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힘>(역사비평사 펴냄)의 저자, 전주대학교의 오항녕 교수가 조선 시대 한복판을 산 이들에 관한 새 연재를 시작합니다. '응답하라, 1689!-시대를 업고 산 대제학 이야기'는 효종, 현종, 숙종 연간에 살았던 학자이자 관료인 문곡 김수항(1629~1689)을 통해 그 시대의 현재적 의미를 밝혀줄 것입니다. <편집자> |
1. 재미
재미라는 것이 '낯설면서도 내 삶과 닿아 있어서 느끼는 감동'이라고 한다면 그런 재미를 찾아보고 싶습니다.
1. 문명의 근거
페테르 프로이켄의 <에스키모의 책>에 나오는 그린란드 이누이트 족의 이야기라고 합니다. 프로이켄이 어느 날 사냥을 나섰다가 허탕을 치고 허기진 몸으로 돌아왔답니다. 그런데 해마를 잡은 사냥꾼이 큰 고기 한 덩이를 자기 앞에 내려놓았고, 그는 사냥꾼에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러자 사냥꾼은 오히려 화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여기 사는 우리 모두는 인간이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서로서로 도와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일로 감사하다는 말을 듣길 좋아하지 않아요. 오늘 내가 얻은 것을 내일 당신이 얻을 수 있어요. 여기 속담에 선물이 노예를 만들고 채찍이 개를 만든다는 말이 있어요."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냥꾼의 마지막 말은 인류학의 고전으로 통합니다. 사냥꾼은 경제적 계산을 할 줄 안다는 이유로 자신을 인간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인간다운 존재는 그런 계산을 거부하는 존재라고,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주었는지를 계산하거나 기억하기를 거부하는 존재하고 주장합니다. 그런 식으로 계산하고 기억하다 보면 "권력과 권력을 비교하고 측정하고 계산하기 시작할 것이고" 그러면 빚을 통해 서로를 노예나 개로 전락시키는 세상이 불가피하다는 이유에서입니다. (…) 진정한 물음은 우리가 어떤 성향을 인간의 바탕으로 여기고 문명의 근거로 삼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부채 : 그 첫 5000년>(정명진 옮김, 부글북스 펴냄), 142쪽)
1. 역사학의 무덤
인문학 아카데미는 많은 데가 대개 철학 중심이고 역사학은 개설된 데가 거의 없으며, 있어도 한두 강좌 구색을 맞추는 정도입니다. 역사학자들의 책임 운운하는 상투적인 반성 말고-상투적이지만 진실!- 다른 각도에서 짚어볼까요?
가끔 우리 현대인들이 우스울 때가 있습니다. 마치 현대 사회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발전한 시대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진보라고 할까요? 저는 그다지 동의가 되지 않습니다.
우선, 근대 자본주의는 가능한 한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밖에 없어서 노동력을 팔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을 90퍼센트 이상으로 만들어놓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의료, 과학, 생산력의 발전을 높이 사더라도, 또 신분제의 폐지와 민주주의의 발전을 인정하더라도, 여전히 위험하고 불평등하며 불안정한 삶이 곳곳에서 함정처럼 도사리고 있고, 앞으로 나아지기보다는 악화되리라는 전망이 우세한 듯합니다. 구조 조정은 어쩌다 있는 비상 조치가 아니라 상시적인 노동 유연화의 방책이 되었듯이 말입니다.
근대 사회는 신분 대신 계급을 창출했고, 평등을 외치면서 불평등도 심화했으며, 예방과 치료의 한편으로 무제한적인 폭력을 준비했고, 민주주의와 함께 전체주의도 만들어냈습니다. 물론 이런 계약과 거래, 시장의 언어와 생활양식이 지배하는 사회가 살기 좋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매우 허접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애당초 삶의 양식이 다른 사회, 즉 다른 경제 구조와 가치, 원리가 작동하는 사회를 서로 비교한다는 것이 난센스입니다. 어느 한쪽의 기준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매우 폭력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지요. 간간히 과장도 하고 거짓말도 보태가면서 말입니다. 희한한 것은 근대 계몽주의(자본주의)를 제외하고 어느 시대에도 지나간 시대에 대해 이토록 오만한 이데올로그들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있지도 않은 초야권(初夜權)도 만들어내고, 이전 시대를 '암흑 시대'라고 과감하게 딱지 붙이는 방식 말입니다.
우리는 자유, 평등, 민주의 유토피아로 가고 있다는 진보주의 이데올로기를 근대 역사학이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역사학의 무덤이기도 했습니다. 그 어떤 과거보다 지금이 진보한 사회라는데 어떤 바보가 '삶의 성찰을 위해' 과거를 돌아보겠습니까? 역사학이 근대로 오는 여정을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 수준으로, 또는 호고(好古) 취미에 머물렀던 데는 이런 배경을 고려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아, 좀 시간이 지나 살기가 더 힘들고 망할 때가 되어야겠구나, 그때가 되어 '진보, 발전'의 허구성이 드러나야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삶을 생각하겠구나, 그렇게 되면 지금의 삶에 대한 허위의식이 걷히겠지, 그러면 과거든 어디든 다른 삶의 경험을 비로소 심각하고 진지하게 고려하겠지……. 모던 역사학은 숙명적으로 모던 사회가 몰락하면서 극복될 듯합니다.
1. 조선 한복판
뭔가 다른 삶의 양식을 찾지 않으면 안 될 현시점에서, 뭔가 대안의 실마리를 찾자는 생각으로 이 시대를 보면 어떻게 보일까,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합니다. 물론 과거는 절대 그대로 반복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대안을 조선에서만 찾아야할 이유도 없습니다. 다만, 이번 연재는 조선, 대략 인조 후반~효종~현종~숙종 전반의 시대를 다루려고 합니다.
이 시기, 그동안 학계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시대였습니다. 식민사관과 근대를 지상의 목표로 보는 근대주의 역사학이 뒤엉키면서, 상품 화폐 경제를 찾고, 자본주의 맹아를 찾았습니다. 탈(脫)주자(朱子)-수(守)주자로 학파(또는 정파)를 보수-진보로 나누는가 하면, 그 사이로 다시 가문 숭배가 학문으로 포장한 채 실제 과거보다도 더 당쟁을 비극적으로 재현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페이지마다 오류와 왜곡이 발견되어 도저히 비판조차도 할 수 없는 책이 대중서라는 미명하에 버젓이 역사서 행세를 하면서 콩쥐-팥쥐 논리로 증오와 갈등을 확대 재생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결과, 이 시기 시대상은 일제 시대 식민사학자들의 연구보다 더 뒤틀렸고, 그 뒤틀린 거울 탓에 그 거울을 보는 사람들의 역사의식도 뒤틀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왜곡을 바로잡는 연구도 꾸준히 축적되었습니다. 정책, 사상, 사회, 인물 등 차곡차곡 쌓이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 광해군대의 혼란은 반정을 통해 가까스로 수습했으나, 그 여파로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치욕을 겪었습니다. 병자호란으로 인한 후유증에 민심도 경제도 힘들었습니다. 정치적 격동으로 민생이 불안해지기도 했고, 가뭄, 홍수 같은 자연재해로 고통을 받기도 했습니다. 예송(禮訟)으로 사화(士禍)가 일어났고, 또 당파 간의 당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효종, 현종, 숙종 연간은 대동법이 시행되고, 양반에게도 군역을 지우는 균역(均役)이 논의되었으며, 노비도 어머니가 양인이면 양인이 되게 하자는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사회, 경제의 영역에서 공정하고 평등한 삶을 지향하던 에너지가 있었습니다. 단종과 사육신이 복권되어 조야(朝野)의 오랜 숙원이 풀렸고, 대외 관계는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대략 인목대비(1584~1632년)부터 희빈 장씨(1659~1701년)까지의 시대라고 보면 됩니다. 인목대비는 딱히 떠오르는 배우가 없는데, 장희빈을 연기했던 배우 김혜수 씨의 매력이 생각납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인목대비의 고난은 구조적으로 긴 영향을 미쳤고, 장희빈의 등장은 또한 아까운 인물들이 희생되고 사라져간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 역사를 심각하면서도 의연히 흘려보내기도 했던 사람들, 더 힘들면 싸우기도 했던 사람들, 어지간하면 견디기도 했던 사람들, 살 만하면 살 만한 대로 즐겼던 사람들, 그 속에서 정감과 격조를 잃지 않던 사람들, 그렇게 인생과 세상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1. 이 사람
이제 왜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1629년(인조7년)~1689년(숙종15년))을 통해서 보려고 했는지 대답할 차례입니다. 먼저 시 일부를 보겠습니다. 문곡이 태어난 지 스무하루 만에 죽은 아이를 추모하며 지은 시입니다.
하찮은 풀, 서리와 눈에 시들더라도 寸草萎霜雪
봄 오면 다시 피어나는 법이거늘 春來還復榮
천심은 어찌 그리 심히 박하여 天心何厚薄
우리 아이는 되살리지 아니하는가 不敎兒再生
건너 이웃집 애 우는 소리 듣고 隔隣聽呱呱
몇 번인가 네가 우나 착각했나니 幾度錯疑汝
지난해 너와 같은 때 태어난 아이 去歲同時兒
어느덧 이제 벌써 말을 배운단다 如今已學語
눈물 참으려 눈길을 떨구었건만 忍淚已垂睫
잊으려 해도 다시금 보고 싶다 欲忘還復思
소리 삼키고 어둔 벽 향했으니 呑聲向暗壁
혹여 네 어미 알까 두려웠노라 恐被汝孃知
아내가 첫 애를 낳았을 때, 저는 종종 연구소에서 자고 들어왔습니다. 인천 집과 서울 연구소를 출퇴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왕복 네 시간이었으므로, 연구소에서 자는 일은 그리 타박거리가 되지는 않았습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튼 전 이틀 또는 사흘에 한 번 꼴로 집에서 자는 셈이었지요. 음, 아내도 출근을 해야 했습니다. 아침에 아이 챙겨 장모님께 맡기고 바쁘게 출근을 서둘렀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입니다. 알다시피 갓난애들은 밤에 자다 자주 깨게 마련입니다. 그날따라 아내는 피곤했는지 애가 우는 소리를 듣지도 못하고 자고 있었습니다. 나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아내를 부르다가 깨지 않자, 애를 툭 쳤습니다. 진짜 '툭' 쳤는데, 이놈이 죽겠다고 울기 시작하는 겁니다. 순간 아내가 깨어 일어나 애를 달래기 시작했고, 난 모른 척하고 다시 꿈나라로 들어갔습니다. 다음날 아침, 이놈은 나를 경계하기 시작했습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놈이 큰 뒤에도 종종 저를 경계하는(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날 일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문곡이 시를 지어 애도한 아이의 이름은 칠룡(七龍)입니다. 칠(七)은 아들의 차례이고 용(龍)은 꿈에서 용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는 우는 아이를 아내에게 떠넘겼던 저의 행태를 돌아보며, 핏덩이를 보낸 슬픔마저 아내가 깰까 울음소리를 참던 모습에서 문곡이라는 인간에게 끌렸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문곡의 배려에 견주어 저의 행동이 무척 천했다고 생각되어 몸서리가 쳐졌습니다.
그는 효종, 현종, 숙종 연간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장원급제를 거쳐 대제학에 영의정까지 지냈습니다. 그것도 마흔 살에 대제학에 올랐습니다. 조선은 학자-관료 사회라서 대제학을 문형(文衡, 학문의 기준)이라고 불렀고, 영의정보다 대제학을 지낸 것이 더 영광이었습니다. 그제 국무총리가 되려다 낙마한 인사가 생각납니다. 거기에 비교하기에는 문곡이 너무도 고상합니다. 여기서 '고상하다'는 평은 당시 사관(史官)의 말이기도 합니다.
얼핏 보면 누릴 만큼 누리고 산 사람처럼 보입니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손자이면서, 박세채(朴世采)와 성균관 동기이고, 민정중(閔鼎重, 인현왕후의 작은아버지), 윤휴(尹鑴), 이현일(李玄逸)과 동시대 사람이고, 송시열(宋時烈)의 제자이기도 합니다. 김창집(金昌集)을 비롯한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은 '육창(六昌)'이라고 불렸는데 정치, 문학, 예술 쪽에 이름을 떨쳤습니다. 하지만 문곡 자신은 장희빈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사화(士禍)로 인해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떴으며, 후일 그의 아들, 손자 역시 사화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가 남긴 시 뿐 아니라 편지도 있습니다. 친구에게, 스승에게, 친척에게, 아내에게 준 글입니다. 동료들과 벌인 논쟁도 있고 국왕에게 올린 기개에 찬 상소도 있으며, 죽음이 친구와 가족, 스승을 갈라놓을 때 아픈 마음으로 쓴 비문도 있습니다. 그 흔적을 통해, 문곡 김수항이라는 인물을 통해 조선의 한복판에 들어가 보고 싶습니다. 앞으로 박세채, 이현일 등의 연보를 만들면서, 이들의 눈을 통해서도 시대를 읽어보려고 합니다.
1. 함께 역사가가 되어
벽초(碧初) 홍명희(洪命憙) 선생이 <임꺽정>(사계절 펴냄)을 쓸 때, 자신은 조선의 정화(精華)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임꺽정>을 읽으면서 이 소설을 두고 의적(義賊) 이야기라거나, 봉건 사회의 신분 질서를 타파하려는 민중들의 삶이라거나, 하는 해석이 실제 <임꺽정>과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첫째, 임꺽정 일당은 털어서 가끔 남에게 주었을지 모르지만 대개 자기들이 먹고 마셨습니다. 둘째, 산채를 옮기면서 거기 살던 사람들 수십 명을 도륙내기도 했습니다. 셋째, 노골적인 힘에 우위를 둔 두령 중심 위계는 어떤 왕정보다 훨씬 폭력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꺽정이 사랑을 받은 것은 아마도 명종대의 시공간을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을 듯합니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守令)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宰相)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지금 재상들의 탐오가 풍습을 이루어 한이 없기 때문에 수령은 백성의 고혈(膏血)을 짜내어 권력 있는 자를 섬기고 돼지와 닭을 마구 잡는 등 못하는 짓이 없다. 그런데도 곤궁한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너도나도 스스로 죽음의 구덩이에 몸을 던져 요행과 겁탈을 일삼으니, 이 어찌 백성의 본성이겠는가.
진실로 조정(朝廷)이 맑아 재산을 좋아하는 마음이 없고, 수령을 모두 옛날 한(漢)나라 때 훌륭한 관리였던 공수(龔遂)와 황패(黃霸) 같은 사람으로 가려 차임한다면, 흉기를 들었던 도적이 송아지를 사서 농촌으로 돌아갈 것이다. 무엇하러 이토록 심하게 사람을 죽이겠는가. 이런 점을 생각하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추적하여 체포하려고만 한다면, 아마 체포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도적들이 또 이어서 일어날 것이며, 결국 영영 다 잡지 못할 것이다." (<명종 실록> 권25, 14년 3월 27일)
사초(史草)에 남겨 실록에 실린 사관(史官)의 말입니다. 지당합니다. 정치를 잘못하면 도적도 의적이 됩니다. 그래서 잘못된 정치는 두 가지 죄를 집니다. 하나는 잘못된 정치 그 자체이고, 또 하나는 도적을 의적으로 만드는 판단의 혼란을 초래하는 잘못입니다.
아무래도 <임꺽정>을 보면, 양반이든 백정이든 조선 사람들이 보여주는 언어와 삶 자체가 생명력인 듯합니다. 실록은 사관의 입을 통해 비판 정신과 생명력의 근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벽초 선생이 말한 '조선의 정화'가 그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이번에 연재를 하면서 벽초 선생처럼 '조선의 정화' 운운하는 말은 감히 꺼낼 수 없습니다. 다만 문곡이라는 인물과 함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다른 세상인 조선의 어떤 모습을 여행하듯 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가끔 위에 나온 명종 때의 사관 코스프레를 하면서 말입니다.
어딘가 도달해야할 듯 조바심하는 '도로의 역사'보다는 싫든 좋든 어울려 산 '마당의 역사'가 실제 현실에 부합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사람들은 그리 모질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잘못은 은근히 덮고 싶습니다. 잘한 일은 드러내고 싶습니다. 화(和)의 역사를 서술해가고 싶습니다. 직필(直筆)은 그 속에서 구현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독자 여러분께 두 가지를 당부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필자의 글을 비판적으로 읽어달라는 것입니다. 귀명창이 있어야 소리명창이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이 귀명창이 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필자가 인용하는 사료가 미심쩍으면 인터넷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한국고전번역원 사이트에 가면 검색어로 얼마든지 찾아보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역사탐구가 될 것입니다. 필자뿐이 아니라 다른 책들도 그렇게 비평하다보면 어설픈 왜곡과 과장은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당색의 논리에 함몰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나 관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학은 관점의 차이를 사료의 검증을 통해 조금씩 줄여가면서 서로 납득할 수 있는 진실을 넓혀가는 학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줄 인문학이라고 믿습니다.
간혹 무슨 사심(私心) 때문인지 모든 논의를 당색으로 환원시켜 비난하는 당색 부활론자들이 있습니다. 논리학에서는 '인신공격의 오류', '순환논증의 오류'라고 부르는데, 이런 오류를 반복하다보면 무엇보다도 자신의 심성이 망가지고 심성이 망가지면 병이 듭니다. 공부를 제대로 해야 몸이 건강해집니다.^^.
스승에게 죽음 명한 숙종, 그 가슴 아픈 사연은?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알고도 가는 길 ①
기사입력 2013.02.15 18:20:00
세상에는 몰라서 당하는 일도 있지만, 뭔 일이 날지 알고도 가야만 하는 길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다. 어쩔 수 없는 길마저도 자신의 선택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1629~1689), 그 사람이 그러했다. 그가 1689년(숙종15)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올렸다. 윤3월 초사흘이었다.
큰형에게 보내는 편지
앞서 11일에 내려주신 편지를 받았습니다. 아내가 오는 편에 한식날 내려주신 편지를 또 받아보았습니다. 제사를 지내고 도성에 들어가셨다는데, 기거가 어느 정도 편안하심을 알고 무척 위안이 되었습니다. 저는 일단 근심은 면했지만, 듣자니 죄를 가중하라는 논의가 조만간 일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이미 고려하고 있던 일입니다. 모든 일은 하늘에 달렸으니 단지 순순히 받아들일 뿐이지 오히려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오직 삼성(參星)과 상성(商星)처럼 뚝 떨어져 얼굴을 뵙고 영결할 길이 없으니, 그것이 처량하고 슬픕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봉산(蓬山) 소식은 더욱 묘연하여, 생각할수록 단지 슬픔만 늘어납니다.
<금골산록(金骨山錄)>은 전에 등본(謄本)이 있었으나 미처 가져오지 못했는데, 그 기록을 보여주신다면 파적거리로 삼을까 합니다. 그 산은 군(郡)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섬 가운데 있어서 바위산이 제법 볼만하지만 이른바 삼굴(三窟)은 극히 위험한 절벽이어서 발을 돌리기도 어렵다고 합니다. 죄인의 행적으로 그럴 기회도 없겠지만, 어차피 쇠약한 나이에 병든 다리로는 올라갈 가망도 없습니다.
1689년. 기사년(己巳年)이다. 희빈 장 씨의 득세와 함께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는 사화(士禍)가 있었던 그 해. 조정에서는 김수항에 대한 추가 처벌 논의가 한창이었다. 그때 그는 귀양지인 전라도 진도에서 큰형의 편지를 받고 답장을 올렸다.
큰형은 김수증(金壽曾)이다. 수(壽) 자가 돌림자이다. 삼성(參星)은 동쪽에, 상성(商星)은 서쪽에 있기 때문에,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형편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이 편지에는 어쩌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 큰형을 만나보지 못하고 변을 당할 수 있는 안타까움이 담겨 있다. '봉산(蓬山) 소식'이란 작은형 김수흥(金壽興)의 소식을 말한다. 봉산은 경상도 장기(長鬐)인데, 파직된 뒤 장기에 귀양 가 있던 작은형 김수흥의 안부를 몰라 애태우는 것이다. 김수흥은 이듬해인 1690년(숙종16)에 귀양지에서 세상을 떴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였을까? 이 와중에 답사를 가고 싶다는 말을 꺼낸다. 편지에 나오는 <금골산록(金骨山錄)>은 진도에 귀양 왔던 이주(李冑)란 사람이 지은 금골산 답사기를 가리키는 듯하다. <국역 속동문선> 권21에 나온다. 죄인 처지에 가망이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금골산에 오르는 상상으로 답답함을 견디려 했던 것인가 보다. 이로부터 한 달 뒤인 4월 초순, 그는 숙종의 명에 따라 사약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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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골산(해발 193미터) 입구. 진도군 군내면 둔전리에 있다. 개골산이라고도 불리는 "진도의 금강"이다. 문곡은 여기에 한 번 올라가보고 싶었나보다. ⓒ오항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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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골산에서 내려다본 해언사. ⓒ오항녕 |
빗나간 인연잠깐 시간을 거슬러 가보자. 때는 현종 6년(1665) 9월 5일, 나중에 숙종이 되는 원자 순(焞)은 처음 스승을 맞아 인사를 나누었다. 이제 젖먹이가 아니다. 조선의 국왕이 되기 위한 첫걸음으로 받는 정식 교육이 시작되었다. 현종 2년(1661)에 태어났으니, 원자의 나이 다섯 살이었다.
원자를 가르치는 직책을 보양관(輔養官)이라고 불렀다. 후일 세자로 책봉되면 정식으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이라는 관청을 두어 세자의 학문과 덕성을 가르친다. 원자는 아직 공식 관청을 두지 않고 보양관만 두어 스승으로 삼았다. 현종의 아들인 원자의 보양관에는 어머니 명성왕후(明聖王后 고종의 왕비는 '명성황후(明成皇后)'임!)의 큰아버지인 김좌명(金佐明), 그리고 김수항(金壽恒)이었다.
이후 원자는 이듬해인 현종 7년 3월까지 <효경(孝經)>을 거의 다 읽었다. 당시 이조판서를 맡고 있던 김수항은 원자 보양관을 사직하며 다음과 같은 차자를 올렸다.
<효경> 한 책을 지금 이미 강학을 마쳐 덕량과 학업이 늘 민첩하고 날로 나아가니, 어리석은 신의 기쁜 마음은 실로 다른 사람보다 만 배는 될 것입니다. (…) 배운 내용을 되새기고 인도하여 총명에 도달하게 하시어 애당초 어릴 때부터 어진 사대부를 접견할 때는 적고, 환관(宦官)과 궁첩(宮妾)을 가까이할 때가 많지 않은지 경계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그 근본을 추구해보면 또한 전하께서 몸소 실천하여 가르치기에 달려 있습니다. 대체로 전하의 한 마디 말씀과 한 가지 행동은 원자가 보고 배우는 대상 아닌 것이 없으니, 진실로 사소한 일일지라도 삼가지 않음이 없어야 하며 어느 곳에서라도 공경하지 않음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
또 반드시 궁궐 안을 엄숙하게 하고 사특한 길을 막아서 말만 잘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들락거리며 아첨하지 못하게 하고, 즐기며 가지고 노는 물건을 보거나 듣지 못하게 하십시오.이 차자는 <숙종실록>과 <문곡집>에 모두 실려 있다. 반년 정도 원자를 가르친 이후 김수항은 보양관을 사직했는데,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러면서 원자가 어렸을 때부터 학자를 자주 접하게 하고, 환관이나 궁녀들과 어울려 노는 데 빠지지 않도록 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아울러 아버지인 현종의 행동거지가 원자에게 가장 큰 본보기라고 강조했다.
이로부터 23년 뒤, 원자에서 장년이 된 숙종은 스승이었던 김수항에게 사약을 내렸다. 다섯 살짜리 원자를 가르쳤던 김수항은 사약을 받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첩에 현혹되지 말라고 간곡히 말했건만, 궁첩 장 씨 때문에 김수항에게 사약을 내린 숙종은 23년 전 아버지 현종에게 올린 김수항의 차자를 기억하고 있었을까? 아니, 알고는 있었을까? 원자의 훈육을 간곡히 진언했던 김수항의 차자를 읽으며, 그 결과를 알고 있던 나는 공연히 가슴 한 켠에 안타까움이 자리했다. 무엇이 이들 사이의 인연을 이렇게 어지럽혔을까? 이런 어긋남이 조선 사회와 인민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죽여야 합니다"김수항은 귀양지에서 자신을 처벌하라는, 다시 말해 죽이라는 논의가 벌어지는 조정 상황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그 무렵인 윤3월 20일, 장령 김방걸(金邦杰), 지평 심벌(沈橃)·정선명(鄭善明), 정언 김정태(金鼎台) 등 사헌부와 사간원 관원이 함께 숙종에게 계(啓)를 올려 김수항의 죄를 논하였다.
김수항(金壽恒)은 간사하고 표독하여 겉으로는 점잖은 체하지만 속에는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10년 동안 전조(銓曹 이조)를 맡고 있으면서 마음대로 위세를 부렸고, 8년 동안 정승(政丞)을 지내면서 하고 싶은 대로 하였습니다. 족류(族類 집안)와 인친(姻親 혼인으로 맺은 친척)이 요소요소에 앉아 있어 권세가 치열하였고, 문생(門生)이나, 연고 있는 관리가 온 나라에 가득하여 당여(黨與)가 매우 성대하였습니다. (…)
윤휴(尹鑴)는 현사(賢士)입니다. 성상(聖上)께서 처음에 이미 참작해서 선처(善處)하여 그 죄가 유배에 그쳤는데, 대역(大逆)이라 무함하여 기필코 죽인 뒤에야 그만두었습니다. 오시수(吳始壽)는 대신(大臣)입니다. 전하께서 자전(慈殿)의 분부에 따라 그의 죽음을 용서하였는데, 상소를 올려 극력 논쟁함으로써 끝내는 사사(死賜)에 이르게 했습니다. (…)이사명(李師命)의 음흉함은 온 나라 사람이 다 함께 증오하는데도, 그가 병권(兵權)의 자리를 극력 요구하자 우서(友婿 동서)라는 혐의도 피하지 않고 서전(西銓 병조판서)의 장관에 후보로 올렸으며, 이단하(李端夏)가 실성한 사람이라는 것은 진신(搢紳)들이 모두 알고 있는 바인데도 송시열(宋時烈)의 천거에 따라 공론(公論)을 무시하고 백료(百僚)의 우두머리에 올려놓았습니다. (…) 율(律)에 의하여 처치하소서.이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김수항이 이조판서와 대신으로 오래 있으면서 권세를 부렸는데, 윤휴나 오시수 같은 명망 있는 사람은 무함하여 죽이는 한편, 동서인 이사명, 친구인 이단하 같은 사람은 자신의 당색이라고 하여 능력이나 인덕을 무시하고 등용하였다는 것이다.
홍문관 관원도 여기에 동조했다. 부제학(副提學) 유명견(柳命堅), 교리(校理) 이현조(李玄祚)가 차자(箚子)를 올려 김수항(金壽恒)의 죄를 따졌는데, 앞서 대간(臺諫)이 아뢴 것과 대략 같았다. 그리고 "대신(大臣)이 지은 죄가 사면(赦免)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더라도 죽이지 않는 방식으로 대우하는 것은 참으로 사람을 용납하는 덕(德)입니다. 그러나 이제 김수항은 결단코 죽여야 할 것이요, 조금도 용서할 수가 없는데 대신이라고 핑계하여 형장(刑章)을 가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당(唐)나라 때 이임보(李林甫)와 노기(盧杞)가 죽을 필요가 없었고, 송(宋)나라 때 한탁주(韓佗胄)와 가사도(賈似道)가 죽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 됩니다. 더구나 우리 조선의 김안로(金安老)와 윤원형(尹元衡)은 모두 대신으로서 끝내 사사(賜死)되었는데, 김수항의 죄는 김안로·윤원형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라며, 숙종의 결단을 촉구했다.(윤3월 22일)
이임보는 당나라 현종(玄宗) 때 음흉하기로 이름난 재상이고, 노기는 덕종(德宗) 때 국권을 전횡한 재상이었다. 한탁주는 송나라 영종(寧宗) 때 권력을 잡고 횡포를 부렸는데 결국 피살당했으며, 가사도는 이종(理宗) 때 그 권세가 일세를 흔들었으나 진의중(陳宜中) 등의 탄핵을 받고 귀양 갔다가 거기서 피살되었다.
유명견 등 홍문관 관원들은 아예 김수항을 김안로나 윤원형에 비유했다. 김안로는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 중종14) 때 조광조(趙光祖) 등을 탄압하고 죽인 인물이고, 윤원형은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의 동생으로 명종 때 권력을 남용하고 민생을 파탄시킨 인물이다. 김수항은 어찌 이리 탄핵받았을까? 그리고 어디까지 진실일까? 우리는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을까? 우선, 가까운 사건부터 살펴보자. 이런 탄핵이 있기 전에 정권이 바뀌는 '환국(換局)'이 있었고, 그 바로 전에 숙종의 첫 아들이 탄생했다. 나중에 경종(景宗)이 되는 희빈(禧嬪) 장 씨 소생이었다.
아들 낳은 미녀를 총애한 그 왕의 속내는?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알고도 가는 길 ②
기사입력 2013.03.01 18:45:00
숙종, 아들을 보다숙종 14년(1688년) 10월 27일, 왕자가 태어났다. 조선의 19대 왕, 숙종. 현종 2년(1661년)에 태어난 숙종은 29살이 다 되도록 아들이 없었다. 15세 전후에 혼인하였던 당시로서는 심각한 사태였다. 숙종은 인경왕후(仁敬王后) 김 씨를 1680년에 잃었다. 계비인 인현왕후(仁顯王后) 민 씨에게도 후사가 없었다.
후사가 없다는 것은 왕정(王政)에서는 체제가 불안해지는 사태였다. 마치 대통령 임기가 끝나는데, 후임 대통령을 뽑지 못한 근대 국가와 마찬가지 형국인 셈이다. 그러므로 숙종이 몇 차례 병을 앓았을 때 조정에 어수선한 분위기가 엿보였던 것은 공연한 일이 아니라 왕정의 근원적인 불안감이었다. 국가가 애당초 없었으면 모르지만, 사람들이 그 속에 살고 있는 동안 그 시스템이 정상 가동되어야 삶의 리듬이 깨지지 않을 터였다.
그 불안감은 누구보다도 숙종 자신이 가장 컸을 것이다. 후사를 보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이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몸으로 생물학적 재생산을 해야 하는 효(孝)의 일차적인 요건을 채우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국왕은 조종조(祖宗朝)라고 부르는 종묘와, 백성들 삶을 지켜내는 토대인 사직을 짊어지고 있는 존재였다. 바로 이때 후궁인 장 씨가 아들을 낳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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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묘와 사직. 국왕에게 후사가 없다는 것은 왕위 계승으로 표현되는 나라의 명맥과, 땅과 곡식으로 표현되는 백성의 안위, 이 둘을 지키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
우리는 왕정(王政)을 모른다내 주변에 있는 대다수의 분들과는 달리 나는 왕정(王政)에서 진보하여 민주정(民主政)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흔히 생각하듯, 민주정이 왕정보다 더 나은 정치 제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런 관점 때문에 나를 의심스런 눈으로 쳐다보는 분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도 할 수 없다. 나는 역사 발전에 대해 회의적이거나, 유보적이다. 그 시대는 그 시대의 생활양식과 규범에 의해 움직인다고 생각하지, 역사가 계기적으로 발전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고려보다 조선이 더 나은 사회라든가, 조선보다 현대가 더 나은 사회라고 보지 않는다.
왕정이든, 민주정이든, 귀족정이든, 그것은 어떤 사회의 인구, 경제력 같은 규모, 기술이나 문화 같은 시스템과 규범의 결정 요소, 그 사회가 당면한 과제 등에 의해 선택될 수 있는 정치 체제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일례를 들자면, 현대 사회에서 국가 대표를 뽑을 때는 보통선거를 정치 제도로 선택할 수 있지만, 이 보통 선거가 동네 이장을 뽑거나 대학 총장을 뽑는 데 과연 효율적이거나 고상한 방식인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동네 이장 뽑다가 동네가 둘로 갈라진다든가, 대학 총장 뽑느라 강남 룸살롱 매상만 올려주었다는 사실은 단지 어떤 제도가 정착하기 위한 과도기로 설명되기에는 폐해가 심각하고 불행한 사태이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지만, 왕정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내가 알고 있는 왕정에 대한 학술적 논의라고 해봐야 그다지 학술적으로 보이지 않는 왕권-신권이라는 1차원의 논리가 전부이다. 하긴 현재 살고 있는 세상의 정치 제도도 제대로 배우지 않는데, 지나간 시대의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여기겠는가.
어떤 정부를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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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민주주의>(알렉시스 드 토크빌 지음, 임효선·박지동 옮김, 한길사 펴냄). ⓒ한길사 |
근대 민주주의에 대해 자상하게 알려준 알레시스 드 토크빌(1805~1859년)이라는 학자가 있다. 지난 몇 달간 전주 독서 모임에서 그가 지은 <미국의 민주주의>(임효선·박지동 옮김, 한길사 펴냄)를 읽었다. 먼저 민주 정치의 장점과 단점을 통찰한 토크빌의 말을 살펴보자.
우선 우리는 사회와 정부에서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인간 심성을 어느 정도 고양시켜 관대한 감정으로 이 세상의 사물을 바라보도록 가르치고, 세속적인 이익을 그저 경멸적으로 보도록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으며, 강한 신념을 만들고 일깨워 영예롭게 헌신하는 정신을 보존하기를 당신은 바라는가? 습관을 순화하고 생활 태도를 아름답게 만들며 예술을 함양하는 것, 그리고 시나 아름다움, 영광 들을 애호하는 풍조를 증진하는 것이 당신의 목적인가? 모든 다른 나라들에게 고압적으로 행동하며 또한 결과야 어떤 것이 되건 역사에 영원불명의 명성을 남기게 될 고상한 과업들을 치러낼 준비가 되어 있는 국민을 만들어내려고 하는가? 만일 이런 일을 사회가 지향할 주요한 목표라고 생각한다면 민주 정치는 피해야 한다. 그 이유는 민주 정치는 분명하게 그 목표로 당신을 인도해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적, 도덕적 활동을 안락한 사물의 생산과 전반적 복리의 증진으로 돌리는 것을 하나의 방책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천재성보다는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인간에게 더 유익하다면, 영웅의 윤리가 아니라 평화의 습관을 증진하는 것이 당신의 목적이라면 또한 범죄보다는 폐단 쪽을 택하고 범법 행위가 같은 비율로 줄어들 경우 고귀한 행동이 줄어들어도 만족한다면, 찬란한 사회에 살기보다는 당신 주변이 번영하는 것에 만족한다면, 간단히 말해서 정부의 주요 목표가 국가 전체에 가능한 최대의 권력과 영광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고 국가를 구성하는 개개인들에게 최대의 안락을 확보해주고 가능한 한 가난을 피하게 하는 것이라면, 위에 말한 것들이 당신이 바라는 바라면 사람들의 처지를 평등하게 만들고 민주제도를 수립해야 한다. (<미국의 민주주의>, 328~329쪽)토크빌이 귀족 출신이고 프랑스가 당시 왕정이었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절대적 우위를 인정하기보다, 왕정과 민주정의 상대적 가치와 지향을 언급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위의 논의는 그 자체로 두 제도의 비전 차이를 잘 정리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우리가 논의할 조선의 왕정과는 작은 차이가 느껴지기도 한다.
심성의 고양, 아름다움, 역사에 남는 명예, 지적, 도덕적 활동 등을 조선이 추구한 것은 사실이나, 다른 나라에 대한 고압적 태도, 영웅의 윤리나 찬란한 사회, 천재성의 동경은 조선 사회와 거리가 멀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같은 왕정이면서도 실제에서 조선과 프랑스는 이렇게 차이가 난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토크빌이 1830년부터 약 3년간 미국을 여행한 뒤 집필에 들어가 1835년에 출간된 책이다. 그런 까닭에 토크빌은 이후 유럽을 풍미하면서 전 세계에 퍼진 진보, 문명 담론의 오염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을 것이다. 토크빌은 위의 말에 이어서 이렇게 덧붙였다. 진보의 목적론이 아니라, 자연 선택적인 진화론에 가까운 발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시기가 지나갔다면, 그리고 인간의 능력보다 우세한 어떤 힘이 우리들이 바라는 바와는 관계없이 그들 두 가지 정부 형태 가운데 어느 쪽으로 이미 우리를 이끌어간다면, 우리들에게 할당되는 것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그것의 좋고 나쁜 경향을 모두 밝혀내서 좋은 경향을 북돋우고 나쁜 경향을 최대한으로 억제해야 한다."멀고도 가까운 왕정인류 역사에서 볼 때, 왕정은 민주정보다 훨씬 연륜이 길고 깊다. 그리고 무엇보다 왕정은 매우 강력한 물질적 기초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가족이라는 인프라이다. 왕정에서 종종 국왕이 부모로 표현되는 것은 흔히 생각하듯 정치적 사기(詐欺)가 아니다. 민주정의 토대를 사회 계약이라고 생각하는 견해가 부르주아지의 성장이라는 물질적 토대를 갖고 있듯이. 이 두 조건, 즉 역사적 경험과 가족이라는 물적 토대가 왕정을 사라지지 않게 한다. 때로 이 두 조건은 상호 작용한다.
실제로 민주정과 함께 왕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가까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그러하고, 허울이든 실제든 세계 곳곳에서 왕정은 유지되고 있다. 정치권력의 세습이라는 왕정의 요소는 더욱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똑똑해야 대통령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준 조지 워커 부시는 아버지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없이는 즉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라의 규모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보통 선거라는 외피 속에서 정치권력을 세습하는 양상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정치 분야 외에, 경제, 문화 영역에서는 어떠한가? 요즘 아들, 딸들을 데리고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예인들이 많다. 나는 거기서도 왕정의 조짐을 본다. 좋고 나쁜 문제가 아니다. 토크빌이 말했듯이, 왕정은 하나의 조건, 우리가 장점과 단점을 판단하고 대처할 조건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현대 사회에도 왕정, 또는 왕정의 요소가 곳곳에 존재하지만, 조선의 왕정 역시 생각보다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가만 보면 조선의 정부, 즉 조정(朝廷)에서 세습으로 자리를 차지하는 존재는 국왕 하나였다. 나머지는 할아버지, 아버지가 무슨 관직을 했느냐에 상관없이 과거 시험을 붙어야만 관직에 나올 수 있었다.
요즘의 국가 유공자처럼 음직(蔭職)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예외적인 경우였고, 양반이라도 몇 대에 걸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서서히 평민과 같아졌다. 다른 한편 대대로 과거에 급제하는 가문이나, 사회에 공이 많은 집안은 존경을 받기도 했고, 때에 따라서는 왕가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리기도 했다.
후궁 장 씨의 집안비록 후궁의 소생이지만 숙종이 아들을 보았다는 것은 무척 안도할 만한 경사였다. 왕정이라는 정치 체제(Regime)의 유지가 보장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나이가 많았던 숙종으로서는 뭐라도 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장 씨에게든 새로 얻은 아들에게든.
그런데 경종이 태어나기까지의 과정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 사연은 태어난 이듬해인 1689년(숙종 15년) 1월 11일 아들을 원자(元子)로 책봉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귀양을 갔다가 죽음을 당한 김수항의 처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본관이 인동(仁同)인 장 씨는 효종 10년(1659년) 생으로, 이듬해 태어난 숙종보다 한 살 위였다. 대대로 역관(譯官) 집안이었는데, 할아버지 장응인(張應仁, 1594~1660년) 이래 20여 명의 역관이 나왔고, 그 중 역과에 수석으로 합격한 사람이 7명이나 되었다. 아버지는 장경(張烱)이다.
아버지 장경의 사촌 형인 역관 장현(張炫, 1613~1695년)에 주목해보자. 그는 병자호란 후 소현세자를 따라 심양에서 6년간 머물렀다. 귀국해서는 40년 동안 30번 이상 북경에 다녀왔던 베테랑 역관으로, 효종의 동생 인평대군 등을 따라가 사무역을 통해 큰 부를 축적했다고 한다. 장현은 인평대군의 아들 복창군, 복선군이 사신으로 갈 때도, 남인의 우두머리였던 허적(許積, 1610~1680년)이 사신으로 갈 때도 수행하였다.
장현은 김수항의 할아버지인 김상헌(金尙憲)이 대사헌(요즘의 감사원장)이었을 때 집을 규격에 벗어나게 지어 투옥된 적이 있었으니, 은연 중 김수항과 후궁 장 씨 사이에 묵은 감정이 없다고 하기 어렵다. 아무튼 집을 과도하게 지어 투옥될 정도로 부유했고, 아직 그다지 세력을 떨치지 못할 때인데도 장현에게 청탁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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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희빈의 아버지 장경신도비 : 불광동 은혜초등학교 근처에 있던 것을 1974년 고양시 고봉산 자락으로 이장하였다. 인현왕후를 내쫓고 장 씨가 왕비가 되었던 1691년(숙종 17년)에 세웠는데, 민암(閔黯)이 글을 짓고, 오시복(吳始復)이 글씨를 썼다. ⓒ오항녕 |
돌아온 후궁 장 씨장 씨의 생모 윤 씨는 조사석(趙師錫)의 처갓집 종이었다. 젊었을 때 조사석과 어울렸는데, 장 씨 집에 시집간 뒤에도 조사석의 집에 오갔다고 한다. 그래서 장 씨는 조사석의 후원, 인조 후궁 조귀인의 손자 동평군 이항(李杭)의 주선을 업고 궁녀로 들어왔다.
장 씨가 22세 되던 숙종 6년(1680년)에 왕비 인경왕후 김 씨가 천연두에 걸려 세상을 떴고, 이후 비로소 장 씨가 숙종과 가까워졌다. 숙종 7년에 숙종은 계비 인현왕후 민 씨를 맞았는데, 민 씨가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에게 장 씨를 궁중에 들여오게 하자고 건의한 것으로 미루어, 이 무렵 궁궐 밖으로 쫓겨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록에는 그때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경신년(1680년) 인경왕후가 승하한 후 비로소 은총을 받았다. 명성왕후(明聖王后)가 곧 명을 내려 그 집으로 쫓아내었는데,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의 아내 신 씨가 좋은 기회로 여겨 자주 그 집에 불러들여 보살펴 주었다. 신유년(1681년)에 내전(內殿 인현왕후)이 중전의 자리에 오르자 그 일을 듣고서 조용히 명성왕후에 아뢰기를,
"임금의 은총을 입은 궁인(宮人)이 오랫동안 민간에 머물러 있는 것은 사체(事體)가 지극히 미안하니 다시 불러들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명성왕후가 말하기를,
"내전(內殿)이 그 사람을 아직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오. 그 사람이 매우 간사하고 악독하고, 주상이 평일에도 희로(喜怒)의 감정이 느닷없이 일어나는데, 만약 그의 꼬임을 받게 되면 말할 수 없이 나라의 화란이 될 것이니, 내전은 나중에라도 나의 말을 생각해야 할 것이오."
하였다. 내전이 말하기를,
"어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헤아려 나라의 사체(事體)를 돌아보지 않으십니까?"
하였으나, 명성왕후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명성왕후가 승하한 후에 내전이 다시 임금을 위해 그 일을 말하였고, 자의전(慈懿殿 인조의 계비 조 씨)도 또한 힘써 그 일을 권하니, 임금이 곧 불러들이라고 명하여 총애하였다. (<숙종 실록> 권17 12년 12월 10일)그러니까 어머니가 내쫓은 여자를 돌아가시고 나자 다시 불러들인 것이다. 장 씨는 미모에 질투도 있고 좀 드센 편이었나 보다. 위의 기록에 이어, 사관(史官)은 이렇게 적었다.
"장 씨의 교만하고 방자함은 더욱 심해져서 어느 날 임금이 그녀를 희롱하려 하자 장 씨가 피해 달아나 내전(內殿)의 앞에 뛰어 들어와 (…) 이후로 내전이 시키는 모든 일에 대해 교만한 태도를 지으며 공손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불러도 순응하지 않는 일까지 있었다. 어느 날 내전이 명하여 종아리를 때리게 하니 더욱 원한과 독을 품었다."영빈 김 씨의 입궐그렇다고 15세의 나이로 왕비가 되었던 인현왕후가 손 놓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명성왕후가 해준 경계도 있고, 직접 장 씨의 됨됨이를 경험했던 그는 장 씨의 환란을 막고자 숙종 12년(1686년) 김수증(金壽增)의 손녀인 김 씨를 숙종의 후궁으로 들여 숙의(淑儀)로 삼는다. 이가 영빈(寧嬪) 김 씨이다.
그러나 김 씨는 숙종과 별로 가깝지 못했고, 오히려 인현왕후가 폐위될 때 함께 숙종에게 내쫓겼다. 김 씨가 했던 큰 역할은 환란 없이 뒤에 경종과 영조를 왕위에 올린 일이다. 김 씨는 후일 영조(英祖)가 되는 연잉군(延礽君)을 양자로 들였던 것이다.
이건 나중 일이고, 당시 김수항은 김 씨의 후궁 간택을 반대했다. 김 씨의 할아버지 김수증은 곧 김수항의 맏형이다. 김 씨의 아버지는 김창국(金昌國)으로, 김수항의 친조카이니, 김수항은 김 씨의 작은할아버지가 되는데 그가 김 씨의 후궁 간택을 반대한 이유를 그가 쓴 편지에서 알 수 있다.
편지를 보고 위로가 되었다. 내 병세는 밤새 한결같았지만, 간택(揀擇)이 정말 청양(靑陽, 이때 김창국이 청양현감이었다) 김창국(金昌國) 집안으로 정해졌다고 오늘 아침 대궐에서 통보가 있었으니 이곳의 놀라움을 어찌 다 말하겠느냐. 오늘의 이 거조는 이미 종사를 위한 대계이니, 비록 다른 집안의 여자라도 그 병이 있다는 것을 알면 대신의 신분으로 아무 말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물며 이 아이는 숙환(宿患) 외에도 배앓이와 혈병(血病)이 지극히 가볍지 않다.
지금 만일 먼저 그 실상을 진달하지 않는다면 향후 무거운 견책을 받더라도 스스로 해명할 길이 없을 것이다. 설령 끝내 주상의 생각을 바꾸지 못하더라도 도리상 이럴 수는 없기 때문에 병든 몸을 싣고 대궐에 가서 힘껏 아뢸 계획이지만, 분명 몸이 더 상하게 될 것이므로 이래저래 걱정이고 한탄이구나. 나머지는 이만 줄인다. (아들 창집에게 보내는 답장[答集兒] 병인년(1686년, 숙종12년))큰아들 창집에게 말리라고 편지만 보낸 것이 아니라, 실제로 김수항은 대궐로 들어가 숙종에게 입대하여 김 씨의 간택을 반대했으나, 숙종이 윤허하지 않았다. (<숙종 실록> 12년 3월 23일)
아들 김창협의 바른 말숙종의 장 씨에 대한 총애는 갈수록 깊어갔다. 숙종 12년 9월, 숙종은 장 씨를 위해 몰래 별당을 지어주었다. 당연히 사헌부 장령 이국화 등이 중지할 것을 청했지만, 숙종은 잘못 전해들은 것이라고 둘러대며 공사를 중지하지 않았다. 이어 12월에는 장 씨를 종4품 숙원(淑媛)으로 삼았다. 궁녀로 들어와 왕자나 공주를 낳지도 않은 사람이 숙원이 되는 것은 특별한 조치였다. 또 며칠 뒤 장 씨의 궁방인 숙원방(淑媛房)에 사패(賜牌, 임금이 특별히 내려줌) 노비 100명을 주었다.
사헌부의 반대 이후, 홍문관 관원들의 면담에서도 반대 의견이 쏟아졌다. 사간원도 동참했다. 그러나 숙종은 상소를 올린 정언(正言) 한성우(韓聖佑)를 갈아치웠다. 승정원은 한성우가 사심을 가지고 한 말이 아니라며 구원하러 나섰다. 숙종도 뭔가 말은 해야 했다.
역사 기록을 보니, 여자를 총애함으로써 정신이 어지러워져서 실정(失政)하게 된 자가 많았으므로 내가 상시 슬퍼하고 한탄하였다. 하물며 나는 종묘(宗廟)의 부탁을 받았으니, 어찌 감히 스스로 가볍게 행동하겠는가? (<숙종 실록> 권17 12년 12월 11일)그런데 숙종의 행동이나 조치는 그의 말과 달랐다. 후궁 장 씨에 대한 숙종의 과도한 집착을 둘러싸고 신하들과 숙종 사이에 긴장이 흐르기 시작한 초엽, 국립대학교 총장격인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던 김창협(金昌協)의 논계가 들어갔다.
어제 사헌부의 계(啓)에 대해 전하께서는 전해들은 말이 사실과 어긋난다고 하셨는데, 근래에 진실로 별당을 짓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대목(大木)을 구하는 공사 담당 관리가 빈번히 민간에 출입하고 있으니 대간의 아뢴 대로, '장인(匠人)을 불러 모으고 재목을 운반하는 데 반드시 이른 아침과 늦은 저녁에 한다'는 말이 과연 거짓말이 아닙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임금이 장 씨를 위하여 별당을 지으면서 외부 사람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했다" 하였다.] 지금 전하께서 스스로의 잘못이라고 하교하시고는 안으로는 급하지 않은 역사(役事)를 일으키고, 밖으로는 신하의 말을 막아 버리는 변명을 하시니, 이것은 스스로를 속이고 또 남을 속이는 일입니다. (<숙종 실록> 권17 12년 12월 10일)김창협은 김수항의 둘째 아들이다. '장 씨를 위해 별당을 짓는 일은 잘못했다고 말하면서, 안으로는 별당을 짓고, 밖으로는 신하들의 말을 막는다' '이는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일이다' 그의 발언은 숙종을 흔들었다. 숙종은 화를 내지 않았다. 화를 내지 못했다. 숙종은 흔들렸고, 화는 그로부터 3년이 지나 터졌다.
처음 김창협의 말을 읽었을 때, 잠시 고개를 들고 눈을 감았다. "그냥 지나가지 않겠구나……." 이런 말을 당시 표현으로 위언(危言)이라고 한다. <논어>에, 공자가 "나라에 도리나 상식이 통하면 말과 행실을 높게 하고, 나라에 도리가 도리나 상식이 없을 때에는 행실은 높게 하되 말은 겸손하게 하여야 한다[邦有道, 危言危行, 邦無道, 危行言孫]."고 한 데서 나왔다.
이런 말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지금 범범한 나도 아는데, 김창협이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한다. 알고도 하는 사람들. 조선 사람들에게서 뭔가 건질 것이 있다면, 이런 삶의 태도가 그중 하나일 것이다.
조선 시대의 기록을 읽다보면 상소나 편지 등에서, 정중한 듯하면서도, 너무 정확하여 이렇게 심하게 말하고도 성할 수 있으려나, 싶은 때가 자주 있다. 성한 경우도 있고, 성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 대개 전후 상황을 보면 짐작이 가는데, 숙종의 처사, 처신에 대한 김창협의 비판은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하기에 위험했다. 이 일이 있고 이듬해, 실록에 사관이 남긴 말이다.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수항(金壽恒)이 죄를 입게 된 것이 (…) 혹자는 그의 아들 김창협(金昌協)이 일찍이 한 차례 상소를 올려 후궁(後宮)을 지적하여 배척하면서 한 말이 매우 절박하였기에, 임금의 마음에 불평이 생겨 그의 아비에게 화풀이하게 된 것이라고도 몰래 말하는 자가 많았다. (<숙종 실록> 권18 13년 9월 11일)
여색에 빠진 왕, 하늘은 홍수로 답했다!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알고도 가는 길, 그 세 번째
후궁 장 씨를 위해 별당을 짓다가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내 스스로의 잘못"이라고 인정하면서 비판을 모면하는 한편, 뒤로는 별당 공사를 계속했던 숙종.
김수항이 23세 때 본 둘째 아들로, 대사성이었던 김창협은 숙종의 그런 행태에 대해 "스스로는 속이고 남을 속이는 일"이라고 정면으로 반박했다. 사관은 "김수항이 죄를 입게 된 것을 두고, 그의 아들 김창협(1651~1708년)이 한 말 때문에 임금의 마음에 불평이 남아 김수항에게 화풀이를 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기록했다.
농사짓는 바위나는 지곡서당에서 <고려-조선 열 명의 이름난 문장 뽑아보기(麗韓十家文鈔)>라는 편집본을 읽으며 김창협을 처음 알았다. 이 책은 지금도 고전 문학을 하는 학자들의 필독서이며, 번역본도 나와 있어 일반 시민들도 읽을 수 있다. 또 그의 저술을 모은 <농암집(農巖集)>이라는 문집이 남아 있고, 일부 번역되어 있다. 이 분에 대해 설명하려고 해도 책 한 권으로는 어림없지만, 오늘은 우리 주제와 관련하여 조금만 언급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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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암 김창협. |
그의 호 농암은 영평(永平, 포천의 옛 이름) 응암(鷹巖, 매바위)에서 유래한다. 1679년, 그는 이곳에 집을 마련해두었는데, 1689년(숙종 15년) 부친 김수항이 사사(賜死)되자 세상에 나갈 뜻을 버린 김창협은 응암을 농암으로 고치고 여생을 마치기로 결심하였다. 농암, '농사짓는 바위'……. 그 때의 심정을 알 수 있을 듯하다. 서울 집에 혼자 남아 있던 어머니를 자주 뵙기가 어렵게 되자 1697년 8월에는 삼주(三洲, 경기도 양주군)로 거처를 옮겼는데, 그래서인지 농암이라는 호와 함께 삼주라는 호도 썼다.
그의 학문이 높았던 것은 잘 알려져 있거니와, 숙종 8년(1682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6품 수찬(修撰)으로 등용된 뒤, 대부분 홍문관 관원으로 있었다. 집현전의 후신인 홍문관 관원은 '명예로우면서도 잘 나가는' 관직이었다. 똑똑하고 잘 나가면 그대로 살아도 아쉬울 것이 없을 텐데, 이 분은 대놓고 바른 말을 하였다. 그것도 한참 여자에 빠져있던 젊은 숙종에게.
"김치를 보내주어 고맙네"몇 세대에 걸쳐 조선의 내로라하는 명문(名門)이면 경제력도 있을 법한데, 이 분은 그런 주변도 없었나보다. 하긴 조선의 명문 집안이 경제력만 가지고 되는 경우는 없었다. 순조 이후로 넘어가면서 서서히 왕조의 붕괴와 함께 그런 양상이 나타나지만, 김창협이 살았던 무렵의 조선은 많이 달랐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장희빈이 폐위되고 인현왕후가 복위하면서, 이미 세상을 뜬 아버지 김수항도 복관되었으나, 이런 상황의 변화가 경제적 안정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삼주에 살 때 형편을 알 수 있는 편지 몇 장이 전해진다. 김시좌(金時佐, 1664~1727년)라는 집안 조카이자 제자로 <농암집> 편찬을 주도했던 인물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 편지는 <김창협(金昌協)의 농암진적(農巖眞蹟)>(심영환 정서, 장유승·배미정 역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펴냄, 2012년)에 수록되어 있다.
새 집이 허술하여 "물건을 아무렇게나 보관하면 도둑질을 가르친다"는 말이 걱정되었는데, 과연 지난밤에 도둑이 들어 집안에 있는 것을 싹 쓸어 가버렸네. 이미 깨진 독과 같으니 어쩔 수가 없지만, 앞으로 근심이 없어지지 않으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네. (1697년 4월 6일.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 "물건을 아무렇게나 보관하면 도둑질을 가르치는 것이고, 얼굴을 예쁘게 꾸미면 음탕함을 가르치는 것이다"라고 했다.))자네는 전부터 나의 어려운 처지를 자주 도와주었네. 매번 물건을 받으니 마음이 매우 불편하네. 하지만 지금처럼 군색한 때에는 이쪽저쪽에서 빌리기도 좋지 않아 어제 저녁 이후로는 거의 불을 피워 밥을 해먹지 못할 지경이네. 일단 부득불 자네 말대로 가져다 쓰겠네. 고맙고도 부끄럽네. (1699년 2월 19일)자네가 보내준 신선한 채소는 시골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세. 정말로 고맙네. (1704년 3월 16일)
제자 공부 챙겨주는 말을 하다가, 병든 종(奴)에게 쓸 약을 부탁하다가, 또는 지은 글을 상의하다가, 사이사이에 농암은 미안하고 부끄러워하면서 김시좌에게 도움을 청하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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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협이 김시좌에게 1704년(숙종 30년) 2월 4일에 보낸 편지. 왼편 작은 글씨로 쓴 추신에, "김치를 계속 보내주어 고맙네. 다만 약을 먹고 있으니 무김치는 먹을 수가 없네(沈菜蒙繼送爲荷, 但方服藥, 若是蘿葡, 則喫不得矣.)"라고 적었다. ⓒ오항녕 |
아버지와 아들농암은 아버지 문곡 김수항의 문집 <문곡집(文谷集)>을 책임지고 편집했다. 그가 <문곡집>을 완성한 것은 위 편지들이 오고간 삼주(양주군)에 살 때인 기묘년(1699년, 숙종 25년)이었다. 그 <문곡집>에 다음과 같은 편지가 실려 있다.
전후로 매번 너희들의 편지를 볼 때마다 바쁘다는 뜻이 많이 있으니, 이미 노는 데 분주하여 조용히 편지를 쓸 수 없다는 것을 알겠다. 듣건대 너희들이 하루 종일 나가 놀면서 서책을 완전히 젖혀두었다고 하더구나. 앞서 내가 보낸 편지 가운데 추위를 무릅쓰고 나가 놀지 말라는 뜻은 과연 어디로 갔느냐.이는 필시 너희들이 내가 멀리 나간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때를 틈타 떼 지어 놀면서, 내가 멀리서 걱정하는 마음은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니 이는 아버지를 섬기는 도리를 모르는 짓이다. 내가 멀리 나갔더라도 너희 어머니가 계신데 교훈을 따르지 않았으니, 이는 어머니를 섬기는 도리를 모르는 짓이다. 사람이 되어서 부모를 아랑곳하지 않는다면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너희들이 부모를 아랑곳하지 않더라도 부모가 자식을 위하는 마음에는 부득불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이다. 너희들이 부지런히 배워서 사람이 되는 것은 진실로 바랄 수 없겠지만, 이렇게 혹독한 추위에 잡배들을 쫓아다니면서 밤낮으로 놀게 되면 반드시 큰 병이 생길 것이다. 큰 병이 생기면 나나 너희 어머니의 걱정이 어떠하겠느냐. 오늘 바라는 것은 오직 떼 지어 놀러 다니지 말라는 것이지, 배우고 배우지 않고는 논할 틈도 없구나. 황 교관 집에도 가서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이다. ('창집, 창협에게 보내는 답장(答集協)')추운데 나가 놀지 말라, 에미, 애비 걱정시키지 말라, 몰려다니며 놀지 말라, 황 교관에게 배우러간다는 핑계로 딴 데 가지 마라(요즘 말로, 땡땡이치지 마라) 등등. 아마 한창 자랄 때 쓴 편지일 것이다. 황 교관이 누군지 모르겠으나, 서울에 있는 사학(四學)의 교관으로 있었는데 농암 형제가 배우러 다녔던 듯이다.
요즘에 친한 친구나 연인끼리 이름 두 자 중 한 자를 줄여, '항녕' 대신 '녕', '윤희' 대신 '희'라고 쓰는 경우가 있다. 위의 편지도 '답집협(答集協)'이라고 하여, 아들의 이름인 창집과 창협의 창 자를 빼고 각각 '집', '협'이라고 불렀다. 그러고 보면 이름을 줄여 부르는 습관은 유래가 오래된 것이다.
'집'은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金昌集)으로 문곡의 큰아들이고 농암의 형이다. 문곡은 아들 여섯을 두었는데, 세간에서는 이들을 육창(六昌)이라고 불렀다. 나는 이들 형제의 이름이 너무 헷갈려 아예 집(集)-협(協)-흡(翕)-업(業)-즙(緝)-립(立)이라고 외워버렸다. 김창집은 경종 때 벌어진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사사됨으로써 김수항에 이어 큰아들까지 부자가 부당한 권력 행사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훌륭하게 자란 아들들이지만, 어렸을 때는 다 비슷했나 보다. 어울려 놀기 좋아하고, 부모 말 안 듣고…. 농암은 이 편지를 갈무리하여 아버지의 문집에 실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문곡집> 맨 뒤에 실린 '발문'에서 농암이 "눈물을 흘리며 쓴다"고 한 말이 허언은 아니었을 것이다. 많은 자식들이 뒤늦게 깨닫듯이…. 무엇보다 자신의 상소로 시작된 숙종 12년의 이 위험한 국면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장 씨의 오라비 장희재의 에피소드다시 농암이 숙종을 비판하던 무렵으로 돌아와, 당시 상황을 이해하기 좋은 두 가지 사례를 들어두고 가자.
1683년(숙종 9년) 3월 13일은 인조반정(仁朝反正)의 회갑(回甲)이 되는 날이었다. 이날 정명공주(貞明公主, 1603~1685년)의 집에서 잔치를 열었다. 정명공주는 인목대비의 딸이자 영창대군의 누이로, 광해군 치하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다가 인조반정을 맞았고, 이후 홍주원(洪柱元)과 혼인하고 장수하였다. 이 날 조정 대신 이하의 관원이 공주의 집에 모였는데, 기녀를 다수 모아 술을 따르고 춤과 노래를 하게 하였다.
그 중에 숙정(淑正)이라는 이름을 가진 기녀가 노래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다. 술을 마신 후 손님 가운데 어떤 사람이 숙정과 더불어 희롱하려 하였는데, 숙정은 후궁 장 씨의 오라비인 장희재의 첩이었다. 숙정은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의 종이었다. 동평군은 인조 때 후궁으로, 김자점(金自點)과 결탁, 친청파(親淸派)를 형성하여 반역을 도모했다가 처형된 귀인(貴人) 조 씨의 소생이었다. 숙정을 통해 장희재는 동평군과 결탁하였다.
잔치가 열리던 날, 장희재는 포도부장(捕盜部將)으로서 대궐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몰래 숙정을 불러내어 달아나 버리니 어떤 사람이 대신들에게 그 일을 일렀다. 좌의정 민정중(閔鼎重)이, "조정의 큰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술을 따르는 기녀가 먼저 달아났으니 사체(事體)가 놀랍다"라고 하고, 비변사 낭관(郞官)에게 기녀를 불러 데리고 간 그 남편을 곤장으로 엄하게 다스리게 했다. 곤장을 쳤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장희재는 이 일 때문에 뼈에 사무치게 독을 품었는데, 이 일이 1689년 사화의 빌미가 되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숙종 실록> 권17 12년 12월 10일)
또 다른 배경, 조사석(趙師錫)한편, 장 씨의 후원자로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 조 씨가 있었다. 후궁 장 씨는 조대비(趙大妃)를 섬겼는데, 이는 조사석(趙師錫)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조사석은 대비의 재종(再從, 6촌) 동생이었다. 또 후궁 장 씨의 어미가 조사석의 처갓집 종이었는데, 조사석이 젊었을 때 사사로이 통했고 장가(張家)의 아내가 된 뒤에도 여전히 때때로 조사석의 집에 오갔다고 한다. (<숙종실록> 권18 13년 6월 16일)
장 씨를 쫓아냈던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가 돌아가고 나서 장 씨가 다시 입궐하여 숙종의 총애를 독차지하자, 결국 조사석은 정승에 임명되었다. 숙종은 조사석을 정승에 임명하기 위해 다섯 차례나 후보 명단을 다시 올리라고 했다. (<숙종 실록>에 세 번 반려했다는 기록도 같이 나온다.) 의정부에서 올린 후보에 조사석이 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보로 올리지 않으면 아무리 임금이라도 낙점(落點)할 재간이 없는 것이다. 통상 세 명의 후보(望) 중에 임금이 한 사람을 낙점하는데, 대개 수망(首望), 즉 후보 중 1순위를 낙점하는 것이 관례이다. 특히 대신의 경우는 그러하다. 그러므로 숙종의 조사석 임명과 같은 사례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인사였다. 김수항은 조사석을 후보로 올리지 않았고, 숙종은 김수항이 면직된 뒤에나 조사석을 정승으로 임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숙종은 김수항이 병으로 사직하기를 기다렸다는 말도 돌았다. (<숙종 실록> 권18 13년 7월 24일)
이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후궁 장 씨의 지원이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길거리에서의 말과 항간(巷間)에서의 평론이 갈수록 더욱 떠들썩하면서도 감히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숙종의 장 씨에 대한 애착을 알기 때문에 두려워한 것이다(<숙종 실록> 권18 13년 9월 11일).
흉년에도 불구하고숙종 12년 12월, 숙종은 장 씨를 숙원(淑媛)으로 삼고, 숙원방(淑媛房)에 사패 노비(賜牌奴婢) 100명을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정언(正言) 한성우(韓聖佑)는 "왕자(王子)를 많이 두어야 하는 도리 때문에 이미 숙의(淑儀)를 선발했는데, 또 반년이 지나지 않아 장 씨를 책봉하니, 궁중 안에서 엄격한 명분(名分)을 알지 못하는 것이며, 성색(盛色, 미인)을 경계하라는 말이 또한 이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 아닌가 염려된다"고 비판하였다(<숙종 실록> 권17 12년 12월 14일).
아울러 효종(孝宗)은 궁인 한 사람을 가까이하여 옹주(翁主)를 낳기까지 했지만 즉위한 뒤에도 끝내 봉작을 내리지 않아서 지금까지 칭송받고 있다고 상기시켰다. 할아버지의 사례를 들어 손자를 압박했던 것이다. 숙종은 "효종의 일은 사실과 다르다", "억측이 심하다"고 개탄하였다.
그러나 숙종의 과도한 '총애'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숙원방에 사패 노비를 내려줄 때 농지에 대한 조항을 누락했다며, 150결(結)을 나누어주도록 명하였다. 그러자 승정원에서는 "팔도(八道)에 흉년이 들어 굶주려서 죽는 사람이 길에 널려 있어서 막중한 종묘(宗廟)의 제향(祭享)도 절감하자는 의논이 있는 상황입니다. 숙원방에 농지를 주는 일 같이 시급하지 않은 일은 천천히 의논해야 합니다"라고 하자, 가까스로 가을까지 기다렸다가 갈라 주도록 하였다(<숙종 실록> 권18 13년 2월 15일).
민심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1687년(숙종 13년) 6월에 큰 수해(水害)가 났다. 지방에서 올라온 장계에 의하면 모든 도의 참상이 똑같았다. 강양도(江襄道, 강원도)의 경우 원성(原城, 원주) 읍내는 급하게 내리는 비가 막 쏟아져 기세가 강(江)을 뒤집어 놓은 것 같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집이 물에 잠기어 파괴된 것이 164호나 되었고 살림살이도 남김없이 떠내려갔으며 백성들이 도망하여 피할 적에 물에 휩쓸려 죽은 사람도 무척 많았을 정도로 예전에 없던 큰 이변이었다. 사관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옛적의 역사를 보면, 큰 수해는 여자를 총애할 때 나타나는 징조라고 했다. 이때 장 씨에 대한 폐총(嬖寵)이 한창 대단했으니, 이번 수재가 발생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다른 도들도 잇달아 수해 피해를 보고했는데, 사람과 가축이 죽거나 부상하고 집들이 떠내려가고 분묘(墳墓)가 무너진 것이 매우 많았으며, 또한 벼락 맞아 죽은 사람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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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손문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