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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님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一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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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강해(16)*숨겨진 시간*
사도행전 9장20-31절 / 송태근 목사
할렐루야! 잘 지내셨어요? 우리 옆에 분들하고 인사 좀 나누세요. “반갑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밖에는 비 안 오고 흐리지요? 목사는 이런 날을 아주 좋아합니다. 날이 너무 하창하면 걱정이 돼요. 우리 청년들도 산으로 들로 다 도망 안 갔을까? 그런데 비가 올 듯, 말듯 한 날은 “에이, 교회나 가자.” 그런 마음으로 오신 분은 없지요? 제 친한 친군데 필라델피아에서 목회를 하는 친구예요. 신대원을 같이 다녔지요. 1년에 한 번씩 꼭 한국에 방문을 해서 시간을 갖곤 하는데 아주 미식가입니다. 제가 이 친구한테 음식점 몇 군데를 소개했다가 아주 피 봤어요.
“네 입맛은 변하지 않냐?” 저는 좀 잡식성이에요. 허기만 채우면 만족한 스타일이에요. 별로 그렇게 뭐 먹는데 관심이 없어요. 이직으로 미식가라서 예를 들어 이제 어느 음식점에 와서 비빔밥을 시켰습니다. 저는 비비기도 귀찮아 가지고 따로 집어넣어요. 어차피 안에서 섞어지는데 내가 뭐 그렇게까지 섞을 필요가 있나 싶어서. 그런데 이 친구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걸 고추장에다가 천천히 비빕니다. 그 중간쯤에 멈춰서 꼭 저를 한번 불러요. “태근아! 이 색깔 변하는 거 봐라. 그래서 음식은 말이지 눈으로 먹는 거야!” 그래요. 모르겠어요. 난 그 경지까지 언제 갈려나 모르겠습니다만 이 차원이 좀 달라요.
그래 어딜 이제 둘이 차를 타고 가더라도 저는 목적지가 생기면 운전해서 거기까지만 가는데 몰두합니다. 옆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잘 못 봐요. 그런데 이 친구하고 가면서 꼭 넋두리 겸 이런 얘기를 묻곤 합니다. “저 너머엔 웬 어떤 사람들이 살까?” 뭐 사람이 살겠지요. 그런데 어떤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저 너머에 살까? 그런 그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하는 스타일이에요.
제가 참 배우는 게 많아요.
너무 다르다. 보통 저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들은 나타난 현상 또는 팩트, 그리고 어떤 결과만 가지고 갑론을박(甲論乙駁)을 하기가 쉽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도 그래요. 사실은 성경이라는 책은 나타난 어떤 팩트, 스토리 또는 결과만 가지고 메시지가 있는 건 아니에요. 특별히 오늘 같은 경우는 그렇습니다.
오늘 같은 경우는 뜻밖에 우리가 늘 흘깃 지나갈 수 있는 사소한 표현 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표정을 만날 수가 있어요. 그래서 늘 글을 읽어도 그렇지만 글과 그 사이에 글자로 써 있지 않은, 어떤 작가의 의도, 또, 하나님의 표정, 이런 것들을 우리가 볼 수 있어야 됩니다. 우리 그런 차원에서 한번 성경을 좀 볼까요?
[20절]을 좀 보십시다. “20. 즉시 회당들에서 그리스도를 선포하되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거늘” / 앞을 보십시오. 여기 매우 사소해 보이고 뭐 있어도 의미가 달라지지 않고, 없어도 의미가 달라지지 않는 그런 표현이 하나 있는데 [즉시] 라는 단어예요.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여러분 18절에 한번 볼까요? ➤“18. [즉시]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고 그가 곧 시력을 받으니라.”
우리 지난 시간에도 잠깐 [아나니야]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설명 드린 것 기억 날 겁니다. 아나니야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어요. “너는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이 [직가]라 하는 거리는 거리에 모양새를 얘기하는데, 그 그림에는 어떤 목적이 숨어져 있다고 그랬지요? ‘하나님의 급한 마음이 숨겨져 있다’고 그랬습니다.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또 [사도행전 16장]에도 보면 “직행하여” 5일 걸릴 뱃길을 뒤바람을 불게 해서든지, 어떤 방법이든 하여 하나님이 이틀 만에 마케도니아 첫 성의 바울의 일행을 떨어뜨려 놓습니다.
닷새 걸릴 거리를 이틀 만에 밀어붙여요.
이런 글자로는 쓰여 있지 않은 그 속에 녹아진 의미를 통해서 우리는 뭘 봤는가 하면 그 어둠의 영이 가득히 차 있는 시대를 향해서 하나님의 답답하고, 화급한 마음을 봤습니다. 사실 이런 표현들을 보고 마치 이런 거 같아요. 하나님 혼자서 급해 가지고 난리를 치는 거 같아요. 거기에 사도바울은 아직은 사울이지요. 사울은 붙잡혀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라고 쫓아갔다가 외국 도성 끝에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엎어져 가지고 하나님 손에 지금 붙들려 있는 거예요. 얼떨결에 자기도 지금 정신이 없어요.
그런데 그 손에 붙들려서 하나님이 이 사울을 난리를 쳐요.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그래요. 쉽게 얘기하면, 이건 사울의 입장에서는 어떤 느낌일까요? “어! 이건 뭐지? 이건 또 뭐야? 어 이거 왜 이러지?” 마치 말 탄 기분일거요. 말이 마치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는데 거기에 올라앉아 가지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런 느낌, 즉시, 즉시로, 똑바로 가서, 하나님 혼자서 뭔가 어떤 문제에 붙잡혀서 지금 급하고 화급한 거예요. 바로 이런 사소해 보이는 한 표현 속에 담아진 하나님의 마음을 오늘 이 예배에 청중들이 공감하고 돌아가야 됩니다.
저는 이번 주간에 3개 대학의 학생들을 만났었어요. 하루는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학생들 거기 또 우리 교회에 청년이 하나 있더라고요. 또 지난 화요일 날에는 연세대학교 전체 채플을 두 번 인도를 했었습니다. 1부는 1학년생들, 2부은 2, 3, 4학년생,이렇게 인도를 했는데 연대는 채플이 두 종류로 나눠져 있더군요. 신앙 채플과 일반 채플로 나누어져 있어요. 모르긴 몰라도 신앙 채플은 이제 크리스찬들을 대상으로 한 채플일 것이고, 일반 채플은 학점을 이수하기 위한 채플일 겁니다.
그 채플에 들어가서 설교를 하면 그 날은 아주 파죽음이 됩니다. 전부 시체 앉혀놓고 설교하는 것 같아요. 전부 이거 각자 끼고 안 들어요. 이거 올라가기 전의 교목 목사님이 그러셨어요. “목사님! 각오하시고 올라 가셔야 될 겁니다.” “아! 괜찮습니다. 여러 차례 겪어서 익숙합니다.” 그런데 겪어서 익숙해도 짜증이 나요. 안 들어요. 그러다가 삼일교회에 와서 설교를 하면 천국에서 설교를 하는 것 같아요.
선교사 파송해 달라.
대기실에서 이제 교목 교수님들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가운데 물어요. 목사님! 우리학교 학생들이 한 4만 명 됩니다. 그런데 이중에 한명 몇% 정도가 크리스찬이라고 보십니까? 그러나 아무래도 선교사가 설립한 학교고 기독정신으로 설립된 학교이기 때문에 모자라도 2-30% 되지 않겠나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한 번이라도 교회 다리 걸친 적(籍)을 두고 있었던 사람까지 후하게 쳐서 텐 프로가 안 된대요. 10%가 안 돼요.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통계를 내자면 그저 7-8 프로 되면 많이 되는 거래요. 그래서 그 다음 말에 제가 적지 않은 쇼크를 받았어요.
“목사님! 우리 학교에 선교사 한 분 좀 파송 해주십시오.” 연세대학교가 선교지가 되었더라고요. “선교사 파송해 달라.”는 그 말이 저는 굉장히 현실로 다가왔어요. ‘그래! 이제는 선교사를 파송해야 될 때가 되었구나!’ 지금도 언더우드 상(狀) 앞에서 의식 있는 기독대학 학생들이 이 기독 정신에 본질적 회복을 위해서 얼마 안 되는 학생들이지만 꾸준히 기우는 운동을 하고 있어요.
얼마나 마음 아픈 얘긴지 몰라요. 어쩔 수 없는 게 모든 기독대학 실태가 다 그렇습니다. 이대, 숭실대, 다 똑같아요. 제가 숭실대에도 여러 차례 채플 인도해 봤어요. 기가 막혀요. 그 학교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38선으로 나누어지기 전에 허리가, 끊어지기 전에, 실질적인 기독 사학 명문이었습니다. 그 학교의 재터리가 놓여진지 얼마 안 돼요.
그 숭실대학 안에 기독교 학과가 있어요. 그 학생들이 요청을 해서 제가 이제 설교 하루 갔었던 겁니다. 이제는 그 기독교 학과가 그저 인문학 분야의 한 파티션으로 이제 분류가 돼서 그렇게 취급을 받고 있더라고요. 하나의 교양 과목이더라고요. 세월이 가고 규모가 커지다 보면 언제나 역사의 결말은 본질에서 이탈되게 되어 있습니다. 캠퍼스의 상황 뿐 아니에요. 우리나라 5천만으로 잡았을 때, 제 생각에는 과거의 20%, 25%라고 뻥을 쳤는데 잘 잡아서 한 500만 정도, 그저 교회를 정상적으로 출석하는 프로테이지를 갖고 있지 않나? 10분의1 정도 잡으면 잘 잡는 겁니다.
그럼 나머지 4천 몇 백만은 아직도 복음도 한번 듣지 못하고, 그렇게 죽어 가는 거예요. 우리가 계속해서 동남아로, 대만으로, 일본으로, 선교 해야지요. 내 정말 중요한 것은 국내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리고 캠퍼스가 이렇게 무너져 가고 있어요. 정말 선교사를 파송해야 될 때가 왔어요. 주 하나님이 이 당시 1세기 시대에만 이런 마음으로 화급한 게 아니라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삼일교회 성도들에게 이 마음을 같이 나누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래서 즉시, 즉시로, 바로 가서, 직행하여, 이게 사도행전의 표정이요. 하나님이 혼자서 발버둥을 치는 거예요. 그 하나님의 버둥거리는, 혼자서 춤추는, 그 춤에 여러분들이 좀 같이 공감하고 소명으로 일어서야 되지 않겠어요? 이것이 오늘 이 시간에 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삼일인 모두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시대적 소명이고, 개인적 비전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왜 [아멘] 안 하세요?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 성경을 더 보십시다. [22-23절]은 여러분들이 읽으십시오. ➤“22. 그러나 사울은 점점 더 힘을 얻어 이분이 바로 그리스도임을 입증하며 다마스쿠스에 거하던 유대인들을 당황하게 하니라. 23. ¶ 여러 날이 지나서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의논하였으나 24. 그들이 숨어 있음을 사울이 알게 되니라.”
자 앞을 보세요. [22절과 23절 사이]에 중요한 연결 고리가 하나 있는데 이 연결 고리가 뭐냐면? “여러 날이 지나매” 라는 뜻입니다. 자! “여러 날이 지나매” 이 말을 우리 한글 성경으로만 보면, 이게 ‘며칠이 지났다는 얘기냐? 몇 주가 지났다는 얘기냐? 몇 달이 지났다는 얘기냐? 몇 년이 지났다는 얘기냐?’ 구분이 안 돼요. 헬라 말을 봐도 똑 하게 구분이 안 돼요.
분명 [22절 상황]과 [23절 사이]에는 ‘어떤 시간적 간격이 있다’고 했어요. 지금 오늘 설교 제목이 뭐죠? “숨겨진 시간”이 “감춰진 시간”이에요. 여긴 분명 지금 시간 간격이 있어요. 그게 며칠이건 몇 년이건.. 그 기간을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 감추어진 시간이 분명 있긴 있는데, 이 시간이 오늘 이 시대의 교회, 또 오늘 우리 개인에게 무슨 의미를 던져주고 있는가를 찾아 들추는 것이 오늘 여러분들과의 중요한 설교를 듣는 과제입니다.
자! 그래서 제일 좋은 성경해석 방법은 드문, 드문 강조했던 바와 같이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가는 것이 제일 정확합니다. ‘누가 말하기를’ ‘내 생각에는 아무 의미 없어요.’ 그래서 여기를 표시를 해주시고 [갈라디아서 1장] 천천히 찾으세요. 물론 신약 성경에 있습니다. 자 [1장15-17절]을 보세요. 지금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어떻게 회심(回心) 되었는가를 사울이 설명에 들어가는 겁니다.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나를 구별하시고 자신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16. 자신의 [아들]을 내 안에 계시하사 내가 그분을 이교도들 가운데 선포하는 것을 기뻐하실 때에 내가 즉시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였고 17. 예루살렘으로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자들에게로 올라가지도 아니하였으며 오직 아라비아로 들어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노라.” 아멘!
그가 회심한 직후에 본부격인 사도들이 있는 예루살렘 교회로 갔다 그랬어요? 안 갔다 그랬어요? “가지 아니하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어디로 갔다고 밝히고 있습니까? “아라비아로 갔다”고 밝히고 있어요. 어! 바울이 아라비아? 아라비아는 어떤 곳이죠? ‘사막이고 광야’입니다. 광야로 들어갔어요. 자 조금 더 읽어 볼까요?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왔나요? 다마스쿠스로 왔나요? “자기가 회심했던 현장이 다마스쿠스로 옵니다.” 정확히 [사도행전]의 맥락과 일치합니다.
그리고 18절을 보세요. ➤“18. 그 뒤 삼 년이 지나서 내가 베드로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그와 함께 십오 일을 지냈으나”/ 자! 그러면 예루살렘으로 가기까지 광야에서 몇 년을 머물러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까? 3년을 머물러 있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어디에서? “광야에서” 자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겨요. 그러면 ‘도대체 이 사람 하나 살지 않는, 무서운 광야에서 외로이 홀로 3년 동안을 사도 바울은 뭘 했을까? 왜 하나님은 그를 거기에다가 집어 던져 놓았을까?’ 거기에 성경은 이렇게 해석을 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11절을 보세요. ➤“11. 그러나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확실히 알리노니 내가 선포한 복음은 사람을 따라 나지 아니하였느니라. 12. 나는 그것을 사람에게서 받지도 아니하고 배우지도 아니하였으며 다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통하였느니라.” 아멘!
자! 이제 앞을 보세요. 사도 바울이 배운 것은 사람에게서 들은 것도 아니고, 사람에게서 배운 것도 아니에요. 오직 누구에게서 배웠다고 돼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배웠다”고 되어 있어요. 이 지식부터 발끝까지 새로워지는 경험을 어디서 있을까요? ‘광야’에서 합니다. 완전히 저의 모두 지식으로까지 거듭나는 경험을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사도인 것을 어디 가서든지 당당하게 밝혀요. ‘사도 이 조건 중에 하나가 뭐냐면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자’이어야 합니다.
그 가르침이 어디에서 이루어진 겁니까? 광야에서 이루어진 겁니다.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사람이 다니는 곳도 아니고 사람이 살 만한 공간도 안 돼요. 낮에는 살인적인 햇빛, 밤에는 무서운 추위, 간혹 오고 가는 으르렁 거리는 짐승들, 쓸쓸한 달빛, 총총한 별빛, 밖에는 보이지 않는 곳입니다.
거기에 말벗 하나 없는 외로운 시간을 3년을 지내면서 오로지 누구만 바라봐야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것을 통해서 그의 갖고 있었던 잘못 알고 있었던 모든 성경의 지식이 업사이드다운(upside down), 뒤집어지는 경험을 해요. 이 3년에 감추어진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행전]의 그 복음의 열매와 그 역사가 오늘날 우리에게 감동으로까지 밀려오도록 가능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통해서 “내가 이 시대를 향하여 얼마나 다급한지 아느냐? 얼마나 화급한지 아느냐?” 이거를 일차적으로 보여주셨어요. 그런데 다급하다고, 화급하다고, 하나님이 준비되지 않은 사람을 쓰지 않습니다. 사울을 갖다가 뜬금없이 아라비아 광야에다가 3년 동안이나 처박아놔요. 이 뭔가 있을 거예요. ‘불렀으면 쓰셔야 될 거 아니냐?’ 그런데 긴, 긴, 침묵 속에 3년을 그곳에서 혹독한 시간을 겪게 합니다.
수많은 회의가 들었을 거예요. 그러면서 ‘오직 주 만 바라는’ 연습을 시킵니다. 광야라는 것이 히브리말로 뭐예요? [מדבר 미드바르] 라고 말합니다. [미드바르] 뭐에 합성어지요? [다바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현장”이라는 뜻입니다. [דבר 다바르]라는 말이 ‘말씀’이에요.
그냥 “광야는 정말 하나님의 말씀 밖에는 들을 것이, 들을 수가 없는 곳”입니다. 이 훈련을 누가 제일 처절하게 합니까? 히브리 노예들이 이집트 탈출해서, 광야의 40년을 지나는 동안 뭘 배웁니까? 위로부터 하나님의 만나를 먹으면서, 하나님께만 의존하는 법을 배워요. 누구도 의지하고 기대할 수가 없는 공간이에요. 매일, 매일 만나가 내리지 않으면 다 죽어요. 그래서 하나님께만 의존을 하는 법을 하늘의 만나를 통해서 배웁니다. 그런데 그 만나가 신약으로 넘어가니까 뭐에 상징이었습니다.
숨겨진 시간, 그 세월
➤“48. 내가 곧 그 생명의 빵이로다.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빵이므로 사람이 그것을 먹으면 죽지 아니하리라. 51.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니 사람이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내가 주고자 하는 빵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해 내가 주고자 하는 내 살이로다. 하시니라.”
그 만나는 누구를 바라보는 훈련이었어요? 하나님을 바라보는 훈련이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훈련이었어요. 오늘 사울이 광야에서 뭘 배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대한민국 백성치고, 히딩크 감독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는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이 변방에 국가, 축구로서는 후진국인 변방의 국가에 건너와서 몽상 소설과 같은 얘기를 했어요. 꿈같은 얘기 했어요. “얼마 있다가 온 세계가 놀랄만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아무도 믿지 않았어요. 선수들 스스로도 믿지 않았어요. 그런데 일관되게 그 주장을 합니다. 그건 뚜껑을 열어보니까 2002년 6월은 8.15 이후에 우리 민족사에 온 국민이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그런 카타르시스를 경험한 적이 없을 정도로 울분을 풀어내고 같이 울고, 같이 울었던, 같이 웃었던, 그런 놀라운 사회 현상까지 보게 되었어요.
할머니들까지 빨간 조끼를 입고 나와서 “대한민국! 대한민국!” 외쳤던 그 지금 돌아보면 ‘우리가 그때 한때 전부다 일시적으로 미쳤었나? 왜 그랬지?’ 난리가 났었지요. 그 한복판에 히딩크를 빼놓고 얘기할 수가 없겠지요. 그 히딩크는 네덜란드 어느 프로팀에 무명의 축구선수였어요. 15년간을 무명 생활을 했습니다. 누가 부상당하거나 다치면 대신 뛰는 미드필더로 ‘벤치워머’였어요. ‘벤치를 따뜻하게 덮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깐 연봉도 형편없지요. 생활이 안 되는 거예요. 그중에는 특수학교 아이들을 체육을 가리키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어두웠던, 힘겨웠던, 말하고 싶지 않았던 시간이 자기 인생을 바꾸게 될 줄은 자기도 몰랐지요.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아이들이 장애를 입은 아이들이다 보니까 제일 어려움 이 뭐냐면, 아이들과 소통하는 게 너무너무 힘들어요. 자기네들끼리도 소통이 안 되고, 코치인 자기 하고도 소통이 안 되고, 그러다가 장애의 아이들하고 소통하는 법을 하나씩, 하나씩 관찰하게 되었습니다.
그거를 온몸으로 체득하여 익히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정리하고, 그것을 터득하게 되지요. 그러다가 82년도에 결국은 은퇴라고 할 것도 없이 프로 세월에서 물러납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코치 생활로 시작을 해요. 이때부터 이분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하게도 이 히딩크가 선수들을 다루고, 선수들을 맡으면 선수들이 잘 알아듣고, 이해력이 빠르고, 조화가 잘되고, 잘 끌려오는 것을 주변 사람들이 살금살금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뭘까? 그러다가 결국은 1998년도에 이 히딩크 감독이 네덜란드 축구 대표 감독으로 부임하게 됩니다.
네덜란드는 축구를 아주 잘하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의 감독을 맡는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입니다. 그리고 그는 변방 국가 한국에 건너와서 꿈같은 얘기를 하고 다니면서 맡은 지 불과 얼마 만에 이 변방에 축구 국가를 세계, 그것도 다른 대회가 아닌 ‘월드컵대회 4강’이라는 반열에 올려놔요. 아무도 믿지 않았어요. 32강정도 가면 잘한다고 했어요. 히딩크 감독이 그 후에 유명인이 되면서 책을 쓰고, 강연을 하고, 가는데 마다 빼놓지 않는 얘기가 뭐냐면? 자기 인생 속에 가장 힘들었던 시간, 감추고 싶었던 시간, 어쩌면 숨겨진 시간, 그 세월과 그 시간이 내게 없었던들 오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얘기를 반드시 합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세상을 향하여 다급한 마음이 있어도 그 일 위에서 사울을 바로 쓰지 않았어요. 3년 동안을 아라비아 광야에다가 예수 그리스도와만 직접 만남이 이루어지도록 거기다가 밀어 넣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분들 가운데 막 그런 칠흑 같은 동굴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분들이 있어요. ‘여기서 끝내야 되나? 여기서 포기해야 되나? 여기까지 왔는데 왜 이렇게 안 되는 걸까?’ 각자 그런 시간들이 있어요. 그 돌아보면 그 칠흑 같은 통로를 지나는 시간들이 내 인생의 숙성이 되어서, 지금은 내 인생을 떠받치는 뭐가 된 거예요? 자산이 된 거예요.
[고린도후서 1장 8-9절] ➤“8. 형제들아, 아시아에서 우리에게 닥친 우리의 고난에 대하여 너희가 모르기를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라. 우리가 힘에 겹도록 한량없이 눌려 심지어 생명까지도 단념하고 9. 우리 속에 죽음의 선고를 받았으니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아니하고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려 함이라.”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도록, 그것을 연습하도록 때로는 우리를 아라비아 광야 같은 사막에다가 외로이 던져 놓습니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게 만들어요. 누구나 이렇게 숨겨진 시간이 있어요. 이제 가을 야구가 시작이 됩니다. 이번에 감격적인 것은 넥센이 4강안에 들어왔다는 거예요. 웃음^^ 그 넥센팀을 맡고 있는 감독이 연경엽이라는 분입니다. 이분은 선수 시절에 히딩크 같은 존재였어요. 오해도 많이 받고, 멸시도 많이 받았어요. 이분의 선수 시절 타율이 1.98입니다. 2할이 안 됐어요. 그리고 항상 대주자, 대수비, [벤치워머]였습니다.
그러다가 코치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는 주류 코치를 하면서 선수들의 행동을 분석하기 시작합니다. 어느 선수는 어떤 습관이 있고, 어떤 행동 패턴이 있고, 이것을 전부 정리를 해요. 그 데이터를 가지고 팀을 운영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사람들이 “에이, 그까짓 게 무슨 도움이 돼?” 하다가 그것을 인정하게 되고, 참고하기 시작했어요. 넥센팀은 아시는 대로 2008년도에 새로 창단된 팀이에요. 그 신생팀이 이 play-off에 진출한다는 것은 사실 기적 같은 일입니다. 어디까지 올라갈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play-off, 이 가을 야구에 진입을 했다는 것은 참 축하해 줄 만한 일이에요. 저는 참고로 넥센팀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인정하지 않는 시간, 정말 어떤 때는 땅에 파묻힌 것 같은 시간들을 가질 때가 있어요. ‘아! 이러다가 어떻게 되는 건가?’ 답이 안 나오는 인생! 그러나 어느 인생도 하나님이 여분으로 만드는 인생은 없어요. 여러분! 그 터널을 잘 감당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아버지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 아버지는 여러분들을 가장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항상 최선을 다 하시는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최고를 준비하시는 사랑입니다. 아멘! 하나님만 의지하는, 이 귀한 광야의 생활에 여러분들이 보석처럼 준비되는 은혜가 있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영상 녹취/ 타이핑 / 김은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