이해(1913) 가을에 블라디보스톡을 떠나 노령 하바로프스크로 거소를 옮겼다.
이때
‘나라를 잃어 나라를 울고
집을 떠나 집을 울고,
이제 몸둘 곳조차 잃어 몸을 우노라’
라는 비창한 시(詩)를 지었다 한다.
(2)대한 광복 군정서(大韓光復軍政署)의 조직과 사관학교 건립 추진.
선생은 이곳에 온 뒤 1914년 3월에는 노일전쟁 10주년을 맞아 러시아 내에 배일 감정이 높아짐을 이용하여 이동녕(李東寧). 이종호(李
鍾浩,1885~1932). 정재관(鄭在寬) 등과 협의하여 러시아 극동 총독 보스타빈의 양해를 얻어 대한광복군정서(大韓光復軍政署)를 조
직하고, 선생 자신이 초대 수석 정도령(正都領)으로 추대되어 의병을 모집, 훈련하는 한편, 우라까하(烏拉卡河)에 사관학교를 건립하려
고 추진하였다.
그해 7월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대한광복군정서를 해산하고, 여기에서 훈련된 많은 병사들이 러시아 군에 편입되어 서부 전선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3)《권업신문 발간》발간으로 독립정신 고취
선생은 노령(露領)과 만주 일대에 거주하는 교포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조성환(曺成煥,1875~1948). 이동녕(李東寧
1869~1940). 류인석(柳麟錫,1842~1915). 김항규(金恒圭,1881~1948). 이민복(李敏馥,李昇馥의 兄). 조용철(趙用哲). 김완수
(金完洙). 백순(白純) 등과 상호 연락 협력하여 《대동신문(大東新聞》을 발간하였으니 이 신문은 노령과 만주 일대는 물론이요. 멀리
상해와 미주(美洲)에 까지 배부되었다 한다.
제6절 선생의 별세와 유족. 유허
(1)선생의 별세
선생은 하바로프스크로 이주한 이래 기후. 풍토가 몸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든 계획이 뜻대로 되지 않아 침식을 잊고 상심. 과로한
끝에 건강이 좋지 않은지라, 동지들이 권하여 1916년 병진(丙辰)에 하바로프스크 보다 기후가 온화한 니콜리스크(雙城子)로 거소를 옮
겨 정양하였으나, 1917년 정사(丁巳: 倭政 大正 6년) 음력 2월 9일(양력 3월 2일)에 48세로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 채 한많은 일생을
마치었다.
병이 위중하게 되자 동지들이 극 비밀리에 고국으로 연락하여 달려 온 부인 서씨(徐氏)와 아우 상익(相益) 및 영식(令息) 정희(庭熙)를
돌아보고, “내가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유혼(遺魂)인들 무슨 면목으로 조국 땅에 돌아가랴. 내가 죽거든 시
체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유품을 모두 불태워서 시베리라 벌판에 뿌려라. 그리고 조국의 광복이 되기 전에는 제사도 지내지 말라”하고
유언했다.
또 동지들을 돌아보고
“내가 죽은 뒤에는 상해로 내려가서 그 곳의 동지들과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이룩하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운명 하였다.
선생이 별세한 뒤, 선생과 행동을 같이 하였던 이시영(李始榮). 이동녕(李東寧). 조성환(曺成煥). 등은 상해로 내려가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2)유족(遺族)
선생의 유족으로 부인 달성서씨(達城徐氏)는 참판 서정순(徐廷淳): 公淳)의 따님으로서 선생이 해외로 망명한 뒤로는 왜적의 혹심한
감시를 받아가며 아들 정희(庭熙)와 쓸쓸히 살았다. 한때는 선생의 고향인 진천 읍내리(鎭川 邑內里)에서 살기도 하였으나, 서울로 올
라가서 그 역시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별세하였다(묘는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미암리에서 진천 숭렬사 옆 이상설선생과 합장)
선생의 독자 정희(庭熙)도 일시 언론계에 관여하였으나 왜정 치하에 감시를 받으며, 고생 스럽게 살았으며, 해방 후 진천으로 내려와서
살다가 1948년 무자(戊子)에 50세로 별세하였다.(묘는 陰城郡 大所面 泰生里 先瑩下에 있음).
정희에게는 재준(在濬). 재홍(在鴻). 재철(在哲)의 세 아들이 있었으나 6.25전란 때, 행방불명되었고, 가까운 친척으로는 생가(生
家) 편의 조카인 관희(觀熙: 상해 임시정부 비서처 총무과장, 서울 중앙방송국 초대 방송국장). 양희(亮熙). 완희(完熙)가 있다.
(3)유허(遺墟)와 유허비(遺墟碑)
선생이 출생한 가옥이 진천군 덕산면 산척리 산직 마을에 최근까지 있었는데 , 10여년전 장마비에 도괴되어 철거되었다. 해방 후 1957
년에 충북도지사 정낙훈(鄭樂勳)씨가 도비(道費)를 보내어 유허비(遺墟碑)를 세우게 하였는데, 현재 출생 가옥의 앞산에 있다.
그리고 고향에 남아있던 선생의 장서(藏書) 일부가 고물 상점에 넘어갔었는데, 당시 부통령으로 있던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씨의
주선으로 회수되어 국회 도서관에 기증되어 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