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치솟고 가라앉을 때마다 의금부 형틀에서 매를 맞을 때, 하얗게 뒤집히던 고통이 다시 살아났다. 다시 배가 가라앉을 때 정약전은 의식을 잃었다’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사를 다룬 소설 「흑산」 (김훈)에서 흑산도 가는 바닷길을 이처럼 묘사했다.
전남 강진으로 유배 간 동생 약용 못지않은 천재이자 이 땅의 첫 어류 백과사전 「 자산어보(玆山魚譜)」 를 쓴 정약전(1758~1816)이 1891년 신유박해 때 배교(背敎)해 목숨을 건지고 흑산도로 귀양갔다. 200년이 훨씬 지났지만 목포에서 흑산도 가는 86km 뱃길은 지금도 험난하다. 여객선은 급류에 떠다니는 나뭇잎 신세다.
역설적이게도 이처럼 접근의 어려움 때문에 흑산도에는 천주교가 단단히 성장했다. 1958년 아일랜드의 성 콜롬반 외방선교회가 발을 들인 게 결정적인 계기다. 절해고도에서 바다에만 의지해 살아야 하는 천형을 스스로 선택한 주민들에겐 죽어서 가는 천국보다 당장 이생의 궁핍을 벗어나는 일이 절실했을지 모른다. 그곳 홍어가게 간판이 요한수산·라파엘수산 등 세례명을 밝힌 것을 보면 면면을 짐작할 수 있다.
흑산도는 ‘홍어와 천주교’의 섬이다. 최근 개봉한 이준익 감독이 영화 ‘자산어보’를 촬영할 때도 가장 맛있게 먹은 어류 역시 삭히지 않은 ‘생물 홍어’라고 했다.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는 흑산(黑山)을 자산(玆山)으로 고쳐 불렀다. “흑산이란 이름이 막막하고 어둑하며 두려워 차마 그대로 발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흑산은 어둠이고 공포이고 좌절이고 절망이었다. 그러나 형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집안이 풍비박산 나고 정적들이 조정을 장악해 죽음 직전까지 몰렸다. 형제는 현실에 굴하지 않으려는 의지로 견딘다. 흑(黑)과 자(玆)는 같이 ‘검다’는 뜻이지만 ‘고쳐부르기’를 통해 속뜻이 달라졌다. 자산은 한 줄기 빛이고 기쁨이고 흥이고 희망이었다.
‘자산어보’는 선비와 어부 창대의 거래, 즉 도리와 실용의 균형에서 흑산을 자산으로 바꾸는 길을 찾는다. ‘사극은 시대를 보는 거울’이라는 이준익 감독의 말이 심상찮게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