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에세이
모래와 황홀 사이, 詩
(시인)
詩란 저 먼 영원의 영혼으로부터 어느 순간 내 가슴 한복판을 강타하는 태풍으로 온다. 가만히 텅텅 삶의 족적조차 없이 사라져버릴 한 존재의 비참과 황홀을 몇 마디의 문자로 남기라고 호통치며 언어의 강 물을 솟구치게 하는 디오니소스의 빛. 그래서 까닭 없이 시인들은 헛헛한 언어의 춤을 추고 만다. 이렇게 시에 대해 쓴다는 것도 그리하여 수없이 찢어버린 파지의 몸짓에 다름 아니다. 쓸까 말까 시에 대한 에세이가 내 맘을 젖어들게 하지 못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써드리지요…라고 대답해 버리지 않았던가.
봄이다. 일상의 침잠을 보다 못해 오늘은 봄까치꽃이 제 몸의 파릇한 꽃잎파리 하나 보일 듯 말 듯 부스스한 겨울 풀잎들을 헤치고 들이미는 산길에서 눈물이 핑 돈다. 생명의 하루가 저렇게 열리고 있는 것은 온 우주의 합일된 날갯짓이며, 빛나는 존재들의 한 씨앗을 넘겨받은 대지의 붉은 핏줄이 밤새 어쩌지 못하고 스스로를 찢어내는 한 소식이리라.
그렇다, 詩가 별건가. 저 앙증맞은 개불알풀꽃의 섹시한 비밀스런 몸짓에 기대어 한 마디 내뱉었던 그 날의 노래 아니랴?‘오빠!’하고.
오빠인 모래를 밟는다.
모래인 바람을 밟는다.
발가락이 백 개의 설레임을 그려 하늘로 날려보낸다.
하늘이 온통 발가락으로 가득 찼다
발가락이 부르는 노래가 새벽시장 좌판에 깔렸다
詩를 요리하려는 여인네들의 눈이 휘둥그레
오늘의 요리는
모래인 오빠
언제나 풀잎만 먹던 아침이
오늘부터 모래를 먹게 되었다, 매울 줄도 모르는 모래가
맛있다고?
발가락은 알고 있다!
언제나 먹는 달콤한 건 詩가 아니야!
어제와 오늘이 논쟁을 한다
서로 이기거나 함께 지는 황홀의 시간이다 오빠냐 모래냐
파도 속에서 풋!
자맥질 쿵더쿵, 한없이 섞이며 발가락을 혼절시키는
— 졸시「새벽 모래밭에서」전문
삶은 비극일까, 희극일까, 사랑일까, 비참일까. 그렇게 묻는 건 시인에게 그가 생각하는 시의 중심이 무엇인가를 살짝 귀띔해 달라는 주문이기도 하다. 니체는 그리스적 비극을 그린 그의 명저 『비극의 탄생』에서 삶의 너무도 초라하고 해결할 길 없는 비참한 일상을 뒤집어야 할 인간, 시인들의 의지를 실어놓은 시적 예술품에 대하여, 시를 쓰고 시인이 된다는 의미를 추상과 경험이라는 두 이질적인 현상으로 대비시켜 설명하고 있다.
“시인은, 자신이 자신 앞에 살아 움직이는 여러 형태들에 둘러싸여 있다고 생각하고 또 그 형태들의 가장 내적인 본질을 통찰하는 한에서만 시인이라는 사실보다 더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현대적 재능이라는 특이한 약점으로 말미암아 미적 근원 형상을 너무 복잡하고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갖게 되었다…호메로스는 어떻게 모든 시인들보다 훨씬 더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었을까?
그가 그만큼 더 많이 관조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나쁜 시인이기 때문에 시에 관해 그토록 추상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미적 현상은 단순하다. 단지 지속적으로 살아있는 유희를 바라보고 항상 정령의 무리에 둘러싸여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져 보라. 그러면 시인이 될 것이다.”
— 『비극의 탄생』, 니체 전집 · 2 (책세상)
언젠가부터 추상적 사념을 통해 시를 쓴다는 것에 대하여 회의하게되었다. 글이란 문자라는 형식과 정신이라는 마음, 그리고 그 안에서 끓어 넘치는 언어적 유희라고 느끼면서도 언어가 아닌 내 살과 피의현현이라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면서 미친듯이 바다를 찾아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발가락 사이를 출렁이며 들락거리는 물결의 맛을 시로 옮기게 되었다. 뻘밭에도 수시로 들락거리는데, 그 찐득거리며 간지러운 발가락이 행복에 겨운 듯 시어들을 불러줄 때는 백지에게 결코 미안하지 않았다. 파지破紙란 그때의 피부가 글자와 만나 데굴데굴 구르며 찢어지는 ‘시간의 헛발질’이 이젠 내 삶의 중심은 아니란 걸 확인시켜주는 일에 다름 아니었다.
시간은 없어졌다 그때로부터. 어제라든지, 오늘, 내일이라는 24시간 단위의 흐름이 알 수 없는 무위의 안정감을 입어 평화로웠다. 그러면서 시공간의 무한한 비밀이 나를 데리고 다녔다. 멀고 가까운 곳에 존재한다고 믿었던 사랑의 꽃잎들이 무수히 내 안에서 피어나고 사라졌지만, 그때까지처럼 허무하거나 아팠던 시간의 모습은 아니었다. 발가락을 간질이는 모래알들은 그저 영원의 거대한 부서짐을 간직한 사물일 뿐이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 달아나는 파도의 노랫소리가 출렁이는 비극이라면, 그건 그리스인들이 노래하던 파격의 예술적 음조였을 뿐, 언제나 좋았다. 행복이었다.
새벽엔 모래밭에 철썩이는 살짝 시원한 바닷물을 내 발바닥에 입맞춤시켰고, 넉넉하게 비어 있는 휴일엔 여섯 일곱 시간 남짓 산바람과 땀방울을 연애시켰다. 그들의 사랑 타령은 얼마나 황홀했던가. 황홀이라는 시편이 자꾸 혀를 간질이며 다가왔다. 그렇게 詩는 고독해도 비극적이지만 않게 태어나 촐랑거리는 존재의 빛살로 달무리의 은은진진으로 사랑하자고 그렇게 살아가자고 꼬리쳤다.
그대의 몸, 꼴려 꼴려서 흐물흐물 터져 나올 때
그건 이슬이다
인연, 열망으로 동백꽃 붉게 피어날 때
문득 처음 본 재두루미 노랑부리왜가리 청띠제비나비 날갯짓!
천상천하天上天下 이슬이다
오 ⟶ 반짝! 사이 또르르 ⟶ 방울방울! 사이
두근두근 ⟷ 쓰라림! 사이 키스 ⟷ 애무! 사이
밤 ⟶ 새벽! 사이 숫처녀 ⟷ 첫총각! 사이
구름 ⟶ 바람 ⟶ 빗방울 사이
눈물 ⟵ 우주! 사이 그대 ⟷ 나! 사이
머물 수 없는 처량 달빛의 생!
하랑하랑 허허랑 이슬이다
— 졸시,「황홀, 이슬방울 사이」전문
ㅡ『우리詩』 2019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