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등 효과
[ Gaslight Effect ]
" 엄마가 제일 잘 안단다"
2010년 개봉한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라푼젤(Tangled)〉에는, 주인공 라푼젤과 계모 고델의 숨 막히는 심리 대결이 펼쳐집니다. 사실 고델은 자신의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마법의 머리카락을 지닌 왕국의 공주를 납치해 18년 동안이나 탑에 유폐한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물리적인 힘으로가 아니라, 탑 밖의 외부 세계는 너무나 무섭고 두려운 곳이라는 공포심을 주입함으로써 도망가지 못하도록 매어놓습니다.
성년이 될 나이인 18세 생일이 멀지 않은 날 라푼젤은 탑 밖에 나가보겠다고 합니다. 깜짝 놀란 고델은 자신이 얼마나 희생적으로 라푼젤을 돌봤는지 거듭 강조하면서, 청소년기를 지낸 성인이라면 누구나 뇌리에서 지울 수 없는 그 끔찍한 대사, “엄마가 제일 잘 안단다(Mother knows best)”를 반복합니다.
이 대목은 일종의 뮤지컬 시퀀스로 진행되는데 그 대사는 대충 이렇습니다.
엄마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
곧 네가 둥지를 떠나고 싶어하리란 걸 알아.
곧,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엄마가 제일 잘 안단다.
엄마 말을 들으렴.
바깥세상은 아주 무서운 곳이야.
······
그러니 그만하렴, 넌 엄마를 슬프게 한단다.
엄마가 여기 있어, 엄마가 널 지켜줄 거란다.
아가, 엄마가 제안할게.
어려운 일은 건너뛰고, 엄마랑 있으렴.
엄마가 제일 잘 안단다.
실제로 바깥세상에 무서운 도적과 강도가 판을 친다 하더라도, 이렇게 반박하기 힘든 말로 가두어놓는 계모가 훨씬 더 으스스하게 느껴집니다.
문학작품 속에는 유달리 딸의 성장을 막는 엄마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엄마와 딸에 국한된 문제는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 선생님과 제자,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 등 모든 불평등 관계 속에는 겉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폭력과 억압의 배경음이 흐르곤 합니다.
미국의 심리치료사인 로빈 스턴(Robin Stern)은 이러한 보이지 않는 폭력에 대해 ‘가스등 효과(Gaslight effect)’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동명의 저서를 발표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이후 이 단어는 그다지 학술적인 용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친숙한 것이 되었습니다.
‘가스등 효과’란 이름은 잉그리드 버그만이 주연으로 나왔던 1944년 흑백영화 〈가스등〉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이 영화에서 버그만은 부유한 상속녀 폴라로 나오는데, 남편은 그녀의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 사랑을 가장한 세뇌를 통해 그녀를 정신병자로 몰아갑니다.
이렇듯 가스등 효과는 항상 사랑과 존경으로 맺어진 두 사람 사이에 발생합니다. 조종하는 사람과 조종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인데, 전자는 후자를 위해서라는 구실을 대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대신 결정해주고 이를 받아들이도록 암암리에 강제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네가 너무 이기적이기 때문이야.”
“그런 식으로 입는 것은 천박하기 짝이 없어.”
“네 능력을 내가 더 잘 알아.”
“이건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야.”
이런 말들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물론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들은 항상 이런 말들을 입에 달고 삽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자식을 위하는 부모가 하는 이런 말들과, 라푼젤의 계모처럼 순전히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 상대를 조종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지요.
이런 상황을 한번 떠올려봅시다. 많이 배웠고 자존심도 세지만 병약하고 현실감이 없는 남편이, 무식하지만 억척스러운 부인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남편은 자주 아파 한 직장에 오래 다니지도 못하는 형편이지만, 부인은 그래도 남편의 학식과 인품을 존경합니다.
집안의 궂은일은 도맡아 하는지라 부인은 가끔 질펀하게 놀고 싶어하지만, 남편은 항시 “그런 천박한 언행은 못 봐주겠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귀가 시간이 조금이라도 늦으면 “아픈 남편 내팽개치고 자기만 잘 놀고먹는다”고 타박합니다. 수준 있는 사람들과 만나야 한다며 자기 친구들과의 부부 동반 자리에 꼭 부인을 동석시키는데, 돌아와서는 항상 “그런 무식한 말은 왜 했느냐?”, “창피해서 얼굴을 못 들었다” 등의 말로 구박을 합니다.
부인은 처음엔 싸워도 보고, 따져도 봤지만 항상 남편 말이 하나부터 열까지 틀리지 않은 말들인지라 점점 따질 기운도 의욕도 없어집니다. 그저 자기가 무식한 죄라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부인이라도 무시하지 않으면 자기 자존심을 세울 수단이 하나도 없는 남편에게서 기인합니다. 남편은 실제 사회생활에서는 무능력과 패배감으로 젖어 있기 때문에, 그 원인을 부인에게 전가하고 부인을 탓함으로써만 자신의 정신적 평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병적 심리상태가 서로 엇물리면서 ‘가스등 효과’가 발휘되는 것입니다.
가스등 효과를 처음 제안한 스턴은 조종하는 사람이나 조종당하는 사람이나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라고 지적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상대방의 탓으로만 돌려선 안 된다는 것이지요.
스턴은 가스등 효과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첫째, 현재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해야만 합니다.
둘째,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감정을 느끼며 어떤 소망을 갖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셋째, 진정 그/그녀가 나를 사랑하고 위한다면, 내 개성이 한껏 성장하는 것을 보고 싶어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만약 그 반대로 그/그녀가 원하는 모습대로 내가 변하기를 바란다면, 가스등 효과가 작용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한번 의심해보아야 합니다.
애니메이션 〈라푼젤〉에서 18세 생일을 앞두고 상황이 벌어진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그전까지 아이에 불과했던 라푼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결정할 능력도 권한도 없었기 때문에 계모의 말만 믿고 탑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년이 된 이상, 자신을 파악하고 스스로에 대해 책임지는 것은 권리이자 의무이기도 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라푼젤은 그 과업을 해냈고, “엄마가 제일 잘 안단다”에서 빠져나오는 데 성공합니다. 물론 그래서 우리가 그녀를 사랑스러워하는 것이고요.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가스등 효과 [Gaslight Effect] - 엄마가 제일 잘 안단다 (사람을 움직이는 100가지 심리법칙, 2011. 10. 20., 케이엔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