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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일본 상인(군인?) 쓰치다 살해 이유와 그 원인이 된 을미사변!
우리 한국인 대부분이 존경하는 역사 인물에는 이상재, 안창호, 서재필, 안중근과
김구가 있는데..... 김구 선생은 애국애족 정신에 투철하신 분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해 윤봉길의거를 계획하고 광복군을 조직한 애국자로, 일본인을
살해한 치하포 사건의 전말과 그 원인이 된 을미사변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김구는 동학에 들어가 최시형으로 부터 황해도접주에 임명되어 1894년에 선봉장
으로 해주성을 공격했으며, 패한 이후 해주 안태훈의 집에 숨어있는
동안 아들 안중근을 알았다는데.... 동학군은 관군 + 양반 지주들의 민보군 +
보부상 + 일본군 4자와 싸웠으니, 민보군을 이끈 안태훈과 아들 안중근에게
김구는 전투를 치른 적의 수괴인데도 불구하고 숨겨준 안태훈의 그릇이 참 큽니다?
동학농민군이 궐기하자 황해도관찰사 정현석의 요청을 받은 안태훈은 집안 자제
들과 인근 포수들을 모아 70명 의병으로 청계산에 진을 쳤으니 동학군이
일본인을 배척한다는 핑계로 관리들을 죽이고 백성의 재산을 약탈했다고
말했는데 안중근도 죽을 때 까지도 "동학군에 대한 증오심" 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안태훈의 의병(민보군)은 박석골전투에서 20보 거리에서 화승총으로 엽전을 맞추는
신기에 가까운 16살 안중근의 사격술로 동학군 수십명을 죽이는 큰 전과를
올리는데, 청계산에서 8km 거리에 19세 김구가 포수만도 700명을 이끌고 포진
하자 70명을 지휘하던 안태훈은 김구에게 밀서를 보내서 전투를 피하자고 말합니다.
안중근이 쓴 안응칠 역사에 보면 박석골 전투 대승후에 일본군 부대를 이끌고 근처를
지나가던 일본군 장교 스즈키로 부터 축하의 인사를 받았다는데, 조선군+
민보군 + 보부상 + 일본군은 같은 편인 연합군인지라.... 동학군이 패한후 김구가
안태훈의 집에 넉달간 숨어지내는 중에 단발령이 공표되자 김구는 거사를 제의합니다.
하지만 천주교도인 안태훈이 거절하니 김구는 동족인 동학군은 목숨 걸고 토벌하더니
서양 오랑캐들의 천주교를 믿는 것도 괴이하고, 게다가 친일파 김홍집내각의 단발령
에 저항하지 않는데 대해 원망하고 떠났지만, 김구는 감옥에 갇혀 세계지지등 중국인
들의 저서를 읽으면서 눈을 떴으니......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이 상해 임시정부에서
일하는등 화해하고 훗날 안중근 조카딸 안미생과 김구 아들 김인이 결혼을 하게됩니다.
이후 김구는 만주로 건너가 김이언의 의병에 참가했다가 여의치 않은 중에 1895년 10월
일본인들이 민왕비(명성황후)를 죽인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분이 치밀어 귀국했다가....
1896년 3월 9일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인 스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살해합니다.
백범일지에 보면 저 주막은 방이 3개로 40명이 묵었다는데 단발을 한 어떤 자가 조선인과 대화
하는 것을 엿들으니..... 황해도 출신이라지만 그 말투가 서울말씨이니 수상한데다가, 두루마기
밑으로 칼이 보이는지라 5개월 전에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시 보니 미우라 공사는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그 일행이 맞다고 보았으니 몸을 숨겨
도망친다고 여겼습니다. 확실한 증거는 전혀 없는지라 아닐수도 있지만, 저놈은 왜놈이
틀림없고 칼까지 차고 다니니 장차 조선인에게 해를 입힐 자라 생각하고는 덥쳐서 때려 죽입니다.
1894년 아베 신조 총리의 외고조부 오시마 요시마사는 서울에 무혈입성후 경복궁을 공격해
고종을 포로로 잡고 김홍집 친일내각을 세우니 이노우에 공사가 지도해 갑오개혁을 하는
데.... 왕실과 국가 재정을 분리시키며 노비제도를 폐지하고 천민을 해방시키며 양반과 상놈
의 신분제도를 폐하고 500년간 이어진 과부 재혼금지 제도를 철폐하며 도량형을 통일합니다.
청일전쟁 승리후 1895년 10월 일본군과 낭인들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
이 일어나고 두달 후 친일 정권에 의해 단발령이 선포되자 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으며,
1896년 2월 11일에는 고종이 엄상궁 가마 뒷자리에 함께 끼어 타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나 친일내각이 무느지고 이완용의 친러내각이 들어섭니다.
김구는 1896년 3월 8일 평남 용강군에서 배를 타고는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鵄河浦) 로 가서
이화보(李化甫)가 운용하는 여점(旅店)에 머물게 되어 다음날 새벽에 살해했는데,
무역상인 또는 약장사(賣藥商人)로도 언급되는 스치다를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 육군중위
로 판단한 김구는 그를 죽였다는 포고문과 함께 거주지와 성명을 써놓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치하포사건이 일어난 3월 9일 스치다를 수행했던 조선인 통역 임학길(林學吉)이 평양으로
도주해 일본 경성영사관 경부 히라하라 아쓰무에게 신고하니.... 히라하라는 3월 15일
치하포에 도착해 지방관에게 범인의 체포를 의뢰하였고, 일본영사관도 외부(外部)에
신속한 범인 체포를 촉구하였으니 해주부는 범인이 김창수(金昌洙: 김구) 임을 확인합니다.
그러나 당시 친러정권인지라 소극적인 조선 정부의 입장에 따라 김구의 체포는 몇달
동안 지연되자.... 일본영사관은 6월 5일부터 27일 사이에 3명의 순사를 평양 지역
에 파견하여 사건 조사를 실시하였고, 결국 피신중이던 김구는 6월말 해주부에
체포되었고 외국인 사건이니 인천감리서로 압송되어 합동 신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3차례의 진술공초(供招)에서 김구 선생은 스치다 살해 동기와 살해 방법을
밝혔는데..... 동기는‘국모의 원수에 대한 복수’를 하고 나라의 수치를
조금이나마 씻고자 하는 것이며, 방법은 발로 차서 마당에 쓰러뜨리니
그가 칼을 뽑기에 돌로 쳐 넘어뜨리고 칼을 빼앗아 죽였다고 주장했습니다.
10월 22일 법부는 김구에 대한 교형(絞刑)을 국왕에게 건의하였으나 국왕 고종이
재가하지 않고 시일을 끌다가, 1897년 1월 22일 사형을 면하고 수감 생활을
이어가던중 1898년 3월 19일 탈옥을 하는데... 조선 정부 및 고종황제의
소극적 처벌의지는 침략자 일본에 대한 최소한의 저항이었다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1896년 1월부터 을미사변과 단발령의 시행으로 분격한 유생들이 을미의병을 조직하여 수도권
및 충청과 강원도 및 함경도까지 확대되었으니 전국적으로 친일파와 일본인에 대한 상해
사건이 벌어지는데... 1896년 5월 30일 일본 공사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일본인 피살인원은
43명, 부상자가 14명에 이른다고 하였으며 일본인 조선여행 금지 및 거류민 철수를 지시합니다.
일본 경찰의 보고에 따르면 쓰치다 조스케는 이즈하라항의 무역상 오쿠보키(大久保機)의 고용인
으로 1895년 10월에 평안남도 진남포에 도착하여 11월 4일에 장사를 하러 황해도 황주로
갔었다는데 일본인에 대한 소요사태에 따른 철수명령을 받고 인천으로 가려던 참이었다고 합니다.
치하포 사건의 특징은“백범일지”기록과 친러정권 하에서 김구를 체포하여 신문하고
기록한 대한제국의 조서와 신문보도 등이 상당한 내용의 차이를 보인다는 것인데...
쓰치다 조스케가 상인이라는 건 학계에서 오래전부터 나왔던 이야기이니, 1997년
부터 김구 전문가인 도진순이 쓰치다 조스케가 상인이란 것을 보고서로 작성했습니다.
'단발을 하고 한복을 입은 한명이 같이 앉은 나그네와 인사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성은
정이고 사는 곳은 장연이라고 했다. 말투가 장연 말씨가 아닌 경성 말씨였는데도
시골 노인들은 그를 조선 사람으로 알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분명 왜놈 이었다.'
'만약에 저자가 보통 장사치라면 조선인 행세를 할 필요가 없을 것. 그렇다면 혹시 미우라
고로(명성황후 시해범)가 아닐까? 공범일 수도 있다. 공범이 아니라도 칼을 차고 다니는
왜놈은 우리 민족의 독버섯이다.' '나는 왜놈의 소지품을 뒤지게 하였다. 소지품을
조사해 보니 왜놈의 이름은 쓰치다 조로이고 직위는 육군 중위이고 엽전이 800냥이 있었다'
그런데 조스케가 일본군 육군 중위라는 기록은 백범일지 단 한군데에만
나오며 일본측 기록에는 약장수로 등록이 되어 있으니.....
사건 10년후 쓰치다 조스케의 유족은 대한제국에서 배상을 받았습니다.
친러정권인 대한제국 조서에는 백범일지와는 정반대로 쓰치다가 칼을 뽑아들고 덤볐다는 얘기는
전혀 없으며... 김구의 진술은 1차 신문에서는 발로 차고 돌로 때렸다, 2차는 처음은 돌로
때리고 다시 나무로 때리자 넘어졌다가 일어나 도망하기에 강변까지 쫓아가서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3차는 돌을 던져 쓰러뜨린후 투숙객이 분격하여 함께 찔러 죽였다고 다르게 진술했습니다.
'금액량은 잘 모르겠는데 동행인의 노자로 얼만가를 주고 당나귀 한 마리를 엽전
일흔다섯냥에 사서 타고 왔으므로 대략 전액은 엽전 백냥 가량으로 안다.'(김구)
'그대가 이 사건을 일으킨 것은 재물을 탐하여 한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왜 재물을 탈취
하였는가?'(신문) '동행한 세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갈 노자를 달라고 애걸하므로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돈을 줘서 보내고 난 뒤 나머지 돈 팔백냥은 점주(주막)에게 맡겼다.'(김구)
'그래서 몹시 놀라 달려가 본즉 김창수가 일본인을 붙들고 마구 때리고 있기에 만류
하려 하였으나, 벌써 일본인을 죽여서 끌어다 강변에 버리고 환도 한 자루를
탈취하여서는 자기가 차고 당나귀 한 마리를 사서 타고 떠났습니다' (주막 주인)
사료 검토는 교차 검증이 기본이니“백범일지” 주장을 뒷받침할수 있는 증거가 부족한 것은 사실인데
5개월 전인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 가담자들은 사건후 바로 일본으로 이송되어 감옥에 수감된
채 재판을 받았고 치하포 사건이 일어나기 몇주전에 석방되었으나, 조선에 다시 오기는 어려웠으니
1896년 3월 9일 살해된 쓰치다 조스케가 명성황후 시해에 개입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봅니다.
친러정권이던 대한제국 재판부의 판결문에서는 쓰치다 조스케 의 신분에 대하여
'쓰치다 조스케가 명성황후 시해에 연관된 일본제국 군인인지, 무고한 상인인지
판단할 아무런 증거도 현출되지 않았기에 판단이 무리이다' 라고 쓰고 있습니다.
1896년 9월 10일 '삼초' 가 작성된 날 대한제국 인천항재판소 판사 이재정은 심리후
살인죄로 교형(사형)을 선고(사형선고 판결) 하였으며 법부에'조율재처' 바란다
는 보고를 하였으나, 고종의 사형집행 명령이 지연되자 10월 2일 법부에
조속한 처리를 전보로 독촉하였지만 고종은 끝내 사형 집행 서명을 하지 않습니다.
그후 김구 선생은 감리서 책임자 경무관 김윤정과 투전판 두목 김주경의 비호로 감옥
에서 대접이 좋았다고“백범일지”에서 회고하고 있으니 2년간의 투옥 생활후 탈옥
에 성공하는데... 선생은 그를 명성황후를 시해한 미우라이거나 공범일 것 같다는
짐작에 원수를 갚고 나라의 수치를 씻는다는 우국의 일념으로 처단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왜 쓰치다 조스케가 조선인으로 '위장' 했는지는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는데.... 을미사변 직후 시골에서 일본인이 일본인인 거 티내고 다니는 것도
미친 짓이니, 단발령과 명성황후가 시해된 이후 친러정권하 인지라 일본인을 향한
조선인들의 원한에 찬 감정을 안다면 죽여 달라는 것이나 다름 없는 무모한 짓입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일본에 대한 분노로 일본인이 43명이나 살해당했고 단발령에 대한 반발로
한양에서 조차 조선인들이 일본인의 가옥을 부수고 일본인들을 때려죽였으니.... 조선
에서 활동하는 일본인이라면 신변의 위협을 느꼈을 것이니, 조선인 복장을 한 것은 상업
활동을 하면서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밝혀 불이익 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쓰치다 조스케가 상인이라는 건 2000년대가 되기 전부터 알려져 있던 사실이니
김구를 다룬 대표 학자로 도진순은 1997년에 보고서를 작성하여 치하포
사건 분석을 내놓은 적이 있는데(도진순, 1895-96년 김구의 연중 의병 활동
과 치하포사건, 한국학술진흥재단 1997) 쓰치다 조스케가 상인이라고 적었습니다.
배경식이 저작한 “올바르게 풀어쓴 백범일지, 너머북스 2008) 에서는 치하포 사건의
실체가 그대로 쓰여져 있으니... 김구 선생이 아무 죄도 없는 멀쩡한 일본인을 잔혹
하게 죽였는데, 이걸 자신의 ”백범일지 “에서는 사실과 다르게 썼다고 적고 있습니다.
손충무는 김구 암살사건을 다루던 기자였는데 특파원으로서 김구에 관한 자료를 수집했으니 백범
일지도 연구했는데... 손충무는 쓰치다 조스케 사건에 관한 자료를 신문사에 기증하기도 했지만
그가 제공한 자료에는 쓰치다 조스케가 일본 제국 중위라는 기록은 없으며 치하포 사건
조사 당시 1차 사건 진술, 독립신문, 일본 자료 등에서 모두 상인(商人) 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백범일지에서는 치하포 사건을 혼자 일으킨 영웅적인 일로 서술하고 있으나 이
부분도 사실과 다른 것 같으니..... 백범은 인천 감리서 신문 조서에서 '다른
세 사람과 함께 치하포에 왔으며 쓰치다를 살해할 때 이들의 도움을 받았다'
라고 진술했고 더욱 그들에게 쓰치다의 소지품에서 발견한 돈을 주기도 했습니다.
쓰치다의 정체에 대한 기록은 일본측 자료는 거의 없고, 당시 김구를 재판했던 친러정권 대한
제국 정부의 기록에 의해서 그의 정체를 추정만 할 수 있는데.... 이 재판에 주요 증인
으로 참여했던게 '임학길' 이라고, 당시 쓰치다의 통역 역할을 하면서 따라다녔던 조선인 입니다.
그는 김구가 쓰치다를 죽일때 바로 도망쳤고 일본영사관에 신고를 했으며 재판정에서 증언을 했는데
백범일지에는 이 '임학길' 에 대한 내용이 전혀 나오지 않으며, 오히려 '쓰치다' 의 조선말이 유창
해서 주변 사람들이 다 조선인으로 착각하는데 자기만 이 놈이 왜놈이란걸 눈치챘다고 적고 있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은 민왕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으로 인해 조선인들의 감정이 격해졌기
때문에 안전지대인 인천으로 피해가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도중에서
조선인들에게 습격당하지 않기 위해서 조선인 복장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짐작됩니다.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 적고있는 것 처럼 당시에 '쓰치다' 가 일본 군인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죽였고, 죽는 날까지 자신이 처음 죽인 사람이 일본 군인 '쓰치다' 라고 믿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착각이나 지레짐작 또는 오해로 인해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설사
그렇더래도, 그런 흠결에도 김구선생의 애국애족과 헌신적인 독립투사인 점은 변치 않습니다!
백범이 일생의 공적으로 자랑스럽게 서술한게 치하포사건이니 백범일지에 '국모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놈을 죽였다' 고 썼으며.... '쾌남아 다운 행동'
'국가의 큰 수치를 씻기 위해 행한 일' '이 한몸 희생하여 만인을 교훈했다'
고 썼으니 그만큼 치하포사건의 원인이 된 을미사변에 대한 원한이 컸던 것입니다!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 8일 조선주재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와 공사관 수비대, 일본군
경성 수비대 일부에 일본인 낭인들과 신식 군대인 조선군 훈련대가 경복궁에
무력으로 침입하여, 명성황후 민왕비를 포함한 조선인 궁중 인사들을 집단
살해한 사건이며 전임 이노우에 가오루가 구체적인 계획을 만들었다고 추측됩니다.
유길준은 명성황후를 혹평하며 거사에는 대원군을 내세워야 한다고 했으니 윤치호는 그를 일본
낭인들의 지휘자 중 한사람으로 지목했으며... 훈련대 대대장 우범선, 이두황, 이진호 3명의
대대장 모두가 참가했고, 전 군부협판 이주회, 국왕 친위대 부위 윤석우에 궁궐수비대 조선인
병사들도 협력했으며 송병준의 사위 구연수는 일본 낭인들이 민비 시신을 소각하는걸 도왔습니다.
일본은 사건후 러시아를 통해 일본의 침탈을 막으려했던 고종의 조력자인 명성황후를 제거
하고 다시 친일 대신으로 내각을 구성하는데 성공하지만, 일본에 대한 조선 민중의
반감은 극에 달해 을미의병이 발발하고 고종이 1896년 2월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하면서
저 주모자들의 목적은 무산되고... 친러내각이 세워지며 1897년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합니다.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던 당일 새벽에 경복궁에 나타난 흥선대원군을 앞세워서 을미사변을
조선의 내부분쟁 사건으로 꾸미려 했지만... 미군 다이 대령과 러시아 건축기사 사바틴과
장교등 외국인들이 현장을 목격하고 공사관과 외신에 사실을 알렸고, 각국의 공사관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여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들이 명성황후 살해를 주도하였음이 세계에 알려집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을 강하게 압박해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였고
전쟁배상금 외에 요동 반도와 타이완 섬을 포함한 영토를 차지하지만 만주와
극동에서의 이권이 위협받을 거라 판단한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게 요동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할 것을 요구하니 일본은 3국 간섭에 굴복합니다.
이를 지켜본 고종과 민왕비(명성황후)는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견제할수 있다는 생각을 굳혔
으니 고종은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를 불러 조- 러간의 공조를 논의했으니 어윤중, 김윤식
등 친일 성향의 관료들이 축출되고... 이완용을 중심으로 한 친러파 관료들이 중용 되었습니다.
이완용은 대부분 조선관료들 처럼 친청파이다가 청일전쟁후 친미파로 변했고 저 3국 간섭
을 보고는 친러파로 변했으며 러일전쟁후 친일파가 되는데, 친러파일때 서재필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니 영은문을 허물고 독립문을 세울 때.... 이완용은 독립협회
회장 자격에다가 조선의 명필답게 “독립문”글자를 써서 독립문에 현판으로 걸었습니다.
친일파 대신 군국기무처의 박영효는 민왕비가 자신의 숙청을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은뒤 1895년
7월에 암살을 모의했지만, 민왕비를“세계에서 가장 나쁜 여성”이라고 혹평하며 석달후 을미사변에
가담하는 유길준의 내부고발로 인해 실패하자 일본으로 도망갔으며... 박영효가 명성황후 암살미수
사건 혐의로 수배되면서 신응희, 이규완이 달나나고 친일관료들이 쫓겨나면서 일본 입지는 좁아집니다.
청일전쟁 전후로 중국 내 영토확장과 조선문제에 있어 러시아가 무력시위를 포함한 다양한 채널로
일본에 압력을 가하자..... 일본 정부에서는 러시아에 조선을 완전히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극심해졌으니, 조선공사로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 및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과 같은 조슈번 출신인 미우라로 하여금 명성황후를 죽임으로써 국면을 전환하고자 했습니다.
1895년 7월 신식군대 훈련대의 충성심을 의심한 고종은 자신과 명성황후가 신임하던, 1882년
임오군란때 명성황후를 등에 업고 대궐을 빠져나가 충청도 장호원으로 도피시켰던
충복 홍계훈을 새 훈련대 연대장으로 임명하려고 했으며.... 9월 1일 이노우에를 대신해
일본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가 조선 주재 일본 공사로 부임하니 조슈번 끼리 교대한 것입니다.
10월 3일 공사관에서 민왕후 암살 계획이 구체적으로 짜여졌으니 흥선대원군과 친밀한 관계에
있던 일본 공사관 무관 오카모토 류노스케 대위가 대원군을 가마에 태워 경복궁에 들어가기로
했으며.... 동원된 낭인들은 몰락한 사무라이 출신으로 한성신보 사장 아다치 겐조를 비롯해
편집장과 기자들에 구마모토 출신 인사와 도쿄제국대학교 출신 극우 엘리트 학생들이었습니다.
혹 나중에 일이 잘못되더라도 일본 정부와는 무관한 일로 발뺌하기 위한 속셈이었으며....
또 사건을 조선인들 간의 분쟁에 의한 결과로 만들려는 속셈에 따라 신식 군대인
훈련대 대대장 3명을 끌어들였으니, 훈련대 2대대장 우범선이 주동이고 1대대장
이두황과 3대대장 이진범이 참가해 대대원을 모두 이끌고 당일 밤에 경복궁으로 들어갑니다.
일본의 작전명은 '여우사냥' 이니 10월 10일로 계획됐으나 조선 정부가 훈련대 해산을 결정한 때는
10월 7일 새벽 2시로 군부 대신 안경수가 9시경 미우라 고로에게 통보하였고 뒤이어 우범선
도 달려와 보고하자 거사 날짜를 이날 밤으로 바꾸니... 10월 8일 새벽 4시에 결행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니 흥선대원군은 새벽 3시에는 경복궁에 들어와 있어야 했지만 경복궁에 도달한 것은
새벽 5시를 넘긴지라 아침이 가까운 시간이 되어버린 탓에 예정과는 달리 많은
목격자가 생겨나게 됐고 치밀했던 사전 계획과 달리 당일 사건은 엉성하게 진행되게 됩니다.
흥선대원군을 기다리는 사이에 일본 공사관 수비대 1중대는 장소를 착각해 낭인들과 우범선
이 지휘하는 조선군 훈련대 제2대대와 합류가 늦어졌으니.... 새벽 2시 경에 별군관에게
고종의 호위경관 2명이 달려와 삼군부(광화문)에 일본군과 조선군 훈련대가 운집해
있다고 보고하자..... 현흥택 정령은 경비병을 광화문으로 급히 보내서 상황을 확인합니다.
오전 4시 일본 공관 수비대와 조선군 훈련대 1,2,3 대대는 광화문과 춘생문및 추성문을 포위했고 4시
30분경에 일본군 1중대와 훈련대 2대대는 춘생문을 뚫고 들어오니... 고종은 소란이 일어나는지라
짐작하고 바로 친러파 대신 이범진을 내보내니, 이범진은 4m~5m 나 되는 궁궐의 담장을 뛰어넘은
신공을 발휘한뒤(?) 먼저 미국 공사관에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고 이어 러시아 공사관으로 달려갑니다.
4시 30분쯤 일본 공사관 수비대와 조선인 훈련대 병력등 1천여명에 이들과 합류한 일본인 낭인 3~40
여명, 그리고 미우라에게 을미사변을 부추긴 도카이 산시 일본 중의원 숙소에서 나온 낭인 십수명이
광화문에 집결해 사다리를 타고 넘어 궁궐을 범하는데... 이때 신임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이 본부중대
100여명을 데리고 달려와 반란에 가담한 훈련대 병사들을 꾸짖고 제지하다가 일본군에게 사살당합니다.
조선군 시위대 교관인 미국인 윌리엄 다이 대령과 러시아인 사바틴은 이학균 부령으로 부터 보고
를 받자마자 별군관실로 갔으나, 2명의 부령과 7명의 당직 장교가 야근하고 있어야 함에도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으니 이미 모두 도주한 것이라.... 다이 대령은 급한대로 몇백명의
궁궐 시위대를 모아 사다리를 타고 궁으로 침입하는 일본군과 낭인 및 조선인 훈련대에 맞섭니다.
하지만 사바틴이 러시아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조선군 궁궐 시위대는 겁에 질려 무기를 버리고 도주
하는지라.... 순식간에 무너지는 와중에 끝까지 저항하던 무예청 무사들을 비롯 경비병 200명은
흥선대원군이 입궐하자 혼란스러워 하며 총을 내려놓고 전투를 포기하는데, 경비병 저항이 멈추자
조선군 훈련대 1천명은 흥선대원군이 가마를 타고 들어와 머물고 있는 강녕전 앞 뜰에서 대기합니다.
조선군 시위대가 도주한 가운데 일본 낭인들은 조선인 길잡이의 안내로 건청궁으로 몰려가서
왕비를 찾으며, 닥치는 대로 궁녀들을 잡아 행방을 캐물으며 머리채를 쥐어잡고 마구 구타
를 가하고 섬돌에 패대기치니 궁녀들의 처절한 단발마 비명이 새벽공기를 가르는데도...
담 밖에 부동자세로 기립한 신식군대인 천명의 조선 훈련대 군인들은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민왕비를 찾아 눈에 불을켠 일본 낭인의 횡포는 극에 달해 고종의 어깨와 팔을 잡아끌었고 태자비
민씨(순명효황후)는 복부를 낭인에게 가격당하여 병상에 누워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으며....
왕태자(순종) 가 발길질에 머리채를 잡혀 끌려다녔고, 고종의 외국인 고용자들인 미군
다이 대령과 러시아인 사바틴도 발길질 등 무차별 구타를 당했으니 훗날 전세계에 증언 했습니다.
그럼에도 조선군 훈련대 1천여명은 마이동풍 부동자세로 시립한 가운데..... 결국 건청궁 곤녕합에서
낭인들은 왕후를 찾아냈으니...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낭인들을 가로막았지만 권총에 맞았고,
이어 낭인들의 칼에 두 팔이 잘려나가는 참극이 벌어졌으니... 민왕후는 궁녀들 사이에 있다가 낭인들
에게 끌려나온뒤 낭인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칼로 내리쳐 상해를 입혀 절명시켰으니 새벽 6시경 입니다.
을미사변에 가담했던 고바야카와(小早川秀雄) 는 왕비가 숨진 모습을 목격한 당사자로 기록을
남겼으니.... “마침 그때 시위대 연대장인 현흥택(玄興澤)이 군복을 입은채 허리에 찬 칼은
내버리고 비무장으로 겁에질린 걸음으로 나타나자, 낭인들의 철권(鐵券)이 그에게 마구
내리 쏟아졌다. 그러나 현흥택은 겨우 숨을 건져 도망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숨어버렸다.”
“이러고 있는 사이 곤녕합 방안에 쓰러져 있는 부인이 민왕비라고 하는 사실이 누군가로 부터 퍼뜨려
졌다. 나는 직접 방안으로 들어가 쓰러져 있는 부인을 보았다. 부인은 아직 침소에서 나온
그대로였는지, 상체엔 짧은 속적삼을 입었을 뿐이고, 허리로 부터 아래로는 백색 속옷을 입고 있었다”
“죽었다기 보다는 인형을 눕혀 놓은 것 같은 모양으로 잠이 들어 있었다. 가냘픈 손으로 8도(八道) 를
움직여 군호(群豪)를 조종했던 민왕비, 그 사람의 유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이다. 웅혼(雄魂)은
가서 돌아오지 않고, 방안엔 유해를 지키는 단 한 명의 그림자도 없었다. 실로 처참을 극한 광경이었다. ”
“민왕비(閔王妃)의 치명상은 이마 위에 교차된 2개의 칼날 자국에 있었던 모양이다. 오전 8시
경이 되어 일본도(日本刀)를 담요에다 말아싸고, 나의 칼은 쿠마베(隈部)라고 하는 장한
(壯漢)한테 지워서 광화문을 나서니 구경나온 한국인들이 문전(門前) 한 길에 구름처럼
모여 놀란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떼며 지나갔다.”
최근엔 명성황후를 살해한 주범은 낭인이 아니라 일본군 장교라는 주장이 새로 제기되었으니......
을미사변 당일 우치다 사다쓰치 경성총영사가 하라 다카시 외무차관에게 보낸 문서에 그 내용이
나오는데, '우치다 사신' 이라 고 하는 이 서한은 전말을 가장 충실하게 적은 문서로 평가받습니다.
“살해당한 부녀 중 한명은 왕비라고 하는 바, 이를 살해한 자는 우리 수비대의 어느 육군
소위 이다.” 또 사건 한달 뒤 우치다 경성총영사는 히로시마 지방재판소 검사장에게
보낸 공전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었으니 “왕비는 먼저 우리 육군사관의 칼에 맞고....”
당시 경성수비대에는 모두 4명의 소위가 있었는데 그중 살해 현장에 들어간소위는 미야모토 소위가
유일했으니, 이후 왕후의 신원을 어떻게 확인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들의 설명이 엇갈리는데....
황현이 쓴 매천야록은 왕후의 양녀가 된 고무라의 딸이 그 얼굴을 확인해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초상화나 사진을 들고와서 궁녀들의 얼굴과 대조했을 것이라는 설, 혹은 마마 자국을
보고 확인했다는 설도 있는데.... 을미사변에 가담한 우범선의 진술을 기록한“우범선 최후사”
에는 낭인들이 우범선을 데려와서 왕후의 얼굴을 확인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아들
우장춘 박사는 배추와 양배추의 교잡을 통해 다윈의 진화론을 수정한 세계적인 농학자 입니다.
어머니는 일본인 사카이 나카(酒井ナカ)로 아버지가 1903년 고영근에게 암살되어 가세가 기울자 6살때
고아원에서 지냈다는데 후에 어머니를 따라 히로시마로 이사했으며 박영효의 주선으로 조선총독부
에서 학비를 지원받으며 1916년 도쿄제국대학 농과대학에 진힉했는데 시회주의 김철수를 만나니 '너의
부친 우범선이 매국한 것에 대해 속죄하려면 조선 독립을 위해 네가 배운바로 봉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농학박사가 된후 1947년 한국에서 그의 귀국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에서 놓아주지 않으니 자기 발로 조선인
강제수용소에 들어가 한국 정부에서 보내준 한국인 신분증을 제시하면서 송환선에 탑승하는 방식으로
농업국가인 고국으로 돌아와 부산에서 원예시험장을 만들어 우량 종자의 개발과 보급에 헌신하는데 한국
정부는 100만엔(10억원)을 이적비로 주니 우장춘은 이 돈을 한국에 뿌릴 우량 종자를 사는데 다 써 버립니다.
또 다른 일설에는 민 왕후와 주위에 있던 왕후로 의심되는 궁녀들을 죽인후 누가 왕비
인지를 알기 위해 전부 벗겨서 임신했던 흔적을 찾아서 확인했다고 하는데.... 에조
보고서의 항목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어, 꽤 신빙성 있는 이야기라 볼 수 있겠습니다.
미우라 고로 공사는 경복궁에 들어와 고종을 알현하는 도중에 나와 왕후의 시체를
확인한뒤 낭인들에게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시체를 불태워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미우라가 고종, 흥선대원군과 함께 3자회담을 진행하는 동안
낭인들은 경복궁 뒤편 건청궁 동쪽 녹원에서 시체에 기름을 끼얹고 불태웁니다.
을미사변에서 죽은 사람은 신임 연대장 홍계훈, 내부대신 이경직, 명성황후와 궁녀 몇명.... 일본은
사건을 조선 내부 권력투쟁으로 몰고가려고 했으니 그럼 일본군과 조선군 사이 전투는 없어야
하는지라, 조선군 발밑에 위협사격을 하자 겁을 집어먹은 시위대가 총을 버리고 도주했으니
총소리는 요란했지만 죽은자는 소수이며 일본군이나 낭인들은 사망자가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는 궁궐경비대인 시위대를 총지휘하던 미국인 윌리엄 다이 대령이 이학균 부령으로
부터 보고를 받자마자 러시아인 사바틴과 함께 지휘를 위해 별군관실로 달려
갔으나.... 2명의 부령과 7명의 당직 장교가 야근하고 있어야 함에도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으니 이미 모두 도주한 것에서 당시 "조선군들의 상태" 를 짐작할수 있습니다.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 '상투 튼 사람들과 함께한 15년(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에 보면....“10월 8일 아침에 대궐에서 나는 총소리를 들었는데 현장에 있던 러시아인
사바틴과 미국인 다이 장군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공격부대는 총을 쏜 뒤 "아무런 저항 없이"
대궐 안으로 쳐들어왔다. 의화군(의친왕)이 도망치자고 왕비에게 간청했지만 대비를 홀로 남겨
놓고 갈수는 없다며 거절했다. 정병하가 "두분 전하(고종, 민왕비)는 안전할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 저자는 천한 사람이 왕비 덕에 출세하고 큰 은혜를 입었는데 의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이 암살자의
하수인이 됐다고 했다. 적의 무리는 왕비를 찾아내 찔러 죽였다. 궁녀들을 데려와 왕비의 시체를
보여주자 "중전마마, 중전마마" 라고 소리쳤다. 그들의 절규를 듣고 암살자들이 득의의 미소를 흘렸다.”
“그 뒤에 곧 거기서 그다지 머지않은 작은 숲으로 시체들을 옮겼고 그 위에 등유를 부었다. 그리고
불을 붙였고 뼈 몇 줌만이 남았다. 이 사건 이후 고종은 독살의 공포를 느껴 음식을 거의 들지
않았다. 언더우드 부인이 음식을 만들어서 임금에게 보냈다. 음식은 통에 담은 뒤 자물쇠로 잠갔다.“
"유진 벨은 또 하룻밤을 궁중에서 보냈습니다. 왕은 밤에 두려움을 느끼고 선교사들을 부릅니다.
선교사들은 매일밤 두사람씩 고종의 침소 앞에서 권총을 들고 불침번을 서며, 내일도 그는 경호
하러 갈 겁니다." - 선교사 유진 벨의 아내 로티벨(Lottie Bell) 이 1895년 12월2일 어머니께 쓴 편지
미우라 고로는 고종과의 회담에서 협박을 가하여 김홍집으로 하여금 내각을 구성하게했으며
“한성신보”는 흥선대원군이 입궐했다는 대문짝만 한 기사를 내서 간밤의 사건이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사이의 알력으로 벌어진 것으로 유도했으니.... 김홍집은
고종의 명의로 명성황후를 폐서인한다는 조칙을 발표했지만 이것이 역풍을 불러 일으킵니다.
민왕비 명성황후 살해를 조선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속이려했던 일본은 상황이 불리해지자 미우라
고로등 사건 가담자 48명을 히로시마 감옥에 수감하고 재판에 회부했으나... 1895년 11월 28일
이완용을 비롯한 친미파 관료와 선교사, 외교관이 개입된 고종 탈출작전인 춘생문 사건이 터지자
"봐라, 구미도 조선에 개입하는데 왜 우리라고 개입 못하냐?" 라며 사건 가담자 전원을 석방합니다.
일본인들이 조선 왕비 살해라는 범죄 행위에 대해 흥선대원군과 신식군대 조선군 훈련대
에 누명을 씌우고자 노력했는데.... 민씨세력 축출을 원했던 흥선대원군이 일본과
손을 잡은 것 자체는 부정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이니, 을미사변 전 8월 16일 일본인
궁내부 고문관 오카모토 류노스케는 공덕리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별장을 방문 했습니다.
흥선대원군에게 자신들이 명성황후 일파를 축출해주는 대신 "거사후 대군주를 보필해 궁중
을 감독하되, 정사는 내각에 맡겨 일체 간섭하지 말라" 는 것, 이준용을 3년간 일본
유학을 보내라는등 4가지 조건의 대원군의 정계은퇴를 강요하는 각서를 제시하고
자필 확인을 받아냈으며 거사 일자는 날을 택해 흥선대원군에게 통보해 주기로 했습니다.
일본은 명분 확보를 위해 흥선대원군으로 하여금 거사 취지를 밝히는
고유문을 발표하게 하였고...... 그것을 한양 시내에 붙였습니다.
“소인배들이 어진 사람을 배척하고 간사한 무리를 기용해 유신의 대업을 폐지하고 5백년 종사도
위기에 처해 있으니, 나는 입궐하여 대군주(고종)를 보익하고 사악한 무리들을 쫓아내
유신의 대업을 이루고 5백년 종사를 지키려니 백성들은 안심하고 생업을 지킬 것이며 섣불리
경거망동하지 말라. 나의 길을 막는 자가 있다면 큰 죄를 짓는 것이니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을미사변 동안 흥선대원군은 야밤중임에도 경복궁 내 강녕전에서 휴식을 취하며 사태의
진전을 보고 있었으니...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러시아를 끌어들이려 한 왕후
민씨를 싫어하여 을미사변을 주도한 것은 사실이고 실제 실행도 일본인들이
했지만, 흥선대원군이 명분 면에서 일본인들에게 도움을 준 것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미국인 선교사 겸 외교관이었던 호머 헐버트는 '한국의 죽음' 에서 이렇게 기술
했습니다.“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 가 조선에서 상의하고자 했던 사람이
전임 섭정(흥선대원군) 이었다는 사정은 이해하기 쉬우며, 20년 동안 섭정의
경험은 공사가 겨냥한 목표를 이루는 길은 하나뿐임을 확신하도록 만들었다. ”
캐나다 출신의 영국인 기자 프레더릭 매켄지는, '한국의 비극' 에서 흥선대원군에 대해
일본인들의 입 노릇을 했다고 비판적 견해를 드러냈는데... 그래서였는지
1898년 흥선대원군의 사망 때에도“효의 나라 조선”에서 아들 고종은 아버지
장례식에도 불참했으니 서로 원수가 된 것입니다! 그럼 고종은 불효자식인 걸까요?
이사벨라 비숍은 '조선과 이웃 나라들' 에서 홍계훈이 일본 장교의 칼에 피습된뒤
여덟발의 총탄을 맞고 죽었다고 적었는데 이후 유럽에서는 을미사변
소문으로 책은 불티나게 팔려나갔으니... 문제는 조선은 지폐나 금화와 은화가
없으니 조선에서는 와국인들이 여행중에 많은 돈을 가지고 다닐 방법이 없었습니다.
비숍여사는 나룻배를 한척 빌린후 화폐가치가 없는데도 무겁기만한 상평통보 한가마니를
사서 배 밑에 넣고 가마니를 덮은후 그 위에 앉고... 하인 서너명을 고용한 후에 마을
에서 장정 10여명을 고용해 배에 밧줄을 묶어 장정들이 강가에서 끌면서 올라가다가,
다음날이면 도착한 마을에서 새로 장정을 고용해 충주~단양까지 한강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후 버나드 비숍여사의 금강산 여행은 하인 여섯명을 구한후 나귀 다섯필을 빌려 하나는
타고 두번째 나귀에는 엽전 자루를 싣고 세 번째 나귀는 옷등 소지품을 네 번째
나귀는 쌀과 부식등을 다섯 번째 나귀는 솥과 그릇등을 싣고 북한강변을 따라 여행을 합니다.
밤이면 노랑머리 서양여자를 처음 본 조선의 시골 여자들이 몰려와 밤 12시가 넘도록 창호지
문에 손가락 구멍을 뚫고 보다가.... 방에 들어와 가방을 뒤져서 소지품을 꺼내 만지고
심지어 여사의 머리카락을 만지니, 결국 육혈포를 쏘아 쫓아내고서야 잠을 잘수 잇엇다고 합니다.
10년후 1904년 5월 러일전쟁 취재차 조선에 온 미국 사진기자 로버트 던도 같은 문제에 부닥쳤으니
평양으로 출발하기 전에 구리타라는 일본인에게 환전을 부탁합니다."돈이 많이 필요하다" 는
구리타 말에 미화 150달러 를 건넸는데, 150달러는 현재 4,050달러로 한화로는 440만원 정도
인데 석양무렵 묵고있던 호텔 사동이 던에게 뛰어왔다. 큰일 났다, 구리타가 돈을 들수가 없다고???
*** 1904년 6월 4일 미국 주간지‘콜리어스’에 실린 사진, 미화 150 달러 ,
현재 가치 4,050 달러, 한화 440만원 정도 가치의 상평통보 ***
상평통보 1개는 한푼으로 돈이 모두 얼마인지 세어볼 엄두를 냈을까? "1개 부대가 있어야 운반할
수 있는 돈이었다. 돈 몇줄을 들고 2주 취재를 마치고 왔다. 그 사이 장정 스무명이 밤낮으로 내
재산을 지켰다. 돈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에게 일당을 지급하고 나니 돈더미가 눈녹듯이 사라졌다."
을미사변에 가담한 48명의 낭인 중의 한 명인 도우 가츠아키(藤勝顯)는 민 왕비를 두번째로
베어 마지막 숨을 끊었노라고 스스로 자랑하고 다녔다고 하며, 일본 후쿠오카 구시다
(櫛田) 신사에 그가 사용한 칼이 보관되어 있는데.... 나무 칼집에는 그가 직접 새겨 넣은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 라는 문구가 그대로 있습니다.
훗날 명성황후 살해범 48명 중에서 1명인 구니토모 시게아키의 후손이 홍릉에서 사죄하기도
하였는데,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일본인은 을미사변에 대해 전혀 모르니.... 2018년 기준
으로 을미사변을 다루는 일본의 중학교 역사교과서는 8종 중에 마나비샤에서 출판한 교과서
단 1종에 불과한데다가, 이마저도 내용을 축소했고 일본의 입장에서 왜곡해 기술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