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오늘(어머니의 기일)
(어머니가 계시던 방에서 바라본) 300미터 거리 커피집 불빛은 노랗고, 500미터 터미널의 불빛은 하얗다. 낮엔 나뭇잎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먼 공항동네는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불빛이 산란하며 반짝거린다.
그리고 언젠가 작은 망원경을 통해 사진을 찍었던 까마득한 승학산 아래 아파트군은 이련한 감각속에서만 불빛이 깜빡거릴 뿐이다. 아마도 부모님이 계시는 곳도 그러한 분위기가 느껴짐직하다.
이시각 창문을 통해보는 바깥세상은 온통 구름낀 검은 하늘아래 막아선 고층아파트 너머로 깜빡이는 네개의 불빛 깜빡거리며, 비행기가 상승하는 밤풍경이다.
문득 1년전 오늘이 생각났다. 점심 후 여동생의 전화를 받고 집을 나섰다. 가느다란 빗줄기가 작은 우산쓴 어깨를 적시며 우울감을 부추겼다.
비가 그치고 동생이 오기전 시간이 남아 병원 가까운 곳 산복도로 아래 뒷골목을 걸었다. 역사깊은(?) 골목길에서 예전 영화의 흔적 담은 벽보들을 보며 그시절 그곳에서 있었던 추억을 회상했다.
동생을 만나 코로나 감염대비 완전무장을 갖추고 중환자실로 들어섰다. 불밝지 아니한 병실 침상에 누운 환자들...누가 의식이 명료하고, 누가 당장의 죽음을 앞둔 환자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그중에서 간호사가 가리키는 의식없는 듯한 어머니를 발견했다. 가슴이 철렁내려 앉았다. 여동생이 흔들며 불러도 대답이 없으셨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신 어머니께서는 얼마나 살아계실까? 다만 그게 궁금해졌다.
병원을 나와 동생과 헤어져 어머니를 모실 다른 병원의 장례식장을 둘러보았다. 희미하게 불켜진 널다란 빈소 공간을 보니 '을씨년스럽다'는 식의 표현이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젊은 시절이 생각났다. 그해 겨울, 고등학교 2학년 방학때였다. 저녁밥을 먹고 바람을 쏘일겸 영도의 누님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침통했다. 누님은 고개를 떨구었고, 자형은 떨리는 손으로 무엇인가를 포대기로 싸서 상자에 넣었다.
알고보니 쌍둥이인 어린 조카의 시신이었다. 이 어두운 밤에 조카는 자신이 돌아올 길도 모르는 뒷산 어디엔가 묻혀질 것이다.
심호흡을 하며 밤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어디로갈까? 망설이다 오늘밤은 큰집 조카와 함께 자기로 했다. 두어시간 넘게 걸었을까? 어두컴컴한 남부민동 골목길은 또다시 을씨년스러웠다.
찬바람에 낙엽 구르는 소리, 누군가가 나를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같아 자꾸만 뒤를 돌아다 보았다.
드디어 송도 산비탈, 길을 가로지르기 위해 택한 곳이 하필이면 대학병원 뒷길이었다. 영안실,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 애썼는데도 그곳으로 저절로 눈길이 갔다.
철제 침대위에 눕혀진 하얀 붕대감은 시신, 나를 보고있는 듯 멀리서도 밝은 불빛에 얼굴의 굴곡이 또렸했다. 그방엔 움직이는 생명체란 없고, 창가에 아까 보았던 어린 조카의 그것만이 클로즙 되어왔다.
다음날 새벽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의 부음 소식이었다. 향년 101세, 이미 마음의 결정은 내렸으나 하늘이 무너지는 듯 눈앞이 깜깜했다. 우스개 말로했던 나는 '고아'가 된것이다. 그게 1년전 오늘이었다.
다시 창가에 다가 앉았다. 창밖의 불빛들은 밝기를 더해간다. 눈에 들어온 시외버스터미널, 그곳은 만남과 헤어짐의 매개지가 되고 또한 다른 지역으로 전파된다. 때론 우리 인생의 변곡점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먼길 다녀온 버스들이 하나 둘 잠자리를 잡는다. 나란히 불켜진 행선지 간판 아래 어디론가를 떠나갈 시람들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터미널의 그모습이 또한 을씨년스럽다.
우리네 인생들도 터미널의 풍경처럼 왔다가 만나고 또 헤어져간다. 누구는 그 삶이 아쉬워 몸부림을 치고, 누군가는 삶에 지쳐 체념을 했다.
다양한 인생여정, 그래도 그들의 마지막 가슴에 남는 것은 그립다는 것, 떠나감이 아쉽다는 마음일 것 같다. 보고싶은 어머니의 품속같이...