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순간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황지은
시애틀 사는 딸이 서울에 출장을 왔다. 갑자기 일이 생겨 한국에 일주일 체류하는 동안 내내 일정이 꽉 찼다고 한다. 우리가 사는 대전에 갈 시간이 없다며 내가 딸이 머무는 호텔에 와서 같이 지낼 수 있는지 사정을 물어왔다. 나로선 달리 사유가 없었고 딸과 오붓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 좋은 일이다. 남편도 찬성하여 우리는 망설임 없이 동조했다.
다음날, 고속버스 타고 강남 터미널에 내려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다스> 호텔을 찾아갔다. 딸이 로비에서 기다려 마중하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4층까지 있는 숫자판에 키를 대니 19층 불이 켜진다. 룸에 들어서니 내부가 꽤 넓은 스위트 룸이다. 외국에 사느지라 늘 그리운 딸인데 서울에 와서 함께 지낸다 생각하니 꿈인 듯하다.
딸은 시차 적응할 여유가 없을 만큼 바빠서 나와 따로 시간을 갖지는 못하였다. 저녁에도 업무를 수행하느라 늦게 자니 가능한 내게는 신경 안 쓰게 하려고 마음을 썼다. 편한 대화는 호텔 뷔페 조식 시간에 하였다. 딸은 자유로이 일하고 나는 혼자서 시간을 보냈는데 자유로움이 있어 좋았다. 특별한 휴가를 받은 듯하여 이대로 한 달쯤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 안에도 편의시설이 있었고, 엘리베이터 타고 지하로 내려가니 현대백화점, 코엑스몰, 별마당 도서관이 연결되었다. 사람들이 북적이고 길이 미로 찾기 같은데 어디로 가든 통하였다.
백화점이 있어 편리하고 쇼핑몰 구경도 재미있지만, 중앙에 위치하여 만남과 기다림으로 북적이는 ‘별마당 도서관‘이 특별하여 인상 깊었다. 에스컬레이터로 오르내리는 복층 구조의 천정까지 맞닿아 있는 대형 서가에 책이 빽빽이 꽂혀 있다. 13m 높이 서가에 칸칸이 은은한 불빛이 있어 외국 관광지에 온 듯한 도서관이다. 그곳 컴퓨터에 영풍문고 검색란이 있어 ‘엄마의 인형‘을 치니 <황지은 수필집>으로 소개되어 나왔다. 인터넷에 내 이름이 나오니 신기하다. 딸이 엄마가 낸 첫 수필집이라며 매일 한두 권씩 들고 나가 자랑스럽게 회사 사람들에게 전하고 오니 고마웠다. 미숙한 글을 펼치고 마냥 부끄럽기만 하던 마음이 편하였다.
오래전 우리와 가까웠던 분이 있다. 살기에 바빴는지 우리가 연락을 안 한 탓으로 소원했었다. 수필집을 출간하고 보니 그에게 전하고 싶었다. 그분이 공인이어서 인터넷으로 쉽게 주소를 찾았다. 겉봉에 우리 연락처도 적어 ’엄마의 인형’을 우편으로 보내드렸다. 반가워할 것이라 짐작은 하였으나 책을 받고 단번에 끝까지 다 읽었다며 잘 썼다는 인사말까지 전화로 해주실 줄은 몰랐다. 보람을 느끼며 고마웠다.
그분과는 39년 전 남편과 잠시 같은 구역에서 지낸 인연으로 오래 왕래하며 지내었다. 딸도 기억하여 우리가 서울에 와서 있다는 소식을 알렸다. 집에서 호텔이 멀지 않다며 연락받은 날 바로 찾아오셨다. 좋은 식당을 예약하고 맛난 저녁도 사주시니 지난 얘기로 회포를 풀었다.
사람은 처음 만남을 잘해야 한다며, 20년 만에 만나는 오늘도 마찬가지로 처음 만남이니 소중한 시간이라 하였다. 수천 명 거느리시는 공인이 신분을 온전히 내려놓고 너무도 친절히 최선을 다해주는 대접을 받으며 감동했다. 예전에 독일에서 8년간 철학 전공하고 돌아와 옆집 다녀온 듯이 얘기하던 때와 다름없이 대하였다. 젊은 시절 어려울 때 우리 집을 방문하면 언제나 따뜻한 정이 있어 위로받았다고도 한다. 남편과도 통화하며 매일 본 듯이 대화하였다.
세상 모든 것은 변하고 있고, 같은 순간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사람과의 만남을 늘 처음인 듯이 하라는 말씀을 주시어 여운이 남는다. 사생활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수필집을 내고, 옳은 것인가, 스스로 답을 찾지 못할 때 그날의 만남에서 용기를 얻었다. 미숙한 글모음이 흩어진 인연들을 고운 추억으로 다시금 이어지게 하여 감사하다. 출간을 생각만 하고 시도하지 않았다면 결과도 없을 것이었다.
딸이 말하기를, 친구가 ‘엄마의 수필집을 읽으면서 본인의 감정도 보태어져 눈물이 나더라’고 했다며 누군가의 감동을 얻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미국 도서관에 한글로 된 책이 비치되어 교포들이 빌려서 읽으니 ‘엄마의 인형‘ 수필집을 그곳 도서관에 기증하여 보게 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처음에는 그런 일이 가능까 싶지었는데 이도 역시 생각만 하고 시도하지 않는다면 결과도 없을 것이다. 딸에게 기증할 방법을 알아보라고 하였다.
호텔에서 딸하고 같이 보낸 시간이 잠시 춘몽을 꾼 듯, 한숨 잘 자고 일어나니 한 주간이 지나버린 듯하다. 남편은 딸이 출국하기 전날 주말에 와서 같이 지냈다. 배웅하고 집에 돌아오니 허전하여 스스로 마음을 다스린다. 반갑게 대해주신 지인 말씀이 새롭게 기억이 난다. 어느새 나이 들어 그분도 늙어가니 모든 것은 변하고 있다. 우리 집을 다시금 찾으면 처음인 듯 맞이해야겠다. 할수록 어렵게 느껴지는 글쓰기지만 세련된 문장이 아니어도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쓰면 될 것 같은 자신감도 조금은 생긴듯해 기뻤다. 시간은 흐르니 같은 순간이 두 번 다시 오지는 않는다. 매사에 처음인 듯 정성을 기울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