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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세유표(經世遺表)
부공제(賦貢制) 2
《한서(漢書)》에 이르기를, “진(秦)나라 때에 전조(田租 : 전지에 부과하는 조세)ㆍ구부(口賦 : 인구에 할당해서 받던 세)와 염ㆍ철(鹽鐵)에 대한 이익이 예전보다 20배였다.” 했다. 시황(始皇) 31년(기원전 216)에, 검수(黔首 : 진나라 때에 백성을 일컫던 말)에게 스스로 실전(實田)하도록 하였다.
마단림은, “진나라에서 정전(井田)을 없애고 백성에게 제 마음대로 경농(耕農)하도록 하여 많고 적음을 계교하지 않았으므로, 부렴(賦斂)이 후한가 박한가를 이미 상고할 데가 없었다 그후에 드디어 지세는 그만두고 사람에게만 세를 받게 되었으니 그 어그러짐이 더구나 심하다. 이해에 비로소 검수에게 스스로 실전(實田 : 자작의 밭을 실지대로 신고하는 것)하도록 하여 부를 정했다.” 하였다.
생각건대, 부법(賦法)을 정하고자 하면, 백성의 빈부를 살피지 않을 수 없고, 빈부를 살피고자 한다면 그 전지를 자실(自實)하지 않을 수 없으니, 진나라 법이라는 이유로 그르게만 여길 수는 없다. 겸병(兼幷)하도록 한 것이 이미 진(秦)나라 법이었으니, 어찌 전지를 자실하도록 하지 않을 수 가 있겠는가(자실한다는 것은 그 실상을 스스로 말하는 것이다)? 정지(井地)가 고르지 않은즉 실전법(實田法)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
한(漢)나라가 일어나자, 고조(高祖)는 법을 약속하고 금령(禁令)을 풀었다. 전조(田租)를 가볍게 해서 15분의 1을 세로 했는데, 관리의 녹을 요량하고 관청 용도를 헤아려서 백성에게 부과하였다. 식화지(食貨志)에 이르기를, “진나라는 상앙(商鞅)이 마련한 법을 써서 한 달 경(更 : 邊戍)을 마친 병졸을 다시 정졸(正卒)로 삼았다. 한 해의 둔수(屯戍)와 한 해의 역역(力役)이 예전보다 30배인데, 한나라가 일어난 후에도 그냥 따라서 하고 고치지 않았다.” 하였다. 여순(如淳)이 이르기를, “경(更)에 세 가지(三品)가 있는데, 정졸(正卒)은 한 달에 한 번 경(更)하는 이것을 졸경(卒更)이라 하고, 가난한 자가 삯돈(顧錢 : 顧는 雇와 통한다)을 얻고자 하면 다음 차례가 된 자가 돈을 내어서 고용하는데, 한 달에 2천이며 이것을 천경(踐更)이라 하고, 천하 사람이 모두 3일씩을 변새(邊塞)에 수자리하며 정승의 아들도 또한 조발(調發)하는데, 가지 않는 자는 돈 300을 관에 내어 수자리하는 자에게 지급하는데 이것을 과경(過更)이라 한다.” 하였다.
생각건대, 상앙이 정전을 폐지하여 정전이 이미 폐지되자 졸오(卒伍)도 어지러워졌다. 이에 만민을 조발해서 수졸(戍卒)을 삼게 되었고, 또 수졸 면하는 돈을 받아서 관청 용도에 보충했으니, 선왕의 법과 비교하여 실로 어떠한가? 진나라는 수졸 때문에 마침내 나라가 망했는데(陳勝과 沛公은 모두 수졸들의 원한으로 인해서 군사를 일으켰다), 그후 한나라가 일어났으나 즉시 고치지 않았음은 무슨 까닭인가? 지금 우리나라의 군보전(軍保錢)이 이 천경전(踐更錢)과 그 법이 서로 같으니, 바삐 정파(停罷)함이 마땅하며 그대로 둠은 불가하다.
《한서》에 이르기를, “고조 4년 8월에 처음 산부(算賦 : 丁稅)를 하였다.” 했다. 《한의》(漢儀 : 서명) 주(注)에는, “사람의 나이가 15세부터 56세까지는 부전(賦錢)을 내었는데, 사람마다 120을 1산(算)으로 해서, 군사와 아울러 거마(車馬)를 다스리게 하였다.” 했다. 마단림은, “호구에 부과하는 것이 이에서 비롯되었다. 옛적에 백성을 다스리던 자는 전지가 있으면 세를 받고 몸이 있으면 부역을 시켰을 뿐이고 그 몸에 대해 세를 받은 자는 없었다 그런데 한나라 법은 백성의 나이가 15세가 되면 구부(口賦)를 산(算)으로 내다가 56세에 이르면 면제했고, 20세가 되면 요역(徭役)을 붙였다가 또한 56세에 면제했는데, 이것은 세를 받고 또 사역을 시킨 것이다.” 했다. 구준(丘濬)은, “옛적에는 전지가 있으면 세가 있고, 몸이 있으면 요역이 있었는데, 세는 재물을 내고 요역은 노력을 내는 것이었다. 오직 놀며 게을러서 직사(職事)가 없는 자는 억제해서 부가(夫家)에 준(準)하여 정세(征稅)를 내도록 한 것이요, 이익을 취한 바는 아니었다. 그런데 한나라에서 인구를 헤아려서 산을 내도록 한 후부터는 무릇 백성된 자는 몸이 있으면 용(庸 : 傭과 같은 뜻임)이 있었다. 그리고 역역(力役) 외에 인구를 헤아려서 재물을 내어 이것이 드디어 후세의 정제(定制)가 되었다.” 했다.
살피건대, 옛적에도 호구에 부했던 것은 경서에 분명한 문구가 있다. 택전지세(宅廛之稅)가 지금의 호조(戶調)라는 것이고 부가지정(夫家之征)은 지금의 구전(口錢)이라는 것이다. 두 가지 외에 또 직공(職貢)이 있어, 농자는 곡식을, 공자(工者)는 기구(器具)를, 상자(商者)는 보화(寶貨)를, 우자(虞者)는 목재(木材)를, 목자(牧者)는 짐승을, 빈자(嬪者)는 깁실을 공으로 바쳤다.
선유(先儒)는 매양, 호부(戶賦)가 이때에 시작되었고, 구부(口賦)도 이때에 시작되었고, 주거(舟車)를 산(算)하는 것이 이때에 시작되었고. 상고(商賈)를 산하는 것이 이때에 시작되었고, 관시(關市)에 정(征)하는 것이 이때에 시작되었고, 염철(鹽鐵)을 독점(獨占)하는 이가 이때부터 있었다고 이른다. 그런즉 요ㆍ순과 삼왕(三王) 적에 무릇 공부(貢賦)라고 부르던 것은, 한닢 돈도 징수하는 것이 전연 없었고, 오직 농부에게 전세(田稅)만 거두었다는 것이다.
선왕(先王)은 법이 있었으나 후왕(後王)은 법이 없었다. 선왕의 법은 정밀했는데 후세의 법은 거칠었고, 선왕의 법은 정제(整齊)했는데 후세의 법은 어지러웠다. 이와 같을 뿐이었는데 어찌 옛적에는 없었는데 지금에 있다는 것인가?
법 마련한 것이 정밀하고 정제하면 백성의 요역이 고르게 되고, 법 마련한 것이 거칠고 어지러우면 백성의 요역이 치우치게 된다. 고르면 경ㆍ중의 차(差)가 없어져 물정이 화평해지고, 치우치면 고락(苦樂)이 서로 동떨어져서 물정이 들끓게 된다. 이리하여 백성이 지금을 원망하고 옛적을 사모하게 되는 까닭이다. 또 옛적에는 한 해 수입을 절용하고 많이 저축해서 흉년과 여역(癘疫)에 대비하고, 군사를 일으키는 데에 대비했다. 후세에는 한 해 수입을 한 해 동안에 다 써버려 음탕하고 사치하며, 저축하기는 생각지 않아서, 흉년과 여역을 구제하지 못하고, 군사를 일으키게 되면 더 부과하게 된다. 이것이, 백성이 지금을 원망하고 옛적을 사모하게 되는 까닭이다. 호구에 부과하는 것이 한나라 때에 시작되었다는 것은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고조(高祖) 11년(기원전 196)에 조칙하기를, “지금 공헌(貢獻)하는 데에 규정이 없어서 관리가 혹 많이 부과하니(부는 공임), 백성이 많이 미워한다. 제후(諸侯)ㆍ왕 및 군(郡)에는 각각 인구수로써 사람을 셈하고 해마다 63전(錢)으로 해서 헌비(獻費)에 공급하도록 하라.” 하였다.
혜제(惠帝) 6년(기원전 189)에는 민간 여자로서 나이 30이 되도록 시집 보내지 않은 자는 5산(算)으로 하였다.
문제(文帝)는 무사(武事)를 없애고 문교(文敎)를 닦아서, 정남(丁男)은 3년 만에 한번 복사(服事)했는데 백성의 부(賦)가 40이었다.
5산이란 한나라 때 율(律)로서 1산이 120전이었다 오직 공인(貢人)과 노비(奴婢)는 산을 곱절로 했는데, 지금 5산이나 되도록 한 것은 죄를 처벌한 것이었다(越王句踐이 명하기를, “여자 나이가 17세에 시집가지 않았거나, 남자 나이가 20에도 장가가지 않았으면 그 부모에게 죄가 있다.” 했다). 40이란 고정된 부(賦)로서 한 해에 한번 일하는 것이다. 1산(算)이 120인데, 당시에는 천하에 백성이 많았으므로, 3년 만에 한번 일해서 부가 40이 되었다. 생각건대, 한나라 법에 120이 1산이었은즉, 63전이란 대개 초기에 창설했던 법이었다.
살피건대, 《통고(通考)》에 “촉(蜀)나라 이웅(李雄)이 부(賦)를 박하게 해서 1구(口)가 돈40문(文)을 내었는데, 대개 문제(文帝) 때에 남은 법이었다.” 하였다.
경제(景帝) 2년(기원전 155)에, 천하 남자 나이가 20이 되면 벼슬에 붙이도록 하였다. 원제(元帝) 때에 공우(貢禹)는 백성의 나이가 20이 되면 이에 산(算)하도록 청했다.
서씨(徐氏)는 “여순(如淳이 이르기를, ‘율(律)에 남자 나이가 23세가 되어야 벼슬에 붙여서, 나이가 56세가 되면 이에 면직한다.’ 했은즉, ‘백성으로서 관직에 있는 기간이 33년이다.’ 하였다. 지금 경제는 다시 다른 제도를 만들어서, 남자 나이 20세가 되었을 때 벼슬에 붙이기 시작했는데, 벼슬에 있는 기간이 36년이 된다.” 했다.
생각건대, 경제의 법이 중간에 변경된 적이 있어서 그 산(算)이 조금 일렀다. 때문에 공우도 이에 20세부터 산했던 것이었다.
소제(昭帝) 원봉(元鳳) 4년(기원전 77)에. 조서하여 4년과 5년에는 구부(口賦)를 거두지 말도록 하였다. 《한의(漢儀)》 주(注)에는, “백성의 나이가 7세에서 14세까지는 사람마다 구부가 23전(錢)이었다(이하 생략). 20전을 천자(天子)에게 바치고, 3전은 무제(武帝)가 구전을 보태서 거기마(車騎馬)를 보조하였다.또 이르기를, “사람이 15세 이상에서 56세까지 부를 내는데, 해마다 한 사람이 돈 120을 내었다.” 하였다.
원제(元帝) 때에 공우(貢禹)가 말하기를, “옛적에는 백성에게 부산(賦算)이 없었고 구전(口錢)은 무제 때에 생겼는데, 무제가 사이(四夷)를 정벌하면서 백성에게 중하게 부했다. 백성이 자식을 낳아서 3세가 되면 구전을 내는 까닭으로 백성이 매우 곤란해서 자식을 낳으면 문득 죽이기까지 했다. 백성이 7세가 되어 이(齒)를 갈면 이에 구전을 내고, 20세가 되면 이에 산하도록 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천자가 그 논의를 회부해서, 백성이 자식을 낳아 7세가 되면 이에 구전을 내도록 했는데, 그것이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생각건대, 나쁜 법과 포학한 정사는 모두 경서의 뜻을 밝히지 못한 데에서 연유(緣由)했다. 그러므로 나는 나라를 다스리는 요령은 경서의 뜻을 밝힘보다 먼저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추관사민(秋官司民)이 만민의 수효를 정(登)하는 것을 맡아서, 이가 난 어린 아이 이상은 모두 판적(版籍)에 기록했다(정씨의 주석에 “사내 아이는 난 지 여덟 달만에 이가 나고 계집아이는 난 지 일곱 달만에 이가 난다.” 했다). 이것은 그 뜻이 만민의 수효를 알아서 황천(皇天)에게 고(告)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민이 제사하는 것은 만민을 위해서 복을 비는 것이며, 털끝만큼이라도 부를 징수하려는 뜻이 어찌 있었겠는가?
그 부를 징수하는 시기는 큰 한정이 있는데, 향대부(鄕大夫)조에 보인다. 야(野)에는 16세부터이고, 국도에는 20세부터였다. 그런데 모두 부세한다고 이른 것도 본디 호구에 산(算)해서 돈을 거두던 것이 아니다. 1부(一夫)와 1부(一婦)가 스스로 일가를 이룬 자가 부포(夫布)를 내고 터를 받아 집을 지어서 당연히 택세를 바칠 자가 이포(里布)를 내며, 아홉 가지 직 중에 갈라받아서 각자 생업을 하는 자가 직공(職貢)을 냈다. 직공이란 것은 농자는 곡식을(즉 屋粟이다), 공자(工者)는 기구를, 상자(商者)는 보화를, 우자(虞者)는 목재를, 빈자(嬪者)는 실을 바쳤다. 직이 없는 백성은 다만 부포만 바치고 그 직공은 면제했는데, 이것이 선왕의 법이었다.
그런즉 이른바 야에는 16세, 국도에는 20세라는 것도 일찍이 식구로써 돈을 내던 것이 아니었다. 혹은 가산(家産 : 六畜과 車輦 같은 것)으로, 혹은 택전(宅廛)으로, 혹은 직공으로 했을 뿐인데, 어찌 “너에게 이미 식구가 있으니 당연히 구전을 내어야 한다.”고 했겠는가? 특히 옛적에는, 16세 이상된 자는, 반드시 직 없는 백성이 없으므로, 식구에 따라 부를 징수하던 것이 구부(口賦)와 서로 같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명목은 바루지 않을 수 없는데, 명목을 구부라 함은 크게 불가한 것이다. 늙은이, 어린이, 귀한 사람, 어진 사람, 늙고 병든 사람, 몹쓸 병이 든 홀아비, 홀어미, 고아, 자식 없는 늙은이는 모두 구(口)는 있어도 일찍이 돈을 징수하지 않았는데, 명목을 구전(口錢)이라 하는 이런 이치가 있었겠는가? 구가 있는 자는 모두 바친 다음이라야 바야흐로 구전이라 말할 수 있다.
무릇 3세 이상은 이가 겨우 났을 뿐이어서 제 힘으로 먹지 못하는데, 그 부모된 자는 털끝만큼도 힘입는 것은 없으면서 양육하느라 수고만 한다. 자식이 없는 자는 걱정이 없고 자식이 많은 자는 걱정이 많으니, 이치에 견감(蠲減)해서 무휼(撫恤)함이 마땅하거늘, 도리어 이 사람에게 부를 덧붙이는 것이겠는가? 지금 가난한 선비로서 한 달에 아홉 끼니를 먹으면서도 농사도 장사도 하지 않는 자가 있다. 게다가 6~7명의 자녀를 낳아 굶주려도 능히 먹이지 못하고, 추워도 능히 입히지 못하여 탄식하고 슬퍼하며 속히 죽기만을 원한다. 그럼에도 현리(縣吏)가 문간에 와서 6~7명 식구의 부전(賦錢)을 내도록 요구한다면 그 천지의 화기를 해치고 국가의 체면을 무너뜨림이 그 어떠하겠는가? 구전이라는 것은 천하의 학정으로서 삼대 적에는 반드시 하지 않았을 터이니 꼭 의논할 것이 못 된다. 한 무제 때에 과연 이런 사정으로 자식을 죽인 일이 있었으니 후세 임금은 경계할 바를 알아야 할 것이다.
진(晋)나라 무제(武帝) 때에 호조(戶調)하던 방식은, 남녀 나이가 16세 이상에서 60세까지가 정정(正丁)이 되고, 15세 이하로 13세까지와 61세 이상에서 65세까지는 차정(次丁)이 되며, 12세 이하와 66세 이상은 늙은이ㆍ어린이라 하여 일하지 않았다.
생각건대, 늙은이ㆍ어린이를 위로 면제하고 아래로 면제하던 그 법은 취할 만한 것이었다.
송 효 무제(宋孝武帝) 때에 왕경홍(王敬弘)이 상언(上言)하기를, “예전 제도에 사람의 나이가 12세가 되면 반 역(半役)을 하고, 16세가 되면 온 역(全役)을 했습니다. 지금은 황화(皇化)가 유신(維新)하였으니 15세에서 16세까지를 반정(半丁)으로 하고, 17세가 되거든 온 정(全丁)으로 함이 마땅합니다.” 하여 임금이 그의 말을 따랐다.
북제(北齊)의 제도는, 남자의 나이 18세 이상 65세 이하가 정(丁)이 되고, 16세 이상 17세 이하가 중정(中丁)이 되고, 66세 이상은 늙은이로, 15세 이하는 어린이로 했다.
후주(後周)의 제도는, 18세에서 59세까지의 모든 사람에게는 요역을 맡겼다(일설에는 “18세에서 64세까지와, 병이 가벼운 자는 모두 부라 했다.” 한다).
수 문제(隋文帝)가 새로운 영(令)을 반포해서 “남녀간에 3세 이하는 황(黃)으로, 10세 이하는 소아(小兒)로, 17세 이하는 중(中)으로, 18세 이상은 정(丁)으로 하여 요역을 맡기다가 60세가 되면 늙은이라 해서 이에 면제한다.” 했다. 개황(開皇 : 隋 文帝의 연호) 3년(583)에는 사람의 나이가 21세가 되어야 정으로 하도록 했다.
개황 10년에는 백성의 나이가 50세가 된 자는 용(庸)만 바치고 역(役)은 정지시켰다. 양제(煬帝)가 즉위한 후에, 호구가 더욱 많아져서 남자 나이가 22세가 되어야 정으로 했다. 당(唐)나라 제도는, 백성이 처음 나면 황(黃), 4세는 소, 16세는 중, 21세는 정, 60세는 늙은이로 했다. 천보(天寶 : 唐 玄宗의 연호) 3년(744)에 다시 영을 내려서 백성의 나이가 18세 이상이면 중남(中男)으로 하고, 23세이면 상성정(上成丁)으로 했다. 대종(代宗 : 당 제7대왕)이 조서하기를, “남자 25세를 성정으로 하고, 55세를 늙은이로 하라” 했다. 송(宋)나라건덕(乾德 : 宋 太祖의 연호) 원년(963)에 영을 내려서, “여러 주(州)에서 해마다 아뢰는 데에 남부(男夫)는 20세를 정으로 하고, 60세를 늙은이로 하며, 여자 인구는 간예하지 않는다.” 했다.
살피건대, 상복전(喪服傳)에, “19세에서 16세까지가 장상(長殤)이고, 15세에서 12세까지는 중상(中殤)이며, 11세에서 8세까지는 하상(下殤)이라” 했는데, 상이라는 것은 아직 성인(成人)이 되지 못한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런즉 향대부(鄕大夫) 조에 이른바, 6척(尺)은 16세 이상에 해당되며, 7척은 20세 이상에 해당되는데 정현이 6척을 15세라 한 것은 믿을 수 없다.
내 생각으로는 구전(口錢)은 결코 시행할 수 없으며 따라서 정전(丁錢)은 옛법이라는 것이다. 16세 이상은 반 정으로 삼아서 반 산(半算)을 냄이 마땅하며(1산이 120인즉 반산은 60으로 함이 마땅하다) 20세 이상은 온정으로 삼아서 이에 온전한 산을 징수한다. 그리고 여정(女丁)은 반 산으로 했다가 50세가 되면 면제함이 또한 마땅할 것이다. 역대로 정(丁)을 산(算)한 기한이 혹 일찍부터 했다가 혹은 늦추었다가 하여 전례(典例)로 할 수 없으니, 떳떳한 예로써 절충함이 마땅하다.
화식전(貨殖傳)에, “봉(封)한다는 것은 조세(租稅)를 먹는 것이다. 한해 세율(稅率)이 호(戶)마다 200인즉(호마다 돈 200을 징수하는 것이다) 1천 호가 되는 나라(天戶之君)에는 20만(호마다 200이므로 1천 호에 20만이 되는 것)이 되는데, 조근(朝覲)과 빙향(聘享)하는 비용도 그 중에서 지출된다 서민으로서 농ㆍ공ㆍ상도 또한 해마다 1만(萬)에 이식을 2천으로 기준하였는데(이하 생략) 100만인 집에는 이식이 즉 20만(비율이 2천인 까닭으로 100만 되는 집에도 또한 20만이다)이다. 경요(更徭)와 조부(租賦)도 또한 그 중에서 나오며, 의식(衣食)의 욕구(慾求)에 좋고 아름다움을 마음대로 할 수가 있다.” 하였다.
마단림은, “한나라 법을 상고하니, 구부가 있고 호부가 있는데, 구부는 산부(算賦)이고, 호부는 오직 사서(史書)에 보이는 것뿐이다. 그러나 화식전에 말한 바는 군(君)으로 봉해서 식읍(食邑)하는 호에 부과하던 것으로 되었다. 그런즉 땅으로써 봉하지 않은 것은 현관(縣官)이 별도로 부하는 것이 있었던가? 아니면 이런 역은 없었던가?” 하였다.
생각건대, 구부의 법은 구(口)마다 120이었고, 호부의 법은 호마다 200이었다. 만약 호와 구 두 길로 징수했다고 이른다면 민역(民役)이 너무 무겁고, 만약 호와 구를 합쳐서 징수했다고 이른다면 비록 일부일부가 1호를 이루었더라도 그 돈이 너무 적으니(2구의 산이 240이다) 어찌 알겠는가? 호에 빈부가 있는데도 통틀어 200을 받고, 구에 중과가 있는데도 모두 120을 징수한다면, 만약 의돈(猗頓) 같은 부자라도 자식이 없으면 해마다 바치는 것이 극히 적고, 검루(黔婁) 같이 가난해도 자식이 많으면 해마다 바치는 것이 갑절일 터이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한나라 이후부터는 체제(禘祭)에 이미 강신(灌)한 것 같으니 나는 보고 싶지도 않다(해마다 1만에 이식이 2천이라는 것은 돈놀이를 해서 殖利하는 것을 이른 것. 봄에 2만 냥을 놓아서 그해 말이 되면 이자가 2천이라는 것).
소제(昭帝) 원봉(元鳳) 원년(기원전 80)에, 삼보(三輔)와 태상시(太常寺)에 영을 내려서 고을마다 콩과 조(粟)로써 부(賦)에 당하도록 하였다.
원평(元平) 원년(기원전 74)에, 조서하여 구부전(口賦錢)에 10분의 3을 감했다. 선제(宣帝) 본시(本始) 3년(기원전 71)에, 조서하여 가뭄에 피해된 곳은 조부(租賦)를 내지 말도록 했다. 4년에 조서하여 지진(地震) 피해가 심한 곳은 조부를 거두지 말도록 했다. 감로(甘露 : 漢 宣帝의 중년 개원 연호) 원년(기원전 53)에, 민산(民算)에 30을 줄였다. 성제(成帝) 건시(建始) 원년(기원전 32)에, 부에 산 40을 줄였다.
홍가(鴻嘉) 4년(기원전 17)에, 군국(郡國)에 10분의 4 이상 재해를 당했거나, 백성의 재물이 3만 미만인 것은 조부를 거두지 말도록 했다. 장제(章帝) 건초(建初) 3년(78)에, 조서해서 포백(布帛)을 조(租)로 하였다. 안제(安帝) 원초(元初) 원년(114)에 조서하여 삼보(三輔)에 3년 동안 전조(田租)는 면제하고 다시 구산(口算)을 부과하였다.
생각건대, 한나라 제도는 120을 1산으로 하였는데, 여기에 산을 감했다는 것은 혹 3분의 1을 감하고 혹은 4분의 1을 감한 것이었다. 생각건대, 한나라 때에는 흉년을 만났을 때마다 반드시 조부를 견감(蠲減)했는데,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으므로 지금은 우선 생략한다.
환제(桓帝) 연희(延熹) 8년(165) 초에, 영을 내려서 군국에 전지(田地) 있는 자에게 묘세(畝稅)를 돈으로 거두었다(1묘에 10전이 있음). 영제(靈帝) 중평(中平) 2년(185), 천하 전묘(田畝)에 세를 10전으로 하여 수궁전(修宮錢)이라 불렀다. 영제가 동인(銅人)을 만들고 싶었으나 나라 용도가 부족했다. 이에 조서해서 민전(民田) 매묘에 세 10전을 조정(調定)했는데 육강(陸康)이 상소하여 간했다. 단림은 “장제(章帝) 때에 곡식이 아주 귀하다는 이유로 돈을 봉치(封置)하고, 포백을 조(租)로 했으니 돈과 포백을 대개 번갈아 썼던 것이다. 여기에 이른바, 묘세를 돈으로 징수했다는 것은 상부(常賦)로서 30분의 1을 취하는 것 이외에 내는 것이며, 지금 세전(稅錢)이라는 것도 이때에 시작된 것이다.” 했다.
생각건대, 춘추 시대 이전에 전부(田賦)의 제도를 쓴 자는 노애공(魯哀公)이었고, 춘추 이후에 전부의 제도를 쓴 자는 한나라 환제(桓帝)ㆍ영제(靈帝)였다. 위 무제(魏武帝)는 매호에 깁(絹) 2필, 목면(木綿) 2근(斤)을 부(賦)로 마련하였다. 진 무제(晋武帝)가 오(吳)나라를 평정한 후에 호조(戶調) 제도를 제정하였다. 정남(丁男)이 호가 된 것은 해마다 깁 3필, 목면 3근을 바치고, 여자 및 차정남(次丁男)이 호가 된 것은 그 반을 바쳤다. 그리고 변방 고을은 혹 3분의 2를, 더 먼 고을은 3분 1로 하며, 이인(夷人)은 빈포(賓布)로 호마다 1필을 바치는데, 먼 곳은 혹 1장(丈)으로 하였다. 전지에 부과하지 않는 것으로서, 호마다 의미(義米) 3곡(斛)을, 먼 데는 5두를 바쳤다. 아주 먼 데에는 산전(算錢)을 바쳤는데 사람마다 28문(文)이었다.
마단림은, “양한(兩漢 : 漢과 後漢) 제도로서 세가 30분의 1인 것은 전부(田賦)이고, 20세가 되면 비로소 붙여서, 사람마다 한 산을 내는 것은 호구에 대한 부이다. 지금 진(晋)나라 법이 이와 같음은 두 가지 부를 합쳐서 하나로 한 것인 듯하다.” 했다.
살피건대, 한나라 때에 호구에 대한 부에 대해서는 명백한 문구가 없다. 그리고 위ㆍ진(魏晋) 이후에도 또한 구전(口錢)이라는 말이 없은즉 양한때의 구전이 변해서 위ㆍ진 때 호조(戶調)가 된 것이지, 두 가지로 징수했던 것은 아니다. 호조의 법이 구부보다 좋았으나, 요ㆍ순 이래로 부를 9등으로 분간했고, 《주례》에도 6축(六畜)과 거련(車輦)을 반드시 유사(有司)에게 두루 알게 한 것은 그 가난함과 부유함을 비교해서 9등으로 차(差)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옛적에는 9등으로 갈랐는데, 지금은 2등으로 갈랐으니 그 법이 엉성하다. 성인은 마음이 정밀했는데 후세 사람은 마음이 거칠었다. 정밀한 자가 법을 마련하면 그 부가 고르고 거친 자가 법을 마련하면 그 부가 고르지 못한 것이 모두 이런 따위이다. 효 무제(孝武帝) 태원(太元) 2년(377)에, 전지에 조(租)를 징수하는 제도를 정했다. 왕공(王公) 이하로 구세(口稅)가 3곡(斛)인데 오직 자신의 역(役)은 견감되었다. 8년에, 또 세미(稅米) 5석을 증가하였다.
송 문제(宋文帝) 원가(元嘉 : 송 문제의 연호, 424~453) 연간에 손활(孫豁)이 표문(表文)을 올려서, “무리(武吏)로서 나이가 만 16세면 쌀 60곡을 부과하고, 50세 이하 13세까지는 30곡을 부과해서, 1호 안에 정(丁)의 많고 적음에 따라 모두 쌀을 바친다. 또 13세인 아이는 농사일을 감당하지 못해서 문득 도망쳐 숨는데, 호구가 줄어드는 것은 진실로 이런 까닭이니 부과하는 연한을 다시 마련해서 자립할 수 있도록 함이 마땅합니다.” 했다. 마단림은, “송나라 제도가 진나라 제도와 동떨어지게 다름은 자못 깨닫지 못하겠다. 이른바 60곡이라는 것은 한 해에 부과한 것이 아니었는지 고찰함이 마땅하다.” 했다.
생각건대, 북제(北齊)의 제도는. 경성(京城) 사방 30리 안은 공전(公田)으로 만들었고, 공전을 받는 자는 집사관(執事官) 1품 이하로 우림(羽林)ㆍ무분(武賁)까지인데, 각각 차별이 있었다. 이른바 구세(口稅) 3곡에다 세 5석을 증가해서 30곡, 60곡에 이르렀다는 것은 모두 공전에서 나온 것임을 의심할 것이 없다.
송 효무제(宋孝武帝) 대명(大明) 5년(461)에 천하 인호(人戶)는 해마다 포(布) 4척씩을 바치도록 마련하였다.
생각건대, 이것은 반드시 상부(常賦) 이외에 별도로, 포 4척(尺)을 바치는 것이며, 상부가 이것뿐일 수는 없다.
후위(後魏) 제도는 1부(一夫) 1부(一婦)가 비단 1필, 곡식 1석을 조(調)로 하였다. 사람의 나이가 13세 이상이고 장가 가지 않은 자는 4명이 합쳐 1부 1부의 조(調)를 내었다. 농사를 맡은 노(奴)와 길쌈을 맡은 비(婢)는 8구로 장가가지 않은 자 4명을 당했고, 농우(農牛) 10두(頭)로 노비 8명을 당했다. 그리고 마포(麻布)가 많이 생산되는 고장에서는 1부 1부가 포 1필을 내었다. 대개 10필 중에 5필을 공조(公調)로 하고, 2필은 조외의 비용으로 하며, 3필은 내외 백관의 녹봉으로 하였다.
생각건대, 우마(牛馬)와 노비(奴婢)는 다만 그 많고 적음을 비교해서 9등으로 정함이 마땅한 것인데, 소 10두로 노비 8명을 당한다는 것이 어찌 이치에 맞겠는가? 중상(中殤) 나이는 조(調)가 없는 것이 마땅한데, 이에 장가가지 않은 4명을 1부 1부에 당하도록 함이 어찌 이치에 맞겠는가? 쇠란(衰亂)한 시대의 법은 그 거칠고 어지러움이 이와 같다.
후위 효 문제(後魏孝文帝) 태화(太和) 8년(484), 매호에 비단 3필, 곡식 2석 9두를 증가해서 관사(官司)의 녹봉으로 하였다. 이보다 먼저 천하 호를 9품(品)으로 혼동해서, 호마다 비단 2필ㆍ솜 2근ㆍ곡식 20석을 조(調)로 하고, 또 사람마다 비단 1필 2장(丈)을 그 주(州) 창고에 쌓아서 조정한 외의 비용에 제공(提供)했는데, 이때에 와서 증가한 것이었다. 장제(莊帝)가 즉위(卽位)한 후에 사람의 빈부에 따라 3등 9품으로 조(租)를 바치는 제도를 만들었다. 1천 리(千里) 안은 속(粟)을 바치고, 1천 리 밖은 미(米)를 바치는데, 상(上) 3품은 호마다 경사(京師)에 들이고, 중(中) 3품은 다른 주(州)의 요창(要倉)에 들이며, 하(下) 3품은 그 주에 들였다. 정제(靜帝) 때, 여러 주에 조(調)로 한 깁은 죄다 40척을 한도로 하였다. 효 명제(孝明帝) 때에 장보(張普)가 상소하기를 “고조(高祖)께서 큰 말(斗)을 없애고 긴 자를 버리며, 무거운 저울을 고친 것은 백성을 사랑해서 박한 부(賦)를 따른 것입니다. 이후로부터는 자가 점점 길어지고 말이 넓어졌습니다. 지금 백관이 녹봉을 청하면서 다만 그 길고 넓은 것과 후하고 무거운 것을 좋아해서 다시 표준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길고 넓으며, 후하고 무거운 것으로 얻은 자는 그 주(州)에서 능히 비단과 베를 조정한다 합니다. 문득 아름다운 칭찬을 남발해서 보고 들음을 어지럽히는데, 이것은 온 관사(官舍)가 성상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관자(官度), 관저울(官秤)에 의해서 그 근량과 양과 길이를 계산해서 녹봉을 청구하는 사람에게 적당히 계산하여 주기를 청합니다.” 했다. 생각건대, 무릇 포백을 징수하는 데에는 길고 넓음에 도(度)를 두고, 가벼움과 무거움에 수량을 두어 정하기를 장보의 말과 같게 함이 마땅하겠다.
북제 문선제(北齊文宣帝)가 비로소 호를 9등으로 하는 법을 세워서 부자에게는 세를 돈으로 받고, 가난한 자에게는 그 힘을 부렸다. 무성제(武成帝) 때엔 법으로 정하여 사람 1상(牀)에 비단 1필, 목면(木綿) 8냥을 조(調)로 하였다.
살피건대, 후위 이래로 모두 9등으로 백성에게 거두었다. 사람 1상(床)이란 부부(夫婦)가 침상(寢床)을 함께 하기 때문이다. 9등의 차(差)는 상호(上戶)ㆍ중호(中戶)ㆍ하호(下戶)라는 구분이 있고, 상효(上梟)ㆍ중효ㆍ하효라는 항목이 있었는데. 전대(前代)와 비교해서 제법 조리가 있었다. 후주(後周)의 제도는 사부(司賦)가 부를 고르게 하는 정사를 맡았다. 아내[室]가 있는 자도 해마다 깁 1필, 목면 8냥(兩), 곡식 5곡에 불과했고, 정(丁)은 반이었다. 그리고 누에 치는 고장이 아니면 아내가 있는 자는 베 1필, 삼 1근이고 정은 또 그 반절이었다. 풍년에는 전액을 부과하고, 평년에는 반액으로 하며, 하년에는 한 가지만으로 해서 모두 그 시기에 징수하며, 기근과 전염병이 유행하는 해에는 징수하지 않았다.
생각건대, 아내가 있다는 것은 《주례》에 이른바 부가지정(夫家之征)이고, 정이란 《주례》에 이른바 나라 안은 6척(尺), 야(野)에는 7척이라는 것이다. 후주의 법은 모두 《주례》 제도를 본떠서, 가장 볼 만한 것이 있었는데, 대개 이때는 경학(經學)이 조금 밝아졌기 때문이었다.
수 문제(隋文帝)는 주(周)나라 제도에 의해서 역정(役丁)을 12번(番)으로 하여 공장(工匠)은 6번이었다. 정남(丁男) 1상(牀)은 조속 3석 외에 누에 고장이면 깁과 명주를 조(調)하고, 삼 고장이면 베를 조하였는데, 깁과 명주는 필로 하여 목면(木綿) 3냥(兩)을 덧붙이고, 베는 끝(端)으로 하여 삼 3근을 덧붙였다. 단정(單丁) 및 노복(奴僕)과 하례(下隸)는 각 반액으로 하고, 작품(爵品)이 있거나 효자(孝子)ㆍ순손(順孫)ㆍ의부(義夫)ㆍ절부(節婦)는 아울러 요역 부과를 면제하였다. 개황(開皇) 3년에 12번을 줄여서 한 해에 30일을 노역하고 깁 1필을 줄여서 2장(丈)으로 조정하였다. 양제(煬帝)가 즉위하자, 호구가 더욱 많아져서 부고(府庫)가 넘치므로 이에 부인(婦人) 및 노비와 부곡(部曲)에 부과하던 것을 면제하였다.
생각건대, 정남 1상이란 부가지정이고, 단정을 반액으로 한다는 것은 6척ㆍ7척에 대한 정(征)으로 모두 주나라 제도에 근거한 것이니, 보는 자가 자세히 살핌이 마땅하겠다(絹이 베같이 거친 것은 絁이고, 얼음같이 매끈한 것은 綾이라 한다). 당(唐)나라 무덕(武德 : 唐 高祖의 연호) 2년(619)에는 정(丁)마다 조(租) 2석, 깁 2필, 목면 3냥으로 제정하고, 이 밖에 불법으로 징렴(徵斂)함이 없도록 하였다.
생각건대, 역대로 부과 징렴한 것이 이와 같이 무거웠던 것은, 이른바 한정(丁)은 모두 전지 한 경(頃)을 받았고, 깁ㆍ베ㆍ목면ㆍ삼(麻)은 모두 전역(田役)에다 신공(身貢)을 겸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조는 2석뿐이나 다른 물품이 도리어 많았던 것이다. 당나라 무덕 7년(624), 비로소 균전(均田)해서 조세(租稅)를 부과하는 것을 정했다. 무릇 천하 정남으로서 18세 이상인 자에게는 전지 1경을 주었다(이하 생략). 무릇 전지를 받은 정은 해마다 곡식 2석을 바치는데 이것을 조(租)라 이르며, 정이 그 고장에 산출(産出)되는 것에 따라서 해마다 견(絹)ㆍ능(綾)ㆍ시(絁) 각 2장(丈)과 베는 이보다 5분의 1을 더하고, 목면 3냥을 바친다. 베를 바치는 자는 삼 3근을 더하는데 조(調)라 이른다. 사람의 힘을 사용하는 것은 해마다 20일이고 윤달(閏)이 있는 해에는 이틀을 더하며, 노역하지 않는 자는 하루를 깁 3척(尺)으로 하면서 용(庸 : 傭의 뜻임)이라 이른다. 일이 있어서 25일을 더 노역한 자는 조(調)를 면제하고, 30일을 노역한 자는 조(租)ㆍ조(調)를 모두 면제한다. 그런데, 정역(征役)은 아울러서 50일을 넘지 못한다. 현종(玄宗) 개원(開元) 8년에, 조(租)ㆍ용(庸)ㆍ조(調)의 법을 천하에 반포하였다.
《신당서(新唐書)》 식화지에 “정(丁)마다 속(粟) 2곡, 벼 3곡을 바치고, 조(調)는 해마다 깁 2필, 능(綾)ㆍ시(絁) 각 2장(丈)을 바치는데, 베는 5분의 1을 더하고, 목면 3냥과 삼 3근을 바친다. 누에 고장이 아니면 은(銀) 14냥을 바친다.’ 했다. 육지(陸贄)는, “전지(田地)가 있으면 조(租)가 있고, 집이 있으면 조(調)가 있으며, 몸이 있으면 용(庸)이 있었다. 천하가 한 집이 되고, 법제(法制)가 하나같이 고르면 비록 이리저리 옮겨가도 간사함이 용납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정형(程逈)은, “두우(杜佑)가 《이도요결(理道要訣)을 지으면서 우문융(宇文融)의 공(功)을 일컬었다. 육지는 조ㆍ조(租調)의 법을 칭찬하면서, ‘교열(校閱)하지 않아도 많고 적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연고로 전지를 받은 1정에게 2정의 부(賦)를 바치게 할 수는 결코 없다. 그리하여 두 가지 세(稅)를 향사(鄕司)에서 능히 많게도 적게도 하여 그 사이에 농간하던 것처럼 하지는 못한다.’ 하였다. 그런데 사신(史臣)은 ‘주ㆍ현(州縣)에서 융(融)의 뜻을 영합하여 실수 없이 그 숫자만 벌여서 수입을 올리기에만 힘써, 대개 육지의 말과 배치된다.’ 하였으니, 어찌 사신이 그 실상을 상고하지 못한 것이겠는가?” 했다.
생각건대, 100묘의 세로서 다만 조(粟) 2석(20두)인 것은 너무 가볍고, 1호의 부(賦)가 은 14냥인 것은 너무 무거우며, 백성의 노역을 씀이 해마다 20일이 되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당나라 제도는 호를 9등으로 갈랐는데, 조ㆍ용ㆍ조에 대해서는 9등으로 했다는 문자가 없으니 무엇으로써 좋은 법이라 일컬었는지 지금은 알 수가 없다. 대종(代宗) 대력(大曆) 4년(769), 천하 및 왕공(王公) 이하에게 칙서를 내려서, “금후에는 탁지(度支) 장행지(長行旨) 조를 표준함이 마땅하되 매년 세전(稅錢)으로 상지상 호는 4천문(文), 상지중 호는 3천 500문, 상지하 호는 3천 문, 중지상 호는 2천 500문, 중지중 호는 2천 문, 중지하 호는 1천 500문, 하지상 호는 1천 문, 하지중 호는 700문, 하지하 호는 500문이다. 현재 관직에 있는 자로서 1품은 상지상 호의 세를 준(準)하고, 9품은 하지하 호의 세를 준하는데, 나머지 품도 아울러 이 호등(戶等)의 세에 준한다.” 하였다.
백성으로서 저점(邸店 : 상점)ㆍ행포(行舖 : 노점)ㆍ노야(爐冶ㆍ대장간)가 있는 자는 본호(本戶) 2등의 세를 준하며, 그 기장호(寄莊戶 : 주민으로서 노동력, 곧 丁이 있는 것)는 8등 호의 세를 따르며, 기주호(寄住戶 : 住居民을 말함)는 9등호의 세를 따르며, 여러 도(道) 장사(將士)의 장전(莊田)은 아울러 9등 호의 세를 따라서 바친다. 마단림은, “세를 돈으로 바치고 곡식과 비단으로 하지 않으며, 자력(資力)으로써 세를 정하고 신정(身丁)은 묻지 않는 것을 사람들은 모두 양세(兩稅)를 시행하기 시작한 이후의 폐단이라 하나 지금 이것을 본즉 유래한 지가 오래이다.” 했다.
생각건대, 삼대(三代) 적에는 백성의 살림이 이미 균등했으니 그 부렴에도 차등이 없었음이 마땅했다. 그러나 6축과 거련(車輦)ㆍ원림(園林) 따위 수효를 오히려 긴절하게 계산해서 9등으로 분간했는데(大司徒 條에 있다), 하물며 후세에는 겸병하는 것을 금단하지 않아서 백성의 빈부가 아득히 천양(天壤)의 간격과 같았으니 어찌 9등으로 분간하지 않겠는가? 대력(大曆) 시대 제도가 가장 이치에 맞았다. 다만 왕공의 작위(爵位)는 5등으로 벌였고, 조신(朝臣)의 관직은 9품계(品階)로 갖추었는데, 모두 소민(小民)과 율을 같이 하여 그 호부(戶賦)를 징수했은즉, 천하에 드디어 존비와 귀천의 등과 군자 소인의 계급이 없어지는 것이니 어찌 옳겠는가? 이런 것이 어찌 후세의 법이 되겠는가?
덕종(德宗) 건중(建中) 원년(780)에, 양염(楊炎)이 정승이 되어, 드디어 양세법(兩稅法)을 만들었다. 여름 납기는 6월을 넘기지 못하고 가을 납기는 11월을 넘기지 못하는데, 양세사(兩稅使)를 두어서 총괄하도록 하였다. 먼저 주ㆍ현에 해마다 꼭 소용되는 비용 및 상공(上供)하는 액수를 계산한 다음, 사람들에게 부과했는데, 지출을 요량해서 수입을 정했다. 호(戶)에 주객(主客)의 구별이 없어, 현재 있는 자로써 문부(文簿)를 만들고, 사람은 정남(丁男)과 중남(中男)이라는 구별도 없이 빈부(貧富)만으로 차등 했다. 한 곳에 있지 않고 행상하는 자는 그가 있는 주ㆍ현에서 30분의 1세를 받는데, 받는 것이 일정한 곳에 있는 자와 고르게 해서 요행한 이득이 없도록 하고, 그 조용(租庸)과 잡요(雜徭)는 면제하되 정액(丁額)은 폐하지 않으며, 그 전묘(田畝)에 대한 세는 대력 14년 현재, 기간(起墾)된 전지의 수로 정해서 고르게 징수했는데, 출척사(黜陟使)를 보내서 여러 도의 정남(丁男)과 살림의 등급을 상고하고 홀아비ㆍ홀어미ㆍ독자ㆍ자식 없는 늙은이로서 제대로 생활을 이루지 못할 사람은 면제했으며, 감히 덧붙여서 징렴한 것은 법을 어긴 것으로써 논죄(論罪)했다.옛 제도에는 380만 5천 호였는데, 사자(使者)가 조사해낸 것은 주호(主戶)가 380만이고, 객호(客戶)가 30만이었다. 천하 백성을 토단(土斷)해서 지착(地著)하지 않았고, 판적(版籍)을 고치지 않아도 그 허실을 알아서, 해마다 돈 2천 500여 만 꿰미[緡], 쌀 400만 곡을 거두어서 외방에 공급하고(이하 생략), 돈 950여 만 꿰미와 쌀 600여 만 곡을 경사에 공급하니 천하가 편하게 되었다.사신(史臣)이 이르기를, “조ㆍ용ㆍ조의 법은 인정(人丁)을 근본한 것이다. 개원(開元) 이후에 오래도록 판적을 정리하지 않아서 법도가 폐폐(廢弊)하였다. 정구(丁口)가 옮겨가기도 죽기도 했으며, 전묘가 바뀌고 빈부가 오르내려서 죄다 전과 같지 않았는데, 호부(戶部)에서는 해마다 헛 문서만을 올렸다. 왕홍(王鉷)이 호구사(戶口使)가 되어 취렴(聚斂)에만 힘썼다. 이에 옛 판적을 조사해서 30년 동안 면제되었던 조ㆍ용을 독촉하니, 사람들이 호소할 데도 없는 처지를 괴로워하고 법이 드디어 크게 무너져버렸는데, 지덕(至德 : 肅宗의 초기의 연호, 756~757) 연대 이후에 천하에 병란이 일어나서 인구가 축나고 판도(版圖)가 비었었다.
그러나 부렴하는 관청은 서로 통섭(統攝)이 없고 기강이 크게 무너져서 왕부(王府)에 들어오는 것은 얼마 없었다. 상류층에는 부과가 면제되고 하류층에는 부과가 증가되었다. 이리하여 천하 백성이 몹시 가난해지고 허탕하게 떠돌이가 되어 제 고향에 토착한 자는 100에 4~5명도 못 되었다. 양염이 그 폐단을 걱정하여 이에 양세법을 청해서 그 제도를 하나로 만들었다. 논의하는 자는 “조ㆍ용ㆍ조는 고조와 태종이 마련한 법이니 경솔히 고칠 수 없다.” 했으나, 황제가 한창 염(炎)을 신임했으므로 드디어 시행하였다. 이로부터 아전들의 간사한 짓이 용납되지 않으니 경하게 하고 중하게 하는 권한이 비로소 조정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마단림은, “우문융과 양염은 모두 폐정(弊政)을 개혁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하였는데, 융은 고조ㆍ태종의 법을 지켰고, 염은 고조ㆍ태종의 법을 변경하였다. 그러나 융이 옛법을 지켰으되 사람들이 병통으로 여긴 것은 주ㆍ현을 핍박하고, 도망친 나머지를 망령되이 증가해서 제 공으로 한 때문이었고, 염은 법을 변경했으되 사람들이 편하게 여긴 것은 인정에 순응하여 우선 빈부를 비교해서 부를 마련한 때문이었는데, 지금에 반드시 융을 좋게 여기고 염을 나쁘게 여김은 사정에 합당하지 못하다.” 했다.
생각건대, 양세라는 것은, 여름 세와 가을 세였다(《通鑑》 주에 있다). 여름 세는 양맥(兩麥)이 수확되고, 견사(繭絲)가 새로 나왔으므로 비단(綾絹) 따위를 이때에 징수하는 것이요, 가을 세는 오곡이 수확되고, 길쌈이 새로 이루어졌으므로 명주와 베(絁布) 따위를 이때에 징수하는 것인데, 전세 2석은 이 두 가지 세 외에 있었던 것이다. 양세라는 명칭은 대종(代宗) 때에 생겼던 것인데(옛법도 또한 여름 세, 가을 세로 되어 있다). 양염이 특별히 윤색했을 뿐이다.
예전에는 정구(丁口)를 근본으로 삼았는데, 지금은 가산(家産)을 으뜸으로 하니, 많은 사람들이 병통으로 여긴다. 일찍이 논했거니와 요ㆍ순과 삼왕시대에는 전지를 9등으로 분간하고 부(賦)도 9등으로 갈랐다. 전지는 진실로 그러함이 마땅하지만 부는 어찌해서 그렇게 했던가? 그때 천하 백성은 한 집이 전지 100묘씩을 받아서 빈부가 없었다. 그러나 6축과 거련을 반드시 신중하고 알맞게 타산해서 그 빈부를 살폈던 까닭에 곡례(曲禮 : 《禮紀》의 편명)에, “사(士)의 부를 물으면 수레를 헤아려서 대하고, 서인(庶人)의 부를 물으면 짐승을 헤아려서 대한다.” 했는데 이것이 그 증험이다.
원포(園圃)의 이익이 있거나 칠림(漆林)의 이익이 있으면 그 남은 것을 살폈다(載師 條에 있다) 선왕이 백성의 빈부를 살펴서 부렴(賦斂)의 차등을 바룬 것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후세에 와서는 겸병(兼幷)이 날로 심하여 부유한 자의 전지는 군ㆍ현에 연했고, 가난한 자의 집은 경쇠(磬)를 달아맨 것 같은 것이겠는가? 백성의 부모가 된 자는 백성의 빈부를 살피게 된 것이니, 삼고(三古 : 고대를 3등분한 것. 上古ㆍ中古ㆍ下古) 적과 비교하면 더욱 정하게, 더욱 엄하게 함이 마땅한데, 도리어 정(丁)을 근본으로 하여 빈부를 살피지 않는 것이다. 한 해 수입이 1만관(萬貫)인 자도 일률(一率)을 내고, 아침에 저녁거리를 생각하지 못하는 자도 일률을 내어, 부유한 자가 왕토(王土)를 침식하되 나라에는 도움이 없고, 가난한 자가 구렁에 쌓이되 그 고혈을 바치니 어찌 좋은 법이겠는가?
조ㆍ용ㆍ조의 법은 당 고조 무덕(武德) 7년에 이룩되었는데, 이때에 진왕(秦王) 세민(世民 : 뒤에 太宗이 됨)이 미처 당국(當國 : 즉위와 같음)하기 전이므로 중외(中外)가 위험스럽게 생각하고 의심하여 먼 앞날을 고려함이 없었으니, 그 제정한 법이 어찌 요ㆍ순과 3왕의 법과 같아서 문리(文理)가 치밀하고 천작(天作)으로 된 쇠뭉치같아서 만세에 전하도록 폐단이 없는 것과 같겠는가? 비록 천보지란(天寶之亂)이 아니더라도 이 법(法)은 오래가면 무너지는 것이 그 필연의 형세였다. 양염이 유안(劉晏)을 학살하여, 중외가 눈을 흘겼던 까닭으로 양세법(兩稅法)도 사람들이 많이 헐뜯었으나 실상 잘 변경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등을 분간해서 차등한 율의 많고 적은 숫자가 사책(史冊)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1등 2등이라는 세를 도무지 밝힐 수 없으나 생각건대 대력(大曆) 시대에 9등으로 하던 제도와 그리 동떨어지지는 않았을 듯하다.
육지(陸贄)의 주의(奏議)에 이르기를, “조ㆍ용ㆍ조의 옛법은 이에 성조(聖祖)의 전장(典章)으로 시행한 지 100년이 되었건만 사람들이 편리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지금 양세법을 창설해서 이에 군ㆍ읍(郡邑)을 수색하고 부서(簿書)를 핵실(劾實), 주(州)마다 대력 때 1년 과율(科率) 중에 전곡(錢穀)이 가장 많던 것을 뽑아서 문득 양세의 정액(定額)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이에 법 아닌 권령(權令 : 임시 방편으로 내는 명령)을 채택해서 떳떳한 제도로 만들고, 명목 없는 가혹한 부(賦)를 가려서 일정한 규정을 세웠으니, 이것은 재물 모으기에 힘쓴 것입니다. 어찌 백성의 고통을 규휼한다고 이르겠습니까? 무릇 재물이 나는 것은 반드시 인력을 인연함인데 공교하면서 능히 부지런하면 재물이 풍부해지고, 졸(拙)하면서 게으르면 재물이 매양 없어집니다. 이러므로 선왕이 부세 수입을 마련할 때 반드시 정부(丁夫)를 근본으로 하여 인력 한계분(力分) 밖에 요구가 없었고, 역분 안에는 용서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농사에 힘썼다는 이유로 그 세를 증가하지 아니하고, 농사를 폐했다는 이유로 그 조(租)를 감면하지 않으면 파종(播種)하는 것이 많아질 것이며, 살림이 불어났다는 이유로 그 정(征)을 많게 하지 않고, 타향살이(流寓) 한다는 이유로 그 조(調)를 면제하지 않으면 토착(地利)이 굳어질 것이며, 스스로 경계하며 힘쓴다는 이유로 그 역(役)을 중하게 하지 않고, 구차하고 게으르다는 이유로 그 용(庸)을 견감하지 않으면 공력(功力)이 부지런해질 것입니다. 이와 같은 다음이라야 능히 사람에게 그 삶을 편케 여기며 그 힘을 다해서 서로 보고 본받으며, 도망하려는 마음이 없어질 것이니, 비록 게으르게 놀고 따르지 않는 사람이 있더라도 또한 벌써 징계되었을 것입니다.
양세를 세우는 것인즉 이것과 달라서 오직 자산(資産)을 으뜸으로 하고 정신(丁身)을 근본으로 하지 않아서 자산이 적은 자는 그 세가 적고, 자산이 많은 자는 그 세도 많습니다. 그러나 자산이 많은 자 중에도 그 사정이 하나같지 않다는 것은 깨닫지 못합니다. 혹 품속이나 상자에 감추면 물건은 비록 귀한 것이나 남이 능히 엿보지 못하고, 혹 마당이나 창(倉)에 쌓아서 값은 비록 헐하나 남들이 부자라 하며, 혹 유통시켜서 이식을 불리는 재물이 있어 액수는 비록 적더라도 날마다 남는 것을 수입하며, 혹 여사(廬舍)나 기구 따위 자산이 있어 값은 비록 비싸나 그 해가 다 가도록 이익이 없는 것이 있으니, 이와 같은 따위는 그 종류가 실상 번잡한데, 통틀어서 값을 헤아리고 꿰미를 셈한다면 그 균평을 잃고 거짓이 불어날 것이 마땅합니다.
이를 말미암아 가벼운 재물에 힘써서 옮겨가기를 좋아하는 자는 항상 요역(徭役)에 빠지고, 본업(本業)에 힘써서 거산(居産 : 부동산 따위를 말함)을 가진 자는 매양 징구(徵求)에 시달리니, 따라서 이것은 간사하도록 유도하고, 요역을 피하도록 고취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역용(力庸)이 느슨해지지 않을 수 없고, 풍속이 그릇되지 않을 수 없으며, 여정(閭井)이 잔피하지 않을 수 없고, 부입(賦入)이 모자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제도를 창설하던 당시에 다시 균평히 하기를 힘쓰지 않고 다만 본도(本道) 본주(本州)에게 각각 예전 액수대로 세를 징수하도록 하여 취렴에만 급하고, 혹 견제(蠲除)될까 두려워서 물력(物力)이 감당할 것인가는 요량하지 않고, 오직 예전 액수를 표준으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예전에 중하던 곳은 유산(流散)이 더욱 많고, 예전에 가볍던 고장에는 귀부(歸附)하는 것이 더욱 많아집니다. 유산이 있으면 이미 중한 자에게 분배해서 징수하는 것이 점점 무거워지고, 귀부가 있으면 이미 경한 자가 갈라서 내는 것이 점점 가벼워집니다. 높아짐과 낮아짐이 서로 기울어지는데 그 형세 어찌 능히 그치겠습니까?
또 처음 계획할 즈음에 조목을 세우지 않고 사신(使臣) 10여 명을 갈라 보내니, 오로지 제 뜻대로만 시행해서 각자 한 모퉁이만 마련하여 드디어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고 방법을 다르게 해서 낮추고 올림이 같지 않고 늦추고 조임이 떳떳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정에 복명하게 되어서도 마침내 유별로 모아 처리함이 없었으니 그 얼룩졌음을 어찌 이루 다 말하겠습니까?” 하였다.
생각건대, 육지는 군자이고 양염은 소인이었다. 그러나 조ㆍ용 법이 반드시 좋기만 한 것이 아니고, 양세법이 반드시 나쁘기만 한 것이 아닌데 지의 말은 너무 치우치니, 이것이 그의 병통이었다. 그가 논한 양세의 병통도 그런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는데, 내가 시험삼아 논해보겠다.
대력 연간에 가장 높았던 세율을 정액(定額)으로 세운 것은 양염의 잘못이었다. 무릇 부세를 평균하게 하는 법은, 위로 나라의 용도를 요량하고 아래로 백성의 힘을 요량함인데, 나라의 용도에 반드시 줄이지 못할 것은 백성이 비록 괴롭더라도 거두지 않을 수 없으며, 백성의 힘이 반드시 감당하지 못할 것은 나라가 비록 어렵더라도 가볍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백성의 힘을 헤아리지 않고 먼저 가장 높았던 비율을 일정한 규정으로 정했으니, 설령 백성의 힘이 감당할 만하다 하더라도 그 명목은 이미 깨끗하지 못하다. 이것은 양염에게 잘못이 있고 육지의 말이 옳다.
그 선왕의 법이 반드시 정부(丁夫)를 근본으로 했다는 것은, 지의 말이 통하지 않는다. 선왕 시대에는 백성의 살림이 매우 균등했으므로 정부를 근본으로 해도 그 부(賦)가 또한 평균했다. 그런데도 6축과 거련을 반드시 절실하게 계산해서 9등으로 갈랐다. 더구나 후세 백성의 빈부의 차는 하늘과 땅처럼 동떨어지는데 어찌 정으로 근본을 삼을 수 있겠는가? 선왕의 법은, 농사를 힘껏 하는 자에도 세를 증액하지 않고, 농사하지 않는 자도 그 곡식을 면제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백성의 빈부는 어찌 다만 농사를 힘껏 한 부자와 농사하지 않은 가난함뿐이겠는가? 부유한 자는 농사하지 않아도 소봉(素封)되고, 가난한 자는 농사를 힘껏 해도 적빈(赤貧)이다. 우ㆍ직(禹稷)과 주공(周公)으로 하여금 오늘날에 법을 마련하도록 하더라도 과연 빈부를 고르게 해서 한결같이 해내겠는가? 따라서 지의 말은 크게 잘못이다.
그 자산 중에도 사정이 한결같지 않다는 것은 지의 말이 절실하다. 그러나 주머니에 금을 넣고 상자에 은을 담아 봉해두고, 움직이지 않아서 남이 능히 엿보지 못하는 것은 그저 수전노(守錢虜)일 뿐이다. 비록 100년이 지나더라도 그 이문이 없는 것이 적빈한 자와 같으니, 많이 징렴하기에는 불가하다. 그리고 주머니와 상자에 간직한 물건이 혹 한번이라도 뒤집혀 움직이면 사람이 엿보게 되고 따라서 부세를 매길 터이니 또 무엇이 불가하겠는가? 돈 꿰미를 셈하는 즈음에 비록 실제와 상위(相違)가 있다 치더라도 대략 부한 다음이라야 부하다 하고 가난한 다음이라야 가난하다고 이른다. 그 실제에 잘못되는 것을 걱정하여 도리어 빈부를 혼동한다면 소봉(素封)도 한 율이, 적빈(赤貧)도 한 율이 될 터이니, 그 실수가 더욱 크지 않겠는가? 따라서 지의 말은 크게 잘못되었다.
혹 면제됨을 염려해서, 오직 예전 세액을 표준했다고 말한 것은 양염에게 잘못이 있고 지의 말이 옳았다. 대저 일대의 왕이 법을 마련하는 데는 9주(州)를 통틀어 한 율로 씌우고 내외 원근을 한 저울로 공평하게 단 다음이라야 “바야흐로 모든 땅을 서로 바루어서 재부를 삼가되 다 3등으로 품절하여 중국에 부를 이룩한다.”(庶土交正 底愼財賦 咸則三壤 成賦中邦 : 《晝經》 禹貢 편에서 인용)라고 이를 수 있다. 예전부터 세액이 가볍던 고장에는 증액해서 평균하게 하고, 세액이 무겁던 고장에는 세액을 견감해서 평균하도록 하며, 세액이 평평한 곳에는 그대로 평평하게 한다. 그렇게 되어 증액된 자가 원망을 해도 법을 맡은 자가 놀라지 않고, 견감된 자가 칭찬해도 법을 맡은 자가 덕으로 여기지 않은 다음이라야 바야흐로 백성의 부모라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지금 여러 주를 가만히 계산해보니, 가벼운 데는 많지 않고 무거운 데가 실상 많았다. 이에 차라리 가벼운 쪽에 잘못될지라도 무거운 쪽을 아껴서 오직 예전 세액을 표준했고, 같은 예로 평균하도록 구하지 않았으니, 이는 양염의 간사함이 일찍이 선(善)을 좋아하는 마음은 없고, 윗사람에게 이익되게 하기에만 급급했을 뿐이니 지의 말이 옳았다.
그 사신(使臣)을 갈라보내 소견이 다르고 법을 다르게 했다고 일컬은 것은 양세법(兩稅法)의 죄가 아니다. 사람마다 제 뜻대로 해서, 이렇게 고르지 못함이 있지 않게 하려면 지는 힘껏 청해서 그 사자 열 사람 중에서 유능한 두어 사람을 뽑은 다음 각각 규례를 주어서 한 법을 따르도록 했음이 옳았다. 그러하건만 이 말단의 잘못된 것만을 지적하여 그 본법을 파괴하려 한 것이니 어찌 공변된 언론이겠는가? 이것인즉 지의 말은 반드시 그렇지 못했다.
육지 주의에 이르기를, “곡식과 비단은 인민이 만드는 것이고, 전화(錢貨)는 관(官)에서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국조(國朝)에서 영(令)을 내려 조(租)는 곡식을 내고, 용(庸)은 깁을 내며, 조(調)는 비단ㆍ솜ㆍ베ㆍ삼을 섞어서 내는데, 이 종류가 아닌 것은 부법(賦法)에도 들지 않았습니다. 열성(列聖)께서 남긴 법은 환하게 징험할 수 있는데, 일찍이 백성에게 주전하는 것은 금단해놓고 어찌 돈을 부(賦)한 적이 있었습니까?
지금 양세법은 유독 옛 전장(典章)과 다릅니다. 그 땅에서 나는 것을 부과하는 공통된 법을 어기고, 돈 꿰미를 계산하는 말단의 법을 본받아서 사리와 인공(人功)을 헤아리지 않고서 다만 자산 매기기에 조금 편리하다는 이유로 전곡(錢穀)을 세로 정했습니다. 시기에 임박해 잡물(雜物)과 절충하여 징수하는데, 해마다 명목이 자못 달라 오직 구득하기에 이롭고 마땅함만을 계산하고 진공(進供)하기에 어려운가 쉬운가는 논하지 않으므로 징수하는 것이 업(業)한 바가 아니고, 업하는 것이 징수하는 바가 아닙니다. 드디어 값을 증가해서 저에게 없는 것을 사기도 하고, 값을 줄여서 저에게 있는 것을 내다파는데, 한쪽으로 증액하고 한쪽으로 감액하니 모손(耗損)이 벌써 많아졌습니다. 또 백성의 경영하는 바는 오직 농사짓고 길쌈하는 데에 있어, 인력으로 만드는 것은 한도가 있고 물가(物價)의 귀천은 정한 것이 없으므로 이에 세를 정하면서 돈으로 계산하고, 돈으로 따져서 물건을 납부하도록 하니, 이것은 한정된 물(物)을 가지고 무상한 바침[供]을 받드는 것입니다.” 하였다.
생각건대, 지의 말은 근본한 데가 있으니 그 누가 불가하다 하겠는가? 그러나 내가 일찍이 보니, 백성이 바치기에 가장 즐겁게 여기는 것은 돈이었고, 그 다음은 곡식이며, 가장 괴로워하는 것은 포백이었다. 대개 포백이라는 물건은 길고 짧은 것이 있고 넓고 좁은 것이 있으며, 엉성하고 촘촘한 것이 있고 두텁고 엷은 것이 있으며, 정하고 거친 것이 있고, 아름답고 나쁜 것이 있다. 백성이 시험삼아 나쁜 것을 내놓으면 관에서는 아름다운 것을 요구하여, 한 필을 바치는 데에 세번 네번 퇴짜를 놓는다. 아전은 이를 인연해서 간사한 짓을 하며 온갖 폐단이 시끄럽게 일어나는데, 이것이 이른바 예전과 지금이 같고 중국과 우리나라가 같다는 것이다.
곡식이라는 물건에도 정하고 거친 것이 있고, 그 두량(斗量)하는 데에도 평평하고 넘치는 것이 있어서 관에서 한 번이라도 검사를 잘못하면 백성이 그 해를 받는다. 오직 돈이라는 물건은 백이면 백이다 하고 천이면 천이다 하여, 저울과 자를 쓰지 않고 말과 곡을 쓰지 않아도 수효에 이미 모자람이 없으니, 트집 잡아서 말할 만한 것이 없다. 본래는 위에서 만들었으나 지금에는 이미 아래로 흩어져서 곡식이 있고 베가 있으면 제대로 돈을 얻을 수 있으니 그 없는 것을 요구한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취렴하는 신하가 이(利)를 좇아 의(義)를 잊어서 베가 흔하면 돈을 징수하고 베가 귀하면 베를 징수하여, 관에서는 항상 이를 쌓고 백성은 항상 해를 입으니, 이 점이 바로 백성이 심복하지 않게 되는 이유이다 다만 백성에게 편리함만 구하고 나라의 유족(裕足)함을 돌보지 않는다면 모든 부렴은 모두 돈으로 바치도록 해도 가하겠다.
그러나 백관에게 녹봉을 주어야 하고, 삼군(軍)에 상사(賞賜)하는 일이 있어 포백을 징수하는 것도 없을 수 없으니, 삼 가꾸기에 알맞고 뽕나무 가꾸기 알맞은 고장은 마땅히 포백으로 액수를 정해서 헐해도 물리치지 말고 귀해도 또한 탐하지 말아야 백성의 원망이 없을 것이다. 그 땅에 소산이 없으면 혹 돈으로 징수하고 혹 곡식으로 징수하여도 불가할 바가 없겠지만, 육지는 반드시 돈을 없애고 베를 징수하고자 했으니, 그의 논의(論議)도 편벽되었다(白居易의 시에 “사삿집에 돈 만드는 대장간이 없고(私家無錢罏), 평지에는 구리 산이 없다(平地無銅山). 어찌해서 여름 세와 가을 세를(胡爲秋夏稅), 해마다 해마다 돈으로 받는가(歲歲輸銅錢)?” 했으니 그때의 민심은 대개 돈 바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단림은 “역시 구부의 법(法)은 모두 정ㆍ중(丁中)을 보아서 후하게도 박하게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빈부가 가지런하지 않음은 그 유래한 지가 오래이다. 지금 정(丁)이 되지 않은 어린이가 여러 대(代) 자산(資産)을 이어받아서 집에 천금을 쌓아도 이에 부가 박하고, 또 나이는 이미 장성했으나 몸이 곤궁해서 집에 송곳 세울 땅도 없는 자는 이에 부가 많은데 어찌 어긋나고 뒤틀리지 않았는가?
지금 양세법은 사람에 정ㆍ중(丁中)할 것 없이 빈부만으로 차등하니 더구나 적당하다. 선공(宣公 : 陸贄의 시호)이 이른바, ‘값을 헤아리고 꿰미를 세는 것은 평균함을 잃고 거짓을 자라나게 하며 가벼운 재물을 가지고 옮겨다니는 자는 요역에 빠지고, 본업(本業)을 힘써서 옮기지 않는 자는 염구(斂求)에 고달프다. 이에 간사한 짓을 하도록 유도하고, 요역을 피하도록 고취하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일을 맡아서 봉행하는 자가 밝지 못하고 공정하지 못한 허물이며 법의 폐단은 아니다.
대개 농사를 힘껏 해서 근본에 힘쓰는 것과 장사치가 이끗(利末)을 좇는 것은 모두 치부를 하는 것으로서, 비록 이끗을 좇는 자는 요역에 빠지기 쉽고 근본을 힘쓰는 자는 주구(誅求)에 고달프다 하더라도 고달프게 되는 자는 오히려 부유한 사람이니 용ㆍ조의 법이 빈부를 묻지 않고 통틀어서 원적(元籍)을 상고하고 징수하는 것보다야 오히려 낫지 않겠는가? 양세법을 시행하고부터는 이 폐단이 혁파되었으니 그 법이 양염에게서 나왔다는 것으로써 어찌 나쁘게만 여길 것인가?” 했다. 내가 상고하니 마단림의 논의가 공평하고 진실해서 이치에 맞는다.
[주D-001]경요(更徭) : 변수(邊戍)를 일컫는 말. 즉 변수의 요역(徭役).
[주D-002]의돈(猗頓) : 춘추 시대 노(魯)나라 사람. 도주공(陶朱公 : 范蠡)에게 치부술을 배워 의(猗)지방에서 소와 양을 먹였는데, 10년 만에 크게 부(富)해서 왕공(王公)에 비길 만했음.
[주D-003]검루(黔婁) : 춘추 시대 제(齊)나라의 어진 사람. 제왕이 정승으로 맞이하려 했으나 나가지 않았음. 집이 몹시 가난해서 죽은 후에 염습(斂襲)할 이불이 없었다 함.
[주D-004]체제(禘祭) : 천자가 그 시조(始祖)의 묘에 올리는 제사. 강신(降神)은 제사할 때에 울창(鬱鬯) 술을 땅에 쏟아서 신을 내리게 하는 것. 노(魯)는 제후의 나라여서 체제를 할 수 없는데 희공(僖公)을 제부(隮附)해서 체제하므로 공자(孔子)는 보고 싶지 않다고 한 말을 인용한 것으로서 즉 해서는 안될 일을 하는 것이기에 보고 싶지 않다는 뜻임.
[주D-005]동인(銅人) : 동(銅)으로 사람 모양을 만들어서 궁궐 문과 종묘 문에 세워 장식하던 것.
[주D-006]호조(戶調) : 호(戶)마다 세를 매겨서 내게 하는 물품.
[주D-007]빈포(賓布) : 빈(賓)은 열(列). 즉 자투리 베가 아니고, 한 끝으로 이어진 베라는 뜻
[주D-008]의리(義米) : 빈궁(貧窮)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쌀. 즉 의연미(義捐米).
[주D-009]토단(土斷) : 일정한 면적에 거주하는 호수(戶數)를 제한하는 일.
[주D-010]지착(地著) : 그 땅에서 자라서 영주하는 것. 토착과 같음
[주D-011]천보지란(天寶之亂) : 천보는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 즉 당시에 일어난 안녹산(安祿山)의 반란을 가리킴.
[주D-012]소봉(素封) : 관작(官爵)이나 봉토(封土)는 없어도 그 부(富)함이 봉후(封侯)와 같음을 일컫는 말.
[주D-013]정ㆍ중(丁中) : 호역(戶役)하는 연령을 일컫는 말. 16세 이상을 중(中), 21세 이상을 정(丁)으로 하여 과역(課役)에 종사시키고, 50세 이상을 노(老)라 하여 과역을 면제했다(《唐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