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신앙생활
2024.5.12. 주일 오전예배
요한계시록 3장 앞부분에 보면 사데 교회에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 나와 있습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살았다 하나 죽은 자! 슬픈 대명사이지요. 이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서 사데 교회는 당시에 사데에 있는 교회일 뿐만 아니라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중세 암흑 천 년간의 교회 속에서 1517년 마틴 루터의 개혁으로 교회가 새롭게 복음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교회가 되게끔 주님이 역사하시고 등장한 교회가 개신교이지요. 복음으로 인해서 새롭게 일깨워서 살아 있는 교회라는 이름은 가졌지만 주님의 안목으로 살펴보면 지금은 많이 퇴색되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도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있다. 그들은 내게 합당한 자인 연고라” 그 몇 명이 이기는 자들이었지요. 교회마다 이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나 빌라델비아 교회는 그 교회의 거의 모든 성도들이 이기는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다섯 교회는 이기는 자들이 소수였어요. 우리 교회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모두가 이기는 자들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기는 자들은 살아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내 주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 속에 오늘의 삶을 꾸려가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신앙생활을 위해서 저는 오늘 두 가지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살아 있는 신앙생활은 기다림이 살아 있습니다.
시편 40편 1절 말씀에 “내가 주님을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사무엘상 30장에는 빼앗긴 가족들을 찾아서 전투하러 나간 다윗과 사백 명의 용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쳐서 연약한 형제들 이백 명은 브솔 시냇가에서 기도하며 싸우러 나간 형제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투하러 나간 형제들도 소중하지만, 뒤에 남아서 기도하는 형제들도 소중히 주님은 보십니다. 몸 된 교회가 주님 모시고 힘있게 서가는 것은 여러 일꾼들이 수고 속에 섬기는 것도 귀중하지만 뒤에서 조용히 기도해주시는 율전동 할머니 권사님들, 여러 기도팀들과 한 분 한 분의 기도하는 식구님들을 주님은 기억하고 계실 것으로 압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둘째 아들이 방탕하게 살다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때 아버지의 마음은 그 둘째 아들을 향해서 한 번도 잊어버림이 없이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 아버지의 기다림은 살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에 반해 그 아우의 형 되는 사람은 자기가 밭에서 일하고 돌아온 때 자기 집안에서 잔치가 벌어지고 있거든요. 하인 중 한 사람이 “당신의 동생이 살아 돌아왔으므로 주인님이 잔치를 배설했습니다”라고 했을 때 그는 버럭 화를 냅니다. 잔치의 의미를 모르고 왜 잔치하냐고 따지듯이 화를 냅니다. 그는 동생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기다림이 없었습니다. 불행한 사람이지요.
우리가 지난 주일 날 어버이 청소년 주일에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들을 초청하고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참 뜻깊은 예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많이 축복해주셨어요. 저도 개인적으로 올 연초에 사십 년 동안 주님을 떠났던 제 큰 누님이 “나 요즘 교회 다니고 있어” 문자를 받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누님, 그 믿음의 결단이 천국 갈 때까지 변함없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하고 답장이 오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누님을 이번에 초청했습니다. 한 달간 기도하고 기다렸는데 큰 누님이 서울에서 우리 예배에 참여하시고자 다가왔습니다. 저도 모처럼 가정에서 식사하면서 큰 누님과 대화를 나누었는데요. “참 오늘 예배가 너무 은혜롭더라. 항상 그러냐?” “항상 그렇습니다.” “진토리교회 홈페이지 좀 알려주라. 가끔씩 말씀 들어보게” 큰 누님의 휴대폰에 우리 교회 앱을 깔아드렸습니다. 그리고 “마음 주어지면 자주 오십시오. 누님,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그렇게 큰 누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제 마음이 이렇게 기쁜데 주님은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저희 두 분 부모님 천국에 가셨고 큰 형님도 천국에 가셨고 남은 동기들 위해서 기도했더니 다들 예수님을 믿고 마지막 막차로 큰 누님까지 돌아오셨으니 저는 할렐루야입니다. 이제 남은 조카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데 조금씩 마음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여요. “삼촌, 내가 하고 있는 가게를 문 닫으려고 하는데 가게가 잘 팔리도록 기도해주세요.” 그것도 반가운 소리더라구요. “그래 기도하마. 그런데 네가 꼭 기도해야 해” 그렇게 조카와 대화를 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곧 죽을병에 걸렸던 나사로 때문에 두 여동생,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급히 초청합니다. “예수님, 빨리 오십시오. 제 오라버니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곳에서 더 머무시고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베다니촌의 그 집으로 다가오셨습니다. 그 장례식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지요. 나사로는 무덤에 있고요. 예수님이 다가오셨건만 그들의 기다림은 죽어 있었습니다. 좋은 표현으로는 그들의 마음이 잠들어 있었어요. “예수님 너무 늦게 오셨습니다. 오라버니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시체에서 썩은 냄새도 납니다.” 환경적으로는 땅끝이고 늦은 것 같지만 주님은 제시간에 그 집에 다가가신 것입니다. 기도하다가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시간까지는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을 기다리고 주님의 지시사항을 기다렸던 엘리야를 생각해보세요. 주님의 명령을 따라 그릿 시냇가에 숨었다가 시돈 땅 과부 집에서 삼 년 동안 있다가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 팔백오십명과 영적 전투를 할 때에도 엘리야는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일곱 번째 기도했을 때 손바닥 만한 구름이 비쳤습니다. “이제 되었다.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구원의 손길이다.” 그러나 일곱 번 기도했어도 그런 구름이 안 비쳤다면 또 무릎을 꿇고 기도할 엘리야였습니다. 기도하는 것 중요하지만 기다림까지 이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12장의 그 종은 밤중에 주인님이 언제 오실까 깨어 기다립니다. 밤 이경에 오실지 삼경에 오실지 아니면 비 오는 날 수요일 날 저녁에 오실지 주님을 기다리고 추구하는 마음이 강한 주님의 종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이나 이 세대에서는 기다림이 없어요. 언약적으로 굳게 서서 사랑하는 주님을 기다리고 주님의 명령을 기다리고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며 이 전도하기 좋고 찾아가기 좋은 5월을 잘 보냈으면 합니다.
둘째로 살아 있는 신앙생활은 그리움이 살아 있습니다.
그리움이 살아 있는 성도!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요즘 사람들은 기다림도 모르지만 그리움은 더더욱 모르는 것 같아요. 요한복음의 말씀을 우리 천국 가신 목사님은 그리움의 책이라 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부활하여 승천하신 지 육십 년 가까이 되었을 때 사도 요한은 주님을 참으로 그리워하며 성령님의 감동으로 요한복음을 한 자 한 자 기록했습니다. 요한복음은 어느 말씀을 보더라도 주님이 그리워집니다. 특히 요한복음 20장에 나오는 전날에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갔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인 줄 모르고 그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이 너무 그리워서 그 무덤에 찾아간 것이지요. 제자들은 두려워 숨어 있었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그리움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 새벽에 우리 주님은 부활의 첫 대면자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 주셨지요. 그리고 “마리아야”라고 불러주셨습니다. 빌립보서 말씀에 보면 빌립보를 떠난 사도 바울 선생님이지만 그 빌립보의 아름다운 성도들을 그리워하는 사도 바울 선생님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만 빌립보 성도들을 보고 싶고 그리워할까요? 빌립보 성도들도 역시 떠나가신 사도 바울 선생님을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천국적인 관계입니까? 사도행전 1장과 2장에 우리 예수님을 못 박아 죽였던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주님을 그리워하는 백이십 명의 주님의 제자들, 처음에는 일시에 오백 명이 주님을 뵈었으니 처음에 오백 명으로 시작했을지 몰라요. 그러나 삼백팔십 명은 제 갈 길로 가버렸고 백이십 명의 주님의 제자들만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9절에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요한이 사도이지만 형제라고 하는 말씀이 얼마나 마음에 사무치는지요. 천국 가신 목사님과 전화 통화했을 때 가끔 “목사님” 그렇게 부르면 “내가 무슨 목사야? 형아지” 고쳐주십니다. “네, 형님” “그렇게 불러야 가깝지, 목사라 부르면 멀게 느껴져” 한 삼십 년 전 즈음으로 기억이 됩니다. 아래쪽 형제 교회를 섬기고 있을 때 우리 교회로 잠깐 우리 목사님과 형제들을 뵈러 올라온 적이 있었어요. “오늘은 장사하러 안 간다.” 저더러 “저 트럭에 타고 내가 데려가고 싶은 곳이 있으니 같이 가자” 그러셨습니다. 우리 목사님이 그 당시 자주 찾으셨던 빈들판의 한 장소였습니다. 그러시면서 “일단 우리 잠 좀 자자.” 한숨 좀 쉬시고 말씀해주시고 함께 기도했던 시간이 아련히 떠오릅니다. 주님이 그리워서 우리 성도들이 찾는 곳은 이 땅에서는 빈들판뿐입니다. 달리 위로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다른 곳에 기웃거리지 마십시오. 빈들판으로 직행하시면 그리움이 살아납니다. 우리 각자의 빈들판이 날마다 살아 있어야 주님과 형제들에 대한 살아 있는 그리움을 지킬 수 있습니다. 어둠은 이 빈들판에 가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을지 몰라요. 지난번 제가 말씀드린 작은 여우처럼 말입니다. 작은 여우 많이 잡으셨습니까? 여우 목도리들을 하고 오셨어야 하는데 더운 날씨 관계로 잡아서 다 집에 놔두고 오셨는지 목도리 하신 분은 안 보이네요.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사도 베드로는 점심시간 때 아래쪽에서는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기도하러 지붕 위로 올라갔습니다. 낮 12시에, 어떠한 마음일까요? 어떠한 문제가 있어 기도하러 올라간 것이 아니라 주님이 그리워서 지붕 위에 올라간 줄 압니다. 디모데후서 1장에 보면 사도 바울 선생님이 축복하는 한 형제가 나옵니다.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습니다.” 부지런히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가까운 거리가 아닌데 오네시보로 형제가 말입니다. 에베소에서도 사도바울 선생님을 섬겼다 했습니다. 그리움 속에 찾아간 사도 바울 선생님께 기쁨이 되어주고 위로가 되어주고 형제와 형제가 그리움 속에서 만나는 것,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 박수호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괴산에서 연약한 몸을 가지고 계실 때 주님을 그리워하시고 형제들을 얼마나 그리워하시는지 병원에서 마지막 모습도 기억이 납니다. 몸짓으로 손짓으로 무엇을 만들고 있었어요. 그래서 “무얼 만드세요?” 성우 엄마가 물어보았을 때 “빵 만들고 있어. 식구님들이 곧 오시잖아. 빵 드려야지” 헛소리라고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형제에 대한 그리움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무의식중이라도 섬김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과 제가 그곳에 심방 했을 때 눈물이 많이 났습니다.
기다림과 그리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대단한 신앙생활이라 생각이 듭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지만 죽은 자가 아니라 죽은 자 같으나 살아 있는 성도,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 연약한 자 같으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성도, 이것이 우리의 대명사가 되었으면 합니다. 삐약삐약하지 마시고 살아 있는 신앙생활, 주님과 함께 이기고 또 이기더라! 영광에서 영광으로, 믿음에서 믿음으로 힘있게 섬겨 가는 살아 있는 신앙생활하는 귀한 식구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