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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 2 - 진화에서 제갈팔괘촌에 도착해 걸어서 제갈씨 집성촌 마을을 구경하다!
2023년 10월 31일 쑤저우시 동남쪽 난쉰구전(南浔古镇 남심고진) 에서 택시를 불러 타고 한시간
을 달려서 후저우(湖州 호주) 역에 도착해 기차표를 끊으니 9시 33분 열차는 10시 51분에
진화 金华(금화) 에 도착하기로 내일 항저우행 기차표를 끊은후 역을 나와 호텔에 체크인을 합니다.
이제 제갈공명의 후손들이 산다는 주거바과촌 诸葛八卦村 (諸葛八卦村 제갈팔괘촌) 으로 가려고
기차역 광장에 자리한 정류소에서 808 路 란시(兰溪) 행 버스를 타서 1인당 6위안씩을
주고 앉으니... 30여분을 달려서 란시(兰溪) 시내에 접어들아 진자오상사(今朝商廈) 에서 내립니다.
어떤 아주머니가 버스 요금 까지 친절하게 가르쳐 주더니 버스에서 내린 후에도 제갈팔괘촌 가는 시외
버스가 없어졌는지 택시를 타라고 말해주어 30분을 달려서 주거바과촌에 내리니 주차장에는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데 문표를 구입해 10분을 걸어서 작은 연못을 지나 마을로 들어갑니다.
여기 마을 바로 앞에 작은 연못은 이른바 태극의 음양을 상징한다는데.... 들어갈때는 마음이 급해서
확인하지는 못하고 나중에 나오다가 안내판을 보고 조금 떨어져서 보니 비로소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 외딴 곳에 자리한 주거바과촌 诸葛八卦村 (諸葛八卦村 제갈팔괘촌) 은 진화 (金华
금화) 현 란시청 兰溪城(난계성) 에서 서쪽으로 17㎞ 지점 신안장(新安江)
과 푸춘장(富春江) 유역에 위치하며 예전에는 '가오룽 高隆(고륭)' 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 마을 주민 3천여명 중에서 2,500명이 제갈(诸葛) 성이라고 하는데 제갈량
诸葛亮 의 후손들은 손권(孙权), 유비(刘备), 조조(曹操) 의
후손들과 신안장(新安江) 과 푸춘장(富春江) 강물을 공유 하였다고 합니다.
마음이 급한지라 두갈래 길 가운데 잠시 망설이는데 여기 마을 입구 담에 태극무늬가 그려져 있으니
바로 우리 태극기인데.... 지금 현재의 태극기 말고 옛날 조선의 집 대문에 그려져 있던 태극입니다.
1872년에 처음 박영효가 일본에 가는 배 위에서 처음 태극기를 만들던 그때 모습의 위아래
가 아닌 양 옆으로 그려진 태극으로 당시 우리 태극에서 보던 눈인 동그라미
가 그려져 있고..... 박영효가 복잡하다고 줄인 4괘가 아닌 원래의 8괘가 그려져 있습니다.
오른쪽 길을 택해 골목으로 들어가니 거기에 큰 기와집이 보이니 바로 제갈공명을 모신 청샹츠 丞相祠
(승상사) 로 이곳은 제갈씨족(诸葛氏族) 들이 모여 조상에 대한 제사를 올리는 곳이라고 합니다.
승상사 는 명(明) 나라 때 세워졌으며 '회(回)' 자형 배치로 되어 있고 헝탕[亨堂] 에는 제갈량(诸葛亮)
의 좌상 이 모셔져 있으며 충신탕(崇信堂), 융무탕(雍睦堂) 및 상리탕(尚礼堂) 사당이 있습니다.
제갈공명은 중국 후한 말의 인물이자 삼국시대 촉한의 재상으로 공명(孔明) 은 자(字) 이며 이름은
양(亮) 인데 형주에 머물다가 유비를 따르기 시작해 대전략과 내정을 담당하였으며 촉한이
건국되자 승상에 임명되었고, 유비 사후에는 군권을 포함해 국정 전반을 총괄하는 위치에 올랐습니다.
탁월한 능력과 성실함뿐 아니라 높은 충성심으로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 훌륭한 신하이자 재상의 상징
으로 여겨지는 인물이며, 다른 한편으로 소설 《삼국지연의》의 영향으로 군사의 대명사로도 알려진
인물로 삼고초려, 수어지교, 출사표, 난공불락, 칠종칠금, 읍참마속등 고사성어의 유래와 관련된 인물입니다.
형주의 유종이 항복하고 조조군이 남하하자 유비는 하구까지 피난했는데, 제갈량은 노숙을 따라 손권에게
사자로 파견되어 동맹을 체결하였으며 적벽대전과 남군 공방전이 마무리된후 형주의 여러 군을 맡아
군대에 보급했고 익주에서 전쟁이 격해지자 장비와 함께 물길을 따라 익주로 향하며 여러 현을 정복했습니다.
유비가 오나라 원정으로 국력을 소진시킨후, 후계자 유선을 보좌할 보정대신으로 행정권은 제갈량에게,
군권은 이엄에게 맡김으로 안전장치를 수행하였으나, 유비 사후 제갈량은 손오와 군사동맹을 회복한
뒤 남만에서의 반란 진압을 근거로 군권을 장악하였으며 남만을 굴복시킨후 북벌에 매진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제갈량은 촉의 행정, 인사, 군권, 상벌을 장악한 상태였으며, 대규모 원정을 입안, 실행하였으며
선제인 유비의 유지를 받들어 지속적인 북벌을 주도하였으니 후임자로 지목된
장완과 비의는 한중에서 통치를 이어나갔으며 진지와 황호가 집권한 시기에 들어서야 막을 내립니다.
제갈량의 북벌은 과단성보다 견실함을 중요시했으며, 천수를 비롯 여러 군에서 호응을 일으켰고 관중을
진동시켰으나 1차 원정 이후로 어려움에 봉착하였으니 촉한은 북벌에 뒤따르는 보급 문제를
극복할수 없었으며 이는 전근대 보급 체계의 한계였으니 제갈량은 5차 원정 도중 진중에서 사망합니다.
제갈량은 사후 촉한 2대 황제 유선에 의해 충무후로 봉해졌으며 서진의 사마염,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
같은 삼국시대 말기의 인물들에게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니 남송 대에 이르러 제갈량은 군주인
유비와 함께 신격화되었고.... 원 대의 삼국지평화, 명 대의 삼국지연의를 거쳐 이미지가 확립되었습니다.
제갈량은 문화적 상징이니 그가 지나친 장소나 민간전승 조차 다양한 문화 상품으로 개발되어 판매
되는 등 제갈량이 남긴 족적은 쉽게 지울수 없을 만큼 크게 남았고 이는 여러 사서의
기록이 방증하는데 신격화된 제갈량의 이미지는 객관적인 연구를 방해하는 요인중 하나로 지적됩니다.
민간전승에서 제갈량은 몇몇 발명품과 음식의 시초로 전해지니 사료적으로 근거가 확실한 것은
제갈노, 목우, 유마인데.... 제갈노는 기존 연노의 개량품으로 간주되나 실물은 전하지
않아 개량의 수준이 어떠한지를 알수 없고, 목우와 유마는 외바퀴 수레의 일종으로 간주됩니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제갈량을 평하는 글에서 그가 상국(相國) 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다고
썼으니 상국이란 나라의 재상 곧 승상의 다른 이름이며 《계한보신찬》에는 제갈량
이 선제(유비)의 유명을 받아 재상이 되었다고 나오는데, 이 시기 제갈량은 이미 승상이었습니다.
제갈공명은 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는데.... 문득 역사학자 임용한씨는 동아일보 ‘임용한
의 전쟁사’ 칼럼에 “전쟁에서 쉽게 이기는 방법” 이란 글을 올린게 떠오릅니다.
손자는 싸우지 않고 아군과 적의 군대를 보존하면서 승리하는 것이 최고의 승리라고 말했다. 이 말에는
누구나 동의한다. 하지만 실천 방법이 쉽지 않다. 중국 고대의 병서 ‘육도’ 는 주나라 문왕과 태공망이
나눈 대화를 기록한 책이다. 이 책에 무력을 쓰지 않고 모략으로 적을 정복하는 방법에 관한 토의가 있다.
태공망은 무려 12가지나 되는 방안을 제시한다. 방법이 12가지나 된다는 것은 결정적인
방법이 없고 어렵다는 의미도 된다. 국가란 다양한 이해관계와 갈등이란
기반에서 태어난 사회적 생물이다. 그 안에 항상 갈등이란 요소를 품고 있을 수밖에 없다.
전쟁은 공동의 적을 제시해서 갈등을 일시적으로 봉합하는 기능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쟁이 길어지고
고통이 커지면, 내부의 균열이 터져 나오고 만다. 상대국의 입장에서는 전쟁 전에 어떻게든 상대국의
국가적 균열을 조장하고 확대시켜 놓을수록 유리하다. 태공망이 12가지나 되는 방안을 제시한 배경이다.
그중 5번째 방안이 적국의 충신을 우대해서 군주가 의심하게 하고, 능력이나 충성심이
떨어지는 다른 사람을 요직에 등용하게 하라고 한다. 실제로 사기를 보면
춘추전국시대에 이런 방법은 많이 사용되었고 때로는 결정적 승리를 거두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방법이 먹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주변국과 긴장 관계가 지속되면 사람들은
감정적이 된다. 적국에 대해 증오만 표출하고, 배타적인 정책을 주장하는
사람이 애국자로 보이고.... 화친이나 교류를 주장하는 사람은 매국노로 보인다.
그 순간 국가 정책의 유연성, 정보력, 성장력이 굳고 경직된다. 모든 병서에서 지적하는 전술의
원칙이 적의 틈에 파고들어 가 적의 허점을 찾고, 적의 장점을 배우고,
우리의 대응 방식은 감추며, 어떤 상황에서든 효율적으로 대처할수 있는 유연함을 갖추는 것이다.
배는 물에 뜨고 물살을 따라 흘러 내려가지만 돌은 가라앉는다. 나라가 감정적인 애국심이란 표피로 경화
되어 버리면 안에서 목소리만 요란할 뿐, 모든 능력은 가라앉는다. 그러나 단단한 껍데기에 쌓인
사람들은 그것도 모른다. 병자호란의 역사를 보면 껍데기가 깨어지고 적군이 밀려 들어와서도 모른다.
문득 동아일보 이호재 기자가 동아일보에 쓴 “中 산둥대 학생들 한국문학 실력 탁월... 서울대
뺨칩니다” 라는 기사가 떠오으니 산둥대서 외국인 석좌교수 근무, 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의 소회, 한국어로 한국문학 토론-발표… 한자 능숙해 고전 연구 뛰어나,
美日서도 강의 ‘한국문학 전도사’… 희귀문헌 1654점 서울대 기증도 라는 부제를 달았습니다.
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는 “한국, 중국, 일본의 학자들이 정치적 문제와 별개로 동아시아적 관점
에서 학술적 교류를 이어가면 좋겠다. 세 나라 학자들을 잇는 네트워크를 만들고 싶다” 고
말했다. “중국 산둥대 한국어학과 학생들은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학생들만큼 한국 문학
에 대한 이해도가 높습니다. 특히 한자에 능숙한 만큼 고전문학, 근대문학 연구에 뛰어나요.”
서울 종로구 문예지 ‘유심’ 사무실에서 만난 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75)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1983∼2012년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산둥대 학생들의 실력이 서울대
학생들과 비교해 전혀 밀리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산둥대 학생들은 한국어로 한국문학에 대해
토론하고 발표한다”며 “영어, 일본어도 능통해 4개 언어로 소통하며 문학적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고 했다.
권 교수는 미국 하버드대 하버드옌칭연구소 초빙교수, 도쿄대 한국조선문화연구소 초청교수,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 겸임교수로 전 세계를 돌아다녀 ‘한국문학 전도사’ 로 불린다. 그가 중국으로
향한 건 1992년 한국어학과를 설립한 산둥대가 ‘국제 동아시아연구원’(가칭) 설립을 추진 하면서다.
권교수는 “2026년 국제 동아시아연구원 개설을 목표로 올 7월 부터 산둥대에서 석좌교수로 일하고 있다”
권교수는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문학, 언어, 문화에 대한 학술적 교류가 목표” 라 했다.
“한국과 중국 연구자들은 보는 관점이 달라요. 예를 들면 시인 이상(1910∼1937) 의
작품을 한국 연구자들은 폐병에 시달린 성장 과정이나 건축학도 라는 점에서
해석하죠. 반면에 중국 연구자는 이상의 작품을 일제식민지라는 당대 역사와 결부 짓더군요.”
권 교수는 중국 학생들이 근대 한국과 중국의 사상 교류에도 관심이 많다고 했다. 박은식
(1859∼1925), 신채호(1880∼1936) 등 독립운동가들이 근대 중국의 개혁을
주창했던 량치차오(梁啓超·1873∼1929)의 변법론을 조선에 소개한 과정을 연구하는 식이다.
권 교수는 평생 모은 근현대 문헌 1654점을 서울대 중앙도서관에 25일 기증한다. 정지용
(1902∼1950) 시집 ‘백록담’ 초판본, 이광수(1892∼1950) 소설 ‘무정’
5판본, 염상섭(1897∼1963) 소설 ‘만세전’ 초판본을 비롯한 희귀 자료가 다수 포함돼 있다.
북한 주간지 ‘문학신문’ 도 창간호 부터 1960년 12월 27일까지 기증됐는데 이는 국내 유일의 자료다.
고문헌 400점도 포함돼 있다. 서울대 중앙도서관에 고문헌이 기증된 건 1994년 이후 처음이다.
이를 모은 전시 ‘어느 국문학자의 보물찾기’ 는 25일부터 12월 15일까지 서울대 중앙도서관에서 열린다.
고가에 거래되는 희귀한 문헌을 왜 기증했을까. 속물적인 질문을 던지니 그는 눈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자식들은 문학에 관심이 없으니 물려줄 필요가 없잖아요. 평생을
서울대에 있었어요. 후배 연구자를 위해 자료를 받아준다니 제가 고맙고 영예로운 일이죠.”
1970년대 문학 평론을 시작한 그는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지난달 1일에는
문예지 ‘유심’ 을 재창간했다. 서울대 중앙도서관에서 25일 열리는 기증식에
참석하는 그는 28일 다시 중국으로 떠난다. 한국문학의 미래를 묻자 그는 진중히 답했다.
“한류를 방탄소년단(BTS)이나 드라마 등 대중문화에서만 찾지 마세요. 이미 한국어를 공부하고,
한국문학을 연구하는 외국 학생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 학생들이 다음 한류를 이끌 겁니다.”
"산 위의 푸른 솔과 길 위의 먼지, 구름과 진흙, 이런 사이인데 어찌 친해질 수 있나요.
세상 사람들은 야윈 명마를 싫어하건만, 그대만은 가난한 인재라도 마다않으셨지요.
천금을 준다 해도 성격은 못 바꾸지만, 일단 약속했다면 저는 목숨까지도 내놓지요.
이 서생이 고마움을 모른다 마소서. 작은 정성이나마 은인에게는 꼭 보답을 하니까요."
(山上靑松陌上塵, 雲泥豈合得相親. 擧世盡嫌良馬瘦, 唯君不棄臥龍貧.
千金未必能以性, 一諾從來許殺身. 莫道書生無感激, 寸心還是報恩人.)
―‘호남의 최중승에게 올리는 시(상호남최중승·上湖南崔中丞)’ 융욱(戎昱·744∼800)
자신을 막료로 발탁한 데 감읍하여 어사중승(御史中丞) 최관(崔瓘)에게 올렸다는 시. 상관과
자신은 푸른 솔과 먼지. 구름과 진흙만큼이나 격차가 현격하여 도무지 친해질 수 없는
사이다. 한데도 상관은 시인의 재능을 인정했다. 아무리 명마라도 기력이 쇠하면
나 몰라라 외면하고, 잠재력 있는 인재라도 빈천하면 내치기 마련인 게 세상 인심인데도 말이다.
물론 시인은 재물에 쉬 굴복하여 성격이 돌변하는 속물이 아니다. 세상의 편견에 의연히 맞서
인재를 챙겨 주는 상관에게 생명을 걸고 보은하겠노라는 다짐이 이래서 더
믿음직하다. 상관에 대한 무한한 찬사 속에 시인의 견결한 기개와 지조가 은연중에 녹아 있다.
최관이 융욱을 너무 좋아하여 사위로 삼으려 했으나 융(戎) 이라는 성씨가 탐탁지 않았다.
이에 성을 바꾸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는데 융욱이 거절하면서 이 시를
바쳤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동아일보에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