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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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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사진(산행영상) 스크랩 금북14구간 각원사~성거산~서원산~배티고개.
선장 추천 0 조회 78 11.12.31 13:1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009년7월24일.

오늘은 원유석씨가 중국여행을 갔다 오면 같이 가자해서 하루를 늦추어 가려했는데 중국에서 타고오는 배가 스큐류에어망이 걸려 배가 속력이 나지 않아 인천항에 늦게 도착한다하여 할수없이 우리들 9명이 전 처럼 우리집에서 새벽 5시20분쯤 모여 오늘의 들머리인 각원사 옆의 비포장 도로를 힘겹게 차를 몰고 올라가 좁은 공터에 차를 주차시키고 산행을 준비하고 출발하는 시간이 6시 30분이 채 되질 않았다.

 

날씨는 흐리고 바람이 시원스럽게 느끼며 출발전의 모습을 담고 산행을 시작을 한다.    

 지난번에 내려온 등산로를 따라 오르는데 약간의 땀이 나지만 그리 덥지는 않다.

 산행 시작한지 15분 만에 사랑의쉼터 정자에 도착했다.

사랑의쉼터 사각정자는 새천안 로타리클럽에서 비 바람과 여름엔 시원하게 쉴수있도록 기증한 것이었다.

 

사각 정자의 왼쪽으로 잘 나있는 등산로를 따라 진행을 했다.

 좌불상과 태조산 성거산으로 가는 이정표가 있는 사거리를 지났으며...

 길 좋은 등산로를 따라 진행을 한다.

오늘은 바람이 불어 더웁지도 않고 산도 그리 높지않아 수월한 산행의 느낌이 든다.

 잠시휴식.

 음료를 마시고.

 진행을 하다 약간의 조망이 있는곳에서 저 멀리 흑성산을 카메라에 담아본다.

 

 

 

 

 

 

 만일사에서 올라오는 사거리에서 계단을 따라 오르고.

 

 성거산 오르기전에 양 옆으로 바위가 있었으며.

 성거산에 도착하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성거산은 충남 천안시에 있는 579m 의 산이다.

고려 태조는 직산의수헐원에 들렀다가 동쪽의 성거산을 바라보니 오색이 영롱하여 그 아름다움을 보고 영험한 산이라 여겨 제사를 지내도록 했으며 성거산이라 칭했다는 <직산현지>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정상엔 성거산성이 자리잡고 있다.  이 산성은 군사통신기지 설치 당시에 성곽이 많이 파괴되어 옛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백제는 산성이나 읍성을 축조할 때 반드시 익성을 축조하는 축성법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성거산성은 위례산성의 익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렇게 본다면 성거산성도 삼국시대에 축성한것이 분명하다.

예전에 나홀로 이곳에 올라와  태조산을 가는데 이 곳으로 갔다가 연결이 안되어 다시 ?하던 능선이 이곳 이었다.

아랫길로 내려서 진행을 했어야 하는데....

 

 성거산에서 잠시쉬며 형님들이 갖고오신 막걸리를 한잔씩하고.

 

 성거산에서 북쪽방향으로 약간 내리막길로 진행이 되었다.

 다시 조금 오르니 군부대의 시설물이 있어 철조망 옆으로 돌아서 진행을 했다.

 

 

 철조망을 돌아 군 부대 정문앞 도로를 따라 내려서 진행이 되었다.

 

 계속 포장도로 길로 내려서 진행이 되었다.

 

 성거산 순교성지 제2 줄무덤 돌 비석이 있는 곳에서 사진을 찌고.

 천안시 북면 납안리 성거산에 위치한 성지에는 제1, 제2 묘역에 각각 38기와 36기의 순교자 및 교우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묘소 근처의 소학동 교우촌은 병인박해 이전부터 천안 일대 교우촌의 중심지였고, 공주 감영에서 치명당한 최천여(베드로, 최종여(라자로) 형제, 배문호(베드로), 고의진(요셉), 그리고 최천여의 며느리 등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곳이다.

천안 성거산 일대에는 박해시대의 교우촌이 많다. 천원군의 남쪽과 동쪽 지역인 목천면, 북면, 풍세면, 광덕면 일대가 바로 그 곳이다.

성거산 일대의 공소를 설립순으로 보면 서덕골(목천면 송출리)은 1884년에 두세 신부가, 먹방이(먹뱅이 : 목천면 석천리) 공소와 소학동(쇠악골 : 북면 납안리) 공소 역시 1884년과 1888년에 설립하였다. 사리목(북면 납안리) 공소는 1901년 드비즈 신부가, 매일골(목천면 송출리) 공소는 1895년 귀를리에 신부가 설립하였으며 석천리(목천면 석천리) 공소와 도촌(북면 납안리) 공소는 1913년, 1920년 이후에는 안성 본당의 공베르 신부가 설립하였다.

소학동 사리목은 목천 북면 소재지를 거쳐 남안리(도촌)까지 약 23km 정도 들어가는 깊은 산골이며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은신하여 살기에 적절한 곳이었다. 지금은 공군 ○○부대가 주둔해 있지만 증언자 최병기씨의 말에 의하면 박해시 교우들이 망을 보다가 포졸들이 나타나면 깃발을 갖고 신호하며 망대 역할을 했다고 한다. 워낙 깊고 나무가 울창하여 소학동 계곡에 숨어 있으면 찾을 수 없었다고 전해주었다. 지금도 능선 계곡을 따라가 보면 증언자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소학골은 1866년 병인박해시 깔래 강 신부, 페롱 신부, 뮈델 주교, 두세 신부, 베르모렐 신부가 숨어 지내며 암암리 사목활동을 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1866년 1월 초순경 전프란치스코 사베리오(경북 문경군 동로면 명전리 건학 공소 회장)와 이요한(경북 문경군 문경읍 증평리 여우목 공소 회장, 성 이 윤일의 아들)은 부럭이(충북 제원군 덕산면 월악리)에서 예천 포졸에게 잡혀 예천 현감 경유 공주 감사에게 압송되어 공주 감영에서 음력 1865년 12월 10일, 양력 1866년 1월 26일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들이 순교한 몇 주 후 강 신부는 건학 공소에 가서 판공성사를 주었다.

이 무렵 2월 23일 조선교구장 베르뇌 장 주교가 서울에서 체포된데 이어 불란서 신부들이 체포되었다. 이 때 강 신부는 속속 날아드는 비보를 듣고 3월 초순부터 사목활동을 일체 중단하고 5월 말에는 이 곳 소학골 교우촌(충남 천안시 북면 납안리)으로 피신하여 머물렀다. 강 신부는 자신도 곧 붙잡혀 순교하리라는 절박한 상황에서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께 제 6 신 서한(1866년 6월 8일)을 썼고 역시 제 7 신 서한(1866월 6월 10일)도 소학골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알브랑 교장 신부에게 서한을 올렸다. 이 서한은 조선의 12명 선교사 중 3명만 살아 남아 있다는 소식과 높은 고산 준령의 교우촌으로 피신하며 겪게 되는 고충과 이승에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내용이다. 생존한 선교사 리델 신부는 병인박해를 본국에 알리고자 조선 교우와 함께 출범해 산동반도에 도착하여 강 신부의 서한을 발송했다.

리델 신부가 탈출한 다음 페롱 신부는 강 신부를 찾아와 함께 소학골에서 칩거하였다. 그들은 10월 11일 조선 배로 출범하여 이틀 동안 조선 연안을 항해하다가 다행히 청국 밀수꾼 배를 타고 산동반도로 탈출했다. 서양 선교사들이 출국한 후 얼마 안되어 목천의 포졸들이 소학동(또는 소학골) 교우촌을 덮쳐 소학골 교우 5명이 공주 감영으로 압송되어 음력 1868년 11월 8일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 5명은 배문호(베드로), 최천여(베드로), 최종여(라자로), 고의진(요셉), 채서방 며느리이다. 치명일기 509 - 513호에 나온다.

1.최천여(베드로) : 충청도 목천 소학골에 살고 묵상과 염경기도를 하며 늘 치명 원의를 자주 말하더니 병인년 10월 초십일에 포졸에게 잡혀 관청에 들어갔다. 천주학을 배반하도록 권유당했다. 그러나 말을 듣지 않자 다시 투옥, 옥중에 들어가 배교한 교우들에게 금세는 잠깐이요 후세의 세계는 영원하니 어찌 잠시 살기 위해 배반하느냐고 눈물을 흘렸으며 병인년 11월 초파일에 치명하였다. 당시 나이 52세.

2.최종여(라자로) : 최천여(베드로)의 아우로 목천 소학골에서 형과 함께 열심히 수계생활하더니 병인년 10월 초십일에 목천 포졸에 잡혀 혹독한 역병으로 거의 사경에 이르러 스스로 걸어가지 못하니 포졸들이 목을 매어 끌고 본관으로 가서 며칠 갇혔다가 공주 진영에서 형과 함께 11월 초파일에 치명하였다. 당시 나이 42세.

3.배문호(베드로)와 고의진(요셉) : 이들은 충청도 목천 소학골에 살았고 열심히 수계생활하며 부모에게 배우고 믿음을 다하였다. 하옥된 후 옥에서 계율을 풀어 읽으니 이것을 누구한테 배웠으며 믿음은 얼마나 되느냐 물으니 죽어도 천주학은 배반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치명하기를 원한 배문호는 강 신부가 준 철사띠를 주야로 띠고 고신극기하는 법률을 배우더니 병인년 10월 초파일에 목천 포졸에게 고요셉과 함께 잡혔다. 2·3차 물 고문과 형벌이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고 조과 만과를 서로 통경하니 경문이 자신만만했다고 한다. 순상 분부에 11월 초파일에 공주로 끌려가며 경문을 소리 높여 읽었다. 창교배(인솔자)도 즐겨 듣고 배교한 두 사람도 이 모습을 보고 통회하여 스스로 합세 공주 진영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증언에 의하면 두 분은 절친한 친구였으며 공주 감영으로 끌려갈 때도 어깨동무하며 찬송가를 불렀다고 한다. 모진 형벌에도 굴하지 않자 즉시 하옥, 병인년 11월 초파일에 치명하니 배문호는 24세였고 고요셉의 나이는 알지 못하였다.

4.채서방 며느리 : 모친에게 3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어머님도 뒤를 따라오소서. 또 이르오되 '동곳'(머리를 감아 상투 꽂는데 필요한 것)을 보내오니 나를 보는 듯이 보시고 저와 고요셉은 목마름을 오줌으로 푸나이다." 하였다. 그리고 "사람의 시체는 지금 청주 절골 사는 강치운이 찾아 묻었느니라." 하였다.

현재 이 곳에는 제 1, 제 2의 묘역이 있는데 제 1 묘역에 38기, 제 2 묘역에 30기의 순교자 및 신앙 선조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이 유해들은 1959년 성거산 정상에 있는 미군 통신기지 건설을 위해 도로를 만들 때 발굴된 유해들로써 그중 인부들이 제 1 묘역에 38기의 유해를 이장했고 제 2 묘역에 30기의 유해를 이장했었다. 그후 1998년 3월 21일 제 2 묘역 뒤쪽에서 이 성지를 총지휘하고 있던 천안 성황동 천주교회 김동억 신부의 지시로 묘분으로 여겨지는 일곱 봉분을 발굴한 결과 다섯 무덤에서 유해가 발견되었고 한 무덤에서 가로 3cm 세로 6cm의 청동 십자고상이 발견되었다.(대전 가톨릭대학교 박물관에 보관) 이 5구의 유해를 제2묘역에 안치함으로써 총 73기의 유해가 이 곳에 안장되었다. 이 유해들은 공주 감영에서 1866년 11월 8일자로 순교한 배문호(베드로), 최천여(베드로), 최종여(라자로)와 고요셉 그리고 채서방 며느리 등 5명의 순교자들을 비롯, 무명 순교자들과 이 곳을 중심으로 한 신앙 선조의 유해들이다. 원래 이 곳에는 200여기의 신자들 묘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는데 박해중에 급히 묘지를 만들었고 또 후손들이 잘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찾을 길이 없다. 그래서 미군 기지 군사 도로를 개설할 때 그 도로 구간에 있던 유해들과 5구의 유해, 총 73구만 모시게 되었다.

대전교구장 경 주교님은 1998년 7월 22일자 교구장 공문(제 98-7호)을 통해 천안 성거산 교우촌 유적지 소학동과 순교자 묘소를 교구의 성지로 공식 인준하셨다.

현재 제1, 제2 묘역에 십자가, 예수 성심상, 성모상, 십자가의 길 15처상, 제대 두 곳 등을 건립하고 나무와 꽃잔디로 조경을 이루고 있으며 휴식 공간도 마련해 놓고 있다. 이 곳은 해발 500m 고지에 울창한 나무와 맑은 물, 청정한 공기 등이 있어 야외 수련 장소, 피정 장소로도 아주 빼어난 곳이다.

성지관리 : 입장 성당 (041-585-4872)        퍼 왔음.

 

 다시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 진행이 되었다.

 우리가 차를 몰고 지나온 입장면 소재지.

 

 

 

 

 

 우물목고개에서 아스팔트 오른쪽으로 풀이 무성한 등산로를 따라 금북이 진행이되었다.

 

 지나는 길에 큰 철탑도 지나고.

 

 한참을 진행을 하다 선두에 형님들이 깜짝놀라 바라보니....

 나무에 오색의 깃발을 말아 나무에 감아놓은 것을보고 지난번 차동고개의 일 때문에 놀랐다고 했다.

 다시 위례산 쪽으로 진행.

 

 

 

 

 

 산행 3시간만에 위례산에 도착을 했다.

위례산의 전해오는 전설을 옮겨본다.

지금의 충남 천안시 입장면 호당리에는 백제군이 고려군에게 패하고 울었다는 위례산이 있다.

위례산 둘레에는 지금도 옛날을 말해주듯이 백제의 성터가 남아 있다.

한편 위례산정에는 용이 놀았다는 용 샘이 있는데 이 용샘은 충청남도 공주까지 뚫려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고 서해까지 이어?다고도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흙으로 메워저서 샘 바닥이 보이고 지름이 5m 정도 밖에 안 되는 조그마한 샘이지만 아무리 가물어도물이 마르지 않아서 신비감을 자아내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산마루에는 전쟁 ? 백제 임금의 화살막이를 했던 3m 정도의 돌이 꽂혀 있고 동남쪽으로 내려오면 말구유로 쓰였다는 큰 돌이 두 쪽으로 깨어진채 있으며 동쪽으로는 어느 장군이 시험하기 위하여 돌에 주먹질을 하여 주먹모양으로 파진 바위가 있다.

전쟁때 유난히도 관련이 많은 위례산에는 위의 이야기 외에 또 하나의 기이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날 백제가 공주에 수도를 정하고 있으 무렵, 어느 임금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날로 남침해 오눈 고구려의 군사를 막기 위하여 왕은 이 곳 위례산까지 와서 군사들의 사기를 높여주고 전쟁을 독려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때 백제의 임금은 용왕의 아들이 사람으로 변신하여 공주에서 위례산 용샘까지 땅 속 물줄기를 타고 단숨에 왔다고 한다.

그 때 백제의 국경선은 이곳까지 밀려와 고구려 군대는 틈만 있으면 백제를 공격했다. 백제왕은 산마루에 화살막이를 큰 돌로 만들어 세우고 그곳에서 백제군을 지휘했다.

백제왕은 천연적으로 유리한 이곳의 지형을 이용하고 온갖 조화를 부려 고구려 군사들이 침입해 올 때마다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었다. 그야말로 고구려 군사들은 날로 피를 흘리고 쓰러?다. 수 천 명이 넘게 죽어간 것이다.  고구려군은 그래도 계속 이 위례산을 쳐들어왔다.

그것은 고구려가 이곳을 점령하면 지금의 천안까지 고구려의 땅이 될 수 있기 ?문이다. 고구려는 이곳에서 너무 많은 피를 흘려 그대로 물러 설 수는 없었다.

고구려는 처음에는 500명씩 군사를 보내어 위례산을 공격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군사를 투입시켜도 고구려군은 패하기만 했다.백제군이승리를 거듭하는 것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백제임금이 이곳까지 와서 여러 가지 조화를 부려 전쟁을 지휘하였기 때문이었다. 백제의 임금은 이처럼 날마다 새벽에는 용으로 변하여 공주에서 이 곳 용샘으로 나와 전쟁을 하였기에 승리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위례산에서 동쪽방향으로 참나무 숲속 길 좋은 등산로를 따라 진행이 되었다.

 

 

 

 

 

 부수문이 고개로 내려가는 나무계단이 있고.

 

 입장에서 목천방으로 넘어가는 57번도도로 부수문이고개를  건너 숲속으로 진행이 되었다.

 

 

 

 부수문이 고개를 지나 459 봉에서 잠시 휴식에 김계자사모님이 갖고오신 도마도 쥬스에 갈증을 해소 시킨다.

다시 진행을 하다 나뭇가지에 메달닌 만뢰지맥의 표지판이 있었다.

여기서 부터 진천의 만뢰산으로 진행되는 곳으로 보였다.

 진행을 하다 옆이 확 트인 엽돈재 고개에 도착을 했다.

 

 여기서 부터 진행방향 왼쪽은 경기도 안성이고 오른쪽은 충북 진천.

 

 엽돈재에 내려서서 기념사진....

 

 도로를 횡단하여 조금 내려가다 오른쪽으로 오르막의 등산로를 따라 진행이 되었다.

 

 

 서운산까지 5.4 km 이정표를 지나고...

 

 엽돈재에서 360봉 오르기전 힘들면 쉬어가라고 나무의자도 있었다.

 서운산 정상에 가기전에 조금 넓은장소에서 점심을 해결을 하고....

 점심을 먹고 서운산 쪽으로 진행을하다 부러저 있는 두송이의 버섯을 놓고 사진에 담아 봤다...

 

 

 서운산 가기전에 청룡사에서 오르는  등산로의 이정표가 있었다.

 

 이곳에서도 청룡사에서 오르는 길....

 드디어 오늘의 마지막 높은산 인 서운산에 도착을 했다.

 경기도와 충청남도의 경계지역에 위치한 서운산은 경기도 안성에서 남쪽으로 약 12 km 정도 떨어잔곳에 있다.

해발 547m 로 아담하고 바위도 거의 없는 유순한 산세에 푹 안겨 가족들낄 가볍게 산행하기에 좋다. 더불어 청룡사와 석남사 등 문화 유적지가 많아 쉬엄쉬엄 역사공부 하기에도 좋고 산 주변엔 호수들까지 있어 운치 있는 산행을 즐길 수 있다.  청룡사 쪽에서 오른다면 절 왼쪽 등산로를 따라 20 여분 오르면 개인농장을 지나 나옹선사가 기도?다는 토굴이 있다.울창한 숲길을 헤치고 40분쯤 오르면금북정맥의 산등성이가 한꺼번ㅇ에 내려다 보이는 좌성사가 나온다.

좌성사는 백년정도의 역사를 지닌 비교적 근래에 기도사찰이다.  좌성사에 오르면 반드시 대웅전 뒤편 바위틈에서 솟아나오는 샘물을 먹어보자.  조금씩 바위틈에서 솟아나오는 물맛이 단맛이다.  좌성사위쪽 요사체를 지나 오솔길로 오르면 새로 지은듯한 서운정이 나온다. 여기서 정자 난간에 걸터 앉아 바람도 쐬고 땀을 식히노라면 가히 신선이 된 듯 기분.  다시 오솔길을 올라 토성 앞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급경사를 오르면 가슴을 씻어낸다는 탕흉대가 나온다.

탕흉대는 서운산 최고의 전망대로 손꼽힌다. 이곳은 안성,평택,성환,천안까지 시야에 잡힌다.   올라온 길을 돌아나와 토성을 따라 산길을 산책하듯 걷는 기분은 오묘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정상에서 땀을 식힌 뒤 은적음을 보고 울창한 숲길을 따라 내려오면 청룡사에서 오르던 길과 다시 만난다.  이곳 저곳 산세를 음미하며 둘러봐도 2 시간이면 넉넉한 거리다. 정상에서 청룡사쪽 길을 접고 동북쪽 기슭으로 내려가면 마애여래좌상 앞쪽으로 내려갈 수 있다.

 

 서운산 정상에서 사진을 찍는데 비가 오기 시작을 했다.

 서운산 정상에서 오른던길을 조금 뒤돌아 오다 왼쪽으로 서둘러 내려갔다.

 날씨가 어둑해지고 비가 제법 내리기 시작을 한다.

 석남사와 배티고개로 갈라지는 곳에서 오른쪽 으로 서둘러 내려갔다.

비가 옷이 젖을 정도 내려 판쵸를 꺼내입고 뒤 따라 내려갔다.

 

 

 비가 너무내려 카메라를 배낭에 넣어서 잠시 사진을 못 찍었지만 날머리의 기록은 남겨야겠기에 급히 카메라를 꺼네어 담아놓는다.

 

 

 

 

 비는 계속 오지만 어디 비를 피할곳을 찾다가 진천방향으로 조금 내려가다 안성 중앙 골프장 입구에 간판이 있는곳을 들어가 비를 피하며 안성에 개인택시를 호출했다.

 

 비를 피하여 광고판 아래서 택시를 기다리는 신세....건우형님이 무엇이 좋은지 .....

 비 내리는 처마 밑에 이상한 거미줄에 거미가 있어 카메라에 담아놨다.

오늘은 왜 이리 처량 스러울까 ....

 무엇을 바라고 하는것 두 아닌데 ...

취미가 같아 춥고 더움을 마다않고 여기까지 왔으니 당진의 산꾼들 정말 대단해요  !!!!!!

택시를 부른지 20분만에 안성의 개인택시가 도착하여 나와 원영형이 각원사 좌불상에가서 차를 가지고 와서 고생하신 대원들을 싣고 행담도 해수피아가서 샤워를하고 신평에 회장님의 여동생님이 운영하는 돈데이 식당에서 맛난 저녁을먹고 다음 마지막 산행을 약속을 하고 헤어?다.

오늘 도상거리 20.8KM를 8시간에 걸처 산행을 다른때 보다 더웁지 않아 수월하게 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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