Ⅴ. 강화 마니산(摩尼山)
마니산 등산로 / 참성단(塹星壇) / 함허동천(涵虛洞天) 등산로 / 참성단 채화(採火)
인천시 강화군에 있는 마니산은 마리산(摩利山)이라고도 하는데 옛 지명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말을 빌리면 예부터 참성단에서 천제(天祭)를 올렸던 신성한 곳으로 보아 산 중의 으뜸이라 하여 순우리말인 ‘머리(頭) 산’으로 불렸다가 일제강점기 때 한자로 지명을 바꾸면서 마리(摩利)라는 이상한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그 후 다시 마니(摩尼)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모르겠다.
지금도 시월 상달이 되면 이곳 마니산 천제단에서 천제(天祭)를 올리고 전국체전 때는 성화를 채화한다.
강화(江華)는 ‘지붕 없는 박물관’으로 불릴 만큼 유물과 유적이 곳곳에 산재(散在)되어 있는 역사의 고장인데 곳곳의 고인돌을 비롯한 수많은 선사(先史) 유적과 더불어 신라 때 창건된 전등사(傳燈寺), 몽골의 침입으로 임금이 피난 와서 기거하던 고려궁지(宮趾)와 마니산록(摩尼山麓)에 있던 별궁 터인 이궁지(離宮址), 그 밖에도 철종 생가, 강화 읍성(邑城), 정족산 사고(鼎足山 史庫-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곳), 대장경 법화경을 판각하였던 정수사(淨水寺), 또 수많은 돈대(墩臺)를 비롯한 개화기 서양과 맞서 싸우던 유적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강화의 지형을 살펴보면 지금은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를 건너놓아 육지와 연결되었지만, 몽고병란(蒙古丙亂) 때에는 김포와 경계를 이루는 좁고 기다란 해협(염하鹽河)이 가로막고 있어 수전(水戰)에 약한 몽골군이 결국 함락지 못했다고 한다.
또, 마니산이 있는 화도(華道)은 당시 고가도(高駕島)라는 독립된 섬이었는데 좁고 긴 바다에 선두포(船頭浦)와 가릉포(嘉陵浦)를 가로막고 흙을 메꾸어 지금은 드넓은 논이 되었고 강화도와 연결되었다.
원래 이곳 지명은 ‘강화도 남쪽의 섬’이라는 의미로 ‘하도(下島)’였는데 일제강점기, 강화도와 연결되어 합쳐지자 꽃 화(華)로 바꾸어 강화군 화도면(華道面)이 되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두 섬 사이의 좁고 긴 수로를 통하여 배들이 드나들었고 그 양안(兩岸)으로는 수많은 주막과 저자(시장) 거리가 번창하였다고 하며, 근처의 현 덕포리(德浦里)는 예전에 이 부근이 떡을 파는 떡전(떡포) 거리로 불렸는데 그 이름이 남아 현 이름 덕포(德浦)의 유래라고도 한다.
전설(傳說)에 의하면 마니산 정상의 참성단(塹星壇)은 단군께서 몸소 쌓으시고 천제를 올렸으며, 또 전등사(傳燈寺) 둘레의 정족산(鼎足山)은 단군의 세 아드님인 부소(夫蘇), 부우(夫虞), 부여(夫餘)가 성(城)을 쌓았다고 하여 삼랑성(三郞城)이라 하였는데 지금의 정족산성(鼎足山城)이다.
옛사람들은 강화를 특별히 신성한 곳으로 여겼던 듯하다. 강화도에 있는 아홉 개의 산을 태양계 아홉 행성(行星)으로 보면 그 중 마니산은 지구(地球)에 해당하고, 한반도(韓半島)를 호랑이 형상으로 보면 마니산이 그 배꼽에 해당한다는 등이다. 마니산 정상의 참성단은 인조 17년(1639)과 숙종 26년(1700)에 개수축(改修築)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명종(明宗)은 직접 참성단에 올라 제를 모셨다고 한다.
참성단에 제(祭)를 올릴 때 제문(祭文)을 율곡(栗谷)이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그 제문이 남아 있다.
당시로 보면 마니산 참성단까지 오는 길이 쉽지 않았다고 짐작할 수 있는데 우선 한양에서 김포까지 수레나 가마로 와서 염하(鹽河: 특히 풍랑과 소용돌이가 심하다)를 건넌 다음 말을 타고 마니산 건넛마을인 도장리(道場里)까지 온 다음, 다시 나룻배를 타고 마니산 입구까지 건너와 가파른 돌계단을 1시간 30분 남짓 걸어 올라야 했다.
이렇듯 힘들고 먼 거리를 임금이 몸소 와서 천제(天祭)를 올렸다고 하니 그만큼 신성한 곳으로 여겼음이 분명하다. 근래, 기계를 이용하여 지기(地氣)를 측정했더니 마니산 조금 아래쪽 언덕이 전국에서 가장 기(氣)가 세게 나오는 곳이라고 하여 ‘전국 제일의 생기처(生氣處)’로 명명하고 표지판을 세웠다.
1. 강화도의 사찰(寺刹)들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 크기의 섬인 강화도는 중부지방 전역의 물을 한데 모아 오는 한강과 임진강(臨津江), 예성강(禮成江)이 합류하여 서해(西海)에서 만나는 물 머리(合水머리)를 막고 있는 섬으로 예로부터 한반도의 중심부를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였을 뿐만 아니라 단군이 부소(扶蘇)·부우(扶虞)·부여(扶餘) 세 왕자에게 각각 한 봉우리씩 맡아 쌓게 하였다는 삼랑성(三郞城), 단군(檀君)께서 하늘에 제사하기 위하여 쌓았다는 참성단(塹聖壇)이 있는 등 민족의 성지(聖地)이기도 하다. 옛 문헌에 보면 사찰들이 산재(散在)해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없어지고 몇 개의 사찰만이 남아 있는데 소개하고자 한다.
<오련지(五蓮池) 설화(說話)>
고구려 장수왕 때 천축조사(天竺<印度> 승려)가 강화도 고려산(高麗山) 정상에 올랐는데 그곳에서 다섯 가지 색깔의 연꽃이 피어있는 연못(五蓮池)을 발견하고 연꽃을 따서 던져 그 연꽃이 떨어진 곳에 절을 세웠다는 설화가 전한다. 곧 하얀 연꽃이 떨어진 곳에 백련사(白蓮寺)를, 푸른 연꽃이 떨어진 곳에는 청련사(靑蓮寺), 붉은 연꽃이 떨어진 곳에는 적련사(赤蓮寺), 노란 연꽃이 떨어진 곳에는 황련사(黃蓮寺), 검은 연꽃이 떨어진 곳에 흑련사(黑蓮寺)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설로 전한다.
현재는 백련사, 청련사, 적련사(積石寺)의 3개 사찰만 있으나 기록에 의거 혈구산(血口山)에 있던 혈구사(穴口寺)를 근래(1962년) 황련사로 이름을 바꾸었고, 강화 가운데 우뚝 솟은 고려산(高麗山)은 지금도 봄이면 진달래 축제로 유명한데 정상 조금 아래쪽에 설화에 나오는 오련지(五蓮池) 흔적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