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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8:4).
본문을 해석하는 열쇠는 “율법의 요구”(要求)가 무엇인가를 규명하는데 있습니다. 여기에는 신학적(神學的)인 면과, 윤리적(倫理的)인 면이 함께 들어있다고 보아야만 합니다. 4절이 놓여 있는 위치(位置)가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 4절의 신학적인 면은 3절과 결부시킬 때에 분명해집니다. “율법이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3)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요구를 폐하고 행해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행해주셨다는 것입니다.
㉡ 4절의 윤리적(倫理的)인 면은 5절과 결부가 되는데,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시기 위해서 이처럼 “하나님이 행해주셨다”면, 이제 우리도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입니다.
①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4) 합니다.
㉠ 이는 해석상 쉬운 구절이 아닙니다. 서론에서 언급한 대로 이 말씀에는 신학적인 면과, 윤리적인 면, 양쪽에 다 결부되어 있다고 보아야만 합니다. 먼저 신학적인 의미인데, 율법의 요구”, 즉 율법이 무엇을 요구(要求)하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 율법은 “죄 값은 사망”이라 하신 대로 죄인을 법대로 처벌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4절이 3절의 연속(連續)이라는 점을 유념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율법의 요구를 묵살하신 것이 아니라, “곧 (우리)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심”(3)으로, 율법의 요구를 들어주셨다는 문맥(文脈)입니다.
㉢ 이렇게 행해주심으로,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4하), 즉 우리를 처벌해달라는 율법의 요구가 충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학적인 면입니다.
② 이점에서 어떤 분들은 “율법”도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인데, 그런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대신 죽음에 내어주셨다는 것이 선득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저는 이점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고심하다가 그 빛을 다니엘서와 에스더서에게 받게 되었습니다. 다리오 왕은 어떻게 해서라도 다니엘을 구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간신배들이 무엇이라고 압박했습니까? “메대와 바사의 규례를 아시거니와 왕의 세우신 금령(禁令)과 법도는 변개(變改)치 못할 것이니이다”(단 6:15) 했습니다. 그래서 법대로 다니엘을 사자 굴에 던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 아하수에로 왕도, “왕의 이름을 쓰고 왕의 반지로 인친 조서는 누구든지 취소(取消)할 수 없음이니라”(에 8:8) 하고 말합니다. 하물며 만군의 여호와께서,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하고 세우신 금령(禁令)의 권위이겠습니까? 1:32절에서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정하신 법대로 시행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③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율법의 요구를 묵살하시거나 폐하여 버리실 수가 없는 분이십니다.
㉠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만 되시는 것이 아니라, 공의의 하나님도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시지만, 법은 폐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만일 한번 세우신 말씀을 폐하거나 변개(變改)하신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聖經)도 언제 변개될지 모르므로 믿을 수가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요구에 응하여 주셨습니다. 응하여 주시되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보내어 우리 대신 죽음에 내어 주셨던 것입니다.
㉡ 이 장면을 한번 영상으로 그려보십시오. 율법이 요구한 것은 죄인(罪人)인 우리들을 처형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사 그를 우리 대신 내어 주셨습니다. 그 때 율법이 어떠했으리라고 여겨지십니까? 놀래서 기절했을 것입니다.
㉢ 5:10절에서는,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배신한 배은망덕한 자, “저희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1:28) 원수(怨讐)들을 위해서 자기 아들을 대신 내어 주시다니, 율법은 기절초풍을 했을 것입니다. 놀랜 것은 율법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천사들도 하나님 속에 감추었던 비밀의 경륜(벧전 1:12, 엡 3:10) 앞에 경탄(驚歎)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④ 왜냐하면 범죄 한 천사들은 용서치 아니하시고(벧후 2:4),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주려 하심이라”(히 2:16) 하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천사(天使)들의 범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율법의 요구에 응하여 인간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4)이라는 신학적인 의미를 인식하셨습니까?
㉠ 하나님의 사랑의 망극하심을 이제 아시겠습니까? 죄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피 흘림이 없은즉 사유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에는 인간의 죄를 위하여 그림자로 짐승이 대신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속죄제로는 율법의 요구에 응하는 바는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드리는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⑤ 3:26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곧 이 때에” 하나님의 공의도 만족히 여김을 받으셨으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고 여겨주실 수가 있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즉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셨던 것입니다.
㉠ 우리의 죄를 사하신 것만이 아니라, 의롭다고 여겨주신 것은 율법의 요구를 폐하시고 행해주신 일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신 후에,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 아주 합법적인 것이었습니다.
㉡ 이점을 3:31절에서는,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권위를 최고로 세워 주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이 제정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 하신 말씀 속에는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었다, 죄 값이 다 청산이 되었다는 뜻도 함의되어 있는 것입니다.
⑥ 이제 4절의 윤리적(倫理的)인 면을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육신(肉身)을 좇지 않고 그 영(靈)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한, 4절이 놓여 있는 위치(位置)는 참으로 절묘합니다.
㉠ 앞으로는 “하나님은 하시나니” 한 3절과 결부가 되어 있고, 뒤로는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한, 5절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 5절에는 “육신과, 영”이 대조(對照)되어 있습니다.
㉮ “육신을 좇지 않고” 한 “육신”은, 3절에서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다” 한, “육신”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이 육신은,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 도다”(7:19) 한, 연약(軟弱)한 육신인 것입니다.
㉯ 그런데 이제는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영”(靈)은, 우리를 해방시켜주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聖靈)(2)의 “영”이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9하) 한 “영”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라는 말은,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 할지니라”(7:6) 한 말씀과 같은 뜻인 것입니다.
㉢ 그러므로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4중)라 한 “행(行)함”을 주목해야만 합니다. 이 “행함”은 현재시제로, 계속적으로 행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믿음과, 행함”이 둘이 아니라 하나이듯이, 하나님이 행해주신 교리(敎理)와, 인간이 행해야하는 윤리(倫理)는 떼어놓아서는 아니 되는 하나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떼어놓아서는 아니 된다는 말씀입니다.
⑦ 우리 주님은 율법의 요구에 응하여 십자가만을 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육신하신 생애 전체가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삶이었다는 점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 “할례 할 팔일이 되매,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눅 2:21, 22) 합니다.
㉡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하는 세례 요한의 말에,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4:14, 15) 하시고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결례나 세례를 받으셔야할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15:8) 하시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복음전도자들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하고 증거하면서, 이에 상응하는 의로운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칭의”교리가 어떻게 견고(堅固)하게 설 수가 있겠습니까?
⑧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셔서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해주심으로,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게 하신”(7:4상) 목적은,
㉠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7:4하) 하심에서입니다. 우리들이 전에는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은(6:21) 자들이었습니다. 에베소서 2:10절에서도,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行)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십니다.
⑨ 이점에서 분명해야할 점은 그리스도인들이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할 수 있는 원동력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주신”, 대속적인 죽으심, 즉 복음으로만이 가능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은 칭의(稱義)만이 아니라, 성화(聖化)도 주지 못한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인 율법에서 해방된 후에야 비로소 성화의 삶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점을 사도는 7:1-6절까지에서, “율법”이라는 남편 밑에서 살 때의 상황과, 율법에서 벗어나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와 합하여 한 영을 이룬 후의 삶을 대조해서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얼른 생각하기에는 엄한 율법 하에 있을 때에 성화가 이루어 질 것 같지만, 그 상태의 삶은 공포와 두려움과 정죄감에 빠져 있던 지옥 같은 삶이었던 것입니다.
㉡ 남편이 돌아오는 대문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안색이 하얗게 질리는 그런 공포의 생활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시되 죽기까지 사랑하여 주신 주님과 두 몸이 합하여 한 몸을 이루듯이 주와 합하여 한 영을 이룬 후에는 매일 매일이 신혼처럼 기쁨과 감사와 감격의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 그러니까 7장의 사람은 자력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고 무진 애를 쓰지만 할 수없는 상태를 대표하는 것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할 수 없는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삶과 죽음을 통해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주심으로,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하는” 성도들도 비로소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⑩ 그러므로 칭의와, 성화는 항상 함께 간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바입니다.
㉠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에게는 성화가 뒤따르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0절을 보십시오.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합니다. 의로움뿐만 아니라, 거룩함도 함께 가져다주십니다.
㉡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영을 좇아” 살아가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8:13절에서는,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십니다. 혹시 실수하고 넘어져도 그분께서는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고 다친 상처를 치료해 주시고 싸매어 주십니다.
㉢ 전에는 잘 하려고 하면 할수록 손이 떨리고 실수연발이었으나, 이제는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기 때문에 더 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전에는 의무감에서 벌을 받을까보아 두려워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일까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하게” 하는 것은 오직 복음의 능력, “사랑의 강권”(고후 5:14)함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