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의 인물>
1930년의 부동면장 고창석
고창석(高昌錫)은 1899년 7월 7일(음 5월 29일),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평화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재설이고, 어머니는 여흥 민씨로, 본은 장흥 호는 청고(靑皐)이다. 임진왜란의 의병장 고경명의 14대손이다.
어머니의 택호는 마포, 1898년 시집왔고, 1899년 아들 창석을 낳았으며, 1900년 남편을 떠나보내고 청상과부로 1951년까지 살았다.
창석의 어린 시절 일화를 소개한다. 창석은 아버지의 6촌 형인 고재량에게서 천자문을 배웠다. 창석에게 7촌 재당숙이 된다.
서당은 재량의 사랑채로 창석의 집 바로 뒤편에 있다. 아들이 서당으로 가면 어머니는 울타리 가에서 귀를 기울였다. 도란도란 책 읽는 소리가 들리고 회초리 소리도 들리고 어머니가 먼저 아파했으며, 아이들 울음소리가 들리면 어머니가 먼저 울었다. 그러던 차 창석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여흥 민씨는 연동 형님을 찾아가 항의했다. 연동 형님은 고재량의 부인이다.
“연동 형님, 서방님께서 이러실 줄 몰랐소. 당신의 아들은 회초리로 가르치고, 애비 없는 내 자식은 누구더러 가르치라고 그냥 보냈대요?”
“종수씨, 정 그러시다면 똑같이 애휼하고 벌주리라.”
** 고병균 수필집. [연자시, 가족 사랑 이야기] 143쪽 ‘마포 할머니’ 중에서
아들 창석에 대한 어머니 여흥 민씨의 교육은 불로 연단하는 용광로 교육이었고, 인정사정없이 두들기는 대장간 교육이었다.
이렇게 자란 창석은, 만 30세인 쇼와 4년 11월 15일에 부동면장의 명을 받았다. ‘쇼와’는 일본의 연호이다. 천왕 히로히토의 재임 기간인 1926년 12월 25일부터 1989년 1월 6일까지 약 62년을 가리키며, ‘쇼와 4년’이라면 1929년이 된다. ‘부동면’은 탐진강을 기준으로 동부지역인데, 1931년부터 1932년 사이에 서부지역의 장흥면에 흡수 통합되었다. 그것이 관보에 의하여 정리된 날은 1936년 11월 1일이다. 장흥면이 장흥읍으로 승격되었는데, 조선총독부령 제221호에 의하여 공포된 날은 1940년 11월 1일이다.
부동면장 고창석은 ‘청고 창석의 일지’라는 제목의 책을 남겼다. 그 복사본이 장남 영국에게 있었고, 그의 셋째 아들 병훈에게 전해졌다. 병훈은 1930년부터 1944년까지 14년의 일지를 한국어로 번역했다. 창석이 서거한 1946년 8월 1일 이후 79년만이다.
1930년의 일지 중 몇 개를 소개한다. 부동면장으로 직무를 수행한 시기의 일지다. 일지를 선택한 기준은 없다. 읽어가다가 마음에 내키는 대로 선택했다.
어떤 날의 일지에는 병훈의 해설이 있다. 거기에 나의 의견도 첨삭한다.
◈1월 4일, 토요일, 눈 오고 바람 불며 매우 추움
추위를 무릅쓰고 출근하여 직원들과 신년 인사를 나누었다. 스가노(菅野)와 신년 인사를 나누던 중, 그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소방조(消防組)의 신년 첫 행사(初式)와 위로 건배식에 참석했다. 이 행사는 마사오카(正岡)씨의 사임회(辭任會)를 겸했으며, 산미개량조합에서 개최되었다. 참석하여 여러분에게 위로사(慰勞辭)로 간단히 사례(謝禮)했다. 예양(汭陽)의 윤 주사(尹主事) 댁에 1박 했다. 밤 12시부터 새벽 2시까지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에 대해 서로 논의했다.
해설
신임 면장으로서 지역 현안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가 아들을 낳았다.‘ 직원의 애경사까지 챙기는 따뜻한 인품의 인물이다.
일지에는 양력 날짜, 요일, 날씨가 있다. 일기 형식을 제대로 갖추었다. 특히 날씨는 ’눈 오고 바람 불며 매우 추움‘이라 기록한 것은 날씨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1월 16일 목요일, 흐림
저리자금 이용 문제로 매일같이 고심하며 연구하고, 여러 방면으로 권유하고 타협해 보았지만 좋은 방책도 없고 효과도 없다. 삼산리에서 근농공제조합 설치를 또 요청했다. 두 번째 요청이었지만, 위원이 될 만한 사람이 없다. 박모 씨에게 출장 명령을 내렸더니 부당한 보도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군(郡)으로 오던 도중에 집으로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안심했다. 조효(湊孝)에게 이자 문제를 가지고 다시 협상해 보았다
해설
경제적 어려움(자금, 인재 부족)과 행정 과정에서 발생하는 구설수(부당 보도),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면장의 끈질긴 노력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선심성 복지예산은 행정기관의 재정 문제를 유발한다. 경기도가 좋은 예이다.
◈2월 20일 목요일, 맑음 읍내 장날
여러 공적인 일들을 처리하고, 오후 5시경 오자키(尾崎) 교장이 찾아와 학교 문제에 대해 협의했다.
해설
장흥의 오일장날은 2일과 7일이다. 창석의 일지에 쓰인 날짜 날짜 1930년 2월 20일은 양력이다. 이것을 주민들이 주로 사용하는 음력으로 변환하면 1월 12일로 장날이 된다.
장흥의 장날은 행정기관에서 정한 것이 아니다. 보부상들이 강진 장흥 보성 등 이동 경로에 따라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오늘날 장흥에서는 2일과 7일의 오일장 외에 토요시장도 개설되어 열린다. 주5일제가 시행된 2006년 7월 이후이다.
◈3월 12일 수요일, 큰비와 눈보라가 치는 폭풍설(暴風雪)
도로 보수를 위해 구장회의를 개최했다. 8개군 연합 축산물 품평회 협찬회 평의원 회의 안건을 빌려와 그 회의에 참석했다. 발언권은 없었지만, 불공평한 부분에는 평가를 덧붙였고, 임원 역할에 조선인도 참여시켜야 한다고 발언했다. 회의가 끝난 후 군수 이하 7명이 모여 학교 문제에 대해 협의하고 6시경 집에 돌아왔다.
해설
도로 보수를 위해 구장회의, 축산물 품평회 등에 참석하여 발언하여 주민을 대변했다.
① 불공평한 부분에 대한 평가 ② 임원에 조선인의 참여
◈5월 18일 일요일, 큰비
집사람의 병 때문에 의사에게 다녀왔다.
해설
창석은 면장으로서뿐만 아니라 가장으로서 가정에도 충실한 것으로 여겨진다.
◈7월 15일 화요일, 맑음
면 직원들을 모두 출동시켰다. 【뽕나무밭에 비료를 배분하고 독려, 자운영 씨앗 소금물 선별을 독려하기 위해】
그리고 산림조합비 징수를 위해 모두 출동했다. 오후 6시에 집에 돌아왔다.
해설
당시 잠업은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했다.
1) 농가 : 현금 수입의 유일한 수단으로, 생계가 걸린 생명줄이다.
2) 면장 : 지역 경제를 살리는 가업이고, 국책 사업의 최우선 과제다.
◈8월 23일 토요일, 한때 맑음 흐림
해당리(海堂里)로 출장 가서 소작 관행 조사와 농사 개량 소조합 조직, 자운영 재배법 요령에 대해 강연을 했다. 오후 7시에 사무소로 돌아왔다.
해설
농촌 사회의 불합리한 구조는 몇 가지만 소개한다.
1) 소작료가 50% 이상의 고율로 지주들이 소작 농가를 수탈했다.
2) 소작료를 곡물로 납부한 까닭에 흉년이 들면 소작 농가는 빈곤에 시달렸다.
3) 비료는 물론 물세 농지새 등의 농사 비용을 전액 소작 농가가 부담했다.
◈9월 14일 일요일 맑음
평화리에서 소작 관행을 조사했다.
해설
소작 관행 중 가장 심각한 것은 구두 계약이다. 지주가 파기하면 호소할 길이 없다. 따라서 대부분의 소작 농가는 극심한 빈곤과 채무의 악순환에 빠졌다.
◈12월 4일 목요일 맑음
사무 검열 시 미비 사항을 파악하여 각 부서에 설명했다.
오후 8시에 군수의 명령에 따라 이로하 여관에 도착해 부산교에 대해 협의하고, 다음 날 오전 2시에 사무실로 돌아와 투숙했다. 부산교는 부동면과 부산면을 잇는 교량이다.
도(道) 평의원 가네코 센이 지난달 20일 도 당국에 부산교의 조속한 건설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국은 ‘3~4년내에 도내의 도로와 교량을 완비할 방침이지만, 쇼와 6년도(1931년)에는 확답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이에 가네코 씨는 답변을 듣고 동원(東原)에 들렀다가 오늘 돌아왔다.
한편, 모리키 시게키 번영회장도 11월 24일경 상경하여 교섭했지만, 부산교 건설은 전혀 가망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결국, 신흥리를 우회하는 도로(우회도로)를 조속히 신설해달라고 요청했고, 그 결과 마침내 용지 기부를 절반쯤 정리한 후 12월 5일에 상경하게 되었다.
우회도로도 새로 지을 필요가 있지만, 일단 도로를 만들면 부산교를 지을 가능성이 사라질 것이라는 의견이 있었다. 당시 일반적인 여론은 2~3년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다리가 건설되기를 바란다.
이상 부동면장 고창석의 1930년의 일지를 들여다보았다.
일지에서 드러난 고창석은 자신의 책무에 충실했다. 면민의 살림살이에 충실했고, 벼농사, 누에 치기 등 산업을 일으키는 일에도 충실했으며, 농촌 사회의 불합리한 구조인 소작 관행, 저리자금 이용 문제 등 대민 사업에 대하여 고심했다. 군수를 비롯하여 공무원 그리고 주민들에게 진심이었고, 가정에도 충실했다. 일지로 남길 만큼 충실했다.
부동면장 고창석에게는 두 여인이 있다. 엄격하게 교육한 어머니 여흥 민씨(1951년 11월 9일 졸)가 있고, 무녀독남의 남편을 만나 4남 1녀의 자녀로 가문을 번성하게 일군 부인 영광 김씨(1988년 5월 29일 졸)도 있다. 훌륭한 업적을 남긴 남자에게는 훌륭한 여자가 있다. 그것을 나는 여흥 민씨와 영광 김씨에게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