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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순 시집 평설>
서정성의 일탈(逸脫)과 인연의 끈
- 권정순 시인의 따뜻한 감성과 차별성
엄창섭(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 월간『모던포엠』 주간)
1. 존엄한 생명의식과 삶의 구조(構造)
낮은 산자락이 점차로 홍엽으로 물드는 만추의 계절에 30년 남짓한 시간대를 사제 간의 소중한 연(緣)을 맺어온「연초록, 물음표」의 권정남 시인으로부터 모처럼 대학 강의실에서 자신의 여동생으로 현재 미국 켈리포니아 오렌지카운터에서 거주하는 권정순 시인의 첫 시집『불가마 속으로 들어가다』(리토피아, 2003)를 조심스럽게 건네받았다. 모처럼 오랜 날 그 자신이 추구한 시적 내용물과 기본 골격을 삶의 구조와 엄숙한 생명 외경의 관점에서 시적 형상화를 걸쳐 묶어낸 시집은, 따뜻한 감성과 자기 특유의 음성과 색깔, 느낌으로 채색되어 한순간의 격정도 평정시켜줄뿐더러 삶의 일상에서 「서정성의 일탈과 인연의 끈」을 회복시켜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까닭에 격랑의 시간대를 그 나름으로 만보(漫步)하되 생명의 존엄성을 신앙처럼 떠받든 끝에 세세한 바람의 선율(旋律)을 자유로운 영혼의 울림으로 형상화하여 깊은 상처를 치유하며 다이돌핀(Dynorphin)을 쏟아내는 그의 시적 작위(作爲)는 경이로움에 맞물려 있기에 새삼 뜻깊다.
이 같은 연유로 논의에 앞서 평자 그 나름으로 근간「시인과 만나다」를 기획물로 ‘한용운, 김동명, 황금찬, 문덕수, 이성교, 성춘복 시인 등’을 다루던 끝에 감사하게도 월간『모던포엠』전형철 발행인의 배려로 역동적으로 활동하는 80여 명의 시인 중 30여 명을 엄선하여 무려 8백 페이지 남짓한 분량으로 비중감 있게 구도 처리한 평론집『일상의 일탈과 차별성의 의미망』(모던포엠, 2023)을 출간하여 우리 문단에 주목을 받고 있음도 결코 우연일 수 없다. 그렇다. 연유야 어떠하든 권정순 시인이 시집의 머리글「시인의 말」에서 “묵정밭 같은 시를 내밀며 이상호 교수님께 해설을 써주실 것을 부탁드렸습니다. 무척이나 철이 없었음을 뒤늦게 깨달으며 金剛石 같은 글을 써서 안겨주신 정성을 마음 깊이 새깁니다. 아울러 저를 사랑해 주시고 아껴주시는 많은 분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를 통해 입증되듯 지상에서 사용되는 유일한 ‘하늘의 언어인 감사(感謝)’에 대한 소외된 타자에 대한 배려와 그 식별력을 일깨워 못내 경건할 따름이다.
일단 시집의 편집 구도는「제1부 지금도 아퀴를 찾고 있다, 제2부 낙원의 바깥, 제3부 먼발치서 바라보는 슬픔, 해설-낙원의 안쪽으로 가는 길」의 일면에서 결(結) 고운 모직물처럼 직조되어 담백한 시격(詩格)은 못내 선명하게 투사될뿐더러 평자인 이상호 교수의 지적처럼 ‘천상의 층계를 오르는’「낙원의 안쪽으로 가는 길-권정순의 시세계」라는 인연의 매듭은 시적 행간의 틈새를 놀랍게도 허락지 않는다. 특히 삶의 일상에서 보편적인 ‘불가마’의 개념은, ‘황토 불가마, 참숯 찜질방’을 의미할 것이나 그 의미를 확장하면 ‘불가마 속으로’는 기독교의 성서나 단테(Dante Alighieri)의『신곡』에서 범어(梵語) 아비치(Avici)를 연계한 지옥과도 맞물려 있다. 각론하고 첫 시집을 묶어낸 권정순 시인을 일컬어 ‘진실로 시를 사랑하고 때 묻지 않은 정신작업의 종사자”로 지적해도 지나치지 않을뿐더러 한국 시단에서 그 존재와 무게를 검증받은 실체인 탓이다. 까닭에 다수의 시편을 통해 강한 허무감 속에서도 반어적 수사(rhetoric)를 즐겨 역설적 반증(反證)의 기교로 변형을 시켜 이 땅의 독자로부터 시 의미의 다양성과 식별력도 그렇거니와 그 자신의 깊은 사유(思惟)를 경비하게 표출시키지 않는 따뜻한 영혼의 소유자로 끝내 확증을 거쳤음은 유념할 바다.
차제에 영국의 젊은 시인 오웬(Wilfred Edward Salter Owen)의 지적처럼 “시인의 소임은 시대적 상황에 경고하는 것이다.”라는 내면 인식의 깨어있음과 마침표 하나라도 놓치지 않는 충직한 그 자신이 동시대의 시인에게 교시적 의미를 일깨워준 시적 행위는 못내 비장감이 묻어난다. 종종 ‘존재의 뿌리 또는 언어의 집’으로 응축되는 그 자신이 끝매듭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시편 “1. 숱한 음표로 묻혀있는 목소리/돌무더기 아래 실안개로 피어오르는/무너진 시간의 잔해까지 끌어낸다(지금도 아퀴를 찾고 있다)”의 보기나 또는 ‘주로 조각·주물의 원형으로 쓰는 몸통만의 소상(塑像)을 끝내 형사(形似)한 “자라지 못하는 생각의 싹들/낯선 제국에서/독버섯으로 자라난다(토르소)”에서 일체의 머뭇거림 없이 ‘이미 점지한 하늘의 뜻’ 순응(順應)하는 삶의 일념(一念)은 이처럼 그만의 신뢰성을 못내 충격적으로 안겨줄 따름이다.
특히 그 자신의 시집에 수록된 다수의 시편에 견주어 비교적 호흡이 긴 산문시 양식(樣式)을 일정하게 구축한 표제 시격(詩格)에 맞물린 “바람으로 날아간 날들을 새떼처럼 불러모으는 문지기 여인의 허물 벗는 노래가 들리고 저마다 쪼아대고 끄적거리는 살집 깊은 가슴속, 진흙의 막장에서 굳어버린 검댕이 시간을 녹이면 이윽고 껍질만 남은 이름의 낯선 그림자로부터 탈출한다(불가마 속에서의 어느 날)”를 통해 ‘오래전 출타한 선이 불분명한 자화상을 찾는’ 그 행위도 그렇거니와 “활활 삭정이와 더불어 얼룩진 이력을 태우는 한쪽에는 죽이지 못하는 제 몸빛들, 흙의 속살을 누르는 은박지들의 항의가 빗발친다(텃밭에서)”에서 새삼스레 확증되는 메타포(metaphor)야말로 숨 막힘의 현상에서 단절, 거리 두기라는 경계 허물기와 맞물린 정신작업이기에 묵언의 응시 뒤 신선한 감동은 짐짓 가늠할 바다.
2. 시대적 상황 인식과 소통의 기호학
모름지기 일반문학론에서 진실(陳述)의 사전적 개념은, 선언적 성격의 언술이나 작가의 의도, 사상, 또는 주제 및 사상을 명백하고 생생하게 드러낸 어떤 부분이나 국면, 예술적 언술의 특성을 포괄적으로 검색하는 것을 뜻한다. 또 하나 시적 진술에는 독백적 진술과 권유적 진술, 그리고 해석적 진술이 있다. 여기서 그 자신의 시 세계에서 나타난 시적 진술은 비교적 청유형 독백 진술로 새삼 유의미한 정황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 평소 ‘조우(遭遇)의 소중함’에 관심을 지닌 평자이지만 이처럼 따뜻한 감성을 지닌 우연한 교감(交感)도 결코 예외일 수 없다. 까닭에 그 자신이 일상의 서정성을 ‘눈부신 존재의 꽃’으로 형상화 시킨 “잔디 언덕/하늘거리는 팬지, 금잔화의/도형들 위로 흰나비들이/붉은색 노란색을 휘감는다(낙원의 바깥)”에서 담백하게 풀어놓은 시각처리도 그렇지만, 시적 이미지의 형사(形似)는 아득한 성채(城砦)처럼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기에 그 진정성 또한 이채롭다.
또 하나 언어공해가 심각한 현상에서 상처 깊은 영혼의 정화(淨化)를 위해 생명의 기표로, 고뇌의 밤을 지새 우는 뜻 있는 정신작업은 “굳고 단단하게 응고된 힘들/허공의 궁전처럼 떠있고/대리석 기단에 몰려오는 노을빛(거미)”의 보기에서나 또는 “물속에 흔들리는/푸른 능선/가슴 안을 비운다(어라연)”를 통해 못내 신선한 감동을 불러주기에, 불확실한 연계 층위에서 아득한 기억들과 자잘한 시적 질료(質料)를 불러 모으고 작동시켜 가슴 저며주는 서정적 미감의 양상(樣相)은 못내 다정다감이다.
차제에 비교적 다소 긴 호흡의 산문시로 처리한 “아그라 마을 동쪽, 파아란 하늘에 하얀 돔이 잠겨있는 물속을 나무들과 함께 들여다봅니다(다이애나의 고백-타지마할의 사진 속에서)”의 일면(一面)에서 회화적 처리에 의한 대상에 대한 투시(透視), 즉 들여다보기라는 단정적인 일회성(一回性)도 그렇지만, “누런 초가 지붕 아래/비어있는 마음/모여있는 소리들/보일 듯 들릴 듯하여//걸어 잠근 마음을/풀어낸다(소쇄원)”라는 무채색의 정신풍경화는 경이롭게도 시적 상상력의 확장과 화자(persona) 자신의 올곧은 자존감을 통한 투명한 의미망의 확장으로 이같이 지속적일 따름이다.
각론하고 ‘창경원 후원의 먼 풍경’을 짐짓 관망한 끝에 스스럼없이 그 자신이 “소리 없이 죽이는 장작불 울음/지엄하게 졸고 있는/늙은 나무들을 내려다보며/푸른 하늘을 눈에 넣는다(문병·1)”라는 그 발현(發現)은 ‘정화의 매개인 자기희생의 눈물’에 의한 교시적(敎示的) 의미는 마침내 극대화에 맞물려 ‘숨을 쉬기도 버거운 공간’으로 점차 변형된다. 따라서 비록 ‘염장을 하고 건조 시킨 생애’일지라도 그 자신이 “아직도 여행 중인 영혼/붕괴하지 않을 것이라/가슴 속에서 타버린 소리/아마포 사이/잿빛 가루로 비집고 나오는데/열리지 않는 유리관 속에/깨어있는 시간(미라)”을 통해 그 나름으로 확증되는 것은 즉물적 현상을 따뜻한 감성의 시선으로 응시하고 긍정적으로 인식하라는 자기수용의 일깨움을 다분히 수긍(首肯)한 살아있음의 현상이다. 모름지기 ‘마음이 마음을 흔드는 그리움의 무게로 휘청거릴 때’ 가히 그만의 시적 절창으로 지적하지 않더라도 “천근이나 되는 그대/칠흑 가슴으로/푸른 세월을 치듯/허공을 흔드는/춤사위는 힘들다고(건란建蘭)”의 일면처럼 이렇게 따뜻하고 감미로운 감성적인 시편을 접하면 동일한 시간대에 처한 누구나 한 번쯤 가슴 저며오는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이 같은 시적 상상력의 연상과 시 의미의 확장은 지극히 놀라운 극적 효과로 그 긴장감마저 불러줄 것이나 ‘푸른 바람의 노래처럼 구석구석을 돌아들지라도’ 결국 “스위치를 올려도/부대끼며 오그리고 있을 안쪽/끝내 오지 않는 불빛에/해체된 신호들이 틈새를/비집고 나온다(실어증)”라는 그 정황에 비춰 그 자신을 해체하고 재조합하는 창조적 행위는 한 사람의 정신작업의 종사자에게 시적 상상력의 확장과 결부되는 까닭에 호흡을 가다듬고 새삼 묵언으로 응시할 일이다.
또 한편 그 자신의 대다수 시편에는 주관적으로 묘사된 주술성 강한 의미망이 다양하고 폭넓게 언뜻언뜻 보이는 연유로 “원추경 질경이 숨소리/자옥한 중턱에서 뒤돌아선다/하늘 바깥에서/높다랗게 넘실거리는/바닷물//무심의 수위(친견-보문사)”의 보기처럼 아득한 원경(遠景)도 그럴 것이나 “파들거리던 나뭇잎들까지 뛰어내린, 정면으로 바람개비만이 돌아가고 있는 저택처럼 한해의 껍질을 잡고 있습니다(첫 행만 쓰고는 그날 밤도 유족들에게 갔다-「아를르의 여인」모음곡)”을 통해 확증되는 삶의 그 처연한 분위기(情調)는 못내 무도회의 떠들썩함도 창문으로 달아날밖에 없다. 까닭에 그 자신이 타자 간에 깊은 사유를 모색하는 성향으로 자신의 주장을 불특정 개인 또는 다수에게 적극 동조를 요청하는 형태의 권유적 진술은, 종종 자기성찰의 성향을 나타내는 시 세계에 새삼 충직한 양상이다. 이처럼 그 자신의 시 세계에서 쉽게 발견되는 내면의식은 낮은 자세의 그 겸허함을 잊지 않고 수락(受諾)한 ‘관조의 미학’에 잇닿음은 그만의 명상호흡을 통해 다시금 관망할 일이다.
어디까지나 초조와 망설임 끝에 묶어낸 그 자신의 시집에 수록된 시편의 경향과 색조는 앞서 이상호 시인의 “그의 시에는 유난히 ‘시간’과 ‘성찰省察’에 관련된 이미지가 많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시간에 관련된 이미지가 많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시간에 관련된 이미지가 권정순 시의 토대를 이루는 것이라면, ‘성찰’은 바로 그 시간이 작용하여 만들어낸 세계와 자아에 대한 관찰과 비판과 반성을 아우르는 대표적 핵심어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라는 그 지적도 주의 집중할 점이나 삶의 일상에서 동일화의 차별성이랄까? 짐짓 ‘일상의 개아(個我)에 현대성을 융합시킨 진술시와 묘사시’를 이처럼 비중 있게 다루고 있음도 짐짓 지켜볼 바다.
각론하고 에밀 슈타이거(E.Steiger)가 서정의 본질을 회감(會減)으로 정의하면서, ‘시인은 자연을 회감하고 자연은 시인을 회감한다.’라고 역설하였듯, 시적 자아에서 분출되는 서정성은 타자 중심의 사유를 관통하는 공감의 영역을 확장 시키는 그 가능성을 유추(類推)할 때, 비교적 호흡이 단조로운 전문이 8음보 형태인 “어디까지 나아가는지/빠르지도/더디지도 않게//밑동이 차있다/세상 밖으로 나오는//길고 깊은 윤기/푸르른 언변(군자란)”을 통해서도 유추될 것이나 “흐린 능선 옆으로 비껴 들어서면/그림자가 빠져나간 가슴에/화살로 쏟아지는/보랏빛 광선/열리지 않는 늦여름의 오후(하구河口)”에서 새삼 입증되듯 그 자신의 서정(抒情)성에 맞물려 ‘한순간의 격정과 끓어오르는 분노에 평정심을 회복하고 감미로운 심적 현상을 이처럼 자극하여 일상의 감동을 회복시켜주기에 시편에 수용된 그 관심사(關心事)는 또 하나 신선한 충격으로 고통받는 영혼의 치유와 일치(一致)되는 인자(因子)다.
3. 일관성과 의미론적 순환(循環)
모름지기 화자(persona) 자신을 해체하고 재조합하는 창조작업은 시적 상상력과 결부된다. 따라서 그 자신의 시편을 직물 대상의 질료로 삼고 언어 질서에 의해 통일된 체계의 유지와 전통의 재확인이라는 차원에서 우주의 신비를 캐어내는 현상은 한층 유의미하기에 응축 미와 긴장감을 늦출 수 없다. 그렇다. 미래가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시간대에 한 사람의 독자에게 참담함을 충격적으로 안겨주는 항목을 열거한다면, 그중에서 기억 흔적에 남겨둘 것은 질서의 무너짐과 으깨어진 도덕성의 불감증이다. 이 같은 점에서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시적 소재를 비중 있게 시적으로 매듭지은 뒤, 그만의 삶을 반추하되 못내 끊임없는 자위(自慰)가 주어져야 한다.
또 한편 스펜더(Spender)가 제시한 '기억력'은 특정한 감각적 인상으로 단순히 정신적인 재현작업이 아니라, 고통을 통해 생산된 창조적 기억이 변형된 생명력이다. 유추컨대 전문(全文)이 6행 1연 구도의 형상화로 그 정감이 응축되어 자못 빛나는 경기도 안산시 대부동 소재의 대부도(大阜島)는 수도권 관광지로 그 면적은 34.39㎢, 해안선 길이 61㎞에 이르는 일명 ‘낙지섬’이다. 이 같은 지정학적 환경에 비춰 “밀물로 다가오던/푸른 마음도 몰아내고/그리움도 빠져나간/뻘밭의/실핏줄이 드러나는/가슴(대부도)”에서 파악되는 시적 특이성은 ‘푸른 마음, 뻘밭, 그리고 실핏줄, 가슴’과의 대응을 통하여 그 자신이 영혼의 창을 열어놓고 지상에 갈 앉은 음조는 지난(至難)한 몸부림인 동시에 자아 통찰의 행위이다. 모처럼 자연 친화적인 것과 따뜻한 삶의 정감, 그리고 순치되지 않은 우직한 성품은 결코 모가 나지 아니한다.
까닭에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상호대비 시키는 그 자신의 시적 발상은 순백의 언어로 정금을 빚어내는 연금술사의 경이로움에 견주어진다. 그의 시적 음계는 연계 음이 자리해 ‘존재의 사라짐’을 서정적 미감으로 수용한 이상성(Ideality)과 시 의미의 추구 또한 이채로워 독자의 시선을 끌기에 거부감이 없다. 푸른 식물성 언어를 통한 그 자신의 시 의식은 마침내 “수풀 우거진 숨소리로/화답하는 큰마음/지울 수 없는/내 오랜 침묵을/가을빛 일렁이는 잔가지로 들어주고/가슴 깊이 떠돌아다니는/날이 선 메아리들을/골짜기 오지랖에 덮어주기도 한다(산에서)”와 잇닿은 따뜻한 정신기후는 끝내 평화에의 합일과 그 궤를 함께하기에 시적 지형성(Topography)은 모순어법적이거나 생경하지 않고 낯익어, 추상적이면서도 물상적(物像的)인 시어의 작은 개체들이 비교적 발견되지 않기에 불안과 조급함에 익숙한 이 땅의 시인에 견주어 고매한 품격의 소유자로서 개아의 차별성으로 미적 주권을 확장한 권정순 시인을 감히 천부적(天賦的) 시인으로 일컬어도 거부감은 주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각론하고 시적 음조의 투명하고 단조로움으로 시적 인식과 정서의 자유로운 교감을 통한 자의식에 생명체로 존재하는 시는 깨달음의 미학이다. 또 한편 ‘창(窓)’을 주제로 연작시를 읊어낸 “열린 듯 말 듯한/고요의 끝/삼월의 창 앞에 서면/마음 깊은 곳의 얼음장이/비친다(창·3)”에서나 또는 “가장자리로 올수록 옅어진다/끊임없이 밀고 나가는 밝음/또 다른 새벽을 맞이한다(객지에서-벽에 걸린 그림 2점)”은 물론 푸른 식물성 언어를 매개로 따뜻한 정신기후의 조성에 거리감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 같은 맥락에서 “안간힘으로 버텨왔던 껍질/이제 실핏줄이 터지는 소리//창밖에 또 한 차례/화심花心을 잃어버린/피빛 꽃잎들이 쓰러진다(덩굴장미가 보이는 창가에서)”의 시편에서도 확증되듯 지상적인 개체에서 확산, 승화되어 우주로 관통하는 적극성이 수용되어 있다.
특히 그 자신이 끊임없이 시의 행간을 좁히려고 시의 혼불을 밝히며 시적 상상력을 가라앉은 가락 속에 입체적인 구조와 점층적 효과의 조화를 차별화하여 마침내 하강 곡선을 긋고 평행선을 유지하다 가일층 상승곡선으로 줄기차게 이행(移行)시키려는 역할과 당당한 그 존재감에는 비장감마저 묻어있다. 결론적으로 지극선(至極善)의 심성과 담백한 품격의 소유자인 그 자신이 합리적 해법으로 시적 이미지를 엄격히 통제하고 즉물적 현상을 적확하게 풀어낸 ‘당위성, 그 모순에 대한 사유’에 한층 더 친밀하고 철저하여 여백의 틈새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 자신의 대다수 시편은 내면적 성찰을 통한 체험과 일맥상통하기에, 따뜻한 정신기후의 조성과 행복한 집짓기로 해명되는 시 정신은 식물성 언어로 직조된 전율 같은 가슴 떨림이다. 모쪼록 시적 의미망을 확장하는 ‘정신작업의 종사자로서 최선을 다하라.’라는 한결같은 기대감을 거듭 요청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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