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비밀의 문을 여는 열쇠
고향에서 산이란 산은 모두 찾아 올라갔던 것처럼 서울에도 구석구석 안 가본 곳이 없습니다. 그때 서울에는 시내를 관통하는 전차가 다녔습니다. 당시 전차 값이 5전이었는데 그마저도 아까워 시내까지 늘 걸어서 나가곤 했습니다. 무더운 여름날에는 땀을 뻘뻘 흘리며 걸었고, 차디찬 겨울에는 살을 에는 바람을 뚫고 뛰다시피 걸었습니다. 걸음이 워낙 빨라서 흑석동에서 한강을 건너 종로의 화신백화점까지 45분이면 도착했습니다. 보통 사람은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를 절반에 주파했으니, 얼마나 빠른 걸음인지 상상이 갈 것입니다. 전차 갑은 아껴두었다가 나보다 돈이 더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내세우기 부끄러울 정도로 적은 돈이지만 천만금을 내주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주었고, 그 돈이 복의 씨가 되길 빌며 주었습니다.
4월이면 고향에서 꼬박꼬박 학비를 보내왔지만, 형편이 어려운 주위 사람들을 그냥 보아 넘기질 못하다보니 그 돈은 5월이 되기도 전에 도무 바닥이 났습니다. 한번은 학교 가는 길에 숨이 넣어갈 것처럼 아픈 사람을 만났습니다. 어찌나 불쌍한지 발이 떨어지지 않아 그 사람을 업고 오 리나 떨어진 병원으로 내달렸습니다. 때마침 주머니에 들어 있던 학비를 탈탈 털어 병원비로 내고 나니 돈이 한 푼도 남지 않았습니다. 학비를 못 내 학교에서 독촉을 받는 것을 보고 친구들이 돈을 한 푼 두 푼 모아주었습니다.
그때의 친구들을 평생 잊지 못합니다.
도움을 주고받는 것 역시 하늘이 맺어주는 인연입니다. 그 당시는 잘 몰랐지만 지나서 생각해보면 ‘아, 그래서 나를 그 자리에 보내셨구나’히고 깨달아집니다. 그러니 문득 내 앞에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하늘이 이 사람을 도우라고 날 보내셨구나’하고 마음을 다해 섬기게 됩니다. 하늘이 열을 도우라고 하는데 다섯만 도와서는 안됩니다. 열을 주라고 하면 백을 주는 것이 옳습니다. 남을 도울 때는 아낌없이 지갑의 돈까지도 몽땅 털어서 도와야 합니다.
서울에 와서 바람 떡이란 걸 처음 보았습니다. 그 색이며 모양이 어찌나 예쁜지 ‘아이고, 이렇게 곱게 생긴 떡이 다 있구나.’ 하며 한 입 베어 물었더니 바람이 푹 꺼지며 폭삭 주저 않는 게 아닙니까? 그때 알았습니다. ‘아하, 서울이란 곳이 바로 이 바람떡 같구나.’ 서울깍쟁이란 말이 왜 생겼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서울은 겉보기엔 고관대작들이 즐비는 부자 세상 같지만 실상은 가난한 사람들 천지였습니다. 한강 다리 밑에는 누더기 차림의 거지들이 즐비했습니다. 나는 한강 다리 밑 빈민굴에 찾아가 거지들의 머리를 깎아주며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눈물이 많습니다. 가슴에 맺힌 것이 많아 내가 말 한마디만 건네도 대성통곡을 하며 울었습니다. 벅벅 긁으면 허옇게 자국이 생길 정도로 덕지덕지 때가 긴 손으로 직접 구걸해온 밥을 나에게 건네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더럽다 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같이 먹었습니다.
서울에서도 교회를 열심히 다녔습니다. 주로 흑석동에 있던 명수대예수교회와 한강 건너편 백사장에 있던 서빙고교회에 다녔습니다. 추운 겨울날 서빙고동으로 건너가다 보면 ‘뻥!지지지지-’ 하며 얼음장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교회에선 주일학교 선생님 노릇을 했습니다. 내 수업은 아주 재미있어서 아이들이 많이 좋아했습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농담하는 재주도 없어졌지만 그 당시엔 우스개 이야기도 잘해서 아이들이 잘 따르고 좋아해Ttq니다. 내가 엉엉 울면 아이들도 엉엉 울고 내가 하하 웃으면 아이들도 하하 웃으며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닐 정도로 인기가 좋았습니다.
명수대 뒤쪽에는 달마산이 있습니다. 나는 달마산 바윗돌에 올라가 밤새 기도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춥거나 덥거나 상관없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기도에 열중했습니다. 한번 기도에 들어가면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될 정도로 울며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놓고 몇 시간씩 기도에만 전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암호와 같아서 그것을 풀려면 더욱 기도에 몰두해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이미 하나님은 비밀의 문을 여는 열쇠를 친절히 쥐어주셨는데 내 기도가 부족하여 그 문을 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밥을 먹어도 먹는 것 같이 않고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같이 하숙하던 친구들은 내가 산에 올라가 밤새 기도한다는 사실을 잘 몰랐습니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과 다른 뭔가가 느껴졌는지 나를 어려워했습니다. 하지만 평소에는 우스갯소리를 해가며 다정하게 어울려 지냈습니다. 나는 누구와도 마음을 잘 통합니다. 할머니가 오면 할머니랑 친구하고, 애들이 오면 애들과 장난을 치며 놉니다. 누구든지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면 다 통하는 법입니다.
흑석동 시절 자취집 주인이었던 이기완 아주머니는 여든이 넘어 세상을 떠날 때까지 50여 년 동안 나와 우정을 나누며 벗으로 지냈습니다. 하숙을 치느라 늘 바빴지만 항상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었습니다. 나한테 잘해줘야 자기 마음이 편하다면서 반찬 한가지 라도 더 주려고 애썼습니다. 별로 말도 없고 재미도 없는 내가 뭐 그리 예쁘다고 잘해주었는지 모릅니다. 훗날 내가 서대문형소에 수감됐을 때는 옥바라지도 해주었습니다. 지금도 이기완 아주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훈훈해집니다.
자취집 근처 조그만 구멍가게를 하던 송씨 아주머니도 그 시절 큰 은인입니다. 아주머니는 고향을 떠나 살면 늘 배가 고프다며 가게에서 팔다 남는 것이 있으면 뭐든 가져다주었습니다. 작은 가게를 해서 근근이 먹고사는 처지에도 늘 나를 다정하게 챙겨주셨습니다.
한강 모래사장에서 예배를 드리던 날의입니다. 점심시간이 도어 다들 흩어져 안자 밥을 먹었습니다. 점심을 먹지 않은 나는 그 속에 우두커니 않아 있기가 뭐해 혼자 쓱 뒤로 바져 모래사장 돌무더기에 않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송씨 아주머니가 빵 두 개와 아이스케이크 두 개를 가져다주셨습니다. 그 고마운 마음이란! 하나에 1전짜리로 모두 4전밖에 안 되는 것이었지만 그 마음을 평생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일단 신세를 지면 평생을 잊지 못합니다. 나이 구십이 된 지금도 언제 누가 무엇을 해주었고, 또 누가 어떻게 해주었는지 줄줄이 욀 수 있습니다. 나를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고 은덕을 베풀어준 사람들을 평생 잊지 못합니다. 은덕을 입으면 반드시 더 크게 갚아야 합니다. 은혜를 베푼 이를 직접 만날 수 없더라도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못 만나더라도 그 고마움을 다른 사람에게 갚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