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신라가 당을 축출함으로써 삼국통일이 완수되며,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은 하나가 되어 단일한 민족문화와 사회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통일신라론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 이런 묘사는 손진태의 '조선민족사개론'(1948)이나 '국사대요'(1949)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그 시원은 1892년에 출판된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 1858~1922)의 '朝鮮史'에서 최초로 확인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윤선태 동국대 교수는 최근 나온 '신라문화' 제29집에 발표한 논문에서 "통일신라론이 왜 등장했고, 한국의 현행 국사체계 속에 어떤 과정을 거쳐 뿌리내리게 되었는가를 추적"했다.
논문에 따르면 갑오개혁 이후 역사를 소비하는 주체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기존에는 유교 지식인의 經學을 보조하는 수단으로서 기능했던 역사가 갑오개혁 후에는 국민을 지속적으로 창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모하였다. 그 일환으로 등장한 역사교과서가 바로 1902년 金澤榮의 '동사집략'(1902)과 玄采의 '동국사략'(1906), '중등교과 동국사략'(1908) 등이다. 이들은 직접 지은 것이 아니라 하야시의 '조선사'를 거의 그대로 역술한 것들로서, 기존 연구들은 이들을 식민사관의 수용으로만 평가하였을뿐, 근대역사학의 성립과정 속에서 세밀하게 검토하지 않았다.
하야시의 '조선사'에는 '신라의 통일'이라는 항목이 별도로 설정돼 있는데, 그 서술이 현재 통용되는 통일신라론의 선구적 면모를 갖추고 있다. 전통시대의 신라정통론과 하야시의 그것은 질적으로 달랐다. 가령 조선 전기에 찬술된 '동국통감'에는 신라기를 독립시켜 다루고 있지만, 통일의 시점이 고구려가 멸망한 문무왕 8년으로 설정돼 있다. 신라기 독립의 명분도 신라가 箕子의 유풍을 간직, 계승하였고, 오륜이 돈독하다는 등 유교적 가치를 기준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야시는 당세력의 축출을 삼국통일의 시점으로 새롭게 설정했다. 바로 나당의 대립을 강조한 새로운 담론이었던 것이다. 이런 하야시의 입론은 청일전쟁 직전 일본의 대한반도 정책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윤 교수는 추적해 들어간다. 당시 분위기는 강화도사건을 계기로 체결된 1876년 '한일수호조규'의 "조선국은 自主之邦으로 일본국과 平等之權을 보유한다"는 부분에서 살펴볼 수 있다. 여기에서의 자주와 평등은 기본적으로 전근대 동아시아세계의 계서적 국제질서관념 속에서 청국에 대한 조선의 종속관계를 단절시켜, 조선을 전통적인 화이관 밖으로 끌어내려는 일본의 의도가 담겨있다고 윤 교수는 분석한다. 게다가 하야시가 '통일신라론'을 만들어낸 시기인 1885년부터 1893년은 일본이 조선을 둘러싼 청국과의 쟁탈전에서 패배한 시점이기도 하다.
한편, 조선의 경우를 보자. 광무개혁을 주도한 고종정권은 종래의 지역적 단위의 공동체를 넘어 국가단위의 통합이 필요했다. 이 때 하야시가 만들어놓은, 중국을 타자로 한 조선사 체계가 아주 요긴한 내러티브로 다가온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역사가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를 활용했을까. 김택영은 '동사집략'에서 "깜깜한 밤중에 갑자기 이웃집에 불난 듯 역사의 내용이 밝하졌다"라며 하야시의 임나일본부설을 적극 칭송하며 수용하였다. 그에게 근대적 국사체계에 대한 인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택영에게 과거의 임나일본부는 현재의 조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그저 하나의 사료에 불과했던 것이다.
반면, 현채의 '동국사략'은 하야시의 '조선사'를 역술하면서도 자신의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변용했다. 하야시와는 달리 단군의 개국을 확실시 하였고, 위만과 四郡은 목록에서 빼버렸다. 임나는 목차엔 그냥 두었지만, 설명은 통째로 들어냈다. 이는 그가 독자적인 조선의 민족사를 고민하였음을 말해준다. 그의 '동국사략'은 1909년 일제에 의해 판금조치가 되는 등 수난을 겪었지만, 이후 역사서들의 기준이 되었다. 현채의 이런 주체적 사관은 그가 역관 출신의 일본통으로서 일본의 근대적 변화를 몸소 겪었기 때문이라는 게 윤 교수의 분석이다. 그리고 1903년 무렵의 시간대에 양계초의 '응빙실문집'이 들어오고, 사회진화론 및 근대역사학 방법론이 널리 보급되었던 때였다는 것도 고려해 볼만하다.
이렇게 하야시의 통일신라론은 조선의 역사 속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의 통일신라론이 명실상부한 보편적 역사진리로 각인되는 과정에는 또 다른 작용이 있었다. 바로 1902년 이래 미술사학자 세키노 타다시 등이 경주지역 발굴이 그것이다. 그 유명한 석굴암이 이 시기 발굴된 것이다. 산기슭에 묻혀있던 하나의 토굴에 불과했던 석굴암은 타다시를 비롯해 야나기 무네요시 등에 의해 "동양의 종교와 예술의 귀결"이라는 평을 받았다. 나카무라 료헤이는 "석굴암이야말로 신라 예술의 정수를 모은 것이다. 아니, 조선만이 아니라 地上美의 전당이다"라고까지 말했다.
석굴암과 불국사 등 신라의 예술은 일본을 넘어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다. 독일의 미론가 안드레아 에카르트는 "경주의 석굴암이 동양문화의 가장 중요한 기념비임은 지나친 과장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당연히 이런 언설들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일본의 관변학자 세키노와 민예의 창시자 야나기가 건립해놓은 '신라'라는 박물관에 매혹된 관람객이자 학도로서 그 박물관 견학의 결과를 제출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당 세력을 몰아낸 이후 신라사가 황금문명을 이룬다고 기술한 황의돈의 '신편조선역사'(1923), 감상적이고 慕古主義적인 단재사학을 배격함과 동시에 식민사관도 아울러 비판한 안확이 신라의 외세 이용과 삼국통일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조선문명사'(1923), 신라의 정신과 문화를 바탕으로 이른바 '朝鮮心'을 이끌어내는 문일평의 '掌篇新羅史'(1935, '조광'), "광대한 영토와 인민을 상실하긴 했지만, 신라통일로 그나마 민족 모체의 결정을 보게 되었으며 빈번했던 종족 내부의 상투적 비극이 정지되었다"고 말한 손진태의 '조선민족사개론'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윤 교수는 "신라를 지나 고려 이후 미술의 쇠퇴, 조선문화의 쇠퇴 등은 현실적인 제국과 식민구조를 정당화하는 기조로 작용했다. 신라문화는 일본 고대문화의 아류로서 존재한 것이지, 별도의 독립된 학문영역은 아니었다"라고 지적한다.
아무튼 식민지시기를 통틀어 역사, 문학, 종교, 미술 등 통일신라론의 개진은 다방면에 걸쳐 이뤄졌다. 그것은 한국인의 지적, 상상적 능력이 전면적으로 동원된 작업이었고, 후대 한국의 정치실험과 문화 건설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윤 교수는 결론에서 "통일신라의 발명과 확립은 문화와 민족의 지위가 사라져버렸던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이 기획할 수 있었던 상상적인 국가이야기의 시작으로서, 간과할 수 없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라고 평한다.(리뷰팀)
임태보가 만만한 홍어 趙ㅅ이 아닙니다. 그는 의고학파에 대항하여 상고시대 五帝를 격렬히 옹호합니다. 임태보 원전을 독파하고 소화한 상태인지 알 수는 없으나, 내가 읽은 윤 교수 글은 원전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닙니다. 탈민족주의가 귀가 솔깃한 듯하나, 그것이 파괴에 유리할 지 모르나, 탈민족주의는 deconstruction이 되어야 할지니, 7-8세기 신라황금주의만 해도, 나는 asylum의 소멸이라는 측면에서 신라의 일통삼한은 vitality의 소멸이라 간주합니다.
임태보 사학에 대해서는 최재석 교수 논문이 선구적입니다. 지금 시점에 보아 이 논문은 적지 않은 문제점이 있으나, 임태보가 왜 한국역사학에서 중요한 지를 조목조목 지적한 점에서는 사학사적인 조명을 받아야 합니다. 한국근대 역사학의 성립과 관련해서는 임태보보다 성야항으로 대표되는 도쿄제국대학 사학과 3인방, 나카 미치요로 대표하는 일본 동양사학, 양계초가 대표하는 중국근대사학이 긴요할 지니, 문제는 양계초 글 몇 편 외에 이들의 전저는 단 하나도 소개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19-20세기 일본 글을 읽을 줄 알아야지 뭘 논하든 하지...
사슴을 집어삼킨 이구나아라고 할까? 한데 말입니다. 그 사슴은 산덩어리만 한데, 그것을 집어삼킨 이구아나는 채 자라지 못한 소년티가 나더군요. 던져는 놓았고, 또 집어삼키기는 했는데 그것을 어떻게 소화시키느냐? 내 보기엔 소화작용에서는 이구아나는 벗어나야 합니다. 한데 자기가 삼켜 놓고 자기가 소화시키려 하니 부조화가 빚어집니다. 왜? 씹어도 내가 고른 것 같지 않은 음식이 안에 들어가 있으니까요. 남이 주는 음식을 집어삼켰더니, 나한테 맞는 줄 알았는데 그만 쫄바지였습니다.
첫댓글 윤교수 논문은 재미있으니까 조선일보가 반드시 기사 내줄껄?
어쩌나, 통일신라라는 용어는 이미 조선 전기에 편찬된 사서에 사용되었는데......
임태보가 만만한 홍어 趙ㅅ이 아닙니다. 그는 의고학파에 대항하여 상고시대 五帝를 격렬히 옹호합니다. 임태보 원전을 독파하고 소화한 상태인지 알 수는 없으나, 내가 읽은 윤 교수 글은 원전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닙니다. 탈민족주의가 귀가 솔깃한 듯하나, 그것이 파괴에 유리할 지 모르나, 탈민족주의는 deconstruction이 되어야 할지니, 7-8세기 신라황금주의만 해도, 나는 asylum의 소멸이라는 측면에서 신라의 일통삼한은 vitality의 소멸이라 간주합니다.
석굴암과 불국사가 상상의 국민 통합기제라는 시론을 2003년에 박물관 잡지에 썼더니, 그에 관여한 한 원로미술사학자가 제자들에게 이랬답니다. "앞으로는 김태식이 하고 어울리지마"
그럼 소위 한국사에서 바이탈러티가 가장 넘친 시대가 언제인가? 나는 진성여왕 무렵으로 간주합니다. 중앙권력의 해체, 소위 이기백 사학으로 대표하는 중앙집권제 국가의 소멸이야말로 에너지의 분출로 작동합니다.
임태보 사학에 대해서는 최재석 교수 논문이 선구적입니다. 지금 시점에 보아 이 논문은 적지 않은 문제점이 있으나, 임태보가 왜 한국역사학에서 중요한 지를 조목조목 지적한 점에서는 사학사적인 조명을 받아야 합니다. 한국근대 역사학의 성립과 관련해서는 임태보보다 성야항으로 대표되는 도쿄제국대학 사학과 3인방, 나카 미치요로 대표하는 일본 동양사학, 양계초가 대표하는 중국근대사학이 긴요할 지니, 문제는 양계초 글 몇 편 외에 이들의 전저는 단 하나도 소개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19-20세기 일본 글을 읽을 줄 알아야지 뭘 논하든 하지...
4월 10일자 조선일보에 대서특필되었군요. 정구복 교수 논평이 적절하지요. 탈민족주의와 전통사학, 그리고 만들어진 고대사, 이 삼자의 관계를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까요.
사슴을 집어삼킨 이구나아라고 할까? 한데 말입니다. 그 사슴은 산덩어리만 한데, 그것을 집어삼킨 이구아나는 채 자라지 못한 소년티가 나더군요. 던져는 놓았고, 또 집어삼키기는 했는데 그것을 어떻게 소화시키느냐? 내 보기엔 소화작용에서는 이구아나는 벗어나야 합니다. 한데 자기가 삼켜 놓고 자기가 소화시키려 하니 부조화가 빚어집니다. 왜? 씹어도 내가 고른 것 같지 않은 음식이 안에 들어가 있으니까요. 남이 주는 음식을 집어삼켰더니, 나한테 맞는 줄 알았는데 그만 쫄바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