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榮州)」가 낳은 "천하명의와 만고충신"
「李 父 子」
글 ; 朴 錫 泓
* 계간 「榮州文化」편집위원
* 韓國文協 榮州支部
기 고 일 : 1994년 7월(수정게재 2004. 10)
어정대다 보면 벌써 7월은 가버리고, 둥둥거리다 보면 8월마저 가버린다는 「어정칠월 둥둥팔월」이라는 속담이 생각나는 계절이다.
올(94년) 칠월은 유난히도 무덥다 보니 타는 듯한 목마른 얘깃거리가 많은 것 같다. 시간당 300㎜가 넘는 유례없는 폭우가 쏟아졌는가 하면, 민족의 저력을 과시했던 월드컵 축구 열기는 식을 줄 몰랐으며, 거기다가 달이 다 가도록 쏟아 붓던 불볕더위가 온 동네를 가마솥 데우듯 하더니 가뭄불을 지펴 반도의 온 들판을 태우고 있지 않는가. 또한 나라 허리를 묶어 남북으로 갈라놓았던 6.25 동족상쟁의 책임자요 전범이었던 북한 주석 김일성이 남북대화의 물꼬를 트는가 싶더니, 웬걸 「김일성 사망」이라는 급보가 전해지면서 온통 가뭄을 타는 들판을 볼 때마다 오금이 저린데도 아랑곳 없이「김부자」이야기로 시국은 더 뜨겁기만 하다. 그러나 이번 호에는 말썽 많은 「김부자」이야기 대신에 선비의 고장 영주가 낳은 자랑스런 「李父子」이야기로 잠시 더위를 식혀 보았으면 한다.
선비의 고장 영주는 시가지 북쪽에 무쇠를 삼킬 정도의 화광(火光)을 발하는 철탄산(鐵呑山)이 진산(鎭山)으로 앉아 있고, 산의 서쪽 끝머리에 「뒤새」와 「관사골」이라는 동네가 길을 사이로 나뉘어 있다. 길 윗동네는 지방철도청이 생기면서 철도가족들의 보금자리로 관사(官舍)가 들어서면서 붙여진 이름이고, 그 아랫동네는 조선 초기 단종 때까지 대대로 벼슬을 했던「공주 이씨 」가문의 한 분1이 세조의 왕위찬탈을 못 마땅히 여겨 이 고을에 입향(入鄕)하자마자 두문불출(杜門不出)했다고 해서 두서(杜西), 두릉촌(杜陵村), 「뒤새」2로 부르게 된 것이 마을 이름의 내력이다.
근래에 교사(校舍)를 새로 지어 도시미관을 살려 놓은 이 지방 인재의 보고인 영광중학교의 서편 담장을 따라 나 있는 길은 양 동네를 들어가는 진입로이기도 하며, 80년대 초 지금의 우회도로가 나기 전까지만 해도 마산~중강진선 5번 국도를 이어 주던 유일한 시가지 진입도로이다. 이 동네에는 중앙선 철도가 남북으로 지나가고 있고, 가까이에는 파출소와 동사무소․시외버스정류장 등 각종 공공시설이 들어 서 있는가 하면 1급 주택지로서 면모를 과시하는 듯 고급연립주택들이 들어서 있어 전형적인 도시마을의 관문구실을 톡톡히 해주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한때 지금의 고가도로(over bridge) 자리에 철도차량 수리창과 기차머리를 바꾸던 원형입환장(圓型入換場)이 있던 곳이었고, 그 이전에는 서천(西川)물줄기가 마을 앞을 감돌아 흘렀던 흔적이 아직까지도 완연하게 남아 있어 지축선(地軸線)을 따라 유로 변경된 저습지대(低濕地帶)였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옛말대로 시대와 환경이 바뀌면서 시멘트 건물들이 꽉 들어서 있어 이곳의 옛 모습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드물지만, 현 시외버스터미널 길 건너편에는 조선시대 군수 문재도의 「효자각」이 유일하게 남아있다.
예전 이곳 「뒤새」에는 이석간(李碩幹)3이라는 가난한 선비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글 읽는 것 외에는 별다른 재주가 없었던 그에게는 선현들이 남긴 경서(經書)를 통해 귀한 가르침을 배우는 일이 일과였으며, 취미삼아 그동안 고금동서에 전래되어 내려온 황제내경(黃帝內經)4·을 비롯 의서(醫書)5라는 의서는 수천 독을 하였기에 나중에는 유의(儒醫) · 명의(名醫) · 신의(神醫)로 더 소문난 인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병 잘 고치는 영천(榮川) 선비 「이석간」의 소문은 발 없는 말(言)이 천리 간다고 온 나라에 전해지면서, 하루는 이웃 고을의 왜소증(矮小症) 걸린 남편을 고쳐 보려는 열녀 아내가 용하디 용한 이석간을 찾아와 지아비 병 좀 고쳐달라고 애원을 하였다고 한다. 자초지종을 듣고만 있던 「이석간」은 측은한 생각에 도와주고는 싶었으나 의서(醫書)에도 없는 처음 들어보는 병이라 한 달이라는 기한을 주면 연구해서 고쳐 보겠노라고 일러 준 뒤, 그 길로 평소 답답할 때마다 무작정 길 나들이하던 습관대로 죽령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고개에 이르도록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좋은 처방이 나오지 않자, 고갯마루에 앉아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천지신명께 기도하니 난데없는 인기척이 들리면서 등 붙은 장정 두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 「이석간」의 고민 덩어리를 끄집어내며 하는 말이 “그 병에는 어릴 때 젖배를 너무 곯아 얻은 병이니 천집(千家口) 젖을 얻어 먹이면 금방 나을 것이다.”라고 일러 줄 뒤 사라졌다고 한다.
집에 돌아와 즉시 왜소증 환자 내외를 불러보니, 남편은 정말 피골이 상접하고 제대로 먹지 못해 왜소했으며, 아내의 치마폭에 둘둘 쌓여온 장작개비 같이 말랐기에 죽령고개에서 이상한 사람이 일러준 대로 처방을 하니 그가 시키는대로 가가호호 다니며 젖 구걸 한 아내의 정성 덕에 남편은 거짓말처럼 낫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에도 결핵을 앓거나 허약한 사람에게는 우유(양이나 젖소의 젖)를 장복(長服)하면 효과를 크게 본다고 하지 않는가.
나중에는 이석간의 활인의술(活人醫術)이 멀리 중국에 까지 알려지게 되어 명나라 임금(明나라 神宗황제로 추정)이 자기의 어머니인 「황태후」의 불치병을 고쳐 보고자 사신을 보내왔기에, 가기 싫었으나 할 수 없이 사신을 따라 여러 날을 원행 끝에 중국에 들어가 황제6를 만나게 되고, 이어 육십 가까운 황태후를 면전진맥(面前診脈)해 보니 겉보기에는 병명이 황수병(黃水病 : 비장이 상해 배가 붓는 병)7 같았으나 결국 음독(陰毒)이 차서 배꼽아래 하체가 돌처럼 굳어진 몹쓸 병이었다고 한다. 병의 뿌리가 너무 깊어 자신이 없지만, 소생시킬 방안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불현듯 죽령고개 등 붙은 장정 생각이 떠올라 의관을 차려입고 황제가 마련해 준 처소에서 조용히 기도하니, 그때 나타났던 장정이 다시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소백산 산신령인데 네가 평소 인명을 귀히 여기고 심성이 착했기에 다시 나타났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그런 병은 음탕한 여자가 과부가 되어 오래 살다보면 음욕을 참은 것이 화병이 되어 몸 밖으로 배출되지 못하고, 음기(陰氣)가 몸에 쌓여 혈기를 막아 생긴 병이니 병소(病巢)가 모여 있는 배꼽 주변에 금침(金針)을 꽂아 두면 독기가 다 빠져 나오고 차차 기력이 회복될 것”이라고 일러준 뒤 온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튿날, 소백산 산신령이 가르쳐 준 대로 황태후의 배꼽주변 경혈(經穴)을 찾아 침(針)을 놓기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독기가 빠져나오면서 거뜬히 고쳐 원기를 회복시켜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병의 낫고 안낫고를 따질 겨를도 없이 황명(皇命)을 받고 보니, 그 책임이 막중하므로 그는 스스로 마음에 부담을 느껴 여공불급(如恐不及 : 황명을 이행치 못할까 마음을 졸임)이었으나 다행히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고 세전비방(世傳秘方)을 다한 결과 예상밖으로 환후(患候)가 쾌차되므로 마음고생을 절로 덜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후 사실을 눈으로 확인한 황제가 매우 기뻐한 나머지 “과연 조선의 의선(醫仙)인 이석간이야말로 화타 · 편작을 방불하는 명의(名醫)로구나.” 라고 칭찬하며 어전에서 소원을 묻자, 평소 겸손하고 청빈했던 선비였기에 “아무 욕심이 없다”고 아뢰니, 황제가 재차 강권하므로 “정 그러시다면 소생의 고향에 살 집을 지어 주시면 고맙겠다.”고 하자 당장에 영을 내려 사람과 재물을 보내 그의 고향에다 터를 닦아 대궐 같은 아흔 아홉 칸짜리 기와집8을 지어 주되, 도적이나 삼재(三災)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제갈공명의 팔진도(八陳圖)에 의해 본채와 별채 여러 채를 짓되, 둘레에는 땅을 파 큰 못을 만들어 배를 띄우게끔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집을 짓는 동안 이석간은 황제의 특명으로 중국의 명승지를 두루 구경하고 귀국 시에는 황제가 송별연을 베풀어 많은 금은보화와 비단을 하사하면서 황제가 드시던 술과 천도복숭아 등 진귀한 음식까지 맛을 보게 하니 난생 처음 먹어 본 천도복숭아는 얼마나 달고 맛이 좋은지 기념으로 그 씨를 도포자락에 넣어 갖고 왔는데, 이 씨앗을 다듬어서 후손들의 혼례의식 때 의례용 잔9으로 사용해왔다고 하며, 공주 이씨 종손이 지금까지 세전지물(世傳之物) 가보로 숨겨 보관해 오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는 천도복숭아 모양으로 나무속을 파서 술잔으로 다듬은 것으로 보임.)
이 후 이석간은 생거지복(生居之福)을 다 누리면서 수한대로 살다가 일생을 마치게 되었건만, 다행히도 자식들마저 잘 자라주어 두 아들은 모두 다 무과급제로 임진왜란 때 혁혁한 공을 세운 장본인이 되었던 것이다.
(사진) 천도복숭아 술잔 - 현재 영주서원에 보관중 |
「사의경험방」10 중 이석간의 경험방 |
명의 이석간(1509 ~1574)은 허준(1539 ~1615)보다 더 앞선 시기를 살다간 유의(儒醫)로서 평소 퇴계 이황 선생과 그의 문인들과도 교분이 두터웠고, 닭실마을의 충재(沖齋) 권벌(權橃) 선생의 생질(甥姪)이기도 하다. 소수 · 도산 등 퇴도문하의 여러 제자들과 동연배로서 가까이 지냈다. 그리고 여러 문집(소고 박승임 문집, 백암 김륵 문집, 눌은 이광정 문집, 병산 김난상 문집, 송암 권호문 문집 등)에 그의 활인행적과 두 아들의 진충보국한 사실이 기술되어 있다.
특히 이석간에 관하여 송암 권호문(5~6p 사진자료 참고)이 남긴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글에 보면, “1570년(선조 3) 12월 3일 퇴계가 위독하자, 구성(龜城 : 현 영주)에서 참봉 이석간이 급히 와서 생원 민응기․판사 이연량과 함께 선생의 맥을 짚어본 뒤, 약을 조제하여 드시게 했다. 그러나 퇴계선생은 천운이 다함으로 조금도 효험이 없었고, 주변에서 시중드는 사람이 70여명이 되어도 하늘 앞에 정성이 부족하여 그달 8일에 돌아가셨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석간이 퇴계선생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편안히 가시도록 유의(儒醫)이자 제자입장에서 최선을 다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퇴계선생과 도산서원」(정순목 편저) 내용 중 고종기(考終記, 286~288p) 부분 (퇴계선생의 운명을 앞두고 유의(儒醫) 이석간이 마지막으로 진력 처방한 사실) |
|
|
권호문의 「유청량산0록」
위독한 퇴계선생을 진맥, 처방하는 내용 |
「소수서원 입원록」
송암 권호문과 동년 입원한 약포 정탁 |
소수서원이 배출한 주요인물 퇴계이황 선생 문하생들은 대부분 포함
http://san114.tistory.com/1805 참조 |
이 외에도 이석간에 행적을 기록한 문인들의 글이 많이 남아있는데, 그 중「공주 이씨 공숙공 파보」에는 당시 소윤 대윤 당파싸움이 극명하던 시절 윤원형(尹元衡)으로 인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사실이, 「백암 김륵 선생 문집」에는 아들 정견(庭堅)은 기장현감(창의장)으로 원종이등공신, 정헌(庭憲)은 부산진첨사 정발 장군의 막료로서 부산진을 사수하다 순국한 내용 등이, 「충렬사지」에는 아버지 이석간의 의학 관련 내용과 아들 정헌의 살신진충 내용이,「눌은 이광정 선생 문집」에는 이석간의 선대(先代)와 영주에 입향 내력부터 두 아들의 무훈 등이 기록되어 있고, 특히「병산 김난상 선생 유집」에 보면, “한양에는 침(鍼)놓는 자가 많아도 잘못하면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하니..... 설사병이 재발하여 백약을 써도 효험이 없으니 이는 잘못 쓴 약 탓이오. 지금 그대(석간)가 한 번 오셔서 돌봐 준다면, 쓰러져 가는 목숨을 살릴 수 있을 것이오.” 라고 기록된 서답(書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큰 아들 정견(庭堅)11은 선조 때의 인물로서 당시 국내 사정은 당파싸움으로 국력이 쇠미했던 때였으니, 당쟁의 회오리 속에 글만 읽을 게 아니라고 생각해 붓을 던지고 무과에 응시, 급제하여 나라 변방을 지키는 일에 앞장섰던 인물 중에 한 사람이었다. 또한 임진왜란이 터지자 스스로 창의(倡義)하여 의병장으로서 인근 용궁지방에서 왜적 선봉부대를 물리치기도 했으며, 당시 영남 안집사(安集使)였던 백암 김륵(金玏)선생의 천거로 안동진 병마절제사(安東鎭 兵馬節制使)로 특진되었고 권율장군의 행주대첩을 계기로 퇴주하던 왜적들을 원주 지방에서 격파한 공로로 강원도사(江原都事)가 되었으며, 후일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고, 군자감정(軍資監正)의 벼슬에 올랐던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둘째 아들인 정헌(庭憲)12은 소년시절에는 시문(詩文)에도 남다른 재주가 있었지만 선조 24년(1591) 일본을 다녀온 통신사 일행의 엇갈린 보고와 당파로 시국이 시끄럽던 차, 형을 따라 붓을 던져 버리고 무과에 응시, 형제가 나란히 급제하였으며 당시 중앙정부에서는 위급한 상황을 뒤늦게 깨닫고 무신들을 나눠 주요 지방에 파견하여 성벽신축․보수 등 전쟁에 대비토록 분견(分遣)하였을 때, 몸을 아끼지 않고 자원하여 남이 가기 싫어하던 일선지대 부산으로 가서 첨사 정발(鄭撥)의 휘하에 들어가 막빈(幕賓) 자격으로 군무에 임했던 것이다.
조방장(助防將)이 된 이듬해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왜적이 침입해 오자, 생즉필사 사즉필생(生則必死 死則必生)이라는 사생결단의 각오로, 첨사 정발과 함께 전선(戰船)밑에 구멍을 뜷어 수장13시키는 파부침선(破釜沈船)을 한 후, 백성들을 이끌고 성에 들어가 성문을 굳게 닫고 수비전을 폈으나, 화살은 동이 나고 역부족 끝에 첨사 정발(鄭撥),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다대포첨사 윤흥신(尹興信)과 함께 모두가 장렬히 최후를 마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싸움 끝에 불행 중 다행인지 주검 속에서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된 정발 첨사의 부하 한 사람이 왜적의 포로로 잡혀있다 탈출하여 오니, 모두가 왜놈의 끄나풀로 여기므로 잡아다가 다시 안동진관으로 호송하여 조사해 보니 부산성 함락 경위와 정첨사, 이정헌 등 당시 희생자들의 최후를 생생히 증언해 주므로 나중 나라에서 이 사실을 알고 그때 희생된 이들을 충렬사(忠烈祠)14에 배향(配享)케 되었던 것이다.
(사진) 충렬사 전경 (그림) 충렬사 제향도
이때에 정헌의 맏아들은 겨우 열 살이요, 형인 정견마저 국사에 겨를이 없었기에 부산이 7년 동안 왜적의 소굴이 되었다가 왜란이 평정되고 그 이듬해인 선조 32(1599) 10월에 가서야 비로소 부산현지에서 초혼제(招魂祭)를 지내주고, 정헌의 옷과 신발을 거두어 지금의 문수면에 있는 관석산(寬石山) 기슭에 묻어 주었으며, 부산성 함락일인 4월 14일을 기일(忌日)로 삼아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오로지 우국일념(憂國一念)에서 부산첨사 정발(鄭撥, 1553~1592) 장군 휘하의 막빈(부사맹)으로 있으면서 “부산은 우리나라의 관문이다. 만약 부산이 없으면 동래도 없고, 동래가 없으면 영남도 없다. 또한 영남이 없으면 우리나라도 있을 수 없다.”(釜山 我國關門 若無釜山 是無東萊 若無東萊 是無嶺南 若無嶺南 是無我國)라는 각오로 목숨을 던져 나라를 지켰던 이 용감한 모습을 볼 때, 후한서에 나오는 ‘충신은 반드시 효자 가문에서 나온다(救忠臣 必孝子之門)’는 말이 새로워질 따름이다.
영조 18년(1742) 나라에서는 정헌에게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좌승지로 증직(贈職)하고, 그의 옛 고향 뒤새 앞 큰 길에는 사당을 짓고 정려(旌閭)를 세워 후손들에게 의표(儀表)가 되게 하였다.
역시 영조 때 동래부사 홍명한(洪名漢)이 편찬했던 부산진 위안제문(釜山鎭 慰安祭文)에 보면, 부사로 부임해 오자마자 영조 37년(1761) 봄 성 안의 못을 파다가 임란 때 전사한 많은 유골을 수습하여 정결한 곳에 합장했는데, 그 무렵 주위 어떤 분의 꿈에 팔척 장신의 사나이가 큰 화살 · 긴 칼을 차고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임란 때 정첨사를 도와 성을 지키다 순절한 이사맹(李司猛) 정헌인데 아직까지 찬밥 제사조차 받아 본 일이 없다.” 하므로 날을 받아 따로 못가에 단을 베풀고 제를 지내주었다고 적고 있다.
지금은 부산 충렬사와 정공단(鄭公壇)15에 첨사 정발과 함께 배향(配享)되어 있어 그분들의 의로운 삶이 이제는 부산 시민들의 얼이 되어 주고 있으며, 또한 「부산 시지」를 비롯 「동래구지」 등 향토역사책에 명예로운 그의 일대기가 실려 있어 성공한 출향인사처럼 영주가 낳은 자랑스런 인물이 되었다.
충렬사지 정공단
그러면 천하명의로 소문났던 「이석간」과 그의 아들 정견․정헌 형제들이 살았다는 집들은 어디 매쯤 있었을까? 그 아흔아홉 칸짜리 고래 등 같은 기와집들은 진짜 있었을까? 매우 궁금한 일이기도 하다.
「이석간」이 중국 황제로부터 선물로 받게 된 저택은 몇 해 전 까지만 해도 영주 「뒤새」에 비지정문화재인 역사현장으로 남아 있었으나 「조광양조장」을 경영하던 서천수씨 소유 주택으로 관리되어 오다가 소유자가 바뀌면서 그 때의 집은 구닥다리 옛 집이라고 헐리고 지금은 그 자리에 “안영빌라”라는 현대식 연립주택이 들어서 있을 따름이다.
이석간이 살던 집은 구한 말, 고종 황제의 전의(典醫)로서 명성을 떨쳤던 귀운(龜雲) 서병효(徐丙孝)의 소유가 된 뒤, 후손인 서천수 씨까지 관리되어 왔다. 달성 서씨 두서(뒤새) 문중은 원래 안동에서 정착해 살다가 구한 말 영주 안정면의 대룡산으로 이거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병효가 왕실 전의로 상경하면서 궁궐 옆에 집을 마련하고 潼南약국을 개설하였지만, 자식을 먼저 보내는 가화(家禍)를 입게되자 자의반 타의반으로 영주 뒤새의 집을 매입하여 낙향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집은 명종 때, 이석간이 명나라 황태후의 병을 다스린 공으로 나라로부터 받은 99칸의 대저택이며, 집 안의 정자는 귀운정(龜雲亭), 사랑채는 의두헌(倚斗軒) 등으로 명명한 내력이 지암(止菴) 황영조(黃永祖)가 찬한 서병효의 묘지명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이석간에 이어 서병효가 한때 살았으니 명의 2대가 활인제세(活人濟世)한 유서깊은 집이기도 하다. (유계생 송지향 편저, 영주․영풍 향토지 참조)
삼의경험방(내용일부) 삼의경험방(전주역사박물관 소장본)
그러나 그때 별채로 같이 지었던 건물 중에 하나가 보존상 중 · 개축은 되었지만 유일하게 남아 있어 천만다행이라 하겠다. 이 집은 서천수씨 주택 옆에 붙어 있는데, 지금은 전직 철도공무원인 「김종만」씨 소유 주택이다. 68년 당시 영광중학교 역사 교사였던 조재진 선생이 건물 대들보의 때 자국을 벗겨내고 상량일자를 찾아내어 전설같이 전해져 내려오던 이 집 내력과 년대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그때 주인이던 故홍옥남(洪玉南) 여사의 생전에 생생한 증언을 자세히 들은 바 있다.
(사진) 이석간이 살았던 옛집 일부
이 고장 공주 이씨 가문의 천하명의 「이석간」16과 그의 아들 만고충신 「정견」,「정헌」형제들은 역사 속에 묻혀있어 이제 아는 이는 드물지만, 그 흔적의 일부라도 남아 있는 이곳 「뒤새」의 옛집(古家)만큼은 선비의 고장 영주가 낳은 자랑스러운 「李父子」宅으로 길이 보전되어야 할 것이다.
아버지인 이석간은 의원으로서 신농유업(神農遺業) 약시제중(藥施濟衆)하여, 天下에 영주인(榮州人)으로서의 기개를 높였었고, 자식인 이정견 · 이정헌 두 형제는 무관으로서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는 국란을 맞아 살신진충(殺身盡忠)하여 나라를 살렸으니 이보다 더 가상한 일이 있겠는가.
나라 살림이 넉넉한 국가이거나, 유복한 가정일수록 패륜아와 문제아가 많은 요즈음 세태에 비추어볼 때, 부자 2대(父子 二代)에 걸쳐 나라와 이웃을 사랑했던 이야기야말로 여름날 시원한 빗줄기 같은 영주의 자랑이자 이 나라에 보기드문 "충효(忠孝)"의 벼리"로서 두고두고 회자(膾炙)될 것이다.
- 參考資料 - <문헌자료>
• 송암 권호문 선생 문집
• 퇴계선생과 도산서원(퇴계학회 경북지부), 1987
• 충렬사지
• 조선왕조실록 <향토지>
• 영주․영풍 향토지(송지향 편저), 1983
• 부산시지․동래부지․동래향토지(93간, 179p) <문중자료>
• 공주이씨 공숙공 파보 <문집자료>
• 병산 김난상 선생 유집
• 백암 김륵 선생 문집
• 눌은 이광정 선생 문집
• 소고 박승임 선생 문집
• 암천세고 등 <의서자료 >
• 사의경험방(조선 인조 22, 1644, 목활자본), 서울대 규장각
• 삼의경험방(필사본), 전주역사박물관 <인터넷 자료>
• http://san114.tistory.com/1805
• http://blog.naver.com/forhistory?Redirect=Log&logNo=130057880363
• http://blog.naver.com/levrai1?Redirect=Log&logNo=40055720890
• http://blog.naver.com/forhistory/130057880363 <보도자료>
• 연합뉴스(2009. 3. 5. 기사) 및 뉴시스(2009. 3. 5. 기사)
榮州人들에게 드리는 말
천하명의 이석간을 기리기 위해 앞으로 모임을 조성하게 된다면, 이석간이 살던 집만큼은 헐어없애는 일이 없도록 영주시와 시민들, 그리고 공주 이씨 영주문중과 현 소유자(김종만)간에 건설적인 의견을 모아 마지막 남아 있는 집이라도 잘 보전되게끔 법적 · 제도적인 조치와 함께 적절한 관리방안이 먼저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곳 영주는 예로부터 명현열사(名賢烈士)와 다양한 계층의 두드러진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선비의 고장답게 가공인물인 유의태와 어의인 허준을 훨씬 앞서 살다간 실존인물이었던 이석간이라는 명의중의 명의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다른 지역은 조그마한 끄나풀만 있으면 그것을 근거로 문화콘텐츠를 삼아 성역화 시키거나 그 지역의 랜드 마크로 활용하고 있는데 비해 그동안 영주는 이러한 역사적 인물들을 소홀히 하거나 너무 모르고 살아왔다. 앞으로는 이러한 역사적 인물들을 재조명하고 그들이 남긴 흔적을 발굴하여 영주의 브랜드 가치를 높여나가야 할 것이다. (지역사회가 활용할 수 있는 역사적 자료나 캐릭터화 시킬만한 인물들은 무궁무진하나,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 써야 보배이듯, 지속적인 관심과 조사 발굴, 재조명이 되도록 한다면 영주의 역사적 부가가치를 대내외적으로 드높이게 될 것이다.)
※ 위 그림은 천하명의 이석간을 유기적으로 재조명 해볼 수 있는 하드 / 소프트웨어를 도표화 한 것임.
각 주(脚 註)
각주 1 공주 이씨, 이진(李畛) : 임피현령(臨被縣令). 세조의 왕위찬탈 때, 벼슬을 버리고 妻鄕 영주로 낙향. 처부(장인)는 예안 김씨 김숙량(金叔良 : 세종 때 대사간)임. ※ 예안 김씨 추원록과 문향 영주 등 참고
각주 2 「뒤새」: 관아 뒷마을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고도 함.
각주 3 이석간(李碩幹) : 중종 4년(1509)~선조 7년(1574). 평생 동안 “신농유업(神農遺業) 약시제중(藥施濟衆)”으로 활인의술을 편 임상경험방(일명 석간방)을 남기니 인조 ․ 효종 때 와서 그의 뒤를 이어 명의 소리를 듣게 된 蔡得己 ․ 朴濂 ․ 許任 등의 임상경험을 함께 모아 편집한 것이 그 유명한 “사의경험방(四醫經驗方)”이다.
각주 4 황제내경(黃帝內經) : 중국 전설의 제왕인 삼황(복희씨, 신농씨, 황제)시대때, 황제가 의신(醫臣)이었던 기백(岐伯)과 뇌공(雷公) 등 여섯 명의 명의와 주거니 받거니하면서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치료 임상경험방을 기술한 동양 최고의 고전의학서이다. 전편(上)은 소문(素問)인데, 81편의 내용이 음양오행사상을 배경으로 천인합일(天人合一),..
각주 5 「우리고장의 전통문화」책 내용(p229~234)에 보면, 이석간이 동의보감(東醫寶鑑)을 千讀했다는 것은 잘못임. 당시 선조대왕 시의(侍醫) 허준이 1608년 왕이 승하하자 유배지에서 동의보감을 썼다. 이석간의 생몰연대(1509~1574)가 허준보다 훨씬 앞서는 바, 그렇다면 동의보감이 아니라, 그보다 앞서는 전래 의서들을 섭렵한 것이며 도리어 허준의 동의보..
각주 6 중국(明)은 실제 이석간의 생몰연대 사이인 조선 명종 20년(1565) 2월에 명 세종이 죽고 목종이 즉위, 다시 조선 선조 5년(1572) 5월에 명 목종이 죽고 신종이 즉위했으니 口傳 이야기가 사실인 것 같다. 그리고 조선 중하기 때, 편찬된 「광제비급(廣濟秘急)」의 인거제서(引據諸書)에 보면, 이석간이 유의(儒醫)로서 평소 임상치료 경험을 모아 쓴 이..
각주 7 황수병(黃水病) : 한의학에서 비장(脾臟)이 상(傷)하거나 탈(頉)이 나게 되면 허리에 통증을 수반하게 되면서 복수(腹水)가 차듯 퉁퉁 붓는 병이다.
각주 8 아흔아홉 칸의 한옥 : 예전부터 우리 조상들은 인간사에 완전무결한 것은 없으며, 오직 완벽하다는 것은 신(神)의 경지이므로 수한(壽限)을 따져도 백수(百壽)에서 하나(一)를 뺀 백수(白壽)라고 했으며 항상 “次善이 上善이다.”라고 겸허한 마음가짐을 가졌었다.
각주 9 천도잔(天桃盞) : 높이 2.3cm, 너비 4.5cm × 6.5cm(사진 참조)
각주 10 사의경험방(四醫經驗方) : 조선 인조 22년(1644) 목활자본(1책), 서울대 규장각 / 한독의학학술관 소장. 李碩幹이 유의로서 평생 경험한 임상처방을 근거로 만든 의방서(醫方書)이며, 일명 석방(石方) 또는 석간방(石澗方)으로도 썼다. 나중에 채득기(蔡得己)의 학방(鶴方)과 박렴(朴濂)의 오방(悟方)을 보탠 것이 전초본(傳草本)인데, 세 사람의 명의가..
각주 11 이정견(李庭堅) : 명종 11(1556) ~ 광해군 2년(1610)
각주 12 이정헌(李庭憲) : 명종 14(1559) ~ 선조 25년(1592)
각주 13 파부침선(破釜沈船) : 나라가 왜침으로 위난에 처했을 때, 죽기 살기로 싸워 이기고자 왜적이 도망 못 가게 배는 바닥에 구멍을 내어 가라 앉히고, 솥은 굶어죽도록 깨어 버리고, 사생결단의 항쟁을 하던 절대절명의 상황을 이르는 말이며, 유사 이래 수도 없이 왜구의 침탈을 겪은 사실이 부산(釜山)이라는 지명유래의 계기가 되었다.
각주 14 충렬사(忠烈祠) :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 838. 1592년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다 장렬히 순국한 분들의 위패를 모신 곳. 1605년(선조 38년) 충렬공 동래부사 송상현(1551~1592)을 모신 송공사(宋公祠)를 세운 뒤, 1624년도 나라로부터 충렬사라는 사액을 받음. 1709년(숙종35년)에 이어 1736년(영조 12년)에 함께 전사한 8인의..
각주 15 정공단(鄭公壇) :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473-474에 소재. 1766년(영조 42년) 부산첨사 이광국(李光國)이 임란 때, 부산진성을 사수하다가 순사(殉死)한 첨사 정발(鄭撥)과 그의 막료였던 부사맹(副司猛) 이정헌(李庭憲), 정발 첨사의 소실 애향(愛香), 노비 용월이(龍月伊), 기타 무명전사자를 합사하여 매년 부산성 함락일인 음력 4월 14일에 제..
각주 16 이석간의 아버지는 단종추복(端宗追復)을 주장했던 이함(李諴)이요, 외조부는 권사빈(權士彬)이며, 외삼촌은 닭실마을(酉谷) 입향조 충재(冲齋) 권벌(權橃)선생이고 그 아들(동보, 동미)과는 내 외종간이다.
|
첫댓글 안녕하세요~~ 좋은 하루 되세요
잘 보았습니다.
가슴벅찬 문중의 자랑인데 어찌 왜면 할 수 있습니까!
비록 몸은 멀리 서울에 있지만 결코 잃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관심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날 되세요~~
늦게서 나마 알게 되어 선조들의 훌륭한 뜻에 감탄할 뿐이고, 조만간 찾아가 보아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