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8:38-40 예수냐 바라바냐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여 보니 로마를 반역할 정치적인 범죄자가 아니라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문제임을 알았습니다.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면서도 이 땅에 속한 왕이 아니다, 진리에 속한 자들은 내 말을 알아듣는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정치적인 문제로 죄가 없는 것을 알고서 풀어 주려고 합니다(눅 23:13-25).
그래서 최종적인 제안이 예수냐 바라바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죽일 만한 죄를 재판장이 찾아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라바는 어떤 사람입니까? 유명한 죄수입니다. 이 죄수는 민란을 주도한 사람이요 살인한 강도입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시기심으로 예수님을 넘긴 줄을 알고서 유월절 특사로 풀어 주기 위해 예수냐 바라바냐로 제안을 합니다. 설마 살인강도를 원하겠는가 하는 생각이었겠지요?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충동질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바라바를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는 어떻게 하려는가 하니 그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계속 고집하다가는 민란이 일어날 것 같으니 나는 책임이 없다고 하면서 손을 씻으면서, 이 사람의 피에 나는 무죄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처형 판결은 빌라도가 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라도에게 진리란 무엇입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던 권세와 지위가 진리였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합니다. 결국 살인강도 바라바는 살리고 예수님은 죽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선택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를 선택하겠습니까? 나는 그 당시에 있었다면 예수님을 살리라고 하였을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진리를 택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나의 이익을 택하는 사람들입니다. 나의 이익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우리 앞에 예수님이 오시면 우리는 예수님을 선택할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를 선택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선택할 만큼 그렇게 괜찮은 사람들이 아님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알아가는 것이 신앙의 출발이고 복음의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살인강도가 어떤 강도입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오늘날 몸에 문신을 새기고, 유흥가를 주름잡는 그런 살인강도가 아닙니다. 바라보는 민란을 주도 한 사람입니다. 자기의 민족을 로마의 속박에서 해방시키고자 일어난 사람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로마군에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들에게도 피해를 줬겠지요! 왜 민란을 일으킨 것입니까? 지금의 지도층을 갈아치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민란을 일으키면서 살인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로마군에 의하여 잡힌 것입니다.
이 바라바가 민중들에게 무엇을 약속하였을까요. 당연히 이스라엘의 해방을 외쳤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런데 외국인의 지배를 받고 있다니 수치스럽다. 그러므로 싸우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율법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싸우자면서 백성들의 종교심에 호소하면서 많은 사람이 목숨을 내어놓고서 모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민란들이 많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의 군대는 이러한 민란을 진압하는 것이 주 임무였습니다. 이러한 결과로 바라바가 민란 주도자로 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누구를 지지하겠습니까? 로마를 물리치고 로마에 결탁하여 있는 무리를 몰아내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보자고 한다면 누가 따르지 않겠습니까? 물론 기득권을 가진 자들은 따르지 않겠지만 민족적 자긍심으로 무장된 자들이라면 재산도 바치고, 재산이 없으면 몸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이들이 제시하는 것은 현실적인 정치 독립을 이루어 주권을 회복하는 것이며, 그로 인하여 경제적인 자립과 부국 강성을 통하여 자기들의 하나님을 위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메시아를 기다리는 대부분 백성의 마음이었습니다.
이러한 기다림 속에 예수라는 사람이 대단한 가르침과 기적을 일으키면서 온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으니 지도자들은 불안한 것입니다. 저러다가 민란이 일어나면 로마가 쳐들어올 것이고 그러면 나라가 망하게 된다고 그렇게 부추긴 것입니다. 이만한 혜택을 받고 사는 것도 다 로마의 선정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예수님을 고발하고 바울 사도를 고발할 때도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왕은 오직 가이사입니다. 그리고 그 선정과 분봉 왕의 선정으로 우리가 평안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자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넘겨주고자 한 것입니다.
백성들의 관심사도 역시 진리가 아니었습니다. 병을 고쳐 주고 기적을 행하고 먹을 것을 주니 이 사람이 우리의 왕이요 메시아라고 따라나섰는데 갈수록 일하는 방향이 현실적인 문제와 동떨어진 이야기만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빵을 원하는데 자신의 살과 피를 먹어야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만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정치적인 현실은 로마를 물리치고 자주독립을 하는 것인데 칼을 들고 싸우려고 하지는 않고서 내 나라는 이 땅에서 속한 것이 아니다. 무력으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다 하니 점점 백성들의 마음이 이건 아니다 싶은 순간에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지도자들이 보아라 율법을 범하는 저 사람이 메시아일 수가 없다 그러니 저를 죽여야 한다고 부추기는 것입니다. 한 두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다수가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런 것입니다. 자기들에게 현실적인 이익을 갈수록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고함을 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서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따라갔는데 그러한 용기와 희망을 제공하기는커녕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꿈과 희망이 있습니다. 이것을 자아실현이라고 고상하게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꿈과 희망을 예수님께서 산산이 부수어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는데 나는 죽었다 하고서 따라가는데 무슨 꿈과 희망이 있습니까?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가르친 것입니까? 그저 주님의 피로 인하여 우리 가정이 잘되고, 우리 교회 성장하고, 우리 가족을 건강하게 지켜주시는 것이 주님 언약의 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을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바라바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속히 다른 복음을 따르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자들이 나왔는가 하면 유대인들에게서 나온 자들이 믿음만으로 안된다. 할례를 행하라. 안식일을 지키라. 율법을 지키라는 식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말을 들어보니 일리가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큰 구원을 공짜로 주었겠는가? 그러니 내가 어느 정도 보답을 해야지 마음이 편하다는 것입니다. 체면이 있지, 어떻게 하는 죄 된 자존심이 예수님을 믿는 일에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 아십니까? 그러므로 사단이 이러한 면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강도입니다. 영혼의 강도들입니다. 이렇게만 하면 복을 받는다고 축복을 남발합니다. 복 주시는지 안 주시는지 시험해보라고 했다고 하면서 일단 받쳐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종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잡아먹는 것입니다. 이들이 강도가 아닙니까?
또한 그래 그 정도의 각오는 해야지 우리 가정 잘 된다는데, 우리 남편 정년퇴직까지 무사하게 직장생활 한다면 그 정도의 희생이야 못하겠어. 새벽기도하고, 금식하고, 철야하고, 우리 교회 잘되는 길이 우리 가정과 우리 자식이 자자손손 복을 받는다는데 내 하나 희생하는 것, 내가 종이 되는 것이 무슨 대수냐 하면서 오늘도 수도 없이 사람의 종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제시하고 있는 바가 바라바의 제시하는 바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라바를 원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라고 고함을 지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 예수님 하고 있지만, 그 내용에 바라바를 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아시겠습니까? 이러한 것을 주님께서 죽으심으로 고발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이 일을 하지 않으셨다면 아직도 죄가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갔을 것입니다. 진리란 예수님이 이루신 일이 진리가 아니고 그저 내 가정, 내 교회, 내 직장, 내 나라가 잘되고 발전되고 성장하는 것이 진리인 양 여기고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다툼과 싸움과 전쟁이 무엇 때문에 일어나고 있습니까? 전부 자기의 이익을 진리로 여기고 있기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상을 주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을 사랑하고 있는 나는 진멸 받아 마땅하다고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실상은 괴롭지만, 그것이 은혜입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왜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인지 아시겠습니까? 이렇게 하면 죄고, 저렇게 하면 죄가 아니고, 이렇게 하면 선이고, 이렇게 해야 복을 받고, 이러한 기준들은 스스로 세우거나 세뇌를 받아 가면서 익혀 왔던 것들이 결국 예수님을 원한 것이 아니라 바라바를 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은 바로 이 진리,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은 예수님의 무죄함을 밝히는 것입니다. 죄인 바라바가 풀려난 것은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셨음을 상징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이 복음 앞에서 감격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