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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 스크랩 구파발역에서 벽제관지까지
된장녀 추천 0 조회 206 11.05.27 12:5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고양올來 구파발역에서 벽제관지까지

 

 

사신들이 걸었던 옛길을 다시 걸으며

 

 

1872년 고양군 지도

 

 

 

 

글.사진 편집위원 정회룡 onmaeul@hanmail.net

 

350여 년 전 고양지역의 가장 큰 도로는 경의대로이다. 현재의 자유로나 통일로와는 전혀 다른 길이다. 이 길은 남쪽을 연결하는 영남대로와 더불어 북쪽지방 및 중국을 연결하던 매우 중요한 국도였다. 여름의 한복판에서 사신들이 다녔던 서울의 돈의문에서 의주까지의 1,065리로 이어진 의주대로의 구간 중 고양시 구간을 지금까지 모은 자료를 토대로 8월1일과 8월7일 두 번에 나누어 걸으면서 답사를 했다.

 

아침부터 구름이 끼었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작열하는 태양과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지열로 인하여 중간에 포기할 수도 있었을 상황이었다. 그 뜨거웠던 여정을 아래와 같이 정리한다.

 

 

구파발역 3번 출구 -> 창릉 모퉁이 공원 -> 덕수교(창릉천) -> 삼송역 8번 출구-> 숫돌고개 -> 삼송택지개발 내 덕명교비 -> 벽제교(공릉천) -> 옛 지구레코드 -> 군부대-> 세원마을 -> 망객현 -> 서울시 장묘문화사업단 -> 철길 따라 벽제역 -> 고양향교 -> 벽제관지 -> (혜음령)

 

 

구파발 역 주변의 검암참에서 출발

구파발 전철역 부근 어딘가에 파발이 교대했다고 하는 ‘검암참’이 있다고 해서 이곳을 출발지로 하여 덕양구 동산동 ‘창릉 모퉁이 공원’에 안치되어 있는 밥할머니 석상으로 향한다. 높이는 141cm으로 석상의 팔목과 어깨 등은 매우 부드럽고 왼손은 수평으로 하고 오른쪽으로 향하고 있고 오른 손은 손가락을 펴고 정면을 향하고 있다. 얼굴부분이 소실되어 그 숨어있는 이야기가 궁금하다. 임진왜란당시 아군을 전멸의 위기에서 구한 슬기로운 할머니의 화신이라 여겨지고 있다. 그 옆에는 ‘고양 덕수자씨 교비명’이 있어 백성들이 창릉천을 건너는데 고통을 덜어주고 임금이 파주에 있는 장릉 행차에 지장이 없도록 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경기도 관찰사의 공덕을 기렸던 ‘방백오정일청덕휼민선정비’도 함께 있다.

 

                                                                                                                                                                                       밥할머니 석상

 

 

 

 

 

 

1번 국도인 통일로를 따라서 북한산의 사기막골이 발원지인 창릉천을 건넌다. 왼쪽은 장마 때마다 하천이 넘쳐서 모기들이 많았다해서 붙여진 동산동 모기밭 마을이 있다. 시간이 정지했던 1970년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던 곳이었다. 이곳은 삼송택지공사 때문에 인도가 폐쇄되었기에 어쩔 수 없이 버스로 한 정거장을 이동하였다.

삼송역 8번 출구로 가다보면 애매한 부분에 도로가 있다. 풀과 잡석으로 통행이 제한이 되어있지만 이길로 사신들이 다녔을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걷는다. 이 좁은 길이 그 옛날에는 아주 큰 길이었으리라. 새로운 길, 몰랐던 길, 가끔 다녔지만 역사가 이미 스며 있었던 길은 걷는 마음을 신나게 한다. 주변의 울창한 나무로 보아 그 옛길이 맞는 듯하다.

숫돌고개를 오른다.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다. 더위를 잊게 해주는 청량음료 같은 하모니다. 숫돌고개 중턱의 도화공원 내에서 잠시 쉰다.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이 숫돌고개를 사이에 두고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이 왜군과 큰 싸움을 벌였으나 크게 패하여 퇴각하다가 명나라 장수인 이여송이 이곳에서 칼을 갈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오금동 방향으로 내려간다. 걷는 사람들,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잠시나마 모두가 함께 간다. 주변부대의 관사인 곳에 들어간다. 오금동 하촌 마을 우봉 김씨 묘역 중에 조선조의 역관인 김지남과 그의 선조묘소의 소재가 바로 건너편에 있지만 다음 기회로 넘긴다. 우리의 꽃, 무궁화가 예쁘게 피어있다.

이 길을 중심으로 좌측으로는 한우물이 있었고, 우측은 오금동의 하촌, 중촌, 상촌마을이 있었다. 그 옛길은 사라지고 그 추억만 기록되고 있다.

경기도고양군덕명교비

삼송 택지개발현장을 지나서 '경기도고양군덕명교비'로 향한다. 조선 효종 9년(1659)에 세워진 묘비 앞뒤를 살펴본다. 홍수를 대비하기 위한 수위를 관측하고 왕의 파주 장릉 행차시 이용하며 백성들이 편안히 공릉천을 건널 수 있도록 함이다. 이 비는 한양과 개성, 평양, 의주를 거쳐 중국으로 연결되는 조선시대 가장 중요한 도로 중 하나였던 의주대로(관서대로, 연행로)에 위치하여 많은 사람과 물자, 그리고 정보와 문물이 오가는 곳으로 그 중요성이 대단했다고 한다.

 

 

경기도고양군덕명교비

 

 

 

 

1755년에 발간된 고양군지를 보면 '新院川(지금의 공릉천) 위에 옛날에는 院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고, 옛날에 돌다리도 있었으나 지금은 역시 허물어졌다. 다리 옆 백사장에는 陵辛할때의 晝停所(낮에 御駕가 잠시 머무는 곳)가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공릉천에 세워졌던 돌다리가 이곳에 있어야 하는데 없어서 조금을 에돌아 공릉천의 벽제교를 건너 지구레코드 건물을 지난다. 지금은 철거되어 새로운 건물의 철골로 건물의 틀이 잡혀 있다. 공릉천은 조선시대 예종의 원비 능인 '공릉'에서 유래했으나 일제강점기 때 구부러진 하천의 모양을 보고 곡릉천(曲陵川)으로 바꿔불렀다 한다. 파주시는 하천의 명칭을 바로잡기 위해 중앙하천관리위원회에 심의를 요청했고, 2009년 1월 1일부터 원래 명칭으로 변경 사용하고 있다. 벽제교에서 바라본 공릉천의 멀리 북한산이 멋지지만 오늘은 구름이 끼어 보이지 않는다. 물만 보아도 시원하다. 공릉천에서 물고기 잡는 모습은 금방이라도 물로 뛰어들게끔 충동질을 한다. 이 부근이 세원마을이다. 평상에 앉아 쉬는데 군부대가 보인다. '알아야 산다'는 표어가 눈에 확 들어온다. 현대생활에 적응하기위해서는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 오늘 이 거리를 걷는 것처럼. 아이스크림으로 더위를 식힌다.

 

먼 길 떠나는 사람들을 위한 망객현

세원마을을 지나 망객현으로 향한다. 70년대의 내가 살았던 모습과 이렇게 비슷하다니 시간이 정지해버린 세원마을의 모습이다. 이곳 작은 언덕 정상이 한양에서 먼 길을 떠나는 길손이나 사신을 이곳에서 보내고 맞았다는 ‘망객현’인데, 군부대가 위치하고 있어 확인할 길이 없다. 이길을 넘으면 교외선의 벽제역까지 직선코스인데 왼쪽으로 삥돌아 서울외곽순환도로밑을 지나고 교외선 철로를 따라 벽제역으로 향한다. 

 

 

 

  망객현 오르는 길, 끝에는 군부대가 있어 관통하지 못한다.

 

 

 

 

그런데, 통일로와 교외선 철로 사이에 ‘벽제관 고지’라고 적힌 비가 있다. 궁금하다. 왜 이곳에 있는지? 이내 해결된다. 비문을 읽는다. "이곳에서 동북방 3.5km지점에 벽제관 고지가 있다. ~".

 

공용 숙박시설이였던 벽제관지

교외선의 벽제역을 향해 가는데 철로 곁에 핀 가녀린 코스머스의 한들거리는 모습은 잠시나마 여름을 잊게 한다. 부대 앞에서 벽제역참이 있었다고 하는 고양까지는 39번 도로와 일치하지만 뜨겁게 반사되는 지열을 견딜 수 없어 왼쪽의 들길로 들어서 벽제관지 방향으로 향한다. 숲길로 가지만 그래도 변변한 그늘이 없다. 벽제천을 지나며 멀리로 아파트가 보이고 벼는 쑥쑥 자라고 있고 백로가족이 그 사이에서 먹이 사냥을 하고 있고 보라색의 도라지꽃이 참 곱기도 하다.

 

 

교외선인 벽제역 가는 길

 

 

 

 

고양향교에 도착한다. 조선 숙종 때 뛰어난 유학자들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중등 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서 창건되었다. 이곳에서 며칠 전에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도시, 고양’을 꿈꾸는 고양시장과 시의회의장을 포함한 시의원들이 고유제를 지냈다. 고유제란, ‘중대한 일을 치른 뒤에 그 내용을 적어서 사당이나 신명에게 알리는 제사‘이다.

벽제관지로 향한다. 이곳에서는 주로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가는 사절이 숙박과 휴식을 취했고, 한편 중국에서 오는 사절들도 역관에 머물러 휴식하는 공용 숙박시설이었다.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이여송 군대와 왜군이 치열한 접전을 벌인 벽제관 싸움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여기까지가 오늘의 목적지이다.

혜음령까지의 안내는 고양소식 2010년 4월호를 참조하면 더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다.

 

참고한 지도는 1872년에 그려진 고양군 지도로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고, 요즘의 지도와는 판이하게 달라서 정확한 길을 지도에 표시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지만 일제시대 때 만들어진 지도를 구해 그 중간과정의 데이터를 더하면 잃어버렸던 자료가 복원될 듯하다.

 

 

 

고양소식 2010년 9월호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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