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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자 평론 박양근 최민자는 이름만으로도 수필독자들의 주목을 받는다. 상재된 3권의 수필집은 남다른 평가를 받았고 최근 작품집인 열정과 냉정 사이로 구름카페문학상을 거머쥐었다. 수필잡지는 그의 작품을 스타작품으로 싣고 평자들은 그의 글에 주목한다. 당사자가 “다만 쓸 뿐”이라고 침묵할수록 그의 글은 초대의 대상이 된다. 시적 산문, 논픽션적 짧은 산문이 번식하는 오늘날, 그는 자신의 손도장을 찍은 수필을 고집스레 이어오고 있다. 그런데 그가 이번에는 「하느님의 손도장」을 위시한 신작 5편을 「다만 쓸 뿐」이라는 접시에 담아 수필에 대한 쟁론이 분분한 시기에 독자를 찾아왔다. 신작에 대한 기대치는 작가와 독자와 평자 사이에 항상 독해의 층을 만들기 마련이다. “수필의 좌표와 진로를 한번쯤 더듬어보려는” 취지를 지닌 작품이라면 수용의 관점은 더욱 다를 수밖에 없다. 평자는 작품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 가능성을 두 방향으로 좁혔다. 재미와 대중성이라는 세류를 의식하여 세팅한 글인가, 아니면 “다만 쓸 뿐”을 표방한 출사표인가. 평자는 그의 작품이 후자이기를 기대하므로, 나아가 후자이어야 함으로 조용히 읽기 시작하였다. 요즈음 수필계에서는 가볍게 재미있게 쓰고 읽는 유행이 번져가고 있다. “어느 꽃이 더 아름다운지 줄을 세우고 가르는 일”마저 만연하고 있다. 최민자의 신작은 이러한 이상 현상에 주의경보를 보낸다. 심미감과 재미라는 표준화의 논쟁은 수필이 변화의 대상인가 주체인가라는 논의를 일으키면서 새로운 담론을 요청하고 있다. 그것은 현상학이라는 새로 읽기이다. 현상은 우리의 시계 안에 놓여 있는 자연 현상, 사회문화, 그리고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을 지칭하는 용어다. 삶을 기록하는 자아 반영적 글쓰기인 수필은 그 현상을 담아내는 또 다른 현상체이다. 그런데 “사실 자체로”라는 인습 때문에 수필이 지녀야 할 “어떤 의식으로의 지향성”을 경시해왔다. 수필을 체험의 그림자라 하지 않고 목격한 현상의 내적 구조와 절차를 체계적으로 기술하는 글쓰기라 정의하는 이유도 자연과 사회에서 일어나는 제반 현상을 자아 반영적으로 구현할 때 좋은 수필이 생성된다는 데 있다. 혹자는 수필은 감성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현상학에서 논하는 감성은 수동적인 접촉에 불과하다. 그 무엇을 인식하려는 지향성인 노리에스가 작품성의 우열을 결정하는 척도라는 뜻이다.
「하느님의 손도장」은 배꼽의 현상을 다각도로 성찰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배꼽이 무엇인가를 부단하게 탐색하면서 배꼽의 형상과 현상을 결속시켜 나간다. 서사연하는 수필과 달리 대상의 본질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일상이라는 용기에 담겨지지 않고 작가의 자의식(ego)을 무대로 하여 배꼽이 스스로를 보여주는 언술을 지속하게 된다. 배꼽의 지향성은 미용실 아가씨의 배꼽 피어싱에 “질끈 눈을 감아버리는” 시점에서 시작한다. 눈을 감으면 글을 읽을 수도 쓸 수도 없다. 하지만 최민자는 눈을 감음으로써 배꼽의 형상을 더욱 다채롭게 말한다. 그 비법은 단순하다. 자연 그대로 보이는 배꼽의 현상을 콜라주 기법으로 묘사하면서 배꼽과 삶과 우주라는 세 꼭짓점을 일주하는 형국을 취한다고 하겠다.
배꼽은 시원(始原)의 흉터, 임무가 종료된 과거완료의 매듭이다. 우리 생애 최초로 치러 낸, 서럽지도 않은 이별의 흔적이다.
배꼽은 “옛 우물과 분화구”와 “단전(丹田)의 랜드 마크”를 거치면서 의미의 다의성을 확장해간다. “시원의 흉터”라고 이름을 붙이는 첫 작업은 탈일상성의 출발점으로서 이러한 추이를 다지기 위해 작가는 서술자보다는 내포화자로서 “우리”라는 1인칭 복수를 빌어 독자와 교감하고 의미의 단락 쌓기를 통해 배꼽의 이미지와 의미를 확대하려고 노력한다. 즉, 그는 작품 수용력과 문학적 언어력을 지닌 독자를 찾는 글쓰기라는 순례를 시작하는 것이다. 최민자에게 배꼽은 인식력을 통합하는 구실을 한다. 배꼽은 지리학, 신학, 해부학은 물론, 신화라는 인문학적 사고를 촉진시키므로 인간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줄줄이 생산된 물건”이 아님을 확인하는 기표가 된다. 그 결과, “우리”가 된 작가와 독자에게 「하느님의 손도장」은 인간애와 생태성을 학습하는 상호 텍스트가 된다. 나아가 배꼽이 생명 탄생을 상징하는 “비밀스러운 입술”로 승화될 단계에 다다르면 배꼽을 기저로 하는 은유와 환유는 스스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간다. “생명의 원류, 사랑의 흔적, 섹시 아이템, 시들어 떨어진 꼭다리, 화인, 신의 마지막 무인(拇印)……” 등의 다채로운 담론은 이 작품을 전기수필로 정의하는 요소가 되지만 작가는 작품속의 행위자가 아니므로 허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배꼽이라는 “섹시 아이템”은 종래 “남녀상열지과”로 발전한다.
배꼽은 어쩌면 삼신할미가 볼기를 찰싹 쳐 세상 밖으로 내치는 순간, 간절한 마음으로 눌러 찍은 신의 마지막 무인(拇印) 같은 게 아닐까. 불신과 편견이 가득한 지상을 향해 떨어져내리는, 털도 없고 비늘도 없고 사나운 뿔도, 날카로운 이빨도 갖추지 못한 천둥벌거숭이가 걱정스러워, 신은 그렇듯 복부 한가운데에 ‘’자나 ‘’자와 같은 보증의 손도장을 마침표 삼아 꾸욱, 누르셨을 것이다. ‘메이드 인 헤븐’에 불량품은 없을 터.
신은 생명의 창조주이다. 최민자는 창조주라는 신분에 생명의 판정관이라는 지위를 덧붙이고 신의 이름을 빌어 모든 생명체에 ‘메이드 인 헤븐’이라는 손도장을 찍는다. “천둥벌거숭이”의 탄생 과정은 이처럼 인간에 대한 따뜻한 감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사회적 편견과 신분의 차이가 근원적으로 제거되면서 그의 배꼽론은 동양의 삼신할미와 서양의 창조주까지 동등시하는 유종의 미를 거둔다. 미용실 아가씨의 배꼽이 신화적 해석의 대상이 되었다. 인간은 “검품 과정을 너끈히 통과해 낸 천상의 특제품”이라는 신화성에 동참하는 독자가 그의 수필동지가 된다. 이러한 변환은 배꼽을 개체가 아니라 현상의 일부로 해석하려는 작가의 지향성 덕분이다. 수필이 독자에게 전달할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그것은 범상한 사물을 비범하게 읽어 낼 수 있는 인식력과 ‘내’가 아닌 ‘우리’로 나아가는 소통일 것이다. 「하느님의 손도장」은 그 덕목을 중심테제로 삼고 있다.
「골목」은 공간의 현상과 그 지향성을 재확인해 준 작품이다. 서사문학에서 등장인물을 설정하는 방법에는 말하기와 보여주기가 있다. 말하기는 등장인물의 행동과 운명을 전지적 시점으로 기술한다면 보여주는 기법은 말과 행동으로 등장인물이 자신의 성격과 심리를 스스로 보여준다. 서사수필의 경우, 수필가는 서술자와 행위자를 겸하게 되므로 주변상황을 왜곡하거나 행위를 윤색하려는 유혹에 빠져들기 쉽다. 그러나 「골목」의 경우는 골목이 타자이자 대상이기 때문에 보여주기 기법의 문제점에서 무난하게 벗어날 수 있다. 골목은 도시의 스트리트와 이항대립을 보여준다. 그곳에서는 쇼핑거리와 명품점을 찾을 수 없고 대량소비와 향락의 배설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구멍가게, 놈팡이, 빚쟁이, 선술집들만 줄이어 있다. 단락마다 부여된 골목의 자질을 요약하면 소박과 은둔, 은폐와 연결, 전통과 서민성과 유한성 등으로 의미망을 짤수록 실재 이상의 골목으로 발전해간다. 어느덧 ‘웅숭깊고 되바라지지 않은 샛길’이 된 골목은 “눈부시지 않아서 좋다.” 「하느님의 손도장」에서처럼 언어가 조립되면서 ‘길’의 원형이 생성된 것이다. 「골목」이 어떻게 짜여 지고, 어떤 가치성으로 나아가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언어에 대한 개념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문장의 기본 단위는 단어이다. 단어는 계열적 관계와 통사적 관계로 양분된다. 계열적 관계란 ‘골목’을 대체할 수 있는 ‘길, 거리, 소로’ 등의 단어를 말하며 통사적 관계란 주어와 술부와의 상관성을 말한다. 이 작품에서 계열적 관계와 통사적 관계는 오감과 감수성을 작품에 입력시키는 틀로 자리한다. 작가에게 눈부심은 가식과 허식이므로 “골목은 눈부시지 않아서 좋다”는 통사관계는 눈부시지 않은 사람과 소박한 글과 검소한 모임이 좋다는 의미로 확장되어진다. 이것이 「골목」이 ‘우리’ 독자에게 전하려는 진의라 하겠다. 「하느님의 손도장」에서 배꼽에 눈을 감았던 작가가 눈을 크게 뜨고 골목 풍경을 구석구석 찾아다니는 현상도 설명이 가능해진다. 최민자의 언어적 지향성을 찾으려면 줄거리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골목은 좁다랗고 내성적인 공간으로서 낯선 사람들에게 속 풍경을 드러내기를 꺼려하며 실핏줄처럼 이어져 있으면서도 서로를 격리시켜 준다.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그곳은 약한 것을 강하게, 강한 것을 약하게 만들다 못해 골목 사람까지 닮은꼴로 만든다. 골목은 그곳 사람과 운명을 함께 하므로 구절양장이라는 동질성을 갖게 된다. 골목은(현상 자체이므로) ‘사람처럼 병들고 늙는다.’ 은유와 환유가 사물의 계열성을 넓혀줌으로써 최민자의 골목은 살아있다. 인간과 함께 운명도 나눈다. 인간 사회의 축소판으로서 골목은 어둠, 협소함, 폐쇄성, 무질서, 빈곤이라는 전근대성과 소박성, 서민성, 다정다감이라는 인본주의를 동시에 표방한다. 전자보다 후자에 더 큰 비중을 지닌 골목은 혈과 육의 공간으로 구축된다. 그렇게 마무리되는 이유는 수필의 결미는 화해이어야 한다는 당위성에서가 아니라 작가가 골목의 근원성을 더 중시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골목이 사라진 도시는 음영이 없는 얼굴처럼 각박하고 살풍경해 보인다. 말초 구석까지 양분을 전하고 산소를 공급해주는 모세혈관이 있어 순환이 되는 육신과 같이, 미세한 골목들이 손금처럼 퍼져 있어 도시 또한 소통의 활기를 얻는다. 풍성한 이야깃거리와 거친 삶의 에너지가 뒤섞이고, 사람 사는 냄새와 사람 사는 소리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오래 늙은 골목들이 문득 그립다.
최민자는 배꼽에 ‘’을 찍었다면 이번에는 골목은 ‘도시의 모세혈관’이라는 ‘’을 붙인다. 그러나 기대치와 달리 현대독자들은 골목의 순기능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다. 실핏줄과 섬유질로 구성된 인간의 몸도 골목성을 지니고 있음을 모르는 까닭이다. 이러한 도시인에게 무엇을 더 기대할 수 있는가. 그래서 그는 늙은 골목을 더욱 그리워하게 된다. 「세상은 타악기다」는 신명의 소리라는 원형을 탐색하는 과정이 그려진 작품이다. 두드리는 행위는 흥과 멋을 부리는 유희이므로 문장의 어조는 경쾌하고 즐겁다. 작가는 라디오 음악에 맞추어 부엌 물건들을 하나씩 두드리다가 신명을 이기지 못해 목성을 보태기도 한다. 마침내 집안은 거대한 소리의 성운으로 변화해간다. 소리의 질량이 의미라는 질적 전환을 일으킨 셈이다. 독자가 관객으로서 신명과 율동에 동참하려면 유의할 점은 즐거움과 재미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즐거움이 행위자에 내재한다면 재미는 대상이 지닌다. 더구나 작품에 대한 작가와 독자의 기대지평도 다르기 때문에 물건을 두드리는 동기는 달리 이해될 여지가 많다. 구분하면, 억제된 감정을 폭발시키려는 자위행위가 아니면 율동으로 소리의 현상을 탐색하려는 내적행위가 그것이다. 전자가 “사는 게 버거워지니 글이라도 가볍게 쓰고 싶다” 는 언술로 뒷받침된다면 후자는 “침묵 사이에 잠들었던 소리들이 불려 나온다”는 현상학으로 설명된다. 이로써 문장 언술에서는 가벼움을, 내용 의미에서는 무거움을 추구해 나가게 된다. 최민자의 수필을 텍스트로 삼을 때, 제기되는 논쟁의 하나는 가벼운 글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라는 의문점이다. 그 답변을 위해 「세상은 타악기다」는 행위예술의 기법을 도입한다. 작품을 들여다보는 정통독자라면 행간의 글 읽기에서 전위예술가의 난타 공연을 상상할 수 있다. 작가는 부엌 싱크대 앞에서 평상복 차림으로 여러 물건을 두드리는 연기를 보여준다. 공연 제목은 ‘세상은 타악기다’이다. “사는 게 버거워 글이라도 가볍게 쓰고” 싶어 사색이 배재된 유희를 하고 그것을 글에 투영시킨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다. 1인 무언극 끝에 다다른 곳은 소리의 진앙이고 그것은 세상 자체가 타악기라는 개안이다. 가벼운 소재 속에 무거운 주제를 입력시킨 기법이 돋보인다랄까. 이러한 지향성은 그로서는 어쩔 수 없다. 수필은 자아반영의 글쓰기이니까. 어쨌든 우주는 거대한 소리막이라는 그의 귀결은 사실 이상의 진실을 보여준다. “세상의 사물들이 그렇게 다양한 소리를 품고…… 리드미컬한 흥과 신명이 숨어살고 있다”는 진실이 그것이다. 모든 사물과 모든 소리를 포용하는 세상에서 소리를 하나씩 불러낸 행위를 보여주는 기법은 드라마틱하다. 그 기법은 서사의 보여주기에 일치한다. 수필의 보여주기가 소설의 보여주기와 다르다면 수필은 개인의 삶 외에 자연의 규칙과 우주의 법칙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회고에 치우친 서사수필은 이 점을 놓치기 쉽다. 악기 밖에서가 아니라 악기 안에서 연주를 한다는 소리내기의 본성은 작가가 말하려는 요체와 작품의 혈(穴)에 해당한다.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사물 밖에서 두드리지만 세상의 소리를 들으려면 세상 안에 자리하여야 하는 게 아닌가.
나만 사물을 두드리는 게 아니라 사물도 나를 두드리고 있었음을, 만물은 그렇게 서로의 가슴을 두드리며 살아가는 것임을, 묵언의 북채가 화들짝 일깨운다.
소리에 대한 인식은 최종적으로 인간과 사물간의 간격마저 제거하게 된다. 사물과의 소통은 접근, 접속, 접합의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지향성 덕분에 작가는 ‘그대는 묵언의 북채를 가졌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내 신명과 사물의 정령이 어울리려면 “흥과 신명” 외에 “입 다문 것들을 위한 해원(解寃)의 춤사위”가 있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세상은 타악기다」는 결국 배꼽에서 제시한 인간애, 골목에서 제안한 소통성을 보다 확대하여 무생물까지 생명주의의 대상으로 삼아야한다는 담론을 우의화한다. 소리미학의 방점이 이 작품으로 찍혀졌다고 말한들 무리가 없다.
「허물벗기」와 「제 꿈 사실래요」를 함께 논하기로 한다. 얼핏 읽으면 두 작품 사이에 일치점을 찾기 어렵다. 전자가 묵은 노트 속에 적힌 자아의 변화(渙)와 세월에 대한 환(幻)의 기록이라면 후자는 길몽과 로또복권을 사려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일상 소재와 과거의 반추라는 구도에서 두 작품은 유사하다. 그러나 논쟁의 중심에 놓이는 작품은 「제 꿈 사실래요」다. 이 작품을 앞서 다룬 작품들과 비교하면 읽는 재미는 고조되지만 구성과 언술의 밀도가 느슨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 이유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다양한 수필작법을 보여주려는 작가의 취지 때문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두 번째로는 흥미롭게도 일반독자를 위한 배려일 수 있다는 점이다. 작가의 배려는 내포독자와 실제독자를 구분하는 데서 비롯한다. 비유하면 자신의 영토에서 생산된 특산물이 아니라 독자가 선호하는 기호품을 가져온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다수의 독자는 쉬운 읽을거리를 원한다. 작가의 입장에서 보아도 재미는 흥행의 조건에 속한다. 재미가 인간의 본능이고 스토리텔링의 전제조건이지만 만일 서사의 지향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유머의 진의는 훼손되기 쉽다. 최민자는 누구보다 그 이해득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그는 독자의 심미적 능력에 따라 이중적 해석이 가능하도록 풍자라는 장치를 끼워 넣었고 「제 꿈 사실래요」가 희화성을 지향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평자의 오버센스이기를 바라지만 이 작품에는 정통독자와 일반독자를 구분하려는 알레고리가 깔려 있다. 그 점을 밝히기 위해 꿈의 모티프인 황금카펫의 상징성을 살펴보기로 한다.
당초문양이 투각된 장방형의 커다란 가방을 후배는 내 앞에서 조심스럽게 열었다. 양편으로 열린 케이스가 금세 킹사이즈 정도의 침상 받침대로 서더니, 받침대 사이에 더 할 수 없이 섬세한 문양이 세공된 황금카펫이 펼쳐졌다. 그 휘황함이라니.
꿈속의 황금카펫은 두 가지 소망으로 갈라진다. 하나는 예인(藝人)이라면 누구나 밟고 싶은 명예의 자리이고 다른 하나는 세속인이 원하는 재물의 횡재다. 황금카펫을 꾼 길몽은 양가적 충동성을 발휘한다. 최민자는 작가로서 정신적 호사를 누릴 것인가, 아니면 인간으로서 물질적 욕망을 탐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기로에 선다. 전자는 최민자식 수필쓰기를 고수하는 지향성이며, 다른 하나는 독자의 기호에 맞춘 수필로 전향하는 것이다. 전자를 택하면 “답답하고 쓸쓸한” 고독을 이겨내야 하지만 후자를 선택하면 많은 대중독자가 주어진다. 그런데 풍자와 역설의 글쓰기를 은밀하게 꾀하는―수필의 장르적 특징은 다양성이라고 믿는― 작가는 로또복권을 미적 긴장미를 고조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재미를 풀어내는 모티프로 삼는다. “일주일 간의 요행수”라는 테제를 선택한 그의 동기는 결국 다른 데 있다. 일반독자들이 읽도록, 동시에 “그들만의 축제”를 은밀히 희롱하기 위함이다. 여기에 “말만 잘하면 그냥도 드리는데”를 음미할 필요가 생긴다. 그의 권유는 방백의 형식으로 처리된다. 방백은 관객에게 던지는 주인공의 독백으로서 무대 위의 다른 배우를 무시한다. 최민자의 방백도 진정한 수필동료를 찾기 어렵다는 쓸쓸함과 답답함을 은연중에 나타낸다. 이로써 「제 꿈 사실래요」는 작가와 독자 간의 소통의 부재를 희화하는 구조를 지니게 된다. 이점을 간파하지 못하는 일반독자는 재미라는 “방향으로 달리는 누떼”에 끼어든 작가의 외양만 바라본다. 그리고 그의 언어유희에 속임을 당한다. “말만 잘하면 그냥도 드리는데”는 본질적으로 싸구려 자본시장과 요행주의에 대한 경고로서 “사는 일의 궁극은 행운이 아닌 행복”이라는 작가의 진의를 역설적으로 부각시킨다. 작가가 바라는 독자는 숨겨진 의도를 찾아낼 수 있는 문학적 언어 능력을 충분히 갖춘 소위 독자수용비평에서 말하는 정통독자다. 신포도의 우화를 현대화한 기법을 제대로 풀이하지 못한 책임은 작가의 이중서술에 있지 않다. 작가의 지향성을 간파하지 못한 독자에게 있을 따름이다.
「다만 쓸 뿐」은 최민자의 문학적 추이를 밝혀주는 방문(榜文)이다. 평자는 앞서 이 작품은 작가의식을 담아낸 용기라고 비유하였다. 그릇은 주인의 인품과 안목을 보여주는 매체이므로 여타 작품보다 이 글을 앞서 숙독하여야한다. 그러나 보통 독자들은 먹을 것에 먼저 눈길을 돌리기 십상이다. 작가는 오늘의 수필현상을 불안스럽게 지켜본다. “어느 것(수필)이 윗길이고 우선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혼란과 “유려한 문장과 윤색해 낸 신변잡사”를 둘러싼 논쟁과 “신인작가를 추켜세우는 박수갈채”의 집단의식(集團儀式)을 지켜보면 홀로 쓸쓸해진다고 고백한다. 그 심사는 글을 쓴 후든 이전이든 변함이 없다.
……안고수비(眼高手卑)라, 뜻대로 그려지지 못한 것 같다. 이것이 내 한계인 것 같다고, 더는 뾰족이 내놓을 것도 없다고, 훌훌 털고 나니 차라리 후련하다. 허용된 지면을 빌어 수필에 대한 개인적 의문들을 제기해본 것은 아직도 안개바다를 헤매고 있을 문학 동지들과 함께 우리 수필의 좌표와 진로를 한번쯤 차분히 더듬어 보고자 하는, 절절한 우의와 충정에서였다.
“안개 바다의 표류”는 오늘날 한국수필의 병폐를 우회적으로 지적하는 상징으로 매김된다. 은유는 구체어보다 큰 파급효과를 가진다는 점에서 수필의 진로 찾기는 그만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수필의 진로를 더듬는다면 해법이 필요하다. “줄을 세우고 품을 가르는 유행”과 “일사불란한 질주”에서 초연할 수 있는 처방은 심미적 논쟁거리가 아니라 수필의 당위성에 관한 아젠다이지만 이러한 장(場)이 마련되어야하는 이유는 수필가의 정체성이 수필의 격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그의 해법은 “나는 나의 글을 그는 그의 글을 쓰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은 “언 땅을 딛고 찬바람을 맞으며 향기를 길어 올리는 꽃” 같은 수필을 지향한다. ‘혼신의 뜨거움’, 이것이 최민자의 지향성을 끌어가는 동력이고 내공이다. 그래서 「다만 쓸 뿐」이 작품으로 논의되어야 하고 그 넉 자가 수필계에 던지는 파장은 적지 않은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하면 최민자의 수필은 대상에 대한 내적 지향성의 결정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특히 인간계와 세계를 엮어내는 수필은 경험의 서술보다는 그 양자 간에 이루어지는 현상을 분화하여 재구성할 때 탈시간성과 탈공간성을 지니게 된다. 이를 위해 배꼽을 응시하고, 실핏줄 같은 골목을 누비고, 세상을 타악기로 두드리는 작가는 제반 현상을 인식의 망으로 엮어나간다. 최민자의 수필을 분석하면 수필의 서술 구조는 자아반영적일 뿐만 아니라 언어의 의미망처럼 작품 하나하나가 작품망을 구성할 때 고유한 은유와 서사와 해학을 완성한다는 믿음을 더욱 갖게 된다. 문화현상이 다양하고 혼란스러울수록 작가의식으로서의 노리에스가 자신의 문학영토를 공고히 하고 사회에 비전을 던지는 해법이 요청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