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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구광렬 원문보기 글쓴이: Gabriel
2013년 대산문화 겨울호
<가상 인터뷰>
“한 편의 시는 열려진 가능성일 뿐, 여전히 의미는 못 된다.”
- 옥타비오 파스와의 만남
글 / 구광렬_시인, 소설가, 울산대학교 교수. 1956년생
시집 『슬프다 할 뻔했다』 『불맛』 『나 기꺼이 막차를 놓치리』 『밥벌레가 쓴 시』 『자해하는 원숭이』『텅 빈 거울』, 『하늘보다 높은 땅』『팽팽한 줄 위를 걷기』등, 장편소설『세뇨르 뭄』 『가위주먹』등, 기타저서『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 『체의 녹색노트』『바람의 아르테미시아』 등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_멕시코 시인. 1914~1998년
시집『언어 아래의 자유』『독수리인가? 태양인가?』『격렬한 계절』『태양의 돌』『불도마뱀』『『백지』『동쪽 저편』『허공의 아들들』『나무 속으로』등, 산문집 『고독의 미로』『활과 리라』『비평적 열정』『너릅나무에 열린 배』『원숭이 문법학자』『결합과 해체』등
구광렬: 1989년 7월 말경이었으니, 근 25만에 선생님과 자리를 함께하는 셈입니다. 그것도 돌아가신 후에 말입니다. 아무튼 저로서는 무한한 영광입니다.
옥타비오 파스: 그래요. 기억납니다. 나에 관해 박사논문을 쓴 양반이지요? 내 친구 마르킷 프랑크(Margit Frank)가 지도교수라 했고요. 근데 무슨 일로 저를 인터뷰 했었죠?
구광렬: 당시 선생께서는 유력한 노벨문학상후보로 거론 되고 있었으며 제가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던 한국의 서울대학교에서 저에게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의뢰했었죠. 애석하게도 그 해 노벨상을 수상 못하셨지만 말입니다.
옥타비오 파스: 그래요, 그 이듬해인 1990년 수상했지요. 기억나요. 두 권의 책을 나에게 준 것. 그중 한 권이 라빈드라나드 타고르와 후안 라몬 히메네스에 관한 책이었지요?
구광렬: 네, 맞습니다. 저의 은사이신 김현창 교수의 저서지요. 또 다른 책은 <순야타(Sunyata)의 시인, 옥타비오 파스>라는 선생님의 시세계에 관한 저의 박사논문이었구요. 답례로 선생께서는 ‘라 부엘타(La Vuelta)' 잡지 두 권에다 친필 사인을 해주셨습니다.
옥타비오 파스: 그 시절이 좋았어요. ‘라 부엘타’ 잡지사를 운영하던 시절. 내 인생의, 내 시세계의 절정기였지요. 노벨상 수상 후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시를 쓰질 못했어요. 저서도 겨우 에세이 집 두 서권 냈을 뿐이고…… 나이 탓(당시 76세)도 있었겠지만, 노벨상을 타고 보니 이래저래 바빠졌어요.
구광렬: 저 역시 ‘라 부엘타’ 라는 이름만 들어도 설렙니다. 저의 풋풋했던 학창시절이 떠올라서이지요. 잡지사는 제가 살고 있던 ‘산헤로니모’ 거리와 불과 2km 정도 떨어져 있었거든요. 학교(멕시코국립대학교)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서 거의 매일 그곳을 지나야만 했어요.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이번 인터뷰는 비록 가상의 것이긴 하지만 지난 번 채 듣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사뭇 기대가 큽니다. 무엇보다 선생께서 이 세상 분이 아니시기에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질문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아 한결 마음이 가볍습니다. 사실 1989년 당시에는 대시인 앞에서 주눅이 들어, 묻고 싶은 것들을 제대로 묻지 못했거든요.
옥타비오 파스: 아이쿠, 이거 각오를 단단히 해야겠는걸요. 아주 날카롭게 나오실 것 같은데…….(웃음)
구광렬: 그렇게 말씀하시니, 장난기가 발동하여 정말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싶어지는데요.(웃음)
농담입니다. 부드럽게 나가겠습니다. 저도 부드러운 남자이고 싶거든요, 선생님처럼.
옥타비오 파스: 제가 부드러운 남자였던가요?(웃음)
구광렬: 선생님을 처음 뵀을 때, 저의 외숙부를 닮았다는 생각을 했어요. 물론 저의 외숙부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부드러운 어른이셨구요. 선생님을 기다리는 동안 선생님의 비서였던 파띠(Patricia)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분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망설이지 않고 답하더군요. ‘simpatico’(정이 많은) 분이시라고.
자, 그럼 부드럽게 시작하겠습니다. 아주 여리고도 어린 옥타비오 파스로부터 시작할게요. 선생께서는 1914년 멕시코시티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조부께선 신문기자이자 정치가이셨고, 부친께선 변호사였으나 멕시코혁명 당시 싸파타(E. Zapata) 혁명군 축에 가담했었지요. 1920년 멕시코 정부가 싸파타와 그의 추종자들을 몰살시키려들자, 가족 분들 모두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고요. 그곳이 로스엔젤래스였던가요?
옥타비오 파스: 맞습니다. 로스엔젤래스……. 그 시절 에피소드 하나 말씀 드리죠. 여섯 살이 채 못 됐어요. 유치원 다닐 때였습니다. 점심시간이었지요. 숟가락이 없어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런 내 모습을 한 선생님이 지켜봤나 봐요. 왜 밥을 먹지 않나 하고 묻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계속 스페인어로 숟가락(cuchara)을 외쳐댔죠. 그것도 큰 소리로…… 그 소리가 아마 미국 애들 귀에 거슬렸나 봅니다. 꽤 오랜 시간 싸웠어요. 그 뒤에도 사건 아닌 사건들이 꼬리를 물었지요. 조국 멕시코에 관한 내 글들은 대부분 보호받지 못했던 미국 유년 시절과 관계가 있어요.
구광렬: 산문집인 <고독의 미로( El laberinto de la soledad) >도 그러합니까?
옥타비오 파스: 그 부분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죠. 그 후 다시 멕시코로 왔지만 오히려 더 왕따를 당했습니다. 피부는 희고 눈은 파랗고 영어 악센트로 스페인어를 하니, 양놈이라 놀려대는 겁니다……. 하지만 유년 시절이 마냥 괴롭고, 고독하지만은 않았어요.
구광렬: 내친김에 어린 시절부터 영향을 받았던 프랑스 문화, 문학에 관해 한 말씀 해주시지요.
옥타비오 파스: 집안 친척, 특히 고모의 영향이 컸어요. 고모는 프랑스 매니아였지오. 그녀는 집에서 스페인어 대신 프랑스어를 했어요. 우리 집 서재에는 프랑스에 관한 책들로 가득 했고요. 프랑스어의 부드러운 연음과 굴절은 마치 음악을 듣는 양 착각에 빠져들게 했어요. 어린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지요. 그 후 프랑스어를 전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고,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나갔습니다. 특히 프랑스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프랑스 유학시절 앙드레 브레통(André Breton),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조안 니로(Joan Niro) 등 그쪽 젊은 예술가들과 파리 시내 카페에서 잘 어울렸어요. 하지만 초현실주의 시는 믿지 않았어요. 특히 자동기술법은 더욱 그랬고요. 단지 시적 혁명을 갈구했죠. 자유에 관한 사상들과 함께 말입니다. 하지만 윤리나 정치 등의 자유가 아니라, 예술과 미학의 자유…….
구광렬: 청년시절 하버드 대학에서 강의를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미국생활에 관해 좀 더 듣고 싶습니다.
옥타비오 파스: 난 미국 생활을 꽤 오래 했어요. 1944년, 구겐하임 장학금을 받고 버몬트에 있는 Middlebury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틈틈이 그 고장 신문사에서 일했죠. 신문은 고속(高速)의 문학이라 할 수 있잖아요? 신문사 일은 시인인 나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 줬어요. 또 다른 경험은 뉴욕에 있는 MGM사에서 영화 더빙을 하는 일이었어요. 영어를 스페인어로 말입니다. 정말 재미있었어요. 배우들의 입술 움직임을 파악해 스페인어 문장을 리드미컬하게 재생해내는 일. 정말 시인으로서 한 번 해볼 만한 일이었어요. 전쟁이 막 끝난 후(2차 세계대전)였었기에 전반적으로 활기가 넘쳤어요. 물론 인종차별 등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문화적인 측면에선 박력이 있었어요.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문화시대였습니다. 그곳에서 미국 멋쟁이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구요. 그들은 무척 개방적이었으며 정직했습니다.
구광렬: 그들 중, 한 사람만을 꼽는다면 누구일까요?
옥타비오 파스: 현대문명에 관한 한, 엘리엇(T.S. Eliot)은 젊은 시절의 나였습니다. 하지만 엄청 보수적이었던 그와는 달리 당시의 난 상당히 좌익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인간화, 영혼의 황폐화 등으로 대변되는 현대문명에 대한 그의 비판은 나를 매료시키고도 남았어요. 아시다시피 엘리엇은 역사를 시에 도입한 사람이잖아요. 그의 시들은 극히 주관적인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 교육을 받은 나에게 청량제로 다가왔어요.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나 찰스 윌리엄스(Charles William)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근사했습니다. 미국 시인들은 주관적인 것뿐만 아니라 범 우주적인 것을 다루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요. 입체파 화가들이 말하는 입체적 영감 같은 엘리엇의 기술법 또한 흥미로운 것이었구요. 그는 현대 도시의 삶을 입체적으로 조명했습니다. 1969년부터 1976년 사이에 써진 나의 연작시 <회전(Vuelta)>에 엘리엇의 메아리에 관한 것이 들어있어요.
걷고 있건만 나아가지 않는다
이 도시에 둘러싸인 난
공기가 부족하다
몸뚱어리가 부족하다
-옥타비오 파스의 시 회전(Vuelta) 중에서
구광렬: 이제부터 선생님의 시세계에 관한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990년 노벨상 수상소감에서 선생께서는 언어의 모호성에 관해 언급하시던 도중에 ‘언어는 항상 작가의 의도보다 멀리 간다. 그가 시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라고 하셨습니다.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해주시지요.
옥타비오 파스: 누구나 글을 쓸 땐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잘 파악하지 못 합니다. 그가 시인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역사가나 사회학자들은 그래도 나은 편이죠. 저는 사실 언어통제에 자신이 없었습니다. 산문집 ‘고독의 미로’도 정말 고독한 시절에 썼지만 고독을 잘 표현하지 못한 것 같아요. 모두 저 자신을 에워싸고 있던 환경 때문이었지요. 저에게 시는 항상 환경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시는 과학적 작품이 아닙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세상을 알고, 자기 자신을 알고,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서입니다. 시 또한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숨을 죽이고 정지한 부호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기호입니다. 저는 이것을 회전하는 기호(signos en rotación)라고 부릅니다. 주체인 ‘我’와 객체인 ‘他’는 이미지 속에서 하나가 되고, 예술의 원초적 힘이 가해지는 순간 모든 타자성은 상실되고 맙니다.
구광렬: 선생께서는 언어의 모호성에 관한 한, 비트겐슈타인만큼이나 고뇌했던 시인이셨습니다. 적잖은 평자들이 선생을 가리켜 언어를 초월하는 언어 위의 시인이었노라 평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한 말씀 해주시죠.
옥타비오 파스: 젊은 시절 앙드레 브레통과의 만남 뒤 초현실주의에 빠지게 된 연유 역시 이러한 언어가 갖는 원초적 모호성을 극복하고자하는 저의 염원과 무관치 않습니다. 저의 시에서의 은유는 전혀 새로운 의미를 생산치 않습니다. 오히려 의미의 해체와 가까우며, 침묵으로 인도하는 부호들의 만남에 불과합니다. 그 침묵 속에는 또 다른 낱말이 기다리고 있으나, 그것마저 변별적이지 않습니다. 그냥 부호 또는 기호일 뿐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저는 흔히 세간에 알려진 바와는 달리 초현실주의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극도의 현실주의자내지 극사실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가 소위 초현실주의자들이 애용한 자동기술법을 거부한 이유도 이러한 연유에서입니다. 앙드레 브레통 등 저의 친구들이 현대의 이성주의내지 현실주의에 극도의 거부감을 표시하고 무의식의 세계를 노래하기를 주창하는 동안, 저는 오히려 그러한 행위를 책임 없는 현실도피라고 일축했습니다. 이러한 작업은 특히 동양과의 해후 후 순조롭게 진행됩니다. 그 후(1960년 이후) 저는 지나친 이성주의와 현실주의에 의해 일그러진 서구문화를 강하게 비판해왔으며, 데카르트 이후 과학적 이성주의에만 기대온 서양의 현대문명에 대응해 강한 안티테제를 제시해왔습니다.
구광렬: 말씀처럼 선생께서는 언어의 모호성을 극복하기 위해 한 생을 바쳤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말로써만 표현될 수 있는 실재가 있음을 인정하셨습니다. 그 말의 시초를 불교에서 말하는 태초의 소리 ‘옴’에서 찾으려 했고요. 그것과 관련된 선생의 시 한 편을 낭송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잃어버린 말을 찾아야 한다. 안으로든 밖으로든
그것을 꿈꿔야 한다
밤의 문신을 읽어내고 정오의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가면 또한 벗겨내야 한다
햇볕으로 목욕하고 밤의 과실을 따먹으며
별과 강이 쓰는 글자를 해독해야 한다
피의 바다, 땅과 몸이 말해주는 걸 기억하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안으로 밖으로 위로
아래로도 아닌 교차로
모든 길들이 시작되는 그곳으로……
빛은 물로 노래하고
물은 나무의 소리들로 노래하고
새벽에는 온갖 과실들이 하늘에 열리고
낮과 밤이 화해한 뒤
다시 잔잔한 강물이 되어
연인들처럼 애무하고 포옹하는……
세월을 담은 도도한 강물처럼
인간의 계절은 또 그렇게 흘러가야만 한다
태초부터 영위해온 삶의 한 가운데로
시작과 그 끝 너머 저 심오한 그곳으로
(옥타비오 파스의 시, 깨어진 항아리 중에서)
옥타비오 파스: 저에게 한 편의 시는 열려진 가능성일 뿐, 여전히 의미는 못됩니다. 독자라는 또 다른 가능성을 만났을 때, 두 개체는 하나가 되고 제 3의 부호가 탄생하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시의 부호인 이미지 역시 역사 속에서 움직이고, 또 그것을 부정하는 것들과의 대립변증을 거쳐 새로운 합(synthese)이 도출되는 것입니다. 시는 시인의 것도 독자의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주 전체 일 수도 있고 부분일 수도 있습니다. 그 단초를 저는 불교에서 말하는 태초의 소리 ‘옴’에서 구하고자 했구요.
구광렬: 말씀처럼 선생의 특히 1960년 이후 작품들은 불교 등 동양의 종교, 철학, 사상 등을 상당부분 논하거나 설하고 있습니다. 물론 인도나 일본 등 동양 여러 나라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시면서 그곳의 문화나 역사 등을 연구하신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그 외, 특별한 계기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옥타비오 파스: 20세기 초 멕시코에 호세 후안 타블라다(José Juan Tablada)란 아주 특별한 시인이 있었습니다. 소위 멕시코 초기 모더니스트 작가로, 일본의 하이쿠나 연가를 멕시코 및 중남미에 제일 먼저 소개했지요. 젊은 시절 난 그의 작품에 매료되었습니다. 신선함 그 자체였어요. 사실 외교관이 된 것도 그의 영향이 컸습니다. 외교관이 되자마자 부임지로 신청한 나라들이 일본과 인도였으니까요. 바쇼의 선시나 다이세츄 스즈키의 선불교론 등은 나의 시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구광렬: 그러나 선생의 작품에는 중국, 인도, 일본 등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만, 한국에 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한국은 그 삼국 사이에서 문화연결을 위한 가교역할을 한 아주 중요한 나라입니다. 특히 고대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역사, 문화, 사상, 종교, 철학 등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동양 사상을 담고 있는 선생의 대표적인 산문집들 <비평적 열정>, <너릅나무에 열린 배>, <결합과 해체>, <활과 리라> 등에는 한국에 관한 내용이 좀처럼 보이질 않습니다.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옥타비오 파스: 생전인터뷰에서 밝혔던 것처럼 저는 한국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올림픽이 열렸다는 것과 분단국가란 것, 그리고 중남미국가들처럼 정치가 불안하다는 것 정도입니다. 무엇보다 한국문화가 서양세계에 소개되어 있질 않았어요. 특히 문학작품은 더욱 그랬습니다. 의도적으로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한국에 관한 읽을거리가 없었어요. 지금도 그런가요?
구광렬: 작금은 선생의 생전시절과는 많이 다릅니다.
옥타비오 파스: 하긴, 내가 죽은 지 15년이 넘지 않습니까? 그 동안 저쪽 세상도 많이 달라졌겠지요…….
구광렬: 맞습니다. 이제 더 이상 한국을 모르는 중남미 사람들은 없습니다. 자동차, 핸드폰, 텔레비전 등 중남미제국 도처에 한국산 물건들이 깔려있습니다. 대중문화면에서도 K. Pop을 비롯해 한류열풍이 불고 있구요. 하지만 문학작품 부문에서만은 여전합니다. 그만큼 번역이 안 되고 있는 탓이겠지요.
옥타비오 파스: 맞아요. 번역이 중요해요. 번역이 안 된 경우엔 그 나라 말을 공부해서 읽을 수밖에 없는데, 그건 사실 불가능한 일이에요.
구광렬: 멕시코유학시절 저는 멕시코에서 비행기를 타고 다시 한국으로 들어가 소위 이민 백이라 불리는 가방에다 불교, 유교 등 동양의 철학 종교 사상에 관한 책들을 가득 싣고 와야만 했습니다. 선생의 시에 관한 논문을 쓰기 위해서였지요. 신랄한 아이러니를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서양시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뒤늦게 동양철학사상 책들을 뒤적이는, 그것도 서양에서 말입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동양철학에 관한 공부를 제법 할 수 있었어요. 그 후 다시 선생의 시편들을 곰곰이 살펴봤지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선생의 시에서 그리 심도 있는 동양 사상에 대한 사유를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주역이라 하면 그래도 공자가 대나무 쪽을 엮어 만든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지도록 읽었다는 책이 아닙니까. 그 만큼 중요하기도 하지만, 그 만큼 내용이 어렵다는 이야기도 되겠지요. 하지만 주역을 응용해 썼다는 선생의 시편 <Blanco(백지)>를 들여다보면 음양에 해당하는 낱말들을 그저 좌우 양편에 늘어놓기만 한 느낌입니다. 1989년 출간하신 <나무 속으로(El árbol adentro)>에 실린 ‘Ejemplo(본보기)’라는 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장자의 꿈에 대한 이야기를 평면적으로 한 두 줄 베낀 정도에 불과해보입니다. 단지 장소적 배경이 뉴욕이라는 것 빼고는 말입니다. 동양철학이나 사상 종교에 지식이 짧은 서양독자들에게는 대단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저 같은 동양인 독자들에게는 그 시편들은 그저 무책임한 복사내지 표절작으로만 보입니다. 그 밖에도 선생의 여러 작품에서 그러한 것들이 보입니다. 특히 <동쪽 저편>을 비롯한 1960년 이후 작품집에서 말이지요. 물론 선생의 시편들을 헤아려보는 혜안이 저에게 없거나, 아주 어두울 수도 있겠습니다만…….
옥타비오 파스: 부드러운 질문만 하시기로 했잖습니까? 결국 마각을 드러내시는군요.(웃음)
구광렬: (따라 웃으며) 이게 사후 인터뷰이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사실 생전 인터뷰 때 시간이 없어서 질문을 못 드린 것 중 하나입니다. 한국독자 분들을 위해 허심탄회하신 말씀 부탁드립니다.
옥타비오 파스: (정색을 하며) 동양사상이 옷의 물감처럼 밴 저의 시편들 속에는 중국, 인도의 호방함과 일본의 예리함이 들어있지만, 왠지 그 셋을 어우를 원만성은 보이지 않는 게 사실입니다. 근데 사후에 알았어요. 이곳 저승에서………. 특히 생전에 내가 그렇게 좋아했던 일본의 Zen(禪)이 한국의 임제종에서 유래했다는 사실.
아무튼 한국을 알지 못했던 게 크게 후회됩니다. 서양인이 동양, 특히 사상과 철학 책들을 섭렵하는 데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요? 그 면을 고려해서 내 졸작들을 이해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구광렬: 역시 선생께서는 대인배이시며, 대시인이십니다. 그런 질문으로 난처하게 해드린 이 소인배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한국의 고故 김남주 시인은 파블로 네루다의 작품들을 원서로 읽기 위해 옥중에서 스페인어를 공부했습니다. 근 5개 국어를 유창하게 하셨던 선생께서 한국에 관해, 한국 시인들에 관해, 김남주 선생의 네루다에 관한 열정의 반의 반 정도만 있었더라면, 아마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을지도 모르지요. 다시 인간으로 환생하신다면 한국어를 공부해보기를 추천해드립니다. 선생께서 전생을 통해 고민하셨던 언어의 모호성에 관한 문제의 해답을 한국어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한국어로 말하자면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글이니까요.
선생님, 잠시라도 천국에서의 평화스러운 심기를 흩으려 놓은 듯해 죄송합니다. 사후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끝>
첫댓글 교수님, 인터뷰글 잘 읽었습니다. 옥타비오파스의 친구의 제자 그리고 제자의 제자로 이어지는인연들은 남미의 바람인것 같습니다 . 넓은 초원, 바람의시가 확산되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